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애미 신드롬

마이애미 신드롬 01

켄펠잊 논씨피 하이틴 AU


알고 계셨나요?

- 케인&아펠리오스&이즈리얼 NCP 하이틴 AU

- 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 미국을 배경으로 합니다. 고증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 오리진과 하트스틸 설정이 섞여있으며 모브 캐릭터 등장&날조&개인적인 해석이 많습니다.

- 주의!!! 캐릭터의 우울감/약물 묘사를 포함합니다.


"······했으리라고요. 그러니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짚어볼 필요가 있겠죠." "우리가 평화를 사랑하는 만큼 다른 사람들도 그랬으면 좋겠는데요." "별걱정을요! 문명화된 사회잖아요." "뭐, 좋아요! 동의한다고 칠게요. 손에 쥔 그 카드가 당신 말을 증빙해 준다면요." "서두르지 말자고요. 그래봤자 달라지는 건 없어요, 어제 일이니까요. 그럴 필요도 없는 사연이긴 하고요······." "이를 테면요?" "그러니까, '하수구의 악어' 같은?" "이런, 제발요. 그건 다 헛소문이에요." "실망스러운 것 같네요." "지금 이걸 듣고 있을 사람들만큼이나요." "그만큼 평화롭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으음, 우리가 그걸 사랑하는 만큼이요!"

라디오 진행자의 과장된 목소리가 끊긴다. 계획된 연출인 정적이 이어지다가, 곧이어 음악이 흘러나온다.

https://youtu.be/BN1WwnEDWAM?si=OkCXMyzoxb8FJeZR

19XX년 6월 18일 오후 3시 49분

마이애미, 플로리다

파센트 힐 고등학교

노래가 얼마나 희망차든 간에 케인은 웃을 수 없다. 쇠고랑을 찬 것처럼 손을 모으고 앉아있던 케인은 책상 한편에 놓인 라디오를 곁눈질하다 머리를 헤집는다. 이번엔 조용히 넘어갈 방법이 전혀 없다. 숨길 바에야 어떻게 변명할지 고민하는 게 더 빠르겠다. 하지만 교무실에 분기마다 출석한 것치고는 자비로운 처사다. 문밖이 시끄러운 것이 그 증거가 된다. 누구네는 학부모까지 불려 온 듯하지만 그건 알 바가 아니다. 최소한 먼저 주먹을 들지 않으면 이 정도의 취급은 확보가 된다는 걸 그는 잘 알고 있다.

콧등에 올려두었던 얼음팩이 녹기 시작한다. 찬물이 뺨과 입술을 타고 흐를 때가 되어서야 고개를 바로 세운다. 싸구려 천으로 감싼 얼음팩이 질퍽한 소리를 내며 무릎 위로 떨어진다. 피부 감각이 둔해질 정도로 문질러 댔는데 환부는 이 망할 것을 치우자마자 달아오른다. 바지가 젖기 전에 팩을 다시 제자리에 가져다 댄다. 뼈가 부러졌는지는 병원에 가기 전까진 모른다. 진료 비용에 청소년 할인이 있었는지 먼저 떠올려야 한다.

"케인."

바깥이 조용해지나 싶더니 선빵을 친 패거리와 한창 실랑이를 벌이던 교사가 피곤한 낯으로 들어온다.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선한 투이다. 비딱한 표정과 목소리는 또 다른 분쟁거리가 되기 때문에 케인은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얘기는 어떻게든 잘 끝났어. 저쪽에서도 잘 넘어가겠다고 하더라."

그럼, 아무렴. 저기서 무슨 대화를 하고 왔는지 대충 알겠다. 멋지고 잘나가는 애들의 미래를 누군들 지키고 싶지 않아 할까. 목격자가 있었으니 망정이지 그게 아니라면 케인은 쪽도 못 쓰고 아버지를 모셔 왔을 거다. 교사는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안색이다. 깊게 팬 다크서클만큼 깊은 한숨을 내쉰다. 날도 더운데 열 나는 일까지 떠맡게 되었으니 운수가 제법 안 좋다. 애들 싸움을 말려야 하는 입장만큼 불쌍한 것도 없다. 그래도 중립을 지켜야 할 위치 아닌가. 그 결과로 두통약을 몇 알이나 더 먹어야 하는지 관계없이 말이다.

"너도 선 넘은 거 알지? 할 수 있는 말 그렇게 많지 않아."

"누가 그렇게 만들었는데요"

"병원비 안 물어주게 된 걸 감사히 생각하렴."

"제가 받아야 할 건 없고요?"

"더 때린 게 누구지?"

각자가 말하는 바는 명확하다. 입술을 비뚜름하게 만든 케인이 얼음팩을 신경질적으로 쓰레기통에 던져 넣는다. 손등으로 얼굴에 묻은 물을 닦아내지만 상처를 피하려면 손댈 수 있는 면적이 그리 넓지 않다. 줘 터진 얼굴에 축축한 피부. 엄청 꼴사나울 테다. 어쩌면 눈물 자국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심란한 손짓으로 손에 쥔 파일을 툭툭 치던 교사가 문서를 넘겨본다. 손가락 사이에 낀 펜 꼭지가 빙글 돌아간다. 종잇장 뒷면에 비친 글자로 저것이 전화번호부라는 걸 알았을 때 케인은 다리를 잘게 떤다. 아픈 곳이 더 쑤신다. 여긴 이제 진짜 돌겠는 사람만 남았다.

"아버지께 연락할 거야."

"안 돼요."

"지금까지 그냥 넘어갔잖아."

"좋은 생각 아닐걸요."

"너도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었을 텐데?"

"못 이길 거면 애초에 덤비질 말았어야,"

"케인."

싸늘하다. 파일이 책상 위로 내던져진다. 찢긴 페이지 하나가 팔랑이며 바닥으로 떨어진다. 케인은 떨어진 페이지에 제 아버지 연락처가 있는지 재빨리 확인한다. 글씨가 너무 작아서 보이지 않는다. 노래가 끝나고 라디오 진행자가 돌아왔는데 라디오가 고물인지 소리가 끊긴다. 시시한 소리나 해댔을 게 분명하니 상관 없다. 하수구에 사는 악어를 생각하기엔 현실이 너무 되다.

"쟤들은 멍청해서 저러고 있겠어? 네 편의 봐주는 것도 한두 번이야. 이렇게 되기 싫었으면 네 처신은 네가 잘했어야지. 너는 네가 저 애들이랑 다르다고 생각하겠지만 너도 결국······."

틀린 말이 없으면 화도 안 난다는 건 사실이다. 미치지 않고서야 반박할 거리가 없으니 입을 열 구실도 없다. 케인은 항상 제대로 된 처벌을 피할 수 있었던 이유를 생각했다. 의존할 수 있는 보호자가 없으니 마음을 써준 걸까. 배려하는 사람은 대개 배려받는 사람 입장을 고려하지 않는다. 케인에게 주어진 '학부모 호출 면제'는 특례가 아닌 이유도 그렇다. 당장 부모를 불러올 수 없는 가정사를 내비치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 지금 이 지경이 된 데에는 간접적으로 밝혀진 집안 사정 탓도 있기 때문에 케인은 여기서 어떤 기분을 느껴야 하는지 알 수 없다.

잔소리를 가장한 짜증을 풀어낸 교사가 이윽고 말을 멈춘다. 본인도 어느 정도의 자세를 유지해야 하는지 모르는 게 틀림없다. 교사가 케인을 본다. 결국 승자가 되었다지만 다수와의 싸움이었으니 얻은 것보다 잃은 게 더 많다. 애초에 양측 다 이득을 보긴 그른 싸움이었다. 이런 게 질풍노도인가. 피를 닦아낸 휴지가 근심만큼 쌓인다. 급작스레 진정한 교사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아버지 언제 오시니?"

"두 달은 더 있어야 해요."

"그래, 곧 연락 갈 거니까 너도 미리 말씀드려. 오늘로 다 끝낸 거니까 일 더 키우지 말고."

"······."

비교적 건재한 혀가 불어 터진 입안을 쓸어올린다. 무엇을 미리 말씀드릴까. 제가 사람을 팼는데 그 건으로 학교에서 연락 갈 거니까 마음의 준비 해 두세요. 완전히 미친 생각이다. 불쾌한 쇠 맛이 목구멍 뒤까지 내려온다. 침을 뱉는 것처럼 혀를 찬 케인이 다리를 절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만 가도 되겠냐는 물음을 명료하지 않은 눈빛으로 대신한다.

저것들이 설마 다리를 부러뜨리진 않았겠지만 바닥을 디딜 때마다 뼈가 무너지는 느낌이 든다. 복도의 떠들던 무리들이 케인의 몰골을 보고 급속히 소리를 줄인다. 꺼림칙한 표정이다. 누군가 눈치없이 입을 열려고 하니 옆에 있던 사람이 입을 막는다. 케인은 괜히 고개를 들어 주변을 한번 본다. 눈이 마주친 학생이 어색하게 고개를 돌리며 중간에 끊긴 대화를 인위적으로 이어간다. 떨떠름하다. 다시 가던 길을 마저 가면 뒤에서 흘끗흘끗 시선이 닿는다.

