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애미 신드롬 05
켄펠잊 논씨피 하이틴 AU
알고 계셨나요?
- 전편: https://glph.to/sm1gyz
- 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 미국 배경. 모브 캐릭터 등장&날조&개인적인 해석이 많습니다.
- 완결편입니다! 끝까지 함께 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Miami Syndrome 05
19XX년 8월 8일 오후 8시 6분
마이애미, 플로리다
???
한바탕 울고 나면 찾아오는 것은 깊은 부끄러움이다. 이즈리얼은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하면서 우중충한 하늘을 올려다본다. 이대로 집에 들아갈 수도 없고, 사과할 용기도 선뜻 나지 않는다. 그리고 서로 때리고 맞은 건 마찬가지라 어떤 식으로든 얼굴을 보기가 참 애매해졌다. 이제 눈물도 나지 않아 코만 훌쩍이니 거울에 비친 모습이 아주 가관이다. 고개를 돌려버리고 이미 말라버린 얼굴을 벅벅 문질러 닦는다. 피부가 쓸려서 아프다.
오늘 돌아가긴 글렀으니 모텔방이나 잡을지 생각하고 있으면, 짐을 죄다 두고 나와서 돈이 없다. 이보다 절망적일 수가 있나. 아펠리오스한테 어떻게 노숙했는지 물어보기라도 할 걸 그랬다. 다리를 쭉 뻗고 앉아서 우수에 찬 눈으로 궁상을 떨고 있으면 별안간 털털거리는 오토바이 소리가 난다. 엔진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더니 바로 골목 옆에 선다. 아펠리오스다.
여기 있는 줄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지. 갑자기 나타난 그를 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으니 아펠리오스가 헬멧 실드를 연다. 자기를 내려다보는 붉은 눈이 묘하게 유하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다가와서는 옆자리에 털썩 앉고, 헬멧을 벗고 둘 사이에 내려둔다. 자연스러운 몸짓에 이즈리얼이 잠시 말을 잃었다가 정신을 차린다.
"펠?"
'여기 있을 것 같아서.'
"어떻게 알았어?"
'나도 여기 있었거든.'
이즈리얼은 기억 못 하겠지만 이 골목은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곳이다. 이즈리얼이 죽은 듯 자던 아펠리오스를 처음 발견했던 그곳······. 그런 것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는 이즈리얼은 그저 아펠리오스를 당황스럽게 보며 말을 더듬는다.
"혹시 다 들었어?"
'가사 다 썼어. 아직 두 곡뿐이지만. 한 번 확인해 봐.'
"다 알고 온 거야?"
'마음에 안 드는 부분 있으면 말하고. 고쳐줄게.'
"펠, 그러니까······."
내 말 듣고 있어? 아펠리오스가 품에서 접힌 악보 여러 장을 꺼내어 건넨다. 얼떨결에 받아 든 이즈리얼은 머리에 들어오지도 않는 문장을 억지로 욱여넣으면서 뻐끔거리는 입술로 심정을 대변한다. 결국엔 악보를 바닥에 착 내려놓고 어찌할 바 몰라 하며 아펠리오스를 쳐다본다.
"무슨 일 있었는지 안 물어봐?"
'어.'
"왜?"
'그러고 싶어서.'
영양가 없는 대답에 이즈리얼은 그만 실소가 터져버린다. 그래, 이 애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지. 아펠리오스는 퉁퉁 부은 눈으로 킥킥 웃는 이즈리얼을 흘기거나 하지 않는다. 이즈리얼이 가장 감추고 싶어 했을 모습을 위해 오직 정면만 본다. 이즈리얼은 푸념에 가까운 투정을 부리려 뻗었던 다리를 접어 세운다.
"너희는 참 이상해······."
'어떤 점이?'
"너희는 날 모르지만 내가 누구인지 궁금해하지 않잖아."
'너희도 그래.'
"알고 싶지 않아? 내가 왜 그랬나?"
'이상하게 생각 안 해.'
그건 이즈리얼에게 일종의 위로와도 같아서, 그간 있었던 일을 전부 털어놓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아펠리오스는 타인을 위로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므로, 진정 느끼는 바만 이야기했을 뿐이다.
친구가 바로 옆에 있으니 또 울음이 나려 한다. 이즈리얼은 울먹거리는 입으로 한 자 한 자 힘겹게 뱉으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한다. 그날 찾던 사람이 누구였는지. 뉴욕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케인과는 왜 싸웠는지. 전부,는 아니겠지만 횡설수설하며 케인의 가정사는 제외한 할 수 있는 말을 다 하고 있으니 아펠리오스는 한 번도 옆을 돌아보지 않는다. 그를 흘끗 본 이즈리얼은 눈가를 문지르면서 한탄한다.
"너는 그런 적 없어? 세상이 왜 나한테만 이러는지."
'······.'
"나는 그냥 엄청 열심히 살았을 뿐인데."
왜 없겠어, 아펠리오스는 대답하는 대신 생각하고, 담배 연기를 내뱉는 것처럼 긴 심호흡을 하고는 견뎌낼 준비를 한다.
'사람이 죽어도 아무렇지 않더라.'
"뭐?"
두서없는 이야기에 이즈리얼의 고개가 슥 돌아온다. 아펠리오스는 여전히 눈을 맞추지 않고 차분한 목소리를 낸다.
'목소리가 안 나오고부터.’
"그 얘기는,"
‘전부 어떻게 되어버리든 상관없을 것 같았어. 아무런 감흥도 없이 그저 살아만 있는 기분이라······. 뭔가 느끼려고 애썼는데 잘 안됐어.'
하지만 너희는 아니잖아. 아닌 척하면서도 결국, 화를 내야 할 때는 화를 내고 울어야 할 때는 울고 두려워해야 할 때는 두려워한다. 자연스러우면서 당연하다. 그러면서 죽음 직후에는 웃고 역겨운 영화를 본 뒤 깔깔거리며 우스갯소리를 하거나 감정을 돋워도 끝내 화내거나 주먹을 쓰지 않는다. 모순적이고,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아펠리오스의 모든 시선은 단지, 하지만 너희는 아니라는 세 어절에 갇힌다. 아펠리오스는 그때의 메스꺼움의 원인을 이제야 이해한다. 하지만 듣는 내내 이즈리얼은 쓴웃음을 멈추지 않는다.
"세상 모든 일을 체감할 필요는 없어, 아펠리오스."
그건 무척이나 괴로운 일이라며 이즈리얼은 울면서 웃는다. 이제는 울어야 할 때인가. 아펠리오스는 안구에 집중하며 나오지 않는 눈물을 짜내보지만 결국에도 나오는 건 없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이라도 이해가 될 것만 같다. 아펠리오스는 이즈리얼이 내려두었던 악보를 다시 집어, 여기는 쓰는데 얼마나 어려웠고 어디는 너를 생각하면서 쓴 가사라는 둥 몰라도 됐지만 알면 제법 감동받을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아펠리오스는 이렇게까지 말을 많이 하는 자신이 낯설다. 이즈리얼은 코를 길게 훌쩍이며 축축한 눈으로 아펠리오스가 짚는 부분을 하나하나 따라간다.
"고생 많았네."
'생각보다 빨리 끝났어.'
"집에는 언제 갈 거야?"
'곧.'
"안 가면 안 돼?"
'안타깝게도.'
이즈리얼이 쓸쓸한 표정을 짓는다. 아펠리오스는 처음으로 그의 얼굴을 마주본다.
"갔다가 돌아와."
살풋 웃는 얼굴이 외롭고, 또 애처로워서······. 아펠리오스는 갈등하다 끝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 이즈리얼은 상관없는지, 대신 불룩 튀어나온 그의 윗주머니를 툭툭 친다. 안에는 담배갑이 들어있다. 아펠리오스는 한 개비 꺼내주며 자연스럽게 불도 붙여준다. 한계까지 빨아들인 이즈리얼은 또 한계까지 길게 내뱉는다. 눈물이 번진 만큼이나 뿌연 연기가 번진다. 싫어하는 냄새지만 동시에 좋아하는 사람의 냄새다.
"좆같은 맛이 나."
아펠리오스는 바닥에 떨어져 식어버린 꽁초를 생각한다. 아무런 맛도 나지 않던 싸구려 담배. 혀끝으로 몰려오는 좆같음이란 뭘까. 흩어져 사라지려는 연기를 뒤늦게 들이마시고 나지도 않는 맛을 헤아려보던 아펠리오스는 가볍게 대꾸한다. 분명 거짓말은 아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이즈리얼은 순식간에 한 대를 다 태우고는 아펠리오스가 내민 두 번째 담배를 거절한다. 날이 어둑어둑하니 골목 밖으로 빠져나가는 연기도 누군가 신경쓸 일 없다. 이제 곧 밤이 되고, 멀미를 속에 품은 채 길바닥에 죽은 듯 잠든 사람을 깨웠던 날처럼 두 사람은 같은 시간에 다다르고 있다. 저번에 갔던 모텔에 또 가자고 할까. 그러기엔 돈이 없으니 아펠리오스의 주머니 사정에 기대야 한다. 이즈리얼은 주머니를 뒤져본다. 낡은 사진만 한가득 나온다.
복잡한 시선으로 사진을 내려다보던 이즈리얼은 한참이나 고민하는 것 같더니, 겨우 입을 연다.
"이제 그만 두려고."
'뭘?'
"찾는 거."
'······.'
"이제 지쳤거든······. 그만하고 싶어."
'······그래.'
"그래도 어딘가에는 있다고 생각할래."
이즈리얼이 해사하게 웃으며 사진을 접어 넣는다. 이것도 가져가도 되지? 악보도 함께 품속으로 넣는다.
"이러다가 밤 꼬박 새우겠네."
'가끔 그러는 것도 괜찮아.'
"넌 뭘 했어?"
'잠깐 눈 붙이고. 운전도 하고. 불 켜진 곳 아무 데나 들어가고.'
"이상한 데 들어간 건 아니지?"
‘여기저기 갔었지.'
"왜 이렇게 겁이 없어?"
이즈리얼이 아펠리오스의 등짝을 살살 때린다. 아프지 않지만 큰 소리가 난다. 아펠리오스는 비가 오기 전에 어디라도 가자며 일어서고, 수리된 오토바이를 바라보는 이즈리얼을 잠깐 흘기더니 묻는다.
'네가 운전할래?'
"한 번도 안 해 봤어, 안 돼."
'나도 면허 없어.'
"뭐라고?"
'농담이야.'
그러면서 헬멧을 그에게 씌워준다. 머리통을 퍽퍽 치면서 씌우는 바람에 정신이 없으니 그 사이에 아펠리오스는 자연스럽게 앞자리에 엉덩이를 붙인다. 농담도 저런 살벌한 농담이 없다. 이즈리얼은 아펠리오스를 한껏 의심하면서 머뭇머뭇 뒷자리에 올라탄다.
"둘 다 안 죽는 거야."
'너는 안 죽을 거야.'
시동을 걸고 바퀴를 천천히 굴린다. 낡은 바이크의 요란한 엔진소리가 고요가 짙게 깔린 골목을 울린다. 어디로 갈지도 모르면서 멋대로 차를 출발시킨 아펠리오스를, 이즈리얼은 그냥 둔다. 얌전히 집으로 돌아갈지, 아니면 올리브색 카펫이 깔린 작은 모텔로 돌아갈지는 전적으로 아펠리오스에게 달렸다.
3일 후
19XX년 8월 11일 오후 1시 50분
마이애미, 플로리다
테리레인 정비소
"그래서 뭔 일 있었는지 말 안 할 거냐?"
중년 남자가 정비소 바닥에 대자로 누워있는 케인을 발로 툭툭 친다. 어디서 많이 본 장면이다. 철판으로 대충 만들어둔 천장 사이사이로 햇빛이 들어온다. 금연 금지 사인은 '금연'에 가로줄을 싹싹 그어 흡연 금지로 바뀌었다. 구석엔 아펠리오스의 오토바이를 수리했던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다. 헬멧은 중년 남자가 젊을 때 쓰던 걸 줬다. 이제 머리가 커져서 안 들어간다며 젊은 놈이나 쓰라면서.
중년 남자는 케인 위를 넘어 다니면서 부러 그의 심기를 건든다. 애가 며칠 전부터 계속 저기압이다. 언젠가 갑자기 (또!) 얻어터지고 다리를 절고는 안대까지 차고 나타났을 때도 딱히 아무것도 묻지 않았는데, 지금은 그때보다 훨씬 우울해 보인다. 옆에 달고 오던 파란 머리 친구도 며칠째 얼굴을 안 비춘다. 누구라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얘들 싸웠구나.
"집에 안 들어오더라고요."
"사이코패스인가 하는 걔네?"
"아펠리오스예요."
"연락은 해 봤고?"
"해봤겠냐고요."
"걔들 둘이 잘 있겠지. 때 되면 돌아올 거다."
"벌써 3일이나 지났는데."
"설마 아직도 화났겠어? 쑥스러우니까 못 오는 거지."
"자기가 먼저 잘못해 놓고."
"원래 마음 넓은 사람이 먼저 연락하는 거야."
케인은 혀를 차며 돌아눕는다. 눈앞에 바로 전화기가 있다. 걔네 페이저 번호 뭐더라. 제대로 외우지 않아서 긴가민가하다. 연락한다 해도 뭐라고 해야 하는 걸까. 도저히 모르겠어서 케인은 다시 천장을 보며 손등으로 햇빛을 가린다. 일단 저지르기 전까지는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아저씨."
"어."
"내가 애 같으세요?"
"뭔 소리야?"
"애처럼 굴지 말라던데."
"장난치냐? 너는 애야. 너네는 애고."
"본인은 그렇게 생각 안 하나 봐요."
"애들이 어른같이 굴 필요 없어. 안 좋은 거야."
"그럼 아저씨는 좀 어른처럼 굴지······."
남자가 툭 건들려 하니 케인이 벌떡 일어난다. 언제까지 이렇게 눈치싸움이나 하고 있을 건가. 다리를 질질 끌면서 수화기를 드니 자연스럽게 번호가 떠오른다. 마지막 번호를 누르기 전까지는 거침없다가 마지막에 가서야 갈등한다. 하지만 결국 먼저 용서하는 쪽이 이기는 거라고, 케인은 이즈리얼의 페이저로 메시지를 보낸다.
[ 86*0 ] (* Are you mad?)
보내놓고 나니 뭔가 부끄럽지만 이제 와서 무를 수는 없다. 저 정도 했으면 알아서 집에 들어오겠지. 전화를 내려두고 나름 상쾌해진 기분으로 하다 만 일을 다시 하려 하니 번뜩 생각이 난다. 얼핏 심장이 멈춘 것도 같다.
"오늘 며칠이에요?"
"11일."
"아, 썅!"
케인이 부랴부랴 가방을 챙긴다. 다친 발목을 삐끗하고 바닥을 미끄러지면서까지 겨우겨우 챙길 것을 다 챙기고 꺼지는 한쪽 다리로 정비소를 뛰쳐나간다. 그다지 드문 일도 아니었는지 중년 남자는 놀라지 않으며 뛰어나가는 뒤통수에 대고 소리친다.
"일하다 말고 어디 가!?"
"오늘 아빠 오는 날이에요! 내일은 진짜 일 할게요, 죄송해요!"
"집까지 태워 줘!?"
"버스 타면 돼요! 갈게요!"
아무리 정신이 없었다고 해도 이걸 잊고 있었다니. 집안이 개판인데 그걸 들키면 큰일 난다. 떼어버린 사진이나 친구들과 같이 살았던 흔적 따위를 하나하나 설명할 수 있을 리 없다. 케인은 변변치 않은 몸으로 정류장까지 무작정 달려 버스에 올라탄다. 여름 열기와 우중충한 날씨로 가득한 버스 안에서 꿉꿉한 냄새가 난다.
난폭운전으로 바닥이 심각하게 흔들려 손잡이를 잡고 버틴다. 치이고 치이는 어깨의 충격만큼 불안함이 더해진다. 케인이 걱정하는 것은 집안 상태. 아펠리오스와 이즈리얼의 짐은 아버지 방에 그대로 있고 자기 방 상태도 그다지 좋지 않다. 늘 벽에 친구들 사진을 붙여 최대한 잘 사는 척을 했는데, 이제는 그걸 다 떼어버렸으니 누가 봐도 해명거리가 필요하다. 게다가 떼어버린 사진을 상자에 차곡차곡 담아 책상 위에 다소곳이 올려두었으니 그걸 들켰다간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자기한테 완전히 실망할 거다. 인간관계도 재능도 됨됨이도 전부 엉망이다.
30분 후
19XX년 8월 11일 오후 2시 20분
마이애미, 플로리다
센트럴 빌리지 앞
케인은 버스 문이 채 다 열리기도 전에 사이를 비집고 내려, 멀지 않은 집까지 뜀박질한다. 한여름의 태양은 뜨겁고 공기는 무거워서 발을 하나씩 디딜 때마다 몸이 묵직하게 녹아내리는 느낌이다. 케인이 옆을 빠르게 지나가니 나무 그늘에서 쉬던 새들이 멀리 날아가 돌아오지 않는다. 등줄기로 땀이 흘러내리고 이마를 닦을 새도 없이 모퉁이를 도니 길이 막혀있다. 사고가 났으니 돌아서 가라는 노란색 표지판이 앞에 서 있다. 케인은 그것을 보고 마치 모든 의욕을 상실한 듯한 기분을 받는다. 남은 생각은 단 하나, 집에 어떻게 돌아가야 하는가······.
사방에서 빵빵대는 차 소리가 머리를 울린다. 케인은 뒷걸음질로 길을 나와 돌아선다. 처음 보는 얼굴들이 각자 갈 길을 간다. 저 사람들은 모두 갈 곳이 있는 것 같다. 케인도 물론 갈 곳이 있으나, 어떻게 가야 하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가 길을 막고 서있으니 사람들이 양쪽에서 어깨를 치고 간다. 왼쪽 어깨는 앞으로, 오른쪽 어깨는 뒤로 치어 상체가 측면으로 뒤틀린다. 갑작스레 모든 것이 피로하고 무력하다. 거미가 다리를 타고 올라오는 것 같다.
길 한가운데 떡하니 서 있는 케인에게 누군가 한껏 짜증을 부리니 케인은 곧 정신을 차린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 최대한 짧은 동선을 계산하여 움직인다. 안대 밑으로 땀이 차고 더운 숨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온다. 변덕스럽게 쏟아지는 소나기와 비슷하게 더위는 종종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리고는 한다. 지금이 그렇고 아마 모든 상처가 낫기 전까지도 그럴 것이다.
곧 집에 도착한다. 버튼을 여러 번 눌러봤자 엘리베이터가 내려오는 속도는 같지만, 구태여 버튼을 연타한다. 평소보다 느린 척하며 멈춘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다시 한 번 버튼을 연타하고 5층까지 올라가는 잠깐 한참 시간을 보낸다. 문 앞에 서서 열쇠를 세 번은 삐끗하며 꽂아 넣으니 집안이 조용하다. 아버지는 아직 오지 않았나 보다. 하다못해 이즈리얼이나 아펠리오스도.
케인은 우선 두 사람의 짐을 한데 모아 자기 방 옷장에 쑤셔 넣는다. 아펠리오스의 소중한 기타가 어딘가에 강하게 부딪히는 소리가 나지만 지금은 그걸 신경 쓸 때가 아니다. 수용량을 초과한 물건들이 문을 밀고 나오려고 하니, 케인이 힘을 강하게 주어 문을 닫아버리니 문틈이 맞물리며 완벽히 닫힌다. 안에서 우당탕 무너지는 소리가 들린다.
아버지의 침대를 최대한 원상태로 정리하고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킨 뒤, 케인은 급하게 이즈리얼이 주었던 사진을 찾는다. 바다에서 찍은 사진. 다이너에서 찍은 사진. 오락실에서 찍은 사진. 집 안에서, 그리고 잠들었을 때 몰래 찍은 사진. 풍경을 비롯하여 세 사람의 모습이 다양하게 나왔다. 케인은 그것을 자기 방 벽에 하나씩 붙이기 시작한다. 제법 다급한 손길로, 모퉁이에 접착력이 약한 테이프를 붙여 언제든 붙였다 뗄 수 있도록. 아버지는 친구들의 얼굴 하나하나 기억하지 못할 테니, 이 정도로 위장하면 적당히 의심 없이 넘어갈 테다.
케인의 방 벽은 완벽하게 가득 찬다. 하지만 여전히 불안감을 지울 수 없다. 또 뭐를 놓쳤더라. 케인은 우체통에 혹시 못 보고 지나친 편지가 있을까 하여 현관까지 달려가 문을 벌컥 연다. 문 앞에 누군가 서 있어 문에 머리를 박는다.
"악!"
뒤로 넘어갈 뻔한 것을 그 사람이 잡아준다. 아버지. 언제 왔는지 인기척 하나 없다. 몇 달 만에 보는 얼굴인데도 평소 같은 무표정으로 케인을 일으켜준 그는 먼저 입을 열지 않는다. 눈에 띄게 당황한 케인이 어물어물 입을 연다.
"아, 아빠."
언제 오셨어요? 반가움보다는 당혹감이 묻어난 질문에 아버지는 아무런 미동도 없이 조금 전, 따위의 담백한 대답을 내놓는다.
"어디 갈 데라도?"
"아니에요."
케인은 멋쩍게 뒷머리를 긁적인다. 아버지가 아무렇지 않아 하는 걸 보니 (안 그랬던 적도 없지만,) 그다지 수상하게 보지는 않았나 보다. 케인은 그를 집안으로 들인다. 혹시라도 치우지 못한 것이 있을까 봐 걱정하며 곁눈질로 재빠르게 방 안을 살핀다. 눈에 띄는 건 없다. 웬만한 건 다 숨긴 것 같다.
케인의 아버지는 자기 방에 짐을 내려놓고 금방 거실로 나온다. 사춘기 아들과 무뚝뚝한 아버지가 상봉한다. 케인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한참을 입을 다물고 있다. 먼저 안부라도 물어주면 좋으련만. 그러다 문득 그것이 생각나서, 조심스럽게 말한다.
"혹시 얘기 들으셨어요?"
"무슨 얘기를?"
"학교에서··· 무슨 연락 안 받으셨냐고요."
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케인은 한시름 놓는다. 이번에는 진짜로 연락할 듯이 굴더니 다 겁주려는 거였나. 그런 케인을 물끄러미 보던 그의 아버지는 마치 일상적인 질문을 하는 양 케인이 뜨끔해 할 정확한 포인트를 짚으며 눈길을 준다.
"상처는?"
"네?"
