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애미 신드롬

마이애미 신드롬 03

켄펠잊 논씨피 하이틴 AU


알고 계셨나요?

- 전편: https://pnxl.me/n0ymnq

- 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 미국 배경. 모브 캐릭터 등장&날조&개인적인 해석이 많습니다.

- 캐릭터의 우울감/미성년자 음주, 흡연/집단 괴롭힘 묘사를 포함합니다.

- 어쩌다 이렇게 길어졌을까요...? 분량상 잘린 장면이 많아 각 대목이 이어지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 모바일은 가독성이(...) PC 열람을 권장합니다.


Miami Syndrome 03

19XX년 6월 26일 오전 9시 16분

마이애미, 플로리다

사우스웨스트 104번지 센트럴하이츠 505호

눈알이 뻑뻑하다. 밤새 자다 깨기를 반복한 케인이 잘 떠지지 않은 눈두덩이를 꾹 누른다. 눈 아래가 푹 팬 것이 고작 하루 못 잤는데도 며칠은 밤을 새운 사람 같다. 멍든 눈가는 이제야 푸른 기가 빠지기 시작했다. 전보다 옅어진 색은 평소보다 눈을 뜨기 수월하게 했다. 케인은 멍청하게 풀린 시선으로 흐릿한 방안을 쳐다보다가 몸을 일으킨다. 머리를 재빠르게 들었더니 눈앞이 핑글 돈다. 술 취한 사람처럼 상체를 흐느적 돌리는 중에도 집안은 조용하다.

아펠리오스에게는 남는 방을 내주었다. 원래 아버지가 쓰던 방이었는데 따로 살게 된 후부터 최소한의 가구만 남기고 텅 비었다. 아펠리오스는 집에 없는 가족이나 빈방에 관해 묻지 않았다. 집에 오자마자 악기를 만지려는 것을 케인이 막았다. 그것도 그거지만 아펠리오스는 일단 쉬어야 했다. 케인이 기타를 밀어내니 아펠리오스는 한 시간이 넘도록 욕실을 썼으며 이른 오후부터 쥐 죽은 듯 잠을 잤다. 물론 잤다는 건 케인의 추측이다. 안 자도 된다는 걸 억지로 집어넣고 문을 닫아버렸으니 알 길이 없다.

아직 안 일어났나. 만약 그렇다면 아펠리오스는 20시간 가까이 잔 셈이다. 케인은 최대한 조용히 발을 내린다. 몸이 침대에서 떨어지는 순간 철제 프레임이 삐그덕거린다. 발끝으로 걸으려던 노력도 전부 소용 없어지고 케인은 하는 수 없이 발바닥 전체를 써서 닫힌 방문 앞으로 걸어간다. 귀를 대어 보면 아무 소리도 인기척도 없다. 원래도 조용한 사람 같으니 저쪽에서 먼저 티 내주길 기대는 못 한다. 케인은 가볍게 노크한다. 반응은 없다. 다시 한번 두들겨도 결과는 똑같다.

뭐, 생각해 보면 길바닥에서 며칠은 보낸 것 같던데. 일찍 일어나는 게 오히려 이상하겠다. 케인은 본인만의 영역에서 벗어난 사람이라면 일체 알 바 아니었지만 아펠리오스는 눈으로만 보기에도 딱 그랬다. 옆에 있으면 동네 세탁소 앞을 지날 때 나는 냄새가 났다. 머리카락은 뻣뻣하고 옅은 비누 향이 났다. 그리고 나흘 동안 같은 옷을 입었다. 완전히 노숙에 특화된 사람이다. 하지만 케인은 기절초풍할 제안을 받았음에도 아펠리오스가 왜 그런 삶을 사는지 물을 의향이 없다. 이것은 아펠리오스가 아버지에 관해 묻기 전까지 유효할 것이다.

아무튼, 자는 것 같으니 이따 와야겠다. 둘이 있는 시간이 생각보다 더 어색해서 차라리 아주 늦게 일어나면 좋겠다. 기타야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되고. 케인은 무심코 자기 방 쪽으로 몸을 튼다. 아펠리오스가 바로 뒤에 서있다.

히…익!!! 케인이 웃긴 소리를 낸다. 양어깨가 싹 올라가고 목이 짧아진다. 목덜미에 소름이 끼치고 눈이 절로 커진다. 이제 잠은 다 깼다.

‘왜 그래?’

“인기척 좀 내!”

아펠리오스의 얼굴이 축축하다. 한 손에 수건을 들었고 케인이 빌려준 잠옷 차림이다. 아펠리오스는 그저 눈을 깜빡인다. 그로서는 케인이 왜 거북이가 됐는지 전혀 모를 일이다.

“언제 일어났어?”

‘꽤 됐어.’

“그동안 뭐 했는데?”

‘이것저것.’

“진짜 재미없다.”

공포가 사라지면 남는 건 쪽팔림이다. 얼굴에 피가 돌아 건강한 혈색을 훌쩍 뛰어넘는다. 바짝 올라간 어깨를 머쓱하게 내리고 아펠리오스를 지나쳐 방으로 돌아간다. 아펠리오스는 마치 신경질을 부리는 듯 등을 진 케인을 빤히 바라본다. 구시렁대며 이부자리를 정리하는 것까지 다 보인다. 빨개진 얼굴이 분홍색 뒤통수에 비쳐 머리가 더 붉어 보인다. 라는 건, 거짓말이다. 그럴 리가 있나. 아펠리오스는 목이 짧아지는 느낌을 상상하며 닫힌 방문을 연다.

케인은 간단히 세수하고 젖은 옆머리를 털어낸다. 배고프지 않지만 먹여야 할 사람이 있으니 곧장 부엌으로 간다. 혼자 사는 집에 번지르르한 식재료는 당연히 존재하지 않고 마트 떨이로 사온 계란과 빵 몇 조각이 전부다. 검소한 식단에 적응되지 않은 사람에겐 완벽한 영양실조 루틴이다. 그래도 뭐든지 굶는 것보단 낫다. 케인은 계란 두 개를 깨서 달구지 않은 프라이팬 위로 떨어뜨린다.

이제와서 말하면 케인의 요리 실력은 썩 좋지 않다. 오븐에 넣어서는 안 될 것을 넣었다가 집에 소화기를 들여두게 되었다든지 하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가사는 언제나 정신이 ‘조금이라도’ 똑바로 박힌 사람의 몫이라 불평을 받아 줄 사람은 없다. 케인은 보통 사람이라면 아침에 어떤 음식을 먹는지 고민한다. 그러면서 최근 몇 년은 사용하지 않은 토스터를 찬장 구석에서 찾아낸다. 기계를 대충 닦고 딱딱하게 굳은 빵을 구겨 넣는다. 혼자라면 데우지도 않은 밀가루 덩어리를 씹어 먹었겠지만 이건 손님을 대하는 최소한의 예의다.

계란을 무심하게 휘젓는다. 고장 난 줄 알았던 토스터는 열을 내면서 똑딱거린다. 비스듬히 돌린 레버가 천천히 똑바로 선다. 식기는 늘 하나만 나와 있어서 접시와 포크를 더 꺼내야 한다. 케인은 항상 아무도 없는 건너편을 두고 고개를 숙인 채 밥을 먹었는데 오늘은 간만에 그릇 하나가 더 놓인다. 따뜻하고 고소한 냄새가 난다.

“야, 나와서 밥 먹어.”

멀지 않은 곳에서 튜닝하는 소리가 작게 들린다. 알아서 나올 것 같지 않다. 쟤는 저거 없으면 죽나, 물론 기타 때문에 제안을 수락한 것도 있지만 어차피 오래 머물 거라면 어느 정도 친해진 다음에 해도 되지 않겠나. 케인은 아펠리오스의 접시에 절반 이상을 옮겨 담고 빠른 걸음으로 방까지 간다. 열려있는 문을 손가락 관절로 두드리고 아펠리오스를 재촉한다. 지금 보니 아펠리오스가 든 기타는 케인의 것이다. 케인의 방으로 가려면 부엌을 지나쳐야 하는데 케인은 아무것도 못 봤다. 참으로 귀신같다.

“밥 먹으라니까.”

‘배 안 고파.’

“그래도 먹어.”

그건 언제 가져갔어? 네가 땅바닥에 키스할 때. 그런 거 안 했어! 아펠리오스에게서 악기를 뜯어내고 등을 떠민다. 아펠리오스는 힘없이 밀리며 음식이 수북하게 담긴 접시 앞에 강제로 앉는다. 김이 피어오르는 제 몫을 보며 쉽게 손대지 못한다. 너무 많아, 케인은 무시하며 냉장고를 연다.

“커피는 없어. 마실 사람 없거든.”

‘다 못 먹어.’

“우유는 있다. 유통기한 아직 남았어.”

케인은 긴 유리잔 끝까지 우유를 부어 아펠리오스 앞에 밀어준다. 거의 한 팩을 다 부은 수준이다. 다 먹으라는 듯한 턱짓에 아펠리오스는 한숨 짓는다. 어렵사리 포크를 들어 불규칙하게 굴린 계란 덩어리를 하나 찍는다. 그걸 입까지 가져다 대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려서 케인은 독이라도 탔을 줄 아냐며 어이없어한다. 아직 김을 내는 계란이 입속으로 들어간다. 미지근하고 말랑하지만 무슨 맛이 나는지 모르겠다. 잘게 부서지는 음식을 천천히 씹으면서 부스러기가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기분을 느낀다. 이상하다. 배를 채우고 싶은 기분은 뭘까.

케인은 건너편에 다리 한쪽을 세우고 비딱하게 앉는다. 얼마 남지 않은 우유를 팩째로 벌컥벌컥 마신다. 아펠리오스는 그 모습을 신기한 생물을 보듯이 바라봤고 케인은 그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다. 케인이 접시를 비울 때까지 아펠리오스는 포크질을 다섯 번도 못 한다. 케인은 답답해 미치겠는지 수저를 준다. 수저로 음식을 한 움큼 퍼서 입에 넣으면 그 느낌이 더 이상하다. 계란 절반과 빵 한 모퉁이를 겨우 욱여넣고 아펠리오스는 결국 수저를 놓는다. 케인은 다 먹는 건 기대도 안 했다는 듯이 군다.

“됐어, 억지로 먹지 마.”

아니면 우유라도 다 마시든지, 접시를 치우면서 아펠리오스가 컵을 다 비우는지는 구태여 확인하지 않는다. 남은 음식을 긁어내고 물에 담근 뒤 곧바로 설거지 하지 않고 다시 자리에 앉는다. 의자를 끌어당겨 바짝 다가오자 우유 잔을 만지작거리던 아펠리오스가 의아하게 쳐다본다.

“야, 내 생각에는.”

‘생각에는.’

“우린 대화를 좀 해야 할 것 같아."

‘무슨 대화를.’

“그러니까, 그거 있잖아.”

내가 널 따라다녔다고 말했던……, 케인은 먼저 말을 꺼내 놓고 끝을 애매하게 흐린다. 왜 자기에게 불리할 말을 먼저 언급하는지 아펠리오스는 이해하지 못한다. 다섯 손가락을 모두 써서 컵을 움켜쥐고 입 가득 우유를 마신다. 방금까진 혀가 따뜻했는데 금방 차가워진다.

‘그게 왜?’

“아니, 그야 우리는 서로 아무것도 모르고…….”

‘모르고?’

“오해도 좀 있는 것 같으니까?”

‘같으니까?’

상대방의 말을 듣고 있는 티를 내고 싶으면 문장의 마지막 말을 따라 하라고 했다. 그다지 효과가 없었는지 케인이 눈에 띄게 당황한다.

“서로 뭘 좀 알아야 그딴 식으로 대답을 안 하지!!”

이 새끼야!! 케인이 주먹으로 테이블을 꽝 친다. 다행히 아펠리오스가 한 모금 마셨기 때문에 우유는 흐르지 않는다. 기껏 용기 내 꺼낸 말인데 온통 무시당한 기분이 들어 케인은 혼자 씩씩댄다. 아펠리오스는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며 손을 들어 올릴 수 있지만 그러지 않는다. 우유를 두 모금 더 마시니 배가 차는 기분이다. 썩 반가운 기분은 아니어서 비린 맛이 나는 입술이 이상하게 휜다. 케인은 그의 모든 반응을 전혀 이해할 수 없다. 아펠리오스가 케인을 이해하지 못한 것과는 결이 살짝 다르다.

아펠리오스는 하얀색 음료를 1/3가량 비우고 턱을 괴어 몸을 기울인다. 반항적인 사람과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나누는 건 얼마 만인가. 무한한 호의를 보였던 이즈리얼과는 또 다른 느낌이다. 묘한 끌림이 온다. 사랑이나 우정, 인간을 대하는 흥미와는 다른 방향으로. 아펠리오스는 차가운 혀 뒤편에서 작게 웃음 지어본 뒤 입을 연다.

‘그래.’

케인은 뜻밖이었는지 구부렸던 고개를 번쩍 든다. 컵에 담긴 액체의 표면이 잘게 떨린다.

‘어디서부터 시작할까.’

19XX년 6월 26일 오전 9시 41분

뉴욕시, 뉴욕

노스이스트 거리 24번

이즈리얼은 차를 운전하며 작게 흥얼거린다. 비행기가 연착되어 밤늦게 집에 돌아오고 잠을 설친 탓에 노래 부를 기분이 전혀 아니다. 고단했던 여행은 목표했던 바를 하나도 이루지 못했고 일주일 만에 돌아온 뉴욕은 마이애미보다 낯선 동네 같다. 친구들에게 돌아왔다는 연락은 하지 않았다. 어차피 집 앞에 차가 없어진 걸 보면 금방 알아챌 테고 그 시기를 굳이 앞당기고 싶지 않다. 홀로 떠난 여행에 관해서 또 어떤 말로 얼버무려야 할지 조만간 고민해야 한다.

차가 신호에 걸리자 이즈리얼은 스케줄을 확인한다. 오늘은 10시부터 4시까지 아이 셋을 돌봐야 하고 내일은 5시부터 10시까지는 둘을 봐야 하는데 한 명은 갓난아기다. 찢어지는 울음소리와 머리카락을 당기는 아귀힘은 스트레스 그 자체다. 아이들을 최대한 풀어주는 스타일이지만 언제는 도저히 참지 못하고 크게 화낸 적이 있는데, 그런데도 애들은 이즈리얼을 정말 좋아한다. 애들이 좋아하니 부모들 사이에서 이미지와 수요가 절로 올라갔다. 결과적으로 제게 이득이지만, 가끔은 안 좋은 소문이 흘러 들어가서 잘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10시 5분 전. 단독주택의 마당은 커다란 나무와 정성스럽게 가꿔진 화단으로 가득 찼다. 손님 전용 구역에 차를 대면 불투명한 안전용 유리문 앞에 눈을 바짝 대고 서있던 어린이 셋이 펄쩍펄쩍 뛴다. 아이들은 토요타 코롤라의 하얀색 차체와 검은색 띠를 참 반가워한다. 가끔 문이 열려있을 때는 달려와 손바닥을 찍기도 했다. 넘쳐나는 에너지가 버거울 때도 있고 두려울 때도 있어서, 이즈리얼은 차에서 내리기 전에 거울 앞에서 세 번 웃는다. 할 수 있어. 허울 좋은 자기암시, 굳은 다짐의 의미는 항상 빛을 보기도 전에 퇴색된다. 그는 문을 닫지도 않고 아이처럼 자리에서 뛰며 인사한다. 이건 아이들에게서 배운 인사법이다. 나이에 맞지 않은 짓을 해야 본인으로부터 멀어졌다. 차 문에 가려 보이지 않은 부분에서는 한치도 움직이지 않으며 철저히 에너지를 비축하고 있다.

이즈리얼이 현관으로 다가서면 아이들은 한바탕 난리를 친다. 외출 준비를 마친 부모가 나와서 진정시킨다. 어머니는 아이가 뛰쳐나가지 않게 뒷덜미를 잡고 문을 천천히 연다. 이즈리얼의 허리에도 겨우 닿는 아이들이 종종걸음으로 나와 다리에 찰싹 붙는다. 한명 한명 머리를 쓰다듬어주면 부모는 흐뭇하게 바라보며 그에게 끝없는 신뢰를 보낸다. 이즈리얼은 남의 엄마아빠에겐 정말 흠잡을 데 없는 아들이다.

아이들 부모는 이즈리얼에게 인사하며 잘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떠난다. 어린아이 셋은 저마다 이즈리얼, 이즈리얼 부르며 자기 할 말을 한다. 세 명 분의 말소리가 양쪽 귀에 꽂히고 몸은 세 방향으로 당겨진다.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가 언제였나,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도 꽤 오래됐을 것이다. 그 말은 곧, 못 본 사이에 있었던 일을 무용담처럼 떠들어야 한다는 뜻이었으므로 이즈리얼은 벌써 입안이 마른다. 바지를 쥐어뜯으며 보채는 어린이들의 손을 붙잡아 진정시키고 한 명은 안아 든 뒤, 그는 집 안으로 들어가며 문을 꼭 잠근다. 집 밖에는 아무도 없다.

