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아펠] Heaven, Ionia

날조적폐

수많은 횃불이 일으킨 그림자가 사방으로 일렁였다. 나부끼는 불꽃 아래에는 좌석을 가득 채운 관중들이 북적였다. 실로 다채로운 목소리가 오갔다. 밤에 열리는 경기는 새롭지 않냐, 어떤 뜨내기가 도전했냐, 그놈은 얼마나 잘났기에 바로 세트라이에게 덤빌 수 있냐. 가축이 우는 시장 바닥도 이보단 조용할 것이다. 밑도 끝도 없는 말소리가 투기장을 흔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A라는 도전자에게 걸린 배당금이 ‘?’로 표시된 상태다. 수수께끼로 가득한 경기다. 관중들은 돈을 걸어야 하는데, 이 경기에 흐르는 돈의 규모가 보이질 않았다. 

이름조차 제대로 내걸지 않은 A를 향해 관중들이 내심 명복을 빌어주었다. 투기장에 서는 녀석들은 자신에게 붙은 배당금을 명예의 단위로 여겼다. 저딴 식으로 가치를 뭉개는 건 투사의 명예를 깎아내리는 짓이나 다름없었다. 그걸 가만히 두고 보는 녀석도 이상한 놈일 게 분명했다. 저런 놈들이 투기장을 수도 없이 다녀갔지. 하지만 세트라이가 투기장의 주인이 된 이후로는, 그의 자리를 넘본 것들은 모조리 죽지 않았던가? 관중들이 내건 일확천금의 씨앗 역시 세트라이의 주머니로 들어갔고 말이야.

하지만 새로운 놈은 새로운 즐거움을 선사했다. 관중들은 즐거움만 채우면 만족했다. 죽는 쪽이 누가 되었든 간에 피와 비명이 흐르기만 한다면 만사가 형통하리라. 잔잔한 바람은 태양 못지않은 열광을 저 먼 곳까지 실어 날랐다. 멀리서 들으면 축제의 한 부분이나 다름없을 테다. 이윽고 삽시간에 환호성이 퍼져나갔다. 마른 들판을 휩쓴 불처럼. 

모든 이들이 주목하는 곳에, 세트라이, 투기장의 주인이 나타났다. 무패의 세트라이, 디펜딩 챔피언, 최강자. 그를 부르는 다양한 별명이 쏟아졌다. 세트는 화답하듯 관중석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의례적인 미소가 오늘따라 더 아름다웠다. 그가 무언가 숨기는 게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할 정도로 말이다. 

그에 비해 나무 가면을 쓰고 검은색 수행복을 입은 도전자를 향한 관심은 미미했다. 딱 보아도 호리호리하게 생겼으니 영 기대에 차지 않는 게 당연했다. 게다가 낡은 칼 한 자루만이 그가 쥔 유일한 무기였다. 흐릿한 빛이 닿아 반짝이는 날은 세트가 쥐기만 해도 부러질 것처럼 닳아있었다.

“어디서 니 같은 칼을 들고 왔냐!”

  명백한 조롱에도 도전자는 반응조차 없었다. 이 바닥에서 모욕을 참는 건 하수들의 태도다. 관중들은 도전자를 대놓고 얕잡아보기 시작했다. 깡도 없으면서 대체 왜 올라온 거야? 자살하려고? 이어지는 조롱의 크기가 커졌다. 세트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래서 거절했던 건데. 그는 후회를 씹었다. 텁텁하고 쓴맛이 맴돌았다. 그러나 투기장 위에 선 이상 이 경기를 물릴 수도 없다.

세트는 맞은 편의 그를 바라보았다. 홀연히 서 있는 모습은 초연했다. 낡아빠진 검처럼 위태로워 보이기도 했다. 나보리의 큰 손이 관중석을 향해 침을 뱉었다. 그의 고객인 관중들에게 내비치는 속내이자 들끓는 심정의 분출이었다. 

 그래, 아펠리오스. 네가 생각하는 장례식에 걸맞나?