케인은 의식한다. 안대에 가려진 핏줄이 선 눈이나 퍼렇게 멍든 피부, 어색하게 저는 다리. 변명의 여지 없이 싸운 흔적. 더 어릴 적에는 길에서 넘어졌다는 거짓말이라도 해 보았으나 아버지는 모든 사실을 다 알고 있었다는 걸 케인도 안다. 머리가 어느 정도 큰 지금은 같은 말을 되풀이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진실을 말하고 싶지도 않다. 그럼 지금까지의 노력이 전부 헛수고가 된다.
"싸움이 있어서."
"······."
"그걸 말리려다가, 그··· 조금 휘말려서."
사실상 진짜 있었던 일로만 본다면, 먼저 싸움을 건 것은 아펠리오스였고 케인은 그걸 말리긴 했으니 그 말에 거짓은 단 하나도 없다. 하지만 어쩐지 거짓말하는 기분이다. 발바닥에 가시가 꽂히는 느낌이고 자리가 영 불편하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모든 것을 수긍한다.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 말 하지 않는 그 눈빛은 나를 탓하던 입보다 더 불안하다. 케인은 눈을 한곳에 두지 못하고 옷자락을 쥐었다가 놓기도 하면서 제 딴에 불안감을 분산시킨다. 가슴이 도저히 진정되지 않는다.
일단 드, 들어가요. 말을 더듬으며 집안으로 손짓하니 아버지가 먼저 안으로 들어간다. 친구들의 짐을 쑤셔 넣은 옷장은 잘 닫았는지, 번쩍이는 색깔의 머리카락은 다 주웠는지, 이제는 익숙해진 낯선 냄새들이 모두 빠졌는지··· 케인은 혼자 살 적의 상태로 집을 원상복구 했는지 끝없이 상기하며 뒤따라 들어간다. 주변은 지나가는 사람 하나 없이 고요하다.
약 1시간 전
19XX년 8월 11일 오후 1시 30분
마이애미, 플로리다
모텔 "오버룩"
이즈리얼은 아펠리오스의 손동작을 신기하게 쳐다보며 반의반 바퀴 몸을 굴린다. 일찍이 침대에 몸을 벌렁 눕힌 그는 영화 채널이 틀어주는 철 지난 상영작에 결국 흥미를 찾지 못했다. 누구에게도 연락이 오지 않는 전화기나 둘에서 하나로 줄어버린 기타 리프 따위를 의식하며 남의 기타나 두드리면 아펠리오스는 특별히 무어라 말하지 않는다. 천장을 기던 거미도 안 보이고 배수구에 악어가 역류할 자리도 없으니 여기는 이제 두 사람 외에는 텅 비었다. 일정한 박자로 기타 몸체에 닿던 이즈리얼의 손톱이 뚝 멈춘다. 검지를 덮었던 노란색 매니큐어는 샤워할 때 벗겨져 이제 반 밖에 남지 않았다.
“펠. 집에 안 들어가도 돼?”
벌써 네 번은 했던 질문이며 매번 같은 대답을 들었지만 기어코 또 물어본다. 자기야 남의 뺨을 후린 손으로 초인종을 못 누르겠지만 아펠리오스는 켕길 것이 뭐가 있겠는가 하며. 이즈리얼의 입장에서는 아무런 잘못도 없이 싸구려 모텔방이나 전전하며 1인용 침대를 다른 사람과 써야 하는 그의 처지가 참으로 안타깝다. 그거야 아펠리오스가 그동안 케인한테 어떤 장난질을 쳐댔는지 몰라서 내놓을 수 있는 감상이지만 적어도 그가 느끼기에는 그랬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펠리오스는 고개도 들지 않고 한결같이 답한다.
‘괜찮아.’
그에게 괜찮지 않은 것은 과연 뭘까, 이불 위를 마냥 뒹굴던 이즈리얼이 생각한다. 한창 예민할 시기에 좁은 방에서 또래 남자애와 단칸방에 머물며 맨살 부비는 것도 괜찮다고 하니, 이러다 사람을 죽이고 와도 괜찮다며 같이 묻어줄 것 같다. 아펠리오스는 이미 말장난으로 이즈리얼을 묻은 적이 있지만, 이즈리얼은 그것도 모른 채로 담배 냄새가 빠진 옷자락에 질척거리며 묘하게 어수선한 마음을 가라앉히려 시도한다. 하지만 내내 실패하여 벌써 3일이나 지났다. 무일푼으로 남의 동네를 배회한 것까지 포함하여.
냅다 뛰쳐나왔으니 뭔가 챙겼을 리도 없다. 있는 것이라고는 페이저와 껌 뽑아 먹으려고 남겨뒀던 동전 몇 개가 전부다. 애초에 여기 올 때도 특별한 짐 없이 오긴 했지만 완전히 맨몸으로 가출한 상태가 되니 그것보다 답 없는 상황도 없었다. 아펠리오스가 와주지 않았다면 길에서 객사하거나 뉴욕까지 걸어서 돌아갔을 것이다. 그랬으면 남의 아들까지 신경 써야 하는 불쌍한 삼촌이 또 뒷목을 잡았을 테다.
“여긴 재미 없어.”
‘뉴욕보다?’
“음······.”
이곳저곳 들쑤시고 다녀야 하는 이즈리얼에게 아무것도 없는 모텔방은 너무 지루하다. 이전처럼 오락실과 다이너 코스를 밟기에도 마음이 썩 편치 않다. 그렇다고 뉴욕보다 별로냐 하면 그건 또 모르겠다. 여기에도 분쟁해야 할 또래 남자애가 있지만 케인은 적어도 운동하는 애들만큼 머리가 비어있지는 않다. 어, 아닌가? 확신할 수 없어지면 이즈리얼은 문득, 아니 꾸준히, 자기가 무어라 말했는지 곱씹고는 한다.
네가 싫어. 지금껏 단 한 번이라도 그런 말을 했던 적이 있었나. 귀찮게 들러붙는 여자애들이나 괜히 신경을 돋우는 남자애들을 끔찍이 싫어했어도 마냥 웃으며 잘 넘겨왔는데, 아무 잘못도 없는 케인이 그런 말을 들어야 했던 이유는 뭘까. 단순히 화풀이에 지나지 않은 말. 공격적으로 발산된 열등감과 질투. 그동안 묵혀왔던 감정을 애먼 사람한테 쏟아낸 것 같아 이즈리얼은 묘하게 우울해진다. 주먹으로 맞은 탓에 헐어버린 뺨 안쪽도, 혀로 쓸어내리면 은은하게 퍼지던 피의 맛도 어렴풋이 아프다.
하지만 아펠리오스는 아무렇지 않게 옆에 있다. 때로는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는 것보다 아무것도 묻지 않는 것이 더 답답하기에, 이즈리얼은 아펠리오스의 다리에 기대고 있던 머리를 천장으로 돌린다. 기타 소리는 끊기지 않는다. 이즈리얼은 손톱을 몇 번이고 덧발랐지만 아펠리오스의 손톱은 언제나 그대로다.
“펠.”
‘응.’
“이제 와서 후회되는 이유는 뭘까?”
답이 정해져 있는 듯 없는 질문. 어떠한 대답이 듣고 싶어서 물은 것은 아니다. 다만 아펠리오스라면 어쩐지 정답을 알고 있을 것만 같다. 이즈리얼은 상처가 난 입안이 쓰라려 말을 더 잇지 않고, 아펠리오스도 고민하는 듯 홀로 기타나 치며 입을 열지 않는다. 이즈리얼의 바로 눈 옆에 놓인 악보에는 케인이 자주 틀리던 부분에 빨간색 동그라미가 여러 개 그려져 있고 그걸 본 케인은 이렇게까지 많이 틀리지는 않았다고 못마땅해······ 할 것만 같다.
곡을 두 바퀴 돈 아펠리오스는 세 번째 연주를 시작한다. 질리지도 않는지 같은 곡을 계속해서 연습한다. 마치 강박이라도 있는 것처럼 줄을 놓지 못하던 그는 느지막이 입을 연다.
‘넌 걔를 싫어하잖아.’
케인과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했다지만 그렇게 단정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그의 앞에서 싫은 티를 낸 적도 없다. 그야 싸우기 전까지는 모든 게 다 좋았으니까. 오히려 넉살이나 좋았으면 좋아 보였지, 아펠리오스의 앞에서 그들의 관계에는 어떠한 트러블도 없었다. 하지만 아펠리오스는 속을 들여다본 것처럼 입 밖으로 내지 않은 것까지 전부 알고 있어서 이즈리얼은 입이 굳는다. 가슴이 답답한 기분이다.
‘걔도 널 싫어하고.’
“···그걸 어떻게 알아?”
‘그러니까 너희는 서로가 필요해.’
“펠, 나는······.”
무슨 소리인지. 어떤 말이 하고 싶은지. 그리고 무슨 말을 듣고 싶은지. 전혀 모르겠다. 혀가 마비되는 느낌이다. 쉽게 이어지지 않은 다음 문장이 어색하고, 여태껏 사람을 미워했던 날들이 수십 가지 죄처럼 느껴진다. 이즈리얼은 입술을 앙다물며 눈을 아래로 내린다.
“나한테 걔가 필요해 보여?”
‘어.’
“왜?”
‘넌 걔한테 아무것도 숨기지 않잖아.’
“그렇게 보였어?”
‘그랬어.’
아펠리오스가 단호한 듯 아닌 듯 끄덕이고 한동안 말이 없던 이즈리얼은 침잠한 표정으로 고개를 젓는다. 중간에 섞인 웃음은 분명한 자조의 의미를 드러낸다. 아펠리오스의 눈이 악보를 왼쪽부터 오른쪽까지 훑을 때 이즈리얼의 시선은 유독 지저분한 한 소절에 머물러있고, 그것을 깊이 들여다본다. 아펠리오스가 보이지 않을 만큼 거리를 벌리다가 문득 멈춘다. 소리가 뚝 끊기자 이즈리얼은 턱을 들며 시선을 돌린다. 탁한 붉은색 눈이 금색 눈과 마주친다.
“안 그래.”
‘무슨 소리야?’
“원래 싫어하는 사람한테는 아무것도 안 알려줘.”
뉴욕에 있는 멍청한 또래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모든 것을 웃어넘겨야만 했던 불특정한 상황에서 본인은 그 애들보다 더 멍청해 보였을 것이다. 그보다 더욱더 멍청한 몇몇은 실없이 지은 웃음이 진짜인 줄 알았을 테고. 그렇게 속아 넘어가기만 하면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이즈리얼은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사람이어야 했으므로··· 그는 항상 완벽해 보이는 거짓말을 해야 했다.
그렇게 문드러지는 것은 이즈리얼 혼자였다. 남들에겐 스쳐 지나갈 뿐인 외면에 지나치게 매달리고, 몰입하고, 또 압박하고···. 내면은 착실하게 망가지고 있어도 그는 그것을 쉽게 드러낼 수 없다. 고작 그것이 이즈리얼이었으니까. 그러나 어째서인지, 아펠리오스와 케인에게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거짓말은 했을지언정 옆에 두고 싶다는 생각을 항상 했다. 가끔 진실을 말하고 짜증을 부리고 화도 내고 싶었다. 아무것도 숨기지 않는다는 것은 잘못된 말이다. 이즈리얼은 그들에게 아무것도 숨기고 싶지 않았다. 단지 그럴 준비가 안 되었을 뿐이지.
“항상 거짓말해. 내가 누구인지 알려주고 싶지 않다고.”
‘그래서 말 대로 했어?’
“그랬지··· 그치만 걔네는 날 알고 싶어 했어. 민낯까지 긁어내려고.”
‘케인은?’
“걘 아니지.”
‘그럼 사실 너희는······.’
서로를 좋아하는 거네. 이즈리얼이 동그란 눈을 끔뻑인다. 담담한 목소리로 아무렇지 않게 내놓은 대답이 황당하다. 마주쳤던 눈을 천장으로 한 번 넘겼다가 다시 상대의 눈으로 옮겨온다. 말 뜻을 이해하기까지 잠시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왜 결론이 그렇게 돼?”
‘싫어하면 숨기게 된다며.’
“그건 맞지.”
‘근데 걔한테는 안 그러잖아.’
“그래도 그거랑 그건 다르지!”
이즈리얼이 몸을 벌떡 일으킨다. 결론이 그렇게 될 일인가. 면전에다 싫다고는 말했지만 사실 진심은 아니었던 것은 맞는데, 그렇다고 좋다 한다는 서술어가 붙을 정도의 관계인지는 많은 고민이 필요하다. 어쩐지 어감에서 낯간지러운 느낌이 나기도 하고. 그러거나 말거나 아펠리오스는 연습을 마친 기타와 악보를 정리한다. 이즈리얼의 머리통으로 눌렸던 한쪽 다리의 접힌 바짓단을 꾹꾹 당겨 주름을 편다.
떠날 채비를 하는 모양새에 그를 물끄러미 보던 이즈리얼이 뭘 하는 거냐는 식으로 물으면 아펠리오스는 슬슬 돌아가자는 대답을 한다. 마음은 제법 누그러졌고 사과해야 할 필요성도 느끼지만 아직까지 얼굴을 보긴 껄끄러운데, 아펠리오스는 이 냉전을 끝낼 시기가 왔음을 직감한 듯하다. 집주인한테 한껏 짜증을 부리고 그러면서도 이 근방을 떠나지 못하니 지나치다 한 번쯤 마주쳤을 만도 한데, 이 좁은 동네는 그것마저 허락하지 않았다. 이즈리얼은 길게 한숨을 쉰다. 애처럼 굴지 말라고 하긴 했지만 정작 잃어버린 부모 밑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니 애 같았던 것은 본인이다. 게다가 먼저 손까지 올렸으니 결론은 자명하다. 이즈리얼은 있지도 않은 짐을 챙기는 척하며 뒤숭숭한 심경을 곧이곧대로 느낀다.
“얼굴 볼 자신이 없어.”
‘괜찮아.’
“넌 대체 뭐가 괜찮은 거야, 항상.”
‘이제 때가 됐거든.’
아펠리오스가 무슨 대답을 할지는 대충 예상할 수 있다. 괜찮아. 가장 무책임하면서도 위로가 되는 대답. 실질적인 도움은 안 되며 남의 일을 방관하는 듯한 말이지만, 그럼에도 이즈리얼이 아펠리오스의 대답에 간절한 이유는 그는 틀린 적 없기 때문이다. 그가 괜찮다고 말하면 반드시 괜찮았다. 사실, 아펠리오스의 관망은 현실이며 이성의 끝이므로 감정적인 자신은 평생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는 예감이 든다. 그의 이어진 말조차도.
“그게 무슨 소리야?”
‘서로 감정을 정리할 시간이 됐어.’
“그걸로는 이해가 안 돼······.”
이즈리얼이 인상을 구부린다. 아펠리오스는 가방을 어깨에 걸치고 금방 방에서 나갈 것처럼 침대에 걸터앉는다. 이제는 무슨 뜻이냐고 물을 정신도 없어서 그 모습을 멀거니 보고만 있으면 주머니에서 작은 소리가 난다.
삐-
페이저 알림이다. 한동안 소리를 끄고 살았는데 집을 나온 뒤로 괜한 마음에 다시 음소거를 해제했었다. 뉴욕에 있는 애들은 보내는 연락에 한동안 답을 안 하니 절로 흥미가 식어 이제 메시지가 올 일은 거의 없는데, 아펠리오스가 말한 타이밍에 알림이 울렸으니 이즈리얼은 설마 하는 생각으로 얼떨떨하게 페이저를 꺼낸다. 익숙한 번호로 메시지가 왔다. 이즈리얼은 네 개의 문자로 된 메시지를 한참 들여다본다.
[ 86*0 ]
팔짱을 끼고 가만히 기다리던 아펠리오스가 이즈리얼에게 긴 시간을 내어주다가 끝내 묻는다.
‘뭐래?’
“화났냐는데.”
‘화났어?’
“안 났어.”
사실상 화가 날 이유가 뭐가 있겠으며 케인은 일방적인 짜증에 응수했을 뿐이고 감정을 먼저 추스른 것이다. 이즈리얼은 염려하는 눈으로 아펠리오스를 올려보며 눈빛으로 묻는다. 아펠리오스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이즈리얼은 입술에 힘을 주어 꾹 다물었다가 곧 힘을 푼다. 더듬더듬 전화기를 들어 신중하면서도 느리게 번호를 입력하고, 마지막 번호를 넣기 직전 작게 중얼거린다. 왠지 또 울 것 같아. 아펠리오스는 굳이 대꾸하지 않는다. 그의 심정을 온전히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마지막 번호를 넣자 신호가 가고, 잠깐의 정적이 이어진다. 전화를 받았으면 하는 심정과 제발 받지 않았으면 하는 심정이 교차한다. 며칠만에 연락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화가 났느냐는 말에 전화를 걸어 다짜고짜 안 났다고 하기도 영 이상하다. 이즈리얼은 숨소리만큼이나 작게 한숨을 내쉬면서 신호음이 이어질수록 초조해지는 가슴을 붙든다. 아펠리오스는 무심한 듯 보이면서도 이즈리얼의 반응 하나하나까지 전부 지켜본다.
그러다가 달칵, 연결음이 끊기더니 수화기 너머로 누군가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울리는 목소리를 듣고 이즈리얼은 몇 초 동안 멍하니 있다가, 사색이 되며 수화기를 꽝 내려놓으며 전화를 끊어버린다. 깜짝 놀란 듯 이리저리 움직이는 시선이 갈 곳을 찾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드물게 당황하며 눈을 끔뻑이던 아펠리오스가 그를 빤히 쳐다보니, 이즈리얼은 횡설수설하다가 곧 상황을 설명한다.
“전화 잘못 걸었나 봐! 어떤 아저씨가 받았어.”
‘정비소로 전화한 거 아냐?’
“아냐, 집 전화였어. 주인아저씨 목소리도 아니었고. 그리고 난 거기 번호도 몰라!”
‘그럼 잘못 걸었다고 끊지, 왜 그랬어?’
“난 어른이랑 얘기하는 게 싫어! 통화는 더 싫고! 걔들은 끔찍하단 말이야.”
이즈리얼이 말한 ‘걔들’은 확실히 어른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아펠리오스는 이즈리얼에게 어른과 엮인 어떤 사연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워낙 에피소드가 많은 사람이니 더 묻지 않고 넘긴다. 타인에게는 ‘겨우’ 전화 잘못 건 것으로 느껴질 수 있지만 이즈리얼에게는 아닌 듯했다. 적잖이 놀랐는지 엄지손톱을 깨무는 그의 손을 매니큐어도 바르지 않았냐면서 떼어내면서, 문득 한 가지 사실을 생각해 낸다.
‘걔 오늘 일 하는 날이네. 집에 없겠다.’
“그럼 괜히 걸려다가 사고만 쳤네······.”
‘별일 아니야. 신경 쓰지 마.’
“이것도 내가 잘못한 거면 어떡하지? 아니, 잘못한 게 맞지 않아? 예의 없이 말도 안 하고 끊어버리고, 항상 충동적으로, 그리고 내 마음대로, 이렇게 막 회피하기만 하고, 거짓말하고, 또 언제는···.”
이즈리얼은 뭐 대단한 사고라도 친 것처럼 자학하기 시작하고 처음 몇 마디를 들어주던 아펠리오스는 그의 이마를 주먹 끝으로 가볍게 때린다. 세게 때리지도 않았는데 얼얼함이 훅 다가오자 그가 머리를 통째로 감싸 쥔다. 아펠리오스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가져오지도 않은 물건을 놓고 가지는 않는지 확인하며, 이즈리얼을 획 돌아보고는 이전에는 없었던 단호한 말투로 말한다.
‘생각 좀 그만해.’
“그치만······.”
‘그만 해.’
어쩌면 무섭게도 보인다. 이즈리얼은 기세가 확 꺾여 금방 꼬리를 내리지만 그렇다고 서운하거나 나쁜 기분은 아니다. 누군가는 꼭 해줬어야 했던 말. 자기 문제를 타인의 입에서 직설적으로 전해 듣고 나니 오히려 갑갑함이 풀리는 것도 같다. 이즈리얼은 이마를 문지르면서도 생각을 멈추지 않다가, 퍼뜩 눈을 크게 뜨며 머릿속을 엉키면서 어지러운 것을 지우려고 애쓴다. 쉽게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언젠가는 그의 말대로 해야 할 것이 분명하다.
“···알겠어.”
그러니 자신 없으면서도 훗날엔 가능하리라 여기고, 짧게 대답하고는 일어서는 아펠리오스를 따라 함께 침대에서 일어난다. 이제 돌아갈 때가 되었다.
19XX년 8월 11일 오후 1시 55분
마이애미, 플로리다
테리레인 정비소
케인 없다. 두 사람이 정비소에서 가장 처음 들은 말이 그거다. 말 그대로 케인은 바닥에 분홍색 머리카락 하나도 남기지 않은 채로 자리를 비웠다. 이즈리얼은 차를 얻어 탄 이후로 정비소에 방문하는 게 처음이었는데, 그 얼굴을 알아본 주인 남자가 아는 척을 한다. 너 저번에 걔 아니냐? 이즈리얼은 어른과 대화하는 게 싫다고 우는소리를 했던 것치고는 상당히 예의가 바르다. 반갑게 인사를 받는 동시에 넉살 좋게 안부를 묻는 것이나 궁금하지 않을 근황을 묻는 자연스러움까지···. 확실히 정비소에서는 이전에 받은 게 있으니 거부감이 덜한 건 사실이겠지만 그래도 쾌활하게 웃는 낯빛은 아펠리오스에겐 그다지 좋게 보이지는 않는다.
“오늘 일 안 왔어요?”
“왔는데 아버지 오시는 날이라고 다시 갔어.”
“아버지가 오셨다고요?”
이즈리얼은 아버지라는 말에 유독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도 그럴 것이 아버지는 이즈리얼이 느끼는 열등감의 근원이자 두 사람이 대판 싸우게 된 원인이기 때문에. 언젠가 하루 정도 짐을 빼 줘야 한다고 듣긴 했는데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싶다. 그만큼 노숙을 오래 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아펠리오스의 얼굴은 익히 아는 남자는 이즈리얼 대신 그에게 케인이 제대로 설명하지 않은 것을 묻는다.
“근데 너희들 싸웠냐?”
‘조금이요.’
“며칠씩이나 안 들어갔다며.”
“걱정하던가요?”
“그놈 딴에는 걱정이었지, 뭐.”
이즈리얼은 마음이 안 좋다. 아펠리오스도 자기를 따라왔으니 혼자 남은 그가 길고도 짧은 시간 동안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 턱이 없었다. 그래서 차라리 욕이나 하고 말았으면 괜찮았을 텐데 남에게 걱정 섞인 푸념이라도 늘어놓은 것 같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르바이트 사장님한테 그런 걸 보면 케인도 참 의지할 사람이 없나 보다라고, 그리 생각하게 된다.