이즈리얼은 가장 먼저 물 한 잔을 떠다 마신다. 목을 축이는 데에도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에도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다. 이즈리얼이 뭔가를 마시자 아이들은 사탕과 젤리를 한 움큼 가져와서 이것도 먹어보라며 들이민다. 빨간색과 노란색 색소가 들어간 젤리 곰이나 그의 가방 밑바닥에서나 보던 스키틀즈가 손바닥 안으로 쏟아진다. 아이 하나는 유리병을 들고 왔는데 초록색 코팅이 된 원형 초콜릿이 가득 들어있다.

“이즈리얼은 초록색을 좋아하잖아.”

“어떻게 알았어?”

“머리가 초록이니까!”

우쭐대는 아이를 대할 때는 반드시 과장된 반응을 보여야 한다. 이즈리얼이 박수를 치며 호응하니 아이들은 따라 웃는다. 최소 열 살은 나이가 많은 이즈리얼은 제법 복잡한 사고를 할 줄 아는 여섯 살 쌍둥이나 세 살배기 어린 동생과 어렵지 않게 섞였다. 이즈리얼은 빨간색 젤리 곰을 어금니로 씹으면서 손에 남은 사탕을 아이들 입에 하나씩 넣어준다. 조그만 입이 열릴 때마다 새콤달콤한 냄새가 난다.

아무리 에너지가 빨리더라도 놀아주는 ‘척’하는 건 쉽다. 바닥에 깔린 블록을 일부러 긴장한 척하며 아슬아슬하게 쌓아 올리면 아이들은 침도 못 삼키고 그 모습을 지켜본다. 네모진 장난감은 아이를 집중시키고 주변을 고요하게 만드는 데 탁월하다. 쌍둥이는 언제나 화려한 건축물을 요구하고 오늘은 기둥이 여덟 개 세워진 성을 주문하며 인형을 잔뜩 들고 온다. 얼굴이 둥글면서 머리색이 다른 봉제 인형이다. 아이는 인형에 예쁜 이름을 붙이며 쉽게 이입한다. 자기만의 세계가 너무나 확고하여 종종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기도 했다.

“거기엔 공주님이 살 거야.”

“공주님은 엄청 예뻐.”

“분홍색 머리가 공주님이야.”

“파란색 머리가 공주님이야!”

사이 좋은 쌍둥이는 싸울 것처럼 언성을 높이다가도 금방 어울려 논다. 인형의 짤막한 팔이 위아래로 움직이고 조각보로 만든 옷이 하늘거린다. 세 살짜리 동생은 옆에서 마카로 낙서한 블록을 건네준다. 이즈리얼의 얼굴에도 낙서하고 싶은 간절함이 뻔히 보인다. 아이를 아무리 잘 돌봐준다 해도 얼굴에 마카칠을 할 수는 없기에 이즈리얼은 막내를 무릎에 앉혀주며 쌍둥이와 블록 성에 집중한다.

“공주님이 둘이면 되잖아.”

“그래도 돼?”

“우리한테 안 되는 게 어딨어.”

인형에 관심 없는 막내는 공주에서 제외되어도 불평하지 않는다. 쌍둥이는 그의 대답에 만족하며 옆으로 달려와 함께 블록을 쌓는다. 아이들은 섬세한 손동작을 어려워하여 도움이 필요하다. 이즈리얼은 작은 손을 겹쳐 잡고 사각형과 원형 블록을 번갈아 가며 높게 얹는다. 성의 가장 꼭대기, 삼각형 블록은 항상 쌍둥이들이 올려야 한다. 쌍둥이라서 꼭대기도 두 개다. 막내는 성은 안중에도 없고 자기가 낙서한 블록을 자랑스러워한다. 침이 묻은 손가락으로 울퉁불퉁한 그림이 그려진 곳을 가리키며 침 흘리는 입으로 좋아한다. 이즈리얼은 손을 닦아주며 잘했다고 칭찬한다.

거실 바닥에 발 디딜 틈 없이 장난감이 굴러다닐 때쯤이면 밥 먹일 시간이다. 아이들 점심은 부모가 미리 준비하고 간 음식을 데우기만 하면 된다. 식사를 준비하는 수고는 덜 수 있어 좋지만 문제는 아이 셋이 전부 밥 먹기를 싫어한다. 차라리 머리털이 세 방향으로 뜯기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점심시간은 전쟁이다. 아무리 신경질을 부려도 자리에 앉아있기라도 하면 다행이지 온 집안을 뛰어다니며 도망치는 경우도 더러 있다. 이즈리얼은 시간을 확인하며 다리에 달라붙는 막내를 안아주고 인형 놀이에 몰입한 쌍둥이를 부른다.

“얘들아. 밥 먹어야 하는데?”

“공주는 밥 안 먹어.”

“아냐. 공주는 밥 잘 먹어.”

유치한 말싸움을 길게 주고받으며 인형을 뺏어가려고 시늉해야 쌍둥이는 입술을 비죽이며 식탁에 앉는다. 오늘은 정말 고맙게도 얌전히 말에 따라준다. 막내까지 아기 식탁에 앉히고 식판 세 개에 나눠 담긴 음식을 데워서 갖다주면 먹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눈높이를 맞추어 앉아 맛있는 거라며 온갖 좋은 말을 다 해 줘도 도통 입에 대지를 않는다. 아이들이 아무리 이즈리얼을 좋아한다고 해도 하기 싫은 일은 확실히 정해져 있다.

“안 먹으면 엄마 아빠한테 전화할 건데.”

“싫어.”

“왜 싫어?”

“혼나잖아.”

“안 혼나는 방법이 있어.”

“뭔데?”

밥 먹으면 돼. 아이는 설득당할 뻔하다가 아차, 한다. 쌍둥이는 식판에 눈길조차 주지 않고 인형을 만지며 놀고 막내는 자리에서 벗어나려 한다. 평범한 방법으로는 절대 밥을 먹일 수 없는 세 자매는 이즈리얼이 할 수 있는 모든 생쇼를 직관하고 나서야 음식을 한 숟갈 입에 넣었다. 아마 오늘도 그럴 것이며 근무 시간 중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할 것이다.

다음날 저녁

19XX년 6월 27일 오후 8시 15분

뉴욕시, 뉴욕

노스이스트 거리 114번지

아이들은 일찍 잠에 들었다. 이 집 아기들은 저쪽에 사는 세 아이들과는 다르게 쉽게 밥을 먹고 쉽게 잠 든다. 자잘한 투정이 없는 것만으로 야간 근무를 기꺼이 소화할 수 있는 이즈리얼은 품에 안은 갓난아이의 등을 두드리며 해가 진 창가를 서성인다. 그는 이 일이 싫지 않지만 좋아한다고 말할 수도 없다. 아이나 아이의 부모도 마찬가지다. 동네에 실력 있는 보모로 소문이 났고 모든 사람이 그를 반기지만 현실이 무척이나 멀게 느껴진다. 지금도 어린이의 침을 닦거나 정리하지 않은 레고를 밟고 쓰러지는 일이 과연 잘하는 일인지 문득 고민이 든다. 창밖에는 지나가는 자동차의 불빛이 보이고 유리창에 거울처럼 얼굴이 비친다. 아이를 안고 있는 모습이 썩 어울리지 않는다.

고개를 돌려 옆 침대에서 잠든 아이를 본다. 따뜻한 색의 수면등이 곤히 잠든 얼굴을 밝힌다. 오동통한 손가락에는 덜 지워진 크레용이 여기저기 묻어있다. 이즈리얼의 한쪽 손에는 크레용이 두껍게 칠해진 그림 한 장이 들려있다. 아이는 자기 가족을 그렸는데 그 사이에는 이즈리얼도 있다. 아이에게는 자기도 가족인 걸까. 이즈리얼은 부모를 대체할 수 있는 존재에 대해 생각한다. 동시에 가족이 될 수 있는 사람. 혼자서 답변을 내릴 질문이 아니다. 이즈리얼은 아기를 요람에 눕히고 반대편 벽에 기댄다. 미안하지만 우리는 가족이 아니다.

뒤척이는 아이가 잠꼬대 한다. 꿈에서도 부모를 찾으며 손가락을 까딱이기도 하면 이즈리얼은 항상 이마를 쓸어준다. 곧 돌아오실 거라고 자장가를 부르듯 부드럽게 말하는 목소리는 잠든 아이에게 들리지 않는다. 그의 말처럼 아이가 잠꼬대할 때쯤이면 금방 부모가 돌아왔고 다시 결합한 가족을 보며 이즈리얼은 돈을 챙겨 떠났다. 아이의 바람과는 다르게 이즈리얼은 본인을 철저한 외부인으로 여긴다. 사실 또한 그렇다. 손에 잡히는 돈봉투의 질감은 전혀 기쁘지 않다. 그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을 눈앞에 두었고, 그 돈은 돌아오지 않는 것을 찾는 데 모두 써버린다.


10시가 넘어 집에 도착한 이즈리얼은 옷도 갈아입지 않고 침대에 폭삭 눕는다. 일을 마치고 오면 유난히 맥이 빠져 앞으로 며칠 동안은 스케줄을 잡을 수 없다. 어둠에 익숙해지지 않은 눈은 천장의 높이를 헤아리지 못하고 맴돈다. 그냥 눈을 감아버린다. 밤을 보내기도 싫지만 눈을 뜨면 아침이 되어 있는 것도 싫다. 어느 것도 선택하고 싶지 않다…….

얼굴에 달라붙은 화장품의 질감이 불쾌하다. 손등으로 뺨을 문지르니 피부가 빡빡하다. 이즈리얼은 우울한 시간을 몸소 즐겨야 하지만 그래도 화장은 지워야 한다. 몸을 일으킨다. 긴 뒷머리가 어깨 뒤로 늘어진다. 울 것 같은 표정은 아니다. 죽을 것 같지도 않다. 이즈리얼은 딱 견딜 수 있을 만큼만 슬프다. 이 사실은 그를 더 괴롭게 한다.

가라앉은 이유는 샤워로 끌어올릴 수 있으므로 이즈리얼은 궁색한 발걸음으로 방을 나선다. 문턱을 넘는 순간 바닥에 던져놓은 가방에 발이 걸려 넘어진다. 콰당! 시원하게 엎어진 이즈리얼이 가장 먼저 떨어진 무릎을 부여잡는다. 아직 무릎 통증으로 고생하기엔 너무 어리다.

조금이나마 회복하고자 했던 의지가 바로 꺾인다. 발목에 감긴 가방끈을 신경질적으로 긁어 빼낸다. 소리라도 지르고 싶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그럴 수 없어서, 그는 가방을 발로 차 멀리 보내버린다. 벽에 부딪힌 가방에서 뭔가 굴러 나와 발치까지 미끄러진다. 페이저. 집에 돌아오자마자 뉴욕 친구들이 무분별하게 보내댄 메시지를 전부 무시한 페이저. 잊을만한 틈도 없이 알림이 울려대는 통에 가방 깊숙하게 집어넣고 쳐다도 보지 않았다. 귀를 찌르는 전자음을 생각하면 화가 난다.

이즈리얼은 페이저를 집어 들고 모든 메시지를 삭제한다. 누가 무엇을 보냈는지 확인하지도 않고 모조리 쓰레기통으로 던져버린다. 어째서 혼자인데도 혼자일 수 없는지.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 이즈리얼은 텅 빈 페이저를 맨바닥에 내던지려다가 문득 떠올린다. 고개를 들어 불 꺼진 방안을 본다. 어둠에 윤곽이 잡힌 책상과 침대가 보인다. 그는 얼얼한 무릎을 털어내고 방으로 돌아간다. 책상 위에는 아펠리오스와 찍은 사진이 있다.

아펠리오스. 어째서 그 이름이 떠올랐는지는 모르지만 이즈리얼은 사진을 뒤집어 그의 번호를 찾는다. 입 모양으로 수십 번 되내며 번호를 외워버린 이즈리얼은 멍한 눈으로 복잡한 머릿속을 부여잡는다. 생각이 많지만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는다. 바로 전화기를 들어 외운 번호를 누른다. 신호가 세 번 울리고, 메시지를 입력한다. 페이지가 전송된다. 메시지를 보낸 이즈리얼은 기다리기만 하면 상대가 전화를 받을 것처럼 수화기를 계속 들고 있는다. 신호가 끊어질 때까지.

[ 424 ]

19XX년 6월 27일 오후 10시 58분

마이애미, 플로리다

사우스웨스트 104번지 센트럴하이츠 505호

너무 힘 주지 마. 아펠리오스는 케인과 손을 겹쳐 기타의 지판을 함께 잡아주며 손가락을 미세하게 조정한다. 시간이 늦어 악기 소리를 낼 수는 없으므로 기본기나 되잡아 보자는 의도다. 케인은 내심 진지한 마음으로 피부밑에 닿는 단단한 현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듯 짚는다. 오랫동안 음악을 한 만큼 필수적인 코드나 기법은 어렵지 않게 소화했지만 의외로 잘못된 게 많다. 아펠리오스도 기본기는 있지만 실전은 부족하다는 결론을 냈다.

케인은 모든 음악과 악기를 독학했다. 글로 봤을 땐 멋진 말이지만 처음부터 아예 잘못 배운 것을 고칠 기회가 없다는 게 치명적인 단점이다. 밴드에도 제대로 된 사람이 없어 보고 배울 수도 없었다. 기초를 잡고 있는 것 자체가 기적인 수준이다. 도저히 손가락이 닿지 않자 케인이 불편한 표정을 짓는다. 전혀 모르는 것을 배우는 것보다 잘못 알고 있는 것을 교정하는 게 더 어렵기 때문에, 두 사람은 야밤에 손을 겹쳐 잡고 아무도 원하지 않은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이건 완전히 틀렸네. 손가락이 여기로 가야 해.’

“소리는 비슷하게 나던데.”

‘안 비슷해.’

아펠리오스가 자기보다 아는 게 많다는 사실은 자명했으므로 케인은 반박하지 못하고 입을 다문다. 고작 몇 밀리 벗어난 걸 가지고 완전히 틀렸다는 말을 듣기도 억울하다. 현을 살짝 튕겨보니 소리가 난다. 다른 점을 전혀 모르겠다.

“이걸 하나하나 다 구분한다고?”

‘어.’

“너무 피곤하게 살지 마.”

‘안 배우고 싶어?’

두 사람의 대화는 언제나 케인이 한 수 접는 것으로 끝이 난다. 아펠리오스는 말도 잘 안 하면서 말발은 죽여줄 만큼 셌기 때문에 케인은 감탄하면서도 분했다. 봐준 거라는 자기합리화는 그렇게 시작됐다.

“제대로 된 밴드에 들어갔어야 했는데.”

‘거긴 왜 들어갔는데.’

“어제 말했잖아.”

‘잊어버렸어.’

어제 나눈 대화 말이다. 사실 많은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서로 아무것도 모른다’는 논제로 시작했으나, 그들은 암묵적으로 과거사나 사연에 관해 묻지 않았고 묻지 않았으니 대답하지 않았다. 단지 ‘따라다녔다’는 오해 따위가 왜 생겼는지 해명하는 데 그쳤다. 바다에 갔다가 우연히 보고는 실력이 제법 괜찮길래 다음날도 가봤다, 또 있길래 그다음 날도 갔다, 계속 그러다가 네가 갑자기 없어졌다……, 하는 내용. 아펠리오스는 말이 웃겼는지 중간중간 이빨을 살짝 깨물었고 그게 케인한테 다 보였다. 짜증 났다. 케인이 신경질을 부리는 것으로 대화가 중단되었다. 소득은 없었다.

이즈리얼은 집으로 돌아갔다고 했다. 남한테 사람 하나 떠넘겨 놓고 자기는 가 버린 것이다. 아펠리오스의 말을 들어보면 둘 다 타지에서 온 터라 쉽게 어울릴 수 있었는데, 붙어 다닌 며칠 만에 꽤 친해진 것 같았다. 뭐, 그건 그럴 수 있다 친다. 그런데 겨우 몇 시간 본 본인한테 자기 친구를 맡길 정도로 자길 신뢰할 이유가 있었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헤픈 사람을 이해하기란 어렵지만 어쩐지 그 애는 더 어려울 거란 예감이 든다.

“걔 보고 싶겠네?”

‘왜 그렇게 생각해?’

“둘이 친구잖아. 계속 같이 다녔다며.”

‘친구라는 기준이 뭘까.’

아펠리오스는 이즈리얼을 아끼는 듯 말하면서도 친구라는 말이 나오면 묘하게 방어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래서 걔를 좋아하는 건지 마는 건지 명확하게 이야기 해주지 않아 케인은 눈썹이 가파르게 선다. 둘이 뭘 하고 놀았는지는 잘만 말해줬으면서.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는 관계다.

“걘 여기 뭐 하러 왔대? 사람 찾는 것 같던데.”

‘몰라. 안 물어봤어.’

“그냥 놀러 가고 끝이야?”

‘놀러 가고….’