황금 건틀릿을 꽉 쥐고 그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세트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Heaven, Ionia 

태양이 저물고 고요가 찾아왔다. 하늘을 뒤덮은 베일은 누군가를 떠올리기 좋았다. 님은 먼 곳에 있으니 하늘이나 보며 마음을 달래기를 몇개월 째. 세트는 귀찮은 서류를 손수 해결하며 빌어먹을 외로움을 삭혔다. 하! 이번 수익도 만족스럽네! 돈이라면 삽과 갈퀴를 든 장정 여럿이 온종일 긁어모을 정도로 가졌다. 권세라면 아이오니아의 지하를 뒤흔들 정도로 거느렸다. 하지만 연애 사업만은 풍랑을 맞이한 조각배처럼 흘러갔다. 그의 애인은 하늘에 떠 있는 달과 닮았지만 매일 세트를 찾아오진 않았다. 흔한 편지조차 보내지 않았고, 누군가의 입을 빌어 뜻을 들려주지도 않았다. 뭣 모르는 청년의 마음을 지지고 볶아 언약이라는 족쇄로 묶어놓는 데는 성공했지만 정작 몸을 가두지 않아 생긴 일이다. 그렇다고 매번 임무니, 뭐니, 루나리를 위한 일로 바쁘신 분을 제 옆에 항상 끼고 살 수도 없는 노릇. 모든 상황을 고려한 세트가 한 발짝 물러나며 아펠리오스를 배려한 것이다. 

‘달을 붙잡을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하기나 해?’

아이오니아를 호령하는 보스는 제 애인에게 한없이 약했다. 그가 어머니 다음으로 귀히 여기는 존재이니 쓸데없는 말은 덧붙이지 않는 게 좋았다. 아무튼, 세트는 불만이 가득한 상태다. 너무 오랜 시간 떨어졌다.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다거나 목소리가 흐릿한 상태는 아니다만, 아펠이 주는 온기가 그리웠다. 서로 안는 매너도 모르고 품에 갇혀서 바르작거리는 온기가 무척이나….

찰나의 기류가 세트를 훑고 지나갔다. 바스타야의 감각이 그걸 놓칠 리가 없었다. 그가 서류 더미 사이에서 일어났다. 창가로 향하는 발걸음엔 확신이 담겼다. 더 가까워졌다. 세트는 창을 가린 얇은 커튼을 걷었다. 눈앞에, 찬란한 달이 보였다. 그리고 창을 넘어 집무실 안으로 당도했다. 군더더기 없는 동작을 보아하니 아이오니아로 오는 길은 순탄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감격한 세트가 빛이 감도는 눈동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나의 달, 나의 펠.”

세트는 아펠을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다신 뺏기지 않겠다는 듯 무언의 각오가 담겨 있었다. 거대한 몸에 갇힌 건장한 청년은 소소하게 꼼지락 꼼지락거렸다. 나름 편한 자세를 찾는 노력이었는데, 세트는 그것조차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가만히 있어. 그는 어리광 같은 심술을 부려 조금 더 팔에 힘을 주었다.

재회의 시간이 길어지자 아펠의 손가락이 세트를 톡톡 건드렸다. 용건이 있다는 걸 전해야 했다.

“펠…. 조금만 더.”

작은 머리가 끄덕였다. 알았다는 뜻이었다. 이어 세트가 제 흔적을 남기듯 아펠의 이곳저곳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넓은 손바닥이 뒤통수를 어루만지고 감싸는 것쯤은 익숙했다. 그러나 손바닥으로 훑는 행위는 미묘한 기분을 남겼다. 마치 신체의 모양을 본뜨고 가늠하는 것 같았다. 아펠이 입을 열어 힘겹게 목소리를 쥐어짰다. 

[…세트.]

욕망이 가득한 바스타야의 귀가 쫑긋거렸다. 자신은 새로울 게 없다. 아펠은 언제나 스스로가 똑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바스타야는 늘 새로운 점을 찾아 말해준다.

“어딜 쏘다니길래 흉터가 늘어난 거야?”