“혹시 그런 얘기는 안 했어요? 뭐 때문에 누구랑 싸웠는지 같은···.”
“말 한마디 안 해주더라.”
“얘기할 법도 했는데···.”
“걔가 원래 그래. 못되게 생겨서는.”
남자가 혀를 찬다. 두 사람은 잠시 말이 없다. 아펠리오스는 금연 표지 앞에 서서 주머니 속으로 빈 라이터를 만지작거린다. 침묵에서 느낀다. 케인과 이즈리얼은 상극인 것치고는 상당히 닮았다. 그것이 그의 감상이었다.
“그럼 지금은 집에 갔어요?”
“아마 그럴걸? 간 지 얼마 안 됐어.”
“그럼 빨리 가면 따라잡을 수도 있겠다.”
사실 아무런 대책도 없다. 케인은 자기들 존재를 아버지에게 알리기 꺼리는 눈치였으니, 그대로 아버지가 있는 집에 들어가 버린다면 얼마나 또 기약없이 기다려야 한다. 그러면 간신히 마음에 모아둔 알량한 사과를 건넬 타이밍을 놓칠 거고. 물론 케인 입장에서는 갑자기 집을 꿰찬 친구들의 정체를 설명하기 곤란한 것은 당연하겠다. 그러나 이즈리얼은 왜인지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서, 뒤도 안 돌아보고 가는 사람을 도중에 붙잡고 싶은 심정뿐이다. 아펠리오스가 그렇게 말했던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대충 알겠다.
“펠, 빨리 가야겠어.”
‘아저씨가 뭐래?’
“출발한 지 얼마 안 됐대. 빨리 가면 중간에 만날 수 있을 것 같아.”
‘만난 다음 계획은?’
“사과해야지.”
‘그래.’
라이터에서 손을 떼고 고개를 끄덕인 아펠리오스가 그다지 빠르지 않은 속도로 오토바이에 시동을 건다. 이즈리얼은 사과한다고는 했지만 막상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는 탓에, 차라리 만나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과 빨리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섞인다. 자연스럽게 뒷좌석에 몸을 태우면서도 속이 어지럽다. 긴장을 한 것처럼 불편한 것도 같다. 그러나 그대로 정비소를 떠날 수 없어 마지막까지 예의를 차리며 주인 남자에게 인사한다.
“감사해요 아저씨! 그때도 감사했어요!”
“오냐. 가끔 싸우는 것도 좋지만 일주일 내로 해결 봐라.”
“지금 보려고요! 아저씨도 잘 지내세요, 또 올 게요!”
이즈리얼이 인사를 끝내고 아펠리오스도 고갯짓으로 짧게 인사하면 충분히 달궈진 오토바이가 출발한다. 아펠리오스는 드디어 케인네 집 주소를 외웠고 이제 안전운전만 하면 된다. 순식간에 사라진 두 사람을 보며 주인 남자는 오토바이가 주차되어 있었던 자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저 미친 십 대들이 헬멧도 쓰지 않은 것을 뻔히 알고도 웃는다. 그 애는 참으로 자기 같은 친구들만 사귄다.
“이 길이 맞아?”
‘맞아.’
“근데 사람이 왜 이렇게 많지?”
이 동네는 오늘따라 도심지만큼 사람이 많다. 이렇게 바쁠 때까지도 사람을 헤치고 가야 하는 처지가 비관스럽다기보단 열이 뻗친다. 이즈리얼은 그동안 교통체증에서 운전자들이 왜 그렇게 화가 나 있었는지 체감하면서 급정거한 아펠리오스의 뒤통수에 머리를 박는다. 머리카락은 쿠션을 전혀 하지 못해서 두 머리통 간에 깡 소리가 나며 서로 반대 방향으로 고개가 넘어간다. 눈앞이 파랗게 변한다. 그만큼 머리가 아픈 건지 아니면 모가지에 반동이 와 아펠리오스의 뒷머리에 코 닿을 듯 다가왔는지 모르겠다.
그의 동그란 뒤통수를 문질러주며 앞을 보려 고개를 기울이면 길이 막혀있다. 사고가 났으니 돌아서 가라는 표지판이 바로 앞에 있다. 망가진 자동차나 교통을 통제하는 사람 따위가 있고 그것을 구경하는 사람들이 어깨 너머로 현장을 듬성듬성 비춘다. 큰일은 아닌 것 같지만 주변에 튄 파편이 제법 살벌하다. 바퀴 밑에 깔려 가루가 된 조각을 보면서 이즈리얼은 다른 길을 떠올리지만 타지역에서 그런 게 생각날 리가 없다. 어차피 본인이 운전하는 것도 아니지만 마치 자기가 길 안내라도 해야 하는 양 아펠리오스의 어깨를 잡고 옆길을 손가락질한다.
“아마 저쪽으로 가면 될 거야.”
‘반대야.’
“엇······.”
아펠리오스가 쿨하게 방향을 틀고 어차피 잘 모르는 이즈리얼은 입을 다문다. 앞바퀴가 고민도 없이 가야 할 길을 따라 구른다. 이즈리얼은 괜히 뒤를 돌아보며 멀어지는 현장을 흘기고 민망함에 작은 소리로 덧붙인다.
“갑자기 웬 사고가 났대.”
‘갑자기 나니까 사고지.’
“그런 의미가 아니었는데.”
‘누가 죽지는 않았나 보네.’
“너도 운전 조심히 해.”
‘가끔은 그래.’
“가끔 말고 항상 그래야지.”
그러고 보니 헬멧은 어디에 두고 온 거지··· 같은 생각을 하면서 멀지 않은 곳에서 보이는 아파트 단지를 향해 고개를 든다. 익숙한 건물이다. 어째 돌아서 왔는데 원래 다니던 길보다 더 일찍 도착한 것 같다. 알게 모르게 지름길이 있었나. 벽을 넘지도 않았는데 순간이동이라도 한 것 마냥 도착해버려 이즈리얼은 얼떨떨하게 주변을 돌아본다. 케인은 없고 오는 길에도 없었다. 길이 엇갈렸거나 아직 집에 도착하지 않았거나 둘 중 하나다.
“우리가 너무 빨리 왔나?”
‘자전거가 오토바이보다 빠르지는 않을 테니까.’
라고 말하고 보니 근처에 케인의 자전거가 멀쩡히 주차되어 있다. 저거 케인 거 아니야? 둘 중 하나가 말하려는 동시에 다른 하나가 말했고 결국 두 사람은 5층 복도를 올려다본다. 정작 아파트는 조용하다. 불은 꺼져 있지만 아직 낮이니 그것 뿐으로 안에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는 알 수가 없다. 무엇보다 제대로 보일 리가 없고. 전화라도 다시 해 볼까 싶은데 이즈리얼이 멋쩍게 주머니를 뒤적거린다.
“혹시 남는 동전 있어?”
‘······.’
“······.”
이제 완전한 무일푼이다. 아펠리오스의 주머니에서 나오는 거라고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메모와 오토바이 열쇠뿐이다. 이즈리얼은 몸만 튀어나온 경위로 먼지 한 톨도 떨어지는 게 없다. 중간에 껌이라도 안 뽑아 먹었으면 공중전화를 쓸 기회라도 있었을 텐데, 우울한 기분을 달래기엔 싸구려 단 맛 만한 것도 없는 데다가 껌 자판기 같은 건 보고도 지나칠 수 없는 것이라 그에게는 그게 최선이었다. 참고로 이즈리얼이 먹은 껌은 라즈베리 맛이었고 아펠리오스는 레몬 맛을 먹었다. 둘 다 썩 좋아하는 맛은 아니었다.
그럼 결국 손해밖에 없었나. 남의 집 앞에 서서 이도 저도 못하는 처지에 있으니 답답해서 죽을 것 같다. 마이애미에 와서 죽고 싶었던 적이 딱 두 번 있었는데 한 번은 버스 멀미 때문이었고 두 번째는 먼저 울어버렸을 때였다. 이번은 세 번째다. 굳이 따지고 들자면 별일 아닌데 이즈리얼은 머릿속이 근질거리는 게 마음이 영 편치 않다. 잠시간 기다려도 케인이 오지 않으니 이미 집에 들어갔다고 보면 될 거다.
아버지도 벌써 오셨을까? 못 보던 차가 있거나 한 것은 아니었으니 충분히 의심해 볼 법 한데 그를 가만히 바라보던 아펠리오스가 아무렇지 않게 입을 연다. 사실 이즈리얼도 내심 그러기를 바랐지만 막상 아펠리오스가 제안하니 갈등하게 된다.
19XX년 8월 11일 오후 2시 10분
마이애미, 플로리다
케인네 집
좋은 아들 되는 법이라는 책이 없어서 좋은 아버지 되는 법이라는 책을 산 적이 있다. 정확한 제목은 그게 아니긴 했지만 아무튼 비슷한 느낌이었다. 사춘기 자식을 둔 아버지를 대상으로 한 도서였고 그걸 사춘기인 케인이 들고 계산대에 올려놓았을 때 점원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긴 했지만 상관없었다. 좋은 아버지라는 게 어떤 사람인지 안다면 좋은 아들이 되는 법도 알 수 있을 터였다.
물론 그 책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는 모른다. 책장에도 없고 침대 밑 상자에도 없어서, 아예 잃어버렸다고 봐도 좋을 정도로 행방이 묘연하다. 케인은 그것을 생각할 때마다 내용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탄식했다. 살면서 제 돈을 주고 처음으로 구매한 그 책은 묘사된 내용이 적어도 자기 아버지와는 다르다는 감상만 남겼다. 정확히 어떤 점이 다른지, 좋은 부모란 무엇인지, 그건 모르겠지만. 다정함이라고는 없는 제 유일한 가족은 한창 불안정할 시기의 소년에게는 한없이 미워 보이기만 했다.
케인은 아버지가 들어간 욕실 문을 힐끔거리다가 소파에 몸을 늘어뜨린다. 오랜만에 만난 그와 도저히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간단한 안부와 식사를 마친 다음 아무것도 하지 않은 참이다. 씻으러 들어가기라도 해서 망정이지 그것마저 없었다면 이 상황에 질식했을 거다. 다시 만난 아버지는 여전히 말수가 적었다. 그러면서 학교생활이나 친구 관계 같은 건 잊지 않고 물어보는 게 케인을 더 불편하게 했다. 기만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편지에 담긴 정성의 깊이만큼 죄송함이 몰아치기도 했다.
케인은 몸을 일으킨다. 물 트는 소리가 조금 전부터 들렸으니 숨이 트일 시간은 아직 있을 것이다. 그는 아펠리오스와 이즈리얼의 짐을 제대로 숨겼는지 다시 확인하면서, 벽에 붙은 사진 중 비뚤어진 것을 제대로 고친다. 겉멋만 잔뜩 들어갔던 이전 것들과는 다르게 지극히 자연스럽고 일상적인 샷이다. 어느 사진에는 이즈리얼과 아펠리오스가 찍혀있고 또 어떤 사진에는 자기 혼자 찍혀 있기도 하여, 각자의 단독 사진과 우글우글하게 찍은 사진으로 다양하다. 하나같이 웃고 있거나 찍힌 줄 전혀 모르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친구들. 문득 그런 표현이 생각나서, 케인은 괜스레 울컥하는 심정에 고개를 돌린다. 끝내 시선이 닿은 것은 제 오래된 사진이다.
1979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 날 백화점 앞에 세워진 대형 크리스마스 트리 앞에서 찍은 그 사진은 케인에게는 가장 오래된 아버지와의 추억이다. 그해 이후로 아버지는 집에 잘 들어오지 못했다. 마이애미로 이사 와서는 더 자주 볼 수 있을 줄 알았건만 얼굴은커녕 색이 바랜 편지만 쌓였다. 이럴 거면 왜··· 같은 생각을 많이 했다. 이럴 거면 왜, 아버지는 나와 가족이 되기로 했을까. 왜 하필 나를 선택했을까. 전혀 닮지 않은 외모는 항상 그를 슬프게 하여, 아버지가 늘 땋아주던 긴 머리도 어느 순간 짧게 잘라버렸다. 그것은 일종의 반항 표시였다. 당신이 없어도 나는 상관없다는.
규칙적으로 떨어지는 물소리가 난다. 케인은 구겨진 채로 상자에 처박힌 것들에는 눈길을 주지 않으며, 미약하게 붉어진 눈가를 손등으로 비빈다. 이건 다 바보 같은 짓이고 멍청한 생각이다. 이렇게 꾸민다 한들 뭐가 달라지겠느냐고, 억지로 생각하며 거실로 나온다. 아버지의 커다란 가방이 소파 옆에 기대어져 있다. 짐을 풀지 않았다는 것은 곧 떠나겠다는 뜻이다. 그걸 보니 다시 눈물이 차는 것 같다. 동시에, 이런 식이 아니었던 적이 없기 때문에 이제 담담히 넘길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슬픔이 반감되지는 않는다. 최악의 아버지. 그런 이름을 붙이고 싶다.
······.
그러다 문득 현관 밖이 어수선하다. 발소리와 인기척이 들리는 듯하다. 옆집 사람이 외출이라도 하나 싶으면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들려야 하는데 그런 게 전혀 없다. 케인은 자연스럽게 앞에서 알짱댈 만한 사람들을 떠올리고 빠른 걸음으로 현관에 나간다. 문구멍으로 내다보니, 역시. 문을 벌컥 연다. 한 뼘 거리를 두고 서 있던 이즈리얼과 눈이 딱 마주쳐서, 아펠리오스는 이즈리얼이 소리 지르기 전에 입을 먼저 틀어막는다. 며칠 만에 보는 얼굴치고는 상당히 멍청한 표정이다.
슬슬 냉전을 끝낼 때가 됐고 고민 끝에 보낸 페이지 하나에 기꺼이 찾아와 준 건 고맙긴 한데, 오기 전에 연락 한 통 보내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게다가 아버지가 와 있는 하필 지금! 케인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아펠리오스가 손을 내릴 때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다. 그건 상대 쪽도 마찬가지다. 이즈리얼도 계획 없이 찾아오긴 했지만 보다 자연스럽게··· 그러니까, 이런 극적인 만남 말고 남들 다 하는 것처럼 어색하면서도 정형화된 사과 절차를 밟고 싶었는데 이건 그냥 어색하기만 하다.
“너네 뭐야?”
보다 못한 케인이 먼저 말한다. 욕실 쪽을 한 번 보는 것도 잊지 않는다. 질문 의도가 어려웠는지 대답은 쉽게 돌아오지 않는다. 이즈리얼은 케인에게 시선을 딱 고정하다가 눈을 도르륵 굴린다. 궁색하게 맴도는 발치나 만지작거리는 페이저, 몸에서는 세탁소 세제와 모텔 샴푸 냄새가 난다. 케인에게는 아무래도 낯선 것들이므로 그는 미간을 슬쩍 좁힌다.
“너 아까 페이지 보냈잖아.”
이즈리얼은 그제야 입을 연다. 대답할 준비는 되지 않았지만 케인의 표정을 보니 더 끌어서는 안 될 것만 같다.
“그래서 왔다고? 이렇게 갑자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연락이라도 하고 올 생각은 못 했냐?”
“그게, 이제 남은 돈 없어서 전화 못 써.”
케인이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니 괜히 멋쩍어진 이즈리얼은 말이 많아진다. 아까 정비소에도 갔다 왔는데, 거기서 전화 좀 얻어 쓸걸. 아니면 모텔 전화라도. 역시 그때 바로 답장해야 했어.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아, 전화를 잘못 거는 바람에 정신이······. 그의 말이 길어질수록 케인은 조급하게 뒤를 돌았다가 앞을 보길 반복한다. 그러고 있으니 이즈리얼도 괜스레 케인의 어깨 너머를 보게 된다.
“혹시 아버지 오셨어?”
“어. 그래서 지금은 들어오라고 못 해.”
“그럼 짐이라도 빼서 갈게.”
“됐어, 어차피 다 숨겼어. 그리고 금방 가실 거야.”
마지막 말에는 어쩐지 쓸쓸함이 담겨있다. 탐탁하지 않은 말투가 그의 심정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 이즈리얼은 누군가가 먼저 떠날 때의 느낌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이어 말하지 않는다. 집안에서 들리는 옅은 물소리가 낯설다. 집에 혼자 있을 적에는 다른 사람이 씻는 소리를 들어본 적 없다. 케인도 그랬으리라 생각하니 먼저 화를 냈던 게 더 창피해진다. 그냥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던지고 영영 도망가고 싶다.
“근데 나 너한테 할 말 있는데···.”
“어, 존나 많겠지.”
“그거 때문에 온 거야. 지금 아니면 평생 말 못 할 것 같아서···.”
“드디어 뭔가를 해결할 마음이 들었다고? 지금까지 대체 뭐 하고 있었는데?”
이걸 자초지종 설명하고 있는 것도 웃기다. 싸운 뒤 멋대로 뛰쳐나갔고, 길바닥에 나앉을 뻔한 것을 아펠리오스의 빈약한 재력으로 겨우 커버했고, 슬슬 돈이 떨어질 때쯤에 너한테서 연락이 왔고. 아, 돈 얘기는 자세히 하지는 않았다. 그럼 너무 속물처럼 보이니까. 지금 필요한 건 진정성이다. 진정성! 시간이 얼마나 들었든지 간에 그동안 얼마나 후회했고 뭘 느꼈는지 전하는 게 더 중요하단 말이다. 하지만 이즈리얼은 언제나 사과를 받아야 했던 입장이었던 터라 어떻게 사과해야 하는지 잘 모른다. 자기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을 하면 될까. 그것마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너무 많은 일이 있었고 그것 하나하나 다 마음에 두기에는 자리가 부족했으므로.
이즈리얼이 입을 다물자 케인의 시선은 아펠리오스에게 향한다. 그가 대신 남은 이야기를 해주길 바라는 눈치다. 하지만 아펠리오스는 두 사람의 관계에 개입할 생각이 없다. 어차피 이 모든 것은 사이를 개선하기 위한 절차일 뿐이고 결과가 어떻게 되든 그는 자기 계획을 실행할 계획이다. 지극히 이성적이고 마음이 없는 선택. 아펠리오스가 말이 없자 케인은 다시 이즈리얼을 보고는 입꼬리를 달싹인다. 꼭 다투기라도 할 듯한 양상이다. 지치지도 않고.
두 사람은 가벼운 입씨름을 했다. 네가 이랬니 저랬니 하면서. 먼저 한 수 접어야 하는 건 당연히 이즈리얼이다. 하지만 그의 자존심도 여간 센 것이 아니라 한참이나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한 끝에 서로 지쳐 마음에 안 드는 눈짓으로 쳐다본다. 그 눈빛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있다. 상대를 탓하려는 본능적인 마음도 있지만 가장 큰 것은 그간의 걱정이다. 그렇다 할 연락 수단이 없는 상황에서 울며 뛰쳐나간 사람의 근황을 어찌 알 수가 있을까. 아펠리오스가 있어서 망정이지 그마저도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모른다. 그가 어찌 알고 이즈리얼을 찾아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런 얘기를 하러 온 게 아닌데. 이즈리얼은 상황을 갈무리한다.
“그래서, 지금 잠깐도 시간 안 돼?”
“나갈 상황이 안 돼. 둘러댈 것도 없고.”
“친구 만나고 왔다고 하면 되잖아.”
“친구도 상황 봐 가면서 써먹어야지 다짜고짜 그러면 되겠냐.”
그럼에도 정리되지 않는다. 한 사람은 단지 사과하고 싶을 뿐이고 다른 한 사람은 며칠 만에 보는 얼굴들이 반가울 뿐인데 그걸 제대로 말하지를 못한다. 이것도 자존심의 연장선인지 아니면 둘 다 그냥 바보이기 때문인지, 어쩌면 둘 다인지 여러 가지 가능성을 둘 수 있겠으나 아펠리오스는 기꺼이 마지막 선택지를 고른다. 케인과 이즈리얼이 정신없이 떠들 동안 아펠리오스는 언젠가부터 물소리가 멈췄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 때문에 케인의 뒤로 귀신처럼 다가온 사람에게 아무렇지 않게 목을 숙이며 인사할 수 있다.
아펠리오스가 제 어깨 너머로 고개를 숙이니 케인은 등골이 서늘해진다. 이즈리얼이 눈을 멍청하고 동그랗게 뜨니 서늘함은 확신으로 바뀌어 천천히 고개를 돌려보면, 머리가 젖은 아버지가 서 있다. 그는 케인과 현관 너머에 있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낮은 음성을 느릿하게 울린다.
“친구인가?”
“아, 그게······.”
친구임을 인정하는 것. 그것을 갈등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혼자서도 잘 산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곧잘 친구들 이야기를 했던 케인이다. 사실은 친구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질 나쁜 애들이었지만 아버지 앞에서는 그들의 호칭을 결정하는 데 거리낌 없었다. 하지만 이제야 친구로 지내기에 부끄럽지 않은 사람들을 만났고 말로 뱉지는 않았지만 케인은 그들 전부를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그러고 나니 입을 열기가 어렵다. 지극히 당연하고 평범하며 낯부끄러운 친구라는 말이······ 하기가 어렵다. 혹 충분한 이유가 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아버지와 친구에 엮인 케인의 복잡한 사연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
케인이 쉽게 대답하지 못하니 보다 못한 이즈리얼이 급히 끼어든다.
“거, 걸스카우트요! 쿠키 사실래요?”
물론 도움은 하나도 안 된다. 오히려 불을 지핀 꼴이다. 케인이 황당한 표정을 짓고 케인의 아버지도 그를 이상하게 쳐다보다가는 친구들 들어오라고 해라, 하며 젖은 머리를 턴다. 그 목소리와 손짓은 정갈하면서도 단호했던 필체에 걸맞은 모양이다. 자기 아버지는 저렇게 멋진 사람이 아니었는데. 가족을 추억하며 이즈리얼은 억지로 활기를 찾으며 아펠리오스의 옷자락을 붙잡고 말한다.
“아, 아니에요! 아버지 계신 줄 몰랐어요. 다음에 올게요!”
그렇지, 펠? 속으로 식은땀을 흘리며 물으니 아펠리오스가 눈치를 챘는지 알아서 고개를 끄덕여준다. 별다른 의사 표현은 없지만 이만 돌아가겠다는 의미로는 충분하다. 이즈리얼은 아펠리오스에게 어색한 대화를 붙이면서 억지로 그를 뒤로 돌려 현관을 떠난다.
“아버지 안녕히 계세요! 케인도 나중에 또 봐!”
손을 급하게 흔드는 게 거의 도망치는 것 같다. 쟤가 저렇게 당황한 것도 처음 보니 그건 그것대로 기가 막힌다. 케인의 아버지는 멀어지는 두 사람을 보며 툭 던지듯 묻는다.