장난도 좀 쳤어. 전혀 아무렇지도 않은 투다. 그런가 하면 아펠리오스는 생긴 것과 다르게 장난을 많이 쳤다. 그것도 제법 살벌한 장난이었는데 이를테면 재떨이를 매만지며 자길 흘금 본다든지 설거지를 도우며 칼을 잡고 멀뚱히 있다든지……. 케인이 잠깐 정신을 다른 데로 돌리면 의도를 알 수 없는 행동을 했다. 끝으로는 항상 장난이라고 말했지만 저러다가 진짜로 뭔 일 저지를 것같아 마음 한쪽엔 불안한 구석이 없잖아 있다. 케인은 아펠리오스가 사이코패스임을 의심했지만, 그럼에도 그를 집에 계속 두는 이유는 싸워서 자기가 이길 것 같기 때문이다.

“무슨 장난?”

‘이것저것.’

“재밌냐?”

‘반응이 재밌어.’

“그래 보이긴 해.”

‘몇 개는 진심이었지만.’

케인은 줄 자국이 길게 난 손가락을 문지르면서 가볍게 코웃음친다. 네가 진심일 때도 있어? 라고 말 하니 케인의 머릿속에 아펠리오스가 진심이었던 순간들이 와르륵 떠오른다. 하지만 자기가 한 말을 곧장 시인하면 멋이 없으니 모른 척한다. 아펠리오스는 코드에서 다른 코드로 넘어갈 때 손 쓰는 법을 알려주면서 자기 악기로 운지법을 보여준다. 자세히 알려주는 말 중간중간으로 사족이 낀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개입이다. 너도 알려줄까?

“뭐를?”

‘어디다 묻었는지.’

“뭘 묻어?”

‘정확히는 집으로 돌려보냈지.’

“뭐래, 누굴?”

‘첫발은 위협용이야. 두 번째부터가 진짜.’

사람들은 원래 있어야 할 곳을 집이라고 불러. 말의 의도를 완벽히 파악하지는 못했지만 케인은 그 담담하고 서늘한 목소리에 왠지 모르게 소름이 돋는다. 피부가 닳은 손가락도 아린 느낌이 조금 멀어진 기분이다. 아펠리오스는 계속해서 악기 소리를 들려주며 길게 내려온 머리카락을 넘기지 않는다. 푸른 머리칼 사이사이로 붉은색 눈이 보인다.

‘36번 도로 중간 지점에서 벗어나면 비포장 된 길이 나와. 거기로도 의외로 차가 많이 다녀.’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그 땅에 시체를 묻고 축축해질 정도로만 물을 뿌려두면 차 바퀴에 깔려 땅이 다져져. 알아서 단단해지는 거지.‘

“영화 너무 많이 본 거 아냐?”

‘대신 너무 젖으면 흙이 무너지니까 비가 많이 오는 날은 피해야 돼. 여긴 소나기가 많이 와서 별로야.’

“…….”

‘체구가 작아서 6피트까지 안 파도 됐어.’

저런 말을 하면서 계속 손가락을 조정하는 걸 보니 기분이 엄청나게 이상하다. 케인이 대답하지 않으면 아펠리오스도 말하지 않는다. 잠깐 정적. 침묵은 많은 것을 함의하고 케인이 속으로 식은땀을 흘리니 아펠리오스는 티 나지 않게 재밌어한다. 이즈리얼과 케인 모두 감정표현이 확실한 사람이지만 너무나도 궤가 다르다. 어느 쪽도 놓치긴 아깝다.

‘장난이야. 여긴 이렇게 잡는 게 더 편해.’

내려왔던 손가락이 쑥 올라간다. 케인은 어리벙벙하며 힘주었던 손가락에 힘을 뺀다. 확실히 손가락 쓰는 느낌이 훨씬 수월하면서도 얘는 왜 그런 농담이나 하고 있는지 마냥 황당하다. 그렇게 안 생겨서는 답지 않은 장난을 친다. 생각보다 유치한 타입인가. 아펠리오스가 건 장난에 모두 휘둘린 케인은 애써 그를 유치하다고 생각한다. 눈만 올려 케인의 표정을 다 지켜보던 아펠리오스는 작게 픽 웃는다.

‘괜찮은 사람 좀 만나. 친구 잘 사귀고.’

“걔넨 친구 아니었어.”

‘왜?’

“걔네는 무대에서 담배나 피우고 여자 꼬시면서 자기들이 액슬 로즈인 줄 안다고.”

‘본 조비는 별로?’

“그런 얘기를 하는 게 아니잖아.”

케인이 아펠리오스를 발로 툭 찬다. 아펠리오스도 케인을 찬다. 아펠리오스는 뭐만 하면 전부 맞받아쳤다. 그냥 넘어가 줄 만하지 않나. 케인은 전부 참는다. 하는 짓이 얄미워 한 대 쥐어박고 싶었지만 관둔다.

“아무튼 너도 사람 잘 만나. 길바닥에서 자지도 말고.”

‘널 만나면 안 됐나?’

“죽고 싶냐? 네가 왔잖아.”

그래서, 걔는 잘 만난 것 같고? 이즈리얼. 케인은 이즈리얼이 아펠리오스의 유일한 친구라고 장담할 수 있다. 언젠가 자기까지 친구가 된다면 2명으로 늘겠다. 아펠리오스는 잠깐 고민하는 것처럼 악기 잡은 손을 멈추더니 다시 움직인다. 넌지시 대답한다. 착해. 재밌고. 케인은 얘가 그런 말도 할 줄 안다며 놀리는 투로 호응한다. 반응하지 않은 아펠리오스는 한숨을 짧게 쉬며 지나가듯 덧붙인다. 그리고 우울했지.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두고 아펠리오스가 수업을 이어간다. 바로 옆에서 봐주니 이전보다 나아진 느낌이 명확히 든다. 두 사람은 애들같이 말장난을 치다가도 금방 묵직하게 서로를 대했다. 그만큼 아닌듯 하면서도 둘은 빠른 속도로 가까워졌다. 십대란 사소한 이유로 쉽게 친해지고 멀어졌다.

삐-

한참을 그러고 있으니 페이저가 알림을 울린다. 케인이 자기 것을 확인한다. 내 거 아냐. 이 시간에 올 연락은 없었는지 아펠리오스가 뒤늦게 확인한다. 동생 아냐? 이 시간에는 연락 안 해. 거참 정 없네. 너는 예의가 없고. 버튼을 누르면 메시지가 뜬다. 어디서 본 적 있는 번호다.

“누구래?”

‘이즈리얼.’

“뭐?”

아펠리오스가 페이저를 돌려 케인에게 화면을 보여준다. 숫자 세 개가 덜렁 적혀있다.

[ 424 ] (*call me back)

“이 시간에? 잘못 온 거 아니고?”

‘해보면 알겠지.’

“전화번호도 알아?”

‘집 전화 알려줬어.’

아펠리오스가 수화기를 든다. 케인은 기타를 내려놓고 마냥 보고 있다. 번호를 누르니 신호음이 길게 간다. 끊어지기 직전에 가서도 전화를 받지 않는다. 그러다가 문득 뚝, 하는 소리가 나더니 바깥까지 들릴 만큼 맑은 목소리가 들린다.

안녕하세요, 이즈리얼이에요!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으니 메시지 남겨주세요. 이따 봐요! *삐*

4일 뒤

19XX년 7월 1일 오후 3시 11분

마이애미, 플로리다

사우스웨스트 104번지 센트럴하이츠 505호

이즈리얼에게서 다시 연락이 온 건 그로부터 4일 후다. 아르바이트 출근을 하려던 케인을 아펠리오스가 붙잡는다. 페이저 화면을 돌리며 저번과 똑같은 숫자 세 개가 떠 있는 것을 보여준다. 꼭 알아야 할 사안처럼 진지한 건지 무표정인지 모를 얼굴로 케인을 빤히 보다가 등을 돌려 전화기를 든다. 운동화를 구겨 신던 케인은 반쯤 열었던 문을 닫고 귀찮은 듯 허리에 손을 얹는다.

“며칠이나 지났는데 이제야 연락을 해?”

‘4일.’

“또 뭔 일이래.”

‘해보면 알겠지.’

아펠리오스는 들어본 적 있는 대답을 하며 제법 아무렇지 않게 전화를 건다. 이즈리얼은 마치 갈등하는 것처럼 한참을 받지 않다가 마지막에 가서야 반응한다. 곧바로 연락이 올 줄 몰랐다는 얼떨떨한 목소리. ‘여보세요?’를 발음하는 말투에 심정이 그대로 서린다.

“……어, 안녕. 그러니까, 펠?”

‘나야.’

“조금 놀랐네, 이렇게 빨리 걸 줄 몰랐어.”

‘금방 봤어.’

“밖이야? 아니면 집?”

‘집.’

케인은 현관에 서서 아펠리오스의 뒤통수를 쳐다본다. 목소리가 작아 거의 들리지 않는다. 대충 무슨 용건이었는지만 듣고 싶었는데 생각보다 통화가 길어진다. 케인은 일부러 재촉하는 소리를 내며 목을 긁는다.

“집? 너 걔네 집에 있구나! 으음, 케인, 맞지?”

‘어.’

“케인도 집에 있어?”

‘바로 옆에.’

“대신 인사 해줄래?”

'대신‘이란 말은 직접 대화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반영한다. 그걸 모를 리 없는 아펠리오스는 손으로 수화기를 덮고 케인을 휙 돌아본다. 케인이 시계를 보며 이제 진짜 가야 한다는 제스쳐를 취하자 아펠리오스가 미세하게 큰 목소리로 말한다.

‘너랑 인사하고 싶대.’

“뭐? 나랑 왜?”

‘친해지고 싶어서.’

물론 그런 말 한 적 없다. 아펠리오스는 말을 막 지어내면서 케인을 방 안까지 들어오게 한다. 케인은 어리둥절한 채로 전화를 건네받는다. 당황스러운 건 이즈리얼도 피차 마찬가지다. 서로가 얘랑 다시 대화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기 때문에 이즈리얼은 ‘어, 어.’ 하며 끊어지는 소리만 낸다. 먼저 제대로 된 문장을 말한 건 케인이다.

“여보세요.”

“음…? 여보세요?”

“나 불렀냐?”

“응? 아니, 그게, 어…. 안녕!”

사람 하나를 집에 얹혀놨는데 잘도 안녕하겠다. 이즈리얼이 멋쩍게 웃는다. 미안, 그땐 어쩔 수 없었어. 그냥 한 말이었으니 화를 낼 생각은 없으나, 케인에게 민망함이 담긴 사과는 오히려 어색하다. 케인은 됐어, 나도 상관 안 해, 하며 주제를 어찌저찌 넘긴다.

“그래서. 무슨 일인데?”

“아니, 그냥. 잘 있나 해서?”

“그냥 있어.”

“다친 데는 다 나았어?”

“그건 신경 끄라고 했지.”

“신경 쓰이는데 어떻게 신경을 꺼!”

이즈리얼은 언제 어색했냐는 듯 금방 적응하여 재간 높은 실력으로 말을 붙인다. 케인은 활기와 과장된 감정이 부담스럽다. 저번처럼 예의 없게 굴면 알아서 떨어져 나가겠지 싶다가도 조건 없는 무한한 긍정에 초를 치기에도 마음이 불편하다. 이즈리얼은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질문을 늘어놓으면서 자기는 마이애미가 정말 좋았던 건지, 벌써 거기가 그립다며 징징댄다. 어 그래 정말 힘들겠다. 그래서 내가 어떻게 해 줘야 하는 걸까. 뒷말은 하지 않으면서 아펠리오스를 슬쩍 본다. 도와달라는 눈빛이다. 아펠리오스는 도움 따위 주지 않으며 케인이 헛소리 하지 않는지나 감시하고 있다.

“펠이랑 지내보니까 어때?”

“별로.”

“난 좋던데!”

“비슷한 애들끼리 모이면 원래 그래.”

둘 다 귀찮고 이상하니까. 이즈리얼이 꺄르륵 웃는다. 이상하다는 말은 종종 칭찬으로 쓰였으므로 이즈리얼은 좋은 방향으로 해석하기로 한다. 경박한 웃음소리가 아펠리오스에게도 들린다. 케인은 자제한다고 했지만 말하는 투가 아주 싹수없어서, 한쪽 대화만 들으면 상당히 싸늘하다. 하지만 상대가 이즈리얼이라면 그런 게 없다. 상처는 상대적이다.

“너도 이상해. 머리가 분홍색이잖아.”

“초록인 건 말이 되냐?”

“그것도 그렇네!”

쓸데없는 말이 길어지자 케인은 슬금슬금 엉덩이를 뗀다. 이제 정말 가야 한다는 신호다. 물론 이즈리얼은 그걸 볼 수 없지만 케인은 티를 내는데도 왜 모르냐는 식으로 괜히 신경질을 부린다.

“그런 얘기 하려고 전화했어?”

“아니, 내 말은, 다음에 또 놀러 가겠다고!”

“마음대로 해.”

“나도 너희 집에서 재워 줘.”

“너무 마음대로 하는 거 아니냐?”

케인에겐 그저 인사치레로 하는 말로 들렸지만 이즈리얼은 진심이다. 질린다는 표정을 한번 지어주고 대충 갈무리한다. 나 알바 간다, 끊어. 알바라면 혹시 그때 그 정비……, 끝까지 듣지 않고 아펠리오스에게 수화기를 넘겨준다. 나가보겠다는 손짓을 하고 케인은 자전거까지 뛴다. 혼자 남은 아펠리오스는 들을 사람이 없는데도 겨우 들릴 만한 목소리로 통화를 이어간다.

“미안, 펠. 저번에도 전화했었지? 다른 일 하느라 못 받았어.”

‘괜찮아.’

“너는? 지내기 좋아?”

‘나쁘지 않아.’

“나도 같이 있으면 좋았을 텐데.”

‘올 수 없어?’

생기가 확 죽는다. 진심으로 아쉽게 들린다. 이즈리얼은 으음…, 하며 대답을 끌면서 돌돌 말린 전화선 안에 손가락을 끼워 넣는다. 탄력 있는 선이 피부를 약하게 압박한다.

“사실 이번 달은 조금 바빠. 일도 밀려있고, 일정도 더 있고…….”

‘그렇구나.’

“갈 수 있을 때쯤이면 네가 거기 없을 수도 있어.”

‘얼마나 걸리는데?’

“한…, 다음 달이나 돼야,”

‘있어.’

“어?”

‘그때 가서도 있을 거야.’

이즈리얼이 낮게 웃는다. 자기를 위로하기 위해 한 말인지 진심인지는 알 수 없다. 아펠리오스는 목소리만으로 속을 파악하기 힘든 사람이다. 하지만 아펠리오스는 남을 위로할 줄 모른다. 그에겐 거짓이 없으니 진심이라고 할 것도 없다. 이후 두 사람은 긴 통화를 하지만 알맹이는 없다. 뒤돌아서면 전부 잊어버릴 이야기다. 그러나 지성이 없는 대화에는 마음이 있는 법이고 이즈리얼은 그걸 좋아했다. 아펠리오스도 나쁘지 않은 기분이다. 전환과 환기. 그에게도 기분이 있다면 그렇게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다음 달에 갈게.”

‘그래.’

“진짜 갈 거야.”

‘그래.’

“빈말 아닌 거 알지?”

‘알아.’

“진짜 간다! 나 잊어버리거나 먼저 가버리면 안 돼!”

이즈리얼은 아펠리오스의 대답을 열 번 이상 확인한 뒤에야 겨우 전화를 끊는다. 꼭 가겠다는 말이 장난을 치는 것도 같고 간절함을 포장한 것 같기도 하다. 이즈리얼은 주변이 다시 조용해진 것을 느끼며 무력하게 전화를 내려놓고, 아펠리오스는 정적이 익숙하여 곧장 자기 일에 전념한다. 아펠리오스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고 이즈리얼은 왠지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면서 달력에 적힌 오늘 날짜에 X 표시를 긋는다.

펜을 쥔 이즈리얼의 손은 노란색 매니큐어가 발려있다. 검지와 엄지 가장자리가 얇게 벗겨졌다. 맨손톱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한다. 이즈리얼은 빈 곳을 검은 펜으로 칠해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서랍 구석에 처박힌 매니큐어를 찾는다. 뚜껑을 열면 화장품의 앙칼진 냄새가 뇌를 자극한다. 독한 향기도 손톱에서 넘쳐흐르는 뻑뻑한 액체도 노란색도 전부 마음에 안 든다.

아펠리오스는 케인이 아르바이트에 갈 때마다 케인의 침대에 앉아있었다. 케인이 종종 침대 위에서 기타를 잡았으니 그걸 따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펠리오스와 있을 때에는 바닥에 앉길 좋아했고, 아펠리오스는 지금 바닥에 앉아 한참이나 낮아진 시선 중에 케인이 무엇을 마음에 들어 했는지 찾는다. 별 것 없다. 닦지 않은 먼지, 걸어두지 않은 겉옷, 단단하고 차가운 질감……. 자극은 없다. 복사뼈가 눌릴 뿐이다. 아펠리오스는 다시 침대 위로 올라가려 하다가 침대 밑에서 무언가 본다. 넘어진 상자에서 물건이 잔뜩 쏟아져 있다.

