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애미 신드롬 04
켄펠잊 논씨피 하이틴 AU
알고 계셨나요?
- 전편: https://glph.to/oebi1n
- 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 미국 배경. 모브 캐릭터 등장&날조&개인적인 해석이 많습니다.
- 분량상 잘린 장면이 많아… 각 장면이 이어지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굿모닝, 좋은 아침입니다! 저는 진행을 맡은 하워드 스턴이고, 이쪽은…….” “릭 디즈입니다.” “좋아요, 릭. 오늘은 하늘이 참 멋진데요, 안 그런가요?” “그렇죠, 꼭 소나기라도 내릴 것처럼요.” “우산 챙기셨어요?” “대신 차를 타고 왔죠. 차가 없다면 우산을 챙기는 게 좋을 거예요.” “둘 다 없는데, 이런!” “급여는 다 어디로 가죠?” “그건 중요한 사항이 아니죠. 이걸 듣는 청취자분들은 반드시…….”
Miami Syndrome 04
19XX년 7월 23일 오전 10시 3분
마이애미, 플로리다
브라이트웰 병원
케인은 병원 로비에 앉아 다리를 덜덜 떤다. 아펠리오스가 시술인지 수술인지 처치인지에 들어간 지 30분이 넘어간다. 피부가 찢어진 건 집에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서 본인은 죽어라 안 가던 병원에 그를 끌고 왔다. 상처가 꽤 깊어 몇 바늘 꿰매야 한다는데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된 소견은 못 들었다. 아펠리오스는 아프거나 무섭지도 않은지 평온한 표정 그대로 안쪽으로 들어갔다.
아니, 좋게 생각하자. 안 그래도 삭고 연약한 몸에 그렇게 퍼맞았는데 뼈 한군데 안 부러진 게 용하다. 다섯이 한꺼번에 팼으면 완전 죽음이었을 거다. 아펠리오스는 건강 대신 패기를 타고났다고나 할까.
오히려 뼈가 다친 쪽은 케인이다. 저번에 맞았던 곳을 또 맞아서 겨우 나으려던 발목이 다시 아작났다. 완전히 부러진 건 아니지만 금이 갔다고 했나.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관절에 지지대를 대야 했다. 안 그래도 빨갛던 왼쪽 눈은 더 난리가 나 안대도 찼다. 라이트 훅에 얼굴을 정통으로 맞아 눈깔이 터질 뻔한 것을 기합으로 겨우 살았다. 케인에겐 상당히 곤란한 처사였다. 걷질 못하느니 자전거를 못 타느니 하는 문제를 떠나서, 아버지가 오기 전까지는 나아야만 했던 상처가 더 깊어졌다. 이미 학교 건으로 연락이 갔을 텐데 이런 일까지 갖다 얹고 싶지는 않다.
잠시 후 눈가에 흉한 처치를 받은 아펠리오스가 나온다. 모랫바닥을 구르면서 날카로운 것에 긁히기라도 했는지 눈썹에 길게 스크래치도 생겼다. 케인은 속이 상한다. 결국 자길 위한 일이었다지만 꼭 그런 방식이어야만 했나. 아펠리오스는 나왔다는 제스쳐조차 하지 않고 멀리서 멀거니 케인을 바라보며 서있다. 이미 병원비를 지불한 케인은 아펠리오스를 향해 인상을 한 번 쓰고 아무 말 없이 혼자 밖으로 나가버린다.
걸음 속도가 현저히 느려졌기에 아무리 열심히 걸어가도 아펠리오스는 금방 따라잡는다. 케인은 괜찮냐고도, 왜 그랬느냐고도 묻지 않는다. 단지 발걸음을 재촉할 뿐이다. 그런 그를 아펠리오스가 툭 친다. 케인이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홱 돌린다. 화가 단단히 난 표정이다. 아펠리오스는 슬픈 사람은 몰라도 화난 사람은 어떻게 달래주어야 하는지 아직 모른다. 까짓거, 일단 아무거나 해 보면 된다.
‘한 대 쳐.’
“뭐?”
‘화난 만큼.’
케인은 기가 막히다. 지금 뭣 때문에 화가 났는지 전혀 파악하지 못하나 보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오히려 화가 풀리는 수준이다. 하지만 이제 이마저도 상대하기에 벅차다. 아펠리오스는 그가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케인은 분명 그렇게 생각했다.
‘때리라니까.’
“싫어.”
‘하라고 했잖아.’
“싫다고 했잖아!”
끝까지 뻗대니 아펠리오스가 먼저 케인을 때린다. 난데없이 얻어맞은 케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맞은 부위를 쓰다듬더니 바락 화를 낸다.
“또 뭐 하는 짓이야?”
‘이래야 네가 날 때릴 구실이 생기지.’
“너는 그딴 식으로 밖에 해결을 못해?”
‘돈은 줄게.’
“내가 지금 돈 때문에 이러는 것 같냐고!”
그러니까 한 대 치라니까. 아펠리오스는 끈덕지게 따라붙으며 케인을 종용한다. 케인은 금방 터질듯한 불안정한 화를 애써 가라앉히려고 노력하며 그를 무시한다. 분명 당시에는 해방감에 더하여 아펠리오스에게 고마움까지 느꼈는데, 지금은 또 왜 이럴까. 내가 때리면 넌 죽어. 마지막 자비라도 되는 것처럼 목소리를 차갑게 끌어 내린다. 아펠리오스는 진심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어떨 때는 있는 그대로 감정을 드러내더니 지금은 또 왜 아니란 말인가.
먼저 가버리는 케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아펠리오스는 그의 옷깃을 잡는다. 다친 발목이 금방 멈추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몸이 앞으로 슬 기울어졌다가 올라온다. 이 기분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 지 모르는 케인이 처연한 얼굴로 뒤를 돌아본다. 아펠리오스는 그의 손을 끌어 주먹을 쥐여준 뒤 어서 하라는 듯 턱짓한다. 케인은 그 의미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래도 되는 구실? 세상에 그런 게 있던가. 케인은 쥐고 있는 주먹으로 얼굴이라도 갈길 것처럼 아펠리오스의 얼굴 주변을 맴돌다가, 이내 가슴팍을 툭 밀어버리는 것으로 끝낸다. 아펠리오스의 상체가 아주 미세하게 뒤로 밀린다.
“그러지 마.”
“…….”
“다시는.”
케인은 바늘과 실이 지나간 피부를 몰래 살피면서 홱 돌아서 버린다. 이게 뭐야, 진짜…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떠난 케인을 보내고 아펠리오스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있다. 영원한 이별이라도 되는 양 쓸쓸하지만 케인이 곧 자전거를 끌고 온다. 두 사람은 너덜거리는 눈과 덜렁거리는 발목에 개의치 않고 자전거를 타고 왔다. 택시라는 존재를 모르는 것 같다.
앞자리에는 아펠리오스가 앉는다. 그는 한 다리로 지탱하며 자전거를 비스듬히 세운다. 케인은 잘 들리지 않는 다리를 높게 세우고 뒷자리에 앉는다. 아펠리오스는 곧잘 케인의 허리를 붙잡고 동승했지만 케인은 등을 맞대고 탄다. 아펠리오스의 넓지 않고 뼈가 선 등이 케인의 단단한 등에는 낯설다. 동시에 잃을 것 없이 구는 아펠리오스에 관해 생각한다. 케인의 눈으로 보기에 그만큼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이 또 없는데, 뭐가 아쉽다고 저러는지 알 길이 없다. 아펠리오스는 케인이 간혹 질투했던 제 재능을 몰라본다. 마냥 답답한 일이다.
혹은 그래야만 했던 사연이 있다든지. 서로의 과거를 묻지 않은 그 사람에게 남은 건 오로지 추측뿐이다. 하지만 누구도 진실을 궁금해하지 않는다. 지금 있는 건 지금의 우리이므로, 지난날이 후회를 남겼을지언정 훗날에 되물을 것이 아니다.
“펠.”
케인은 아펠리오스의 이름을 처음으로 줄여 부른다.
“너 총도 쏠 줄 알아?”
‘몰라.’
“근데 어제는 쐈잖아.”
‘장난이었어.’
결론부터 말하면 그건 장난감이단다. 방아쇠를 당기면 종이 폭죽이 터지는 총 모양 장난감. 근데 안에서 뭔가에 걸리기라도 했는지 소리만 나고 폭죽은 안 터졌다. 때는 밤이었고 정교하게 잘 만든 모양새라 충분히 착각할 만했다. 아펠리오스가 그리 말하니 케인이 벙찐다. 자기는 지금 장난감 총을 가지고 사람을 죽일까 봐 제발 그러지 말라고 빌빌 기었던 것이다. 간신히 돌아오려던 얼탱이가 다시 나간다. 너무 어이가 없으면 화도 나지 않는다고, 케인은 그저 모든 부조리에 통달하며 팔꿈치로 아펠리오스를 퍽퍽 친다. 멍든 곳에 맞은 아펠리오스는 자전거를 곧지 않게 움직인다. 사실 케인은 저 말조차 농담이 아닐까 생각한다. 결국 진실은 알 수 없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아펠리오스는 단 한발 남은 총알을 케인을 위해 썼다는 것이다. 하늘이 어둡고 먹구름이 낀다. 일기예보를 확인한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곧 비가 오리란 것은 모두가 확신할 수 있다.
같은 시각
19XX년 7월 23일 오전 10시 3분
뉴욕시, 뉴욕
노스이스트 거리 158번지
상처를 방치했더니 진물이 난다. 반바지 밑으로 드러난 피부가 모두 뒤집어졌다. 연석에 박은 무릎과 아스팔트에 시원하게 갈린 종아리는 보는 사람까지 눈살을 찌푸릴 정도로 흉하다. 그놈의 보드가 문제다. 소독은 아프고 아픈 건 무서우니 대충 연고를 바르는 것으로 대충 때운다. 밖은 이슬비가 내리고 빗방울이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린다. 분명 창문을 모두 닫았는데도 비리고 축축한 물 냄새가 난다.
구급상자를 정리하던 이즈리얼은 문득 마당에서 인기척을 느낀다. 신문 기사가 돌고 난 이후로 누군가 집을 기웃거리는 것은 예삿일이었기에, 이즈리얼은 빈틈없이 내려두었던 블라인드를 살짝 벌려 마당을 확인한다. 차 소리가 들렸던 것도 같다. 아는 얼굴이 보이면 집에 없는 척 하려던 이즈리얼은 진짜로 아는 얼굴이 보이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뜻밖이다.
“삼촌?”
거의 한 분기 만에 얼굴을 본다. 이즈리얼의 삼촌 리메르는 이즈리얼이 관심 없는 어느 유명한(다들 그렇게 말하는) 대학의 존경받는 교수이며 저명한(역시, 다들 그렇게 말하는) 학자다. 연구니 학회이니 뭐니 항상 바빠서 연락도 못 받을 때가 태반이다. 거의 한 달 가까이 연락이 안 되어서 요즘에도 일이 많겠거니 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뜬금없이 집에 올 줄은 몰랐다.
비에 머리와 어깨가 젖은 리메르는 양손 가득 서류 가방과 종이봉투를 들고 안으로 들어온다. 머리를 흔들어서 물기를 탁탁 털어내고 종이가방 세 개를 이즈리얼에게 넘겨준다. 제법 묵직하다. 안을 슬쩍 보니 인형이나 엽서 같은 잡다한 기념품이 들어있다.
“연락도 없이 웬일이야?”
“내가 연락이 없었냐? 네가 안 받았지.”
어쩜 전화할 때마다 통화 중일 수가 있냐며 애인이라도 생겼느냐 물으니 이즈리얼이 멋쩍게 얼버무린다. 요즘 들어 통화량이 부쩍 많아졌으니 그리 오해하는 이유도 알 만하다. 이즈리얼은 문틈에 발을 걸어 현관문을 닫고 리메르의 뒤를 어영부영 따라간다.
“페이지라도 좀 보내지.”
“어떻게 쓰는 건지 몰라.”
“늙은이.”
“너도 나이 먹어 봐라.”
리메르는 오는 길이 고됐는지 거실 소파에 눌러앉아 다리를 쭉 편다. 빗줄기가 굵지 않아 가죽 시트를 닦아야 할 수고는 덜었다. 이건 다 뭐야? 바닥에 쓰러진 수트 케이스를 세워서 장식장에 기대 둔 이즈리얼이 종이봉투를 내밀며 묻는다. 해외에서 열린 학회에 다녀왔을 때 선물을 사 왔다며 전부 이즈리얼 것이란다. 봉투를 뒤집어보니 아까 봤던 인형이나 엽서 말고도 열쇠고리나 자잘한 장난감이 와르르 쏟아진다.
“내가 애인 줄 알아.”
“애잖아. 넌 아직 어려.”
“이런 거 갖고 놀 나이는 지났거든.”
그러면서 인형 하나를 집어 배를 꾹 눌러본다. 삐꾹, 하는 소리가 난다. 외국에서 조카 생각을 해준 건 고맙다만 이런 것들을 대체 어디다 쓰라는 건지 모르겠다. 귀여움만으로 그 쓸모를 다한 걸까.
리메르는 고개를 뒤로 처박고 한숨 돌린다. 일이 쏟아지니 조카는커녕 가족 얼굴도 거의 못 보는데, 이제는 비까지 쏟아지려고 한다. 아직은 빗방울이 조심스럽지만 점점 어두워지는 하늘과 멀리서 들리는 천둥소리가 심상치 않다. 와중에 창문은 답답할 만치 잘 닫아두었고 듣지도 않는 라디오가 켜져 있다. 어린 학생이 혼자 살기에는 지극히 쓸쓸하고 막막하다.
블라인드는 오래도록 접히지 않았는지 먼지가 쌓였다. 리메르는 줄을 당겨 길게 내려왔던 커튼을 시원하게 접어버리고 잠시간 창밖을 본다. 물 얼룩이 잔뜩 묻은 창문이 지저분하다. 집안 곳곳에 하자가 있는 부분은 죄다 가려두었다. 겉보기엔 멀쩡해 보였는데. 리메르는 바닥에 흐트러진 선물들을 뒤적이던 이즈리얼을 부른다.
“다리 좀 봐.”
“별거 아니야.”
“살이 벗겨진 것 같잖아.”
연고를 바른 지 얼마 안 되어서 다리가 치덕치덕 번들번들하다. 리메르는 괜찮다고 뻐기는 이즈리얼의 다리를 찰싹 때린다. 아픈지 작은 소리를 내며 몸을 앞으로 굽힌다. 그럴 줄 알았다. 이마도 한 대 때려주고 훈수를 두려고 하니 이즈리얼이 잔뜩 골이 난 표정을 짓는다. 그러나 어찌하겠나. 이리도 말을 안 듣는 조카인데.
“너무 방치하지 마.”
“안 그래.”
“계속 놔두면 곪는다.”
“알고 있다고.”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행동으로는 전혀 할 의지가 없는 말투. 리메르는 조카가 하고 싶다는 대로 최대한 풀어주는 삼촌이지만, 인생을 온전히 맡기기에 이즈리얼은 너무 어리다. 한쪽은 옆에 붙어서 보살펴줄 수 없고, 다른 한쪽은 관심이 싫으면서도 관심이 고프니 둘 다 답답할 노릇인 건 마찬가지다.
이즈리얼은 입술을 댓 발 내밀고 다리가 쓸린 방향을 눈으로 주욱 따라간다. 무릎에서 시작한 자국이 발목 위에서 멈춘다. 빨래를 늦게 돌렸는데 양말에 묻었던 피는 잘 지워질까. 별로 아끼지 않았던 옷을 생각하며 그는 리메르에 다리를 올리고 뒤로 털썩 눕는다. 어린놈의 버르장머리 없는 행동에도 아량이 넓은 삼촌은 무엇 하나 말하지 않는다.
“삼촌.”
“어.”
“나 가려고.”
“어디를?”
“친구들한테.”
이즈리얼은 언젠가 동네 또래들이 너무 싫다고 호소한 적 있다. 걔들은 너무 멍청하고 오만해서 자기들 외엔 아무것도 모른다며. 그는 대인관계에 지독한 어려움을 표현하면서도, 막상 리메르가 보기엔 쾌활하면서도 다정한 것이 사교성이 높았다. 어느 것이 진짜인지 알 길이 없는 어른은 그가 발랄한 척하는 건 아닌지 의심하였다가, 자기 일이 바빠 모순적인 청소년의 행동을 크게 신경 쓰지 못했다. 그건 아무리 이름이 알려진 학자라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인지 이즈리얼은 친구 이야기를 하길 꺼렸고, 리메르도 먼저 해당 주제로 입을 열지 않았는데, 그랬던 애가 갑자기 친구한테 가겠단다. 그냥 친구도 아니고 친구들. 자기가 알지 못했던 문제를 스스로 극복하기라도 했는지 담담하게 내뱉는 목소리에 적적함이 없다. 어딘가 확신이 담겨있다.
“걔들이 어디 있는데?”
“조금 멀리 있어.”