“네 방에 붙어있는 친구들 사진이 저 애들이었나.”
그가 기억하는 사진은 아마 케인이 밴드에 있을 적 사귀었던 것들의 사진일 것이다. 케인은 여기서 선택할 수 있다. 그 애들이 맞다며 거짓말할지, 아니면 다른 애들이라며 솔직하게 말할지. 거짓말한다면 괜한 핑계와 설명할 거리를 만들지 않을 수 있겠지만 그러려니 어쩐지 뒷맛이 쓰다. 그놈들과 저 애들을 같은 선에 두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바른대로 말하자니 불신을 살 까봐 두렵다. 케인은 생각한다. 자기는 아버지에 대한 믿음이 너무 약한 것 아닌가 하고. 그를 의심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는 날 사랑한다······. 하루에도 여러 번씩 번복되는 그의 주관이 결정을 갈등하게 한다.
“걔들 아니에요. 그 사진 다 뗐어요.”
그러나 무의식중에 입이 열리고, 옳을지 옳지 않을지 모를 대답이 나온다. 미리 생각을 해둔 답변이 아니다. 지금도 입이 멋대로 움직인다.
“왜?”
“밴드 관뒀거든요.”
아버지는 의문을 잔뜩 남긴 대답에도 더 묻지 않는다. 그것이 되레 안심된다. 케인은 방 벽에 새로 붙인 사진들을 하나하나 헤아리고 마지막 상념은 끝내 제 어릴 적 사진에 닿아서, 한참이나 짧아진 뒷머리를 매만진다. 분홍빛 머리칼이 하얀 손가락 사이에 감겼다가 풀린다.
“대신 다른 데 들어갔어요.”
나름 긍정의 한마디.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인다. 나무라거나 칭찬하지도 않는다.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여전히 젖은 머리를 털면서, 똑같이 짧은 두 사람의 머리는 금방 마르기 시작한다. 케인은 맺힌 물방울이 줄어든 하얀 머리카락을 우물쭈물 보다가 깊게 결심하며 아버지를 보며 제 방을 손짓한다. 사진 많아요. 보실래요? 그동안 그저 전시해 두었을 뿐이지, 직접 보러 오라며 제안한 적은 없다. 말을 내뱉는 순간 후회한다. 괜히 귀찮은 일을 만든 것 같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그마저도 받아들이는지 케인이 움직이기도 전에 먼저 그의 방으로 다가간다. 그의 방 안에는 케인이 처음으로 친구임을 자랑하고 싶은 걸스카우트 남자애들의 사진이 가득할 테다.
케인이 집에 들어오라고 페이지를 보낸 건 그날 저녁이다. 달리 갈 곳이 없어 무인 세탁소 의자에 앉아 무의미하게 시간을 태웠고 이즈리얼은 우노(UNO)라도 가져왔어야 했다며 후회했다. 주머니에는 그마저도 살 돈이 없었다. (아펠리오스를 이길 자신도···.) 남에게 의존해야 하는 완벽한 빈털터리 신세. 의존해야 하는 상대가 케인이라는 사실이 심히 부담스러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반면 아펠리오스는 아무 생각 없어 보였다. 자기 돈을 털어야 하고 오토바이 기름이 다 떨어져 가는 상황에서도 왜 끝까지 자기 옆에 붙어있는지 이즈리얼로서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결론만 말하면 고맙게 된 일이니 가만히 있었을 뿐이다.
아무튼 멍하니 메시지를 보던 이즈리얼은 벌떡 일어나며 아펠리오스에게 화면을 보여준다.
“아버지한테 우릴 소개할 마음이 들었나.”
‘의외네.’
“거기서 안 들켰으면 좀 달랐을지도 몰라.”
쓸데없는 소리를 차치하고 지금은 바깥 공기보다 집에서 풍기는 방향제 냄새가 간절한 시기다. 화가 많은 친구와 모텔이 아닌 집 침대도. 이즈리얼은 침대 하나에서 셋이 끼어 자는 상상을 하며 먼저 밖으로 나가 문을 잡아준다. 안에서 생각에 잠긴 듯 느릿하게 몸을 움직이는 아펠리오스는 천천히 걸어 나오면서 집 반대 방향을 가리킨다.
‘먼저 가 있어. 기름 넣고 갈게.’
“기름 넣을 돈 없잖아.”
‘아저씨 이름으로 외상 달면 돼.’
“불쌍한 아저씨···.”
어쩐지 한두 번 해 본 말투가 아니라 이즈리얼은 남에게 행해진 처사에 진심으로 유감을 표한다. 여기서 그가 함께 가겠다고 떼를 쓰지 않은 이유는 케인과 둘이 있을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남의 아버지를 사이에 끼고 해야 할 말들을 하기란 쉽지 않겠지만 왜인지는 몰라도 아펠리오스가 그 모습을 보지 않았으면 한다. 부끄러움 때문일까. 아주 복잡한 심경이므로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지만 일단은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다.
오토바이가 왼쪽으로 떠나고 이즈리얼은 오른쪽으로 걷는다. 달이 뜨고 곧 비가 오려는 듯 하늘이 어둡다. 늘 혼자서 여행했던 기억뿐이라 낯선 도시에 와서 항상 홀로 걷고는 했는데 궁상맞게도 그때의 기분이 다시 살아나는 것 같다. 집에 도착하기 전에 비까지 쏟아지면 지금 자기가 얼마나 슬프고 불쌍한지 어필할 수 있을 것 같다. 허나 집은 금방이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며 걸음을 멈추지 않으니 옆에서 덜컥 말을 건다.
“어디 가?”
케인이 아파트 밖으로 나와 있다. 낮에 봤던 모습 그대로다. 아니, 낮에 봤다기보다는 평소에 보던 모습 그대로인 것이 더 맞겠다.
“아, 잠깐 생각 좀 하느라··· 왜 나와 있어?”
“집에 있기 싫어서.”
“아버지 계실 거 아니야.”
“아까 갔어. 아무도 없어.”
그렇게 말하는 표정이 심드렁하다. 무감한 말투에는 그러지 않은 적 없다는 의미가 담겨있고 쭈그리고 앉은 다리는 붙잡기를 포기한 것처럼 보인다. 이즈리얼은 괜한 얘기를 꺼낸 기분이 들어 발목이 잡히기라도 한 듯이 어색하게 다가간다. 자기네 삼촌도 하루가 안 되어 집을 떠난 적 있기 때문에 충분히 공감이 되는 심정이다. 케인의 송곳니가 사탕을 씹어 먹는다. 금방 입을 열었던 그의 주변에서 은은한 포도 향이 난다.
“그래도 안에 있지. 밖에 더운데. 날씨도 안 좋고.”
“네가 집 주소 까먹었을까 봐 밖에 있었다, 왜. 말 안 걸었으면 그냥 지나쳤을 거면서.”
“그건 생각 좀 하느냐고 그랬다니까 그러네.”
“근데 왜 너 혼자 와?”
“펠은 기름 넣고 온대.”
“저번에 내 이름으로 외상 걸겠다더니.”
“이번엔 아저씨 이름으로 한대.”
“아저씨 진짜 불쌍해.”
자기가 했던 생각이 똑같이 남의 입에서 나오니 제법 웃기다. 이즈리얼이 참지 않고 피식 웃으니 케인이 흘끗 본다. 그에게 어울리는 까칠한 눈빛이지만 저번 같은 부정적인 감정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면 문득 아펠리오스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서로 감정을 정리할 때가 되었다고. 확실히 맞는 말이다, 오히려 정리하고도 남을 시간이었지. 문제는 상당 시간 눈치를 봤다는 점이다. 뭐 때문에 그렇게 화를 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 상황에서 미안하다는 말을 선뜻 꺼내기는 어렵다. 하지만 분명 순서는 있는 것이고, 수십 번 입속을 맴돌았던 말이 있으니 그것만은 해야 할 것이 분명하다.
“그나저나, 케인··· 저번 일 있잖아.”
“어.”
“뭔지는 알고 대답하는 거지?"
“네 말투 보니까 대충 알겠다.”
그럴 리 없겠지만 저번에 때렸던 한쪽 뺨이 유독 붉어 보인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한 대만 때릴걸. 안 그래도 벌써 누구랑 싸우고 와서 이미 다쳐있던 애를. 다친 다리도 채 낫지 않았으니 때렸다가 접질리지 않은 것만으로 참 다행이다. 눈가에 남은 멍 자국은 처음에 봤을 때보다 많이 빠졌지만 꽤 큰 싸움이었는지 아직 완전히 빠지려면 시간을 더 들여야 할 듯하다. 이즈리얼은 주먹을 쥐었다가 풀었다가를 반복하며 꼼지락거린다. 그걸 놓칠 리 없는 케인이 이즈리얼에게 사탕 하나를 던진다. 얼떨결에 받으면 사과 그림이 그려진 초록색 포장지가 보인다. 그는 사탕보다는 싸구려 껌을 더 좋아하지만 가끔 이런 것도 나쁘지 않다.
포장을 까서 사탕을 입에 넣으며 케인의 옆으로 가 똑같이 쭈그려 앉는다. 영 불편하지만 남 보기엔 제법 멋진 자세다. 아펠리오스를 처음 봤을 때도 이 포즈로 자고 있었다. 얼마 가지 않아 다리가 저려 그냥 엉덩이를 깔고 앉는다. 바지가 더러워지는 건 상관없다.
“내가 그때 너 때렸잖아. 갑자기 화도 내고, 멋대로 집도 나가버리고.”
“야, 됐어. 나는 너 안 때렸냐?”
“아니, 내 말은, 그러니까 너도 날 때리긴 했지만, 그게. 이유라는 게 있잖아.”
“무슨 이유?”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원인 같은 거?”
이즈리얼의 말에 케인은 이전에 사귀었던 놈들을 떠올린다. 원인. 주먹을 쓸 수밖에 만들 수 없는 이유. 그때도 분명 먼저 손을 들지는 않았다. 항상 먼저 맞는 것은 자기였고 그에 응수하여 똑같이 때렸을 뿐인데 어째서인지 마지막에 가서는 자기가 더 나쁜 사람이 되어 있었다. 케인은 그들 생각으로 신경질적인 한숨을 내뱉는다. 이즈리얼은 자기 때문인 줄 알고 괜한 눈치를 본다.
“그래, 그런 게 없었으면 참 좋았겠다. 연습 한참 잘하고 있었는데.”
“어, 맞아··· 내 말도 그거고, 생각해 보니 두 번이나 때렸네. 이미 다친 애를···.”
두서없이 횡설수설하는 말. 분명 문장의 목적지는 정해져 있는데 주변을 헤매기만 하고 쉽게 도착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그러니까···를 반복하면 케인은 답지 않게 끝까지 기다려준다. 먼저 들어야 하는 말이 있음을 알고 있는 게 분명하다. 이즈리얼은 사탕의 포장 끝을 매니큐어가 벗겨진 손톱으로 긁다가 안으로 쑥 넣어 반쯤 벗겨버린다. 벗겨진 포장의 너비만큼 입이 열린다.
“그래서, 어······.”
미안하다고. 말하면서 눈을 질끈 감아버린다. 손톱 끝으로 사탕의 끈적한 표면이 들러붙는다. 말할 때는 사람 눈을 봐야 하지만 지금은 도저히 그러질 못하겠다. 어차피 케인도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이 그의 얼굴을 돌아볼 생각이 없어 보인다. 머리 위로 빗방울 하나가 툭 떨어진다. 먹구름이 결국 달을 가린다.
“너 그거 아직도 담고 있냐?”
“뭐? 보통 먼저 맞은 사람이 더 담고 있어야 하는 거 아냐?”
“몰라, 됐어. 이미 지난 일을 왜 신경 써.”
“표정은 엄청 신경 쓰는 것 같은데.”
“그건 네 생각이고.”
빗방울이 두 방울 떨어진다. 곧 소나기가 내릴 테다. 이즈리얼은 손바닥을 펴 비가 얼마나 오는지 가늠하고 사탕을 까 입에 넣는다. 생긴 것치고는 고급스러운 맛이 난다. 이런 어둑한 저녁에는 어울리지 않는 맛이지만 친구 옆에서 하나씩 입속에 굴리기에는 더없이 좋다. 케인도 비를 맞았는지 슬쩍 올라갔던 고개를 위로 쳐올린다. 그와 동시에 멀리서 천둥이 친다. 이 동네는 뭐만 하면 갑자기 비가 쏟아지고 그치기를 반복해서 도저히 감을 잡을 수 없다.
“야, 내가 생각해 봤는데.”
“응.”
“나도 사과해야 될 것 같아.”
“네가 사과한다고? 왜?”
“내가 너보다 힘세니까.”
“겨우 그런 게 이유야?”
“어. 미안.”
너무나도 담백하고 거리낌 없는 사과에 이즈리얼은 벙찐다. 사과라는 것을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는 사람이라니. 그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케인이라니! 죽어도 제 고집만 중요하게 생각할 것 같은 사람이 저러니 굉장히 낯설다. 어쩌면 이즈리얼은 지금까지 사람을 잘못 봤을지도 모른다. 진짜 고집이 센 건 자기가 아니었을까 하며. 고집이야 아펠리오스를 이길 사람은 없지만······ 예상치 못한 사과를 받으니 무슨 말을 더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저 녹지 않는 설탕 덩어리를 어금니로 살짝 깨물기만 반복한다. 비가 투둑투둑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머리가 차갑다. 조금씩 젖는 게 느껴진다.
“너도 그때 화나지 않았어?”
“안 났겠냐, 다짜고짜 쳐맞았는데. 대체 왜 화낸 거야?”
“그냥. 네가 부러워서.”
“세상에 날 부러워하는 놈이 있다는 게 신기하다, 진짜.”
“사람 사정은 다 다른 거야.”
“알아. 그래서 더 뭐라 안 하잖아.”
“미안.”
“사과는 한 번만 하는 거야, 멍청아.”
그 말에 이즈리얼은 웃는다. 오랜만에 듣는 웃음소리에 케인도 피식 실소한다. 비가 점점 더 많이 오기 시작한다. 어깨가 젖고 머리카락이 무거워진다. 머리 위로 천둥이 꽝 친다.
“케인, 나는 사실··· 아펠리오스가 없었으면 너랑 못 친해졌을 것 같아.”
“나도. 나도 네가 싫거든.”
“나도 싫어.”
“내가 더.”
“나는 그것보다 더.”
“내가 이래서 널 싫어하는 거야.”
“나도.”
서로를 싫어하면서 어떻게 친구가 됐는지는 의문이다. 사실 아펠리오스는 핑계이며 그가 없었어도 두 사람은 결국 잘 지냈을 것이다. 탈 없이 잘 지내는 관계가 있다면 산전수전 다 겪는 다이나믹한 사이도 있는 법이므로··· 다를 뿐이지 틀린 적 없는 둘은 머리에 번개가 내리꽂힐 걱정은 하지 않으며 우산 하나 없이 비를 다 맞는다. 체온이 낮아지지만 오히려 시원해서 좋다.
“케인, 그러면 우리··· 다 해결한 거지?”
“어. 여기서 뭘 더 바라냐.”
“그럼 우리는 사실 서로 좋아하는 거고?”
“갑자기 뭔 미친 소리야?”
“펠이 서로 너무너무 싫어하면 싸우지도 않는대.”
“징그러워 죽겠네.”
싫어한다고 안 싸우면 나는 그 밴드 놈들이랑 좋아하는 사이가 되는 거잖아. 케인이 질색한다. 그냥 간밤의 미친 소리로 치부한다. 소나기가 내린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빽빽한 빗줄기가 두 사람을 가리지 않고 철썩인다. 케인은 신발이 젖고 바닥을 깔고 앉은 이즈리얼은 엉덩이가 다 젖는다. 생각보다 웃기는 꼴이다.
When I Come Around · Green Day
자기만 젖을 수 없는 이즈리얼은 쭈그려 앉은 케인을 옆으로 툭 밀어 넘어뜨린다. 발목에 힘이 없는 케인은 금방 넘어지고 젖은 바닥으로 철퍽 엎어진다. 그의 웃옷이 젖는다. 아끼는 옷은 아니므로 상관없지만 열받아 죽겠다. 금방 몸을 일으킨 케인은 이즈리얼을 통째로 들어 올려 바닥에 굴린다. 웅덩이진 저지대에 등을 대고 누운 이즈리얼은 이제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젖었다. 이게 아닌데. 먼저 덤벼서 이긴 적이 한 번도 없다. 하지만 나쁘지 않은 기분이다. 더러운 물에 담겨서도 킥킥 웃으니 케인이 어이없어한다. 자기가 굴려놓고 손을 내밀어 일으켜준다.
순순히 손을 잡은 이즈리얼은 힘을 주어 확 당기는데 케인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단단하게 버틴다. 이즈리얼의 두 손과 케인의 한 팔이 서로 씨름하며 밀고 당기기를 계속한다. 도저히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으면 이즈리얼은 그의 정강이를 가볍게 찬다. 젖은 흙이 묻은 신발로. 바지가 더러워지자 몸이 앞으로 휜다. 다른 발을 디뎌 버텨보지만 허약해진 다리는 얼마 가지 못한다. 그대로 무릎이 구부러지고 넘어진다. 웅덩이에 철퍽 자빠진다. 케인을 담구는 데 성공했지만 이즈리얼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은 이미 자기가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이다. 저항 없이 쓰러진 케인 밑에 깔려버린 이즈리얼은 숨이 턱 막혀 컥컥댄다. 체격 차이를 무시할 수 없는지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무겁다.
“아, 미쳤나 봐. 왜 이렇게 무거워!”
“네가 먼저 시작했다?”
“비키기나 해!”
“야, 나라고 너랑 이러고 싶은 줄 알아?”
그렇게 말하면서 그 자세로 또 싸운다. 역시 나는 네가 싫으니 내가 더 싫으니 싸우다간 얼굴에 물이 흘러 눈앞이 보이지 않을 때가 되어서야 몸을 바로 한다. 손등으로 얼굴을 닦지만 어차피 손등도 젖어있어 닦일 기미가 안 보인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그 뒤에도 서로 물을 튀기며 싸우다가 똑같이 물에 푹 젖은 아펠리오스가 기름이 차지 않은 오토바이를 끌고 오자 일단락된다. 물론 아펠리오스도 두 사람에게 잡혀 웅덩이를 구른다. 그러고는 복수심에 찬 눈빛으로 케인의 바짓자락을 잡는데 그 눈이 너무 무서워서 두 사람은 그에게 한 짓을 금방 후회한다. 그렇게 케인은 세 번을 구른다. 웃음소리가 들린다. 케인도 웃는다··· 한 번쯤은 이래도 될 것 같다. 비에 젖어도 웃을 수 있는 유일한 계절. 하룻밤은 쉽게 넘어간다.
그리고 다음날 아펠리오스는 열이 올랐고 이즈리얼은 가벼운 코감기에 걸렸으며 케인만 멀쩡했다.
약 40분 전
19XX년 8월 11일 오후 9시 23분
마이애미, 플로리다
???
얼마 지나지 않아 아펠리오스는 오토바이에서 내린다. 싸구려 모텔 근처에는 아무도 오지 않기에 골목과 골목을 지나면 묵직하게 끌리는 바퀴 소리만 남는다. 곧장 도착할 수 있는 주유소는 없고 외상을 받아 줄 마음 착한 주인도 없으므로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주는 사람이 그저 신기할 뿐이다.
아펠리오스는 빈 담벼락 옆에 오토바이를 대어놓고 가방 안을 뒤적거린다. 짐이라고는 똑같이 생긴 옷 몇 벌과 담배, 낡은 성경책이 전부다. 그는 담배를 하나 꺼내 물고는 몸을 더듬으며 성냥을 찾는다. 어디다 떨어뜨렸는지 도통 나올 생각이 없다. 아니면 집에 두고 나왔나. 하는 수 없이 불붙지 않은 담배를 이로 씹으며 벽에 기댄다. 날이 어둡다. 아직 밤이 깊지 않았지만 깊어가기 충분하다.
지금쯤이면 이즈리얼은 아마 아파트 근처에 도착했을 것이다. 모든 오해가 풀릴 좋은 날임에도 먹구름이 하늘을 가득 채웠다. 하지만 아펠리오스는 오히려 다행이라고 여긴다. 한바탕 시원하게 쏟아내 씻어버리고 나면 차라리 나은 기분이 될 테다. 그는 자기도 그랬으면 좋겠다고, 자기 친구들처럼 처음으로 바람이라는 것을 해 본다.
혼자 떨어져 나온 이유라. 케인과 이즈리얼이 둘만 보낼 시간이 필요한 것도 있지만 아펠리오스도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했다. 두 사람의 에너지와 감정의 변동을 따라가기 위해서는. 게다가 지금 둘은 같은 주제로 묶였으니 그것을 아펠리오스가 그것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리 없다. 이즈리얼이 모든 것을 이야기해 주지는 않았음에도 어렴풋이 알 수 있다. 가족과 친구, 미래··· 그들이 사랑했던 것들은 그들의 발목을 잡는다. 본인이 그랬던 것처럼.
아펠리오스도 학교에 다닐 적이 있었고 가족과 한 프레임 안에 찍히던 날이 있었다. 이제는 전부 옛날 일이 되어버려 흔적도 거의 찾을 수 없지만 옛날 일이 되었다고 없는 일이 되는 건 아니다. 아펠리오스는 자기에게 없는 대상들이 케인과 이즈리얼에게는 어떤 의미일지 생각해 본다. 아펠리오스는 남을 위로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제대로 알 수 없다. 직접 물어보지 않는 이상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아니면 그 뒤로도.
입안이 쓰다. 담배에 손을 댄 이후로 불쾌한 맛을 느낀 적은 단 한 번도 없지만 왜인지 두 사람을 생각하면 혓바닥 위로 쓴맛이 내려앉는다. 싸구려 다이너에서 맡았던 대마 냄새도 이것보단 역하지 않았는데 이제는 토가 나올 지경이다. 그는 참지 않고 하수구를 찾아 속을 게워 낸다. 어딘가에 살고 있을 악어에게는 미안하다만 지금은 마비되는 혀를 중화하는 게 우선이다. 한 번 뱉어내니 쓴맛이 더 강해진다. 완전히 실패다. 하지만 괜찮다. 곧 비가 쏟아질 테고 그럼 입을 헹굴 수 있을 테니.