그날 저녁

19XX년 7월 1일 오후 8시 29분

마이애미, 플로리다

사우스웨스트 104번지 센트럴하이츠 505호

저녁을 먹은 뒤 한창 졸릴 시간이다. 소파에 앉아 꾸벅꾸벅 졸던 케인은 번쩍 잠에서 깬다. 그대로 방으로 뛰어가 문을 벌컥 여니 아펠리오스가 의자에 기대 기타를 치고 있다. 얼굴빛이 바뀔 정도로 소스라친 케인이 끊이지 않은 리프를 들으며 멍하니 서있다.

‘곡이 꽤 괜찮네.’

“그거 어디서 찾았어.”

‘침대 아래. 쏟아져 있던데.’

아펠리오스는 케인이 발칵 화를 낼 거라고 생각했는데 케인은 그저 마른세수만 한다. 길게 내쉬는 한숨이 많은 것을 함의한다. 손을 치우니 하얗게 질렸던 얼굴이 피곤한 낯으로 돌아온다. 남의 물건에 함부로 손대지 마.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하고 아펠리오스 건너편의 침대에 털썩 누워버린다. 아펠리오스가 발견한 것은 케인의 미완성곡이다. 밴드에 있을 적 쓰던 것이다.

‘완성해 봐.’

“내가 쓴 거 아니야.”

‘네 물건이라며.’

“복잡해. 넌 이해 못 해.”

아펠리오스는 연주를 뚝 멈춘다. 악보가 거기까지만 쓰여있기 때문이다. 이것 말고 미완성곡은 네 개나 더 있다. 아무것도 끝을 보지 못했다. 아펠릴오스는 드러누운 케인을 발끝으로 꾹 찌른다. 케인이 얼굴을 가렸던 팔을 훌쩍 치우고 원망하는 눈빛으로 그를 본다. 표정을 풀지 안으니 한 번 더 찌른다. 케인이 질색하는 소리를 낸다.

‘말해 봐.’

“뭘?”

‘내가 이해할지 못할지.’

“못한다니까.”

‘너보단 잘해.’

“관둬, 싸울 기분 아니니까.”

케인이 돌아눕는다. 보잘것없는 등판이 애처롭다. 싸울 기분 아니라면서 굳이 같은 방에 있는 건 관심을 가져보라는 신호다. 사람에게 대가 없는 관심을 가져야 하는 상황은 처음이라, 아펠리오스는 고민하다가 케인 위로 탈싹 누워버린다. 사람한테, 그것도 아펠리오스한테 깔린 케인이 비명을 지른다. 남자끼리 닿는 살갗이 징그럽다.

“왜 이래?”

‘이렇게 해야 네가 날, 아 더러워. 말 안 할래.’

“진짜 뭐 하는 새끼야.”

케인이 어깨를 밀치니 아펠리오스는 힘을 실어 그를 깔아뭉갠다. 진심으로 밀어낸다면 아펠리오스는 한방에 나가떨어지겠지만 케인은 부러 힘 조절하며 스스로 뭉개지길 택한다. 뿌리칠 기분마저 아닌 것이 한몫한다. 타인의 무게감을 느끼는 것도 가끔은 필요하다.

“넌 나랑 이러고 싶냐?”

‘싫어.’

“근데 왜 이래?”

‘재밌잖아.’

“싫다는 거야 좋다는 거야, 참나.”

‘원래 사람은 자길 몰라.’

엎어진 케인이 잠잠해진다. 아래에서 버둥거리는 게 멎으니 마구 흔들리던 아펠리오스도 잠잠해진다. 케인은 지극히 개인적인 사유로 복잡한 심경을 느끼다가 어렵게 입을 연다. 아펠리오스가 이해할 수 없을 거라고 단정지은 이야기다.

“가끔 내가 아닌 것 같아.”

‘무슨 말이야?’

“말 그대로. 내가 아닌 것 같아. 그래서 그것도 내가 썼다는 기분이 안 들어.”

‘기분을 너무 믿지 마.’

“진짜라니까. 봐, 이해 못 하잖아.”

케인은 단순하면서도 복잡한 상대다. 아펠리오스는 변칙적인 패턴이 새롭고도 번거로워 여러 번의 고민을 했다. 겉은 거칠면서도 속은 너무 약하고 생각이 많은 사람. 그러면서 회복력은 또 좋았다. 그래서 아펠리오스는 좀 더 모질게 굴어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성장할 수 있는 사람도 있는 거라면서.

‘멀리 가 봐.’

“어딜?”

‘너한테서 멀리 가.’

그러나 지금은 그럴 타이밍이 아니다. 아펠리오스는 처음으로 감정적인 조언을 한다. 이성인 척하는 감정이다. 왜냐하면 지금은 때도 아니거니와 그럴 ‘기분’도 아니라서, 뻔뻔하게 남을 깔고 누우면서도 생산적인 제안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야 전부 눈에 들어와.’

“뭘 어떻게 하라는 거야.”

‘가까이 있으면 못 봐. 한 번쯤은 멀어져야 해.’

“그래서 넌 멀어졌고?”

‘난 너무 멀리 갔지.’

“다시 오면 되잖아.”

‘그럴 줄 몰라.’

추상적인 이야기다. 바로 와닿는 말은 아니지만 케인은 그 말의 뜻을 이해한다. 이해만 했지 그 방법은 아직 모른다. 단지 조용히 위에서 아래로 짓눌리는 무게를 느끼고, 울퉁불퉁한 어깨뼈와 곧게 뻗은 등이 맞붙어 자리가 불편할 뿐이다. 아펠리오스는 천장에서 내리쬐는 빛에 눈이 부셔 눈을 꾹 감는다. 잔상이 남는다. 휘갈긴 필체로 쓰인 곡도 남는다. 눈을 뜬 아펠리오스는 공허함에 찬 표정으로 잔상을 되짚어보다가, 반 바퀴 빙글 굴러 케인의 위에서 내려온다. 침대의 폭이 좁아 안전하게 착지하지 못하고 밑으로 떨어진다. 엄청난 소리가 난다.

“아니 미친, 뭐 하는데!? 야, 괜찮냐?”

‘어.’

“어디 박은 거 같던데.”

‘머리를 좀…….’

“뭐가 괜찮아.”

안 그래도 미쳤는데 더 미치면 어쩐다. 케인은 아펠리오스의 안위보다 다른 쪽을 진심으로 걱정하며 그를 일으켜 세운다. 세상이 도는 느낌이다. 상체가 고꾸라지며 고개를 푹 숙인다. 세상이 여러 개로 보이고 흔들거리는 형상이 하나로 합쳐질 때, 아펠리오스는 눈앞에 있는 것을 바로 본다. 고개를 들지 않은 채로 말한다.

‘곡을 완성해. 내가 도와줄게.’

“내 말 하나도 안 들었구나.”

‘그리고 같이 나가자.’

“어딜 나가?”

‘바다로.’

마지막 문장엔 고개를 든다. 저를 쳐다보는 시선이 의미심장하다. 아펠리오스는 충동적으로 내뱉은 말에 후회하지 않는다. 남을 위하는 일은 원래 재미없으나, 지금은 그러고 싶다. 원래 사람은 자길 모르는 법이니 이래도 되었다. 케인의 입은 진즉에 벌어져 있었고, 한 박자 늦은 대답이 느릿하게 기어 나온다. 감흥 없던 말이 점점 흥미롭게 변한다. 이 정도면 만족할 만하겠다.

일주일 후

19XX년 7월 8일 오후 7시 22분

뉴욕시, 뉴욕

노스이스트 거리 158번지

다음 주에 해리네 집에서 파티 한대. 너도 올 거지? 차를 닦던 이즈리얼이 고개를 들었다. 얼굴만 겨우 기억나는 애들이 집 마당에 마음대로 들어오는 건 이제 허사다. 종일 일하고 난 뒤 몸이 쑤시는 통에 뜬잠을 잔 날이었다. 누굴 만날 거라고 예상하지 못해서 지극히 초췌하고 자연 상태에 가까운 모습이다. 이즈리얼은 눈곱이나 제대로 뗐는지 걱정하며 고개를 쑥 내렸다.

“어…. 해리슨? 헨리? 해럴드?”

“헨리. 친구 너무 많은 거 아냐?”

“언제라고? 다음 주?”

헨리가 누군지 모른다. ‘해리’를 애칭을 쓸 법한 이름을 나열했을 뿐이다. 자기가 알지 못하는 친구 중 해리슨이나 해럴드가 있던 것 같기도 한데 결국엔 상관없다. 상황을 빠져나가기 위해 어떠한 변명거리를 만들려면 이름 한 둘 지어내는 건 쉽기 때문에. 이즈리얼은 능숙하게 안타까워하며 샐그러진 눈으로 고개를 비죽 내밀었다.

“다음 주는 일 꽉 찼는데.”

“하루도 못 빼? 금요일 저녁이야.”

“평일에 전부 알바 있어. 가더라도 힘들어서 제정신 아닐걸.”

“애 돌보는 그거? 네 수준에 무슨 애들 뒤치다꺼리나 하고 있어?”

하하, 그러게. 마음에도 없는 소리로 맞장구치고 얼룩을 닦아내는 데에나 몰두했다. 잔디를 사박사박 밝으며 주위를 맴돌던 그 애는 이름이 케이시였는지 스테이시였는지 기억 안 났다. 이즈리얼은 대충 케시와 테시 중간 정도로 발음하며 일방적인 제안을 예의 바르게 거절하려 골머리를 앓았다. 금요일은 일정이 비었지만 굳이 모르는 사람 집에서 하는 파티에 시달리며 시간을 채우고 싶지는 않다. 밤새도록 불 꺼지지 않는 도시의 파티는 문란하고 더럽다.

“그리고 알바 끝나고 친구들이랑 약속 있거든.”

“친구 누구?”

“케인. 아펠리오스.”

“들어본 적 없는데. 뭔 이상한 너드들 아냐?”

그건 일종의 모욕이었나. 그치만, 너드가 어때서? 이즈리얼은 차를 문지르던 타올을 내려두었다. 힘이 들었다. 케인이 다니던 정비소에 세차장이 딸려있었던 것 같던데 피로를 빌미로 만날 구실을 만들고 싶었다.

이즈리얼은 전국에 친구가 있다는 소문이 공공연하게 나돌았다. 사실 그의 입으로 친구라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가끔은 루머가 곤란한 강요에서 벗어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했다. 이 정도로 둘러댔으면 떨어져 나갈 만한데 끈질기다.

“헨리가 꼭 왔으면 좋겠대. 사실상 네가 주인공이라고.”

“내가 뭐라고 그렇게까지.”

“뭐라니, 다들 널 좋아하잖아.”

여기에 너만큼 사랑 받는 사람이 어딨어. 이즈리얼은 대답할 수 없었고 그건 수락의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이와 같은 이유로 이즈리얼은 지금 팔자에도 없는 남의 집 파티장에나 와 있다. 알록달록한 빛이 새어 나오는 창가에 사람 실루엣과 덕지덕지 붙은 장식이 보인다. 볼륨을 최대로 틀어놓은 음악은 심장을 쿵쿵 울린다. 이즈리얼은 잔뜩 긴장한 것을 음악 탓으로 돌린다. 심장이 규칙적으로 뛰는 것처럼 온몸이 뛰었다 내려오기를 반복하여 잠기지 않은 문을 여는데 많은 시간이 걸린다.

이즈리얼의 등장은 이목을 끌어모은다. 제게 한마디씩 하는 수많은 이빨. 순식간에 몰리는 한 쌍의 눈알들이 징그럽다. 눈동자는 동그란 게 다닥다닥 붙어 있는 느낌이 들어 목덜미로 소름이 올라온다. 이즈리얼은 여유로운 척 손을 흔들고 누군가 들려준 컵을 받아 안으로 들어간다. 단 과일주스 향 사이로 찌릿한 알코올 냄새가 난다. 여기저기서 들이밀어지는 잔에 건배해 주며 음료를 마시는 척 컵의 가장자리만 깨문다.

생각 없는 십대들은 춤을 추거나 재미없는 농담을 하고 눈이 맞으면 윗방으로 올라간다. 안 어울리는 옷을 입은 애들은 기 싸움을 하고 자기네 학교에서 이름깨나 날렸다는 쿼터백들은 서로 어깨를 치고 지나간다. 이즈리얼은 사방에서 쏟아지는 근황 토크에 깜찍하게 미소하며, 저 멍청이들 사이에 제발 헨리라는 사람이 없길 간절히 빈다. 멍청한데 예민하고 덩치까지 좋으면 정말 답이 없다.

나, 여행도 다녀오고 알바도 했지. 또 애들 봤어? 우리 가게 와서 일하라니까. 맞아, 네가 너무 아깝다. 이즈리얼은 걱정을 빙자한 무례한 언사를 견딘다. 초반에만 어울려주고 슬슬 취해서 인사불성이 될 중반쯤 눈치를 봐 돌아가면 된다. 입 대지 않은 음료는 남의 잔에 몰래 부어버리고 새로 채운 컵을 들려줄 수 없게 팔짱을 껴 버린다. 느긋한 표정도 잊지 않는다. 아는 얼굴들은 이즈리얼을 오락에 끼워준다. 잘할 줄 모르는 게임을 능숙한 척 하니 주변인들은 그의 형편없는 실력에 웃는다. 어리숙한 모습은 오히려 매력이 되기도 했다.

부모를 잘 만난 아이들은 돈을 걸고 게임을 한다. 블랙잭을 하는 덩치들 사이로 맥주 뚜껑으로 만든 칩과 지폐가 나돈다. 한 놈은 몇 번이고 히트를 외치다가 결국 버스트 당하고 테이블을 강하게 내리친다. 쌓여있던 병뚜껑들이 와르르 쏟아진다.

이즈리얼은 그걸 어깨 너머로 살짝 봤을 뿐이다. 그 사이에 눈이 마주쳐 억지로 끌려와 앉는다. 카드 게임을 하는 애들 중 물이 깨끗한 사람이 없다. 안 그래도 꺼려는 카드가 부르지 않았는데도 앞으로 날아온다. 보는 눈도 많고 주변이 모두 인파에 막혔기에 빠져나갈 수가 없다. 이즈리얼은 뒤집힌 카드를 살짝 열어보고 어물거린다. 히트.

한계까지 히트를 불러 아슬아슬하게 21을 만드는 것이 보는 눈엔 자극적이지만 이즈리얼은 한두 번 부르다 버스트 당할 생각이다. 어차피 아무것도 걸지 않았으니 잃을 것도 없고, 괜히 이겼다가 원하지도 않은 칩이 제 몫으로 들어왔을 때 처리하기도 곤란하다. 두 번째 카드가 왔을 때 이즈리얼은 패를 확인하지도 않고 히트를 부른다. 건넌에 앉은 또 다른 덩치가 게임 좀 할 줄 안다는 듯 웃는다.

자기 운을 원망해야겠다. 이즈리얼은 네 장의 카드를 받고 턴을 끝냈고 상대는 마지막 세 번째 카드를 받았는데 거기서 버스트가 됐다. 이즈리얼이 뒤늦게 패를 열어보니 완벽하고 깔끔하게 21이었다. 얼른 포기하고 도망가려고 했던 계획이 무너진다. 오히려 주목의 대상이 된다.

패왕을 가볍게 무찌른 이즈리얼은 이겼으니 뭐라도 가져가라는 주변의 농성에 속으로 눈물을 삼킨다. 돈에 손 대기 뭣하면 한대라도 치고 가라니 어쩔 수 없이 손바닥으로 이마를 가볍게 친다. 참으로 재미없는 승리다. 실망한 관중이 야유하지만 이즈리얼의 성격을 아는 애들이 태반이니 쟤는 원래 그런 거 못 한다는 식으로 아무렇지 않게 넘어간다.


맞다, 너 걔랑 사귀어? 게임판을 떠나 한숨 돌리던 이즈리얼에게 누군가 다가와 묻는다.

“네 얘기 엄청 하고 다니던데.”

“누구?”

“걔 있잖아, 파란색으로 염색하고.”

“긴 머리에.”

“……아펠리오스?”

이즈리얼은 말도 안 되는 가정을 한다. 차라리 그와 사귄다고 소문이라도 나면 들러붙는 애들이 없어질까도 싶다. 질문을 한두 사람은 서로 눈빛을 교환한다. 자기들끼리만 재밌는 가십거리를 발견했다는, 보는 사람의 속을 답답하고 근질거리게 만드는 시선이다. 한 명이 입을 손으로 가리며 새어 나오는 웃음을 틀어막는다.

“다른 이름 나오는 거 봐.”

“펠이 누구야? 말고 걔 있잖아, 리지.”

“파란 머리 리지는 모르는데.”

“그래? 아무튼 걔가 그래, 자기가 너랑 사귄다고.”

“말 들어보면 애까지 낳겠던데.”

속이 울렁거린다. 모르는 사람과 가상의 자식까지 만들어야 하는 비루한 처지는 어쩌다 생겨났나. 하지만 하도 흔한 일이라 화조차 나지 않는 지경까지 이르렀으니, 이즈리얼은 능란하게 동조하며 주제를 정리한다.

“날 너무 좋아하나 보다. 그거 고맙네!”

그들은 따지거나 부정하지 않으니 오히려 흥미를 잃는다. 애초에 이즈리얼의 감정을 돋우려고 존재하지 않는 리지를 만든 것일 수도 있다. 뭐가 어찌됐든, 자기 이름이 붙은 쓰레기 CD를 보고도 아무렇지 않게 사인하는 이유는 조금만 참으면 이곳을 떠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음반점 구석에서 그의 노래를 찾은 애들은 화보 사진을 못 건진 것을 아쉬워한다. 정말 다행히도 그건 한정판이었다.