거창하지도 않은 외상에 관심을 주는 이유는 뭐지? 아펠은 불만이 가득한 눈에서 시선을 떼고, 세트의 손바닥을 간지럽혔다. 흉터가 남은 두꺼운 가죽 위로 제 할 말이 스며들었다.

[어쩌다 생겼을 뿐이야.]

“어쩌다? 산비탈에서 굴러 자빠져도 이런 크기의 절상은 남을 수가 없어. 펠, 대체 누구지?”

허리에 남은, 세트의 한 뼘을 넘는 흔적. 누군가 아펠이 죽기를 바라며 그었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성공 직전까지 갔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끓어오르던 피가 단숨에 차가워졌다. 목덜미를 훑어내리는 스산함은 복수의 재료였고, 세트는 복수에 대해서는 해박한 지혜를 지니고 있었다. 세트는 이것들을 활용하고자 아펠의 입에서 답이 나오길 바랐다. 그러나 아펠은 늘 세트의 기대를 벗어났다. 손바닥의 쓰인 문장은 세트가 바라던 것이 아니었다.

[이미 죽였어.]

통쾌함도 뭣도 없이 건조했다. 이어 아펠이 문장을 덧그렸다.

[임무는 끝났어.]

세트는 다시 한번 더 아펠을 끌어안았다. 인상을 찌푸리는 건 아펠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살해는 목적을 가진다. 이 바닥에선 복수가 대표적이며, 부가적으로 부와 명예를 바라며 발생한다. 크게 분류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목숨을 쥐고 흔드는 행위에 거창한 이유가 따로 있나. 전부 더럽고 추악한 본심을 숨기고자 으레 사람들이 끄덕이는 가치로 변명 삼는 것이지. 하지만 아펠의 목적은 성스러웠다. 오로지 루나리를 위한 행동이었다. 순교의 가치를 모르면서, 아펠리오스는 순교자처럼 움직였다. 당연히 아펠리오스의 의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타인의 욕망을 잘 다루는 세트는 누구보다도 아펠리오스를 잘 간파하고 분석했다. 그는 덧붙여 생각의 흐름을 이어 나갔다. 아펠의 모든 목적에는 루나리가 있다. 그리고 아펠은 무조건 움직인다. 욕망을 드러낸 적도 없다. 개인적인 이유조차 없다.

[세트. 부탁이 하나 있어.]

그런 세트의 고뇌에 부탁이라는 단어가 끼어들었다. 허벅지를 긁은 터라 진의를 오해할 뻔했지만, 실로 건실한 문장이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부탁? 펠이 나에게 부탁을? 황금빛 눈동자에 당황이 서렸다. 세트는 품에 가둔 아펠을 떨어뜨리고 어깨를 부여잡았다.

“뭐든 말해. 우두머리인 내가 보증할게.”

돈? 무기? 갖고 싶은 게 있으면 빨리 알려줘. 여자나 남자는 빼고. 세트는 아펠에게 무언가 쥐여주고 싶어서 안달 났다. 아펠이 제가 준 물건을 상시 가지고 다니거나, 소중히 여기는 모습을 고대했기 때문이다. 오늘따라 반짝이는 눈동자에 마음을 빼앗겨 세트의 숨이 한박자 멎었을 무렵, 아펠이 손끝으로 그의 팔뚝을 살살 문질렀다. 

[투기장에서 경험하고 싶은 게 있어. 상대는 세트라이 너로.]

세트는 자신이 잘못 이해했노라 넘겨짚었다. 하지만 곱씹을수록 이상한 문장이 세트를 휘감았다. 아펠이 투기장의 룰을 모르던가? 사업을 같이하는 뜻인가? 결투 선언을 똑바로 받아들이지 못한 탓에 엉뚱한 생각이 튀어나왔다. 세트는 결국 아펠의 말이, 투기장에서 한판 붙자는 뜻임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절로 빠져나왔다.

“그건 안 돼.”

[주인의 맹세는 무게가 없군.]