한 방울 툭 떨어진다. 눈꺼풀 위로 떨어진 빗방울이 뺨을 타고 내려온다. 아펠리오스는 담배를 버리고 새카만 하늘을 올려다본다. 비는 드문드문 내려 어깨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영원히 그치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 부모는 모르겠지만 제 동생이 있는 곳은 지금도 화창할 것이다. 동생에게 마지막으로 온 페이지는 잘 지내느냐는 투의 메시지였고 두 사람이 싸우는 동안 아펠리오스는 갑자기 자리를 비우고는 몇 시간가량의 통화를 했다. 동생은 그대로였다. 자기가 옆에 없어도 그대로였다. 근황을 알 수 없는 어떤 사람들도 모두 자기가 모르는 곳에서 그대로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하니 동요한 적 없던 마음도 안정이 되었다.
빗발이 조금씩 굵어진다. 조금씩 젖기 시작하는 때이다. 그런 건 상관없다. 다른 이야기를 더 하고 싶다. 아펠리오스는 살면서 남의 아버지를 처음 봤다. 아버지라는 그 사람은 인상은 서늘하고 목소리는 낮았는데 어떻게 보면 케인과는 정반대였다. 무심하게 뱉던 들어오라는 말도, 그 뒤로 이어지지 않은 문장도··· 그것으로 아펠리오스는 이해했다. 케인은 자기들 존재를 아버지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던 게 아니라, 자기들에게 아버지를 내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복잡한 가정사. 사랑. 인정.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아펠리오스는 모르지만. 이제는 고개라도 끄덕여줄 수 있을 것만 같다.
하지만 늘 그렇듯, 아펠리오스는 남을 위로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케인은 거칠지만 심지가 굳고 이즈리얼은 불안정하지만 결국 벗어날 줄 안다. 그럼 아펠리오스는? 둘 중 하나라도 된 적이 있던가. 무너진 그 순간부터 아무런 변함없이 지금까지 이어져 온 것일지도 모른다. 이즈리얼은 세상 모든 것을 느낄 필요 없다고 말했으나 아펠리오스는 다른 사람들이 궁금하다. 감정이 궁금하고, 생각이 궁금하다. 하물며 부모의 부재가 그들에게 영향을 주는지. 그들과 대부분의 조건이 유사함에도 왜 자기만 모르느냔 말이다. 빗줄기가 굵어진다. 사방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머리가 묵직하게 젖는다.
케인은 종종 자기가 아닌 것 같다며 인정했고 이즈리얼은 찾는 걸 그만 두겠다고 말했다. 그건 아펠리오스도 마찬가지다. 목소리를 확실하게 잃었을 때부터 그는 자기가 아닌 것 같았고 음악을 하길 그만두려고 했다. 하지만 어쩐지 맥락이 다르다. 그들은 전혀 다른 것 같으면서 닮아있고 닮아있는 것 같으면서 전혀 다르다. 다르다기보단 아펠리오스 혼자 동떨어진 기분이다. 그는 누구처럼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이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그런 생각이 든 것 같다. 기다릴 사람이 있고, 찾으러 나갈 수 있고, 감정을 토해낼 수 있도록. 역겨운 맛이 나는 진짜 토 말고. 아펠리오스는 입을 닦는다. 닦는 동시에 젖는다. 입 밖으로 내지 못한 말이 입 주변에 묻은 물기에 흐려진다.
이쯤 되면 두 사람도 화해했을 것이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확인하지는 않았지만 단순한 애들이니 금방 물 위를 구르며 다른 싸움을 하고 있을 테다. 아펠리오스는 이즈리얼을 따라 코를 훌쩍여 보고 케인을 따라 상처가 난 눈썹을 문질러 본다. 침잠하지만 울적한 기분은 아니다. 아니, 이것을 두고 울적하다고 부르는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공포에 질리는 게 가장 큰 자극이었고 그 후에는 남을 겁주는 게 가장 큰 흥밋거리였는데 이제는 아무 의미도 없다. 이제는 단순히 닮고 싶어진다. 자기가 겁주었던 이들을. 이를테면 두 사람이라든지. 굳이 이르지 않아도 아펠리오스는 스스로 알고 있다.
오토바이를 끌고 돌아간다. 빗길을 달리는 건 퍽 낭만적이다. 하지만 오늘은 그럴 기분이 아니다. 자기가 왔다는 것을 두 사람에게 알리고 싶지도 않고. 알려진다면 왠지 머릿속을 들켜버릴 것만 같다. 그는 물웅덩이를 철퍽 밟으며 젖는 발에도 개의치 않고 왔던 길을 되돌아간다. 가는 길에 마주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아펠리오스는 부러 어닝을 피해 걸으며 몸이 폭삭 적셔버리고 풀려버린 신발끈을 다시 묶지 않는다. 이유도 두서도 없다. 그가 이토록 횡설수설하며 생각을 이어간 적이 있었나. 본인도 지금의 상태를 정의할 수 없다. 하지만 괜찮지 않을까. 사람이란 원래 그런 것이니.
복잡한 심경을 겨우 정리하면 케인과 이즈리얼은 물웅덩이에 몸을 담그고 바닥을 구르고 있다. 그러고 있겠지 생각했다만 진짜로 그러고 있으니 제법 놀랍다. 아펠리오스는 집 열쇠도 없으면서 두 사람을 모른척하고 들어가려다 딱 걸린다. 딱 걸렸다는 것은 자기도 두 사람의 꼴을 면치 못한다는 뜻으로, 안 그래도 이미 젖어버린 몸을 한 번 더 적신다 한들 무슨 변화가 있겠나 싶다. 케인을 세 번이나 굴린 아펠리오스는 땅바닥에 대자로 누운 케인을 일으켜주려는 듯 옷자락을 잡더니,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다가 말한다.
‘너 아버지랑 닮았더라.’
그럴 리 없다. 피 섞인 관계가 아니니까. 케인의 입장에서는 아펠리오스가 그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기에 마냥 기분 나쁜 티를 낼 수 없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아버지와 닮았다는 말은 생각 이상으로 기분이 좋다. 하나뿐인 가족과 닮은 존재가 된다는 건 언제나 행복한 일이다. 빗소리 때문에 사방의 소리가 묻혔음에도 어째서인지 그 말만은 명료하게 들렸다. 그러니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다.
“나도 알아.”
그 말을 들은 아펠리오스는 옷자락을 놓는다. 네 번 구른다. 이즈리얼이 웃고, 천둥에 소음이 가려져 아무도 그들의 싸움 소리에 창밖을 내다보지 않는다.
Rage Against The Machine - Guerrilla Radio
일주일 후
19XX년 8월 18일 오후 6시 10분
마이애미, 플로리다
케인네 집
모노폴리를 하다가 케인이 보드를 엎은 게 이틀 전이고 할리갈리 종이 구부러진 게 어제이며 우노 카드가 창밖으로 날아간 게 오늘 이른 오후이다. 참고로 보드게임은 전부 이즈리얼 가방에서 나왔다. 케인은 옷 한 벌 안 가져왔으면서도 게임은 야무지게 챙겨온 게 어이가 없었고 추가로 선글라스가 3개씩이나 나온 것도 기가 찼다
“너는 눈깔이 6개냐?”
“이게 멋이라는 거야.”
“뉴욕 수준이 이 정도밖에 안 됐다니.”
케인과 이즈리얼이 티격태격하는 동안 아펠리오스는 또 갑자기 사라져 아파트 밖으로 날아간 카드를 주워 왔다. 그새 차가 밟고 갔는지 바퀴 자국이 남아있다. 그걸 기어코 찾아왔냐는 말에 아펠리오스는 어깨를 으쓱였고 아직도 어디서 발견했는지는 의문이다.
이 시간대만 되면 부엌은 포화상태다. 이즈리얼이 아펠리오스를 끌고 음식 하는 걸 도와주겠다며 나설 때부터 그랬다. 사실 음식이라고 해 봐야 레토르트 식품을 데우는 정도가 전부이지만 생활비를 혼자 분배해야 하는 청소년들에게는 충분히 먹을 만한 식사였다. 한번은 오븐에 이상한 걸 넣었다가 불이 날 뻔한 적이 있는데 아직도 공식적인 범인이 누군지 모른다. 케인과 이즈리얼은 서로를 용의자로 지목했고 아펠리오스는 둘이 같이 벌인 일이라고 짐작했다.
케인은 멍이 전부 빠졌고 절던 다리가 회복되었으며 이즈리얼은 다리에 생겼던 긁힌 상처가 미세한 흉을 남기고 사라졌다. 아펠리오스는 싸움을 먼저 걸고 다니는 것치고는 부상이 적었는데 대신 며칠 내내 오른 열이 쉽게 내리지 않아서 고생을 꽤 했다. 몸은 뜨겁고 피부는 창백한 게 진짜 죽어버리는 줄 알았다.
아무튼 한동안 앓는 소리를 내던 505호는 비로소 제대로 된 생활 소음을 낼 수 있게 되었고 한바탕 폭풍을 겪은 그들은 부엌에서 와장창 떨어지는 소리를 들어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였다. 그동안은 식기를 하나만 꺼내도 되어서 뭔가를 깨 먹은 적이 없는데 사람이 늘고 설거짓거리가 늘으니 하나둘 금이 가기 시작했다. 설거지 당번을 정하면서 그 빈도가 확 늘었다. 식사 당번은 따로 없지만 요리 실력이 처참하면 처참했지 더 나은 사람이 없어서 오히려 담당을 정하지 않는 게 더 나았다.
아펠리오스는 갓 데운 라자냐를 맨손으로 꺼낸다. 이즈리얼이 기함한다.
“그거 안 뜨거워?”
‘별로.’
“김이 펄펄 나는데?”
“쟤는 손에 굳은살이 많잖아.”
“그걸로 해결되는 문제야?”
“귀하게 자란 너는 모를 걸.”
상대가 귀하게 자라지 않았다는 걸 알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농담이다. 아펠리오스는 식탁 위에 음식이 담긴 접시를 내려놓으며 표면에 닿았던 손을 끔뻑이며 쥐어본다. 열기가 남은 것 같기도 하다.
‘뜨겁네.’
“이제 와서 뜨겁다고 하면 어떡해.”
쟤는 죽어도 한참 뒤에 가서야 ‘죽었네.’ 할 것이다. 케인이 비슷한 뉘앙스로 말하니 이즈리얼이 깔깔 웃는다. 나름 공감하는 듯하다. 변변찮은 음식이지만 그들은 별 헛소리를 다 해댔기에 식사 시간은 늘 즐겁다. 케인은 종종 학교 성적이 잘못되었다며 불평했고 이즈리얼은 뉴욕에 있는 지인들 뒷담화를 했다. 케인이 성적을 D를 맞은 이야기를 하면 이즈리얼은 운동하는 깡패들 이야기를 한다. 아펠리오스도 학교에 다닐 적 에피소드를 생각해 보는 데 말할 수 있는 게 없다. 가만히 듣기만 한다.
“수업을 한 번도 안 빠졌는데 D를 주는 게 말이 돼?”
“시험을 거지같이 봤나 본데.”
“뭘 가르쳤다고 시험을 잘 보길 바라냐고. 백지로 안 낸 걸 감사해야지.”
“얼마나 썼는데?”
“두 줄 정도.”
“네 인생 최고의 성적이다.”
학생들은 그런 식으로 등급이 매겨지고는 했다. 누구는 비인도적이라고 말하지만 케인의 경우에는 F를 받았으면 진작 받았을 것을 매일 출석이라도 한 정성을 봐서 올리고 올려서 겨우 D를 받았다. 이즈리얼도 공부를 썩 잘하는 편은 아니라 케인과 전반적인 성적 분포가 비슷할 게 분명하기 때문에 굳이 한자리 알파벳에 집착하지 않는다. 아펠리오스는 문득 요즘 학교에서는 뭘 배우는지 궁금하다.
‘무슨 과목이었길래?’
“논리와 창의적 글쓰기.”
“그런 걸 들을 생각을 한 게 신기하네.”
“이번 학기 넘기려면 어쩔 수 없었어.”
“나도 비슷한 거 들은 적 있는데.”
“넌 왜 들었는데.”
“그런 거 골라야 깡패들이 없거든.”
참고로 이즈리얼은 C+를 받았다. 그가 말한 깡패들은 수업에 없었지만 논리와 사고에 미친 비틀어진 천재들을 이길 수는 없었다. 애초에 이길 생각도 없었지만.
“너도 사물함에 갇히고 그러냐?”
“무슨 소리야, 나 학교에서 완전 인기 많아.”
“근데 깡패들을 왜 피해 다녀?”
“걔들이 날 질투해서 그래. 인기인은 항상 적이 많거든.”
“아, 그러셔.”
케인이 턱을 괴고 음식을 씹는다. 이즈리얼이 포크를 빙글빙글 돌려가며 양아치의 위험성을 설명할 때 아펠리오스는 안 먹는 채소를 케인의 접시 위로 덜어낸다.
“악질인 애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알아? 특히 운동하는 것들은 최악이야.”
“음악 하는 애들도 별로.”
“그럼 우리도 다 별로라는 소리야?”
“맞지.”
‘너한테는 안 듣고 싶었는데.’
아펠리오스가 수저를 놓으며 한마디 한다. 그는 식사를 먼저 끝마친다. 먹는 속도가 가장 느렸음에도 케인과 이즈리얼이 떠드는 동안 묵묵히 먹기만 해서, 그는 줄곧 가장 빠르게 접시를 비우고는 했다.
“하여튼, 잘생긴 쿼터백이랑은 엮이면 안 돼. 걔들은 정보력이 좋거든.”
“무대에서 담배 피우는 애들이랑도 엮이지 마.”
“그건 말 안 해도 엮이면 안 되잖아.”
그때 공연장에서 났던 냄새를 생각하면 아펠리오스가 피우는 담배는 향기로울 정도다. 코 내벽에 들러붙어서 떨어지지 않던 그 느낌. 지금의 라자냐 냄새와 섞여 속이 울렁거린다. 케인은 간신히 음식을 입에 욱여넣고 포크를 내려둔다. 아펠리오스가 덜어둔 채소도 전부 먹었다.
“가슴에 별까지 달았으면 무조건 피하는 게 좋아.”
“너 지금 군인 무시하냐?”
“아니, 운동하는 애들이라니까. 가슴에 별 단 잘생긴 쿼터백 헨리.”
“전에 같이 밴드 하던 놈 이름도 헨리였는데. 같은 사람 아냐?”
“헨리 캑터?”
“헨리 콜.”
“다른 사람이네.”
“그 이름에 뭔가 있나 보다.”
세상 모든 헨리들에게 유감은 없고 모든 헨리가 이상한 사람은 아니지만 모든 이상한 사람의 이름은 헨리였다. 달갑지 않은 우연에 이즈리얼은 인상을 살짝 찌푸리다가 금방 표정을 푼다. 가십이란 건 한 철 씹어 먹힌 후 사라지기 마련이다. 헨리는 집을 비운 이즈리얼 대신 다른 사람을 괴롭히러 떠났을 거다.
‘그 액슬 로즈가 헨리였어?’
“맞아. 걔. 그 새끼한테 몇 대를 맞았는지, 모양 빠지게.”
“그게 누구야?”
“전 밴드에 있던 애.”
“멤버들끼리 싸우기도 했어?”
“뒤지게 싸웠지, 에휴. 나는 그냥 손절하려고 했는데 중간에 쟤가 끼어들어서는···.”
케인이 아펠리오스를 가리키면서 운을 떼다가 아니, 이 얘기는 됐다. 말을 돌리니 이즈리얼이 아 왜, 알려줘! 징징댄다. 세 사람 모두 식사를 끝낸다. 접시가 깨끗해지고 잔이 비워질 때 아펠리오스가 먼저 일어나 식기를 정리한다. 설거짓거리를 싱크대 안에 넣고 있으면 이즈리얼은 케인의 밴드 생활이 궁금했는지 뒤에서 계속 떠든다. 밴드에서 만든 노래 있어? 저번에 그 로고가 그 밴드 로고였겠네. 사이 안 좋았어? 사진도 싸워서 다 뗀 거야? 케인은 대답이 없다. 모든 물음의 대답이 ‘어.’이기 때문인 것도 있고, 굳이 안 좋은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다. 죽어도 말 못 할 일도 아니지만 그래도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이 하나쯤은 있는 법이다.
“그래도 걔들보단 우리가 좋지?”
“어. 너네는 적어도 묻어버리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런 식으로 좋냐는 의미는 아니었는데···.”
오늘 설거지 담당은 아펠리오스였으므로 그는 여전히 식탁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을 두고 등을 돌려 천천히 물을 튼다. 얇은 물줄기 사이로 둘의 대화 소리가 들린다. 간혹 유치하기도 하고 거칠기도 하고··· 어떨 때는 애틋할 정도로 코드가 잘 맞아서 마치 라디오라도 틀어놓은 양 듣는 맛이 있다. 아침마다 악어나 거미 생각이 들게 만드는 ‘굿모닝, 마이애미!’ 같은 것보다 훨씬 낫다.
둘은 붙어 살고도 아직도 할 이야기가 남았는지 끝없이 말을 이어간다. 똑같은 말을 몇 번이고 하기도 하고 대개 학교나 친구 이야기를 하다가 새로운 주제를 꺼내기도 하는데 질리지도 않나 보다. 얼마 전까지 며칠 동안 얼굴도 안 볼 만큼 크게 싸웠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펠리오스는 두 사람의 그런 단순함을 좋아했다. 대화 주제도 그만큼 단순했는데 가끔 깊이 있는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이 괴롭히면 말 해.
그건 질문의 형태는 아니었지만 아펠리오스는 충분히 고민해야 했다. 저 앞에 누구의 이름이 들어갔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누가 했던 말인지도 모르겠다. 동생이 했던 말인가? 아니면 학교 선생님이나 몇 안 되었던 친구? 이제 와서 말하지만 아펠리오스는 심한 괴롭힘으로 등교를 거부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아펠리오스는 학창 시절 몇 번이고 저 말을 들었고 결국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차라리 그만두는 선택. 어찌 보면 가장 간단한 방법인데 가장 단순한 아이들이 가장 간단한 방법을 택하지 않은 게 신기하다. 궁금하기도 하고. 낮은 성적이나 자길 괴롭히는 애들이 있음에도 그들을 그 자리에 있게 하는 건 뭘까. 별생각을 다 하고 있으면 어느새 옆에 온 두 사람이 팔을 툭툭 친다.
“펠?”
“야, 왜 그래?”
아펠리오스가 끔뻑 놀라 고개를 드니 두 사람은 아까부터 저를 불렀는지 자세가 비딱하다. 잠깐 생각 좀 하느라. 있는 그대로 대답하면 이즈리얼이 싱크대에 몸을 기대며 설거지가 끝난 접시를 넘겨받는다.
“우리가 뭐라고 했는지 들었어?”
‘못 들었어.’
“너는 누가 안 괴롭혔냐고 물어봤어.”
‘어려운 질문을 하네.’
“그럼 대답 안 하면 되지.”
말할 수 없을 수도 있으니까. 아펠리오스는 특정할 수 없는 사람의 이름을 말하지 못한다. 케인과 이즈리얼은 끝까지 기다려주는데 그 전에 설거지가 끝나버린다. 아펠리오스는 아무렇지 않은 척 젖은 손을 케인의 맨살에 벅벅 문질러 닦는다. 케인이 짜증을 내니 이즈리얼한테도 묻힌다. 두 사람의 피부는 닿는 느낌이 달라서 서로 다른 사람인 걸 곧장 알아챌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의 연결점은 같다. 아펠리오스도 언젠가 입을 연다면 한 자리 연결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말해줄게.’
“뭐라고?”
‘언젠간.’
물기를 털어내는 두 사람을 두고 부엌을 떠나면서, 방으로 돌아가는 아펠리오스는 다음을 기약한다. 옷장에 숨겨두었던 짐은 벌써 방에 널브러진 지 오래다. 그는 방에서 기타를 꺼내 와 어질러진 거실로 나와서는 발끝으로 지저분한 것을 정리한 뒤 바닥에 앉는다.
‘지금은 할 일이나 하자.’
이즈리얼은 제법 노래를 부를 수 있게 되었다. 남들 앞에서는 한 소절도 부르기 싫어하던 사람이 어찌저찌 한 곡을 완곡하게 되었을 때 그는 스스로도 놀란 눈치였다. 노래, 그리고 노래와 엮인 모든 것은 그의 트라우마 그 자체였기 때문에 다시는 자기 목소리를 이런 식으로 들을 줄은 몰랐다. 그것도 친구가 자길 위해 써준 가사로.
케인은 이전과 비교도 안 될 만큼 기타 실력이 늘었다. 좋은 스승을 옆에 둔 까닭도 있지만 아펠리오스를 질투하고 그처럼 되고 싶다는 마음 탓이 더 컸다. 늘 반항적이던 그에게는 동기라 할 것이 없었는데 아펠리오스는 훌륭한 자극제가 되었다.
아펠리오스는 한결같았다. 케인이 쓴 곡을 손보고 가사를 붙인 다음 이즈리얼에게 주었다. 두 사람이 보기에 아펠리오스는 극복해야 할 문제 따위 없어 보였기 때문에 그 자체로 완벽한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이즈리얼과 케인이 질투로써 성장했으며, 자기도 드러내지 않은 질투심을 마음속 깊은 곳에 담고 있다는 것을. 케인은 아펠리오스처럼 되고 싶고 이즈리얼은 케인처럼 되고 싶으며 아펠리오스는 케인과 이즈리얼처럼 되고 싶다. 쌍방 혹은 일방적인 이 관계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아펠리오스는 아직 모른다. 지금까지 그가 몰랐던 것은 없었는데도. 아마 이곳을 떠나기 전까지는 알아내야 할 것이다.
이즈리얼은 이전보다 떨림이 줄어든 목소리로 노래를 끝낸 뒤 눈을 감고 몇 초간 수를 센다. 이것은 그가 감정을 추스르는 방법이다. 숫자를 전부 센 이즈리얼이 눈을 뜨면 곧장 다음 곡으로 넘어갔고, 넘어간 노래가 끝나면 또 눈을 감고 숫자를 세길 반복한다. 준비된 네 곡을 전부 부르기까지 그가 센 숫자는 총 백하고 이십이었다. 네 곡 모두 케인과 아펠리오스가 쓴 곡이었다. 그들은 그것들에 부러 제목을 붙이지 않았다. 대신 노래 1, 노래 2, 이런 식으로 부르고는 했는데 그쪽이 여운이 더 남았는지 불평하는 사람은 없다.
아펠리오스는 원래 케인이 준 미완성곡 다섯 개를 전부 완성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케인이 마지막으로 넘겨준 곡이 몇 소절의 코드만 적혔있는 수준이었고 케인도 마음이 떠났는지 더 이상 손을 대지 않아 처음부터 끝까지 아펠리오스가 작업해야 했다. 이 곡은 이즈리얼이 집에 돌아가기 전까지 완성될 기미가 없어 자동으로 다음을 기약하게 되었다. 다섯 번째 곡 역시 제목이 붙지 않았다. 그건 그냥 다섯 번째 곡이었다.