누구는 노래를 불러달라고 주변을 자극하기도 한다. 이 근방에 그가 가수였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으므로 모임에 참석할 때 반드시 한 번은 겪는 일이다. 이제 관두었다느니 안 부른 지 오래돼서 못 하겠다느니 하는 변명은 이미 입장을 굳힌 상대에게 통하지 않는다. 그럴 때마다 이즈리얼은 한 소절을 겨우 불렀는데 현기증이 났다.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고 예상은 했다. 손을 들어 진정시키는데도 잠잠해질 생각이 없다. 차라리 불러주고 빨리 끝내는 게 나을 수 있다. 이즈리얼은 심장을 뱉을 것 같은 기분을 누르며 목을 고른다. 거북한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좋아하지도 않는 노래를 부르는 건 언제나 괴롭다. 이즈리얼이 간신히 입술을 뗀다. 입이 열리자 주변이 급하게 조용해진다.

“얘들아. 너무 그러지 마, 부담스러워하잖아.”

묵직한 손이 어깨 위로 올라온다. 손바닥에 박힌 굳은살이 이즈리얼의 얄팍한 옷을 뚫고 피부로 느껴진다. 손이 얹어진 위치가 눈높이보다 한참 위다. 설마 하며 뒤를 돌아보니 역시나, 근육질 거구의 헨리로 추정되는 사람이 있다. 뒤로 넘긴 머리와 짙은 눈썹이 매력적이고 치아도 하얗다. 짧은 옷을 입은 애들이 주변을 맴돌고 입에서 알코올 냄새가 난다. 가슴팍에 별도 세 개씩이나 달았다. 아 씨발. 좃됐네.

“잘 즐기고 있어?”

“안녕, 해리. 오랜만이야.”

“우리 지금 처음 보는 거 아니었나?”

숨이 꽉 막힌다. 운동부랑 엮여서 좋은 꼴을 못 봤다. 운동하는 애들과 음악 하는 애들은 본인들의 가치관과 차별성을 강조하느라 보통 사이가 안 좋다. 좋게 포장해야 그렇지 사실은 인기를 끌어모으는 데에 서로가 방해됐기 때문이다. 이즈리얼은 음악을 애저녁에 관뒀는데도 과거의 이력과 그로 인한 명성에 곧잘 질투받았다. 중간에 애매하게 낀 셈이다. 해리가 손짓하니 다들 떨떠름한 표정으로 각자 놀거리에 다시 집중한다.

테이프 데크로 틀어놓은 음악이 바뀌고, 노래를 요구하던 몇몇 애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금방 웃고 떠든다. 게임을 하던 무리는 소리를 지르며 테이블을 엎어버리고, 진한 화장을 한 누군가는 해리의 어깨를 툭 치며 고혹적으로 인사하며 지나간다. 이즈리얼에게는 눈 한쪽을 깜빡여 준다. 완전히 난장판이다.

“청소하려면 오래 걸리겠다.”

“괜찮아, 한두 번도 아니고.”

“이런 거 자주 하나 봐?”

“그럼, 좋아하니까.”

해리가 음료를 한 잔 더 떠준다. 이즈리얼은 배가 부르다며 거절하지만 그는 이즈리얼이 아무것도 먹지 않은 것을 알고 있다. 내려보는 시선이 온몸을 스캔한다. 살이 끈적끈적하니 기분 나쁘다.

“내가 꼭 왔으면 했다고 들었어.”

“누구한테?”

“캐시?”

“케이시.”

“그래, 내 말이 그 말이야."

해리가 픽 웃는다. 취해서 혀가 꼬였냐고 농담하며 어깨를 툭 친다. 장난으로 한 짓인지 아니면 진심이었던 건지 이즈리얼이 반대편으로 훅 밀린다. 그는 앞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면서 가벼운 투로 말한다. 걔가 너 좋대. 나는 핑계고 사실 자기가 보고 싶어서 너 초대한 거야. 천장으로 탁한 연기가 퍼진다. 술을 전혀 마시지 않았는데도 눈앞이 흐릿한 것이 어지럽다.

“오면 안 될 자리에 온 건 아니지?”

“당연하지.”

“사실, 난 걔가 어떤 애인지 잘 모르는데.”

“그럴 만해. 우리 쪽 아니면 잘 안 어울리거든.”

“친구가 많은가 보네.”

“뭐, 그렇지. 내 여친이기도 하고.”

“어?”

“마음에 들면 줄게.”

난 다른 애들 많으니까. 이즈리얼은 연인이 쌍으로 무례한 것을 온전히 느끼면서 그리 밝지 않은 낯빛으로 애매하게 대꾸한다. 긍정도 부정도 아닌 것. 해리는 곁눈질하며 그를 충분히 당혹스럽게 한 것에 우월감을 느낀다. 이즈리얼은 애초에 덤빌 생각도, 싸울 마음도 없었지만 그는 이미 자기만의 싸움을 하고 있다. 바로 눈앞까지 온 연기를 손으로 내저으며 간신히 틈을 만든다. 숨은 트이지 않는다.

“이제 음악은 안 하고?”

“관둔 지 꽤 됐지.”

“왜? 네 노래 아직도 인기 많던데.”

“그것만 그렇지. 나머지는 아니니까.”

“재능이 아깝잖아. 더 노력해 봐.”

“그냥, 다른 일을 찾고 싶어.”

거북한 상대와 거북한 주제로 대화를 나누는 게 얼마나 거북한 일인지 거북한 상대는 모를 것이다. 표정 관리는 되어도 기저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너무 가라앉았다. 이즈리얼은 티 나지 않게 눈치를 보며 주변에 거울이 없는지 살핀다. 옆으로 춤추는 무리가 있어 그 너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같이 추기를 권하며 내밀어지는 손이 많다. 해리에게도. 이즈리얼은 정중히 거절하고 해리는 무시한다.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우고 다른 한 손으로 컵에 가득 담긴 술을 원샷한 해리가 이즈리얼에게로 시선을 툭 흘린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속내가 더 잘 보인다.

“불편해 보이네.”

“이렇게 사람 많은 데는 오랜만이라.”

“그래? 친구도 많으면서?”

“조용히 노는 게 더 익숙하거든.”

해리는 빈 종이컵을 구겨서 멀리 떨어진 쓰레기통 안으로 던져 넣는다. 완벽한 포물선이 쓰레기가 있어야 할 곳으로 들여보낸다. 테이블에 걸터앉아 한심한 가십거리를 나누던 무리가 쓰레기가 날아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다. 이즈리얼과 해리가 어울리지 않는 한 쌍이라고 생각했는지 숨기지 않고 웃으며 손을 흔든다. 해리가 받아주고, 이즈리얼은 어색하게 주변을 돌아본다. 이즈리얼, 여기 있지 말고 나가자. 해리, 어디 있나 했더니 여기 있었네. 사방에서 러브콜이 온다. 분명 몸은 여기 있는데 허공에 뜬 기분이다.

“크게 노는 건 싫어하고?”

“그런 편이지. 그럴 자신도 없고.”

“내숭 떠는 거 아냐? 안 그런 것 같던데.”

“진짜야, 이전 학교에서는 친구 없었거든.”

“그럼 즐겨 봐, 이즈리얼. 사랑은 받을 수 있을 때 받아야 해.”

해리는 아무 생각 없이 뱉은 말이지만 이즈리얼에게는 꽤 상처가 된다. 그리고 나 사인도 좀 해주고. 그는 웃으며 품에서 무언가 꺼낸다. 둘둘 말린 신문이다. 노란색 종이의 싸구려 신문. 이즈리얼은 저 안에 어떤 글이 적혀있는지 알고 있다.

“이거 네 기사더라고. 엄청 멋진 사람 같던데.”

“해리, 그건…….”

“소질 있는 것 같던데. 우리 팀 들어오는 건 어때?”

신문이 펼쳐진다. 모 가수의 파파라치 폭행 기사가 실려있다. 이름은 가렸지만 히트곡 하나만을 남기고 사라졌다는 어린 가수라는 특징이 누구보다 이즈리얼에게 어울린다. 이즈리얼은 사색이 되어 신문에 손을 뻗지만 해리가 더 빠르다. 손 닿지 않는 높은 곳으로 올라간다.

“케이시가 왜 널 마음에 들어 했는지 알겠어. 걔는 음악에는 관심도 없거든.”

“나는 그거 별로 안 좋아해서……. 나한테 줄래?”

“다른 것 다 필요 없고 얼굴만 보지. 예쁘고 귀여운 인상을 좋아해. 딱 너 처럼.”

그날 파파라치에 둘러싸였을 때 이즈리얼은 처음으로 카메라 공포증이 생겼다. 초기에는 카메라 렌즈와 비슷한 것만 봐도 극심한 두려움을 느꼈는데, 세상에는 생각보다 그런 물건이 많아 밖에 나가질 못했다. 이를테면 방범용 거울이나 세탁소에 즐비한 드럼세탁기의 유리문이 렌즈와 너무 똑같이 생겨서 몇 년 동안 그 근처에도 못 갔다. 시간이 많이 지나서 이제야 극복하려 하는데, 다시 그 순간을 들추면 금이 갈 수밖에 없다.

“여기에 써줘. ‘사랑을 담아, 이즈리얼’……, 주먹맛도 보여주면 좋겠는데.”

“내가 그런 게 아니야.”

“그래? 그런데 이쪽 문단 좀 봐.”

그때는 이즈리얼의 두 번째 앨범이 망한 뒤 소속사에서 해고된 날이었고, 지금보다 어렸다. 어린애 하나 털어먹겠다고 몰려든 황색지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그걸 같은 레이블에 있던 사람이 지나가다 보고서는 도와줬을 뿐이다. 도와주는 방식이 잘못되어서 그렇지. 그건 그저 폭력적인 호의였고 지금이야 친구가 됐지만 그때는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다.

강펀치에 된통 얻어맞은 기자들은 이를 갈며 폭행 혐의를 모두 이즈리얼에게 뒤집어씌우고 기사를 썼다. 맞은 데가 많이 아팠나. 현실에선 아는 사람만 알고 넘기자고 그대로 덮였지만 신문이 퍼날렸다. 다행인 점은 마이너 신문사의 찌라시는 사람들이 거의 몰른다는 점이었다. 인쇄는 고작 몇십 부로 그쳤고 그대로 잊히나 했는데, 저걸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대체 어디서 찾아온 걸까.

“황색 언론이잖아. 있는 그대로 쓰지 않는다니까.”

“아주 없는 일은 아니라는 소리네.”

“……아니야, 그러니까 나한테 줘.”

해리는 두꺼운 팔뚝으로 이즈리얼을 밀어내면서 자리에서 일어난다. 얘들아, 이즈리얼이 신문에 실렸던 거 알아? 그의 이름이 거론되니 몰려드는 인파가 많다. 기사의 존재를 몰랐던 애들은 어서 보여달라며 손을 뻗고 그 중엔 이즈리얼의 손도 있었는데 결국 닿지 않는다.

이즈리얼이 거의 매달리는 수준으로 달라붙어 뜯어내니 군중은 더 궁금해한다. 양쪽에서 밀려오는 등쌀을 통제할 수 없어, 해리는 팔을 번쩍 올리고 신문을 쫙 펴서 기사를 큰 소리로 읊는다. 가볍던 웃음이 웅성거리는 소리로 바뀔 때 이즈리얼은 여기 와서는 안 됐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틀 뒤

19XX년 7월 10일 오후 5시 53분

마이애미, 플로리다

사우스웨스트 104번지 센트럴하이츠 505호

곡은 생각보다 빠르게 완성되었다. 버린 곡이라느니 자기가 쓴 게 아니라느니 해도 어쨌거나 미완성곡들에 애정이 있는 건 확실했다. 악보를 그리고 가사를 쓰고, 소리로 나타나는 모든 과정을 아펠리오스가 지켜봤다. 아펠리오스는 노래할 수 없고 케인은 보컬 체질이 아니었지만 목소리 없이도 음악이 되기란 충분했다. 아펠리오스는 지가 써놓고 지가 틀린 케인의 코드를 교정해 주며 조금만 더 연습하면 밖으로 나갈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 케인은 이걸 좋아해야 할지 싫어해야 할지 모른다.

“야, 미리 말해두는데, 난 나갈 생각 없어.”

‘이제 조금만 더 연습하면 돼.’

“생각 없다니까 그러네.”

난 남이랑 음악 안 한다고 했잖아. 아펠리오스가 곡을 완성할 동기는 되었어도 누군가에게 의존하지 않겠다는 결단은 아직 유효하다. 케인은 여전히 아펠리오스가 마음에 안 든다. 그는 보는 사람이 짜증 날 정도로 자기 재능을 등한시하고 세상이 어떻게 되든 상관 없다는 태도를 취한다. 누구는 개고생하며 겨우겨우 악기나 붙들고 있는데 케인의 눈에는 복에 겨운 것 이상으로 보이지 않는다.

무엇보다 하나하나 배우고 얻어갈 때마다, 케인은 아펠리오스 없이 홀로 설 수 없다는 생각이 계속 든다. 케인은 분명 아펠리오스가 필요하다. 성장하거나 버티는 데 있어서. 하지만 인정은 어렵고 포기는 괴로우니, 마음에도 없는 고집은 내심 붙잡아 주길 원하고 있다.

‘안 돼’

“안 될 건 또 뭐야.”

‘지금이 아니면 안 돼.’

아펠리오스는 종종 미래가 없는 것처럼 굴었다. 앞으로 책임져야 할 삶이 없어 보였다. 가스 불에 담배를 지지거나 웃통을 까고 베란다에 나가는 일은 영화에서나 봤을 때 쿨하지, 실제로는 하나도 멋있지 않다. 하지만 그 주체가 아펠리오스이기 때문에 마냥 자연스럽고 당연한 듯 보였다. 피곤하고 빨간 눈은 염증이 몰려 충혈되어도 알아챌 수 없을 것 같았다.

자기 삶을 컨트롤 하면서도 그저 흘러가는 대로 놔두는 것 같은 느낌. 케인이 전자이기 위해 아득바득 살아간다면 아펠리오스는 양쪽 전부 아니다. 언제는 무슨 일이 일어나든 초연하게 굴었고 또 언제는 남의 말 듣지도 않고 자기 입장을 고수했다. 지금처럼.

“그렇게 하고 싶으면 너 혼자 하면 되잖아.”

‘혼자는 안 돼.’

“지금까지 잘만 했으면서.”

‘내가 다 가르쳐줬잖아. 그러니까 내 말 들어.’

“너한테 다 배우진 않았어.”

케인도 고집하면 견줄 사람 없지만 아펠리오스는 그보다 더 심하다. 가끔 말없이 빤히 쳐다보면 너무 무서워서 먼저 꺾여주어야 할 때도 많다. 지금이 대략 그런 느낌이라 케인은 심히 난감하다. 까짓거 못 해줄 게 뭐 있나 하는 동시에. 옆에 누군가를 두고 싶지 않다. 아펠리오스가 커버해 주지 않는 내 음악은 가치 없는 것만 같아서. 그냥 사실대로 다 말해버리고 속이라도 시원해지고 싶다. 복잡한 사연이 얽혀있는 일이기에 이해받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는다.

‘바이크 수리까지 얼마나 남았지?’

“앞으로 몇 주는 더.”

‘사흘’

“뭐?”

‘우리는 사흘이면 충분해.’

“안 그래.”

‘아니면 이틀’

분명 좋은 경험일 테다. 하지만 케인은 거절하고 싶다. 어떤 방법으로든 고집을 꺾을 방법이 있을 것이다. 손해볼 것 없는 제안임이 분명하지만 케인은 아직 그럴 준비가 안 됐다.

이틀 뒤

19XX년 7월 12일 오후 6시 42분

이즈리얼이 다 죽어가는 상태로 전화했다. 피곤함에 잔뜩 쉰 목소리가 꼭 울었다가 금방 그친 사람 같다. 케인은 뭔 일이 있었길래 울었냐며 놀리려다가 아펠리오스에게 한 대 얻어맞고 전화기를 넘겨준다. 그 정도 농담도 못 하냐며 궁시렁거리는 겉목소리가 이즈리얼한테도 들린다. 간절했던 소리다.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 침대에 다리만 걸친 이즈리얼은 잘 뜨이지 않는 눈을 벅벅 닦는다.

“난 여기가 싫어.”

‘무슨 일 있어?’

“많지.”

무슨 일이냐 물으면 한 가지 콕 집어낼 수 없다. 개인적인 과거상의 이유부터 일과 인간관계로 엮인 문제는 처음이나 끝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알려면 근원지를 찾아가야 했건만, 이즈리얼은 그간 전국을 돌았음에도 아무런 실마리를 찾지 못한 것을 근거로 현재 닥친 위기마저 해결할 수 없을 거라 확신한다.