“하늘이나 땅 밑에 있는 건 아니지?”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다리로 삼촌을 찬다. 리메르의 팔이 이즈리얼의 발 모양에 맞춰 쑥 들어갔다가 다시 나온다.
“거기 꽤 오래 있을 거야.”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전화도 못 받아. 집 비울 거니까.”
“돌아오기만 해.”
그 말 어디에서 어떤 감정을 느낀 건지는 몰라도 이즈리얼은 울컥 눈물을 흘릴 것 같다. 자기에게도 돌아올 곳과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 듯한 기분이다. 이즈리얼은 대답하는 대신 그저 천장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리메르는 상처 주변으로 붉게 올라온 피부를 살피면서, 이 몸으로 과연 어디까지 다녀올 수 있을지 생각한다. 뭐, 상태가 어찌 되었든 어디든 갈 수 있을 것이다. 아직 어리니까.
리메르는 저녁 시간이 되어서야 떠난다. 내일모레 또 무슨 일정이 있어서(이름이 너무 어려워서 까먹었다.), 내일까지는 도착해야 한다며. 떠날 때쯤이 되니 비가 많이 온다. 이즈리얼은 우산을 펴 삼촌을 차가 있는 곳까지 데려다주고, 차창을 내린 리메르에게 한참 인사를 전한다. 또 연락 하라느니, 아참, 한동안 집에 없을 거라 어차피 못 받는다느니, 다음에도 꼭 들르라느니……. 아닌 척해도 아쉬움이 가득 묻어난다. 리메르는 그 말을 전부 받아주며 마지막으로 손을 흔들고 차를 출발시킨다. 이즈리얼은 같은 자리에 한동안 서서, 차가 떠난 자리를 가만히 지키며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든다.
공허한 기분이다. 하지만 괜찮다. 내일. 내일이면 떠나니까. 굵은 물줄기가 우산의 가림막과 창문, 어닝을 치고 흘러내린다. 타닥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웅덩이에 발을 적시고, 이즈리얼은 집 안으로 들어온다. 적막한 저녁 공기가 그를 반기지 않는다.
그날 오후
19XX년 7월 23일 오후 5시 20분
마이애미, 플로리다
오전에 병원에 다녀와서 급격한 피로감을 느낀 케인은 한바탕 낮잠을 잤다. 잘 시간이 아닌 때에 혼자 침대에 누워본 것도 오랜만인데 까무룩 잠까지 들었다. 생활패턴에 민감할 나이는 아니지만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시계를 찾는다. 오후 5시. 관점에 따라 늦으면 늦고 이르면 이른 시간이다. 비관인지 안도인지 모를 한숨이 이어진다.
새집이 된 머리를 쓸어 넘기면서 비척비척 거실로 나간다. 거실에도 부엌에도 아펠리오스가 없다. 항상 닫혀있던 방문도 열려있다. 야, 자냐? 물으며 문틈으로 살짝 보니 없다. 짐은 그대로고 기타까지 남아있는데 사람만 사라졌다. 케인은 문을 활짝 열고 빈방을 물끄러미 보다가 도로 나온다. 바깥이 어둡고 곧 비가 올 텐데 우산 개수는 변함없다.
아펠리오스가 말 없이 사라진 건 처음이 아니다. 앞의 한두 번까지는 당황했다. 언제 사라져도 이상할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은 했었는데 진짜로 사라지니 어찌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사람이 한곳에 머물지 않고 페이저 번호를 모르니 연락이 닿을 수단도 전무했다. 왠지 모르게 초조해져 정비소까지 가 보니 그의 바이크는 언제나 한편에 존재했다. 아직은 떠난 게 아닐 것이다……, 라고 생각하고 있으면 저녁이 될 때쯤 그가 돌아왔다. 어딜 갔느냐고 물으면 바다, 하며 담백하게 대답했다. 거기서 혼자 뭘 하고 왔는지는 몰라도 케인은 그 이후로 말을 붙이지 않았다. 왜 갑자기 사라졌는가에 관해.
아펠리오스는 연결되지 않는 전화를 끊으며 전화부스에서 나온다. 케인과 이즈리얼 몰래 적어두었던 전화번호에 모두 가로줄을 긋는다. 이번에도 전부 실패. 마지막 기대를 걸면서 대마 냄새 나는 다이너나 동네 깡패들이 점령한 오락실을 견뎠는데 수확이 하나도 없다. 아펠리오스는 종이를 구긴다. 이제 이 일을 할 이유가 전혀 없어졌다. 완전히 질려버린 행위이기도 하며 내일이 되면 더 재밌는 일이 생길 것이다.
리커스토어에서 산 스내플을 한 모금 마신다. 천연 주스라던데 잘 모르겠다. 혓바닥과 입천장에서 터지는 미약한 탄산의 느낌이 썩 좋지 않다. 입안이 눅진해지고 묘한 갈증이 올라온다. 왜 액체를 마시고 있는데도 갈증이 생기는지 고민하면서, 아펠리오스는 부들부들한 단맛과 퍼지는 사과 향을 느끼려 해본다. 이즈리얼이 마셨던 음료도 이런 느낌이었을까. 다이너에서 먹었던 싸구려 와플보다는 제대로 된 맛이 난다. 전체적인 감상은 별로지만 혀에 닿는 감각 자체는 나쁘지 않다. 그러면서도 왜 사람들이 단맛에 집착하는지는 모를 일이다.
사람이 둘인데 저도 모르게 주스를 세 병 샀다. 동생을 챙기던 습관이다. 지금은 동생이 자길 더 챙기는 수준이 되었지만 그래봤자 자기보다 한참 어려 보이는 건 (쌍둥이임에도!) 어쩔 수 없다. 아펠리오스의 겉옷 주머니가 묵직해지며 유리병이 덜그럭거린다. 집을 나와 돌아다닌 지 두 시간쯤 되었으니 이제 돌아갈 때다. 오늘은 바다에 안 갔다. 거긴 이제 혼자 가기 싫다.
다음 셋리스트를 고민하며 웬 어린애 하나가 울고 있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니 길을 잃었나 보다. 길 한가운데 자리를 턱 잡고 울고 있는 것이 누구라도 저를 돌봐주길 바라는 듯한데, 남 무시하길 잘하는 아펠리오스는 충분히 지나칠 수 있었음에도 굳이 한 걸음 다가가 멈춘다. 이것은 마침 주스가 한 병 남는 이유도 있었으며, 케인이나 이즈리얼이 숨기던 가족의 의미를 헤아려 보려는 까닭도 없잖아 있다.
그래서, 아이를 다룰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동생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났다면 경험이라도 있었겠으나 동생이 어릴 땐 자기도 어렸기 때문에 소용없다. 일단 쪼그려 앉아 눈높이를 맞춰본다. 주룩주룩 떨어지는 눈물이 통통한 뺨을 타고 내려온다. 왜 울어? 긴 침묵 끝에 물은 말이 그것이었고, 아이는 울면서도 더듬더듬 엄마 아빠를 잃어버렸다고 말한다.
‘그거 안 됐네.’
충격적이지만 아펠리오스 기준으로는 최고 위로의 말이다. 역시나 아펠리오스는 남을 위로할 줄 모른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나타난 사람이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것 같자, 아이는 더 울기 시작한다. 이보다 더 울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가뿐히 갱신한다. 이 방법은 실패고, 동생이 울면 어떻게 했더라. 그는 아이의 손에 주스 병을 들려준다. 손에 차가운 것이 닿자 아이는 코를 훌쩍이며 울음을 잠시 멈춘다.
‘곧 비가 와.’
“아저씨는 누구세요?”
‘내가 아저씨 같아?’
먹으라고 줬더니 애가 뚜껑을 못 딴다. 뚜껑까지 따서 주니 꿀꺽꿀꺽 잘 받아 마신다. 단맛은 사람을 진정시키기 좋은가. 이즈리얼이 끼니마다 단 음식을 찾았던 이유를 알겠다. 이제 아이도 조용해진다. 아이에게 먹을 것을 주는 사람은 착한 사람이었는지, 아펠리오스가 손을 내미는 대로 얌전히 맞잡는다. 이러다 나쁜 사람 꼬이기 한순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위치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지나가다 경찰서를 봤던 기억이 있다. 아이는 아펠리오스의 검지를 빈틈없이 잡고 있다. 손끝에 박힌 굳은살이 신기한지 꾹꾹 누르기도 한다.
‘어쩌다 잃어버렸어.’
“그냥 잃어버렸어요.”
‘집이 어딘데?’
“저도 몰라요.”
‘경찰서 데려다줄게. 그럼 찾을 수 있어.’
“아저씨는 목소리가 왜 그렇게 작아요?”
순수한 질문은 종종 공격이 되기도 해서, 아펠리오스는 대답하지 않고 아이가 찻길로 나가지 않도록 손을 끌어당겨 안쪽으로 들인다. 대답이 없자 아이는 흥미가 식었는지 낮게 나는 새나 멀리서 치는 천둥을 신기해한다. 방금까지 하늘이 무너질 듯 울었으면서 읽지도 못하는 간판을 보면서 곧잘 웃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현관에 우산이 꽂혀있었지만 당연히 가져오지 않았다. 마이애미 날씨는 변덕스러워서 비가 오다가도 금방 해가 뜨기도 한다고, 케인이 그랬다. 아펠리오스는 겉옷을 아이의 머리 위로 덮어주면서 걸음을 빨리한다. 아이는 뭐가 그렇게 신났는지 옷 사이로 얼굴을 쏙 빼면서 꺄르르 웃는다. 손을 꼭 잡고 잘만 따라온다. 아이가 어른이 되면, 모르는 사람 손을 잡고 빗속을 달렸던 기억은 아마 좋은 추억이 될 테다.
경찰서는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다. 아펠리오스는 그사이에 축축하게 젖었다. 아이를 맡기면서 긴 머리에서 물을 뚝뚝 흘리니 경찰이 우산을 주겠다고 했지만 기어코 거절한다. 거절한 이유는 없다. 없으면 없는 채로 사는 것이 아펠리오스고, 있어야 할 이유를 구태여 만들지 않는다.
아이가 고맙다고 인사하면 손을 흔들어주고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 뛰거나 머리를 가리지는 않는다. 어차피 이미 다 젖었다. 많이 젖거나 더 많이 젖느냐의 차이다. 지금 입고 있는 옷은 케인 것이어서 마음대로 적시면 안 될 듯하지만 어쩌겠는가. 그건 빌려준 사람 잘못이다.
푹 젖은 채로 집에 들어오니 케인은 이제 당황하지도 않는다. 아펠리오스에 관한 모든 것에 달관한 케인은 아펠리오스가 말없이 내민 주스 병도 아무렇지 않게 받을 수 있다. 아펠리오스에게 닦을 수건이나 건네주면서 하던 일을 마저 하며 딱히 궁금하지 않다는 듯이 묻는다.
“어디 갔다 왔어?”
‘경찰서.’
“너 뭐 걸렸어?”
‘…….’
경찰 이야기가 나오니 고개를 벌떡 든다. 이 새끼 드디어 걸렸나! 케인은 죄목이 뭘 지 생각한다. 자기가 아는 것만 해도 꽤 된다. 도로교통법 미준수에 공갈 협박에 폭행······. 아펠리오스가 고개를 저으니 케인은 그대로 뭔가 켕겨 하며 그를 의심한다. 분실물이라도 주워서 갖다줬나 하면 그건 또 아니다. 아펠리오스가 그런 일을 할 것 같지는 않으니까.
“그럼 왜 갔는데?”
‘그럴 일이 있어.’
“그러니까, 그럴 일이 왜 생겼냐고.”
아펠리오스는 아이를 생각한다. 비가 많이 오는데 부모는 만났을까. 빗속에서 잃어버린 자식을 찾을 부모의 마음도 헤아려본다. 언제나 먼저 떠나는 위치였던 아펠리오스는 평생 알 수 없을 것이다.
‘엄마 아빠가 너무 보고 싶을 때도 있으니까.’
그러니 남의 말을 빌릴 수밖에 없다. 그윽하게 말하는 아펠리오스를 의미심장하게 보던 케인은 정말 참으려다가 그러지 못하고 기어코 한마디 한다. 너네 부모님 깜빵 갔어? 우정이 무너지는 말이다……. 아펠리오스는 참는다.
19XX년 7월 24일 오후 2시 12분
마이애미, 플로리다
마이애미 국제공항
걔 어떻게 생겼더라? 공항까지 가는 내내 케인이 중얼거렸다. 원래 도착 시간에 맞춰 마중 간다고 했는데 늦잠 자느라 조금 늦었다. 이즈리얼이 잘 자리를 정리하다가 늦었다고 핑계 댈 생각이다. 도착 예정 시간은 2시 반이었고 차로 40분은 더 가야 한다. 집에서 한 시간이 넘는 거리를 금 간 다리로 사람 하나를 태운 채 자전거로 갈 수는 없으니 결국 차를 탔다. 정비소까지 가서 빌릴 시간이 없어 하는 수 없이 케인 아버지의 차를 썼는데, 케인은 조수석에 앉아 아펠리오스가 남의 차로 수틀리는 짓이라도 할 까봐 마음이 마냥 불안하다.
아펠리오스는 수상할 정도로 운전을 잘한다. 기껏해야 자기 또래이거나 나이가 조금 더 많은 수준이랬는데 이 정도로 능숙한 애들은 드물다. 허구한 날 갖다 박고 죽어버리는 오토바이라면 더더욱. 케인은 그놈의 아버지한테서 못 벗어나 차 타지 말라는 소리 하나에 아직도 운전대를 못잡는데 그에 반해서 아펠리오스나 이즈리얼은 자유로워 보였다. 걔들은 적어도 혼자 여행이라도 다니니까. 어쩐지 부끄러워져 아펠리오스의 손동작을 지켜보던 케인은 괜히 창가에 턱을 괴고 밖을 쳐다본다.
50분경에 공항에 도착한다. 늦게 왔는데 비행기가 연착되어 이즈리얼이 더 늦는 상황이 발생한다. 두 사람은 간식거리를 사 들고 의자에 앉아 평소라면 관심도 없었을 신문이나 읽는다.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정치나 경제 기사가 실려있다. 정치인들이 악수를 나누는 사진이나 어지럽게 오르락내리락하는 그래프 따위가 첨부되어 있는데 저게 뭐든 간에 관심이 전혀 없다. 그 옆에 있는 신문을 가져왔어야 했는데. 마찬가지로 기사 내용에는 관심 없는 아펠리오스는 사진에 잘못 찍힌 이상한 얼굴을 가리키며 케인에게 이거 너 닮았다며 실속 없는 소리나 한다. 케인은 액면가를 걱정해야 하는 것도 모자라 전반적인 외관까지 걱정해야 한다.
헛소리를 하니 시간이 금방 간 줄도 모르고 있다가, 비행기에서 내린 이즈리얼이 먼저 둘을 발견한다. 아펠리오스는 사진이라도 남았지만 그마저도 없는 케인은 사실 얼굴이 긴가민가했는데 분홍 머리와 파랑 머리가 붙어있는 걸 보니 도저히 못 알아볼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이 신문에 집중하는 사이 이즈리얼은 신문 뒤에 숨어있다가 머리를 불쑥 내민다. 아펠리오스는 마치 짠 것처럼 놀라지 않고 케인만 숨을 들이켠다. 그러고는 안 놀란 척한다.
“보고 싶었어!”
“징그러워.”
“내가 가서 얼마나 힘들었는 줄 알아? 일은 많고 애들은 나 괴롭히고 날씨도 안 좋고 삼촌도 그냥 가버리고 넘어지고……. 여기 오겠다고 얼마나 기다렸는지도 몰라 내가 달력에 표시까지 하면서 아예 날짜를 세고 있었다니까? 진짜 진짜 너무 힘들었는데 그냥 여기 올 생각 하면서 버텼어. 여기 와서 다 얘기하려고 일부러 통화할 때도 말 아끼고 미루고,”
“아, 알겠으니까 그만 좀 해!”
들이대는 이즈리얼을 케인이 밀어서 떼어놓는다. 몸이 밀리고 나서야 진정한 이즈리얼은 케인 옆에 끼어있던 있던 아펠리오스와 겨우 인사한다. 잠시간 안부를 묻고 인사를 나누던 중 이즈리얼의 눈에 아펠리오스의 상처가 눈에 띈다. 그전에는 분명 없었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케인도 전보다 더 아파 보인다. 저번에도 얻어 텨저있긴 했지만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쓰고 있던 노란색 선글라스를 슬쩍 벗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보던 이즈리얼은, 남의 살에 손을 대며 봉합된 부위를 슥슥 만져보다가 입을 떡 벌린다.
“너희 싸웠어!?”
“내가 싸울 사람이 없어서 얘랑 싸웠겠냐.”
“근데 왜 이렇게 다쳤어?”
“알 거 없어.”
케인이 퉁명스럽게 대꾸하니 아펠리오스가 귓속말로 답을 준다. 장난 좀 쳤어. 대체 얼마나 살벌한 장난이었길래 눈썹에 스크래치까지. 이즈리얼은 오락실 의자가 날아오던 것을 떠올리며 장난 한 번 더 쳤다가는 골로 가겠다는 생각을 한다.