이즈리얼은 다음 학기가 시작되기 전인 8월 30일에 떠날 예정이다. 아펠리오스도 그즈음 떠나겠다고 말했으나 제대로 된 계획은 아니었다. 그들은 시간이 훌쩍 지나갔음을 체감했고 그 후로는 원래 그랬던 것처럼 서로 없이 혼자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제법 외롭고 굴곡 많았던 삶. 그러나 이후의 삶은 지금 생각할 바가 아니고 지금은 더 중요한 것에 집중해야 한다.
그들이 바다로 나가는 건 25일. 이즈리얼은 관중 앞에서 노래하길 극히 꺼렸으나 아펠리오스의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는 말은 모든 거부권을 철회했다. 다시는 남이랑 음악 안 하겠다고 고집을 피우던 케인을 달랜 것처럼.
“듣기 괜찮았어?”
‘며칠 쉬었는데 괜찮네.’
“밖에 나가서도 똑같이 할 수 있겠지?”
‘생각 그만 하라니까.’
“말도 좀 그만하고.”
“너희는 내 마음을 몰라!”
죽어라까지는 아니지만 나름 열심히 연습했기 때문에 세 사람 모두 악보 없이 기타를 치거나 가사를 외울 수 있었다. 정말 지칠 때는 누워서 기타를 치기도 했는데 그 모습이 꽤 웃겨서 사진이 찍혔고 지금 방 벽에 붙어있다. 간혹 밤새 영화를 보며 울거나 모노폴리를 하다가 소리를 너무 질러 이즈리얼의 목 상태가 안 좋을 때는 아펠리오스가 자기는 안 먹은 해열제를 권했는데 맛이 뭣 같다며 먹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왜 목이 아픈데 해열제를 먹는담.
이즈리얼은 계획이 없는 사람이지만 날짜가 다가올 때마다 달력에 체크하며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생각했다. 25일까지는 연습에 매진하고, 버스킹이 끝난 26일부터 떠나는 날까지 후회가 남지 않도록 놀아야 한다며. 이미 할 수 있는 것을 다 했기에 더 이상 새로운 것을 찾을 수는 없지만 즐거웠던 일을 반복하기엔 충분한 시간일 테다.
“오락실에 다시 갈까?”
“지겹지도 않냐?”
“나랑 펠 이름이 아직도 랭킹에 있는지 확인해야겠어.”
“가서 머리도 못 들던 게 무슨. 너는 기여도도 얼마 안 될 것 같은데.”
“뭐래, 나도 게임 잘해.”
“그것도 최선을 다했던 거라면 나는 진짜 할 말이 없다.”
“네가 할 말은 아닌걸.”
케인은 팔꿈치로 침대 위에 올라앉은 이즈리얼을 퍽 친다. 이즈리얼은 발등으로 케인의 등을 툭툭 치고 케인이 그의 종아리를 잡고 끌어내니 이즈리얼이 주르륵 미끄러져 바닥으로 내려온다. 사선으로 앉은 아펠리오스와 케인 사이로 이즈리얼이 벌렁 누워버린다.
“누워서 노래 부를 수 있으면 좋겠다.”
‘해 봐.’
“그럼 연습이 잘 안되잖아.”
‘해 보기 전까지는 몰라.’
“그래, 아펠리오스가 밖에서 남의 바지를 벗긴 것처럼.”
“바지를 벗겼다고?”
“바지 벗을래 누워서 노래할래?”
얘네들이 지금 뭔 소리를 하는 지는 모르겠지만 이즈리얼은 사색이 되어 바지춤을 붙잡는다. 오늘 속옷 무슨 색이었는지 따위를 생각하며 다음, 다음 곡! 외치니 아펠리오스가 기다렸다는 듯 현을 튕기기 시작한다. 케인은 큭큭 웃으며 잡았던 다리를 놓아준다. 이즈리얼은 케인과 아펠리오스의 구부리고 앉은 다리 위에 자기 다리를 턱 걸치고는 속옷 색깔을 지우고 첫 가사가 무엇이었는지 헤아린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로 천장이 보인다. 눈이 부셔 눈꺼풀을 반 접으면 시야가 살짝 흐릿해진다. 이곳 천장엔 거미가 없다. 이전까지 봤던 거미들은 전부 환상이었나 보다.
누워서 노래 두 곡을 부른 이즈리얼은 신기하게도 평소보다 더 잘 불렀다. 누워있으면 복식호흡이 더 잘 되기라도 하는지 목도 덜 아프다며 신기해하고 있으면 아펠리오스가 제안한다.
‘나가서도 누워서 부르는 거 어때.’
“펠, 너한테 이런 말 하기는 싫지만…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왜, 해 보기 전까지는 모른다잖아.”
“그럼 너도 누워서 기타 쳐.”
“기타는 앉아서 치는 게 더 잘 되거든.”
아펠리오스 딴에는 긴장 풀라고 한 말인데 잘 먹히지 않았나 보다. 다음에는 다른 방법을 써야겠다.
오늘은 비가 오지 않는다. 소리를 막아줄 것이 없으니 밤샘 연습은 진작에 글러 먹었고 누웠다가 앉았다가 엎드렸다가 별 난리를 다 치며 노래를 부르던 이즈리얼은 이제 목소리도 안 나오는지 케인과 아펠리오스의 무릎 사이에 옆으로 엎어져 눕는다. 아펠리오스의 굳은살이 잔뜩 박힌 손가락에는 붉은색 기타 줄 자국이 남았고 아직은 아펠리오스보다 피부가 말랑한 케인의 손에는 반창고가 잔뜩 붙어있다.
“나 목 아파.”
“그럼 그만 해, 내일 목소리 안 나온다.”
“그만하기엔 걱정돼.”
“어쩌라는 거야.”
“모노폴리 할 사람.”
“진짜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다.”
모노폴리 주사위 중 하나는 케인이 보드를 엎는 바람에 옷장 밑으로 들어갔다. 그러니 게임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 옷장 밑부터 뒤져야 한다. 옆으로 누운 채 문제의 옷장 아래 틈을 바라보던 이즈리얼은 바닥에 납작 눌린 얼굴로 웃기 시작한다. 쟤 또 저러네, 하는 반응은 뒤로하고, 그는 킥킥 웃으며 몸을 위로 뒤집는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긴장이 풀리는 기분이다. 감정이란 이토록 변덕스럽다.
Dani California · Red Hot Chili Peppers
4일 후
19XX년 8월 22일 오전 11시 30분
마이애미, 플로리다
악기상 “베이사이드 비츠”
“그렇게 해서 될까?”
아펠리오스의 기타 줄이 끊어져서 시내에 있는 악기상점까지 나와 새로 샀다. 아펠리오스의 것을 갈아 끼우는 겸 케인 것도 교체하려고 기타 두 개를 가져왔다. 아펠리오스야 줄 가는 법을 모를 리야 없지만 케인은 쌩으로 기타를 해체해 본 적 없기 때문에 상인에게 맡기고, 아펠리오스는 길바닥에 쭈그려 앉아 땡볕 밑에서 직접 교체한다.
그는 상점에서 빌린 니퍼로 능숙하게 헤드머신에서 끊어진 줄을 풀어낸다. 낡은 줄이 제거되면 새 기타줄 세트에서 필요한 줄을 꺼내어 브릿지에 끼워 넣고 다른 끝을 헤드머신 구멍에 집어넣는다. 그다음으로 줄을 감기 시작하는데 그 손길이 너무 거칠어서 괜히 직접 교체하려다가 또 끊어먹을까 봐 보는 사람 마음을 졸이게 한다. 괜히 땡볕 밑에 같이 나와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즈리얼이 매니큐어가 멀끔히 지워진 손톱을 잘근대면서 난리를 친다.
“또 끊어지는 거 아냐?”
‘너무 꽉 조이면 끊어져.’
“너무 꽉 조인 것 같은데.”
‘이 정도는 해야 돼.’
가게 안에서 밖을 내다보는 케인은 팔짱을 끼고 한심한 표정을 짓는다. 저렇게 새가슴이어서야. 그러면서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여기저기 싸돌아 다녔다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그는 기타 줄이 전부 교체되는 동안 상점 내부를 훑는다. 한쪽에는 현악기가, 다른 한쪽에는 피아노가 중고와 새것이 섞여 있다. 케인은 어릴 적 피아노를 배운 적 있다. 집에 피아노가 있었고 아버지도 음악 교육에 관심이 있어 보였는데 어느 순간부터 신경을 쓸 겨를이 사라져 자연스럽게 그만두었다. 그때부터 남의 관심이 없어지면 하기 싫어졌다. 치는 법도 전부 잊어버렸고 피아노 의자 옆에 같이 앉아 있던 아버지 생각만 난다.
가볍게 건반을 쳐 본다. 맑은소리가 난다. 그때는 악기가 정말 커 보였는데 몸이 자라고 난 뒤에 보니 그렇게 커 보이지 않는다. 건반 위를 차지하는 손가락도 어릴 적과는 다르게 빈틈이 거의 없다. 어쩐지 싱숭생숭한 기분이 들어 표정이 미묘해지면 그새 일을 끝낸 이즈리얼과 아펠리오스가 안으로 들어온다. 케인은 뭐라도 들킨 것마냥 급히 고개를 든다.
“너 피아노도 쳐?”
“안 쳐. 그냥 보는 거야.”
“난 어릴 때 엄마가 시켜서 잠깐 배웠는데.”
이즈리얼도 케인과 비슷한 회상을 하는지 애틋한 표정으로 건반을 쳐 본다. 케인이 쳤을 때와 같은 소리가 난다.
“펠은 칠 줄 알아?”
‘대충은.’
“못 하는 게 없네.”
동생과 피아노 앞에 나란히 앉아 있던 기억은 나는데 무슨 곡을 쳤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지금 똑같이 하라고 하면 의자에 남는 자리도 없을 거다. 아펠리오스가 다섯 손가락으로 건반을 가볍게 누르니 부드러운 소리가 울린다. 누르는 폼부터 제법 쳐 본 사람 같다.
얼마간 기다리면 케인의 기타 점검이 끝난다. 깨끗해진 기타를 넘겨받고 나오면 이즈리얼이 문득 말한다.
“성대도 갈아 끼울 수 있으면 좋겠다.”
이즈리얼은 의식하지 못했지만 그 말은 아펠리오스에게 미묘한 상처가 된다. 같은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니지만 남의 입으로 들으니 느낌이 또 다르다. 본인이 본인에 관해 말하는 것과 자기 사정을 모르는 타인이 말하는 것은 달라서, ······. 아펠리오스는 금방 생각을 멈춘다. 상처받는다는 건 뭘까. 중고 책을 읽으며 몰입하는 기분과 비슷할까. 그는 어느 순간부터 체감하는 감정이 낯설다. 목소리마저 돌아올 것만 같은 기분이다.
세 사람은 악기상을 나온다. 점심대의 뜨거운 햇빛이 내리비친다. 아펠리오스와 이즈리얼은 오토바이를 타고 왔고 케인은 자전거를 타고 왔다. 탈것에 다시 몸을 실을 때, 이즈리얼은 오토바이 뒤에 타려다 자리를 바꾸어 자전거 뒤에 홀라당 올라탄다. 갈 때는 이걸 타고 가고 싶다며. 케인은 누가 들러붙으면 덥다며 짜증을 내면서도 순순히 태워준다. 맨날 싸우면서도 저렇게 붙어있다. 아펠리오스는 그들을 보며 애증의 감정을 생각한다. 이제는 조금 이해할 수 있다. 어떻게 좋아하는 동시에 싫어하는지. 그는 조금 웃으며 홀로 바이크에 올라탄다.
“과속하지 마, 펠!”
“우리랑 속도 맞춰서 가.”
자기들 싸울 시간도 없는데 자기까지 챙겨주니 정말 웃기는 애들이다. 와중에 아무도 그가 웃는 걸 못 봤다. 아펠리오스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천천히 시동을 건다.
다음날
19XX년 8월 23일 오후 12시 44분
마이애미, 플로리다
다이너 “찰리스”
그 다이너에 또 왔다. 이즈리얼은 선반에 진열된 카세트테이프 중 좋아하는 것을 골라 플레이어 안에 넣는다. 좋아하는 이레이저의 노래가 나오고 그 옆에 ‘내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 -EZ’ 메모를 남긴다. 케인과 아펠리오스는 남의 음악취향 겸 본인들의 음악취향도 알게 된다. 별로 마음에 드는 곡은 아니다. 밥을 먹던 두 사람은 한 곡이 끝날 때마다 카세트를 바꾸고 똑같은 메모를 남긴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 KY. 내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 AP. 그러면서 정작 그게 어떤 곡인지는 써두지 않았다. 그냥 똑같은 메모가 세 개 놓여있을 뿐이다.
다음날
19XX년 8월 24일 오후 11시 24분
마이애미, 플로리다
케인네 집
“시험 전날에는 원래 공부하는 거 아니야. 알아?”
“그건 평소에 착실하게 했던 사람 얘기고.”
“우리 착실하게 했잖아. 그치?”
“그거 보통 자기 입으로 말해?”
“그리고 일찍 자야 해.”
얘 듣지를 않네. 케인이 포기하며 기타와 악보를 접는다. 이즈리얼이 당일 직전에 연습하면 더 떨린다며 연습을 극구 거부한 탓에 곡을 두 바퀴 정도만 돌리고 말았다. 세 사람이 들어가면 꽉 차는 아버지의 방에서 살을 닿아가며 머리통을 맞대는 것도 오늘로 끝이긴 하다. 케인은 어차피 그럴 거 조금 더 하고 싶은 눈치지만 아펠리오스는 어느 쪽이든 상관없어 보인다. 하기야 아펠리오스는 길거리에 특화되어 있다. 케인도 무대에 서본 적이 꽤 있지만 제대로 된 공연보다 버스킹에서 오는 묘한 부담감이 있었다. 겨우 두 번 해본 게 전부이기도 하고. 그땐 잠도 제대로 못 잤다. 이즈리얼도 자기랑 똑같은 기분을 느낄까. 한가롭게 베개나 껴안고 뒹굴거리는 걸 보면 아닌 것 같다.
아버지의 침대는 둘이 쓰기는 당연히 좁지만 이즈리얼 한 명에게는 턱없이 크다. 자기 침대에서 잘 때 한 번 굴러떨어진 걸 보니 잠버릇이 고약한 줄 알았는데 둘이서는 또 꼭 붙어서 잘 자나 보다. 남의 집에 와서 뭘 가리겠냐마는 언제는 제대로 못 할까 봐 걱정하던 애가 이제는 연습도 안 하겠다고 나오는 게 조금 어이없으면서 웃기다.
“너 언제는 걱정된다고 안 했냐?”
“너희는 모르겠지만 지금 엄청 긴장하고 있어.”
심장이 빨리 뛰는지 이즈리얼은 가슴 왼쪽에 손을 올리는데 모르는 사람이 보면 자기 가슴이나 만지는 이상한 사람 같다. 케인은 심드렁하게 그를 보다간 아펠리오스를 툭 친다. 이대로 그만해도 괜찮냐는 시그널이다. 아펠리오스는 그의 실력을 믿는 건지 아니면 케인처럼 포기한 건지는 몰라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악기를 정리한다. 그리고 침대 위로 올라가 이즈리얼보다 먼저 벌렁 누워버린다. 그러니 이즈리얼도 눕는다. 날도 덥고 자리도 좁은데 찰싹 붙어있는 모양이 좀 이상하다.
“너넨 덥지도 않냐.”
‘꽤 아늑해.’
“맞아. 너도 누울래? 가로로 누우면 자리 충분해.”
두 사람은 꿈실꿈실 방향을 돌린다. 아펠리오스는 역시 발이 방바닥에 닿지만 이즈리얼은 닿지 않는다. 그 모습을 보고 헛웃음을 치던 케인도 너 다리 진짜 짧다, 한 소리 해주고 옆에 눕는다. 허리가 좀 아프고 몸 돌릴 데 없지만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 누구랑 이렇게 끼어있는 것도 참 오랜만이다.
“사람들 앞에서 노래 부르는 게 너무 오랜만이야.”
“누가 노래시킨 적 없어?”
“그거랑은 다른 느낌으로.”
그거야 애들 앞에서 눈치껏 불러주는 건 대충 기분에 맞춰주는 거고 버스킹은 일부러 보러오지도 않은 사람들 앞에서 굳이 음악을 하는 행위 아닌가. 듣는 사람이 받아들이는 의미 자체가 다르다. 이즈리얼은 노래하라며 부추기던 목소리를 떠올린다. 그거야 잠깐 해주고 말지. 그러나 부추기지 않는 사람들 앞에서 부르는 노래는 아주 오래전 음반을 냈을 때 이후로 처음이다. 폭삭 망해버린 두 번째 음반이 있으니 아무도 제 노력을 돌아 봐 주지 않는 기분을 잘 안다. 지금도 또 그렇게 될까 봐··· 정확히 말하자면 걱정된다기보다는 무섭다.
“누가 노래하라고 부추기면 할 거야?”
“안 해.”
‘케인은 노래 못 하잖아.’
“그거 때문에 안 하는 게 아니라!”
“열 내지 마, 못할 수도 있지.”
케인이 이즈리얼에게 베개를 퍽 던진다. 이즈리얼은 베개가 두 개가 된다.
의외로 가장 먼저 꾸벅이는 건 케인이다. 불편한 자세로 겉잠이 든 그를 위해 두 사람은 자리를 조금 더 터준다. 이러나저러나 모든 일에 가장 많은 신경을 쓴 사람은 케인일 것이다. 둘은 케인을 끝에 두고 작은 소리로 말하다가 그를 깨울 것 같아 이불 하나를 몸 위에 척 올려두고 불을 끈 뒤 방을 나온다. 그러고는 거실 소파에 서로 다리를 겹쳐 눕듯이 마주 보고 앉고는 못다 한 이야기를 한다. 실없는 소리부터 이즈리얼 기준으로 내일 있을 거사까지. 아펠리오스는 끝없이 쏟아지는 그의 말을 들으며, 어차피 둘 다 남의 시선에 익숙해진 사람들이니 어떻게든 잘 끝날 것이라고 믿는다.
나 잠이 안 와, 어떡해? 아직 11시밖에 안 됐으니까. 그런 뜻이 아니라! 평소라면 울상이 되었을 이즈리얼이 지금은 피식 웃는다. 낮은 웃음소리가 그에게는 썩 낯설어서 아펠리오스는 고개를 들어 눈을 맞춘다. 한참이나 서로를 쳐다보다가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이즈리얼이 먼저 입을 연다.
“펠, 끝나면 돌아간다고 했잖아.”
‘응.’
“그럼 처음이면서 마지막이 되겠네.”
너희가 쓴 곡 노래하는 거. 쓸쓸해 보이는 표정. 분명 본인도 돌아가야 하니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이란 생각 따위를 할 테다. 세상은 넓고, 각자 할 일이 있으니까. 그건 맞는 말이다. 처음부터 다음을 기약할 수 없는 관계로 만났으니 미래를 기대할 수 없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 게다가 아펠리오스는 이것을 마지막으로 음악을 그만둘 생각을 했기 때문에 다음이 있을 가능성은 더욱 낮아지면서··· 참여한 사람이 사라진 곡은 영영 폐기될지도 모른다.
아펠리오스는 유독 이즈리얼에게 현실적인 이야기를 해 주고 싶다. 예쁜 말을 고를 줄 모르는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넌지시 말한다.
‘아마 그럴지도.’
“그렇구나··· 뭔가 아쉽네.”
‘그래도 노래는 계속 불러도 돼.’
“너희 없이는 싫어. 갔다가 돌아올 거야? 저번에 대답 못 들었네.”
‘그런다고 해도 시간이 오래 걸릴 거야. 언제가 될지도 모르고.’
“으음, 크리스마스 어때? 다 외로운 사람들이잖아.”
이즈리얼이 킥킥 웃지만 터놓고 웃는 얼굴이 아니다. 외롭다는 말만큼은 진짜인 듯하다.
“펠, 있잖아.”
‘응.’
“가끔씩 네가 짜증 날 때가 있었는데···.”
‘왜?’
“다 아는 듯이 굴어서. 근데 다 알고 있는 게 맞더라고. 그래서···.”
여기서 마지막으로 만난 게 너희라 참 다행이다. 그는 금방 울 것처럼 보인다. 마지막이라는 말. 그건 언제나 심장을 울려서, 혹시나 하는 마음을 품어도 결국 단념하게 만드는 것이다. 엮인 다리와 맞닿은 살이 따뜻하다. 그러게. 아펠리오스는 짧게 긍정하고, 그의 다리에 옅게 남은 흉터를 내려본다. 언젠가는 후회하게 될 흔적이지만 지금 괜찮다면 그걸로 된 것 아닌가 싶다.
대화를 할 수록 이즈리얼은 긴장이 풀렸는지 눈이 서서히 감긴다. 시간을 보면 얼마 지나지 않았다. 방도 조용한 걸 보니 케인도 잠들었나 보다. 이제 아펠리오스만 잠들면 된다. 하지만 가장 평정심을 유지해야 할 그가 잠에 들지 못한다. 긴장도, 걱정도 아니다. 하나로 정의하기엔 지나치게 복잡한 감정, 그리고 생각. 뜬 눈으로 새벽이 온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만 들릴 뿐, 지나치게 고요하다. 간혹 규칙적인 숨소리가 나면 그들은 가장 불편한 자세로 자면서도 가장 곤히 잠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19XX년 8월 25일 오후 6시 41분
마이애미, 플로리다
여기 이름 뭐였지? - EZ
거 무슨··· 바닷가. - KY
8월의 관광명소에는 언제나 사람이 많다. 늦여름에 접어드는 시기에는 한여름보다 감성을 자극하는 것이 있어서 이때까지 바다에 남아있는 사람은 저마다 사연이 있고는 한다. 저녁쯤 비가 올 수도 있다는 일기예보가 있었음에도 그렇다. 개인사라는 것은 이토록 복잡하다.
일찌감치 해변에 도착해있던 세 사람은 얕은 바다에 몸을 담그고 서로 물을 튀기며 놀다가 햇빛에 피부가 덜 타기 시작할 때쯤 나온다. 젖은 채로 공연해도 멋있을 것 같다는 이유다. 젖은 옷과 머리는 더운 바람에 금방 마르지만 그들이 생각한 것처럼 멋있는지는 의문이다. 바닷물을 먹은 머리칼이 자연스럽게 굳어진 게 어쩌면 멋질 수도 있겠다.