아펠리오스는 상대가 울거나 신세 한탄 혹은 우울감을 표해도 감정적으로 동요하지 않는다. 평소처럼 차분하고도 텅 빈 태도는 간혹 부작용이 있으나 이즈리얼에게는 오히려 위로가 된다. 한결같은 모양새에 그는 골이 깨지는 두통을 느끼면서도 웃음을 터뜨리며 근황 따위를 묻는다. 아펠리오스는 종일 무엇을 했는지 나열하며 케인과의 지루하고도 한심한 일상을 공유한다.

“나 오늘도 일하고 왔는데, 오늘따라 애들이 말을 안 듣더라.”

‘어쩌다가.’

“엄마 아빠가 너무 보고 싶을 때도 있으니까.”

‘힘들었겠네.’

“엄청.”

조르는 투로 투정을 부리면 케인이 옆에서 뭐야, 뭔 일인데? 한다. 이즈리얼은 타지에 두고 온 성격은 나쁘지만 심성이 착한 친구와 심성은 나쁘지만 성격은 착한 친구가 그립다. 고작 며칠 본 얼굴에 연연할 만큼 도시는 최악이다. 마이애미에서 경험한 끔찍한 차멀미는 이곳에서 겪는 스트레스보다 훨씬 달콤하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돌아눕는다. 상체보다 다리 위치가 더 높아 허리가 들린다. 짧은 전화선에 걸려 전화기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펠.”

‘응.’

“파티에는 가지 마.”

‘무슨 파티?’

“뭐든 간에.”

옆에서는 케인이 밥 먹으라며 닦달한다. 아펠리오스는 말이 느리고 이즈리얼은 말이 무지하게 많으니 한 번 통화를 시작하면 스스로 끝낼 줄을 모른다. 충분히 반응한 아펠리오스는 케인을 보며 그럼 직접 끊으라는 식으로 전화를 넘겨준다. 아펠리오스는 언제나 이런 식으로 마무리를 맡겼고 케인은 그런 재주가 없어 항상 되넘겼다. 이번에도 그럴 것이다.

“야, 우냐?”

“안 울어.”

“누가 괴롭혀?”

“안 괴롭혀.”

“그럼 왜 그래?”

“좀 더 다정하게 물어봐.”

아펠리오스의 감정 없는 말은 진정이 되었고, 케인의 모진 말투는 위로가 됐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부 털어놓고 하염없이 운 다음 모든 걸 비우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다. 이 애들이라면 있는 그대로의 감정을 표출해도 될 것만 같다. 하지만 그러지 말아야 한다. 이즈리얼은 언제나 완벽하고 사랑받는 사람이어야 하며……. 완벽하고 사랑받는 사람은 괴롭힘당하거나 울지 않으므로.

“너 싸움 잘해?”

“웬 싸움?”

“주먹질.”

“앞가림할 정도는 해야지.”

“나도 가르쳐 줘.”

“네가 뭔 싸움이야?”

“배워두면 언젠간 쓸 일이 있을 테니까.”

“그러니까, 누가 괴롭혔냐고.”

“물어보지 마.”

이즈리얼은 부러 소리 내 웃고 저쪽에서 먼저 웃으니 케인도 피식거리며 반응한다. 발로 차면 오리건까지 날아갈 것 같은 게 왜 싸우겠대. 안 날아가려고 싸우는 거지. 귀하게 자란 왕자님이 그래도 되겠나? 아, 징그러워! 식탁에 차려진 식사가 식는다. 케인의 손에 밴 음식 냄새가 천천히 날아간다. 케인은 실없이 농담을 계속하다가 나는 분명 쟤를 싫어하지 않았냐는 생각이 문득 든다. 하지만 진짜로 힘들어하는 때까지 신경을 긁을 수는 없으니 이번만 봐주기로 한다. 아펠리오스는 두 사람이 생각보다 잘 맞을지 모른다고 느낀다.

“너 다음 달에 온다며.”

“왜, 더 빨리 보고 싶어?”

“하…, 됐다.”

“잠깐, 가지 마!”

이즈리얼이 킥킥 웃으며 애교 섞인 목소리를 낸다. 케인은 질색하며 아펠리오스에게 전화를 넘겨주려 하다가 다시 바로 한다.

“너한테 싸가지 없게 구는데 내가 뭐 그렇게 마음에 들어?”

“너도 사정이 있겠지.”

“너는 왜 그러냐, 사람이?”

“칭찬이지?”

“욕이야.”

케인이 한숨을 쉰다. 돌아누운 이즈리얼은 먹먹한 눈에 입만 웃고 어차피 두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을 테니 오래도록 근육을 당기지 않는다. 급속도로 내려앉는다. 사그락거리는 머리카락이 목을 스쳐 간지럽다. 간지럽다는 것은 본래 가슴이 뛰는 감각일 터인데 그저 불쾌하기만 하다. 한참이나 말이 없는 이즈리얼을 케인이 아펠리오스에게 눈짓하며 기다려준다. 음식이 조금씩 차가워진다.

“나 8월까지 못 기다리겠어.”

“그럼 어쩌려고.”

“보름 안에 갈래.”

“올 수는 있고?”

“몰라. 이제 쉬고 싶어.”

“너 사람 찾는 건 해결됐어?”

사람은 상처를 살피는 감수성이 부족하고, 사연을 모르는 상대라면 그 깊이가 더 하다. 이즈리얼은 쉽게 대답하지 못하다가 아직, 하고 짧게 말할 뿐이다. 케인은 더 묻지 않는다. 그게 누구든지 볼 수 없는 사람을 찾게 되는 건 이즈리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케인은 처음으로 이즈리얼과의 통화를 직접 끝냈다. 그 모습을 흥미롭게 보던 아펠리오스는 뒤늦게 식탁으로 끌려가며 한마디 거둔다. 재밌네. 철저히 남 일을 보는 듯한 감상이 기묘하다. 엄밀히 따지면 남 일이 맞으나 상대의 불안에 동조해 주던 첫 대화와는 다르게 지극히 삭막하다. 뭐가? 너희 둘 친한 게. 안 친해. 싫다더니 좋은가 보네. 아니야. 케인이 다 식은 음식을 감흥 없이 씹어 넘기면 아펠리오스가 따라 한다. 목구멍을 채우는 느낌이 썩 안 좋다가도 그리 나쁠 것도 없다는 기분이 든다. 아펠리오스는 코끝으로 가볍게 웃으며 만끽해 보려 한다. 잘되지 않고 웃는 법이 정확했는지도 확실치 않다. 케인은 웃음 치는 소리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든다. 아펠리오스가 몇 번의 웃음을 짓든지 보름은 순식간에 지나갈 것이다.

닷새 뒤

19XX년 7월 17일 오후 8시 51분

마이애미, 플로리다

골든 쇼어스 해변

두 번의 버스킹이 있었다. 이틀 전에 한 번, 오늘 한 번. 안 간다고, 안 간다고 한사코 거부하던 케인을 아펠리오스가 억지로 끌고 가 세워두었다. 내심 강요해주길 바라던 케인은 못 이기는 척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루한 자전거로는 두 명 분의 짐을 다 실을 수 없어서 정비소에서 차를 빌렸고, 정비소의 중년 남자는 케인이 옆구리에 모르는 또래를 끼고 온 것을 보고 요즘 애들은 회복탄력성이 참 좋다고 느꼈다. 차는 케인이 몰았고 아펠리오스는 바람에 날리는 긴 머리를 넘기지도 않은 채로 바깥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케인의 아버지는 케인이 운전하는 것을 그리 반가워하지 않았다. 청소년 운전은 위험하니 되도록 자제하라는 뜻이었다. 케인에게는 그저 저를 못 믿는다는 의미로 들렸지만 그럼에도 말을 잘 들으며 고물이 다 된 자전거를 탄 이유는 아버지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주기적으로 받은 편지는 한 통도 열어보지 않으면서 옛 친구들과의 분쟁이나 운전 따위를 걱정하는 것이 참으로 역설적이다.

장소는 늘 같았다. 같은 바닷가의 같은 목재 계단의 같은 칸의 같은 위치였다. 굳이 그 자리를 고집하는 까닭은 없지만 수평선 너머로 내리는 노을빛을 정면으로 받는 곳이었으므로 다른 이유가 필요 없었다. 케인은 작은 무대에는 올라가 봤지만 탁 트인 야외에서 악기를 드는 건 처음이라 입술을 씹을 만큼 긴장했다. 여린 입술에 잇자국이 난 것을 보고 아펠리오스는 마스크를 올려 쓰며 마스크 여분을 건네주었다. 아펠리오스도 긴장을 숨기려고 마스크를 쓰는 건지 궁금했으나 그의 입 부근은 미동도 없었다.

버스킹의 목적은 케인이 작곡한 곡을 공개하는 것이었다. 이 곡은 내가 썼다며 구태여 밝히지는 않았다. 뭐든 간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지나가다 곡 제목 정도는 물어볼 수 있을 테다. 총 다섯 곡을 연주했는데 앞의 네 개는 오아시스나 건즈 앤 로지스의 곡을 커버했고 청자가 몰려들었다. 케인은 다섯째 곡이 올 때까지 아펠리오스와는 다른 이유로 고개를 들지 못했다. 생소한 기분이었다.

케인은 너무 긴장해서 숨을 쉬는 것도 잊어버리고 입을 다물지도 못한 채로 덜덜 떨었다. 아펠리오스는 그 낌새를 눈치챘지만 조언이나 도움은 없었다. 사람들 앞에 서며 이렇게까지 마음을 졸인 적이 없는데 그 자리는 케인에게 너무나도 큰 무대였다. 자신감은 넘치지만 자존감이 부족한 탓이었다.

하지만 긴장한 것치고 케인의 곡은 다른 유명 아티스트의 곡과 자연스럽게 섞였다. 듣는 이들은 그저 제목은 모르지만 듣기 좋은 노래 정도로 치부했다. 나쁘지 않은 성과였다. 자리를 지키던 관객은 마지막에 와서 더 늘었고 쏟아지는 박수나 들지 못한 고개는 여전히 낯설었다. 밴드 시절 케인은 쇼맨십에 능했으나 이 자리에선 급격히 차분해졌다. 함께 있는 사람의 수준은 그만큼 중요했다.

두 번째 버스킹이 끝나고 시간이 늦어가면 파도를 구경하고 음악을 감상하던 관광객들이 조금씩 바다를 떠난다. 저녁 수영은 위험하니 옷을 쥐어짜며 물을 빼던 이들도 모두 물속으로 돌아가지 않고 모래를 씻는다. 악기와 장비를 차에 실어둔 두 사람은 어둑한 바닷물에 발을 담그며 괜스레 물을 튀기기도 한다. 케인은 분명 살짝 튀겼는데 아펠리오스는 손바닥을 움푹하게 모아 한 바가지를 뿌린다.

“야, 하지 마!”

‘네가 먼저 시작했잖아.’

“그렇게까진 안 했어!”

발목이 거의 나은 케인이 약하게 발길질 하니 아펠리오스가 뒤로 털썩 쓰러진다. 몸의 절반이 물에 잠긴다. 이런 미친, 빠뜨릴 생각까지는 없었던 케인이 기겁하며 일으켜준다. 당혹감에 뭐 그리 힘이 없냐며 오히려 아펠리오스를 나무란다. 이미 속옷까지 다 젖어버리고 입가에서 짠맛을 느낀 아펠리오스는 케인도 밀어버린다. 시원하게 뒤로 밀려난 케인이 발을 제대로 디디지 못하고 미끄러져 물에 빠진다. 얜 머리까지 잠겼다. 케인은 급히 머리를 빼고 숨을 고르면서 물속을 기어 아펠리오스의 발목을 잡는다. 발목이 잡히면 뿌리치려고 할수록 불리한 건 자신이라 그는 다시 뒤로 넘어간다.

아펠리오스도 오기가 생겨 케인의 옷자락을 잡고 늘어지며 옷 안으로 모래를 한 움큼 집어넣는다. 피부가 까슬까슬하고 언짢다. 케인은 밤바다는 위험하니 아펠리오스가 깊은 곳으로 굴러가지 않게 단단히 붙들면서 그를 짤랑짤랑 흔들며 물을 먹인다. 아펠리오스가 기침하자 자기가 너무 심했나 싶어졌으나 기침은 구라였고 아펠리오스는 케인을 다시 물 밑으로 집어넣는다.

바닷속을 한참 뒹굴다가 파도가 치고 몸이 으슬으슬해질 때가 되어서야 밖으로 나온다. 빈틈없이 쫄딱 젖었고, 아펠리오스는 거하게 재채기를 한다. 달리 덮어줄 것이 없어 그저 빠르게 차로 이동하며 케인이 나지막이 말한다.

“이젠 여기 안 올 거야.”

‘또 오게 될걸.’

“너랑은 또 안 해.”

‘내일도 와.’

“내일은 나 일 가잖아.”

‘나도 갈래.’

“되겠냐.”

수영할 줄 알아? 남의 차를 마구 적시면서 양쪽으로 사람이 가득한 도로를 비집고 나와 돌아간다. 아펠리오스가 드물게 먼저 묻는다. 남에게 전혀 관심 없어 보이는 사람이 궁금해서든 예의상이든 말을 붙이는 것이 낯설다. 대충은. 난 못 해. 그래 보여. 물에 안 빠지면 문제없지. 빠지면 네 머리카락 잡고 건져줄게. 돌아가는 운전은 아펠리오스가 한다. 바이크를 조종하던 솜씨만큼 자동차 운전도 능숙하다.

오늘 나 좀 괜찮았냐는 물음에 아펠리오스는 깊은 정서도 없이 그저 그랬다고 답한다. 건성으로 하는 말도 아니다. 정취 없는 사람이니 건성마저도 진심이 되었다. 케인이 입술을 내밀고 불평하니 신호에 걸리자마자 아펠리오스가 갑자기 고개를 획 돌려 그를 본다. 부담스러운 시선이 케인의 젖은 뺨으로 향한다.

‘장난이야.’

“장난 좀 그만 쳐.”

‘네 반응이 재밌어.’

“변태야, 무슨?”

아펠리오스는 어른스럽고 성숙하며 유치하다. 케인은 아직 어린애이며 불안정하고 유치하다. 어떤 식으로든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은 변함없고 돌아갈 곳이 같다는 점도 포함할 만하다. 케인은 문득 이젠 오지 않겠다고 했던 말에 감회가 서린다. 언젠가 어른이 되면 혼자 세상을 살아가야 할 테니 미리 연습이 필요했건만 아펠리오스는 그럴 기회를 주지 않는다. 그는 이미 혼자서 어른이 되었으면서 남에게는 틈을 주지 않으니 야속한 동시에 안심이 되었다. 적어도 보고 배울 사람이 생긴 셈이니까. 케인은 저도 모르게 아펠리오스에게 의지했고 의지와 의존의 차이를 모르는 그는 이 불편한 감정을 단지 열등감 내지 염오로 받아들인다.


아펠리오스에게 케인은 완벽한 관찰 대상이었다. 케인이 내뱉는 감정은 그 나이대 청소년이 마땅히 누려야 할 것이었고 케인은 그중에서도 표현이 확실한 편이니 시각적으로나 청각적으로 얻을 것이 많았다. 목소리는 돌아오지 않지만 타인의 몸짓이나 표정은 보고 따라 할 수 있다. 구겨지는 미간과 치켜 올라가는 눈썹, 가늘게 뜨이는 눈이나 꽉 다물어진 입술, 미약하게 잡힌 눈주름, 숨소리의 간격이 좁아지고, 전반적인 얼굴 색이 뜨거워진다. 그건 바로 분노다. 케인의 화는 불안정하고 폭발적이면서 마음 깊이 존재하는 양심 탓에 끝내 자제하고 마는 어리숙함을 무결하게 반영했다.

그런가하면 이즈리얼은 정반대다. 그는 깨끗한 겉껍질로 쌓였지만 속 알맹이는 썩고 있어서, 왜곡된 기쁨과 슬픔을 표현했다. 처연하게 곤두박질치는 눈썹의 끝과 빛나는 눈, 살짝 틈이 생긴 입과 축 처진 어깨와 가라앉은 얼굴빛, 그것이 슬픔이었고 기쁨은 입꼬리가 활짝 올라간 뒤 눈썹이 무지개처럼 둥글게 휘었다. 하지만 전부 가짜인 것 같았다. 화를 내지 않는 이유는 화낼 이유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그럴 줄 모르기 때문이니, 이즈리얼은 오히려 배움이 필요해 보였다. 하지만 그 또한 어린 나이의 불완전함이니 그것대로 가치가 있다. 솔직하지 못해서 상처받는 건 오로지 자신뿐이다.

이 이야기를 굳이 지금 하는 이유는 그 세 감정이 몽땅 필요하기 때문이다. 아펠리오스는 끼어들기를 5번 당했다. 작은 차를 타면 항상 이런 일이 일어난다. 케인은 어금니를 씹으면서 꼭 저런 놈들이 있다며 욕을 했고, 아펠리오스는 끼어들기 당한 슬픔과 큰 차에게 무시당한 분노를 한꺼번에 표현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이 방법이 맞는지는 모른다.

‘씨발.’