대낮에 학교 복도에서 다구리를 맞은 사람을 모르긴 힘들다. 다구리를 맞던 그 사람이 다섯을 상대로 싸워 이겼다는 사실도. 저를 쳐다보는 이유가 무엇이 되었든 달갑지 않은 건 변함 없다. 가십거리는 어느 때나 좋을 대로 이용되고 버려지기 마련이다. 평소의 두 배의 시간을 들여 사물함 앞에 도착하면 케인은 가장 먼저 문 안쪽에 붙인 사진을 확인한다. 오래된 사진이 살짝 비뚤어졌다. 각도를 바르게 맞추면 사진 속 건장한 백발 남자가 바로 선다. 웃음기라고는 없는 얼굴이 지금의 케인과 같다. 케인은 자전거 키를 챙기면서 사진 속 남자에게 시선을 고정한다.

'당신 때문이야.'

입술로 남자를 탓하며 문을 세게 닫는다. 케인의 자리와 이어진 모든 케비넷이 덜컹거린다. 주변이 다시 조용해진다. 이번엔 돌아보는 일 없이 곧장 건물 밖으로 나간다. 자전거를 타고 학교를 완전히 벗어날 때까지 등에 닿는 시선이 사라지지 않는다. 마음껏 구경들 해라, 퉤! 피 섞인 침이 땅바닥에 처박힌다.

케인은 후드를 뒤집어쓴다. 여름의 열기가 올라올 시즌이지만 지금은 얼굴을 가리고 싶다. 헐거워진 발목으로 페달을 밟는다. 교사가 꼭 병원에 들리라고 충고했으나 가더라도 상황이 더 나아질 것 같지는 않다. 제법 더워진 바람이 분다. 지는 해가 지상에 가까워진다. 불그스름한 기운이 기저에 깔린다. 페달링을 멈추고 아지랑이가 사라진 땅을 멀거니 보던 케인이 집으로 돌아가는 도로를 벗어난다. 왔던 길을 되돌아간다. 다시 학교 앞에 도착하고, 그보다 더 멀어진다. 교문 근처에 서 있던 사람 하나가 시비를 건다. 저쪽도 얼굴이 줘 터져있는데 저쪽은 가릴 거리가 없다.

"엿이나 먹어, 케인!"

"너나 먹어!"

그는 케인이 지나간 자리로 중지를 올리지만 어차피 사람 등에는 눈이 안 달렸다. 엿 먹기를 사양한 케인이 집에서부터 점점 멀어진다. 어디로 가야 할지는 모른다. 단지 벗어나고 싶다. 다리를 더 빨리 움직인다. 뼈가 조각나는 것 같다. 해를 등지고 숨을 몰아쉬면서 케인은 이를 깍 문다. 여린 살에서 배어 나온 피의 맛이 난다. 앞만 보고 달리면서 입술로 남을 탓한다. 누군가 들어줬으면 하면서도 아무도 들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당신 때문이기 때문이다. 당신 때문이라고!

19XX년 6월 18일 오후 3시 49분

뉴욕시, 뉴욕

서스턴필드 고등학교

이즈리얼은 케비넷에서 쏟아져나온 편지를 줍느라 바쁘다. 봉투에 쓰인 이름 중 절반 이상이 모르는 사람이다. 마지막 학기말 시험에서 가장 늦게 나왔음에도 교실 밖에서 그를 기다리던 사람이 많다. 몰려드는 인파를 잘 피해 바닥에 떨어진 편지가 발에 밟히지 않도록 조심히 거둔다. 주변을 기웃대는 이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자기 할 말을 하는데 도통 귀에 들어오는 소리가 없다. 정신이 쏙 빠지도록 떨어진 것을 주워 담은 이즈리얼이 몸을 반짝 일으킨다. 머리 꼭대기가 위로 향하자 분산되어 있던 시선이 그에게로 한꺼번에 몰린다. 제 앞에 모인 사람들을 보며 금빛 눈이 끔뻑거린다. 이즈리얼이 그들의 존재를 하나하나 헤아리기도 전에 각자 하고 싶은 말이 그에게로 몰려온다.

이즈리얼! 영화 보고 가지 않을래? 방학하고 같이 어디 놀러 가자, 삼촌이 친구 데려와도 된대. 오늘 저녁에 일정 있어? 안 바쁘면 애들이랑 바다 보는 거 어때? 나 페이저 새로 샀어. 번호 교환하자! 시험 잘 봤어? 이제 뭐 할 거야? 있지, 나 아르바이트하는 데에 자리 하나 남는데 같이 할래? 이따 강아지 산책 갈 건데 너도 가자!

어, 음······. 이즈리얼이 대답을 질질 끌며 한 손에 다 잡히지도 않는 편지를 가방 안에 쑤셔 넣는다. 안은 이미 포화상태다. 부스럭거리며 뭔가 찢기는 소리도 난다. 안을 슬쩍 들여다보려 했으나 출처 모를 잡동사니와 그림자가 섞여 제대로 보지 못한다. 아무 일도 없는 척 가방 문을 닫은 그가 활짝 웃으며 빠른 속도로 시장통을 뚫고 지나간다.

"미안! 오늘 좀 바빠. 지나갈게!"

어떤 손은 빠져나가는 그의 옷자락을 잡기도 했으니 물 흐르듯 빠져나간다. 출구에 다다랐을 때는 반 바퀴 빙글 돌아 지나쳐온 사람들을 향해 손을 흔든다. 먼저 갈게! 좋은 하루 보내! 다소 어색하게 자리를 뜬 감이 있지만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인기인은 원래 항상 바쁘니까. 이번에도 그와의 오후 약속을 놓친 이들이 아쉬워하며 입맛을 다신다. 아쉽지만 놀랍지는 않다. 예약하고 줄을 서더라도 대화 한 줄 나누기 어려운 사람이다. 데이트 경험담은 전설처럼 돌아다녀 그를 남몰래 혹은 대놓고 좋아하는 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기도 한다. 잘생기고 성격까지 좋으니 그를 마다할 이유가 있을까. 누군가 이즈리얼을 싫어한다면 그건 그를 질투하는 탓이다.

뒤를 보며 한참이나 손을 흔들던 이즈리얼은 턱을 잘못 디뎌 넘어지기 직전에야 앞을 본다. 사방에서 웃음소리가 터진다. 맹한 표정으로 눈을 굴려보면 여전히 그를 보고 있는 사람이 많다. 어딜 가나 눈에 띄는 사람은 혼자만의 시간을 갖긴 어렵다.

"또 데이트 가?"

"비슷해! 늦어서 먼저 갈게, 주말 잘 보내!"

멍청하게 웃으며 다시 손을 흔들면 저쪽에서도 좋다고 인사를 받아준다. 맞다, 나 네 앨범 구했어. 꼭 사인 해 줘! 등을 돌리고 뛰어가다 그 말을 듣고 또 뒤 돌아 받아준다. 나중에! 이번이 진짜 마지막이다. 이제는 진짜 가야겠다고 다짐한 이즈리얼이 가방을 고쳐 들고 곧장 주차장까지 간다.

주차장 한가운데, 가장 주목받을 만한 위치에 주차된 차가 바로 그의 것이다. 본인처럼 반짝반짝하게 잘 닦인 모습이다. 가방에서 차키를 찾던 그는 와이퍼에 끼어있는 또 다른 쪽지를 발견한다. 손 대기 전에 주변을 한번 본다. 여기까지 따라온 사람은 없으니 아직까진 한적하다. 아무도 없는 것을 세 번이나 더 확인한 이즈리얼이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쪽지를 뽑아내어 그대로 구겨버리고 가방 안으로 던져넣는다. 종이 뭉치는 손가락 사이로 굴러떨어지고 노란색 매니큐어를 바른 손끝이 밑바닥에 깔려있던 열쇠를 찾아낸다. 집 열쇠 다발과 펜던트가 달린 차키가 동시에 딸려 나온다.

조수석으로 가방을 밀어 넣고 뛰어오르듯 운전석에 몸을 올린다. 뒤늦게 따라온 누군가 말을 걸기 전에 문을 닫아버린다. 주변이 가로막히고 완전히 독립된 공간이 되어서야 이즈리얼은 등받이에 몸을 푹 기대며 녹아내린다. 숨을 깊게 쉬었다가 내쉬길 반복하며 경직된 근육과 호흡을 진정시킨다. 차에 달아놓은 방향제는 메슥거리는 속을 진정시키는 데에 그다지 도움을 주지 못한다. 하지만 운전대에 토를 쏟거나 사람을 치지 않으려면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는 과정이 필요하다. 눈을 감고 삼십까지 센다. 주워 담은 편지 봉투가 몇 개인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학교 최고 인기인! 그런 타이틀에 걸맞은 기대에 맞추기 위해서는 그럴싸한 핑계가 필요하다. 데이트는 러브콜에서 벗어나기 좋은 거짓말 중 하나였고 의문을 표하는 사람이 없으니 머리를 더 굴리지 않아도 되었다. 정신을 갉아먹는 관심이지만 좋은 평판을 유지해서 나쁠 것 없다. 인간관계에서 손익을 따지면 안되었으나 이즈리얼은 메스꺼운 시선을 감당하기 위해 합의점을 만들고 합리화해야 한다. 고작 중고등학생 대상의 인기몰이에 어울려주는 이유도 그것이 유일하다.