‘넌 다리가 왜 그래?’
“보드 타다가 넘어졌어.”
“무슨 강판 위에서 넘어졌나 보네.”
‘살이 무르려고 하는데.’
“괜찮아, 안 아파!”
케인은 놀리려고 한 말인데 이즈리얼이 좋아한다. 안 아프다는 말은 거짓말이어도 아무렴, 그는 집을 떠나서 그저 좋다. 짧은 팔로 두 사람을 꽉 안아주고 빨리 바깥 공기 마시고 싶다며 재촉한다. 케인은 얘가 자기랑 언제 그렇게 친했다고 이러는지 의문이기도 하였으나, 마냥 밝아 보이던 애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이렇게까지 하겠는가 싶어 괜한 말은 하지 않는다.
폴짝 뛰면서 공항을 배회하는 이즈리얼을 아펠리오스가 먼저 뒤 따라간다. 케인은 가방에 신문을 접어 넣으며 어렵사리 발을 뗀다. 참 별난 사람이다.
뒷자리에 앉아 간식을 까먹는 이즈리얼에게 와서 뭐 하고 싶은 거라도 있었는가 물으니, 자기는 원래 계획 같은 건 안 짠단다. 저번에는 정해진 동선대로 움직이는 것 같더니 그건 또 아니었나 보다. 사람 찾는 건은 어찌저찌 해결됐다고 들었다. 전말을 모르는 두 사람은 얼버무리는 말투가 조금 이상했지만 더 캐묻지 않았다. 그들에겐 당장 뭘 해야 하는지가 더 중요하다.
‘가고 싶은 데라도?’
“디즈니 월드?”
“그건 올랜도에 있잖아.”
“차 타고 4시간이면 되는데.”
“갔다가 안 올 거야?”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야지! 이즈리얼이 앞자리에 바짝 붙으니 단 냄새가 난다. 아무튼, 결론은 아무것도 계획된 게 없다는 것이다. 완벽한 계획형 인간인 아펠리오스와 의외로 계획적인 케인에 비해 이즈리얼은 백 퍼센트 무계획형이다. 딱 봐도 그렇게 생기긴 했어도, 먼 곳에서 오는데 이렇게까지 아무 생각이 없을 수가 있나. 케인은 감탄 아닌 감탄을 하며 집 주변에 뭐가 있었는지 떠올린다. 아무것도 없다, 이럴 수가.
“그럼 영화 보자! 비디오 빌려서. 밤새 놀고.”
“너 집 가면 뻗어서 잘 걸.”
“그럼 내일 하면 되지.”
“언제까지 있을 생각인데?”
“펠이 갈 때까지.”
“쟤가 안 가면?”
“나도 안 갈래.”
“에휴, 마음대로 해라, 그래.”
마음에 드는 대답이었는지 이즈리얼이 킥킥 웃는다. 차 안에서 단내가 훅 풍긴다. 아펠리오스는 이 냄새가 뒤에서부터 퍼진 건지 아니면 자기 몸에서 나는 건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차 안 공기가 너무 답답하다 싶어지면 이즈리얼은 창문을 내리고 머리를 기댄 뒤 숨을 크게 들이마신다. 바다 냄새. 이게 그렇게나 그리웠다며 차가 가는 방향과 반대로 나부끼는 야자수나 멈춰있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입으로 묘사한다. 눈에 비치는 모습이 모두 아릿아릿하다. 케인과 아펠리오스는 늘 보던 것들이라 크게 감흥은 없으나 이즈리얼이 유난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가는 시간보다 오는 시간이 더 짧았다. 순식간에 집에 도착해서 짐을 내릴 것도 없이 아파트 안으로 들어온다. 이즈리얼이 가져온 것이라고는 옆으로 매는 가방 하나뿐인데, 안에도 뭔가 든 게 없는지 한없이 가벼워 보인다. 케인은 또 집안 살림이나 옷가지가 작살날 것을 예상하며 두 사람이 올 때까지 엘리베이터를 잡아둔다. 그런데 한참 오지를 않는다. 대신 모퉁이 너머로 목소리가 들린다.
“너 몇 호 살아?”
“505호.”
“편지 왔어.”
1층 벽면에는 모든 세대의 우편함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우편물이 들어있는 호수를 물끄러미 보던 이즈리얼은 케인의 것을 찾아낸다. 케인은 그제야 아버지의 편지가 올 시기를 놓쳤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누르고 있던 엘리베이터 버튼에서 손을 떼니, 아펠리오스가 대신 잡아둔다. 이즈리얼이 까치발을 들고 편지를 대신 꺼내주려는 걸 케인이 됐다며 직접 꺼낸다. 각 잡힌 봉투, 겉면에 쓰인 필체를 보니 아버지가 맞다. 케인은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편지를 덜렁 들고 어서 올라가자며 손짓한다.
이즈리얼이 언뜻 보니 그건 분명 어른이 쓸 법한 필체였다. 케인도 혼자 사는 것 같던데 그러면 멀리 사는 가족이나 어른이 보낸 걸까. 자기도 남이 보낸 편지를 저렇듯 아무렇지 않게 받아 보고 싶다. 우편함 확인이 습관이 되지 않은 저 행동 방식도……. 아니, 아니다. 겉만 보고 남을 함부로 판단하면 안 된다. 이즈리얼은 우편함 문을 도로 닫고 재빨리 뛰어 저를 기다리는 엘리베이터로 간다. 우편함에서 멀어진다……. 평생 그러했으면 좋겠다.
19XX년 7월 24일 오후 3시 26분
마이애미, 플로리다
사우스웨스트 104번지 센트럴하이츠 505호
케인은 자기 방을 내어주고 거실에서 잘 생각이었는데 이즈리얼이 먼저 아펠리오스와 같이 방을 쓰겠다고 했다. 아펠리오스의 의견은 듣지 않은 결정이었다. 남의 집에서 신제지는 마당에 무슨 불만이 있겠냐마는, 아펠리오스도 이즈리얼과 지냈던 게 나쁘지 않았는지 당연하게 오케이 했다.
케인은 거실에 깔던 이불을 거두고 아펠리오스(가 쓰는 아버지의) 방에 하나 더 가져다 두었다. 하지만 첫날은 몸이 힘들 테니 하루만 케인 방을 쓰기로 했고, 이즈리얼은 그의 방을 신기해했다.
"너도 많은 일이 있었나 보네."
사진 한 장이 덜렁 붙어있는 벽을 보며 이즈리얼이 그렇게 말한다. 오래도록 사진을 붙여놔서 하얗게 뜬 자국이나, 테이프에 막혀 찢어진 채로 여전히 달라붙어 있는 삼각형의 포스터 모퉁이에 케인의 질풍노도를 상상한다. 뜯어낸 사진과 포스터를 쑤셔 넣었던 상자는 이제 책상 위에 떡하니 올려져 있다. 원래 미완성 악보를 꺼내느라 잠시만 올려 둘 생각이었는데, 어차피 아펠리오스에게 들켜 그냥 두던 걸 잊고 있었다.
하지만 이즈리얼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며. 오히려 벽에 하나 남은 사진에 더 관심을 보인다. 79년도 크리스마스에 찍힌, 작고 어린 검은 머리 케인이 재밌나 보다.
"너도 이런 시절이 있었구나."
"언제 적이야, 저게."
"머리 긴 것도 귀여운데?"
"어릴 때잖아."
"그러니까 더 귀여운 거지."
숨기고 싶은 모습이었는지 케인이 싫어한다. 굳이 붙여두었으면서 저런 반응을 보일 필요가 있나. 이즈리얼은 장발의 케인을 마냥 재밌어하며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케인의 기타나 그가 쓴 악보에도 기웃댄다. 참고로, 케인은 이즈리얼이 가수였다는 사실을 모른 척 하기로 했다. 아펠리오스가 되도록 언급하지 말라고 하기도 했고, 어차피 잡지에서 본 것 말고는 이즈리얼에 대해 아는 것도 없으니 그냥 가만히 있기로 했다.
하지만, 그래도 조금은 궁금해진다. 케인은 이즈리얼더러 혹시 음악 할 줄 아냐며 떠 본다. 악보를 넘겨 멜로디를 짚어보던 이즈리얼이 고개를 악보에 고정한 채로 말한다.
"알았는데, 안 한 지 너무 오래돼서 잊어버렸어."
"언제 했는데?"
"한 몇 년 전?"
"해 보면 기억날 텐데."
"근데, 재능이 없는 것 같았거든."
노래 불렀는데 반응이 별로 안 좋았어. 이제는 다 지난 일을 추억하는 것 같은 말투다. 노래 나쁘지 않던데······. 라고 속으로 생각만 한 케인은 그저 그래, 한마디 한다. 케인도 자기한테 재능이 없다 생각한 적은 많지만 그래도 그만두려 한 적은 없다. 이즈리얼이 끝내 포기하고 만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 실력이 참 아깝다고 느낀다.
이즈리얼이 보는 악보는 같은 것이 두 장씩 있다. 아펠리오스도 기타를 쳤으니 아마 같이 연습했나 보다. 아직 들어본 적 없어도 곡이 훌륭한 건 알겠지만, 이즈리얼은 문득 5개나 되는 곡 중 가사가 있는 곡이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혹시라도, 하는 마음과 그럴 리가, 하는 생각이 겹친다. 그는 이대로 괜찮다. 두 사람은 이미 본인들만으로 완벽해 보이니까.
상자 옆에는 케인이 아무렇게나 올려 둔 편지가 있다. 하나가 아니라 똑같이 생긴 봉투 두어 개가 더 있다. 모두 열어보지 않았고, 손대지 않은 듯 새하얗고 깨끗하다. 봉투의 상단과 하단에는 모두 같은 필체로 같은 이름이 쓰여있다. 저 사람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정갈한 글씨체에서 상대를 위하는 마음이 느껴진다. 다정할 것 같은 저 사람이 케인을 위해 무슨 문장을 썼을지 궁금하다. 그러나 편지 안 열어 볼 거야? 같은 오지랖은 부릴 수 없었기에 신경 쓰지 않으려 한다. 다른 일을 해야 한다.
늦은 점심을 챙겨 먹고 다 같이 밖으로 나왔다. 집 근처에 있는 비디오 대여점까지 걸어서 약 15분 정도 걸렸는데, 차를 탈 만한 거리도 아니고 케인도 걷기 힘들어하여 둘이 다녀오겠다는 것을 괜찮다며 따라온다. 계획도 없는 애가 괜히 나갔다가 길이라도 잃어버리면 큰일이고, 아펠리오스도 이즈리얼 옆에 있으면 왠지 멍청해질 것 같다는 이유다. 두 사람은 케인의 보폭에 맞춰주면서 분명 아플 텐데도 잘만 걷는 케인의 다리를 자주 확인한다.
"너희 진짜 안 싸운 거 맞지?"
"어."
"왜 다쳤는지 진짜 말 안 해줄 거야?"
"알면 너도 다친다."
"펠은 장난 좀 친 거라던데."
케인이 아펠리오스의 옆구리를 퍽 찌른다. 케인은 멍든 곳을 기막히게 찾아내는 재주가 있어서 아펠리오스는 휘청거리다가 벽에 가서 부딪힌다. 그냥 찌르기만 하고 말려고 했는데 지가 알아서 갖다 박으니 이즈리얼이 깜짝 놀란다.
"왜 괴롭혀!"
"쟤가 날 괴롭히는 거겠지!"
"저 뼈만 남은 몸 좀 봐."
이즈리얼은 아펠리오스를 바로 일으켜주며 아펠리오스를 가운데 세운다. 자기 딴에는 아펠리오스가 또 벽에 부딪히지 않도록 막아주려는 거였는데 그러려면 애초에 케인이랑 붙여 두면 안 됐다. 이즈리얼은 완전히 반대로 생각하고 있다. 아펠리오스도 이 두 사람의 사이에 끼고 싶지 않다. 중간에 존재하는 것 자체가 괴롭다.
"케인이 괴롭히면 말해."
'가끔 그래.'
"그러긴 뭘 그래."
"본인이 그렇다잖아."
"내가 본인이야, 내가."
"그럼 너도 펠이 괴롭히면 말 해."
"너나 잘해."
"안 그래도 잘하고 있거든!"
내가 생각보다 힘 세, 알아? 알겠냐? 궁금하지도 않다. 다리를 질질 끌면서 햇빛 아래 오래 서있었더니 슬슬 땀이 나기 시작한다. 케인과 아펠리오스의 얼굴에 더덕더덕 붙은 반창고 밑에서도 땀이 나는 것 같다. 이즈리얼은 맨다리를 그대로 드러내고 왔더니 상처가 타는 것 같다. 그러나 이들은 헛소리에 집중하느라 아픈 것을 거의 눈치채지 못한다.
대여점에는 에어컨이 틀어져 있고 어린 애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주인은 인사도 없이 어디서 봤던 신문을 읽고 있다. 매대는 카테고리 별로 나누어져 있는데 성인 구역이 따로 나누어지지 않아 미성년자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다. 케인은 자극적인 영화 취향이었고 이즈리얼은 두루두루 좋아했는데, 아펠리오스는 슬래셔가 아니면 보지 않았다. 케인이 아무리 자극을 추구한다 해도 저 정도는 아니라, 살벌한 커버가 달린 비디오를 들여다보는 아펠리오스를 수상하게 쳐다본다. 성인 딱지가 버젓이 붙어있다.
"너 성인이야?"
'그럴 수도 있어.'
"그럴 수도 있는 건 뭐야."
"너 이런 거 좋아해?"
표지에서 이미 사람이 죽고 있다. 이즈리얼이 부러 과장하며 무섭다고 으, 하는 반응을 보이니 케인은 자기도 자신 없으면서 괜히 겁쟁이라고 놀린다. 그럼 서로의 취향은 얼마나 대단한가 보자면서 좋아하는 걸 하나씩 들고 오는데 케인은 탑 건을 가져오고 이즈리얼은 인디아나 존스를 가져온다. 아펠리오스는 딱 자기들 같은 걸 좋아한다고 생각하는데, 이게 칭찬인지 욕인지 잠시 갈등하다가 결국 둘 다 성공한 작품이니 칭찬으로 치기로 한다.
케인이 계산대 옆에 붙은 고스터 버스터즈 포스터를 가리키며 말한다.
"저기 너 있다."
"뭐가?"
포스터 한편에 이상하게 생긴 초록색 괴물이 그려져 있다. (한국명: 먹깨비) 괴악한 비주얼에 충격을 받은 이즈리얼이 손으로 얼굴을 더듬거린다.
"내가 진짜 저렇게 생겼어?"
"똑같은데."
"난 이렇게 예쁘기만 한데!?"
"진짜 죽이고 싶다."
케인은 비디오 케이스로 이즈리얼의 머리를 가볍게 툭 때린다. 서로 이건 너를 닮았네 저건 너를 닮았네 투탁거리며 누가 더 이상한 걸 찾는지로 싸운다. 아까 아펠리오스도 이러지 않았었는지 문득 떠오른다. 둘의 수준이 비슷한 건지 아니면 아펠리오스가 케인과 지내다 보니 수준이 하락했는지 모를 일이다. 계산대를 지키던 주인은 애들 싸움에 질려 목을 고르며 눈치를 준다. 하지만 두 사람은 눈치가 없다.
아펠리오스는 살면서 처음 보는 영화를 골라 왔다. 매대 어딘가 구석에서 발견한 비디오인데 돼지 가면을 쓴 사람이 도끼를 들고 있다. 사방에 피가 튀어있음에도 놀랍게도 성인 영화가 아니다. 와중에 엄청 오래된 비디오인지 커버가 다 닳아서 제목이 지워져 있다. 그래도 아펠리오스는 그게 마음에 들었는지 당당히 계산대 위에 내려둔다. 손 대면 저주라도 받을 것 같은 음산한 포스를 풍기는 비디오라 케인과 이즈리얼은 그걸 보자마자 신나게 놀리던 입을 턱 다문다.
대여 기간은 일주일. 세 편의 영화를 보고 남이 고른 작품이 얼마나 구렸는지 품평하기 충분한 시간이다. 이즈리얼은 저게 진짜로 세상에 존재하는 영화가 맞는지 믿기지 않아 고개를 빼 들고 슬쩍 본다. 아펠리오스는 나름 만족해하며 비디오를 가방에 넣는다. 커버에 튀긴 피가 그냥 인쇄된 이미지인지 진짜 사람 피인지는 모를 일이다.