이즈리얼은 이 바다에 처음 왔을 때를 기억한다. 그때도 누군가 기타 치는 소리가 들렸었는데 그게 아펠리오스였다는 소리를 듣고 제법 놀란 듯했다. 그때야 다른 일을 하느라고 소리에 집중하지 못했고 그가 누군지 알지도 못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아무것도 몰랐던 게 후회가 되고는 한다. 게다가 그 모르던 사람이랑 우연히 만나서 한 무대에 설 줄 누가 알았겠나. 이즈리얼은 악기 준비를 도우면서도 지금 상황이 와닿지 않는지 내내 멍한 표정을 짓는다.
얼떨떨한 건 케인도 마찬가지다. 홀로 서겠다고 전부 털어낸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또 이렇게 될 줄이야. 그것도 한 번도 아니고. 아펠리오스에게 기타를 넘겨받으면 사람들이 웅성인다. 버스킹이 있으리라고 짐작한 그들은 먼저 자리를 잡거나 카메라를 들기 시작한다.
“나 숨이 안 쉬어져······.”
조금씩 몰려드는 인파와 번쩍 들리는 카메라 렌즈를 보고 이즈리얼이 겁에 질린 듯이 긴장한다. 인생에 망조가 들 시점에도 똑같은 장면을 봤다. 정가운데 언 채로 우뚝 서서 눈을 꾹 감은 그를 보며 아펠리오스는 지나치듯 말한다. 그건 제안이었다.
‘눈을 감아.’
틀리지 않은 말이다. 노래는 눈을 감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으니. 케인과 아펠리오스는 마스크를 썼다. 이즈리얼이 보기에 그들의 행위는 자연스러웠다. 마치 능숙하기라도 한 양. 이즈리얼은 그런 두 사람을 양쪽에 꼈다고 생각하니 왠지 모르게 조금이나마 마음이 놓이는 것 같다. 혼자서 하는 게 아니니까. 가장 좋아하는 사람들과 하는 거니까 한 번쯤은 괜찮지 않을까 싶다.
오후 6시 50분. 모든 준비를 끝낸 시간이고, 먹구름이 조금씩 몰려오기 시작한다. 세 사람은 참으로 안 좋은 날짜를 골랐다고 생각하지만 앞뒤로 여유를 둔, 이보다 최적의 시간은 없었다. 케인과 이즈리얼이 싸우지만 않았어도 며칠 전에 진작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그렇게 되어버린 걸 어쩌겠나. 케인과 아펠리오스는 한 칸 뒤에 서고 이즈리얼은 한 칸 앞에 선다. 그의 손끝이 달달 떨린다. 이런 건 악기보단 보컬에 시선이 집중되기 마련이기에, 모든 사람이 시작할 때를 기다리며 이즈리얼을 쳐다본다. 간혹 뒤를 보는 사람도 있기야 하지만 잠깐 멈췄다가 다시 돌아온다.
“나, 난 괜찮아.”
불안정한 목소리. 진짜 괜찮은 사람은 저런 목소리로 괜찮다고 말하지 않는다. 아펠리오스는 마스크 뒤로 짧게 한숨을 쉬고 케인은 이즈리얼의 옆구리를 깊게 찌른다. 호흡해, 멍청아. 입 모양이 보이지 않아 입에 닿은 마스크가 움직일 때마다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지만 가까운 거리인 만큼 놓칠 만한 수준은 아니다. 케인은 나름 걱정되었는지 손가락으로 한 번 더 찌르며 마스크를 잠깐 내린다.
“눈 감아도 된다잖아.”
차라리 보이지 않으면 나을까?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 한 말이니 믿어보기로 한다. 이미 괜찮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으므로. 첫 곡의 시작은 이즈리얼이 준비되었을 때이다. 똑같이 생긴 바다에 질리기 시작한 사람들이나 음악으로 감성을 더욱 자극하려는 사람들은 그들 주변으로 모인다. 바다에 왔으면 바다나 볼 것이지 같은 생각을 하다가 자기 노래를 들으려고 이 정도나 모였다는 게 웃기기도 하다. 이즈리얼은 바짝 굳은 입술로 피식 웃으며 심장을 애써 잠재운다. 어떻게든 극복해야 할 것. 그런 게 분명히 있으므로, 그는 등 뒤로 신호를 보낸다. 얼마 있지 않아 익숙한 기타 소리가 들린다. 충분히 시간을 들인 전주가 금방 끝난다.
첫 가사가 나오기 직전, 이즈리얼은 스르륵 눈을 감는다. 연습한 대로 배에 힘을 주고 최대한 목을 푸니 노래할 때의 목소리가 금방 나온다. 그의 목소리를 듣고 그가 예전에 어떤 노래를 불렀었는지 알아채는 사람이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보이지 않으니 상상 이상으로 아무런 상관이 없다. 여기저기서 터지는 셔터 소리도, 사방에서 느껴지는 인기척도 시야와 단절시키니 그들과 점점 물리적으로 멀어지는 것 같다. 대상과 연결을 끊는 가장 간단한 방법. 이것을 왜 알지 못했을까. 이건 회피가 아닌 일종의 극복 방법이다. 앞에 누굴 두었는지 보이지 않으니 이즈리얼은 조금씩 자신감이 붙는다. 목소리에 힘이 받쳐진다. 그의 변화를 눈치챈 두 사람도 연주에 힘을 준다. 호응하는 사람이 나오기 시작한다.
Have A Nice Day · Bon Jovi
이름 없는 노래들이 끝났다가 시작하길 반복한다. 변변찮은 장비로도 열심히 노래하는 이즈리얼의 등판을 보며 케인은 제대로 된 구성으로 음악을 한 것이 얼마 만인지 생각한다. 이전 밴드는 계속 그의 발목을 잡아서, 그 이상으로 나아갈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가 바라던 날이 생각보다 빨리 왔다. 모든 것을 혼자 떠맡기로 결정했지만 사실은 애정과 소속감 따위가 필요했다. 그게 없으면 사람은 살아갈 수 없다. 세 번째 노래를 시작한다. 몇 번이고 연습한 곡처럼 그 또한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일을 연습해야 할 것이다.
문득 인파 사이로 아버지가 보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음악을 하겠다고 설친 것치고는 아버지에게 직접적으로 곡이나 노래를 들려준 적 없다. 지금 아버지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무슨 말을 할까. 아마 칭찬해주지 않을까. 이번에는 누군가를 실망시키지 않을 만큼 연습했으니까.
이놈의 궂은 날씨는 기타 리프를 하나씩 더해가면 갈수록 하늘을 어둡게 한다. 하나둘 우산을 꺼내기도 한다. 곧 쏟아질 예정인가 보다. 악기는 젖으면 안 되는데. 케인은 긴장할 틈도 없이 순식간에 여러 가지 생각을 한다. 케인의 아버지는 케인의 키가 자기만큼 컸어도 비가 오면 늘 우산을 직접 씌워주려고 했다. 지금 비가 와도 그는 무대에 난입해 우산을 씌워줄까. 그런 상상을 하니 웃음이 나온다. 마스크를 써서 참 다행이다.
아펠리오스는 역시 한 번도 고개를 들지 않는다. 앞으로 꺾인 목과 떨어지는 손, 한쪽으로 넘긴 젖은 머리. 곧 비바람이 몰아칠 것처럼 불규칙적으로 부는 바람. 그의 기준으로 모든 것이 괜찮지만 한 가지 걸리는 것이 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겠다는 이즈리얼의 말. 아쉬움이 잔뜩 묻어났던 그것. 케인도 내색은 안 했지만 똑같은 생각을 하는 게 눈에 보였다. 머리를 쉽게 비우던 아펠리오스도 그 말을 생각하면 자꾸만 깊은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다가 근본적인 질문에 맞닥뜨리기도 한다. 나는 무엇을 그만두려고 했는지.
단순히, 음악을? 꽤 강경한 결정이었던 것도 같다. 하지만 이렇게 갈등하게 되는 이유는 뭘까. 반지 낀 손으로 거미를 내리쳐도, 지금 쓰고 있는 기타로 사람을 후려쳐도, 헬멧 없이 과속하며 달려도 아펠리오스는 한 번도 갈등한 적 없다. 세 번째 곡이 끝난다. 손을 잠시 멈춘 그는 노을에 비치는 이즈리얼의 뒷모습과 즐거워 보이는 케인의 옆모습을 보고 문득 깨닫는다. 이것은 미련이라고.
이즈리얼이 천천히 숫자를 세고 나면 네 번째 곡을 시작한다. 마지막 곡이다. 네 번째 곡이 끝나고 아펠리오스가 늘 그랬던 것처럼 다시 첫 번째 곡을 반복하겠지만, 완성되지 못한 마지막 다섯 번째 곡이 마음에 걸린다. 자기가 그만둬버리면 평생 완성될 일 없겠다. 그렇게 생각하니, 어쩌면 아쉬움이라는 기분이 들어서··· 아펠리오스는 예정된 것보다 강하게 현을 튕긴다. 케인이 그를 슬쩍 봤지만 관객들은 일종의 퍼포먼스로 받아들여 좋아한다. 이제 하늘은 완전히 어둡다. 천둥이 친다.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결국 결론을 내지 못하고, 노래가 끝난다. 허무하다면 허무한 마무리. 하지만 그 어떤 공연보다 완벽했다.
이즈리얼은 천천히 눈을 뜬다. 눈을 감기 전 보았던 모습과 똑같다. 몰려든 사람들, 그들이 들고 있는 카메라, 기대에 젖은 눈빛··· 하나같이 그를 불편하게 하는 것. 하지만 이번만큼은 아니다. 이번엔 그가 이겼다. 아주 압도적으로.
장비를 정리하기 전 사진 찍기를 부탁하는 관객이 더러 있다. 발치에는 그들이 던진 지폐와 동전이 쌓여있다. 적어도 우리 음악은 돈이 되는구나. 누군가 그런 농담을 했고, 적당히 사진을 찍고 나면 조금씩 비가 오기 시작한다. 아직 악기를 집어넣기 전이라 세 사람의 발이 빨라진다. 겨우 마른 옷으로 악기를 싸매고 허겁지겁 케이스에 넣고는 차까지 달린다. 소나기인지 비가 점점 거세진다. 순식간에 다시 젖어버린 그들은 윗도리까지 까서는 기타에 덮고 품에 꽉 안은 채로 뛴다. 악기가 없는 이즈리얼만 그 현장을 보고 깔깔 웃으며 뒤따른다. 빗속을 나란히 달리면서 허탈하고도 후련한 기분이 든다. 몇몇 관객은 부리나케 사라지는 그들의 뒤에 대고 손을 흔들어준다.
“마지막치고는 마무리가 너무 웃기지 않아?”
“너 이거 얼마짜린지 모르지?”
“모르는 게 약이고 아는 게 병이랬어.”
‘약 좀 그만해.’
“안 했거든.”
순식간에 차까지 도착해서 무사히 짐을 실은 그들은 간신히 비를 피한다. 쫄딱 젖은 몸이 가죽 시트를 적신다. 이거 아저씨 차인데. 닦아두면 모르겠지? 케인이 숨길 의지도 없이 말하며 운전석에 타면, 조수석에 앉은 아펠리오스가 뒤 돌아보지 않으며 거울로 뒤에 탄 이즈리얼의 얼굴을 확인한다.
‘어땠어.’
그 짧은 물음에는 많은 것이 담겨있다. 이즈리얼은 창밖에 대고 젖은 머리를 털다가 그의 물음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꽤 오랜 시간 생각에 빠져 입을 열지 못한다. 어땠냐는 물음. 참으로 다양한 대답이 나올 수 있으나···.
“최고였어!”
짧은 물음에는 짧은 대답이 가장 잘 어울린다. 아까 긴장된다며 입술이 마르던 그는 어디 가고 이제는 말갛게 웃는 낯을 하니 어이가 없다. 케인은 가볍게 웃음을 치고 아펠리오스도 다른 물음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비가 너무 와 앞이 안 보인다. 비가 잠잠해졌을 때 출발하기로 하고, 이즈리얼은 앞자리에 바짝 붙어 슬슬 떠들 시동을 건다. 그 와중에 차 안은 착실하게 젖어가고 있다. 이거 내일 돌려줘야 할 텐데··· 아저씨 미안해요. 사랑해요.
All The Small Things · blink-182
19XX년 8월 26일 오전 10시 18분
마이애미, 플로리다
테리레인 정비소
셋이 나란히 혼났다. 어디 갖다 박지는 않았지만 흙 묻은 신발 그대로 차에 탄 게 문제였다. 아무리 박박 문질러도 흔적은 남기 마련이라 이 정도면 절대 모를 거라던 자신감도 모두 물거품이 됐다. 누구 발자국이 이렇게 커!? 셋은 난데없이 발 크기를 대조하기 시작했고 그것 때문에 더 혼났다. 케인은 일이나 하고 나머지 둘은 차나 닦으라며.
주인 남자는 못 살겠다는 투로 말해도 아이들에게 모질게 굴지 못한다. 결국 차 바닥을 닦는 이즈리얼과 아펠리오스를 저리 비켜 세우고 자기가 닦는다. 열심히는 하지만 별로 도움은 안 되던 두 사람이 밀려난다. 오전에 손님이 맡겨두고 간 차를 세차하던 케인이 그들을 한심하게 바라본다.
“도리토스 아저씨는 친절하구나.”
‘테런스.’
“테런스 아저씨는 친절하구나···.”
할 일을 빼앗긴 두 사람은 케인을 참견한다. 멀찍이서 지켜보며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고 끼어들기도 하고 자기들끼리 무어라 속삭이기도 한다. 신경을 온통 빼앗긴 케인이 그들에게 물을 뿌리니 그제야 도망간다. 아펠리오스가 방패로 쓴 이즈리얼의 종아리가 살짝 젖는다. 반바지를 입어서 다행이다.
“여기 와서 평생 젖을 거 다 젖는 것 같아.”
“그럴 짓을 하니까 그렇지.”
“나는 맞는 말 했는데.”
“처맞는 말 아니고?”
케인은 한 대 때릴 듯하다가 뽀득뽀득 소리가 날 정도로 차체를 열심히 닦는다. 그 모습이 신기했는지 이즈리얼은 물을 맞은 것도 금방 잊고 옆을 기웃거린다. 아펠리오스는 금연 표지 아래에서 담배를 꺼내려 하니 이즈리얼에게 끌려간다. 이럴 때는 보통 담배를 뺏어갈 텐데 라이터만 가져간다. 이유는 모른다. 게다가 그거 어차피 비었는데.
“자동 세차장 없어?”
“있어 보이냐? 단골한테만 서비스로 해주는 거라 없어.”
“나도 해 볼래.”
“힘도 못 쓰게 생겼으면서 뭘 한대.”
“나도 내 차 많이 닦아봤거든.”
이즈리얼은 케인이 창문을 닦는 데 쓰던 넓적한 도구를 가져가 유리창을 길게 문지른다. 닦아낸 방향대로 창이 깨끗해지며 거품 섞인 물이 흘러내린다. 차 크기에 비해 체구는 작지만 손 닿는 데까지는 열심히 한다. 확실히 쓸데없는 동작 없이 깔끔하긴 하다. 많이 해 봤다는 게 거짓말은 아니었는지 어디를 어떻게 하라고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한다.
“봐줄 만하네.”
“잘한다고 하면 되지.”
소매를 걷고 온몸을 써가며 청소하는 게 살짝 버거워 보이기도 하면서도 꽤 즐거워 보인다. 하긴 정든 동네를 떠나기 직전인데 뭔들 즐겁지 않을까. 펠도 와서 해 봐, 재밌어. 하며 도구를 넘겨주면 이미 일을 도운 전적이 있는 아펠리오스가 어색하게 팔을 뻗는다. 이즈리얼보다 훨씬 긴 팔이 창문 끝에 닿았다가 내려온다. 발꿈치를 들면 발 받침대 없이도 차 위도 어느 정도 가능할 것 같다. 하지만 이즈리얼은 어림도 없어서 케인이 비웃으며 받침대를 가지러 간다. 사실 그게 필요한 건 자기도 마찬가지다.
케인이 자리를 비운 그 잠깐 사이 새로운 차가 정비소로 들어온다. 주인 남자가 손님을 받으려다가 잠깐 대화하는 듯하더니 두 사람에게 다가온다. 너희한테 볼 일이 있단다. 아는 사람이냐? 근방에 아는 사람이 없는 이즈리얼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빼 들고 아펠리오스는 직감한다. 그놈. 그놈이다······.
“그놈이 누구야?”
‘있어. 줄줄 새는 파이프···.’
“그게 무슨 소리래.”
줄줄 새는 파이프의 차가 두 사람에게 가까이 접근한다. 운전석의 열린 창문으로 보이는 사람은 이즈리얼이 모르는 사람이다. 아펠리오스는 한 번 본 것으로 지금까지 기억하는 사람. 케인과의 첫 만남에서 케인에게 껄떡대고 있던 사람이다. 미친 변태가 죽지도 않고 또 왔다.
“안녕, 며칠 동안 안 보여서 걱정했잖아.”
그는 아펠리오스에게 인사를 건네고 처음 보는 이즈리얼의 위아래를 슬쩍 훑는다. 비슷한 부류의 시선을 수도 없이 받아보았던 이즈리얼은 단번에 불쾌감을 느낀다.
“처음 보는 얼굴도 있네. 안 탈래?”
“안 탈래.”
“그러지 말고. 남는 자리 많아. 같이 가면 재밌을걸.”
“줄줄 샌다는데 어떻게 재밌겠어.”
파이프는 그 말이 웃겼는지 미간을 꿈틀거리다가 기분 나쁜 웃음을 지으며 창밖으로 상체를 내민다. 손을 뻗는 게 어디라도 만질 것 같아 두 사람은 한 발짝 뒤로 물러선다.
“안 놀아 봤는데 새는지 어떻게 알아. 내가 이 근방에서 잘나가는 배관공인데···. 누구라 할 것 없이 다들 환장을 한다고.”
“그럼 환장하는 애들이랑 같이 놀면 안 될까?”
“너무 빼지 마, 나 노란색 눈 좋아해. 밤에도 반짝거리거든.”
“난 노란 눈 좋다고 하는 사람이 싫더라.”
“왜, 혹시 너도 줄줄 새? 걱정하지 마, 내가 고쳐줄 수 있어.”
들을 생각이 없어 보이고 케인은 꼭 가장 필요할 때 없다. 보다 못한 아펠리오스가 한 팔 뒤로 이즈리얼을 뒤로 밀어버린다. 주춤거리며 밀려난 이즈리얼이 아펠리오스를 힐끔 본다. 좋지 않은 느낌이다. 그의 장난으로 의자가 날아다니던 걸 생각하면··· 또 어떤 식으로 큰일이 날지 모른다. 아펠리오스는 밖으로 내민 파이프의 이마에 주먹을 갈기며 그를 안으로 집어넣는다.
‘너나, 잘해, 이 새끼야.’
때리는 리듬에 맞춰서 욕까지 해준다. 파이프가 이마를 감싸 쥔다. 자기가 누구인 줄 아냐며 진상을 떨 줄 알았는데 어쩐지 좋아하는 분위기다. 아프다며 앙탈을 부리면서도 비식비식 웃는 게 엄청나게 기분 나쁘다. 더 때려 보라고 부추기기도 하는데 이건 아펠리오스마저도 질색할 정도다. 폭력적인 걸 좋아하는 변태. 이미 자기들 바운더리를 넘어섰다.
파이프가 염병을 떨고 있을 때 케인이 온다. 철제 받침대를 들고. 케인은 그새 새로운 차가 들어온 것을 확인하고 응대하려다 손님의 정체를 파악하고 손에 쥔 것을 높게 든다. 그대로 내리칠 기세다.
“너 이 새끼, 내가 오지 말라고 했지!”
“얌마! 이게 무슨 일이야!”
케인이 큰 소리를 내면 주인 남자가 깜짝 놀라 달려온다. 이제 주인에게 진상 손님을 보고할 일만 남았다.
“얘 좀 못 오게 해요, 한 번 자보려고 아주 지랄을 한다고요.”
‘한 번을 못 해보게 생겨서는 말이지.’
“그게 중요한 게 아닌··· 아, 아무튼. 얘 쫓아냅니다? 괜찮죠?”
주인 남자는 대충 알아들었는지 손을 휘휘 저으며 내쫓으라는 신호를 보낸다. 케인이 무기가 된 발 받침대를 휘두르려 하니 파이프는 멋쩍게 웃으며 차 방향을 돌린다. 참으로 앙칼진 사람들만 모였다며.
“오늘은 기분이 안 좋은가 보네! 다음에 또 올게!”
“아, 진짜! 좀 꺼지라니까!”
‘이즈, 너도 한마디 해.’
“뭐, 뭐라고 해야 돼?”
‘아무거나.’
차가 빠져나간다. 말하려면 지금이다. 이즈리얼은 고민하다가 차 뒤통수에 대고 외친다. 창문이 열려있으니 충분히 들렸을 테다.
“너, 너나 잘해, 이 새끼야!!”
19XX년 8월 27일 오후 12시 9분
마이애미, 플로리다
브라이트웰 병원
케인의 뼈와 아펠리오스의 눈가를 검진하러 병원에 돌아왔다. 이즈리얼이 보호자 신분으로 진료실에 같이 들어가니 의사가 그들을 마냥 귀여워했다. 케인의 다리는 마치 다친 적이 없었던 것처럼 문제없이 멀쩡해졌고 아펠리오스의 찢어졌던 눈가도 얼추 다 나았다. 눈썹에 난 스크래치는 없어지지 않겠지만 오히려 스타일이 되었으니 본인은 상관이 없단다.
이왕 병원에 온 김에 건강검진이라도 받아 보라며 아펠리오스가 이즈리얼의 등을 떠민다. 남의 동네에서 병원까지 찾아올 줄도 몰랐는데 검진까지 받을 생각조차 안 했던 이즈리얼이 당황한다. 그런 건 돌아가서 해도 돼, 하니 케인이 다 같이 있을 때 하는 게 더 재밌지 않겠냐며 종용한다. 아무래도 검진 결과를 가지고 놀리려고 그러는 것 같다. 아펠리오스는 몰라도 케인의 의도는 지극히 불순하다.
두 사람의 등쌀에 결국 이즈리얼이 져서 가장 간단한 검진만 받아보기로 한다. 체격이나 구강 검사, 결과가 가장 빨리 나오는 피검사라든지 하는 것들. 이즈리얼은 자기만 하는 게 재미없는지 두 사람도 끌어들인다. 검사를 해 주는 사람도 친구들끼리 온 김에 같이 해 보라며 부추기니 뺄 수 없는 분위기가 된다.