"······."

숫자를 다 세고 눈을 뜬 이즈리얼이 룸미러로 몰골을 확인한다. 흐트러진 머리와 혈색 없는 피부, 흐리멍덩한 눈빛, 반쯤 열린 입이 바보 같다. 거울 각도를 조절하며 가장 잘생겨 보이는 지점을 찾는다. 유리에 비친 모습을 노려보며 머리를 정리하고 뺨을 탁탁 친다. 손가락으로 입꼬리를 당겨 올린다. 멋지게 스타일링 된 머리와 건강한 피부, 또렷한 눈매, 완벽한 겉모습이 돌아온다. 손가락을 놓으니 위로 치켜 올라간 입이 스르륵 내려오다가 어느 지점에 걸려 멈춘다. 상냥하고 부드러운 미소가 완성된다. 매력적인 입술과 새하얀 치아가 호감을 더한다. 기준에 부합한 외관이 만들어지자 이즈리얼은 돌아간 거울을 원위치로 바꿔둔다. 분위기를 띄울 만한 노래가 나오는 라디오 채널을 찾는다. 라디오 진행자의 과장된 웃음소리가 들린다. 애매하게 잘린 앞 문장은 궁금증을 자아내지 못한다.

"으음, 우리가 그걸 사랑하는 만큼이요!"

이즈리얼은 키를 꽂아 넣고 차에 시동을 건다. 저 사람이 사랑한다는 그건 뭐였을까. 뭔들, 알아서들 하라지. 웃는 얼굴로 아무런 감흥 없이 짜인 대본에 동조한다. 능숙한 솜씨로 주차장을 빠져나와 학교를 떠난다. 와이퍼를 움직여 혹시 발견하지 못한 종잇조각이 있는지 확인한다. 하늘은 맑지만 도착할 쯤이 되면 해가 떨어질 테다. 비행기 시간까지 아직 많이 남았으니 이제 어디서 밤을 보내야 할지 고민하면 된다. 학교 최고 인기인! 이즈리얼이 최악의 무대를 등지고 빠르게 멀어진다. 앞으로 며칠 간 도시로 돌아올 일은 없을 것이다.

19XX년 6월 18일 오후 3시 49분

???, ???

리로디드 레트로

낡은 책은 간직하기 좋다. 누렇게 바랜 색은 이목을 끌고 가장자리가 자글자글하게 수축한 종잇장은 잘 다져진 까끌까슬한 감촉이 난다. 잘만 의식하면 묵은 먼지와 나무 냄새를 맡을 수 있어서 주기적으로 찾게 되는 물건이다. 아펠리오스는 책등이 닳은 책 한 권에 손을 댄다. 결말 부에 주인공이 모조리 죽는 비극적인 로맨스 소설이다. 책의 1/3 부근을 펼친다. 사랑하는 두 사람이 오붓하게 대화를 나누지만 이미 서로에겐 다른 약혼자가 있다. 제법 애절한 티를 낸다. 건조한 문체는 둘을 두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따위의 수식어를 붙인다. 처음부터 끝은 정해져 있다.

중반부를 펼친다. 악역으로 설정된 인물이 주인공을 괴롭힌다. 급사할 듯 유약한 주인공이 울고 있으면 도와주는 사람은 없다. 아펠리오스의 반 정도 뜬 눈이 흥미를 찾지 못한다. 차라리 결말을 몰랐다면 조금 달랐을까. 절정으로 치닫는 대목을 넘기고 마지막 장으로 간다. 연인은 죽었고, 구멍이 난 머리에서 피가 흐르고, 끝내 감지 못한 눈이 여운을 남기는 것처럼 분위기를 끌다가 끝이 난다. 책을 읽느라 들인 노력이 없으니 안타깝지 않다. 그러나 사랑과 분노, 슬픔이란 감정이 모두 담겼을 거라 추측한다. 손자국이 남고 납작하게 눌러 펴진 책장은 분명 이 진부한 이야기가 누군가의 마음엔 들었다는 의미이다. 아펠리오스는 두 쪽으로 나뉘기 직전인 책을 살며시 덮고 값을 치른다. 타인의 희로애락을 손에 넣기엔 더없이 싼 가격이다.

중고품을 파는 상점은 컨셉에 걸맞게 낡은 골목 인근에 있다. 가게를 끼고 우측으로 돌면 곧장 담배꽁초로 뒤덮인 좁은 골목이 나온다. 아직은 밝은 길목으로 들어선 아펠리오스는 벽에 등을 대고 미끄러지듯 주저앉는다. 길 건너편에 늘어선 또 다른 상점에서 흘러나오는 티비와 라디오 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방금 구매한 책을 꺼내 든다. 금이 가고 둘레가 무너지는 양장 표지가 지저분하다. 코팅이 들린 부분을 손가락으로 문질러보다가 가장 첫 장을 연다. 살짝 번진 잉크, 세련된 필기체로 쓰인 문구가 있다.

사랑스러운 나의 앤에게.

당신의 사랑은 중고 상점에서 1.2달러에 판매 중이다. 나는 일직선의 연모를 엉뚱한 대상에게 향하도록 만든 것이고. 재활용된 감정의 가치는 겨우 이 정도다. 등장인물을 소개하는 도입부를 읽으며 아펠리오스는 이 글씨를 쓴 사람이 앤이라는 상대에게 대체 왜 몰살당하는 이야기를 선물했는지 생각한다. 그만큼 절절한 사랑을 원했을지도 모른다. 사랑은 이따금 죽음과 연관되고는 하니까. 그러나 영 심심한 기분이다. 아펠리오스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찾는다. 라이터 기름은 진작에 떨어져서 대신 성냥을 긋는다. 한 개비를 물고 불을 붙인 뒤 손을 털어 꺼버린다. 그의 담배는 상점 주인에게 내어준 126페이지의 가치만큼 활활 타오른다.

"이를 테면요?" "그러니까, '하수구의 악어' 같은?" "이런, 제발요. 그건 다 헛소문이에요."

와닿지 않은 이야기에 집중하지 못한 아펠리오스는 잡음 섞인 라디오의 음성을 듣고 골목 안쪽의 하수구를 흘끗거린다. 낮이지만 저 속은 어두워서 보이지 않는다. 사람의 호기심. 대중적인 소문으로 부풀리는 상상력. 머릿속으로 오물을 뒤집어쓴 악어를 그린다. 악어가 소설 속 주인공들을 잡아먹는다. 마지막엔 모두가 죽는다. 차라리 이런 게 더 재밌지 않을까.

"실망스러운 것 같네요." "지금 이걸 듣고 있을 사람들만큼이나요."

글쎄다, 딱히, 별로. 그건 기대한 사람 한정이다. 작중 등장하는 악인을 악어로 대치한다. 주인공은 악어 입에 들어간 수생동물이고 나머지 엑스트라는 이빨에 낀 음식물을 빼먹는 악어새다. 그들도 언젠가 닫힌 입 사이에 끼어 죽을 것이다.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는 동물 다큐멘터리가 되고 슬픔도 분노도 애절함도 몽땅 사라진다. 완벽한 실패. 아펠리오스는 첫 번째 담배를 비벼 끈다. 책을 덮는다. 이것도 크게 다르지 않다.

두 번째 담배를 꺼내고 똑같이 불을 붙인다. 뿌연 연기가 골목 밖으로 새어 나간다. 인적이 드물어 시비를 걸 사람도 없고 헤어진 전 연인의 선물을 팔아치우는 가게 근처에는 어차피 아무도 오지 않는다. 값싼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경쾌한 기타 리프의 음질이 불쾌하다. 머물러야 할까, 가야 할까? 앉은 자리에서 담배 세 개를 더 태운 아펠리오스는 노래가 끝나고 한참 뒤에야 답을 내놓는다. 옆에 내려둔 기타를 어깨에 걸치고 무책임하게 주차한 파란색 오토바이에 시동을 건다. 갈 때가 되었다.

남부를 향해 달린 지도 벌써 한 달째다. 앞으로 세 시간 정도 더 달릴 것이다. 정해진 목적지 없이 세 시간 후 도착한 곳에 내려 거기서 일주일을 보낼 생각이다. 이번을 마지막으로 집에 돌아간다. 오토바이 고장과 본인의 객사 중 어느 것이 먼저일지 고민하지 않은 아펠리오스는 다양한 가능성에 무게를 둔다. 칠이 벗겨진 오토바이가 출발한다. 요란한 엔진소리와 함께 머리가 날린다. 좁은 길을 매끄럽게 빠져나간 그는 혀를 굴리며 입 안에 남은 담배 향을 찾는다. 아무런 맛도 나지 않는다.