대여점에서 나오면 아펠리오스가 가고 싶은 곳이라도 있는지 앞장선다. 저녁까지 시간이 애매하게 뜨는 터라 어딜 가든 상관없겠다고 생각한 이즈리얼은 신나서 따라나서다가 자기들이 어디에 도착했는지 깨닫고 멈칫한다. 위에서 아래로 육중한 시선이 내리꽂히고 의자가 날아오던 오락실. 죽기 전에 다시 올 줄 몰랐던 그 오락실! 이즈리얼은 케인의 어깨 너머로 내부를 보면서 혹시 전에 봤던 얼굴이 있는지 살핀다. 사실 그때도 고개를 거의 들지 못해서 얼굴을 제대로 본 사람은 없다. 저기 모여있는 사람 중 자기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케인은 오락실 출입이 자연스러운 모양이다. 평소에도 자주 오는 곳인지 시간 보내기에 나쁘지 않다며, 아펠리오스에게 여기서 '대화'를 하고 싶으면 더 큰 소리로 말하는 게 좋을 거라고 조언한다. 아펠리오스의 대화 방식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이즈리얼은 그의 옷자락을 잡으며 정말 가도 괜찮겠느냐고 묻는다. 아펠리오스는 그 질문의 요지를 모르는 듯이 의아해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여기서 진심인 건 자기뿐인 것 같아, 이즈리얼은 케인더러 자기를 숨겨주기를 부탁하고 그의 팔뚝 뒤에 쏙 숨어서 안으로 따라 들어간다.
당연하지만 내부는 저번과 하나도 달라진 게 없다. 필요 이상으로 볼륨을 키워둔 노래와 특정 게임기에 몰려든 무리와 반짝이는 조명······. 뉴욕에 있는 오락실도 이것과 크게 다를 바 없지만 야자수 모양의 노란색 네온사인은 마이애미에서만 볼 수 있다.
케인도 인기 게임에는 별 관심 없는지 입구 주변에 모인 무리를 심드렁하게 쳐다보며 아펠리오스와 함께 안으로 들어간다. 오히려 또래와 다른 취향을 가진 자기들에게 은근한 우월감을 느끼고 있을 테다. 아펠리오스는 총질하는 게임을 자극적이라는 이유로 가장 좋아했다. 케인도 똑같은 이유로 그와 같은 것을 좋아했고 동시에 가장 자신 있는 게임이었는데, 아펠리오스가 한 번의 시도 만에 하나의 데스도 없이 1위 기록을 갱신하는 것을 보고 감히 자신있다는 말할 수 없다.
케인은 딱히 흥미 없지만 네가 좋아하는 게임이니 특별히 해보겠다는 식으로 도전한다. 랭킹 1위가 바로 옆에서 보고 있으니 긴장이 되었는지 원래 실력이 안 나온다. 아니면 원래도 그렇게 잘 하지 않았거나. 아펠리오스의 플레이 시간 반도 안 되어 죽은 케인이 기록을 들키지 않기 위해 총을 재빨리 이즈리얼에게 떠넘긴다. 얼떨결에 넘겨받은 이즈리얼이 정말 최선을 다해 총을 쏜다. 꼴찌라 하기에도 민망한 점수가 나온다. 다시 말하지만 그는 정말 노력했다. 케인과 이즈리얼이 아펠리오스 발치에도 못 미친 점수를 보면서, 쟤는 웬만하면 건들지 말자고 합의한다. 아펠리오스의 서로 다른 사고를 목격한 그들은 이해의 차이는 있지만 결국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화면에 손을 하나하나 짚으며 센 뒤에야 자기들 점수가 아펠리오스의 것과 자릿수부터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즈리얼이 우와, 대단하다···, 하며 고개를 드니 아펠리오스가 사라졌다. 먼저 가버린 건 아닌 것 같고 얘가 사람 사이에 숨을 일도 없으니 두 사람은 인적이 드문 안쪽으로 더 들어간다. 그러니 가장 구석에서 아펠리오스가 뽑기 기계를 털고 있다. 그럼 그렇지. 아펠리오스는 언제나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다.
네 번의 기회 중에서 인형 세 개를 뽑았다. 원래 네 개 전부 뽑을 수 있었는데 마지막에 케인이 건드는 바람에 못 뽑았다. 헐거운 갈고리가 밑바닥에 박힌 인형을 놓치는 것을 보고 케인이 야유한다. 아펠리오스는 방금 뽑은 토끼 인형을 케인의 얼굴에 하나 던지고 다른 하나는 이즈리얼에게 준다. 마지막 남은 것은 제 동생 것이다. 케인은 이런 걸 창피해서 어떻게 들고 가냐며 불평하면서도 인형을 팔 사이에 소중히 끼고 있다.
이즈리얼은 이런 구린 기계로 어떻게 자기 상체만 한 인형을 뽑았는지 의문이다. 기계를 쿵쿵 두드려보니 매달린 갈고리가 힘없이 흔들린다. 사실 보기보다 엄청 쉬운 건 아닐까 싶어 조그만 인형을 뽑는 기계에다가 돈을 넣고 시도해 보니, 뽑기는커녕 인형 머리만 긁어주다가 끝난다. 이즈리얼이 잉잉대니 케인이 자신만만하게 비켜보라며 그를 옆으로 치우더니만 얘는 인형 등만 긁어준다. 결국 세 명이 열두 번의 기회가 있었는데 세 개밖에 못 뽑은 셈이다. 게다가 그 세 개를 한 명이 다 뽑았다.
두 사람이 대차게 망하는 걸 보던 아펠리오스가 또 다른 곳으로 훌쩍 떠난다. 이즈리얼은 그의 뒤통수에 대고 우려하며 말한다.
"또 장난치지 마."
아펠리오스는 뒤돌아보지 않는 대신 엄지를 치켜 올리는데 아마 알겠다는 뜻인 것 같다.
"쟤 여기서도 뭔짓 했어?"
"알면 다쳐."
눈썹을 비뚜름하게 세우던 케인이 혀를 차면서 동전이나 튕긴다. 아무리 장난을 쳐 봤자 총으로 사람을 패는 것보다 더할까. 케인은 앞으로 아펠리오스가 무슨 짓을 저지르든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다. 이즈리얼은 어깨를 으쓱이면서 그래봤자 우리보다 앞가림 잘하는 사람이라며, 너무 걱정하지 말자고 케인의 등을 떠민다. 맞는 말이지만 확신할 근거는 없다. 옆으로 밀리면서 보니 아펠리오스가 인파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객관적으로, 케인과 이즈리얼은 게임을 썩 잘하는 편은 아니다. 하지만 그 둘이 붙어있으니 봐줄 만할 때도 있었던 실력이 바닥으로 내리꽂힌다. 케인이 조종하는 노란색 얼굴이 쿠키를 먹다가 10초 만에 귀신한테 잡혀 죽으니 이즈리얼이 크게 실망한다. 죽은 사이 자리를 바꿔 이즈리얼이 조종하니 얘는 케인보다 5초 더 살아있다가 죽는다. 누가 더 낫다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이렇게 끝낼 수는 없어서 2인용 게임으로 바꿔 간 뒤 동시에 조종한다. 점수를 겨우 네 자리를 넘기자 이즈리얼의 초록색 공룡은 구덩이에 빠져 죽고 케인의 파란색 공룡은 벽을 거꾸로 타고 지나가는 몬스터에 닿아 죽는다.
아, 게임을 뭐 이렇게 만들었어!! 두 사람은 동시에 게임 못하는 사람 특징: 게임에 화냄을 보여준다. 케인은 하기 전부터 예전에 랭킹에도 든 적 있다고 자부했는데 너랑 해서 이렇다며 이즈리얼을 무지하게 깐다. 그리고 랭킹을 다시 보니 한참 아래 있던 자기 이름이 없어졌다. 대신 맨 위에 아펠리오스와 이즈리얼 이름이 있다. 얘네 뭐야, 미친! 얘들은 왜 남의 동네까지 와서 남의 기록이나 뺏고 있는가. 저번에 와서 둘이 잘 놀다 갔다더니 이런 거나 하고 있었나 보다.
"너넨 할 짓이 없냐?"
"너도 똑같잖아."
"너희랑 같은 라인에 두면 안 되지."
"다른 라인 타도 똑같을걸."
사라진 자기 기록에 안타까워하며 머리를 흐트러뜨린 케인은 이즈리얼을 발로 툭 찬다. 케인은 다친 발목이 삐그덕거려 아프고 이즈리얼은 까진 다리에 타격이 와 아프다. 서로 손해밖에 없다. 모여있을수록 멍청해진다.
슬슬 돌아갈 때가 되어 아펠리오스를 찾으니 안에 없다. 워낙 신출귀몰하는 타입이라 걱정은 안 되는데 문제는 이즈리얼이 피곤해서 죽으려고 한다. 새벽같이 일어나서 장거리 비행을 하고 왔으니 아무리 에너지가 넘쳐도 죽을 때가 됐다. 산송장이 된 이즈리얼을 끌고 밖으로 나오면 아펠리오스는 옆길에서 담배를 피고 있다. 두 사람이 다가오니 아펠리오스는 재를 털고 담배를 한 번 길게 빨아들인 뒤 불을 끈다. 돛대야, 하는 그의 입에서 연기가 퍼진다.
"달라고 안 했어."
"끊었어?"
"피지도 않았거든."
몽롱한 얼굴로 피어오르는 연기를 휘휘 젖던 이즈리얼이 담배 냄새를 맡고 흐리멍덩하던 눈을 덜컥 뜬다. 담배야 냄새가 다 똑같지만 그 중에서도 어딘가 익숙한 냄새다. 불이 꺼지는 걸 보고 충분히 간접흡연 한 이즈리얼은 같은 냄새가 밴 아펠리오스의 주변을 맴돈다.
"난 운동하는 애들이 싫어."
"무슨 소리야, 갑자기?"
"싫어, 아무튼."
가장 싫어하는 사람과 가장 좋아하는 친구가 같은 담배를 핀다는 건 참 불편한 일이다. 이즈리얼은 아펠리오스의 옷을 끌어당겨 세탁소 향기가 다 사라진 옷 냄새를 맡는다. 아펠리오스는 방금 펴서 냄새가 심하다며 그를 밀어낸다. 이즈리얼이 끝까지 버티다가 겨우 떨어진다. 이제 똑같은 냄새를 맡는다면 친구들 생각이 날 것이다. 이즈리얼은 기분 나쁜 향이 남은 코를 손등으로 훔치고 케인은 그걸 지긋이 쳐다본다. 역시나 참으로 별난 사람이다.
그날 저녁
19XX년 7월 24일 오후 8시 56분
마이애미, 플로리다
사우스웨스트 104번지 센트럴하이츠 505호
이즈리얼은 아펠리오스가 그랬던 것처럼 저녁을 먹자마자 뻗어 잠을 잔다. 남에게 방을 빌려주긴 처음인 케인이 머리가 침대에 닿자마자 기절한 이즈리얼을 보며 편지를 꺼내 조용히 나온다. 잠가버렸던 서랍은 빨래 틈에서 열쇠를 찾아 겨우 열었다. 손잡이를 부셔서 찾아야 할 뻔했던 몇 개월 분의 편지를 무사히 되찾았다.
이즈리얼이 잠 든 사이 연습을 도와주겠다는 아펠리오스는 자기 방에서 소리가 엇나간 케인의 기타를 손보고 있다. 케인은 금방 간다고 말하면서 거실 소파 구석에 앉아 편지봉투를 조심스럽게 뜯는다. 가장 최근에 온 편지다. 아직 바래지 않은 종이 색이 반짝인다. 잔뜩 긴장한 채로 가지런히 접힌 종이 두어 장을 펼치면 그리운 기분이 드는 아버지의 글씨가 있다.
내용 자체는 평범하다. 자기는 어떻게 지냈고 너는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어제는 무슨 일이 생겼고 언제까지 해결해야 하는지. 학교생활은 잘 했는지, 그리고 언제 집으로 돌아갈 것인지. 아버지는 편지에 드러난 문체와 실제 말투가 정확히 일치했다. 죽도록 담담한 투가 마음을 다소 아프게 했으나 아버지가 오는 날이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한다. 그때까지 얼굴에 떡하니 남은 상처를 없애는 것이 현재 유일한 문제다.
다음 편지를 뜯어본다. 비슷한 내용이 적혀있다. 학교에서 연락이 왔다는 언급은 없다. 일부러 모른 척 하는 걸까, 아니면 학교가 마지막으로 사정을 봐준 걸까. 이제 와서 말하지만 케인은 아직 아버지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씀드리지 않았다. 정확히는 몇 주에 한 번씩 꼬박꼬박 하던 전화를 아예 하지 않았다. 그럴 염치가 없기도 했거니와 가족의 빈자리를 채울 사람이 생기기도 하여. 하지만 아버지는 그조차도 언급하지 않는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내일 오전에는 전화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케인은 아직 서너 개는 남은 편지를 잘 포개어 다시 서랍에 넣어둔다. 아버지는 기대했던 이야기를 해주지 않지만 그렇다고 기대하지 않았던 말을 하지도 않는다. 날카로운 필체는 부드럽고 감정 없는 단어는 다정해서, 케인은 금방 가겠다던 대답도 잊고 한참이나 반응이 없다가 겨우 아펠리오스에게 간다. 아펠리오스가 고개를 들며 앞자리를 툭툭 친다. 케인의 눈이 살짝 젖었다.
가사를 쓸 거야. 손가락 위치를 조정해 주던 아펠리오스가 그리 말한다. 한 달 전보다 교정 횟수가 확연히 줄어들었다. 케인은 이즈리얼이 깨지 않을 만큼만 소리를 내어 현을 만지다가 눈만 들어 올린다. 아펠리오스는 여전히 케인의 손가락에 시선을 고정하면서 힘이 들어간 손목을 풀어준다. 갑자기 무슨 소리래. 가장 어려워하던 코드를 짚는다. 며칠 전까지는 손가락이 잘 닿지 않았는데 이제는 어렵지 않게 닿는다.
아펠리오스는 언제나 '갑자기'였기 때문에 케인은 별로 놀라지도 않는다. 웬만한 기행에는 익숙해졌다고 하는 게 더 맞겠다. 거북목이 되도록 앞에 놓인 악보를 들여다보는 케인에게 아펠리오스가 새로운 악보를 내어준다. 케인이 썼던 지저분한 음표를 깔끔하게 베껴 그렸다. 그리고 오선지 아래 가사가 한 줄씩 적혀있다. 아직 완성 단계는 아닌지 중간보다 약간 덜 되는 지점에서 끊겼다.
"너 원래 가사는 안 쓴다고 안 했어?"
'부를 사람이 없었으니까.'
"지금은?"
'생겼잖아.'
케인이 곧장 방에서 퍼질러 자는 이즈리얼을 떠올린 이유는, 아마 아펠리오스와 같은 생각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허나 케인은 부정한다.
"음악 얘기 하니까 싫어하던데."
'다시 해 보면 괜찮아.'
"본인이 안 하겠다잖아."
'지금이 아니면 안 돼.'
아펠리오스는 저런 말을 자주 했다. 저의를 물은 적은 없지만 저 말을 하는 아펠리오스의 표정을 보면 왠지 물어볼 수 없었다. 차분하고 진중하면서도 어딘가 낙담에 가까운 얼굴이다. 지금이 아니라 나중이 되면 어떻게 되는지, 그 얼굴을 보면 감히 물을 수가 없어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동거한 케인도 그의 속뜻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알 때도 되지 않았나. 그동안 너무 많은 것을 그냥 넘어갔다. 그가 어디서 왔는지, 몇 살인지, 왜 이러고 있는지, 이름이 진짜 아펠리오스가 맞는지도 모르는데 늘 하는 말의 의미까지 모른다면 케인 입장에서는 너무 억울하다. 적어도 터놓고 신뢰할 수 있는 관계가 되려면 케인도 알아야 하는 것이 있다.
"그게 무슨 말인데?"
'어떤 말?'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는 거."
'······.'
아펠리오스가 갑갑할 정도로 뜸을 들인다. 케인은 분명 맞는 코드를 짚었는데도 엉뚱한 것으로 손가락을 바꿔놓는다. 지금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적막한 표정을 지은 아펠리오스는 입을 먼저 연다. 목소리는 느즈막이 따라온다.
'돌아가면 그만둘 거니까.'
"뭐를 그만둬?"
'전부.'
음악이든, 뭐든······. 케인이 손동작을 뚝 멈춘다. 다시 본 아펠리오스는 표정이 평소처럼 돌아왔다. 그러면서 자기가 코드를 잘못 짚어줬다며 애매모호하게 이야기를 퉁치려고 하는데 케인이 말을 붙잡아 돌아 세운다.
"왜 그러는데."
'그러고 싶어서.'
"갑자기 뭐 때문에?"
'여기 오기 전부터 그랬어.'
"날 찾아온 건 너였잖아."
'그랬지. 하지만 원래 계획은 아니었어.'
아펠리오스가 가사가 쓰인 악보를 도로 가져간다. 조금 더 쓰고 다시 보여주겠단다. 그가 등을 지고 종이 다발을 탁탁 정리하고 있으니 케인은 무릎 위에 올려두었던 기타를 내린다. 악기가 바닥으로 약하게 놓인다.
"원래 계획이란 게 뭔데. 그럼 여긴 왜 왔어."
'재밌을 것 같아서. 당초엔 일주일만 보내려고 했지.'
"재밌으면 계속하면 되잖아."
'그래도 언젠가는 돌아가야 해.'
"그걸 꼭 지금 생각해야 돼?"
'안 그러면 늦어.'
"관두면 이제 뭘 할 건데."