날카로운 문장이 덧쓰고 날아갔다. 질긴 피부 위로 화상이 남은 듯한 착각이 맴돌았다. 아펠의 눈동자에 감돌던 빛이 사라졌다. 세트는 미묘한 시선이 제 아랫도리에 닿는 걸 느꼈다.

“펠, 내 아랫도리는 그렇게 가볍진 않거든? 그리고 생각해봐. 내가 애인을 때려죽일 놈으로 보여?”

[죽여달라는 게 아니야. 죽음을 경험하기만 ]

“그게 그거야, 펠.”

세트가 이어지는 문장을 끊고 단호하게 뱉었다. 내포된 감정은 분노 그 자체였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필요 이상의 감정은 덜어내어 가라앉혔다. 시간을 나누는 것도 부족한 사람과 싸울 순 없다. 아니, 잠시만. 오랜만에 만나서 하는 말이, 뭐? 폭력의 현장에 집어넣어 달라고? 세트의 목울대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그는 너른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아아, 펠. 너는 정말 어려워. 눈요깃거리만 바라는 관중들에게 아펠을 내던지는 건, 제 아버지의 행동을 답습하는 것과 같았다. 삶을 쟁취하고자 투기장에 발을 들인 세트는 아펠의 목적을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무슨 이유를 들어도 말이다.

세트는 굳이 울적한 기분을 숨기지 않았다.

“나는 널 죽일 수도, 내가 세운 규칙을 거스를 수도, ‘죽음’의 문턱을 건너려는 널 끌어당길 수도 없어.”

잠시 침묵이 둘을 휘감았다. 아펠은 세트의 뒷말을 기다렸고, 세트는 입술만 달싹였다. 그렇다. 애석하게도 세트는 아펠에게 약했다. 결국 한숨을 푹 쉰 세트가 가장 최악의 선택을 골랐다. 하지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어보기는 할게. 이번에도 세트가 양보했다. 아펠은 고개를 끄덕였다. 부드럽고 윤곽이 선명한 입술이 떨어졌다. 어둠꽃 정수의 후유증을 겪는 목소리가 천천히 흘렀다. 겪은 일이 많은 만큼 갈라지고 녹이 슬어 거칠었다. 세트는 잠자코 들었다. 아펠이 그려내는 이야기를 상상하며.

나는 또 그들을 죽였어.

애석하게도 그들이 먼저 나를 발견했거든.

동시에 알룬이 속삭였어.

적의를 지닌 자들을 지나치긴 어려울 것이라고.

나는 그들을 죽여야 했어.

…….

끝없이 휘몰아치는 눈보라처럼 고통도 멈추지 않았어. 폐부에 스미는 한기도 어둠꽃 정수의 고통 앞에서는 어림도 없었지. 극심한 고통 때문에 감각이 무뎌지기는커녕 내가 서 있는 장소가 무너져 내릴 거라는 단서가 선명했어. 그래서 안전한 곳으로 방향을 잡았더니, 죽은 줄로만 알았던 그자가 내 발목을 잡았어. 그리고 창을 놓지 않은 팔로 나를 헤집었지. 불타는 고통이 뭔지 다시금 깨달았어.

…세트.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아. 죽음은 내 것이었던 적이 없었거든.

세트는 눈물 따윈 흘리지 않았다. 단지 아펠의 말을 끝까지 경청하고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고요한 눈빛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진실의 입이 열렸다.

“그래, 알겠어. 인정해. 속상해. 속상하다고.”

젠장! 내 애인이 너무 미련해서 열받는다고! 기어코 세트의 입에서 험한 말이 튀어나왔다. 날카로운 이빨이 까득까득 소릴 냈다. 아아, 세트는 그 어떤 짐승보다 위험했다. 임계점에 다다르기 직전이었다.

“지금 내 앞에서 미리 장례식을 치르고 싶단 소리잖아. 한번 죽을 뻔하니까 내 달이 드디어 이 몸을 생각해주는 거지!”

아펠은 쉬이 동감하지 않았다. 그거랑 달라. 세트에게 반대 의사를 보였다.

“아아, 됐어. 다른 이유는 듣지 않을 거야.”

