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가 무덤을 떠날 때

코끼리가 무덤을 떠날 때 01

켄펠잊 논씨피

파란색 포장재에 싸인 치약은 짙은 민트맛이 난다. 정리하지 않은 보드게임은 몇 개의 토큰이 사라졌고, 이유 없이 틀어둔 음악은 플레이리스트를 넘어 모르는 곡을 재생한다. 몇 번을 듣는데도 제목을 기억하지 못할 인디 팝이 방 안을 절반도 채우지 못한다. 금방 설거지를 끝낸 수도꼭지는 물이 뚝뚝 떨어지며 가습기의 물은 금방 채워 찰랑거린다. 밖에서는 가끔 개 발자국 소리가 들릴 뿐 조용하다. 

이토록 세상은 아무 문제 없이 돌아간다. 완벽한 휴일의 절정이다.


사실, 팬들은 그리 놀라지 않았다. 이와 같은 수순이 정해져 있을 때부터 물 밀려오듯 기사가 났다. 찌라시를 퍼트리는 이름 없는 언론은 하트스틸이 해체할 가능성에 대해 떠들었고 대외적인 신빙성은 없었지만 내부적으로 보면 대부분 사실이었다. 때로는 침묵이 정답이 될 때도 있어서, 그들은 SNS를 비롯하여 외부 인터뷰에서도 곧 활동을 중단하고 그룹을 떠날 것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인스타그램에는 평소처럼 셀프 카메라나 무작위 곡을 커버한 짧은 영상이 올라왔다. 하트 수는 줄었지만 조회수와 댓글 수는 전보다 확실히 늘었다. 절반 이상이 해체에 관해 묻는 내용이었다.

멤버 간 불화나 사건사고 같은 이유는 아니었다. 단지, 사람들이 모이면 언젠가는 당연히 흩어지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들은 부러 그룹의 존재에 관해 깊은 논의를 하지 않았고 대신 암묵적인 동의를 했다. 왜냐하면 애정이 어린 소속이 사라진다는 건 너무 가슴 아프니까. 굳이 현실에서 몸을 뒤척일 필요 없이 등을 지면 해결될 일이었다. 곡은 더 이상 발표되지 않았다. 곧 신곡이 나온다는 뉘앙스로 공식 SNS에 오른 티저 영상은 1년하고도 3개월 전에 업로드되었다. 사실상 그룹의 입장으로 보면 죽음이나 다름없었다.

일이 이렇게 된 데에는 누구의 잘못도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팬들은 더 답답해했다. 기다린 사람들과 더 기다릴 사람들, 그리고 그들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들을 사랑할 사람들. 복잡하게 얽힌 수많은 이해관계가 그들의 입이 열리기를 고대했다. 개중에는 개인 인스타그램에서 댓글이나 디엠 테러를 당한 사람도 있지만 '충분히 그럴 수 있다.'라는 이유로 대응 없이 넘어갔다. 그럼에도 이름을 밝히지 않은 당사자는 한동안 휴대전화 화면을 켜는 것도 힘들어했다는 듯했다.

폐기된 컨셉과 아무도 접속하지 않는 단체 채팅방, 깨끗하게 뜯기를 실패한 팬이 준 편지, 그리고 이제는 없는 함께 지내던 숙소··· 그것들을 마지막으로 세트와 크산테는 공식적으로 하트스틸의 끝을 알렸다. 더불어 요네는 소규모 언론의 인터뷰를 진행했고, 이즈리얼과 케인, 아펠리오스는 그동안 감사했다는 게시글을 올렸다. 공식 SNS는 삭제하지 않았다. 다만 계정이 삭제되는 것보다 더 이상 게시물이 올라오지 않는다는 사실이 더 슬픈 법이라고, 누군가 말했으나 쉬이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추억이라는 형태로 평생 남을 것이다.

1일. 날씨는 그저 그랬던 것 같은데··· 잘 모르겠어.