나오지도 않는 목소리로 상스러운 말을 하니 케인은 눈이 동그래져서 그를 돌아본다. 너 방금 뭐라고 했어? 같은 표정을 지으면서, 뒤에서 빵빵대는 것도 모르고 제 귀를 의심한다. 원래 운전을 하면 사람이 예민해진다지만 모든 일에 초연했던 그가 저리도 담백하고 세대를 초월한 욕지거리를 할 수 있다는 게 충격이다. 야, 진정해, 이 동네 원래 그래. 뭔가 안 좋은 느낌이 든 케인은 그를 진정시키려고 어깨를 툭툭 두드린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펠리오스는 속도를 높이며 매끄럽게 차선을 바꾸고 끼어든 차들을 앞서간다. 갑자기 빨라진 속도에 몸이 뒤로 젖혀진 케인은 그가 진짜 미친 사람인지 의심한다. 아펠리오스가 차를 오토바이처럼 운전한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의심이 확신으로 바뀐다.

“야, 그만 밟아! 그러다 사고 난다?”

그건 안 된다. 슬퍼하고 분노했으니 이제 기뻐할 차례다. 평범한 사람에게 기쁨이란 무엇일지 고민하다가 슬픔이나 분노와 그리 멀지 않은 감정이라고 결론 내린다. 아펠리오스는 창문을 내리고 손을 뻗어 뒷차를 향해 중지를 세운다. 얇고 곧으며 굳은살이 박힌 손가락이 아름답게 선다. 아펠리오스가 한 손을 창밖으로 내밀고 다른 한 손으로 아무렇지 않게 운전하는 것을 보며, 케인은…, 음…, 그저 보기만 한다. 무슨 생각을 해야할지 도저히 모르겠다.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다만 다시는 아펠리오스에게 운전석을 내주지 말아야 하며, 번호판을 떼지 않는 이상 같은 차를 몰고 바다에 나오긴 글렀다는 사실만은 확실하다.

19XX년 7월 20일 오후 4시 31분

뉴욕 시, 뉴욕

노스이스트 거리 158번지

이즈리얼은 자판기에서 뽑은 껌 세 개를 한꺼번에 입에 넣는다. 색소가 잔뜩 들어간 동그랗고 딱딱한 껌이다. 단단한 겉껍질을 어금니로 부수고 찐득찐득한 내용물을 씹으면 인공적인 맛이 훅 올라온다. 뒤지게 맛이 없다. 몇 번 씹지 않고 껌과 흘러나온 단물을 모두 하수구에 뱉어버린다. 악어도 저런 건 먹지 않을 것이다. 껌을 씹기 직전에는 변두리에 있는 다이너에서 식사했는데 도심지를 벗어났는데도 사람이 가득했다. 손님 중에는 이즈리얼을 알아보는 동네 주민이 몇 있었고 나머지는 전부 모르는 얼굴이었다.

거기서 과일이 곁들여 나오는 팬케이크를 먹었다. 높은 잔에 담긴 소다도 주문했다. 질척하게 적시는 시럽과 냉동 과일이 뒤섞여 맛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음료도 입안에서 튀는 느낌이 거북하여 한 모금 마시고 내려두었다. 만족스럽지 못한 식사는 종일 기분 나쁘게 한다. 오늘은 차를 몰기 싫어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이곳저곳 돌아다녔다. 오랜만에 타는 것이라 도로에서 넘어져 사고가 날 뻔했지만 종아리만 까지는 것으로 끝났다.

집에서 30분 떨어진 곳에는 작은 오락실이 있었다. 시끄러운 음악, 인기 게임 주변으로 몰려든 무리, 동전을 넣으라고 노래를 불러대는, 신식이지만 아무도 손대지 않는 기계. 이즈리얼은 총을 쏴 보기도 하다가 2인용 게임을 혼자 플레이하며 랭킹은 택도 없는 점수를 냈다. 과일 아이템을 먹지 못한 초록색 공룡이 죽는다. 안타까운 배경음악이 나오고 동전을 요구했다. 이즈리얼은 다른 기계도 건드렸지만 끝내 재미를 찾지 못하고 밖으로 나왔다. 여기도 깡패들이 섭렵한 격투 게임은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다.

파티가 끝나고 집으로 전화가 쏟아졌다. 처음 몇 건을 받으니 상대는 해리가 보여준 게 진짜냐며 호들갑을 떨었다. 집 앞을 지나가다가 현관을 두드리며 물어보기도 했다. 네가 그런 사람인 줄 몰랐다며 실망하는 이도 있었고 살다 보면 그럴 수 있다며 위로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다. 하나하나 답하기 피곤하여 전화선을 뽑고 문을 잠가버렸다. 집 안은 조용했지만 동시에 시끄러웠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틀지 않고, 창문과 커튼까지 꽉꽉 닫아두었는데도 눈앞이 어지럽고 귀가 부산스러웠다. 머리가 완전히 망가진 것 같았다.

하지만 나흘. 나흘만 견디면 여길 떠날 수 있다. 일주일 내내 분포되어 있던 일정을 4일 안에 처리하면 다음 학기가 열리기 전까지는 자유다. 더 이상 일을 받지 않을 것이다. 오전에 이미 알바 한탕을 뛰고 온 탓에 온몸이 쑤신다. 혼자서 바깥을 돌아다닐 때까지만 해도 너무 우울해서 죽을 것 같았다. 혼자 먹는 밥은 맛없고 혼자 타는 보드는 재미없으며 혼자 하는 게임은 어렵고 혼자있는 집에서 마주친 거미는 너무 무섭다.

이즈리얼은 속도를 낸다. 보드 바퀴가 낮은 턱에 걸려 덜컹거려도 낮은 자세로 무게중심과 균형을 잡는다. 피를 줄줄 흘리는 다리로 동네를 활보하니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를 흘끔 본다. 피를 닦고 싶지 않다. 남이 어떻게 쳐다보든 상관 없을 것 같다. 하얀 양말과 때 없이 새하얀 운동화에 붉고 진득한 액체가 튄다. 벗겨진 손톱의 빈자리처럼 작은 핏자국은 빈자리를 메꿀 것이다.

골목에 나앉아 해리가 품에 넣어준 담배를 피고 그라피티가 그려진 벽면에 똑같이 낙서한다. 하수구가 아닌 길바닥에 침도 뱉고 길을 돌아가기 싫으면 벽을 넘는다. 벽돌담에서 뛰어내리면 같은 수업을 들었던 애들이 그를 보고 화들짝 놀란다.

“이즈리얼! 어디서 나오는 거야?”

“아, 갈 길이 조금 급해서.”

“너는 저런 거 못 하는 줄 알았는데.”

“사실 지금이 처음이야.”

입은 웃는데 눈은 전혀 안 그렇다. 잠깐, 너 피 나잖아. 더 큰 이슈가 눈에 띄니 작은 이슈는 그대로 잊힌다. 그들은 심하게 까진 살을 걱정하며 다리를 타고 흐른 핏줄기를 심각하게 본다. 가까운 공원 수도에서 피를 씻자거나 약국에 가서 반창고라도 붙이자고 가는 길을 향해 손짓하는데 마음에 닿는 제안은 아니다. 이즈리얼이 지극히 괜찮아 하니 두 사람도 어찌 손을 못 쓰지만, 한 사람이 우물쭈물하며 입을 열려고 한다. 아, 그런데 너 그 신문……,

이미지 타격을 걱정하는 것인가. 상관없다. 염려의 말을 심드렁하게 흘려들은 이즈리얼은 괜찮다며 어깨를 으쓱이고는 다시 보드를 타고 빠르게 사라진다.

“그럼 또 봐, 세이디, 에이미!”

자리에 덩그러니 남겨진 알렉스와 이바는 세이디와 에이미라는 이름을 처음 듣는다. 거친 아스팔트를 구르는 바퀴 소리가 점점 멀어진다.

집에 도착한 이즈리얼은 습관적으로 우편함을 확인한다. 편지가 들어있기는 하지만 기다렸던 편지는 아니다. 알록달록하게 꾸며졌거나 하트 스티커가 붙은 두꺼운 봉투를 한 움큼 꺼낸 그는 내용을 궁금해하지도 않으며 무심히 집 안으로 들어간다. 혼자 살기엔 과하게 큰 집안이 오늘따라 싸늘하다. 계절에 맞지 않는 체감 온도가 그를 더욱 비참하게 하면 가져온 편지를 봉투째로 잘게 찢어서 물에 담가버린다. 종이가 모두 흐물흐물해지면 하나로 뭉쳐서 쓰레기통 가장 깊은 곳에 집어넣는다. 증거는 완벽하게 인멸된다. 정말이지 편지가 너무 싫다.

그런가 하면 페이저가 난리다. 세 자리에 가깝게 밀린 페이지를 아직도 확인하지 않았다. 메시지가 도착했다는 알림음이 들리면 기계를 완전히 부숴버리고 싶었다. 이즈리얼은 현관에 가방과 보드를 아무렇게나 던져놓고 거실로 이어지는 복도에 드러누워 버린다. 누워서 산더미처럼 쌓인 페이지를 확인한다.

[ 335 ] (*You‘re crazy)

[ 419 ] (*I don‘t understand)

[ 423 ] (*Call Me Now)

다들 해리가 퍼뜨린 기사를 봤나 보다. 왜곡된 글을 곧이곧대로 믿으면서 당사자의 변명이라도 바라는 듯이 저마다 연락을 요구하거나 욕을 한다. 만약 이 이야기가 진심으로 받아들여져 어른들의 귀에까지 들어간다면 이즈리얼은 분명 아르바이트에서 잘릴 것이다. 신뢰란 뭘까. 동조는 이렇게나 쉬운 것이었나. 하지만 오히려 잘 되었다. 그렇게만 해준다면 이제 불필요한 관심과 사랑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곤란하다. 원래 허황된 목표는 동네를 넘어 전국 주에 이름을 날리는 것이었다. 가수 활동으로 그러려고 했는데 망해버려서 계획을 틀었다. 그러면 일단 학교에서 인기가 많아야 하고, 옆 학교에도 존재가 알려져야 하고, 또……. 그런 식으로 인지도를 넓혀야 전국에 매력적인 일반인으로 소문이 날 터였다. 그러면 어딘가에 살아있을지도 모르는 부모가 제 소식을 듣고 찾아올 테고. 이즈리얼이 멍청한 학우와 일말의 관심도 없는 남의 부모에게 아양을 떨며 쾌활하고 예의 바른 척하는 이유도 그게 유일하다. 말도 안 되는 계획이지만 간절한 사람은 가냘픈 희망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그런데 이제는 글렀다, 모두. 포기해야 할 때인 듯하다. 이즈리얼은 메시지를 전부 확인하지 않고 지워 버린다. 앞의 몇십 개가 전부 같은 내용이다. 더 볼 필요도 없다. 어제도 운동부 무리가 찾아와 친목을 빙자한 시비를 걸어댔다. 파파라치한테 주먹을 갈겼던 그 친구처럼 힘이 셌다면 전부 묻어버릴 수 있었을 텐데. 그는 자연스럽게 케인을 떠올린다. 그 애는 앞뒤 가리지 않고 싸움에 뛰어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저번에 봤던 그 너덜너덜한 꼴도 그렇고. 아니면 아펠리오스처럼 주변 시선에 동요하지 않는다든지. 그러면 이렇게까지 휘둘리지 않을 테다. 그들의 극히 일부분밖에 알지 못하는 이즈리얼은 두 사람을 조금이라도 닮고 싶다고 생각한다.

바닥이 딱딱하다. 둥근 머리통과 부드러운 등이 납작하게 눌린다. 하지만 침대까지 갈 자신이 없다. 눈을 떴지만 시야가 흐릿하여 천장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이즈리얼이 소리 없이 중얼거린다. 부럽다. 난 너희가 부러워. 너희처럼 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대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페이저가 울린다. 확인하지 않는다.

19XX년 7월 22일 오후 9시 33분

마이애미, 플로리다

골든 쇼어스 해변

오늘은 중요한 날이었다. 아펠리오스가 처음으로 정비소에서 일했다. 그 전부터 얼굴을 비춰 중년 남자도 그의 존재를 알고 있었는데, 케인의 집에서 얹혀산다는 사실을 알리니 곧바로 일자리를 제안했다. 두 사람이나 필요할 만큼 일이 많지 않은데도 돈벌이 없는 그를 받아주었다. 순전히, 자기 자식뻘 되는 소년을 향한 어른의 선심이었다. 정비나 세차 따위 해본 적 없는 아펠리오스는 당연히 아무것도 하지 못했고 케인이 하는 일이나 멀뚱히 쳐다봤다.

“아니, 넌 오토바이도 세차한 적 없어?”

‘어.’

“그러니까 그렇게 드러웠지!”

‘닦아본 적은 있어.’

요즘엔 자동세차다 뭐다 해서 직원이 직접 해주는 여기는 그다지 인기가 없었다. 인건비가 더 붙는 값을 굳이 찾아와서 지불할 필요는 없으니까. 가끔 어린 남성이 젖는 모습에 희열을 느끼는 변태들만이 더블로 값을 치르고 더한 것을 요구하기는 했다. 전부 쫓겨났다.

어차피 정비와 수리는 전공자가 아니면 물 건너갔으니 케인은 세차하는 법을 알려줬다. 소매와 바지를 걷고, 도구를 이렇게 잡고, 물은 어떻게 뿌리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닦아야 하는지. 아펠리오스는 제법 키가 커서 높은 데까지 어렵지 않게 닿았다. 그는 순간적인 힘은 좋지만 지구력이 약했는데, 몸을 굽혔다가 펴며 팔 근육 전체를 써야 하는 행동은 아무래도 오래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케인은 금방 나가떨어지는 그를 보며 저렇게 허약한데 기타는 어떻게 그리도 장시간 칠 수 있는지 의문이었다. 금연 금지 표지는 아직도 안 고쳐졌다.

아펠리오스가 물을 잘못 뿌리는 바람에 케인의 머리가 쫄딱 젖었다. 왠지 어디서 본 장면 같아 케인은 어이가 없었고 대신 화는 나지 않았다. 똑같이 해줄 수 있었지만 자기는 아펠리오스보다 어른스러운 사람이므로 참았다. 그러니 그가 물을 한 번 더 뿌렸다. 이번엔 명백한 고의였다. 케인도 세수 시켜줬다. 검은 기름과 거품이 묻은 아펠리오스의 얼굴이 깨끗하지 않게 씻겼다. 하라는 일은 안 하고 물장난이나 치고 있으니 두 사람 다 나란히 혼났다. 아펠리오스는 첫 출근날에 혼난 셈이다. 케인은 속으로 좋아했다.

테런스(그러니까, 정비소 사장님.)를 보러 온 오랜 친구나 단골들은 처음 보는 얼굴에 팁을 더 얹어주었다. 정량 이상의 돈을 더 받은 아펠리오스는 그 의도를 알지 못하는 듯 보였다.

‘왜 더 준 거지?’

“처음 보니까 겸사겸사.”

‘처음 보는 거랑 무슨 상관인데?’

“앞으로 잘 해보라는 거지, 뭐.”

‘그걸 왜 모르는 사람한테 기대하지?’

“그게 호의라는 거야, 답답하네 진짜!”

케인이 바락 화를 낸다. 아펠리오스는 간혹 감정 없는 로봇처럼 딱딱하고 무감하다. 호르몬이나 감정을 느끼게 하는 어쩌구가 고장 난 건 아닐까 진심으로 생각한 적도 있다. 케인은 아펠리오스의 주머니에 팁을 꼭꼭 넣어주며 줄 때는 꼭 받으라고 일갈했다. 아펠리오스는 끝까지 이해하지 못한 표정을 지었다.


일과를 마치면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바다로 돌아온다. ‘돌아온다’는 말을 쓸 정도로 바다는 그들에게 익숙해졌다. 오늘은 관중은 없고 대신 밤바다를 즐길 체력이 있다. 아펠리오스는 구석에 있는 데크에서 잠시 쉬고 오겠다며 자리를 뜬다. 와중에도 기타를 짊어지고 간다. 케인은 혼자서 바다를 본다. 바다를 마주 보는 상가는 불이 밝게 빛나지만 바다 쪽은 시간상 많이 어두워서 발은 담그지 못한다. 대신 파도가 발치에 겨우 미칠 거리에 서있다.

파도 소리와 이름 모를 가게가 틀어둔 노래가 섞여 들린다. 오늘따라 파도가 높아 노래는 금방 먹힌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앞으로의 계획을 정리하는 케인은 우편함을 확인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한다.

케인이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보고 있으면 누군가 다가온다. 걸음이 빠르고 한 사람이 아니다. 다섯이 되는 무리다. 익히 아는 얼굴들이라 케인은 급속도로 표정을 구긴다. 저번에 대차게 싸웠던 놈들. 전 밴드 멤버들이다.

“뭐야, 또 맞고 싶어서 왔어?”

“살 만한가 보네.”

“파란 머리 네 친구야? 우리가 데려가도 돼?”

“아버지한테는 아직 연락이 안 갔나 봐?”

분명 신경을 긁으러 왔겠지. 이 시간에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고 와서 딱 마주쳤는지 모르겠다. 아마 며칠 전에 바다에 있던 걸 보고 매일 같이 마주치길 기다린 것 같다. 마지막으로 온 게 언제였더라. 어제, 엊그제, 아니면 일주일 전?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마치 짠 것처럼 자동적으로 몰려와 시비를 거는 걸 보면 상당히 오래 기다린 것 같다. 무슨 스토커도 아니고, 너네도 사람 따라다니냐? 그러니 무리가 비웃는다. 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아네.