침대에서 죽여주는 밤을 보낼 게 아니라면, 그냥 날 따라와. 실로 엄청난 협박을 아무렇지도 않게 흘리다니. 듣는 이가 아무도 없어 다행이었다. 아펠이 마지못해 순응했다. 그리고 집무실을 빠져나가는 세트의 뒤를 따랐다. 아! 큰 덩치가 우뚝 섰다. 세트를 바짝 쫓던 아펠은 풍성한 모피 장식에 얼굴을 파묻고 말았다. 

“짐은 바깥에 두고 들어왔어? 누가 가져가면 어쩌려고.”

한 발짝 뒤로 물러선 아펠이 어깨를 으쓱했다. 이곳에 있는 물건은 모두 세트의 것이잖아. 누가 감히 가져가지? 아주 맹랑한 대답이 세트의 마음에 쏘옥 들었다.

“그래, 펠. 이렇게 된 이상 널 위해 싸울게. 대신 봐주지 않아.”

알잖아? 나의 관중들은 무척 예리하다는걸. 어중간하게 짜고 치는 쇼는 그들에게 통하지 않아.

***

아펠은 어둠꽃의 정수를 마시지 않고 투기장에 섰다.

세트는 두 가지 문제를 떠올렸다. 하나, 그의 쌍둥이 누이 알룬에게 비밀을 만들었다. 둘째, 오늘 일은 아펠리오스가 독자적으로 결정했다. 즉, 아펠리오스가 루나리의 뜻이 아닌 본인을 위한 초석을 깔았다는 소리다. 물론 아펠은 모르시겠지. 

…대체 무얼 봤기에 사람이 달라지는 걸까.

이 시나리오는 혜성처럼 등장한 신인이 세트와 대등하게 싸우다가 결국, 안타까운 목숨을 잃는 것으로 끝날 예정이다. 세트가 적당히 거리를 좁힌 뒤 주먹을 휘둘렀다. 아펠은 충격파의 범위까지 예측해 가뿐히 피했다. 좁은 시야를 대신해 뛰어난 기량이 한몫했다. 관중들의 환호가 폭발했다. 단번에 죽을 거라고 생각했던 놈이 꽤 하는 놈처럼 보여 신선했으리라. 어차피 이 경기의 결말은 정해져 있다. 화려한 퍼포먼스에 눈이 먼 관중들은 절대로 눈치챌 수 없을 것이다. 세트 스스로가 게임판의 나무조각으로 올랐으니 모든 계획은 완벽하게 흘러갔다. 

아펠을 휘어잡을 거대한 기류가 투기장을 맴돌았다. 세트가 손을 뻗어 그를 잡으려던 순간 몸을 비틀어 뛰어든 아펠이 칼을 휘둘렀다. 칼날이 건틀릿에 간단히 가로막혔다. 힘과 힘이 대치하는 상황에도 낡은 칼날은 그럭저럭 잘 버텨주었다.

세트는 경기 시작 전 칼에 관한 걸 물었다.

“하필 왜 그런 걸 골랐지?”

[…제일 눈에 띄었어.]

“그럼 너한테 맞는 놈이 확실하네.”

외면받는 도구는 실력자의 손에서 마지막이 될 궤적을 그렸다. 아펠도 짐작하고 있겠지. 곧 부러질 칼이라는 걸. 그런데도 이걸 고른 이유는…….

목을 노리고 세운 칼날은 세트의 손바닥에 허무하게 가로막혔다. 아펠이 손을 비틀어 칼날을 물리고 곧장 반격했다. 모든 것이 느리게 보였다. 아직 바닥에 떨어지지 않은 피가 공중을 떠다녔다. 아주 작은 핏방울에는 아펠리오스, 제 모습이 보였다. 그 너머로 마지막 궤적을 투영했다. 또다시 건틀릿에 가로막힐 게 분명했지만 아펠은 이게 가장 강력한 수라는 걸 잘 알았다. 