19XX년 6월 18일 오후 7시 12분

마이애미, 플로리다

테리 레인 정비소

중년 남자는 맨바닥에 퍼질러 누운 케인에게 담요를 던져준다. 얼굴 위로 폭삭 덮인 두꺼운 원단은 숨쉬기에 부적합하다. 끝끝내 참던 케인은 담요를 걷으며 부족한 숨을 몰아쉬고 눈만 내려 남자를 본다. 장비가 쌓인 선반 뒤에 처박혀있던 구급상자를 찾은 남자가 겉면에 쌓인 먼지를 털며 다가온다. 이놈아, 입 돌아간다. 케인은 짜증스럽게 몸을 일으키며 뒤집어쓴 후드 위로 펼친 담요를 쌓아 올린다. 남자가 건넨 구급함은 철제 도구 사이에 끼어 오래도록 방치되어 있어서 겉면이 녹슬었다. 손으로 만졌다간 더 큰 병에 걸릴 것 같아 손톱으로 뚜껑을 들어올린다.

내부에 붙은 거울은 처참한 피골을 보여준다. 콧등과 눈가는 시퍼렇게 멍들었고 얻어터진 입술은 피가 제대로 닦이지 않아 심히 흉하다. 당장 어떻게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케인은 턱에 말라붙은 피를 대충 긁어내고 살이 터진 곳을 중점으로 연고를 바르기 시작한다. 사용기간이 한참 지나 굳어버린 연고가 나올 생각을 안 하다가 덩어리째로 쏟아진다.

"아, 진짜! 무슨 제대로 된 게 없어!"

"너랑 나까지 포함해서."

케인은 일주일에 3번 정비소에 딸린 세차장에서 일했고 오늘은 출근하는 날이 아니다. 불량 청소년이 저녁까지 집에 들어가지 않고 행한 일탈은 바로 쉬는 날 출근하는 것이었다. 정비소 주인인 남자는 그간 케인의 행적을 익히 봐 왔기에 어디서 구르다 온 모양새를 보고도 아무렇지 않게 그를 들여보냈다. 그래서 오늘은 몇이었니, 열일곱? 다섯이요. 야, 너도 많이 죽었다. 케인은 입을 댓 발 내밀려다 이미 찢어진 입술을 더 당기는 꼴만 되어 관둔다. 콧등을 눌러보고 뼈에 금이 간 게 명백한 통증이 오자 침울한 표정으로 바뀐다. 하는 수 없이 반창고라도 붙여 보는 케인을 보며 그를 놀려대던 남자는 대뜸 진지하게 말을 건다.

"뭐 때문에 그랬어?"

새살이 난다고 홍보하던 두툼한 밴드를 붙이면 코가 세 배로 커 보이는 효과가 난다. 엄청나게 별로다! 멍이 빠지려면 그저 기다리는 방법밖에 없지만서도 적어도 보이지 않게 가리고 싶은 그가 얼굴을 반창고로 도배한다. 대답을 유예하려는 의도도 있다. 맨피부의 면적이 줄어들고 더 이상 닦아낼 피가 없게 되어서야 케인은 우물쭈물 입을 연다.

"걔들이 아빠 욕을 했어요."

"뭐라고?"

"사람 죽이고 갇혀있느라 집에 못 오는 거라고."

케인의 아버지는 군인이고 직업 특성상 한곳에 오래 있을 수 없어 두어 달에 한 번 겨우 집에 돌아왔다. 잊을만하면 사진과 편지를 보내왔고 주기적으로 전화를 하기도 했지만 그것만으로 채울 수 없는 건 분명 있다. 무뚝뚝하고 감정표현 없는 그 사람과 그리 친하지는 않지만 세상에 부모가 필요하지 않은 아이는 없는 법이다.

자식이 넷이나 있는 남자는 케인의 심정을 이해한다. 네 남매 중 막내가 케인보다 살짝 어린 정도인데 그 아이는 아직 편지를 어떻게 부치는지도 모른다. 저런 이유로 싸움을 일으키는 일은 더더욱 없다. 애들이 못된 것만 배웠네. 남자는 떫은 뒷맛에 혀를 차고는 거친 손으로 케인이 덮은 담요를 잘 여민다. 거부하지 않고 가만히 코만 훌쩍이는데 눈물 자국은 없다. 자존심인지 뭔지 모를 일이다. 혹시 아버지께 연락이 필요하면 대신 해주겠다는 걸 한사코 거절한다. 자식이 효자에다 일당백인 걸 알면 기뻐서 울 텐데. 하지 말라면 좀 하지 마요.

"그래서, 일이나 하려고 여기 왔어?"

"돈 더 주면요."

"어른한테 못 하는 말이 없어."

남자는 케인의 이마에 딱밤을 놓고 자리를 털며 일어난다. 아!! 아프라고 때렸어. 남자는 씩씩대는 케인을 두고 재밌어하며 의자를 끌어다 준다. 맨바닥에 앉지 말라는데도 끝까지 일어날 생각을 안 한다. 그래, 너 내키는 대로 해라, 다 쓴 구급상자를 정리하고 남자는 돈을 챙긴다. 저 조그만 놈이 제 발로 집에 들어갈 것 같진 않고 살살 달랠 방법을 찾아야 한다. 뭐라도 먹이면 기분 푸는 데 도움이 되겠지 싶다. 한 병 사다줘? 술 안 마셔요. 담배는? 안 피워요! 그럼 코카인? 안 한다고! 애보다 더 철이 안 든 어른이 껄껄 웃는다. 상대보다 더 유치하게 구는 건 단단하게 묶인 분위기를 느슨하게 만드는 방법이기도 했다.

주먹도 쓰는 놈이 왜 이렇게 재미가 없어! 남자는 정비소를 나가면서 입구에 놓인 간판 위로 머리를 내밀고는 케인을 나무란 뒤 사라진다. 인생이 아무리 막장이라도 어른한테 엿이나 먹으라고 할 수는 없어서 케인은 그저 어이없는 표정을 짓고 뒷모습을 바라본다. 남자는 정비소 옆 리커 스토어로 향한다. 분홍색과 보라색이 섞인 커다란 네온사인이 붙은 가게인데, 조명의 기개가 장엄하여 후드와 담요로 이중 시야 차단을 한 케인도 그 번쩍이는 분홍빛을 어려움 없이 볼 수 있는 곳이다. 저 가게가 생긴 건 대략 3년 전쯤이다. 그 전엔 그냥 빈 건물이었는데 그때는 케인이 검은색 장발을 땋고 다닐 시절이었고 그때 얘기를 꺼내면 케인은 그게 언제적 얘기냐면서 역정을 냈다. 하지만 그가 머리를 자르고 핑크톤으로 염색하자마자 저 가게가 들어섰는데 정비소 남자는 저 집 사장이 벽에 케인 머리를 달고 장사한다고 무지막지하게 놀려댔다. 놀리는 대상은 '저 집 사장'과 케인 둘이었다.

이런 이유로도 어마어마한 악감정이 생기고는 한다. 사소한 정보는 이만 차치하고 발소리가 완전히 사라진 걸 확인한 케인은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킨다. 여름이 다가오는 마이애미는 덥지만 계절에 맞지 않은 물건을 여전히 몸에 둘둘 감은 채다. 한쪽 다리를 어색하게 끌면서 훤하게 뚫린 정비소 입구까지 나온다. 남자의 이름이 적힌 간판은 옆 가게에서 발산하는 빛에 묻혀 보잘것없다. 일몰 시각에 가까워져 가로등이 드문 변두리는 둘 중 하나에 의존해야 한다. 멋지게 꾸며진 남의 집 조명이나, 낡고 허접한 우리 집 조명이나.

하여간에 한밤중보단 애매하게 해가 질 즈음이 궁상떨기에 더 좋다. 도심지의 활기는 없지만 생각을 정리하는 데 오히려 도움이 된다.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바다에서 오는 은은한 짠내가 처량하면서도 지금 그의 상황에 어느 정도 들어맞는다. 춥지도 않으면서 두른 담요를 여민 케인은 한적한 주변을 두고 오늘따라 유독 손님이 없는 건지 아니면 다들 자길 보고 도망간 건지 잠시 고민한다.

낮에 들었던 말을 곱씹으며 침통한 표정으로 내내 바닥을 쳐다보던 케인은 잠시 후 인기척에 고개를 든다. 리커 스토어와 반대편이니 남자는 아니다. 경계하듯 예민하게 머리를 돌리면 저쪽에서는 아직 그를 발견하지 못했다. 키가 작은 사람이다. 자기 또래 정도 되어 보이는데 뭔가를 들여다보며 두리번거리는 게 꼭 길이라도 잃은 것 같다. 간판의 조명을 따라오는 낌새를 보이던 그 사람은 마침내 케인을 발견하고 걸음이 빨라진다. 저거 지금 나한테 오는 건가? 의도가 뭐든 오늘은 사람을 만날 기분도 아니거니와 내보이고 싶은 꼬락서니도 아니기 때문에 케인은 모른 척 시선을 돌려버린다.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아니나 다를까 바로 옆으로 와 말을 건다.

"안녕! 여기서 일해?"

또랑또랑한 목소리다. 대체 뭐가 그리도 간절하기에 파이트 클럽에서 흠씬 두들겨 맞고 갓 쫓겨난 듯 서있는 자신한테 말을 거는지 도통 모르겠다. 대답을 안 하니 계속해서 귀찮게 한다. 두 번까진 무시한다. 세 번째는 뺨이라도 쳐줄까 하다가 그러다간 죽어버릴 체격이라 하지 못한다. 누군지도 모르는 이 사람의 모든 것이 부담스럽다. 녹색 머리, 금색 눈, 멀끔하면서 감각적인 스타일, 살갑게 다가오는 말투, 완전히 멋지게 꾸며진 남의 집 조명이다. 이대로 무시하다간 그대로 날밤을 새울 것 같아 케인이 까칠하게 답을 준다.