'돌아가서,'
돌아가서······. 아펠리오스가 모호하게 말끝을 흐린다. 케인은 이유도 없이 불안한 생각을 한다. 장난감이라고 우겼지만, 한 발을 남겨둔 총이나 내일이 없어 보이는 라이딩, 한여름에도 끝끝내 내보이지 않는 손목과 몇 대를 맞아도 전혀 아파하지 않아 하던 모습들······. 지금 상상하는 것이 진짜가 될 것 같아 케인은 침대 위에 놓인 아펠리오스의 가방끈을 꽉 쥔다.
"너 있잖아, 혹시······."
'괜찮아, 나는······"
까지 말을 꺼냈는데 건넛방에서 큰 소리가 난다. 우당탕! 누워 자던 이즈리얼이 침대에서 굴러떨어지며 협탁에 머리를 박았다. 아파하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아펠리오스는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기울이면서 못다 한 말을 잇지 않는다. 다만,
'그래서 지금이 아니면 안 돼.'
진전없는 행위의 지속을 멈추고, 대화의 본질을 명확히 한다.
'가사를 쓸 거야.'
"······."
'너도 같이 가자.'
"내 말은······."
'이즈한테는 비밀로 해.'
그렇게 혼자서 주고받는 말을 마무리하고 머리가 찌그러졌을 이즈리얼을 살피러 간다. 케인은 방에 혼자 남겨져, 여전히 의미도 없는 얄팍한 가방끈을 쥔 채로 방을 건너가는 아펠리오스의 뒷모습을 본다. 손바닥에서 땀이 난다. 하지만 왜인지 놓아서는 안 될 것 같다.
다음날
19XX년 7월 25일 오전 11시 23분
마이애미, 플로리다
사우스웨스트 110번지
지는 사람이 앞구르기 하는 거야. 이즈리얼이 호방하게 승부를 걸었다가 대차게 패배한다. 삼세판을 부탁하며 빌어도 아펠리오스가 들은 체도 안 하니 하는 수 없이 땅바닥에 손을 대고 한바퀴 구른다. 마지막에 제대로 발을 딛지 못하고 뒤로 내다 뻗는다. 상처 사이사이에 작은 돌이 끼는 느낌이다. 긴 바지 입을 걸. 세상이 돌고 마냥 푸르기만 한 하늘로 시야가 딱 고정된다.
"다리 아파."
'네가 하자고 했잖아.'
"질 줄 모르고 그랬지."
이즈리얼이 누운 채로 주먹을 들고 설설 흔든다. 한판 더 하자는 뜻이다. 또 진다. 아펠리오스는 그를 측은하게 바라보면서 가위바위보는 대체 어떻게 져 줘야 할지 고민한다.
통화는 끝날 기미가 안 보인다. 케인이 전화부스에 들어간 후로 몇 분인지 모를 시간이 지났다. 케인은 통화 내용을 들려주고 싶지 않아서 방음이 안 되는 집 대신 공중전화를 택했고, 아버지와 연락이 닿을 때까지 생각 이상으로 오래 기다려야 했다. 직업 특성상 당연한 일이지만 가족이랑 전화도 제대로 못하는 현실이 야속하기만 하다. 그래서 케인은 이즈리얼이 부스 앞에서 앞구르기를 하든 물구나무를 서든 제대로 신경쓸 수가 없다.
밖에서는 소리가 전혀 들리지가 않으니 두 사람은 온갖 기이한 행동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 수밖에 없다. 케인이 누구랑 통화하는지도 모르는 그들은 케인이 먼저 말할 때까지 물어볼 생각이 없고, 이즈리얼은 무릎에 돌이 찍혀 피를 보기 직전에 가서야 내기를 멈춘다.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나오니 아펠리오스가 손을 내밀어 일으켜준다. 엉덩이를 털고 전화부스 근처를 지루하게 오락가락한다.
"뉴욕은 지금 비가 오나 봐. 여기는 맑아서 다행이다."
'여기도 종종 흐리고는 해.'
"지금은 아니잖아. 그게 중요한 거지."
마이애미의 한정적인 쾌청한 날씨가 마음에 들었는지 이즈리얼이 우헤헤 웃는다. 엊그제만 해도 바로 이 근처에서 축축한 몸으로 돌아다녔는데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이즈리얼은 뉴욕 사람들은 정없고 항상 바쁘기만 해서 우산도 잘 안 쓴다며, 차라리 이곳에 와서 살고 싶다고 불평을 늘어놓고 아펠리오스는 가만히 듣는다. 그는 고향을 떠난 지 족히 몇 년은 지났다. 그곳이 어땠는지 지금에 와서는 거의 떠올릴 수 없다.
"와이오밍은 어떤데?"
'거긴······.'
"잘 모르는 곳이라 궁금해."
'큰 강이 있었어. 산이랑 들판도.'
"예뻤겠다. 뉴욕은 무슨 빌딩밖에 없거든."
'꽃도 많았지. 겁도 없이 따먹다가 앓기도 했고.'
"안 그래 보여도 사고 많이 쳤구나."
지금이랑 똑같네. 큭큭 웃으며 아펠리오스의 어린 시절을 상상한다. 지금이랑 똑같이 생겼을까. 아니면 케인처럼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을까. 동생이 있다고 했으니 둘은 닮았을까. 가족이 없는 이즈리얼은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어쩐지 입맛이 쓸쓸해져 두서도 없는 고향 이야기를 끝없이 이어간다.
그러다 보면 케인이 나온다. 복잡한 표정이다. 찰싹 붙어앉아 대화하던 이즈리얼과 아펠리오스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를 바라보는 눈빛에 호기심이 담겨있었는지, 케인이 머뭇거리며 말한다.
“아빠야. 군인이라 연락 거의 못해."
"우리 삼촌이랑 비슷하네."
"다음 달엔 집에 한번 올 거야. 그때는 잠깐 짐 빼줘야 돼."
"걱정 마."
가족사는 민감한 주제라는 것을 여기있는 모든 사람이 알고 있으므로, 그들은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돌린다. 자고로 어린 애들은 가족 문제보다는 당장 배를 어떻게 채울지 고민하는 데에 더 많은 시간을 쏟아야 한다.
이즈리얼은 점심을 때울 식당으로 아펠리오스와 왔었던 다이너를 고른다. 꽤 좋은 경험이었나 보다. 어쩐지 지난번 밟았던 밟았던 루트를 그대로 따라하고 있는데 여행자 두 명은 아무런 불만도 없어 보인다. 오히려 좋은지 이즈리얼은 그래봤자 주차장 밖에 안 보이는 창가자리에서 낭만에 젖은 표정을 짓는다. 오늘은 손님없이 내부가 텅 비었다. 전에는 없던 노랫소리가 유독 크게 들린다.
"듣기 좋다."
"처음 들어 보는데."
"좀 다양하게 들어 봐."
"좋아하는 것만 하기도 바쁘다고."
"사람이 어떻게 좋아하는 것만 하고 살아."
자리에 앉아마자 케인과 이즈리얼은 또 티격태격 하기 시작한다. 아펠리오스는 흘러나오는 곡의 노랫말을 머릿속에 새겨넣으며 쓰다 만 가사를 어떻게 마무리지어야 할지 고민한다. 클래시컬한 음악은 이즈리얼에게는 잘 어울렸으나 케인에게는 영 아니고 연주자의 취향에 맞추자니 그럼 보컬이 괴로워 할 테다. 이즈리얼은 노래를 부르겠다 한 적도 없고 이 사실 자체를 모르고 있는데도, 아펠리오스는 당연히 셋이 함께 할 것처럼 과정을 그리고 있다.
케인과 아펠리오스는 샌드위치나 스프 같은 평범한 식사를 주문하고 이즈리얼은 또 단 것을 먹는다. 부글부글 탄산이 올라오는 음료가 거의 팔뚝만한 길이의 잔에 담겨 나온다. 케인은 이즈리얼더러 애들이나 먹는 것을 먹는다며 놀리고 이즈리얼은 그를 포크로 찌르며 응수한다. 아펠리오스가 보기에는 둘 다 똑같다.
노래가 바뀐다. 이번에도 케인 취향은 아니었는지 다이너 사장의 선곡 실력을 의심한다. 어차피 불법 복제한 CD가 분명하다며 근거 없는 뒷담화도 하고 따끈하면서 축축한 음식을 입에 넣는다. 비난하는 말을 해도 표정은 즐거워 보이는 터라, 케인과 마주보고 앉은 아펠리오스는 말과 행동의 불일치에 대해 학습한다. 누군가에게 행동은 감정이 아니고 감정은 행동이 아니다, 라고.
"여기 와본 적 있어?"
"이런 데를 내가 왜 와."
"지금 왔잖아."
"영 별로야.
"사람이 왜 그렇게 부정적이야."
"네가 이상한 거야."
산뜻하고 차분한 분위기는 케인과 안 어울리긴 한다. 그건 아펠리오스도 마찬가지긴 하지만 그는 케인처럼 대놓고 취향을 드러내지 않는다. 애초에 자기 취향이 뭔지 본인도 모른다.
"그럼 넌 뭘 좋아하는데?"
"자극적이어야 마음이 동하지."
"어제 갔던 오락실 같은 거?"
"거기는 너무 애들 장난이야."
"게임 되게 못하던데."
이즈리얼이 그새를 안 놓치고 끼어든다. 아펠리오스가 작게 웃는다. 케인이 째려본다.
“네 음악 취향이 얼마나 잘났는지 알아야겠어."
"디페시 모드. 조이 디비전. 더 큐어. 너는?"
"펫 샵 보이즈, 이레이저, 야주, 그리고, 음···. 펠은 어때?"
'조지 마이클. 왬. 듀란 듀란.'
"그래도 역시 펜타킬이지."
"우웩."
사실 이즈리얼은 펜타킬 노래를 한 번도 안 들어봤다. 비주얼부터 하드코어한게 감히 범접하기가 무섭다. 여느 메탈 밴드의 팬이 그러하듯이 락이나 메탈 듣는 사람은 성격이 더럽고 어두울 것 같다. 케인을 염두에 두고 하는 생각이 맞다.
서로의 취향이 전혀 맞지 않다는 걸 아는 것이, 서로의 취향을 전혀 모르는 것보다 훨씬 낫기 때문에 그들 중 누군가는 사이가 가까워졌다고 느낄 것이다. 녹색 소다를 한입 빨던 이즈리얼이 케인과 아펠리오스에게 너희도 마셔보라며 기울여주면 케인은 거절하고 아펠리오스만 조금 마신다. 한 모금으로 혓바닥이 초록색으로 변하지는 않지만 여린 근육이 액상과당에 녹아내려 하나로 엉겨 붙는 기분이다. 그 색은 결국 초록색일 것이고 스내플보다 더한 단맛이 난다. 지극히 인공적이고 암울한 감정을 단시간에 끌어올리는 데 제격이다.
안 그렇게 생겼는지, 아니면 생긴 것도 그런지는 몰라도 먹는 양은 이즈리얼이 제일 많다. 먹는 속도도 무지하게 빨라서 순식간에 접시를 비우고 할 일이 없어진 입은 생각도 못 해본 주제를 돌려가며 정말이지 쉴 틈 없이 떠든다. 케인보다 말이 세 배 정도 많은 이즈리얼은 라디오 진행자나 캐스터 체질인 듯하다. 아펠리오스가 물리적으로 사람을 팬다면 이즈리얼은 말하는 양으로 사람을 때린다. 케인이 말로써 버거웠던 적은 처음이다.
아펠리오스는 먹는 양이 늘었다. 식빵 끄트머리나 간신히 깨물던 한 달 전과는 다르게 제 몫을 해치울 수 있게 되었다. 그 과정이 전혀 가뿐하지 않지만 옆에서 응원하면 마지막까지 식사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아펠리오스가 케인에게 기타 치는 법을 가르쳐줬다면 케인은 아펠리오스에게 최소한 사람처럼 사는 법을 알려주었다. 과거와 비교하면 가히 장족의 발전이다.
아펠리오스 앞에 놓인 그릇이 바닥을 보이면 이즐리얼이 박수를 쳐 준다. 이즈리얼도 그가 음식을 남기는 걸 숱하게 봐 왔기 때문에 깨끗하게 빈 세 개의 접시는 그야말로 기적과 같다. 아펠리오스는 더부룩한 느낌이 불쾌하고 음식이 당장 목구멍으로 넘어올 것 같지만 애써 눌러 내린다. 이런 게 사람 사는 모습이고 당연한 거라며. 불쾌함도 분명 사는 데에 필수적인 감정일 테다.
"너도 알아 둬."
이런 건 그냥 못 지나친다. 다이너를 나가기 전 자판기에서 껌 세 개를 뽑은 이즈리얼이 케인의 입가로 들이댄다. 선명한 색과 단단한 질감의 껍질이 부담스럽다. 이것마저 거절하려 하다가 저를 보는 눈빛이 너무 반짝거려 어쩔 수 없이 입을 연다. 맞다, 나 얘 싫어했었지, 같은 생각이 떠오르는 순간이다. 아펠리오스도 치아에 깡깡 부딪히는 값싼 불량식품의 맛을 느끼면서 다리가 불편한 케인이 나올 때까지 문을 잡고 서 있는다. 어린 애들과 유치함. 배려와 친절. 언제가 돼야 습득할 수 있는지 탄식하고, 케인이 지나오자 손을 놓는다. 문이 닫히자 끄트머리에 달린 종이 딸랑, 울린다.
19XX년 7월 25일 오전 12시 35분
마이애미, 플로리다
골든 쇼어스 해변
"알바 하루 뺐어. 친구 왔다니까 아저씨가 빼주더라."
근데 수요일엔 출근해야 해. 아르바이트 갈 시간에 이즈리얼에게 끌려 바다에 온 케인이 눈짓하는 아펠리오스를 흘끔 보고 말한다. 이 바다는 다시는 못 올 줄 알았는데. 아펠리오스는 그런 사고를 쳐 놓고도 당당히 같은 곳으로 돌아왔다. 뭐, 어차피 발목이 아파서 하루 정도는 빼야 했다. 그걸 마음씨 좋은 사장님이 다른 이유로 먼저 배려해 준 거고. 아펠리오스를 붙잡고 한 발로 서서 조심조심 양말을 벗던 이즈리얼이 눈을 번쩍하니 크게 뜨고 좋아한다.
"우리는 친구구나."
"말이 그렇다는 거지."
"네 마음 잘 알겠어."
"야, 난 네가 싫어."
지금까지 잘 놀아놓고 인제야 싫은 티를 낸다. 케인은 아직도 자기 마음을 못 정했다. 분명 처음 봤을 때는 정말 마음에 안 들었고 잡지에 실린 모습을 보며 시기했는데, 사람 냄새를 풍기며 전화로 징징대던 것이나 다시 만나게 된 모습이 그리 밉지 않다. 첫 만남에서 그리도 매몰차게 굴었던 건 단지 그때의 기분이 안 좋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나는 쟤를 싫어하는 게 맞을까. 정답은 몰라도 케인은 이즈리얼을 바다로 밀어 넘어뜨리고 싶다. 그래도 신발을 다 벗을 때까지는 기다려주기로 한다.
사진을 찍는 관광객이나 해수욕하는 동네 주민이 많다. 양말과 신발을 전부 벗은 이즈리얼은 물에 발목까지 담구지만 낮은 파도가 쳐 종아리까지 젖는다. 상처가 소금물을 먹어 쓰라리다. 그러나 뉴욕에서 정신이 고생하는 것보다 마이애미에서 몸이 고생하는 게 저울질도 필요 없을 만큼 아늑하다. 이 포근함을 마다할 이유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이즈리얼은 가방을 내려놓고 바지를 짧게 걷으면서 미소한다.
"엄청 차갑다."
"여기 갈아입을 옷 없다, 알지?"
"그 정도는 알아."
너도 들어와 케인, 하니 그가 고개를 젓는다. 아무리 꼬셔도 안 들어올 생각인가 보다. 아버지가 오기 전까지는 말끔히 나아야 했던 케인 입장에서는 작은 운동 하나도 조심히 했다. 그런 것치고는 오락실에 상당히 오래 서있긴 했지만 자기 의지를 누가 말리겠는가. 바닷물에 손을 씻던 아펠리오스는 신발 벗을 준비를 한다.
'수영할 줄 알아?'
"안 해봤는데."
'괜찮아.'
아펠리오스는 자기도 수영할 줄 모르면서 신발을 벗고 이즈리얼의 손을 잡아주며 바다로 들어간다. 가벼운 수영까지는 괜찮겠지만 (물론 의사는 안 된다고 했다.) 발목에 덧댄 지지대 때문에 케인은 물에 안 들어가겠다고 분명히 해두었는데, 맥주병 두 명이 당당히 저승길로 걸어들어가니 우려되지 않을 수 없다.
"너도 못 하잖아."
'괜찮다니까.'
"펠, 진짜 괜찮은 거 맞아?"
