윈터 블루스

하트스틸 세트아펠


알고 계셨나요?

  • 세트아펠이라고 표기해 두었으나 왼/른 구분에 큰 의미는 없습니다. 어느 쪽으로든 해석해 주세요.

  • 사망 소재 주의


winter blues

체감온도가 영하 20도를 웃돈다. 어느 때보다 타인의 온기가 간절한 시기다. 아직 축제의 흔적이 남은 거리에는 걸음을 빨리하는 연인들이 있다. 불 켜진 상점에서 흘러나오는 오래된 재즈는 누구의 취향도 아니다. 크리스마스 트리가 철거된 자리는 아쉬움 이상의 감상을 남기지 못한다. 12월의 막바지. 각자 떠나보낼 것을 준비하는 때이다.  그들은, 그리고 우리는 무엇을 남기고 떠나보낼지 생각해 두었던가. 뿌리부터 뱉어낸 입김은 자취를 남기지 못하고 곧장 사라진다. 



세트도 그사이에 존재했다. 그는 본인이 아직 과거에 있다고 느낀다. 혹은 과거보다 조금 더, 그보다 더 전에. 트리가 있었을 자리를 바라보던 세트는 이만 가기로 한다. 곳곳에 남은 크리스마스 장식이 눈길을 잠깐 끈다. 밝게 반짝이던 노란색 불빛이 여전히 눈에 선하다. 

혼자서 집으로 향하는 길이 제법 생경하다. 하늘은 우중충하고 가로등은 쓸쓸하다. 흐릿하게 가려진 달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할 때, 세트는 돌아가는 길을 제대로 떠올리지 못한다. 혼자서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건 처음이다. 우리는 항상 함께였다.

마치 안개를 걷을 수 있을 것처럼 손가락을 까딱이던 세트는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긴다. 신발 바닥에 닿는 땅의 느낌을 온전히 느끼려고 애쓰며 속으로 걸음 수를 센다. 천천히 되짚으면 분명 도착할 수 있을 테다.



마흔네 걸음. 오른쪽으로 삼백 일흔다섯 걸음, 신호를 건너서 이천백여섯 걸음 직진.



걸음이 빨랐던 세트는 아펠리오스의 보폭에 맞추느라 걷지 않아도 되었을 걸음을 더 했다. 남을 기준으로 한 공식이 자신에게 들어맞을 리 없다. 세트는 발을 내려다본다. 몇 차례 눈으로 확인했지만 아펠리오스의 보폭이 끝내 기억나지 않아 집을 지나쳐 한참을 더 걸었다. 길을 잃은 것 같기도 하다. 세트는 멈추어 서 걸어온 길을 돌아본다. 매서운 추위, 살갗을 베는 바람, 텅 빈 쓸쓸한 골목, 스산한 어둠,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으나, 다만, 방향을 틀어 다시 땅을 딛는 일련의 과정이 문득 두려워진다. 움직일 수 없다. 세트는 그 이유를 생각한다.

그러니까, 이 세상은 살얼음판과 같다. 죽은 심전도의 직선처럼, 남겨진 사람은 얄팍한 기저에 평생을 의지해야 한다. 가야 할 걸음이 있다 한들 쉽게 발을 뗄 수 없다. 위태로운 바닥은 금방 균열을 만들어 발목을 잡는다. 물에 빠지지 않으려면 각자 생존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잊어버리거나, 잊어버리거나, 혹은 잊어버리거나, 또는······.

세트는 바닥이 이미 갈라지고 있다고 짐작한다. 연약한 땅이 자신의 무게를 얼마나 더 견딜 수 있는지 모르겠다. 그래봤자 봄이 되면 전부 녹아버리겠지만 그들은 다음 계절을 헤아릴 시간이 없다. 그럼, 미래를 생각하려면 자신은 지금 어디에 있어야 할까. 아직 떠오르지 않은 익사체가 발밑에 있다.


오랜 상념과 싸운 세트가 마침내 다시 움직이며, 갈라지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이미 걸어온 만큼의 거리를 더 걸어서 간신히 도착한 집이 낯익다. 정겨운 느낌은 아니다. 계단과 창문은 불이 모두 꺼져있고 현관은 사람이 드나든 티가 거의 없다. 

집안은 춥고 어둡다. 굵직한 가구의 그림자만 겨우 확인할 수 있고 세트는 다시 주위를 둘러본다. 이 집은 변한 것이 하나 없다. 크기가 다른 신발들, 비어있는 어항, 유리컵에 남은 입술 자국, 손때가 탄 인형과 아직 치우지 않은 할로윈 장식······. 죽음이란 찰나의 현상이 누군가의 평생을 앗아갔음에도 마치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그대로이다. 불을 켜면 원래의 삶을 다시 살 수 있을 것만 같다. 지극히 일상적이고 평범한 것들, 그러나 세트가 느낀 위화감은 아마도 슬픔을 착각한 것일 터이다.



목제 식탁 아래에는 의자가 끌린 흔적이 있다. 금방 사람이 일어난 것처럼 비스듬이 빠져나온 의자에 손을 가져다 댄다. 아무 느낌도 들지 않는다, 건너편에 앉은 아펠리오스도 그러해 보인다. 얼굴이 없는 그의 형체는 세트를 향해있다. 저 얼굴은 어떠했고 여기 앉아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기억해야 한다. 세트는 천천히 자리에 앉아 아펠리오스를 마주본다. 아마도 그 쯤에 눈이 있었을 것이다.