"뭘 쳐다봐?"

"그게, 사람을 둘 찾고 있거든. 한 명은 키가 이 정도에 커다란 가방을 메고 머리는······."

"몰라."

중간에 말을 끊었지만 모르는 건 사실이다. 이 정도로 예의 없었으면 갈 법도 한데 끈덕지게 들러붙는다. 원래는 같이 가려고 했는데 날 두고 먼저 가버리는 바람에······, 묻지도 않은 사연을 잘만 늘어놓는다. 그러면서 사람이 많이 찾는 곳이 있는지 묻는다. 관광지나 바다 같은. 몰라. 아까와 같은 부정적인 반응이 단칼에 나오니 멋쩍게 웃는다. 노란색 매니큐어를 발랐고 손에 쥔 종이 다발이 구깃구갓하다. 사진이다. 모습을 제대로 확인할 수 없는 두 사람이 찍혀있다. 묘하게 이상한 느낌을 받는다. 불균형하게 짚은 다리가 아프다. 양쪽에서 번쩍이는 거북한 광선과 눈빛에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르던 그가 고민 끝에 자비를 내어준다.

"25분."

"응?"

"바깥쪽으로 나가서 25분 정도 걸으면 바다가 있어."

그는 케인이 가리킨 방향을 보며 거리를 가늠한다. 아무리 봐도 이 동네 사람은 아니다. 도시에서 곱게 자란 도련님이 촌 동네에 갓 상경한 느낌에 가깝다. 이마에 얹은 노란색 선글라스는 제법 분위기를 내었으나 이 또한 과하게 치장되었다는 기분을 들게 한다. 아니, 노란색이 왜 이렇게 많아? 예민한 심경은 옆에 누구를 두었든 남몰래 씹도록 만든다. 방금 처음 만난 사람까지도.

정비소의 남자는 녹색 머리가 떠나기 직전에 돌아온다. 양손 가득 애들 먹을 것과 어른 먹을 것을 들고 오던 남자는 예상치 못한 뉴페이스에 놀라지는 않지만 관심을 보인다. 쉽게 표현하면 그가 그만큼 남들에게 쉽게 호감을 살 만한 인상이라는 뜻이다. 호감가는 녹색 머리는 케인에게 물어본 것을 남자에게 그대로 물어본다. 똑같이 모른다는 대답이 돌아오자 이제 바다로 나가볼 생각이라고 덧붙인다.

외로움과 비감을 푸는 데 또래와 어울리는 것보다 나은 것이 또 있을까. 남자는 케인의 두 손에 두둑한 비닐봉지를 들려주고는 친구에게 길 안내 좀 해주라며 충고한다. 케인의 표정이 대놓고 구겨진다. 남자는 싫은 티를 여과 없이 내는 케인의 옆구리를 꼬집는다. 이런 건 원래 동네 토박이가 해주는 거야. 저도 여기 이사왔어요. 10년 넘게 살았잖아. 손가락을 아래로 끌어당기는 짐의 무게가 무겁다. 알지도 못하는데 친구는 무슨. 녹색 머리가 나서서 거절해주길 내심 기대하는데 얘는 눈치도 없는가 보다. 동그랗게 뜬 눈이 마치 기대라도 하는 것 같다. 싫어요. 그러거나 말거나, 남자는 다리가 불편하면 차를 빌려주겠다며 열쇠를 가져온다. 들 손이 없으니 대신 녹색 머리에게 준다. 저놈이 차를 들고 튀기라도 할 가능성은 아예 생각하지 않는 듯하다. 혹은 저 가방에 사람 머리가 들어있을 확률.

"저 운전하면 안 되는 거 아시잖아요."

"저기, 내가 할 수 있어."

케인의 심성이 조금만 더 나빴어도 벌써 한 대 쳤다. 쓸데없는 말만 골라 하는 그를 케인이 확 째려본다. 남자는 쪼는 기색 하나 없는 그를 보고 흡족해하며 차 번호를 알려주고는 케인의 등을 떠민다. 어차피 일찍 돌아갈 생각은 없었는데 이런 식으로는 아니었다. 이럴 거면 차라리 일을 시키지! 남자는 그의 어깨를 펑펑 때리며 친히 주차된 차까지 모셔준다. 녹색 머리는 이미 문을 열고 기다리고 있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화도 안 난다. 이제는 하다 하다 모르는 사람 수발까지 들어야 한다. 가기 싫으면 여기 남아서 인생 얘기라도 들을 테냐? 미시시피에서 태어나서······.

"아빠는 짭새고 엄마는 히피고요, 예, 알다마다요."

"조심해서 다녀와, 케인!"

먼저 차에 타는 것을 보고 녹색 머리도 운전석에 오른다. 양쪽 문이 닫히는 소리가 확연히 다르다. 저놈은 단순하니 틀림없이 환기가 될 테다. 차가 느릿하게 출발한다. 모퉁이를 깔끔하게 돈 바퀴가 굴러 점점 멀어진다. 꽤 봐 줄 만한 운전 실력이 되겠다. 다리를 벌리고 불량스럽게 앉은 케인은 차창에 팔을 대고 턱을 괴며 옆 사람을 여러 번 흘겨본다. 살짝 열린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바람을 맞으면서 생각한다. 그나저나, 이 새끼 어디서 봤는데.

19XX년 6월 18일 오후 7시 54분

마이애미, 플로리다

버밀리온 해안도로

이거 참, 인상 한번 더럽게 무섭네. 옆에서 오는 시선을 의식하지 않으려는 이즈리얼이 최대한 운전에 집중한다. 처음 본 사람과 의도치 않게 동행하게 된 건 이쪽도 당황스럽지만 도저히 빠져나올 타이밍이 안 잡혔다. 왜냐하면 타인의 제안을 거절하는 건 무례하니까! 가시방석에 앉아서 엑셀을 밟아야 한대도 나쁜 인상으로 남는 것보다야 낫다. 저 케인이란 사람은 어느 쪽이든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나 본데 그건 어쩔 수 없다. 언제나 모든 사람이 행복할 수는 없다. 이건 최선의 선택이었을 뿐이다.

목적지로 향하는 동안 케인은 정말 필요한 말만 했다. 좌회전, 우회전, 계속 직진, 사연이 꽤 많은 모습인데 이 정도 해주는 것도 감사해야 할 테다. 가끔씩 중년 남자에게 받은 봉투를 부스럭거리고 이것저것 꺼내어 이즈리얼의 무릎 위에 무심히 던졌다. 짧은 바지와 맨다리 사이로 축축한 것이 닿아 확인하면 차례대로 보드카와 캔 콜라, 담배 한 갑이다. 그냥 받은 것을 나눠주는 착한 친구인지 아니면 운전하는 사람한테 보드카를 던져주는 미친놈인지 가늠이 안 된다. 아마 둘 다가 아닐까. 심상치 않은 몽타주를 근거로 후자에 더 가까우리라 짐작한다.

"저기, 케인? ···미안! 갑자기 이렇게 돼서. 이쪽으로 혼자 온 건 오늘이 처음이거든. 아, 난 뉴욕에서 왔어. 계속 거기 살던 건 아니지만 지금은 학교가 거기 있어서 그런 건데, 내가 여행을 좋아해서 여기저기 자주 돌아다니는 편이야. 플로리다는 엄청 어릴 때 와본 적 있는데 너무 오래돼서 잘 기억이 안나네. 그때 사진은 많은데 좀 가져올 걸 그랬나. 내가 찾는 사람들은 자연을 좋아해서 바닷가 근처에 가면 금방 볼 수 있을 텐데,"

이 한 문장에는 과장된 부분이 전혀 없다. 케인은 대사 하나가 한 줄이 넘어갈 때까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창밖으로 시선을 두거나 종종 얼굴을 흘기는 게 전부다. 좋다고 따라다니는 애들 외에는 전부 저런 반응이었기 때문에 이즈리얼은 어색한 분위기를 다루는 것이 괴롭지 않았다. 오히려 자기가 들러붙었으면 들러붙었지, 저렇게 싸늘하게 나와주니 피곤할 일이 덜하다. 불필요한 관심은 언제나 사람을 미치게 만드니까. 지금은 본인이 남에게 그러고 있는 듯하지만 그건 뭐, 일단 넘긴다.

해안 도로에 진입하자 차가 점점 많아진다. 개중에는 천장을 시원하게 까고 시끄럽게 라디오 볼륨을 키운 오픈카도 있다. 파도 소리에 맞춰 야자수가 흔들리고 줄지은 나무 뒤로 창백한 하늘을 등진 해가 노랗고 붉은빛을 내며 저문다. 모서리가 각진 차는 각자의 낭만을 즐기는 와중에 옆에 앉은 저 아이는 그렇지 못하다. 말이라도 잘못 붙였다간 트렁크에 자길 쑤셔 박을 것 같다. 이미 몇 명 묻은 것 같기도 하고. 괜한 오지랖은 제명을 재촉한다.