아펠리오스는 허리까지 잠기는 부근까지 이즈리얼을 데려오고, 키 차이 때문에 이즈리얼은 더 잠긴다. 그는 이즈리얼의 양쪽 팔뚝을 경건하게 잡고 결의가 단단한 표정으로 이즈리얼을 본다. 이즈리얼이 멍청하게 눈을 끔뻑이며 바라본다.
"펠?"
'괜찮아.'
우리가 빠지면 케인도 알아서 들어올 테니까. 아펠리오스는 붙들고 있던 이즈리얼의 팔뚝에 힘을 강하게 실어 옆으로 밀어 넘어뜨리고, 함께 물에 빠진다. 빠져 죽을 깊이는 아니었으나 갑작스럽게 발이 안 닿게 되면 수심이 낮은 곳에서도 충분히 죽을 수 있다. 총 하나에 벌벌 떨던 케인처럼 이즈리얼도 죽음의 공포를 느낄까? 그 얼굴을 꼭 보고 싶다.
두 사람이 동시에 사라지니 케인이 쌍욕을 하며 지지대를 급하게 풀고 절뚝절뚝 물속으로 들어온다. 너무 급해서 신발도 못 벗었다. 아펠리오스는 금방 땅을 디뎠지만 이즈리얼은 여전히 버둥거린다. 케인은 수면에 물미역처럼 떠 있는 이즈리얼의 머리카락을 보고 그를 건져 올린다. 옷을 잡고 들어 올리니 물먹은 솜처럼 힘없이 딸려 나온다. 완전히 푹 담겼다. 젖은 머리가 얼굴에 축 달라붙고 비 맞은 빨래처럼 옷에서 물을 뚝뚝 흘린다.
아펠리오스는 연신 기침을 해대는 이즈리얼이 어떠한 표정을 지을 때까지 기다린다. 점차 기침이 멎고 젖은 손등으로 젖은 얼굴을 닦는 의미 없는 행동을 반복한 이즈리얼이 마지막엔 활짝 웃는다.
"죽는 줄 알았네."
'장난이었어.'
"진짜 죽을 수도 있는 거 알아?"
케인은 아펠리오스의 뒤통수를 때리면서 얼른 사과하라고 부추긴다. 그런 건 해본 적 없다. 남을 위로할 땐 사과할 필요 없고 남이 화낼 땐 같이 화내면 되고 남이 기쁠 땐 그저 가만히 있어도 된다. 똑같이 푹 젖은 아펠리오스는 무겁게 내려앉은 머리카락을 넘기면서 눈을 상처 난 다리로 내리깔았다가 다시 올린다.
'미안해.'
이거면 될까. 진심인지도 모르는 이런 말 한마디로. 그러나 이즈리얼은 그걸로 충분했는지 활짝 웃던 얼굴을 바꾸지 않는다. 자기 장난을 당했던 사람 중 저런 표정을 지었던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괜찮아!"
저런 말을 했던 사람도. 이즈리얼이 이상한 건지, 아니면 그동안 쌓은 데이터가 잘못된 건지······. 아펠리오스는 그에게 왜 괜찮을 수 있느냐고 물으려고 하였으나 이즈리얼이 케인에게 물을 뒤집어씌우는 바람에 끝내 하지 못했다. 한쪽 발로 지탱해 서있던 케인이 뒤로 넘어간다. 사방이 물이 튀기고 사람 빠진 자리에 물방울이 부글부글 올라오자 이즈리얼이 손을 넣어 잡아준다. 축축해진 케인이 나온다.
19XX년 7월 26일 오후 9시 46분
마이애미, 플로리다
사우스웨스트 104번지 센트럴하이츠 505호
사람이 동강 나고 머리가 터진다. 바닥에 내장이 흩뿌려지고 타일에 피가 낀다. 쿠션을 끌어안고 눈만 빼서 화면을 쳐다보는 이즈리얼이 사람 하나가 더 죽을 때마다 역겨워 죽겠다는 표정을 짓는다. 소파에 껄렁하게 앉아서 턱을 괸 케인은 빈 콜라 캔을 구기면서 어이없어한다.
"이게 성인물이 아니라고?"
아펠리오스가 고른 영화는 비디오 커버부터 심상치 않았지만 내용은 더 심상치 않다. 동물 가면을 쓴 자경단이 러시안 마피아를 죽이고 다니는 스토리인데 처음부터 끝까지 대사는 하나도 없고 대신 시체만 쌓인다. 어떤 미친 감독이 이런 걸 찍을 생각을 했는지, 그리고 어떤 미친 관객이 이런 걸 볼 생각을 하는지 영 이해되지 않으나 지금 자기들이 이걸 보고 있다. 이런 걸 찾아온 것도 재주라면 재주겠다. 취향이 아니더라도 그냥 탑 건이나 보자고 할 걸. 이즈리얼이 뒤늦게 후회한다.
죽기 직전의 인물들이 각자 겁에 질려 울거나 빌면서 살기 위해 발악한다. 죽음을 앞둔 이들의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그 얼굴이 퍽 재밌어서, 아펠리오스는 멍한 표정을 짓는다. 눈을 깜빡이거나 눈동자가 움직이는 게 전혀 없어 그냥 눈만 뜨고 있는지 아니면 영화에 집중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다. 입을 벌리고 고개를 기울인 채로 가끔 손톱을 잘근잘근 씹기도 하는데, 무서워하거나 불쾌해하는 기색이 전혀 없고 그냥 텅 빈 인형 같다. 완만하게 휜 엄지손톱을 단단한 이가 깨물 때마다 머리가 하나씩 떨어져 나간다.
영화가 너무 징그럽다며 호들갑 떨던 이즈리얼은 아펠리오스의 짧아진 손톱을 보고 그의 손을 잡아 내린다.
"뜯지 마, 매니큐어도 발랐잖아."
넋이 나가서 화면을 보던 아펠리오스의 눈에 초점이 돌아온다. 앞이 선명해지고도 정신을 못 차린 그가 이즈리얼을 돌아본다.
'뭐라고 했어?'
"손톱 뜯지 말라고."
'내가 그랬어?'
"아까부터 계속."
화면에 튀긴 피만큼 아펠리오스의 손톱에는 톱니 모양 잇자국이 남는다. 한계까지 짧아진 손톱을 보고 아펠리오스는 마른세수한다. 영화는 결말부에 치달으며 분위기를 고조한다. 총소리에 귀가 먹먹해지고 눈이 빨갛게 물들 정도로 피를 많이 봤는데 아직도 죽을 사람이 남았다. 케인은 눈이 붉은 아펠리오스는 이런 영화를 많이 봐서 그렇게 된 거라며 우스갯소리를 하다가, 아펠리오스가 부정하지 않고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니 급작스럽게 입을 다문다.
영화는 핵이 터져 등장인물이 몰살당하는 것으로 끝난다. 전개도 최악인데 결말은 더 최악이다. 이즈리얼은 허무해하며 기지개를 켜고 케인은 이런 작품에 뭘 기대했느냐며 시간만 버렸다고 아펠리오스를 흘끔 본다. 아펠리오스는 구름이 번지고 모두가 먼지가 되어 사라지는 것을 멍하게 보다가 잠깐 자리를 비우겠다며 화장실로 몸을 피한다. 케인과 이즈리얼은 자기가 고른 영화가 졸작인 심정을 이해해 주자며, 다음 볼 영화를 고르며 또 싸운다. 아펠리오스가 들어간 화장실이 지극히 고요하다.
아펠리오스는 두 손으로 세면대를 잡고 고개를 푹 숙인다. 변기를 잡고 한참을 있다가 결국 몸을 일으켰다. 뭐가 나올 것 같은데 아무리 헛구역질 해도 나오질 않는다. 세면대 구멍으로 식은땀이 뚝뚝 떨어진다. 받아들이기에 영화가 너무 잔인했던 게 아니다. 이러는 이유를 도저히 모르겠다. 단지 속이 울렁거리고, 오한이 들고, 머리가 어지러워서······.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 같다. 밖에 있는 애들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다.
영화가 끝나고 서로 떠드는 소리가 문을 넘어 들린다. 끔찍한 것을 보고도 금방 지루해하거나 웃기도 하는 목소리들이 낯설다. 나도 저런 소리를 내보던 때가 있었나. 물을 틀어 얼굴을 닦고 거울을 본다. 얼굴에 남은 흉터와 멍 자국 위로 맑은 물방울이 주룩 미끄러진다. 수건으로 닦아내니 파랗게 물든 피부가 눌려 아프다. 색이 금방 빠질 줄 알았는데 며칠은 더 기다려야 한다.
거울에 비친 저를 노려보고 있으니 케인과 이즈리얼이 노크한다. 펠, 괜찮아? 어디 아픈 건 아니지? 메스꺼움의 원인이, 어쩌면 필요 이상으로 마음이 착한 저 친구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아펠리오스는 금방 대답하지 않고 시간을 끈다. 지금까지 살아온 과정 중 단 하나의 돌연변이는 저 둘의 존재이다.
아펠리오스는 밖에서 들려오는 물음에 끝까지 대답하지 않다가 밖으로 나온다. 두 사람이 그의 안색을 보고 끔뻑 놀란다.
"왜 이렇게 창백해?"
"네가 고른 영화 보고 병난 거 아냐?"
"어제 바다 들어갔던 게 안 좋았나?"
"사람이 완전 시체가 됐네."
안정적인 생활, 다정한 사람들, 생각하지 않아도 될 미래, 물비린내 나는 공기······. 그 모든 것이 갑작스레 위화감이 들어 아펠리오스는 얼굴을 쓸어내린다. 피부가 아래로 늘려졌다가 다시 돌아온다.
'괜찮아.'
"말로만?"
'괜찮아.'
"가서 좀 누워. 오늘은 무리하면 안 되겠다."
이즈리얼이 등을 밀어 침대로 넣으려는 걸 아펠리오스가 제지한다. 침대 대신 영화가 끝난 티비를 마주 보는 소파에 앉아 의미 없는 화면을 무표정으로 쳐다본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다 보면 현기증이 천천히 가신다. 고개를 뒤로 꺾은 아펠리오스는 내가 갑자기 왜 이러는지, 그런 물음도 하지 않고 소리 없이 천장만 본다. 케인과 이즈리얼은 아펠리오스의 영화 후유증이 꽤 컸다고 생각하며 눈빛을 교환하다간 이제 재밌는 거나 보자며 다른 영화를 튼다. 이즈리얼은 사실 할리갈리를 하고 싶었지만 아펠리오스의 상태 탓에 조용히 게임 세트를 치운다.
3일 후
19XX년 7월 29일 오후 9시 46분
마이애미, 플로리다
사우스웨스트 104번지 센트럴하이츠 505호
다들 어디 가? 잠이 덜 깬 이즈리얼이 비몽사몽 물으니 케인이 담백하게 대답한다. 알바. 옷을 갈아입던 케인은 입을 옷이 없어 맨몸으로 돌아다니는 아펠리오스를 보고 경악한 뒤 옷가지를 챙겨준다. 이즈리얼은 산발이 된 머리로 눈을 비비며 침대에서 내려오다가 나갈 채비를 하는 두 사람을 보고 눈을 제대로 뜬다.
"펠도 가는 거야?"
"어. 오토바이 수리 끝났거든."
"잠깐, 그거 고장 났었어?"
어쩐지 안 보이더라니. 자기랑 있을 때만 해도 멀쩡하던 게 무슨 일이 있었길래 수리까지 받게 되었을까. 아펠리오스의 장난 스케일을 생각하면 그것도 분명 장난 때문에 그렇게 됐다고 설명할 테다. 이즈리얼은 가로수에 들이받히는 바이크를 상상하며 혼자만의 생각으로 공포에 떤다.
아직 잠옷 차림인 이즈리얼은 자기도 옷을 가져온다.
"나도 갈래."
"펠은 금방 온대. 난 일하다 오겠지만."
"그래도 갈래."
"넌 안 돼."
"왜 안 돼?"
"이상한 사람 많이 와. 너 한번 만져보려고 악을 쓸걸."
"그럼 펠은?"
"쟨 눈으로 욕하잖아. 너도 그럴 수 있어?"
그건 암만 생각해도 안 되겠다. 나쁜 사람이래도 초면에 욕을 하라니. 이즈리얼이 대답을 꾸물거리니 케인은 한숨을 쉬고 넌 집에서 쉬라며 손을 휘적인다. 서운한 티를 냈더니 아펠리오스는 최대한 빨리 오겠단다. 그가 없는 동안 정비소에서 몇 번 일했었는데 오늘은 관둬야겠다. 이즈리얼은 마음이 상할 뻔했지만 아펠리오스가 드물게도 먼저 제 생각을 해주니 기분이 활짝 풀린다.
두 사람을 보내고 이즈리얼은 집에서 혼자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한다. 잠이나 더 잘까, 아니면 빌려온 비디오나 한 번 더 볼까, 그것도 아니면 욕조를 빌려 내내 몸을 녹일까. 잠은 진즉에 깼고 비디오는 질릴 만큼 봤으니 마지막 선택지를 고르기로 한다. 그는 혼자 있는 집에서 목욕을 할 때 주로 헐벗고 집안을 활보했는데 여기는 남의 집인 만큼 특별히 참기로 한다.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물이 욕조에 채워진다. 아무리 여름이래도 따뜻한 물은 필요한 법이다. 열린 욕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약간의 추위를 느낀 이즈리얼은 발끝부터 천천히 담근다. 적정 온도보다 뜨거운 탓에 발가락 사이로 따끔한 통증이 들어온다. 그러나 찬물을 더 틀지 않고 그대로 다리를 집어넣는다. 상처가 난 반대쪽 다리를 집어넣으면, 상처 부위를 불로 지지는 것 같다. 그만큼 아프지만, 그만큼 좋은 기분이다.
목까지 물에 잠긴 그는 입을 물에 넣고 부글부글 소리도 내어 보면서 두 사람이 언제쯤 돌아올지 헤아린다. 그 정비소는 딱 한 번 앞을 지난 게 전부이지만 집에서 걸어가기엔 생각보다 멀어 보였다. 케인이 일을 끝내는 시간이 언제인지도 모르니 아펠리오스가 말한 '최대한 빨리'가 될 때까지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지도 모른다. 갑자기 혼자가 된 이즈리얼은 적적한 기분에 발끝을 첨벙거린다. 욕조에서 물이 넘친다. 뉴욕에서는 제발 혼자가 되고 싶었는데 여기에서 혼자는 외롭다.
이즈리얼은 불현듯 처음 만났던 케인이 제게 무례했었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많이 다쳐있던 그 애는 신경이 곤두서고 당장 물어뜯을 것처럼 굴었으면서, 그때보다 더 다쳐있는 지금은 저를 친구라고 부르며 집 살림에 얹혀 줄 만큼 대우를 잘 해준다. 살가운 성격은 아닌 사람이지만 절대로 못된 사람은 아닐 것이다. 그때는 단지 기분이 많이 안 좋았던 거고, 그러니까 눈치 없는 나를 모질게 굴었던 거고······, 지금은 나를 싫어한다고 말하면서 퍽 다정하게 대할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의 기분을 건드린 상대를 미워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이즈리얼은 알고 있다.
한참을 부글대다가 물에서 머리를 뺀다. 따뜻한 물에 들어갔다가 찬 공기에 닿으니 살이 시리다. 물소리 외에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내 집도 이것과 비슷했는데 분위기는 전혀 다르다. 고즈넉한 집안과 세 사람분의 목소리, 상냥한 사람의 편지, 밤새도록 볼 수 있는 영화라든지. 아직 식지 않은 수면을 보다가 눈을 감은 이즈리얼은 다시금 생각한다. 역시 부럽다. 케인이 부럽고, 그와 완전히 섞여 들어갈 수 있는 아펠리오스가 부럽다. 전혀 다르지만 서로 닮은 두 사람이 부럽다.
잠이 다 깼다고 생각했는데 욕조에 들어와 있으니 스멀스멀 졸음이 몰려온다. 이즈리얼은 물에서 나와 찬물로 세수한 뒤 욕조에 물을 빼고 뜨끈한 살을 수건으로 대충 닦는다. 그러다가 원래 입던 옷을 케인 방에 두고 온 것을 기억하고, 몸집에 비해 너무 큰 잠옷을 끌고 조심스럽게 케인 방으로 간다.
남의 방에 마음대로 들어가는 취향은 없지만 이 정도면 어쩔 수 없는 사유라고 합리화하고, 도둑질이라도 하는 것처럼 문틈으로 슬쩍 들여다본다. 물론 아무도 없다는 건 안다. 이 행위는 최소한의 양심 표현이다. 옷은 책상 한구석에 가지런히 접혀있다. 원래 입었던 것보다 각이 더 잘 접혀있어서 재밌다. 미리 말은 안 했지만 잘 다려서 정리했나 보다.
옷을 가지고 나가려니 잠옷에 달린 끈에 손잡이가 걸려 책상 서랍이 열린다. 열쇠 구멍이 있길래 잠겨있는 줄 알았는데 잘만 열린다. 서랍 안에는 봉투가 열린 편지가 한가득 들어있다. 반으로 대충 접혀 입을 벌린 편지지도 있다. 이즈리얼은 보면 안 될 것을 본 것처럼 심장이 덜컹거린다. 긴장한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린다. 편지의 뒷면으로 겉면에서 보았던 정갈한 필체가 비친다. 그 순간 이즈리얼은 강력한 충동을 느낀다. 그러지 말아야 할 것을 알지만, 읽어보고 싶다.