글로벌한 아이돌 그룹도 아니고, 일개 프로젝트 팀이 해체한다고 유난 떨 것이 있나. 케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팬들을 생각하면 아쉽지만 솔직히 말하면 활동에 그리 규모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곡이 발표되는 기간도 갈수록 길어져 조금씩 사그라지는 때였다. 전 밴드보다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나은 그룹이었지만 울고불고할 정도로 뭔가 대단히 쌓아오지는 않았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었다. 어차피, 비슷한 사람은 얼마든지 모을 수 있다고··· 부러 오만한 생각을 하면서, 그는 나름대로 외로움을 잊고자 했다. 깊은 상실감은 때로 교만으로 분출되었고 케인이 그 사례에 걸맞았다.

공식적으로 활동이 끝난 다음 날, 늦은 오후에 눈을 뜬 케인은 휴대전화를 확인하지 않고 침대에 엎드려 누워 한참을 움직이지 않는다. 턱을 베개로 받치고 눈꺼풀을 여닫기를 반복하며 꼼지락거리는 움직임도 없이 모든 행동을 멈춘다. 누가 보면 잠든 줄 알겠지만 그는 확실히 깨어있고, 뒤집힌 휴대전화는 미리 무음으로 바꿔놓아 미동이 없으며, 오랜만에 돌아온 집은 공기가 시리다. 금방 깨었지만 멍한 느낌이 들거나 허기가 지지는 않다. 고요한 집 안의 흐름처럼 제 몸에도 정적이 울리는 것 같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도 모르게 이불 속에 묻혀있던 케인은 바깥에서 주차 문제로 싸우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난다. 딱히 좋지 않은 기분인 건 아니지만 굳이 남의 욕지거리를 들을 이유는 없다. 그는 세수를 하고 부엌으로 가 작은 물 한 통을 전부 비운다. 앞머리가 젖어 물이 떨어진다. 빈 물병을 아무 데나 올려두고 의자에 앉아 등을 기댄다. 이제 어떡하지, 같은 생각은 들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머릿속에 아무것도 없는 것이 맞다. 아무렇지 않은 느낌. 그게 진짜인지는 알 길이 없는 채로, 케인은 맨발에 닿은 거실의 찬기를 느낀다. 다리를 타고 조금씩 올라온다.

혹시 아버지한테 연락이 왔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을 때, 싸우는 소리가 점점 심해져 모든 헤아림은 무로 돌아갔다. 제발 입 좀 다물어. 케인은 창문에 열린 틈이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 다시 몸을 일으킨다. 창가까지 가는 길이 너무 멀다. 그 사이에 소리는 점점 더 커진다. 정신이 깨니 떠올리지 않았던 기억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그는 인상을 팍 구기면서 물기가 묻어 늘어진 앞머리를 옆으로 넘긴다. 창문을 확인한다. 어디도 열리지 않았다. 틈을 슬쩍 열어 밖을 확인한다. 싸우던 소리는 들리지 않고,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1일. 산책하기 좋은 날씨. 구름 없이 맑음.

엄청 큰 개였다. 골든 리트리버라고 했는데, 두 발로 서니 꼭 사람 크기 만했다. 이즈리얼은 옷에 묻은 털을 떼며 신호를 기다린다. 횡단보도를 가로지르는 차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고, 뒤집어쓴 후드가 시야를 가린다. 딱히 얼굴을 가려야 하거나 화장을 안 했기 때문은 아니다. 사람마다 종종 숨고 싶을 때가 있는 법이고, 지금이 딱 그때일 뿐이다. 한 손에는 식료품점에서 산 재료들을 들고, 원래라면 오늘이 식사 당번이었을 것을 생각하면서 천천히 발을 뗀다. 신호가 초록색으로 바뀌었다. 차가 멈춘다. 바람에 모자가 벗겨지려는 것을 아무것도 들지 않은 반대쪽 손으로 바로잡는다. 마찬가지로 초록색인 긴 머리가 어깨로 흘러내린다.

개가 참 귀여웠지. 이름 물어볼걸.