······있지, 난 겨울이 좋#았어, 내 몸을 가"누기엔 더위보다 추위가 더 나았거든. 어머;니도 항상 겨울이 되면 창,가에서 뜨[개질을 하/셨는데 그건 내 모자'나 목도*리가 되고는 했지. 발목까-지 눈이 오는, 날엔 밖:에 나가 놀)았어······, 온몸이 푹" 젖을 만<큼 눈을 맞고 ?나서야 돌아왔'지만 감/기 한 번 걸린 적 없#었어.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지금 나(한테 좋은 추억*으로 남은 거야. 그런데 여@기는 눈이 "전혀 안 오네. 추,위는 메마르.면 마를 수록 힘든데,:.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세트는 되는대로 말을 지어낸다. 내용이 온통 엉망이다. 자연스럽게 말하는 목소리에 잡음이 낀다. 세트는 추락하는 기분을 느낀다. 죽음은 곧 망각이다. 무엇도 영원하지 않으니 현재를 전제로 미래를 가정했던 날들이 얼마나 가여웠는지 체감한다. 아펠리오스가 존재하지 않는 눈으로 세트를 본다. 저 입술은 무엇을 발음했는지 떠올린다. 기억나지 않는다. 들리지 않던 그의 목소리가 어떻게 울렸는지 전혀 상기할 수 없어서 발화發話된 문장마저 함께 발화發火한다.



여       울은 내       뜻해. 내가  살       은 너무    고 강    , 꼭   이 베이는 것      에    을 내놓을    없     .    은   기에 잘        이라 더 조심       . 그      을    지며 놀았     억은 있    .    닥에 쌓인 눈   조      간이 지나      려서,     어렸     손이 빨갛      . 네   기억하       과   조     르지  그       대로     억이    . 너도 그   ?



그래. 나도 그래. 세트가 웃는다. 테이블 위에 놓인 그의 손을 보며, 말이 되지 않은 단어와 잡히지 않는 손을 매만진다. 벗겨진 매니큐어를 생각한다. 부러진 손톱은 다 나았던가, 이 고통스러운 형상이 꿈이라면 정말 고통스럽다. 이것을 만든 게 자신이라면 나는 이제 어디를 떠돌아야 하나. 한참이나 말이 없던 세트가 의자를 끌고 일어난다. 네 갈래로 나뉜 의자 다리는 바닥에 남은 자국 위를 똑같이 긁는다. 세트가 떠나자 얼굴 없는 아펠리오스의 형상이 잠시간 남아있다 사라진다. 

아펠리오스는 현관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방을 썼다. 깨어있는 모든 시간을 작업해야 했던 그의 방은 항상 문이 닫혀있었다. 문을 두드리면 잠시 후 그가 나왔는데 항상 가까이 다가오는 발소리가 났다. 관계가 틀어지면 열어주지 않던 때도 더러 있었다. 장애물을 낀 상태로 하는 대화는 원활하지 않았다. 잘 들리지 않았고, 잘 듣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세트는 다시 그 자리에 선다. 당장 열려도 이상하지 않을 문이다. 문틈 사이로 새는 빛은 없다. 불이 얼마나 오래 꺼져있었는지 헤아릴 수 없다. 한기마저 돈다. 바깥이나 안쪽이나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어디에나 추위는 있다. 그것을 견디는 건 개인의 문제다. 

세트는 자신이 어느 쪽인지 생각하며 문고리에 손을 대려다가 곧 거둔다. 대신 문을 가볍게 두드린다. 어떤 소리가 났는지는 본인만 알 것이다.

안녕, 펠.

듣고 있어?

한참 동안 기다렸으며 한참을 그리워했던 이름. 아직 잊지 않아서 다행이다.

나왔어, 길을 잃어버려서 조금 걸렸네.

너도 잘 지냈던 거면 좋겠다. 밖이 엄청 추운 것 같았거든.

다가가지 않고 거리를 유지한다. 옅게 젖은 눈이 문으로 가로막힌 것을 본다.

여긴 그때 그대로라서 다행이야. 걱정 많이 했어.

금방 가봐야 해, 시간이 없어서. 미안······, 꼭 다시 올게.

마침내 문을 열지 못하고 세트는 한 발짝 떨어진다. 그러니까, 이 세상은, 그리고 이 너머는 살얼음판이다. 죽은 심전도의 직선처럼, 남은 사람은 얄팍한 기저에 평생을 의지해야 한다. 가야할 걸음이 있다 한들 쉽게 발을 뗄 수 없는 곳에, 죽은 이의 무게가 실릴 자리는 없다. 발목을 잡는 건 마지막 남은 미련이다. 다음 계절이 언 것을 모두 녹일 때까지 세트는 다시 돌아올 수 없음을 안다.

그러나 모든 존재는 가야 할 때가 있다. 미련은 모두의 어깨를 짓누르니 무게를 덜어야 한다. 아쉬움에 문에 대고 손을 흔든 세트가 집을 떠날 마음을 가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언젠가 문이 다시 열리고 불이 켜질 것을 믿어야 한다. 세트는 문에서 떨어져 그 전경을 바라보다가 밖으로 나온다. 방 창문을 올려다보며 마지막 소원을 남긴다. 세트는 모든 그리움에서 떠나 얼음판 위에서 내려 우중충한 하늘 밑으로 간다. 여전히 달을 가린 채다. 그러나 낮게 나는 새를 피해 함께 허리를 숙이던 날들이 있었으므로, 우리는 앞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배울 것이다.

이제 이곳에서 세트는 보이지 않는다. 불은 여전히 꺼져있으며 문 뒤에 인기척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앞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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