케인은 이들이 갑자기 나타난 이유를 헤아려본다. 두들겨 맞은 게 억울해서? 자기들만 쌔빠지게 혼난 게 열받아서? 분명 쫓아냈는데 비참한 삶을 살지 않고 그새 파트너를 만들어서 잘만 살고 있어서? 무엇 하나 확증이 없지만 적어도 저 세 이유에 모두 해당한다고 감히 추측할 수 있다.

“그럼 왜 갑자기 와서 시비야.”

“그냥 어떻게 지내나 궁금해서 온 거지.”

“그래, 친구였잖아?”

“우리 사이에 궁금할 수도 있지.”

“우리라도 있어야 네가 안 외롭잖아.”

집에 가면 혼자일 거 아냐. 그들은 논리가 부족할 때 꼭 아버지를 들먹였다. 제 아버지에 관해 날조되는 이야기 중 진실은 단 하나도 없었으니 낙담할 필요는 없었지만, 진실이 아니니 더 화가 났다. 케인이 아니라도 누구든 그럴 것이다.

“용건만 말해.”

“말 했잖아, 궁금해서 왔다고.”

“저번에 맞은 게 덜 아팠나 봐?”

“폭력적으로 굴지 좀 마, 네 아빠처럼 되려고?”

“진짜 부모도 아닌 걸 왜 기다려.”

왜, 너도 우리 죽일 거야? 무리 중 하나가 케인의 이마를 툭 치며 말한다. 머리가 뒤로 밀린다. 주먹이 절로 쥐어졌지만 절대 먼저 때려서는 안 된다. 사람한테 손 올리는 거 아니라고 아버지가 항상 그랬다. 하지만 이 애들을 사람으로 봐야 하는가? 그건 또 모르는 일이다.

“네 아버지가 누굴 죽였는지 알아?”

“우리 같은 십대였대. 공부도 잘하고, 친구도 많았다더라.”

“마흔네 번을 찔렀대. 부모도 못 알아 봤다던데.”

“근데 술 마셔서 기억 안 난다고 했다며.”

즉석에서 지어지는 헛소리는 가히 경탄스러울 정도다. 너무 어이가 없어 케인은 화가 나지도 않고, 그저 그들을 노려보면서 입을 꽉 다문다. 무리는 킬킬대며 진짜라서 반박을 못 한다는 모욕을 퍼붇고 흉기로 그를 찌르는 시늉을 한다. 이렇게, 이런식으로. 그런데 자식이란 새끼는 팔자 좋게 음악이나 하고 있네. 그래, 아버지 가슴 찢어지겠다. 저번에는 참지 못했지만 이번엔 다르다. 반응하지 않으면 재미없다고 금방 떠날 것이다. 참자. 나만 참으면 된다. 이들을 잘 아는 건 케인이다. 같이 활동하며 봐 온 모습이 있으며 그들은 언제나 규격에 맞는 행동을 했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된다.

‘케인?’

하지만 아펠리오스가 돌아온다. 파도에 가려지기 직전인 작은 목소리에 무리 뒤편을 보면 그가 있다. 무리는 재밌는 것을 발견했다는 듯이 케인보다 먼저 그에게 다가간다. 그의 키가 훤칠하여 생각보다 눈높이가 높아 당황한 기색이 없잖아 있었으나, 개의치 않고 이번엔 아펠리오스에게 시비를 건다.

“그러니까, 얜 누구래? 벌써 갈아탔어?”

“안 그래도 너랑 얘기하고 싶었는데.”

“둘이 잘 어울리더라. 혹시 사귀어?”

무리는 케인에게 했던 것처럼 이마를 치거나 어깨와 다리를 툭툭 건든다. 아펠리오스는 미동도 없이 서서 그들을 내려다본다. 반응이 재미없는지 비아냥댄다.

“뭐야, 얜. 말 못 하냐?”

“뭣 때문에 둘이 같이 다닌대?”

“네 아빠도 사람 죽였어?”

다른 상대에게도 같은 레파토리로 공격하니 아펠리오스는 짧게 한숨을 쉰다. 저들이 머리를 치든가 말든가 어깨에서 가방을 내려 안을 뒤적거린다. 눈물 닦을 손수건이라도 찾니? 무리 중 아펠리오스와 가장 가까이 서 있던 한 명이 그의 가방을 당기며 안을 엿본다. 그는 당기는 손을 막지 않고 계속해서 안을 뒤지다가, 손에 쥔다. 철컥, 하는 불길한 소리가 난다. 아펠리오스는 총을 꺼내 그들에게 겨눈다.


그것이 총이라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긴 시간이 걸렸다. 시비를 걸던 무리도 움찔 놀라며 뒤로 몸을 뺀다. 아펠리오스는 한 발이라도 더 움직이면 발포할 것처럼 위협적으로 총을 치켜든다. 케인은 얼빠진 얼굴로 그 장면을 본다. 그러니까, 지금 쟤가 뭔 짓을 하는 건지 받아들이는 데에 큰 노력이 필요하다. 당장 달려들어 말려도 부족할 판에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여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애써 겁을 숨긴 무리는 웬 장난감 총을 가지고 왔다며 조롱하고 아펠리오스는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울이며 하늘로 한 발 쏜다. 탕! 조그만 총은 크지 않은 소리를 내지만 버르장머리 없는 상대를 위협하는 데에는 충분하다. 지레짐작 겁먹긴 했지만 설마 진짜 쏠 줄 몰랐던 무리는 피어오르는 연기에 목이 짧아지고 가장 가까이 붙어있던 한 명은 뒤로 나자빠진다. 엉덩이를 바닥에 찧고 잘은 모래가 케인의 다리에 튀고 나서야 그는 아펠리오스에게 달려든다. 몸을 뒤로 당기고 팔에 힘을 가해 접으려고 하는데도 도통 움직이질 않는다.

“야, 너 미쳤어? 지금 뭐 하는 거야?”

‘가만히 있지 마.’

“이런 식은 아니지, 이 새끼야! 그거 빨리 내려놔!”

말리는 사람이 케인뿐인 것은 그들 외에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무리는 일부러 으슥한 시간에 두 사람을 만나러 왔지만 그것이 오히려 범죄의 증거를 없애는 데 도움을 준다. 아펠리오스는 팔을 편 채로 버티며 자빠진 놈은 놔두고 가장 선두에서 케인을 긁던 소년에게 총구를 옮겨간다. 그가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만 진짜로 그렇게 될 상황이 되니 머리가 하얗게 변한다. 손가락이 방아쇠에 걸친다. 케인은 어깨와 허리를 밀치는 힘을 더 싣지만 꼼짝 안 한다. 그야말로 사람 한 놈 보내기 직전이다.

“제발 하지 마.”

‘괜찮아.’

“하지 말라니까!”

무리는 다섯이나 되면서 고작 조그만 총 하나에 벌벌 떨며 움직이지 못한다. 아펠리오스는 두려움으로 뒤덮인 얼굴을 어지간하게 보면서 의외로 만족스럽지 않은 심정에 실망한다. 겁주는 일은 언제나 재밌었는데 지금은 왜 흥미가 생기지 않을까. 실패다. 너무 재미없는 상대를 골랐다. 아펠리오스는 얼어버린 이들을 향해 조소하며 이제 마무리하려 한다. 오히려 케인이 더 파랗게 질렸다. 제발 쏘지 말라고 벌벌 빌어대는 게 제법 불쌍하다. 얘를 겁주려던 건 아닌데.

‘괜찮다니까.’

“뭐가 괜찮은데!”

‘다 장난이야.’

케인의 복잡한 머리가 그 말을 끝내 받아들이지 못하니, 아펠리오스는 시원하게 방아쇠를 당긴다. 눈이 따라가지 못하는 새에 손가락이 접힌다. 그것을 인지하자마자 케인은 급하게 아펠리오스의 손목을 잡아 방향을 튼다. 제발. 죽었으면 좋겠는 사람들이지만 죽어도 되는 사람은 아니다. 아펠리오스의 팔이 위를 향한다. 아무런 소리도 없고, 이미 걷힌 연기는 다시 피어오르지 않는다.

틱, 틱.

빈 총이 걸린 소리를 낸다. 케인은 그제서야 아펠리오스가 한 말 뜻을 이해한다. 첫발은 위협용. 두 번째부터가 진짜. 첫발로 이미 탄창은 비었다. 아무것도 발사하지 못한다. 아펠리오스를 제외한 모두가 어리둥절하다. 아펠리오스는 그 사이에 어깨에 멘 기타를 내려 무리에게 휘두른다. 허공을 횡으로 가르는 기타를 보며 케인은 생각하길 포기한다. 기타에 맞은 세 명이 볼링핀처럼 와르르 넘어진다.

둔탁한 소리가 나고 기타 무게에 몸이 쏠린 아펠리오스가 앞으로 기울어진다. 넘어진 이들은 자기가 무엇에 맞았는지 헤아리다가 너무나도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머리끝까지 화가 난다. 그래, 그러니까.

결론은 좆됐다. 총이 비고 무기가 없는 걸 확인한 남은 무리 두 명이 아펠리오스에게 달려든다. 기타에 직격타를 맞은 한 명은 아직 전투 불능 상태고 걸려 넘어진 두 명은 소리를 지르며 케인에게 향한다. 케인은 한꺼번에 두 명을 받아내면서 정신없고 심란한 상태로 아펠리오스의 상태를 확인한다. 이 새끼는 먼저 덤볐으면서 싸우는 소질은 형편없다. 한 대를 못 때리고 얻어맞기만 한다. 어렵게 내지른 주먹이 운 좋게 상대의 얼굴을 갈기기도 하지만 큰 타격이 없다. 코피가 흐르고 눈가가 찢어져 피가 난다. 저러다 맞아 죽겠다.

케인은 한 놈의 멱살을 잡아 좌로 휘두르며 왼쪽에 있던 다른 한 명과 머리를 맞부딪힌다. 딱딱한 것이 강하게 충돌하는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이 동시에 나가떨어진다. 그러니 잊고 있던 마지막 한 명이 케인의 다리를 잡고 넘어뜨려 등허리를 발로 차고 나가떨어졌던 이들이 기어와 손댈 수 있는 곳 모두를 패기 시작한다. 저번에 때린 데를 또 때린다. 애써 나으려던 상처 부위가 다시 커진다.

케인이 세 명한테 맞을 동안 아펠리오스는 한 놈의 눈깔에 모래를 먹이고 다른 한 명은 바닷물에 담가버린다. 어떻게 이겼냐 하니 몸을 낮추고 바지를 벗겨버렸다. 속옷 한 장만 덜렁 남은 소년은 엉덩이골이 노출되고 나서야 옷을 추스렸는데 그때를 노려 물속으로 밀어 넘어뜨린다. 모래를 먹은 놈은 눈을 씻어야 하지만 사방이 짠물이라 쉬이 방법을 찾지 못한다. 아펠리오스는 바지가 벗겨진 소년의 옷깃을 잡고 물고문하는 수준으로 물에 데친다. 케인이 맞아야 할 후폭풍을 생각하며 죽이지는 않았지만 상대는 꽤 괴로워한다.

그러니 물에서 건져준다. 상대는 이미 목이 탈 정도로 물을 먹어 전의를 상실하였고 자기보다 한참 약골인 아펠리오스가 저를 가만히 쳐다봐도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한다. 아펠리오스는 진즉에 흥미가 식었고 반 정도 뜬 눈으로 상대를 내려다본다.

‘말하면 안 돼.’

“뭐, 뭐를,”

‘몇 명을 죽였는지.’

너희만 알고 있어야 해. 캑캑대는 소년은 소름이 끼친다. 몸을 절인 찬물 때문인지 아펠리오스의 말 때문인지는 모른다. 그는 옹알이 같은 소리를 내다가 곧 말하지 않고 고개를 설설 끄덕인다. 아펠리오스는 감정이 전혀 전해지지 않는 웃음을 짓고 옷깃을 놔 버린다. 얕은 바다에 누워버린 상대를 두고 아펠리오스는 케인에게 돌아간다.

자기 잘못도 없는데 이딴 식으로 싸우게 된 케인의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코피와 입술이 터지고 눈가에 멍이 들고 무릎이 까진다. 모랫바닥이니 비교적 푹신한 게 그나마 다행이다. 하지만 입은 상처는 저번보다 면적을 더 넓혔다. 그러고 있으니 물에 젖은 아펠리오스가 다가온다. 그는 바닥에 떨어진 총을 주워 다시 무리에게 겨누고, 그들은 코웃음을 친다.

“그거 어차피 비었잖,”

총알이 없으면 총으로 때리면 된다. 아펠리오스는 총을 둔기 삼아 비웃은 한 놈의 머리를 쳐버린다. 악! 머리를 부여잡은 놈이 옆으로 밀렸다가 다시 몸을 일으킨다. 이놈들은 맷집이 더 세다. 그러면 더 많은 둔기가 필요할 테고 총알이 더 많았으면 도움이 됐을 것이다. 두 명은 이미 완전히 겁먹었거나 싸울 의지를 잃었으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치고, 둘이서 셋을 상대하는 건 크게 어렵지 않으니 덤벼도 될 테지만 전력의 차이가 너무 크다.

“이런, 씨이이발……!!!!”

아펠리오스가 사이클을 계산하고 있으니 케인이 욕을 내지르며 아펠리오스의 소매를 덥석 잡는다.

“야, 그냥 튀어!!”

냅다 뛰기 시작한다. 케인은 또 다리를 다쳐 절뚝인다. 이제 다 나았다며 까진 살에 연고를 바르던 게 바로 얼마 전이었는데 안타깝게 됐다. 저런. 나 때문에 저렇게 됐나, 아펠리오스는 지극히 당연한 생각을 하며 어디로 끌고 가는지도 모른 채로 잘만 따라간다. 세 명이 뒤를 쫓아 달려온다. 아펠리오스는 케인이 잡은 옷을 힘주어 빼버리고 여유롭게 뒤를 돌아보며 그들과 눈을 맞춰준다. 그것에 더 약이 올랐는지 더 빠른 속도로 다가오기 시작한다.

아펠리오스는 케인을 앞질러 간다. 스쳐 지나가는 중 케인의 주머니에서 자전거 열쇠를 빼는 것도 잊지 않는다. 케인보다 먼저 자전거까지 도착한 그는 미리 잠금을 풀고 케인을 기다린다. 저번과 같은 쪽 다리를 끌며 도착한 케인이 헉헉댄다.

‘네가 할래? 아니면 내가?’

“꺼져, 이제 너한테 아무것도 안 맡겨.”

케인이 서둘러 앞자리에 타니 아펠리오스도 뒤에 탄다. 두 사람은 똑같이 줘 터진 얼굴을 했다. 두 명을 실은 자전거가 재빨리 해변을 벗어나고, 무리가 도착했을 때 그들은 이미 떠나고 없다. 무리가 입은 피해는 그다지 없었으나 이를 갈며 분해한다. 자기들이 더 때려놓고 왜 분해하는지는 모르겠으나 경찰에 신고하자든지 주변에 본 사람은 없었는지 하는 말이 나온다. 하지만 물에 데쳐졌다 나온 한 명은 제발 조용히 넘어가자며 애써 상황을 진정시킨다. 사실 그들도 알고 있다. 경찰은 애들 싸움 따위에 관심 없다는 것을.

케인은 무지하게 페달을 밟으며 뒤도 안 돌아보고 집까지 향한다. 도착할 때까지 입을 여는 사람은 없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어디서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고 지금 벌어진 일을 모두 이해하지도 못했다. 다만 케인은 왜인지 고맙다고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말로 넘어갈 수 있는 일에 구태여 폭력을 썼지만 주먹을 내지른 뒤 이렇게나 후회되지 않은 적은 없다.

아펠리오스는 찢어진 눈가를 매만지고 손에 묻은 피를 괜스레 케인의 옷에 묻힌다. 케인이 짜증을 내고 아펠리오스는 픽 웃으며 더 닦는다. 그만 좀 해! 바락 소리를 지르니 그제야 멈추다가 다시 벅벅 닦는다.

‘재밌었어?’

“너 미쳤냐?”

‘아니야.’

흉이 질지도 모른다. 경찰서에 끌려갈지도 모르고. 하지만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은 지금, 미리 걱정하고 싶지 않다. 자전거가 달리는 속도에 맞추어 더운 바람이 분다. 바람은 피를 굳혀버리고 푸른 멍자국 위를 간지럽게 스친다. 엄청난 사고를 치고 왔지만 조금이나마 자유로운 느낌이 든다. 두 사람 모두 마찬가지다.

‘재밌네.’

“넌 진짜 미친 새끼야.”

‘대신 하나가 빠졌어.’

노래 부를 사람. 아펠리오스는 눈을 감으며 이즈리얼이 그랬던 것처럼 몸을 뒤로 눕힌다. 바람에 날린 머리카락이 핏방울에 엉겨 붙는다. 욕실의 샤워기는 마이애미의 바다만큼 더러운 것을 시원하게 씻어내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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