남의 방에 들어오는 것도 모자라 남의 편지를 몰래 읽는 것이 얼마나 추접스러운 일인지 알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나 많은데 하나쯤이라면, 그리고 그쪽에서 먼저 서랍을 잠그지 않았다면······. 이즈리얼은 불안한 기색으로 방 밖을 여러 번 살피며 기어코 가장 위에 있는 편지에 손을 댄다. 펜으로 꼭꼭 눌러썼는지 만지기만 해도 글자가 오갔던 흔적이 만져진다. 남의 편지가 궁금한 건 당연하잖아, 그렇지? 자기 자신인지, 아니면 다른 누구인지를 설득하며 접혀있는 종이를 편다.
얼마 후 아펠리오스가 돌어온다. 급하게 서랍 문을 닫고 아무렇지 않은 척 옷가지를 들고 방에서 나온다. 아펠리오스는 네가 왜 거기서 나오느냐는 눈빛조차 하지 않는다. 이즈리얼은 괜히 먼저 찔리며 옷을 케인 방에 두고 왔다고 알아서 해명한다. 아펠리오스는 아무렴 좋다는 표정이다.
1층으로 내려가 보니 오토바이는 완벽하게 수리되어 있다. 얼마나 망가졌었는지는 모르지만 도색도 새로 되어있는 것이, 저번에 본 것보다 더 새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무엇보다 훌륭한 건, 아펠리오스가 드디어 헬멧을 샀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머리통으로 차 사이를 질주하던 걸 생각하면 정말 엄청난 발전이다.
"드디어 살고 싶은 생각이 들었구나!"
'그게 무슨 뜻이야?'
"헬멧이 생겼잖아."
'아저씨가 사라고 했어. 안 그러면 오토바이 안 돌려준대.'
"그거라도 어디야."
이즈리얼은 웃으면서 헬멧 머리꼭지를 펑펑 때리면서 아펠리오스에게 씌워준다. 검은색 광택이 나는 재질이 그에게 아주 잘 어울린다. 실드를 열어보니 눈만 보여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더욱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 이걸로 생존 확률이 조금이라도 더 올라갔다면.
"케인은 일하는 중?"
'한창.'
"어떤 일인지 궁금했는데."
'세차 해. 이상한 사람 많긴 하더라.'
"너도 본 적 있어?"
'나도 잠깐 일한 적 있어서. 몇 번 봤어.'
"어떤 사람들인데?"
'케인이랑 자고 싶은 것 같던데.'
"역겨워!"
이즈리얼이 오만상을 지으니 아펠리오스가 헬멧 안쪽에서 작게 웃는다. 그 자리에 케인이 아니라 이즈리얼이 있었으면 쪽도 못 쓰고 휘둘렸을 것이다. 아펠리오스는 자기가 이즈리얼의 고집을 꺾을 수 있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제가 아니라 케인이었으면 불가능했겠다.
"나도 가보고 싶었는데."
'케인은 널 걱정해서 그런 거야.'
"안 그렇게 생겨서 마음은 참 착하다니까."
'내가 말했어. 다음엔 같이 오자고.'
"진짜로? 거기 아저씨도 한번 뵙고 싶은데!"
'아저씨도 계셔. 월요일이면 같이 가도 될 거야.'
이즈리얼이 헤실헤실 웃으며 좋아한다. 아펠리오스는 해맑은 웃음을 보면서, 곧 가사가 완성될 거라는 말은 아끼기로 한다. 아직은 좋다는 감정을 마음껏 누리기를 바란다. 동시에, 이즈리얼은 몰래 편지를 읽었다는 사실을 무덤까지 가져가기로 한다. 화창했던 날씨가 조금씩 어두워진다. 그러나 늘 그랬던 것처럼, 시간은 금방 지날 것이다.
약 일주일 뒤
19XX년 8월 6일 오전 1시 21분
마이애미, 플로리다
어디였더라, 케인네 집. -A
너 아직도 주소 못 외웠어? -K
새벽 내내 천둥번개가 치고 비가 많이 내린다고 했다. 그 말인즉슨 새벽에 기타를 쳐도 민원이 안 들어온다는 뜻이다. 이즈리얼이 온 뒤로 버스킹을 한 번도 나가지 않아, 그가 연습하는 게 궁금하다며 한자리를 꿰찼다. 자기도 옛날에 기타를 배웠었는데 안 배우느니만 못한 실력이었다며 줄을 몇 번 튕겨보고 돌려준다. 아무래도 악기보단 옆에서 떠드는 게 더 재밌는지 속절없이 한담이나 늘어놓는다.
"저 상자에는 뭐 들었어?"
이즈리얼은 처음부터 케인의 책상 위에 처음부터 올려져 있었던 '버릴 것' 상자를 가리킨다. 상자의 가장 위층에는 악보가 들어있었는데 버릴 것이라고 써놓은 것치고는 지금 잘 꺼내서 연주하고 있다. 케인은 알려주지 않으려다가 뭐 대단한 거라고 숨겨야 하는가 의구심이 든다. 전 밴드는 완전히 족쇄 같았는데 아펠리오스라는 더 큰 풍파를 맞아 보니 그다지 심각한 일도 아닌 것 같다. 케인은 귀찮다는 듯 순순히 상자를 내려 뒤집는다.
안에는 옛날 사진과 밴드 콘서트 티켓, 영화 포스터, 피크와 영문 모를 영수증이 잔뜩 들어있다. 사진과 포스터는 하나같이 억지로 떼어내서 가장자리가 다 구겨졌다. 이즈리얼은 팔각형이 된 사진을 보면서 저 중에 케인은 어디 있는지 찾는다. 하지만 찾을 필요도 없이 분홍 머리가 좋기도 하고 안 좋기도 한 의미로 이목을 끄는 바람에 바로 눈길이 간다. 찍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지금이랑 똑같은 얼굴이다. 나머지 사람들은 전부 무섭게 생겼다만 운동하는 애들보다야 음악 하는 애들이 낫다.
"지금이랑 똑같이 생겼네."
"몇 달 전 사진이니까."
"벽에 붙여놨었지?"
모서리가 찢기고 구겨진 사진은 수상하고 어릴 적 사진 하나만 덜렁 붙어있는 벽은 이상하다. 케인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발로 들어있는 사진을 착잡한 눈으로 쳐다본다. 전부 의미 없어진 추억. 애초에 그런 걸 추억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즈리얼은 그런 케인을 물끄러미 보다가 지금까지 함께 찍었던 폴라로이드를 전부 가지고 온다. 애들이 앞뒤 안 가리고 막 찍어댔기에 양이 꽤 된다.
"받아."
"뭔데?"
"너 줄게. 방 꾸며."
"됐어, 너나 가져."
"가져가래도!"
이즈리얼은 케인의 옷깃을 잡아당겨 그 안으로 넣어버린다. 케인의 맨살에 빳빳한 재질의 폴라로이드가 철썩 붙는다. 짜증을 내며 옷 속에서 사진을 꺼낸 케인은 싫은 티를 내면서도 한 장 한 장 넘겨본다. 다이너나 바다에서 찍었던 사진이나 바다나 차 안에서 창밖을 찍은 사진도 있다. 보통 이런 건 여행 기록으로 남기는데 이걸 다 줘도 괜찮을지 모르겠다.
"난 사실 사진을 싫어해."
"갑자기 또 뭔 소리야."
"찍는 게 좋아."
"그럼 네가 찍은 건 네가 가져야지."
"선물하는 건 더 좋고."
이즈리얼은 제 부모의 사진을 생각하면서, 사연도 모르는 케인이 이것들을 어떤 심정으로 떼어냈는지 묘하게 공감할 수 있다. 이즈리얼도 같은 충동을 느낀 적이 많다. 찢어버리고, 구겨버리고······. 하지만 그럴 수 없으니 결국 어디엔가 간직하는 것이다. 지난 일마저 쉽게 버릴 수 없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 일인지 그는 잘 알고 있다.
하여튼 줬으니 한곳에 모아두고는, 케인은 다시 상자를 정리한다.
'이건 뭐야?'
그러던 중 아펠리오스가 심상치 않은 걸 발견한다. 사진 맨 밑에 깔려있던 그림 한 장이다. 그림의 뒷면을 보고 저게 뭐였는지 떠올리느라 잠깐 눈을 깜빡이던 케인은 은근히 자랑스러워한다. 밴드에 있을 적 그렸던 밴드 로고다. 진한 스모키 화장을 한 플로리다산 악어가 기타를 들고 죽음의 락을 하고 있다. 자기가 하나하나 디자인하고 그렸다며 갑자기 신나서 떠드는데 두 사람의 표정은 별로 좋지 않다.
'아 이건 좀······.'
"세 번 보면 죽는 그림 같아."
"안목이 더럽게들 없네."
"네 취향이 형편없는 거야."
케인은 혀를 차며 락을 모르는 애들이랑 무슨 대화를 하겠냐며, 그림과 상자를 치워버린다. 다시 연습에 집중할 때다. 이즈리얼은 바닥에 앉아있는 케인 앞에 드러누워 침대에 앉은 아펠리오스를 올려다보며 케인의 취향이 얼마나 끔찍한지 기나긴 연설을 한다.
케인도 실력이 많이 늘었다. 아펠리오스의 지시 없이도 복잡한 코드에 손을 댈 수 있게 되었고 실수도 확연히 줄었다. 케인은 아펠리오스에게 고마워해야 할 지 아니면 어차피 거래한 것이니 고마워할 필요가 없는지 잠깐 고민한다. 아펠리오스는 부러 가사가 적힌 악보를 펼치며 케인과 두 개의 기타 라인을 연주하며 이즈리얼의 반응을 본다.
가만히 연주나 듣던 이즈리얼이 문득 악보를 보았을 때, 저번에는 가사가 있는 악보가 하나도 없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한다. 고개를 기울이며 뒤집힌 글자를 읽어보려 하니 아펠리오스가 손을 반짝 뻗어 보기 좋게 악보를 돌려준다. 이런. 몰래 보려고 했는데. 갑작스럽게 눈앞까지 악보가 들이밀어지니 이즈리얼이 눈에 띄게 당황한다. 이즈리얼에게 가사의 ㄱ도 꺼내지 않았던 케인은 슬슬 때가 되었다고 추측한다.
"악보가 참 멋지다."
"펠이 쓴 거야."
'궁금하면 읽어 봐.'
"아니, 그냥, 잠깐 본 거야."
'자세히 봐도 돼.'
이즈리얼은 하는 수 없이 악보를 들고 가사를 천천히 읽는다. 얘가 가사까지 쓰는 줄은 몰랐는데. 두 사람의 시선에 진땀을 빼가며 머릿속에 잘 들어오지 않는 문장을 억지로 쑤셔 넣는다. 고생 고생을 해서 읽었지만 내용이 꽤 좋은 건 사실이다. 이걸 왜 자기한테 보여준 건지 의문이지만. 뭐, 궁금해하는 것 같으니까 보여줬겠지만 이즈리얼은 왜인지 다른 생각이 든다.
"어떠냐?"
"마음에 들어."
"너 노래 할 줄 알아?"
"알긴 알지."
'그럼 네가 부르면 되겠다.'
아펠리오스는 이즈리얼이 대답도 하기 전에 펜을 들어 악보 구석에 글씨를 적는다.
GUITAR. APHELIOS, KAIN
VOCAL. EZREAL
"I가 아니라 Y거든."
'복잡하네.'
글자가 바뀐다. 대충 직직 그었다.
GUITAR. APHELIOS, KAIN KAYN
VOCAL. EZREAL
내용을 가장 늦게 확인한 이즈리얼이 악보를 손으로 더듬으며 더 이상 쓰지 못하게 한다.
"아니, 나 노래 못 해! 안 한 지 엄청 오래됐다니까?"
'한 번이면 돼.'
"그 한 번도 못 하겠다고!"
'지금이 아니면 안 돼.'
"어째서?"
'······.'
아펠리오스가 대답을 안 하니 케인이 팔꿈치로 그를 툭 친 다음 대신 대답한다.
"얘 곧 간대."
"어디를?"
"집에."
"왜!!???"
"그럼 평생 여기 사냐?"
"그럼 좋겠어!!!"
"내 집이야!!"
언젠간 그럴 줄 알았지만 그런 날이 벌써 올 줄은 몰랐다. 이즈리얼이 한껏 징징대고 있으니 아펠리오스가 그에게 악보를 건네준다. 구석에 적힌 제 이름이 생경하다. 다른 것도 아니고 갑자기 노래라니. 도저히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안 든다. 이즈리얼은 다시 돌려주려 하다가, 그의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는 말을 곱씹는다. 저는 집에 돌아갔다가도 다시 왔는데, 그는 꼭 다시 오지 않을 것만 같다. 가까운 거리도 아니고 다음 달이면 다시 바빠질 테니, 정말 그의 말 대로 '지금이 아니면' 볼 수 없을 테다.
"그런데 난······, 노래가 재미없어."
'하지만 우리한텐 네가 필요해.'
"다른 사람 구할 수 없어?"
'케인 친구 없어.'
"야, 왜 날 때리는데."
'노래 체질도 아니더라.'
"나 좀 그만 괴롭혀."
"케인 그렇게 안 봤는데."
입으로는 농담을 하지만 기분은 별로 그렇지 않다. 이즈리얼에게 노래는 굉장히 중대한 제안이다. 노래 부를 적의 트라우마가 상당히 강하게 남아 있어서, 단순히 '내가 필요하다'는 말 정도에 넘어갈 수 없다. 하지만 그 상대가 아펠리오스라면······, 그리고 그가 곧 떠나고, 나도 떠나야 한다면. 억지로라도 웃으며 카메라 앞에 서게 된 것처럼, 다시 가사를 입에 담을 수도 있지 않을까, 라고 이즈리얼은 생각하다가 끝내 다시 갈등한다. 그런 이즈리얼을 케인이 기다려주고 아펠리오스가 종용한다.
'정말 싫으면 안 해도 돼.'
"싫은 게 아니야, 자신 없는 거지."
'그건 해보기 전까지 몰라.'
하지 않으면 모른다는 말, 어찌나 진부하고 당연한 말인가. 하지만 그런 것에도 설득당하고는 하는 게 사람이기에 이즈리얼의 갈등이 한 쪽 방향으로 미세하게 기운다. 싫으면 안 해도 돼. 딱 한 번만이야. 그리 되뇐다.
"······그럼 한 번만 불러볼게."
‘지금?’
"뭐? 지금은 안 돼!"
"안 될 건 또 뭐야?"
"준비가 안 됐어."
‘그럼 하지 말고 해.’
"안 된다니까."
하지만 저러면서 결국 불러줄 걸 알기 때문에 케인은 그를 더욱 놀린다. 아펠리오스는 그가 준비를 끝내고 불러주길 기다리며 조용히 하라면서 케인을 한 대 친다. 찰싹 소리가 나니 케인이 조용해지고 이즈리얼이 웃는다. 고작 자기 친구들에게 들려주는 건데도 필요 이상으로 긴장한 이즈리얼은 마르는 입술을 적시면서 몇 분이고 몇 시간이고 뜸을 들여서야 간신히 입을 연다.
부드러운 목소리다. 그의 히트곡에서 들었던 목소리에서 전혀 변하지 않았다. 감미롭고 따뜻해서 그대로 썩히는 게 아까울 정도다. 노래는 길고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펠리오스는 그의 노래를 원래 알고 있었던 것처럼 만족한 채로 듣고, 케인은 노래를 들으면서도 어딘가에 정신이 팔려 제대로 집중하지 못한다. 마음이 편하지 않다. 그날이 다가오고 있다.
이틀 후
19XX년 8월 8일 오후 5시 47분
며칠 뒤면 아버지가 오신다. 막상 날짜가 다가오니 케인은 안절부절못하며 어쩔 줄 모른다. 그날 잠깐 짐을 빼놓으라고 애들한테 말해 놨으면서 그게 언제인지는 아직 말 못했다. 어째서인지 입을 떼기가 영 어렵다. 아버지 이야기를 '제대로 된' 친구들 앞에서 하는 건 처음이라, 타이밍을 어떻게 재야 할지 모르겠다. 그냥 아무렇지 않게 말해버리면 아무도 신경 안 쓸 텐데, 그게 잘 안된다.
와중에 아펠리오스는 어디 나가고 없다. 혼자 훌쩍 사라지는 건 이즈리얼이 온 뒤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이번엔 기타랑 오토바이가 함께 사라졌으니 혼자서 고성방가라도 하고 올 모양이다. 이즈리얼도 그가 갑자기 사라진다는 걸 알고 있었다. 둘이 같이 지낼 때도 몇 번 그랬나 보다. 진짜 미친 사람이다.