"너 왜 그렇게 다쳤어?"

하지만 내가 누구인가! 많고 많은 10대 중 제일 잘난 이즈리얼 아닌가! 마치 대본으로 짠 것처럼 도식화된 행동을 보여주는 것이 이미지를 유지하는 또 다른 방법이다. 자기 자신으로 살아남는 방식이기도 하다. 기대야 맞춰주면 그만이고 실망했다면 저쪽에서 먼저 떠나면 해결된다.

"음, 계단에서 굴렀구나? 아니면······. 떨어지는 책에 맞아서? 아, 혹시 하수구에 사는 악어랑 싸웠,"

"신경 꺼."

케인은 더 이상 자길 흘기지 않는다. 그동안 자길 싫어했던 애들과 행동이 똑같다. 째려보다가, 무시하고, 퉁명스럽게 대답을 내던지고, 얘는 나의 무엇이 마음에 안 들었을까. 되도록 물어보고 싶었지만 분쟁으로 이어봐야 좋을 건 없다. 그래도 부풀어 오른 콧등과 절던 다리는 조금 걱정된다. 제 발로 병원에 갈 인간상은 아니다.

생각보다 도로가 막혀 도보로 25분 거리를 차를 타고 30분이 넘게 걸렸다. 케인과 이즈리얼이 좁은 공간에 오붓하게 갇혀있던 시간이기도 하다. 주차할 자리는 있지만 해변에 사람이 꽤 많다. 해가 졌는데도 자리를 깔고 누운 사람이나 꼴불견인 연인, 사이드에 설치된 계단에서 버스킹을 하는 사람이라든지 친구도 뭣도 아닌 관계로 청승맞게 해 지는 바닷가에 온 두 사람이나. 이들이 저들에게 흥미가 없는 것처럼 두 사람도 서로에게 흥미가 없다. 차에서 내린 이즈리얼이 기지개를 쫙 켜며 몸을 늘린다. 케인은 내리지 않는다. 이즈리얼은 바닷바람에 처연한 심정이 될 여유도 없이 케인을 신경 쓴다.

"길 알려줘서 고마워. 먼저 가도 돼!"

"돌아가는 길 모르잖아."

"그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기다려 달라고 하기 미안해서."

잠시간 말이 없던 케인이 차에서 내린다. 이즈리얼은 기다리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인다. 생긴 건 저래도 나름 착한 사람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이즈리얼은 선글라스를 가방에 접어 넣고 주변을 둘러본다. 왠지 모르게 익숙한 지점이 있으면 사진과 장소를 대조한다. 두 사람이 찍힌 사진은 이곳과 유사한 바다를 배경으로 한다. 특정 위치에 사진을 들어 올리니 사진상의 지형과 묘하게 엇나간다. 여긴 아니다. 실망감이 몰려오지만 조금만 더 찾아보기로 한다. 버스커의 기타 연주와 관객의 호응은 아무런 위안도 되지 못한다.

사진을 넘긴다. 주차장을 배경으로 차 앞에서 찍은 사진이 나온다. 찍힌 사람은 같다. 주차장을 향해 사진을 가져다 대지만 역시 들어맞는 지점이 없다. 오래 전 사진이니 디테일한 부분이 바뀌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만 그렇다 해도 너무 다르다. 바짝 선 이즈리얼의 입꼬리가 그대로 굳는다. 괜찮다. 바다는 이곳 말고도 더 있다.

낯빛이 급속도로 어두워지는 걸 느낀 이즈리얼이 케인의 눈치를 본다. 그는 차에 기대어 도저히 재미를 못 느끼는 눈빛으로 바다를 보고 있다. 종종 눈이 마주쳤으나 시선이 오래 가지는 않는다. 확실히 여행을 오거나 사람을 찾는 것치고는 어색해 보일 테다. 하지만 저 애는 누구처럼 남의 사연을 캐내려 참견하는 사람은 아니다. 적어도 자기가 보기엔 그렇다. 무엇보다 저쪽도 상당히 되알진 현생을 겪은 것 같기에 진정이 필요할 것이다.

사진 몇 장을 더 뒤진 이즈리얼은 사진사가 없는 관광객들에게 불려 간다. 제게 내밀어지는 카메라의 둥그런 렌즈를 보고 덜컥 겁이 나다가도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받아 든다. 차라리 찍는 입장이 되는 게 좋다. 이즈리얼은 사람 좋은 미소로 여섯 명의 사진을 찍어주며 입바른 소리도 놓치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제 좀 가, 속으로 저주한다. 케인은 그새 어디 갔는지 안 보인다. 귀에 들리는 버스킹은 이제 절정에 달한다. 카메라를 맡긴 관광객은 떠날 생각을 않는다. 실망은 분노가 되고 분노는 무력감으로 변질된다. 매력적이게 샐그러지는 웃음은 그런 심정을 대변하지 못한다.

이즈리얼은 불청객에 시달리고 한참이 지나서야 차로 돌아온다. 케인은 없다. 혼자 남은 틈을 타 눈을 감고 삼십까지 센다. 학교 근처를 조금만 벗어나도 자길 아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실로 다행이면서 불행이다. 귀찮은 사람들에게 붙잡히긴 했지만 어차피 저들은 자길 기억하지 못한다. 평소보다 빠르게 숫자를 세고 눈을 뜬 이즈리얼은 룸미러로 다시금 모습을 확인한다. 피곤한 기색이 있지만 이 정도면 봐줄 만하다.

케인은 그로부터 약 10분 뒤에 돌아왔다. 기타 소리가 멎고 박수갈채가 끝나고 한참 뒤다. 어디 갔다 왔어? 신경 꺼. 또 다시, 케인이 자연스럽게 창밖으로 시선을 고정하면 이즈리얼은 차를 출발시킨다. 차체가 흔들리며 비닐봉지가 부스럭댄다. 안에 가득 담긴 유리병이 서로 부딪히며 달그락거린다.

"사람 정말 많더라! 일찍 왔으면 더 구경하는 건데. 항상 거리가 좀 가까웠으면 한다니까."

"······."

이즈리얼의 원맨쇼가 다시 시작한다. 추임새도 없는 대화를 혼자 잘도 이어간다. 케인은 전혀 듣지 않는 표정을 한다. 사실 다 듣고 있다는 사실을 이즈리얼은 잘 안다. 예상보다 알기 쉬운 타입이다. 쉴 틈 없이 지속되는 그의 말이 귀찮았는지 케인은 버튼을 툭툭 눌러 라디오를 켠다. 오히려 분위기만 더 띄우는 격이 된다.

https://youtu.be/DjcCQsRCHUs?si=2vLe0H8j-s4kYPvF

그럼 나도 신난 티를 내줄까. 이즈리얼의 말이 세 배로 많아진다. 케인은 헛웃음을 치며 살짝 벗겨진 후드를 다시 푹 눌러쓴다. 그 모습을 본 이즈리얼이 소리내어 웃는다. 우리는 이제 자기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한다.

돌아오는 시간은 가는 시간보다 빨랐다. 두 사람은 정비소에 도착하고 이즈리얼은 뒤도 안 돌아보고 차에서 내리는 케인을 붙잡는다. 케인이 무릎 위로 올려두었던 술과 담배를 돌려준다. 이건 안 받아도 돼, 너 가져! 물론 이 말에는 케인이 술담배를 모두 한다는 전제가 들어가 있으며 밝히지 않은 조롱의 의미도 있다. 거기 두던가. 케인은 매몰차게 정비소 안으로 들어간다. 싫은 티를 팍팍 내면서도 필요할 땐 착실히 대답을 해주는 게 재밌다. 중년 남자는 보이지 않지만 안쪽 불이 켜져 있는 걸 보니 아직 남아있긴 하는가 보다.

가방을 챙기고 보닛 위에 열쇠를 올려둔 이즈리얼은 멀어지는 케인의 뒤통수에 대고 인사를 남긴다. 같이 가줘서 고마워! 아저씨한테도 고맙다고 전해줘! 또 보자, 케인! 돌아보지 않는데도 계속해서 손을 흔든 이즈리얼은 완전히 혼자 남겨지고 나서야 손을 내린다. 한껏 당겼던 입 근육이 뚝 떨어진다. 감정 없는 표정으로 변두리를 둘러보고 쓰레기장을 찾는다. 정비소로부터 천 걸음 멀어지니 쓰레기통 하나가 나온다. 불투명한 플라스틱 상자 앞에 선 이즈리얼은 가방을 연다. 한구석에 소중히 놓인 사진과 카메라 옆으로 주워담은 편지가 아무렇게나 흐트러져있다.

미안 샐리, 미안 낸시, 미안 메리, 미안, 어, 넌 누구지?

