[세트아펠]Deeper Than Blue

하트스틸 셑펠

하염없이 비가 내리는 날이면, 아펠리오스는 늘 음습하고 축축했던 지하실의 공기를 떠올리곤 했다.

어둡고 차가운 지하실에 빛이라고는 금방이라도 꺼져버릴 듯 위태롭게 빛나는 형광등뿐. 그마저도 스위치를 내려 버리면 완전한 암흑 속에 잠기는 그곳은 문을 닫음으로써 완성되는 조악한 피난처였다. 그와 동시에 끝을 알 수 없는 늪과도 같았다. 문 너머의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 곳. 세상과 단절된 공간에서 절망감이 범람할 때면 아펠리오스는 스스로를 물 속에 처박고 싶은 지독한 욕망에 시달렸다.

나의 목소리를 앗아간 이는 대체 누구인가? 아름다웠던 노랫소리를 가져 갔다면 내게 다리라도 돌려 주어야지.

그 다리를 받아서 무엇에 쓰려고? 너는 이미 다리가 두 개 있으니 내게 다리를 받는다 한들 다리가 네 개 붙은 괴물이 될 뿐이 아니더냐. 그래도 좋다면 다리를 네게 주마.

어차피 목소리를 잃은 너는 물거품이 될 수밖에 없으니.

침묵과 정적. 그것은 아주 오래 전부터 아펠리오스의 일부였다. 그랬기에 그것이 미치도록 싫었다. 아펠리오스는 살며시 귀를 틀어 막았다. 고요 속에서 상념이 흘러 들어왔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 됐던 것일까? 아펠리오스는 생각했다. 태어나기를 잘못 태어난 것일까? 아니면 진실에서 눈을 돌리고 노래라는 이름의 자해를 계속 했던 때부터 잘못된 것일까. 어쩌면 지금까지 흘러 온 궤적 전부가 잘못 되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에게 있어 음악은 전부였다. 아펠리오스는 음악을 사랑했다. 노래는 세상과 아펠리오스를 연결하는 유일한 끈이었다. 그는 노래하고 싶다는 소망을 늘 가슴에 품고 살았다.

그 모든 게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린 순간, 아펠리오스는 스스로가 세상에서 지워지길 간절히 기원했다. 그럴 수 없었던 것은, 가라 앉아가는 그에게 숨을 나눠주는 바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보고 싶어.’

습기가 차오른 창문에 동그라미 하나와 세모 두 개를 그리며, 아펠리오스는 머릿속으로 사랑하는 연인의 이름을 되뇌었다. 고양이는 근심 걱정따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해맑게 웃는 얼굴. 그가 저에게 지어주는 바보같은 표정처럼. 남들보다 배는 큰 덩치에 따스한 체온. 약간 핑크빛이 도는 붉은색의 머리카락, 깊은 청록색의 눈동자. 낮고 매력 있는 목소리는…… 볼륨이 작다고는 말 못 하지.

펠. 내 이름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 그 한 글자의 울림이 심장을 떨리게 했다. 살아있음을 느끼게 했다.

아펠리오스는 밤하늘의 별을 헤듯 머릿속의 그를 그렸다. 그의 곱슬기 있는 머리카락. 손끝에 닿는 피부의 결과 늠름한 콧대. 콧잔등에 가로로 그어진 흉터는 그가 겪은 고난의 증명. 이제 어찌할 도리도 없는 그 상처를 볼 때마다 아펠리오스는 안타까움에 몸서리치곤 했다. 사나운 듯한 눈초리에는 늘 사랑이 담겨 있고. 그가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그가 아끼는 것, 그가 혐오하는 것. 그가 그리워 하는 것, 그가 버리고 싶어하는 것. 그의 취미와 그의 특기. 그의 기쁨과 슬픔. 분노와 즐거움. 사랑과 증오.

찰나의 헤어짐에도 이렇게나 그립다면 그가 없어진 뒤의 자신은 어떻게 되는 걸까?