뒤늦은 후회를 하면서 늘어선 상점들을 훑어본다. 아직 문을 열지 않은 개인 카페나 한산한 음식점, 일찍이 손님을 받은 미용실 따위가 있다. 넓은 전면창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안에 있는 사람과 눈이 마주치면 가볍게 목인사를 하는 척 눈을 피한다. 누가 알아볼 거라는 생각은 안 한다. 굳이 따지자면 자기들은 아는 사람만 아는 이들이었으니까. 이제 '자기들'이라며 여섯을 하나로 묶는 것도 맞지 않을 것이다. 하루아침에 남남이 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본인들의 생활이 있으며 앞으로 나아갈 길이 있으니까. 이즈리얼은 일찍부터 그런 생각을 했다. 울적한 기분이 들었고, 다 거짓말 같았다. 당장 집에 돌아가면 그들이 있을 것만 같아서··· 머릿수에 맞지 않은 식료품을 구매하고 영수증을 주머니에 구겨 넣을 즈음 그 사실을 깨달았다.

이거 혼자서 다 못 먹는데.

동시에 이즈리얼은 작게 웃는다. 꼭 헤어진 연인이 똑같은 것을 두 개씩 준비하다가 헤어졌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 같다. 분명 합의를 본 사항이고 사귀던 사이가 아닌데도 이러는 게 조금 유난스럽다는 생각을 한다. 어차피 얼굴을 보자면 못 볼 것도 아닌데. 그는 한숨을 뱉듯이 웃으며 어깨에서 흘러내리는 외투를 바로잡는다. 길거리에 선 사람이 두 장씩 내미는 전단지를 받아 영수증이 든 주머니에 같이 쑤셔 넣는다. 주머니가 꽉 찬다. 손을 넣을 자리가 없어 빼내고, 입김이 짙게 흩어지는 입에 대고 손을 분다.

집으로 돌아가던 이즈리얼은 문득 걸음을 멈춘다. 중고 서적과 음반을 파는 상점 앞이다. 요즘 음반점은 대부분 멸종했으니 이런 곳에서나 앨범을 구경할 수 있다. 그는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지하에 있는 문을 찾아 계단을 내려간다. 계단 이곳저곳에 눈이 녹아 물이 흥건해 손잡이를 잡으니 녹인 보람도 없이 손이 다시 차가워진다. 제대로 되는 일이 없다.

평소 독서를 즐기는 타입은 아니므로 서적 매대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새로 팔려 들어온 앨범 매대를 가벼운 시선으로 바라본다. 거진 10년 만에 보는 아이돌 앨범이나 논란의 중심에 선 그룹의 음반 등이 즐비하다. 그 중에서··· 익숙한 얼굴이나 로고는 없다. 어떻게 해체 하루만에 앨범을 팔아치우는 게 가능하겠냐마는 일단 다행이라고 하고 싶다. 아무튼 누군가는 간직할지도 모른다는 뜻이니까. 그것에 만족한 이즈리얼은 괜스레 두꺼운 책을 넘겨보다 제목을 보고 한 권을 고른다.

The Three Musketeers - Alexandre Dumas

당연히 본인이 읽을 건 아니다. 다른 게 아니라, 일전에 작사를 하던 제 친구가 영감을 얻을 목적으로 책을 읽던 게 생각이 나 골랐을 뿐이다. 다음에 만나면 꼭 줘야지, 같은 생각을 하며 그는 낡은 냄새가 나는 책을 들고 계산대로 향한다. 그러나 기대되지 않는다. 전혀.

1일. ······.

책상에 엎드려 선잠을 자는 게 습관이 됐다. 3분의 1정도 남은 커피가 향을 잃었다. 아펠리오스는 뻑뻑한 눈을 뜨면서도 뻐근한 몸을 늘리지 않는다. 눈앞이 흐릿하여 시계가 잘 보이지 않는다. 지금이 아침인지 저녁인지도 알 수가 없다. 언제 잠들어서 언제 깼는지도 모르는 마당에 뭘 할 수 있겠냐마는, 그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리로 천천히 일어나 커튼을 걷어낸다. 바깥이 어둡다. 제대로 기억나지는 않지만 자다 깨기를 반복해서 결국 이 시간까지 왔음이 분명하다.