세트 역시 직감했다. 아펠의 눈동자가 말하는 걸 똑똑히 직시했다. 그는 고개를 꺾으며 예상했던 경로에 건틀릿을 가져다 댔다. 건틀릿에 맞닿은 칼날이 기어코 부러지고 말았다. 조각이 공중으로 치솟았다. 머리카락 한 올의 차이로 목을 지킨 세트가, 아펠을 향해 빠르게 접근했다. 그리고 그의 허리를 휘어잡아 높이 뛰어올랐다. 이거 아무에게나 해주는 거 아니야.

“이걸로 끝이다!”

울려 퍼지는 외침 끝에 세트가 대미를 장식했다. 투기장 바닥에 아펠을 내리꽂자 흡사 폭탄이 터진 것과 맞먹는 효과가 나타났다. 흙먼지가 자욱하게 깔리고 두 사람의 인영조차 흐릿하게 보였다. 오, 맙소사. 무대가 부서졌군. 관중들이 술렁거렸다. 서서히 시야를 방해하는 먼지가 가라앉자 결과가 선명하게 보였다. 도전자는 피투성이가 되어 잔해 위에 널브러졌고, 우리의 챔피언은 우뚝 서서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다.

관중들이 세트라이를 호명하며 유희에 찬 환호를 질렀다. 그는 잔해 위에 다가가 ‘시체’가 입은 상의를 억센 손으로 휘어잡았다. 그리고 질질 끌며 투기장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소음은 아주 좋은 장막이 되어주었다. 세트는 아펠에게 말을 걸었다.

“죽음의 소감은 어때?”

[…….]

“뭐야. 너무 놀라워서 말도 안 나와?”

[나는 살아 있나?]

“당연히 살아있지. 조용한 곳에서 아무도 모르게 치료해줄 테니까 걱정은 마.”

[여기가 영혼 세계인가?]

“여긴 아이오니아지. 하하!”

목을 긁는 웃음소리가 섬뜩했다. 짐승의 것을 닮아 위압까지 느껴졌다. 아펠은 눈가를 지나 줄줄 흐르는 핏물을 느꼈다. 시야가 불편한 건 문제도 아니었다. 촛불처럼 의식이 가물가물했다. 귀는 멀쩡한 줄 알았건만 관중들의 함성도 슬슬 멀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게 죽음을 뜻하는 건 아니라고 여겼다.

생명의 누수 끝에 모든 생각이 멈추면 비로소, 비로소 죽음을 맞이하겠지. 그리고 기다리는 사람을….

[…두고….]

“응?”

[너 역시 두고 가지 않아….]

세트가 잠시 멈추어 섰다. 그러나 아주 잠깐이었다. 그는 사냥감을 질질 끌고 가며 경기를 끝마쳤다. 이로써 세트가 할 수 있는 일을 마쳤다. 그는 아펠의 부탁을 들어주며 이 땅 위에 붙들어놓았다. …죽음은 아직 아펠리오스의 것이 아니다.


안녕하세요. 적폐 날조 글로 다시 찾아뵙습니다.

이번 글은 유독 힘들었습니다. 제가 생각해도 두서가 없다고 여겨질 정도네요. 갑작스레 내려가도 놀라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할 말을 주저리 풀어낸다면, 이 글은 fall out boy - Heaven, Iowa와 영화 한 편 그리고 밤새님의 글 ‘안티로맨틱’(https://posty.pe/4tksbp)에서 파생된 글이라고 할 수 있어요. 안티로맨틱을 읽고 여운 속에서 둥실 떠다닐 때, 노래가 결합했고, 영화 대사가 따라붙었죠. 결국은 대사 한 줄을 위해 8천자를 썼네요. 그래도 좋은 경험이었어요. 훗날 글을 또 쓸 땐 더 나아져 있을 거라고 믿어요, 저는.

아, 또 다른 노래가 있다면  Black Veil Brides - In the end가 있겠네요. 혹시 많은 단서를 발견하셨고, 저랑 음악 취향이 겹치신다면 좋은 밴드 음악을 추천해주세요. 사골 플리에 새로운 뼈를 넣고 싶어요...

이번 글도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그럼 다음에 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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