봉투에 적힌 이름 하나하나에 사과를 건네며 편지를 쓰레기통 안으로 털어 넣는다. 가득 찼던 가방이 비고 비어있던 쓰레기통이 가득 찬다. 깜빡거리는 가로등은 남은 이름을 채 읽지 못하게 한다. 안됐네, 오늘은 좀 바빠. 하나도 남기지 않고 전부 폐기한 이즈리얼은 미련 없이 변두리를 떠난다. 좋지 않은 기분이다. 가방에 넣어둔 콜라 캔이 넘어진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내용물이 찰랑거리며 언젠가 터질 것을 예고한다. 본인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러지 말아야 한다. 폭발할 것을 알더라도 뚜껑을 따지 않으면 아무 이상 없다. 본인도 마찬가지다. 슬슬 밤이 온다. 늘 그랬던 것처럼 잘 곳은 어디든 있을 것이다.

약 1시간 전

19XX년 6월 18일 오후 6시 24분

마이애미, 플로리다

다이너 "블루 스왈로우"

싸구려 다이너의 화장실에선 대마 연기가 난다. 젖은 풀과 실리콘 태우는 향이 섞인 비릿하고 거북한 냄새는 세면대에서 속을 비울 명분이 된다. 물얼룩이 남은 거울 앞에서 얼굴을 씻은 아펠리오스는 거무스름하게 그늘진 눈 밑을 매만지며 뒤편에서 다가오는 희뿌연 기체의 농도를 가늠한다. 생존하는 데 과연 역한 자극도 필요한지 축축한 손으로 이유를 하나하나 헤아린다. 신체고 정신이고 따질 것 없이, 반응이라야 클리셰가 된 묵은 소설보다는 기관지에 직접 주입하는 마약성 물질이 더 확실할 게 당연하다. 역겨움마저도 사람을 살게 만든다면 아펠리오스는 단 하나의 선택을 해야 한다.

그는 손 모양으로 물때가 벗겨진 세면대 가장자리를 잡고 숨을 크게 들이쉰다. 익숙한 듯 낯선 냄새가 몸속 비어있는 모든 부분에 들어찬다. 담배를 피울 때처럼 속이 시원해지는 느낌은 없지만 그렇다고 뜨끈하지도 않다. 예상보다 못할 짓은 아니었던지 아펠리오스는 두 번째 숨을 들이켠다. 어렴풋이 머리가 띵한 기분이 들고 주름진 장기 내부 사이사이로 신체에 침투해서는 안 될 성분이 들러붙는다. 진득한 향이 콧속에 오래도록 남는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좆같은 냄새. 하지만 싫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그렇지, 이런 기분이 있더랬지. 중요한 것을 발견한 아펠리오스는 이 장소를 쉽게 떠나지 못한다. 현실에서 멀어지려 할 때 몸은 한 번씩 신호를 주었다. 급격한 토기가 올라와 상체가 앞으로 고꾸라진다. 고개를 처박고 여러 번 헛구역질한다. 나오는 건 없다.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내지른 뒤 닫힌 화장실 칸이 신경질적으로 덜컹거리고 나서야 밖으로 나간다. 저건 꺼지라는 의미다.

몇 곳을 돌았지만 목격한 바는 비슷하다. 창백한 하늘색 타일, 깜빡이는 불, 녹색으로 변한 지저분한 거울, 모서리가 제대로 붙지 않은 포스터와 제대로 제거되지 않은 스티커 자국, 질 낮은 한량들이 락카 스프레이로 적어 둔 상스러운 단어와 전화번호. 가끔씩 잠긴 칸에서는 수상한 소리나 연기가 흘러나온다. 날것의 모습과 어린애들의 한심한 짓거리엔 관심 없으나 마이애미는 시청각적 자극을 찾기 좋아 아펠리오스는 전국을 돌다가도 결국 이곳으로 돌아왔다.

언제나 문이 열려있는 현지 다이너는 창밖으로 바다가 보인다. 주크박스는 술병에 얻어맞아 흠집이 났고 기꺼이 돈을 지불한 사람의 취향에 맞는 노래를 찾아낸다. 낡았지만 나름의 독자적인 분위기를 쥐고 있는 젊은 장소다. 낯선 사람이 옆을 지나가는 것만으로 현재를 즐기는 이들의 시선을 받을 수 없다.

https://youtu.be/z2qoihbzc3E?si=wndIx-XDEgezdHZB

아펠리오스의 굽 달린 워크 부츠가 반들거리는 격자 바닥 위에서 또각거린다. 오랜 세월 발에 밟혀 흐릿해진 무늬에 빨간색과 보라색 조명이 비친다. 식당은 만석이다. 그는 기타와 가방을 기대두었던 바 테이블 앞으로 조용히 돌아온다. 새빨간 에나멜 가죽이 씌워진 둥그런 철제 의자는 등받이가 없고 높이가 높지만 아펠리오스는 발을 충분히 땅에 맞댄다. 비가 샌 흔적이 있는 나무 천장은 적갈색 칠로 가려버렸는데 그의 머리 바로 위에도 채 가려지지 않은 빗자국이 있다.

그는 말없이 손짓만으로 음식을 주문한다. 바로 옆 벽면에 배치된 다트판과 주크박스에서 나오는 음악 탓에 소리를 지르는 정도가 되어야 겨우 들리는 수준이다. 때문에 괜한 일로 힘 빼지 않으려는 현대인의 마음을 잘 아는지 주문을 받은 직원은 아펠리오스가 입을 단 한 번도 열지 않아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아펠리오스는 뒤집힌 소스 통과 냅킨 따위가 놓인 테이블에 기대며 턱을 괸다. 가장 끝자리에 앉아 복도처럼 길게 늘어진 다이너 내부를 내려다보듯 관찰한다. 그와 비슷한 나이대 손님들로 꽉 찬 자리는 가족보단 친구 단위가 많다. 수영복 차림부터 웃통을 깐 사람도 더러 존재하는데 오히려 환영받는 분위기다. 흘려 쓴 글씨로 만들어진 네온사인은 벽이고 천장이고 빈 곳 없이 붙어 전력을 알차게 낭비한다. 연식이 되어 보이는 고장난 주유기와 짝퉁 마이애미 돌핀스 유니폼, 온갖 영화 포스터도 장식했다. 높은 잔에 담겨 나오는 쓰레기에 가까운 음료는 혓바닥을 원색으로 바꾼다. 누구는 애먼 식탁을 치며 웃고 다른 누구는 창밖으로 지나가는 사람에게 추파를 던진다.

총체적 난국이다. 무엇 하나 흥미를 끄는 것이 없고 그런 와중에 저들은 모두 행복하다. 사람은 이런 것을 두고 마땅히 행복을 느껴야 한다. 자연스럽게 섞일 수 없는 아펠리오스는 선곡이 잘못되었음을 느끼고 테이블 위로 시선을 내린다. 작은 거미 하나가 가로질러 간다. 손바닥으로 내리친다. 굵직한 반지에 막혀 살이 평평하게 닿지 않아 그 사이로 거미가 빠져나간다. 발이 꽤 빠르다.

전자레인지에 돌린 음식이 신속하게 나온다. 장식을 얹지 않은 와플 한 접시를 주문한 아펠리오스는 거미와 악어를 기억하며 김이 나는 밀가루 덩어리를 뒤적거린다. 속에 있는 것을 다 게우고 왔다면 조금은 나았겠지만 지금 상태로는 전혀 먹고 싶지 않다. 가장자리를 조금 떼어 입에 넣는다. 혀 위로 뜨거운 조각이 올라온 게 전부이고 아무런 맛도 나지 않는다. 이를 썩게 만들면 나을까. 함께 나온 시럽 그릇을 뒤집어엎어 빵을 축축하게 적신다. 포크의 벌어진 삼지창 사이로 진득한 시럽이 천천히 흘러내린다. 똑같이 입에 넣는다. 뜨거운 조각이 흐물거린다. 아까 맡았던 대마 맛이 난다.

음식은 제쳐두고 앞니로 포크를 문 아펠리오스가 나른하게 몸을 기대려다 등받이가 없는 것을 깨닫고 몸을 바로 한다. 대신 거미가 지나간 길 위로 팔꿈치를 댄다. 마지막으로 뭔가를 먹은 게 어제 점심이다. 비슷하게 생긴 식당에서 주문한 차가운 푸실리는 고무 맛이 났다. 고무 아니면 흙, 다리 여덟 아니면 넷. 그가 사는 세상은 대강 그러했다. 흉부를 두들기는 베이스도 현실을 바꾸지는 못한다.

목을 수술한 의사는 이 모든 게 기분 탓이라고 했다. 갑작스러운 신체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한 심리적 작용이라고. 아펠리오스가 외부 자극에 둔감해진 것은 성대에 생긴 복잡한 문제를 제거한 뒤부터다. 젊은 날의 혹사로 예전 목소리는 돌아오지 않았고 작은 소리와 지리멸렬한 감탄사 외에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입을 닫게 된 후로 아펠리오스는 뇌에 안개가 끼는 듯한 증상을 보였다. 간접은 물론 직접적으로 신체에 닿는 열이나 고통 따위에도 그렇다 할 반응을 내지 않게 되었다.