방에 침대가 있지만 눕고 싶지는 않다. 그럼에도 아펠리오스는 눕는다. 누운 채로 손을 위로 뻗어 휴대전화를 확인한다. SNS 알림을 꺼놓아서 화면 상단에 아무것도 떠 있지 않다. 모두가 함께 있던 채팅방도 아무도 나가지 않았지만 동시에 아무도 말을 하지 않는다. 다들 각자의 일을 정리하고 있으리라. 불 켜지 않은 방은 어둡고 휴대전화 불빛만 유일하게 빛난다. 아펠리오스는 강한 빛에 미간을 좁히면서 마지막엔 결국 화면을 끈다. 아무것도 얻어낸 것이 없다. 이제 메시지로 시끄럽게 떠들던 사람이 없어졌음을 실감하는 정도다.

사실 아펠리오스는 하트스틸이 해체한 데에 본인의 잘못이 크다고 생각했다. 건강이나 극심한 완벽주의 성향 탓에 곡 작업이 더디고, 그런 만큼 그룹의 공백기는 남은 멤버들이 애써 채워야 했다. 그 사이 떨어져 나가는 팬들도 많고 소속사의 기대감도 떨어졌기에 여기까지 오게 된 것 아닌가, 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 생각은 지금까지도 유효하다. 어쩌면 죄책감. 그것이 아펠리오스의 몸을 무겁게 누른다. 내가 바뀌었다면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은 한계가 없어서, 마치 발 달리지 않은 소문처럼 널리도 퍼졌다. 

The paranoia's rising, can't silence the cries

But I’ll face the fear that hides behind these eyes

아펠리오스는 쓰다 만 가사를 소리 없이 흥얼거린다. 분명 작곡을 했었는데 이제는 음을 거의 잊어버렸다. 책상을 뒤지면 어딘가 악보가 있을 테지만 숙소 작업실에서 짐을 빼던 중 사라졌을 수도 있다. 제대로 된 잠은 아니었지만 분명 눈을 붙였는데도 진한 피로가 몰려온다. 깊게 팬 다크서클 부근을 문지르며, 그는 그 뒤에 어떤 가사를 썼었는지 한참을 헤아리다가 사이사이 멈칫거리며 억지로 흥얼거림을 이어간다.

I’ve been lost, in the chaos··· drowning, in the noise

But now I rise··· reclaiming my voice···?

내면의 투쟁을 위해 어둠을 벗어난다는 그런 희망찬 이야기··· 따위를 상상하며 적었던 몇 가지 문장이었던 것 같다. 작곡 전 읽었던 책이 많은 도움이 됐다. 하지만 그 책마저 다 읽지 못했다. 두통이 몰려온다. 열이 오른 것 같기도 하다. 그럼에도 파란색 포장재에 싸인 치약은 짙은 민트맛이 난다. 정리하지 않은 보드게임은 몇 개의 토큰이 사라졌고, 이유 없이 틀어둔 음악은 플레이리스트를 넘어 모르는 곡을 재생한다. 몇 번을 듣는데도 제목을 기억하지 못할 인디 팝이 방 안을 절반도 채우지 못한다. 금방 설거지를 끝낸 수도꼭지는 물이 뚝뚝 떨어지며 가습기의 물은 금방 채워 찰랑거린다. 밖에서는 가끔 개 발자국 소리가 들릴 뿐 조용하다. 

이토록 세상은 아무 문제 없이 돌아간다. 완벽한 휴일의 절정이다.

케인은 다시 창문을 닫으며, 이즈리얼은 책을 계산하며, 아펠리오스는 팔을 이마에 얹으며 생각한다.

지금이 바로 누군가 말했던, 딸기향 해열제 같은 환상적인 해결책이 필요한 때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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