그가 없는 시간은 지독히도 지루하고 또 우울했다. 그의 품이 그리웠다. 그가 자신을 안아주기만 한다면 모든 괴로움을 물에 흘려 보낼 수 있을 텐데.

창밖은 장대비. 시간은 오후 1시. 사랑스러운 바보는 여전히 감감무소식. 우울감에 침수된 아펠리오스는 비통한 감정을 음악으로 승화해 보려 작곡 프로그램을 켰지만, 드럼 비트는 정체중. 그나마 흥얼거리던 멜로디 라인은 빗소리에 묻혀 백지 상태로 변해버렸다.

야속한 빗소리. 귓전을 때리는 소음. 끝나지 않는 내  애탄의 말로. 홀린 듯 헤드셋을 벗은 아펠리오스는 창문을 때리는 빗줄기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빗방울이 중력에 이끌려 바닥으로 떨어지고 산산히 부서져 사라지는 광경을 두눈에 담으려는 듯이, 그렇게 우두커니 서서 하염없이 지켜 보고만 있었다.

기분은 멜랑콜리. 아침부터 내린 비는 그칠 생각을 도무지 하지 않았다. 회색빛 하늘은 곧 아펠리오스 자신의 심상이었을까? 붉은 빛의 태양은 어디로 갔는지 여전히 추구하는 자의 곁으로 돌아오지 않고. 원망을 담아 하늘을 노려봐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문득 시선을 내리니 집 앞에 고인 물 웅덩이가 눈에 들어왔다. 바다는 분명 아니었다. 내가 가라앉을 곳은 아니었다. 깊어봤자 기껏해야 발이 참방거릴 정도겠지.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지만 불타듯이 돌아가는 사고 회로는 퓨즈가 나가버려서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물 속에 뛰어든다면 나는 물거품이 되어 버릴까?

오랜 궁금증. 헛된 망상. 그릇된 충동. 아펠리오스는 자신도 모르게 창문을 열고 창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바로 그 순간,

"펠, 지금 뭐하는 거야!"

급하게 달려 왔는지 흐트러진 차림새로, 세트는 창문 너머로 반절 정도 넘어 간 아펠리오스의 몸을 꽉 붙잡아 끌어 안았다. 아펠리오스를 단단히 껴안은 세트의 팔에는 힘줄까지 돋아나 있었다. 살짝 숨이 막혔다. 오히려 그게 좋았다. 그의 가슴과 맞닿은 등 너머로 고동 소리가 전해져왔다. 평소보다 훨씬 빨라진 심장 소리. 두근두근. 두근두근. 박동이 겹쳐진다. 그는 여기에 있다.

아아, 그의 품이었다. 유일한 안식처였다.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고 따뜻한 보금자리였다.

‘ …아무것도 아니야.’

아펠리오스는 작게 속삭였다. 간질간질한 울림이었다. 남들이라면 듣지 못할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는 분명 들을 수 있으리라.

“미안해, 펠.”

‘뭐가.’

“내가 늦어서.”

세트는 의외로 눈치가 빠르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바다 속으로 하염없이 가라 앉아만 가던 아펠리오스를 뭍 밖으로 끌어 내지 못했을 테니까. 비로 진창이 된 길가에 연하늘색 우산이 나뒹굴었다. 세트가 좋아하는 우산이었다. 망가져버린 저 우산은 두번 다시 쓸 수 없겠지. 입고 나갔던 연회색 민소매 후드티가 축축하게 젖어 검정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몽실하던 머리카락은 푹 젖어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제서야 그의 몸이 평소보다 차갑다는 걸 알았다. 아펠리오스는 약간,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너는 아무것도 모를 정도로 둔하면서, 항상 내가 들키고 싶지 않은 부분을 찾아내고야 만다.

창밖을 내다 보았다. 밖은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가 그칠 날이 오기는 할까?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상관 없었다.

네가 내 곁에 있어 준다면 나는 물거품이 되지 않을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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