의사는 이것이 단지 상실감에서 오는 우울 증후라고 진단했다. 신체에서 성대 외에 달라진 점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고 덧붙이면서. 그러나 와닿지 않았다. 인간에게 목소리는 곧 감정이다. 감정은 감각으로부터 나오고, 산출이 없으니 투입을 아무리 증가시켜도 아펠리오스는 무엇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공허함만 남았다. 말 그대로, 무엇도 없이 속이 비어버린 상태였다. 한계까지 불어댄 풍선처럼 품은 것 없도 없이 신체는 착실하게 무너졌다.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다니. 세상은 그대로일지언정 아펠리오스는 많은 것이 변했다.

가상 인물의 죽음도 사랑도 복수도 구역질나는 냄새도 달콤한 식사도 무드 있는 음악도 해가 지는 바다와 북적이는 식당의 열기도 아펠리오스에겐 아무런 감상을 남기지 않는다. 음식의 절반 이상을 남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트판 앞으로 간다. 탁한 붉은색 눈은 삼각형과 사다리꼴 면적에 번쩍번쩍 들어오는 빛을 투과시키지 못한다. 고민하지 않고 핀을 던진다. 20점짜리 트리플 라인에 연달아 3개가 꽂힌다. 최고점! 모르는 사람들이 환호한다. 그는 아무렇지 않다. 왕좌에서 내려와 값을 치르고 짐을 챙긴다. 다이너를 떠나기 전 주크박스의 노래를 바꾼다. 장르가 하드록으로 바뀐다. 기계 겉면에 난 흠집을 손톱으로 긁어보다가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나간다. 여긴 거미가 살 만한 곳이 아니며 당신들은 많은 것을 느끼길 바란다.

19XX년 6월 18일 오후 7시 54분

마이애미, 플로리다

골든 쇼어스 해변

임종이 가까워지는 오토바이를 타고 아펠리오스는 가장 가까운 바다에 도착한다. 교통체증과 약간의 시비가 있었으나 큰 문제는 아니다. 그의 가방에는 "우연히도" 총이 들어있었고 잘 빠진 검은색 기체를 보여주니 모든 분쟁이 해결되었다. 대화가 조금만 길어졌어도 목적지를 바꾸어 6피트 구덩이를 파야 했을 것이다.

일찍이 신발을 벗고 모래사장에 들어선 아펠리오스는 깨진 조개 조각을 피하지 않고 물가 가까이 다가간다. 바닷물은 하얀색 거품을 내며 결이 치고 둥글게 말린 가장자리는 파도가 되어 발치까지 밀려오다가 모래에 먹혀 사라진다. 그는 발바닥이 젖는 기분을 느끼며 바짓단을 걷고 한 발짝 물 안으로 들어간다. 복사뼈까지 잠긴다. 이곳 날씨는 춥지 않아서 밤낮 할 것 없이 발을 담구고는 했는데 예상과는 사뭇 다른 느낌에 씁쓸함 대신 입속으로 대마 향을 느낀다. 수면을 기점으로 물에 잠긴 살과 아직 젖지 않은 피부 사이의 간극이 허전하다. 발밑으로 부스러지는 거친 모래의 질감도 이와 유사하다.

이 바다는 입구로부터 좌측에 계단이 설치되어 있고 타이밍을 잘 맞추면 옆으로 곧장 바다와 석양이 보인다. 주로 최적의 포토 스팟을 찾는 사람이나 버스커가 애용했고 아펠리오스도 그 중 한명이다. 공연자 없이 비어있는 계단의 중간쯤 적당히 자리를 잡은 아펠리오스는 기타와 최소한의 장비만 꺼내어 연주를 준비한다. 학교를 중퇴한 그에게 남은 시간마다 전국을 돌며 버스킹하는 것은 관행이었다. 노래를 부를 수 없게 된 후에도 멈추지 않았다. 버스킹은 어린 아티스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예술 행위였으며, 종종 돈을 쥐여주고 가는 사람도 있어서 안정적인 수입이 없는 그에게는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로 필요한 일이기도 했다. 아펠리오스는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다. 자리에 앉을 때부터 고개는 들지 않는다. 자판을 짚으면 시선이 몰리고 연주를 시작하면 인파가 몰린다. 화려한 기타 리프에 사람들의 기대가 한껏 부푼다. 두근거리지도, 부담스럽지도, 두렵지도 않다.

https://youtu.be/WnJFQEHsSrU?si=n5-TBGZRNI6Nf-z6

유일하게 정신을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시간. 아펠리오스는 이 순간을 좋아했다. 어리숙한 나이의 철없는 표현으로 인생을 사는 이유 같았다. 가장 즐겁고 가장 힘들면서도 가장 심장을 뛰게 하는 것에 가까웠다. 그때와는 다른 방향으로 성장해 버린 지금, 예전의 의미를 찾고자 많은 시간을 할애했으나 결국엔 되찾을 수 없는 것도 있다. 아펠리오스가 버스킹을 하는 내내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들지 않는 이유는 여기서 기인했다. 이젠 교감이 없다. 음악과도 관중과도 교감이 없다. 완벽한 손기술도 박수도 환성도 보고 듣기에만 번지르르하여 어떠한 울림도 주지 못하니 아펠리오스는 수십 개의 시선을 받는 동안 머리를 비우면서도 많은 생각을 한다. 삶의 전부였던 이것을 언젠가 포기하고 싶다.

이후 어떻게 해야 할지는 깊이 고민하지 않는다. 바로 앞에 걸어들어갈 수 있는 바다가 있는데 무엇이 걱정인가. 단단한 기타 줄을 쥐어흔들며 살다가 찰랑이는 물살에 끝을 맺는 것도 제법 어울릴 테다. 공연이 무르익고 눈가를 아른거리던 태양 빛이 완전히 내려앉는다. 긴 머리카락에 앞이 가려진다. 언뜻 빠져들듯 하면서도 간간이 들리는 셔터 소리가 그를 현실로 끌어올린다. 좋지 않으면서 좋은 징조이다. 적어도 맨정신으로 연주를 끝낼 수 있다.

아펠리오스는 항상 첫 곡과 마지막 곡을 같은 것으로 배치했다. 언제나 처음으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을 내고 싶어서 시작한 것이었지만 이제는 아무런 가치가 남지 않는다. 분위기가 절정에 가까워지고 슬슬 행위 자체가 지겨워지자 그는 다시 첫 곡을 찾는다. 연주를 가속하고 같은 마디를 연속으로 반복하며 마음대로 곡을 바꾼다. 생각 없는 관중들은 그저 격정적인 전개와 군더더기 없는 실력에 열광한다. 저들은 음악을 논할 자격이 없다.

처음이자 마지막 곡이 끝나고 한참이나 박수 소리가 이어진다.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은 아펠리오스는 사람들이 전부 떠날 때까지 움직이지 않는다. 저들은 이 또한 하나의 퍼포먼스로 여기며 또 다른 구경거리를 찾아 떠난다. 멍청한 팬을 둔 것이 장점으로 작용하는 순간이다. 인기척과 가까이서 들리던 말소리가 사방으로 흩어지고 나서야 아펠리오스는 고개를 든다. 정면에 서 있던 한 사람과 눈이 딱 마주친다. 이미 해가 진 탓에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으나 어째서인지 눈이 마주쳤다는 것은 확신할 수 있다. 자신을 끝까지 지켜보고 있던 구경꾼인지, 서로 마주 보고도 같은 위치에 못을 박고 움직이지 않는다. 상당한 시간 동안 잘 닿지도 않는 눈싸움을 하고 저쪽에서 먼저 자리를 뜬다. 아펠리오스의 시선이 뒷모습을 따라간다. 이상한 사람이다. 그러나 특별히 신경 쓸 건 없다. 저것 또한 무의미한 기타 소리에 동조한 멍청이 중 하나다.

19XX년 6월 18일 오후 9시 3분

마이애미, 플로리다

???

혼자 남겨진 아펠리오스는 풀어둔 것을 정리하고 발을 씻는다. 발가락 사이로 들어간 잘은 모래가 지저분하게 떨어진다. 찬 바람이 불긴 하나 이 정도면 따뜻한 편이다. 물기를 말리고 신발을 신은 뒤 바이크에 짐을 싣는다. 주행 시간이 길었으니 오늘은 잠을 자야 한다. 아펠리오스는 아직까지도 우정과 사랑이 가득한 바다를 돌아보지 않는다. 홀로 철 지난 여름 노래가 들리는 도로를 건너며 적당한 장소를 찾는다. 적당히 깨끗하고, 적당히 조용하고, 적당히 안전한 곳. 이왕이면 왕래가 적은 곳. 옆구리에 꼈던 바다를 내려놓고 도시 외곽에 도착한 그는 좁은 골목을 고른다. 낡은 상점가의 골목과 비슷하지만 여기는 악어가 나올 하수구가 없고 벽면이 깨끗하다. 그에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침실이다.

오토바이에서 내린 아펠리오스는 안쪽으로 주차한 뒤 맨바닥에 털썩 주저앉는다. 짐을 지키지도 않고 실어둔 그대로 둔다. 약 3시간 정도 자면 충분할 것이다. 눈을 감기 전 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찾던 그는 돗대인 것을 확인하고 불붙이는 일 없이 도로 집어넣는다. 벽에 머리를 기댄 아펠리오스는 생각한다. 역시 여긴 최악이다. 하지만 괜찮다. 오지 않을 악어도 강도도 미래도 총 한 정이면 모두 해결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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