아펠리오스가 집에 없고, 이즈리얼이 뒹굴뒹굴하는 틈을 타 케인은 편지를 다시 읽는다. 그동안 받았던 우편을 전부 꺼내두고 첫 순서부터 글자를 하나하나 곱씹으며 내용을 머릿속에 담는다. 몇몇 문장은 이미 봤던 것이지만 완벽에 가까운 필체와 작문 실력에 그리운 마음이 동한다. 그러면서 정작 만났을 땐 몇 마디 안 하는 그가 미워지기도 한다. 케인은 복잡한 심경으로 접혀있는 마지막 편지를 펼치면서 한숨을 길게 쉰다.
케인의 한숨이 끝나는 순간에 이즈리얼이 방문을 쿵쿵 두드린다.
"케인! 뭐 해?"
"아, 깜짝이야!"
"바빠? 펠 찾으러 가자!"
목소리는 해맑은데 문 두드리는 힘은 거의 박살 낼 수준이다. 빨리 나오라고 문을 패는 통에 케인은 허둥지둥 서랍을 열고, 문이 제대로 닫히지 않았는지 저절로 열려버려 편지를 전부 숨기기 전에 이즈리얼이 그를 본다.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문턱 너머에서 얌전히 보고만 있는데도 뭔가 엄청난 걸 들켜버린 기분이다. 한 장씩 꺼내서 볼 걸. 쌓여있던 편지봉투가 바닥으로 우르르 떨어진다. 온 방바닥에 하얀색 종이가 퍼진다.
이즈리얼은 그 모습을 멀뚱히 본다. 그는 저 봉투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우편함에 꽂혀있는 걸 봤고, 또 훔쳐봤으니까. 이즈리얼도 케인처럼 엄청난 걸 들킨 기분을 느끼면서 조심히 안으로 들어가, 침대 밑에까지 들어간 봉투를 손을 집어넣어 꺼내준다.
"인기인인가 봐."
"그런 거 아냐."
"누가 보낸 거야?"
은근슬쩍 떠 보면서, 괜히 모른 척 뒤집힌 봉투를 돌려 이름을 확인해 본다. 케인은 의외로 뺏어가지 않는다. 태를 보아하니 은근히 말하고 싶어 하는 분위기다. 이즈리얼은 남의 부모가 어떤지 전혀 궁금하지 않지만, 그래도 그의 기분에 맞춰주기로 한다.
"어른 글씨 같은데."
"어른이니까."
"아버지?"
"어."
케인은 아버지랑 같이 안 사는 이유를 설명해야 할 것 같아서 마음이 불편하다. 그러나, 사실 이즈리얼 입장에서는 그렇게 중대한 사유도 아니다. 아빠랑 같이 안 사는 게, 뭐 어때서? 사유가 무엇이든 간에 사람들 사연은 다양한 법이다. 케인은 그걸 모르는 것처럼 우물쭈물 하며 이즈리얼이 주워준 봉투를 가져간다. 이런 것 하나에도 저리 곤란해할 수 있어서 참 좋겠다.
"봉투가 꽤 많은데. 매번 보내주시는 거야?"
"그런 편이지."
"좋겠다. 나도 편지 좋아하는데!"
이즈리얼은 그동안 뜯지도 않고 폐기했던 편지들을 회상하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한다. 딱 이 정도까지만 알고 싶다. 더 깊게 파고들면 서로가 힘들어진다. 하지만 케인은 쌓인 이야기가 많았는지 말을 멈추질 않는다.
"혼자 지낸 지 꽤 됐어. 내 얼굴 기억이나 하는지 모르겠네."
"설마, 자식 얼굴을 잊겠어."
"우리 아빠면 가능할걸."
이즈리얼이 편지를 확인했을 땐 아주 다정한 사람 같았다. 원래 누리는 사람은 자기가 누리는 것이 뭔지 모르고, 케인도 같은 부류라고 생각한다. 이즈리얼은 기분이 확 안 좋아진다. 같이 나가자고 찾아온 건데 이제 그럴 마음도 들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집에 얹혀살면서 분쟁해 봐야 좋을 건 뭔가. 이즈리얼은 괜찮은 척하지만 한층 다운된 톤으로 케인을 타이른다.
"곧 오시는 거 아냐? 매번 오시는 거면 널 보고 싶어 하시는 거겠지."
"어차피 고작해야 하루 있다가 가."
"많이 바쁘셔서 그럴 거야."
"나랑 있을 때는 말도 잘 안 하던데."
"뭐가 어떻게 됐든 널 사랑하니까 그러는 거지."
내가 왜 남의 부모 편까지 들어줘야 하는 걸까. 이즈리얼은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정리하지 못하고 낯빛이 어두워지도록 그냥 둔다. 케인은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의자에 퍼질러 앉아 신세 한탄이나 한다. 케인한테는 이즈리얼만큼 눈치 없는 사람도 없지만, 이즈리얼한테는 케인만큼 눈치 없는 사람도 없다. 미칠 노릇이다.
"차도 못 타게 하는데, 뭐."
"너를 걱정하시나 봐."
"걱정이 아니라 날 못 믿는 거겠지."
"편지도 보내주시잖아."
"그래봤자 내가 몇 살인지도 모를 걸."
"너무 그렇게 생각하지 마, 그 마음이 중요한 거잖아."
케인이 지겹다는 듯 손을 턴다. 이즈리얼은 한 발짝 뒤로 물러나면서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다. 자신의 결핍을 숨기고 남 일을 두둔해야 하는 게 거북하면서 이질적이다.
"다 시간 낭비야. 마음에도 없는 소리나 해대고"
"사람에 따라서 표현이 서툴 수도 있는 거야."
"됐어, 넌 아무것도 모르잖아."
케인은 말을 내뱉는 동시에 모두 후회한다. 사랑이란 받으면 받을수록 불안해지는 것이라, 케인은 아버지의 사랑을 줄곧 의심하고는 하였으나······. 마음 한구석으로는 아버지에 관한 불신이 없다. 그런 게 가족이고 그런 게 부모라면서.
케인은 불현듯 깨달은 것일지도 모른다. 사실 자기가 의심했던 건 아버지가 아닌 나였을지도 모른다고. 사랑 하는 사람이 아닌 사랑 받는 사람의 자격, 스스로 그것이 충족되지 않았다고 느끼기에 인정하는 대신 곧잘 남의 탓으로 돌려왔다. 알량한 자존심을 지켜야 했던 그는 지금마저도 동떨어진 비난밖에 할 수 없다.
"네 생각이 항상 들어맞지는 않아."
"너는 그걸 어떻게 확신할 건데."
"모든 사람이 네 아버지 같지는 않고."
이즈리얼의 표정이 괴롭다. 실언했음이 분명하다. 지금이라도 그만두면 분쟁을 끝낼 수 있겠지만 한 번 불거진 균열은 쉽게 바로잡히지 않는다. 동시에 그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 이즈리얼의 말은 전부 근거 없는 허황뿐이다.
"모든 부모가 이 나이 먹도록 멍청한 자전거나 타게 두지는 않겠지."
"아니야."
"고작 몇 달에 한 번 얼굴 보러 오지도 않을 거고."
"아니야······."
"그러면서 날 위하는 척 편지로 어물쩍 넘어가지도 않겠네."
"그만 좀 해!!"
묵묵히 감정을 다스리던 이즈리얼이 갑작스럽게 악을 쓰며 소리 지른다. 케인이 흠칫 놀라고 이즈리얼은 가쁜 숨을 몰아쉰다. 헉헉거리는 숨소리가 애매한 정적을 채운다. 왜 자기가 먼저 시작해 놓고 저러는지 케인은 알 길이 없다. 서로의 과거를 캐묻지 않은 대가로 친구가 되었고, 그랬던 대가로 큰 파동이 몰려온다.
"애처럼 굴지 마. 네 아버지 생각 한 번이라도 해본 적 있어?"
"왜 이렇게 이해를 못 해? 너랑 나 중에 누가 우리 아빠를 더 잘 알겠어?"
"넌 지금 아무것도 몰라. 완전히 자기 생각만 하잖아!"
"네가 나한테 징징대서 뭐가 해결되는데?"
갑자기 왜 싸우게 된 걸까. 서로에게 너무나 민감한 주제인 동시에 서로에게 얼마나 민감한 주제인지 몰랐기 때문일까. 의견이 좁혀지길 바라기는 글렀다는 사실을 두 사람 모두 안다. 그러면서도 서로의 의견을 구하니 문제가 해결될 리 없다. 이즈리얼의 손에 힘이 들어가며 주먹이 쥐어진다. 반달 모양 손톱자국이 연약한 손바닥 위로 깊게 남는다. 처음 제 발언을 후회했던 케인도 이제 역증만 남는다.
케인이 되레 화를 내니 이즈리얼은 숨이 막히는 듯 호흡을 턱 멈추고 케인의 물음을 헤아린다. 사랑의 증명. 그런 것이 왜 필요하단 말인가. 사랑은 그 자체로 사랑인데도. 몸이 조금씩 떨린다. 이건 분노가 아닌 슬픔과 두려움, 후환이다. 케인이 자신을 이해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지 않는다. 다 가진 사람은 본래 결핍을 공감하지 못한다.
"모든 부모가 달마다 편지를 보내지는 않아."
"지금 고작 그런 거 때문에,"
"모든 부모가 정해진 날 매번 돌아오지는 않는다고!!"
죽어도 하기 싫었던 말이다. 정신이 완전히 나갈 것 같다. 이즈리얼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상체를 웅크린다. 숙인 고개로 피가 몰려 머리 꼭대기가 뜨겁다. 안구에 물이 천천히 차오른다. 헐거운 소리가 다시 한번 어색한 고요를 채운다. 이대로 애처럼 목 놓아 울고 싶다. 물이 새기 시작한 구멍은 당장에 틀어막을 수 없고 누수는 남은 물이 없어질 때까지 계속되어야 한다.
"······넌 생각해 본 적 없잖아."
세상 어딘가에는 모른 척 연락을 끊는 부모도 있다고.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 가서 죽어버리는 부모도 있다고. 세상을 아무리 뒤져도 흔적조차 나오지 않는 부모도 있다고. 멍청한 유품이나 가지고 전국을 돌아본 적 있냐고. 이렇게까지 될 일이었나, 훌쩍이는 소리조차 없는 이즈리얼이 생각한다. 낙루가 아무리 부끄러운 일이라 하여도 눈물에 멀겋게 번진 시야를 닦아내지 못한다. 아주 추한 일이다. 이건 나와 어울리지 않으며, 이건 내가 아니다······.
케인은 이즈리얼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쉽게 잡아내지 못한다. 아마 자기가 모르는 본인 이야기를 하는 것이리라. 남의 가족사를 밝혀내는 것만큼 악질적인 일도 없기에 건들고 싶지 않았다. 애초에 그것을 전제로 우리가 지금 함께 있을 수 있는 것 아닌가. 하지만 계속 그러고 싶었다면 지금 저런 말을 해서는 안 됐다. 제 약점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울어야 할 일이라는 건 마음이 불편하지만 이즈리얼의 말이 맞다면 결국 케인의 입장도 완전히 엇나가지 않는다.
케인은 싸늘하게 이즈리얼을 바라본다. 처음 만났던 그때와 같은 표정이다.
"너는 그냥 핑계를 대면서 화풀이하고 싶은 거야."
"내가 봤어. 내가 알아..."
"네 감정을 남한테 전가하고 싶은 거라고, 너 혼자 해결 못하니까!!"
"넌 네가 뭘 누리고 있는지 몰라."
"이런 걸 어떻게 누린다고 말해?"
"그건 널 사랑하는 거야!"
"어차피 진짜 아빠도 아니야!!"
케인이 소리를 내지르니 이즈리얼은 문득 떨림을 멈춘다. 머리를 감싸 쥔 채로 구부린 상체에 고개만 올려, 충혈된 두 눈으로 케인을 잠시간 바라본다. 케인의 매몰찬 얼굴을 확인했을 때, 이즈리얼은 한줄기 흐르는 눈물을 마지막으로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눈에 빛이 없다. 표정을 구성하는 모든 부위가 어떠한 감정도 담고 있지 않다.
그러고는 주먹으로 케인의 얼굴을 후려친다. 케인이 뒤로 넘어지며 가구에 엉키고 벽에 등과 머리를 부딪힌다. 케인이 채 정신 차리기 전에 이즈리얼은 그의 멱살을 잡고 한 번 더 친다. 케인의 고개가 바짝 돌아가고 코피가 흐른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해···?"
울음 섞인 목소리에 상처받은 표정이 여실히 드러난다. 그러길래 건들지 말지, 왜 먼저 덤벼서는. 왜 자기가 먼저 건드려놓고 자기가 상처받는지 모르겠다. 케인은 코피를 닦으며 그리 생각하고, 저도 주먹을 쥐어 이즈리얼의 뺨을 향해 휘두른다. 한방에 나가떨어진다. 얼굴에 붉은 자국이 남은 이즈리얼은 바닥에 누운 채로 움직이지 못한다. 바닥을 적실 만큼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해······. "
"내 앞에서 다시는 아빠 얘기 꺼내지 마."
"아무것도 모르는 건 너야. 나는 얼마나······."
얼마나 너처럼 되고 싶었는데, 이즈리얼이 부들거리는 팔로 바닥을 짚고 몸을 일으킨다. 입술에서 터져 나온 피가 눈물에 섞인다. 긴 한숨 같은 탄식. 고개를 들지 못하여 긴 앞머리가 얼굴을 숨기고, 축 처진 어깨가 심정을 대변한다. 더듬더듬 천천히 일어선 이즈리얼이 긴장감 서린 공기 사이로 색색거리는 숨소리를 겨우 내다가, 치켜 올라간 눈동자로 케인을 흘긴다.
"네가 싫어."
한마디 남기고 밖으로 나간다. 비틀거리는 발걸음을 보며 케인은 그를 붙들지 않는다. 일정하지 않은 발소리와 현관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가 난다. 들리는 것이 완전히 사라지자 케인은 머리를 흩트리며 방바닥에 털썩 주저앉는다. 작게 욕하고, 복잡한 마음을 추수르지 못한다.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씨발.
집에서 멀어지자 이즈리얼이 달리는 속도를 더한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뛴다. 점점 숨쉬기가 힘들어지고 앞이 안 보인다. 옆을 스치는 사람들이 그를 이상하게 돌아보다가, 곧 관심을 거두고 사라진다. 입술을 꽉 깨물고 있다가, 바다 냄새가 가까워지고 이가 찢긴 살에 박혀버리면 엉엉 우는소리가 여실해진다. 누가 보면 사뭇 미친 사람처럼 보일 테다. 이즈리얼은 속으로 변명한다. 그러나 누구에게 변명해야 할까.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저는 정말 필요한 말만 했어요. 먼저 폭력을 쓴 건 잘못했지만, 제발,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것만 알아주세요. 아들러는 열등감이 그 자체로 정상적이면서 열등감을 대하는 태도가 더 중요하다고 했죠. 사람이 사람을 부러워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잖아요? 하지만 저는 지금껏 잘 참아 왔어요. 그러니까, 태도를 바르게 한 거죠! 아무런 티도 내지 않고, 착하고 다정한 사람으로 남아 있었어요. 제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아시잖아요. 하지만 저도 사람이고, 누군가는 미워지기 마련이라 내적으로 갈등한 적도 많았지만 모질게 굴지는 않았어요보세요제가 얼마나 남을 위하며 살았고 나 자신을 돌아보지 않았는지 그런데 어떻게 나한테 그럴수가 있나요 내가 뭘 잘못했길래 그런 말을 들어야 하냐고요 저는 이제 지쳤고 더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바다 냄새 사이로 그리운 세탁소 냄새와 담배 향기를 찾는다. 어디에도 없다. 무작정 뛰어나온 이즈리얼은 막다른 길에 가까워졌을 때 골목으로 숨어든다. 벽에 바짝 붙어서 누가 있는지 살핀 뒤에 미끄러지듯 주저앉는다. 손을 꽉 모으고 누군가에게 사죄라도 하는 듯 미약한 숨을 거칠게 내쉬면서 빈다.
"잘못했어요."
눈높이 앞으로 깨진 거울이 버려져 있다. 수십 개로 갈라진 얼굴 중에서 어느 것이 진짜 자신인지 알 수 없다. 하나하나 더듬으며 찾을 자신이 없어서, 웅크려 앉아 머리를 숨겨버린다. 완전히 어둠이 되면 온전히 자기 자신과 있을 수 있고, 자신이 누구인지,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용서를 구하면서 저주하고, 또 용서를 빌고, 질투하고······. 누군가 찾아올 때까지 서로 닮지 않은 것을 반복하고 있으면, 저를 찾는 사람보다 밤이 먼저 온다.
예보에는 없던 먹구름이 몰려오고, 천둥소리가 멀리서 들려온다. 마이애미 날씨는 십 대의 정서와 같아서, 아침에는 온화하고 점심엔 뜨겁다가도 오후엔 소나기를 쏟은 뒤 금방 멎고는 했다. 감정이 식은 뒤 남은 저녁 시간엔 다시 기세를 불태우거나 차갑게 젖은 채로 하루를 넘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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