결론만 말하자면 키는 이즈리얼이 가장 작고 아펠리오스가 가장 크다. 육안이나 수치상으로나 케인과 유사했는데 결국 미세한 차이로 아펠리오스가 더 컸다. 묘한 패배감을 느낀 케인은 결과에 무언가 문제가 있음을 확신하고 다시는 이 병원에 오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이즈리얼은 키는 아무래도 좋지만 구강 상태가 영 나쁘다. 항상 단 음식을 먹었기 때문에 충치가 발생할 확률이 가장 높았는데, 아니나다를까 어금니 쪽에 슬금슬금 충치가 생기려 한다는 결과가 나온다. 이렇게 된 거 치과까지 들려 건강한 상태로 집에 돌아가자는 케인의 말에 이즈리얼이 사색이 된다. 아무리 그래도 치과는 싫다. 다시 사람들 앞에서 노래 부르는 한이 있더라도 치과는 싫다고!
“야, 애처럼 굴지 말라며. 애냐? 치과 무서워하게.”
“남일이라고 막 말하지 마.”
“네 업보잖아. 관리 잘했어야지.”
키는 가장 크지 못하지만 아무튼 가장 건강한 케인이 이즈리얼을 놀려댄다. 충격에 빠진 이즈리얼이 혀로 어금니를 쓸어내리는 동안 아펠리오스의 검사 결과가 나온다. 의사는 문외한 청소년들을 상대로 어려운 말을 해댔지만 가장 쉬운 말로 바꾸면 영양실조로 달려가고 있단다. 근육이랑 지방이 쌍으로 부족하고 웬만한 수치가 정상 범위보다 낮게 나왔다. 최근 규칙적인 생활을 한다고 쳐도 그 이전에 몇 날 며칠을 길바닥에서 굴렀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아펠리오스는 의사에게 한바탕 잔소리를 듣고는 겨우 벗어난다.
“애들 건강이 다 왜 이런대.”
‘운동 잘하고 잘 먹으면 된대.’
“그거 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줄 알아?”
“맞아. 운동하기 진짜 싫거든.”
“너는 좀 해.”
하지만 이즈리얼은 남 걱정할 때가 아니다. 두 사람은 이미 그를 치과까지 데려갈 생각을 하고 있다. 애써 말을 돌리며 집에 가서 비디오나 보자는 그의 말을 깡그리 무시하면서, 억지로 차에 태워 병원을 떠나 또 다른 병원으로 향한다. 이것들 병원비 댈 돈은 어디서 난 거야! 발버둥 쳐보지만 어쩔 수 없다··· 혼자서 둘의 힘을 이길 수는 없다.
순식간에 치과 대기 순서에 이름이 올라간 이즈리얼은 창백해진 얼굴을 하고 다리를 달달 떤다. 그걸 보는 케인은 좋아서 죽으려고 한다. 아펠리오스는 그의 어깨를 두드려주면서 심한 충치가 아니니 금방 끝날 거라며 의외로 따뜻한 말을 해준다. 하지만 그의 귀에 들어오는 말은 없다. 고문 의자에 누워서 입을 벌리면 흉악한 도구들이 들어와 생니를 뽑아버리겠지. 이즈리얼이 벌떡 일어난다.
“나 갑자기 다 나은 것 같아.”
“미친 소리 하지 말고 앉아. 다음 차례야.”
“난 진짜 치과가 싫어!”
“야, 너무 크게 말하지 마. 다 듣잖아.”
‘자주 오면 좋아질걸.’
한참이나 환장할 소리를 듣고 있으면 케인의 말처럼 금방 차례가 온다. 들어오라는 직원의 말에 다리가 급격히 굳는다. 그걸 케인이 친히 안쪽까지 데려다주고 큭큭 웃으면서 말한다.
“손잡아줘? 옆에 있어 줄까?”
“됐으니까 가! 보지 마!”
이럴 줄 알았으면 카메라 가져올걸. 케인은 아쉬워하며 대기석으로 돌아간다. 이즈리얼이 앉은 의자가 뒤로 넘어가고 마스크와 장갑을 낀 의사가 이름을 알 수 없는 도구를 들고 그에게로 몸을 숙인다. 입을 벌리라는 말을 듣고 실제로 입을 벌리기까지 몇 번의 갈등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결국 입은 벌어졌고 의사가 든 도구는 입속으로 들어왔다.
이전 병원에서 들은 것처럼 심한 충치는 아니란다. 그래도 심해지기 전에 제거해야 하므로 의사는 다른 도구를 가져온다. ‘위잉’ 소리가 나는 그거. 이즈리얼은 식은땀을 뻘뻘 흘린다.
“그거 꼭 해야되나요···?”
“심해지기 전에 하셔야 해요~”
치과 의사들은 하나같이 필요 이상으로 긍정적이다. 이즈리얼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다시 입을 벌린다. 아직 완전히 썩은 것도 아니고 이를 뽑는 것도 아니니 그리 아프지 않을 거다···라며 자기 세뇌를 한다. 케인과 아펠리오스는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른다. 대기석 옆에 꽂혀있는 책자를 펴 들고 생물이 아닌 것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이건 너를 닮았네 저건 너를 닮았네 할 뿐이다. 그들은 이즈리얼의 비명에 가까운 앓는 소리가 날 때까지 그 짓을 반복한다. 노래하는 사람의 비명은 발성부터 다르다.
19XX년 8월 28일 오후 7시 24분
마이애미, 플로리다
케인네 집
왠지 이 아픈 것 같아. 마지막으로 짐을 확인하던 이즈리얼이 말한다. 확인할 짐이라고 해 봐야 처음 들고 온 크로스백 하나밖에 없다. 새로 찍은 사진 절반은 케인에게 주고 나머지 절반은 아펠리오스에게 줬다. 케인은 더 이상 붙일 데가 없다며 다시 돌려주었고 아펠리오스는 가장 마음에 드는 것 몇 개만 골라 갔다. 결국 남은 건 본인이 가지게 되었다. 이즈리얼은 이제 사진으로 새로운 사람을 추억하게 된다.
그는 어제의 치과 치료가 충격이었는지 괜히 투정을 부리면서 가방을 닫는다. 엄청난 치료도 아니고 그냥 긁어내는 수준이었다고 들었는데 뭐가 그렇게 불만인 건지. 똑같이 치과를 무서워하는 케인은 자기는 절대 갈 일이 없을 거라고 믿으며 남의 고통에 비웃음을 보낸다.
“마이애미에서 두 번째로 끔찍한 경험이었어.”
“첫 번째는 뭔데.”
“차멀미.”
“어지간히 심했나 보네.”
아펠리오스는 혼자 병원에 가본 것이 언제였는지 생각한다. 학교에 다닐 적이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그 후로는 이곳저곳 돌아다니기 바빠 건강 챙길 시간이 없었다. 망가질 것은 이미 망가지고도 남았는데 지금이라도 사람처럼 살면 다시 회복이라도 될까. 종종 아팠던 부위를 문지르면서 거울에 대고 입을 벌린다. 어제도 확인받았지만 치아는 깨끗하다.
“너 뭐 해?”
‘충치 확인.’
“어제 없다고 했잖아.”
‘오늘 생겼을 수도 있잖아.’
“그런다고 보이겠냐.”
최근 들어 아펠리오스는 유독 단 음식을 찾았다. 그의 메뉴 선정은 남들이 보기에 감흥 없는 식사에 가까웠는데 이제야 제 또래처럼 먹기 시작했다. 그 나이대 입맛이라야 할 것도 없지만 아무튼 전보다는 평범해졌다. 그런다고 곧바로 충치를 걱정하는 것은 기우지만 케인은 아펠리오스의 입꼬리를 잡고 쭉 벌리며 안을 들여다본다. 하얗고 깨끗하다.
“충치 없어.”
‘그런다고 보이겠냐.’
“진짜 짜증 나네.”
아펠리오스가 케인의 말을 그대로 따라하면 이즈리얼이 자기도 봐 달라며 둘 사이로 머리를 들이민다. 달관에 가까운 경지에 이른 케인이 그의 입을 쫙 찢으며 안을 봐 준다. 얘도 깨끗하긴 한데 충치가 있었다고 하니 괜히 건강이 나빠 보인다.
“넌 구려.”
“왜!?”
“그냥.”
이즈리얼이 입술을 내민다. 저런 말은 처음 들어보는 듯하다.
“잘 봐두라고, 지금 아니면 언제 이런 걸 보겠어.”
“살다 살다 남의 이까지 관찰할 줄은 몰랐다.”
“우리 가면 그것도 없어. 아쉬워나 하지 마.”
남의 이 못 본다고 아쉬울까. 케인은 어이가 없다. 이즈리얼은 손가락으로 입술을 올려 이를 보여주며 웃는다. 아펠리오스는 그를 보며 생각한다. 좀 구린 것도 같고······. 하지만 지나고 보면 떠오를 것들. 거기에 구강구조가 있다는 건 조금 이상하지만 그래도 이 또한 추억거리가 될 테다.
19XX년 8월 29일 오후 10시 39분
마이애미, 플로리다
사우스웨스트 104번지 센트럴하이츠 옥상
아파트 옥상은 개방되어 있다. 그들은 높은 곳이 무섭지 않은지 안전 펜스에 가까이 붙어 앉아 처연하게 하늘을 올려다본다. 떠나기 전날 밤. 그것은 이즈리얼을 슬프게 했고 케인도 괜히 싱숭생숭해졌다. 아펠리오스도 이쯤 떠난다고 했으니 함께 할 날이 얼마 안 남았음이 분명하다.
그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아무말도 하지 않는다. 오늘따라 맑던 하늘에 뜬 별을 보면서 멀리서 나는 바닷냄새를 그립지 않을 정도로 느낀다. 하지만 그리움이란 충분한 연습과 준비를 했어도 찾아오는 것이기에 아무리 해도 부족하다는 걸 그들은 안다. 다리를 세우고 앉아 있던 이즈리얼이 뒤로 털썩 눕는다. 팔다리를 대자로 펴고 잔잔하게 부는 바람을 맞으면서 눈은 여전히 위에 고정한다. 하늘이 높다. 여기 처음 왔을 때보다 더.
“집에 가기 싫다.”
그 말에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다. 가야 하는 사람과 남아야 하는 사람의 미련을 저울질할 필요도 없이 세 사람 모두 같은 것을 느끼고 있다. 시간이 참 빠르다는 것과, 정말 우연한 만남이 그들 삶에 큰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는 것······. 처음 만남을 생각하면 마냥 신기하기만 하다. 그냥 지나칠 수 있었던 인연에 참 많은 일이 생겼다. 좋은 일만 있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것마저 이제는 추억이 된다. 하늘에서 잠시 눈을 떼고 누워버린 이즈리얼을 보던 케인은 자기도 누워버린다. 그러고는 아펠리오스도 누우라는 듯 옷자락을 당긴다. 그도 순순히 눕는다.
“시간 엄청 빠르네.”
케인이 한마디 하고, 세 사람은 같은 하늘을 보고 있지만 서로 다른 지점을 바라본다. 그러게, 대꾸도 없이 모두가 눈을 끔뻑인다. 각자의 기억을 회상하는 듯하다. 함께 비디오를 보거나 꾸벅꾸벅 졸던 날을 떠올린 이즈리얼은 살풋 웃는다.
“여기서 이대로 자고 싶어.”
‘잠은 침대에서 자야지.’
“날 더워도 입 돌아간다.”
“그치만 그것도 재밌을 것 같아.”
맞는 말이다. 애초에 셋이서 하면 뭔들 재미없으리라고. 판이 뒤집힌 모노폴리나 종이 찌그러진 할리갈리마저 재밌었는데 이들이 새로운 자극을 찾는 건 쉽다. 바닥이 딱딱해 등이 불편하지만 그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즈리얼은 머리통 뒤에 손바닥을 끼고 누워서는 정적 속에 숨소리만 낸다. 바다와는 멀 텐데 파도 소리가 나는 착각이 들고 날벌레가 없는 밤중 옥상은 쾌적하다. 아펠리오스는 다소곳하게 누워서 고향에서 보았던 하늘을 떠올린다. 거기 하늘도 여기랑 비슷했던 것같다. 집에 돌아가면 가끔 여기 생각이 날까. 그렇다면 동생에게도 여행이 어땠는지 자세히 이야기해 줄 수 있겠다.
케인에게는 한없이 익숙한 경관이다. 전혀 낯설지 않은데 옆에 두 사람을 끼고 있으니 어쩐지 생경한 느낌이 든다. 어차피 친구들이니 로맨틱한 구석은 없지만 마음이 동하는 게 꼭 자기가 떠나는 것 같다.
“너네는 저런 게 재밌냐?”
아무리 들여다봐도 똑같은 하늘을 괜히 탓하면서, 케인은 넌지시 묻는다. 이즈리얼과 아펠리오스는 긴 시간 동안 말이 없다가 아펠리오스가 먼저 입을 연다.
‘집에서 봤던 하늘이랑 똑같아.’
아펠리오스가 말하는 집은 자기 고향을 의미할 테다. 거긴 너무 멀고 갈 일도 없으므로 두 사람은 그의 집이란 곳을 궁금해한다. 이즈리얼은 뉴욕 도시에서 보던 하늘을 떠올린다. 기억나지 않는다. 그야 제대로 위를 올려다본 적이 없으니까. 하늘 아래에서 그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남 보기에 부족함 없는 삶을 살았다. 공허함을 느낀 채로 위를 보았을 때 눈에 들어온 건 집 천장뿐었다. 바깥에 나자빠지는 것마저 그에게는 허락되지 않아서, 지금까지 줄곧··· 방 안에 갇혀 살았다. 이제야 그 밖으로 나온 기분이다.
그래서 이즈리얼은 케인과 아펠리오스의 말에 대답하지 못한다.
“여기 하늘은 신기하게 생겼네.”
대신 생뚱맞은 소리를 한다. 그게 무슨 소리냐며 태클이 들어올 줄 알았는데 의외로 잠잠하다. 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아니면 각자의 감상을 존중할까. 한때는 남의 생각이 미친 듯이 궁금했고 자길 어떻게 바라보는지 알고 싶었는데, 이제는 몰라도 될 것 같다. 과거는 전부 하늘 위로 올려보낸다. 계속 이렇게만 되게 해달라고 소원을 빈다. 자기가 찾던 사람들도 언젠가 같은 하늘을 보며 같은 바람을 기원했을 것이다. 사고가 그렇게 흘러가니 또 눈물이 찬다. 하지만 울어서는 안 된다. 이제 마지막이니까.
그는 꼭 누가 죽어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절절함을 느낀다. 왜 헤어짐은 항상 상실 같을까. 자기가 떠나도 그들은 어딘가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여기는 언제든 돌아올 수 있을 것이고. 이즈리얼은 마르는 입을 적신다. 꼭 확인받고 싶다. 그는 단단한 바닥에서 몸을 일으켜 앉는다. 그를 보던 두 사람은 아직 일어나지 않으며 여전히 하늘을 보고 있다.
“계속 여기 있을 거야?”
사실 그건 제대로 완성되지 않은 문장이다. 빠진 요소들이 너무 많다. 하지만 두 사람은 왜인지 알아들을 수 있어서, 각자 다른 답을 내어놓는다. 케인은 ‘어’. 아펠리오스는 ‘아마도’. 그것만으로 이즈리얼에게는 큰 의미가 된다. 그가 두 사람을 돌아보며 웃는다. 케인은 뭐가 그리 좋냐며 까칠하게 굴지만 속으로는 대충 비슷한 표정을 지었을 테다.
다음으로 아펠리오스가 일어난다. 누군가 먼저 떠나는 건 그에게는 처음이다. 공항에 나가서, 떠나가는 뒷모습을 보고, 하늘에 뜬 비행기를 한참이나 아래에서 바라보면서··· 떠난 그 사람을 추억하는 일. 그건 너무 낯설다. 아펠리오스는 이즈리얼과 케인을 번갈아 본다. 저 애들도 언젠가 떠나고 없을 거라는 생각을 하니 그 뒷일이 잘 상상되지 않는다. 그래서 자기가 먼저 떠났어야 하는 건데. 아펠리오스는 낮게 가라앉는 시선으로 눈 닿는 곳 아무 데나 보면서, 남몰래 떠나는 시기를 고민한다. 그리고 언제 돌아올지도.
여행은 여기가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려고 했다. 왜냐하면 돌아올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하지만 이제 이유라 할 것이 생겼으니 돌아와도 괜찮을 것이다. 아펠리오스는 그렇게 생각했고, 언제 돌아오든 두 사람은 계속 이 자리에 있을 것만 같았다.
“다음엔 짐 좀 제대로 챙겨 와. 이제 옷 없다.”
케인은 그리 말하며 다음이 있다는 것을 확실히 한다. 한사람이 떠나면 연락조차 불투명한 시대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커다란 확신이다. 그의 말에 이즈리얼이 다시 웃는다. 아펠리오스도 조금 웃는다. 두 사람 다 케인의 옷을 입고 있다. 이제 세 사람은 모두 같은 냄새가 나고,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집에서 잠을 자고, 같은 시기에 서로를 떠나보낸다. 커다란 추억을 남긴 채로. 그리고, 기약할 수 있는 내일을 남긴 채로.
“역시 여긴 최고야.”
언젠가 최악이라며 비난했던 곳. 장소와 사람들. 이제는 더할 수 없을 만큼의 그리움. 세 사람 모두에게 그렇다. 무엇을 보고 들었든지, 그 사실은 변함없을 것이다. 구름 하나 없이 맑은 하늘에 별이 밝게 빛난다. 다시 말하지만 낭만적인 구석은 없다. 이 또한 일상의 한 부분이다.
Mr. Brightside · The Killers
19XX년 8월 30일 오후 1시 5분
마이애미, 플로리다
마이애미 국제공항
이별은 금방 다가온다. 아쉬운 비행. 떠나기 전 이즈리얼은 두 사람을 꼭 안아준다. 이날이 결국 오긴 오는구나, 하며 한참이나 그들을 껴안고있던 이즈리얼은 크게 숨을 내쉬며 놓아준다. 울 것 같은 표정은 아니지만 그에 준하는 표정을 짓고 있어서, 남은 두 사람은 애처럼 굴지 말라던 사람이 가장 애같이 군다며 짓궂게 군다. 마지막으로 깊은 웃음을 지어 보인 이즈리얼은 얼마 되지 않은 짐을 가지고 다음을 기약한다.
“또 올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연말에 또 오든지.”
“안 바쁘면.”
“비싼 척하기는.”
“펠은 어떻게 할 거야?”
‘나도 곧 돌아가야지.’
“각자 자기 삶 살다가 다시 만나면 되겠다.”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지만 그게 언제인지는 정해두지 않는다. 그것이 그들의 마지막이며 어쩌면 다음을 준비하는 단계이다. 비행 전 여느 때와 같이 함께 아침을 먹고 드라이브를 즐긴 그들은 이즈리얼이 떠날 때까지 옆을 벗어나지 않는다. 이제는 정말로 가야 할 때, 그는 끝으로 그들을 한 번 더 끌어안고는 연락처와 주소를 남기며 뒤돌아선다. 그리고 몇 번이나 뒤돌아본다. 돌아선 게 애석할 정도로 고개를 뒤로 고정한 그는 아쉬운 표정으로 수없이 손을 흔든다. 힘차게 흔들리는 손바닥은 사라지지 않는 미소와 퍽 잘 어울린다.
이즈리얼을 보내고 케인과 아펠리오스는 둘만 남은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며 감흥 없이 라디오를 듣는다. 언제나 같은 내용의 대본은 그들을 지루하게 한다. 창문을 열어놓고 하늘로 비행기가 뜨는 것을 확인한 그들은 그가 정말 떠났음을 실감한다. 평소보다 유독 조용한 차 안도 한몫한다.
이제는 아버지의 눈치를 보지 않고 운전하는 케인은 ‘돌아간다’는 말에 문득 어떤 생각이 나, 시선을 앞으로 고정한 채로 아펠리오스를 부른다. 창밖을 내다보던 그는 케인을 돌아본다.
“네가 그랬잖아.”
‘뭐라고?’
“나한테서 멀리 가라고.”
두서없는 말이다. 아펠리오스는 떠올리지 않아도 자기가 그런 말을 했음을 기억할 수 있다.
“너네랑 같이 있어 보니까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아.”
‘멀리 갔어?’
“잠깐 갔다 왔어. 아버지도 보고, 바다도 나가보고··· 그러니까 내가 어떤 사람인지 대충 알겠더라.”
‘그거 다행이네.’
라디오에서 깔깔 웃는 소리가 난다. 무언가 재밌는 이야기를 한 것 같은데 아무도 듣지 못했다. 케인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속도를 조금씩 줄이면서 잠깐 아펠리오스를 쳐다보고는 다시 눈을 돌린다.
“야, 너는 너무 멀리 갔다고 했지.”
‘그랬지.’
“돌아오는 방법이 있는 것 같더라.”
‘어떻게?’
“그건 나도 몰라. 어쨌든 있는 것 같았어.”
‘무책임한 말이네.’
“아무튼.”
남을 위하는 말. 아펠리오스는 할 수 없는 것. 할 수 없었던 것. 눈을 느리게 깜빡인다. 창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눈이 시리다. 아펠리오스는 창문을 반쯤 올리고 옆으로 기울였던 상체를 바로 한다. 돌아오는 방법이라. 밖에 나갔다가 집에 돌아오던 것처럼 하면 될까. 그게 쉬웠다면 진작에 그랬을 것이다.
“그러니까 갔다가 돌아와.”
그건 중의적이다. 본인에게로 돌아오라는 것인지, 아니면 다시 마이애미로 돌아오라는 것인지. 어느 쪽으로 해석하든 상관없다. 결국 둘 다일 테니까. 평소라면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을 아펠리오스는 처음으로 입을 연다.
‘그래.’
그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케인은 웃는다. 이 상황이 영원토록 지속되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에 지을 수 있는 웃음이다.
그다음 날, 아펠리오스는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다. 떠났다는 말이 맞겠다. 짐은 그대로 놔두고 기타와 오토바이만 들고 떠났다. 펠? 아침에 일어난 케인이 그리 불러도 대답은 없었다. 짐이라고 해 봐야 옷 몇 벌과 담배, 성경책이 전부였다. 전날 하고 싶은 말은 다 했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게 사라진 게 서운하기도 하면서, 물건을 놔두고 간 것이 어쩌면 여지를 남겨준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의 말처럼 다시 돌아오겠다는.
케인은 순식간에 혼자가 되었지만 나머지 두 사람도 이제 혼자다. 외롭다는 느낌. 그러나 언젠가 만날 날을 기약할 수 있으므로 심장이 아린 슬픔은 아니다. 집안에 밴 익숙한 냄새도 벽에 붙은 사진들도, 모두 지금까지의 시간을 증명한다. 지금은 혼자라 한들 그들의 흔적은 옆에 있으므로 무엇도 걱정할 것 없다. 혹 쓸쓸하다면 페이저는 몇 번이고 울릴 것이고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시간은 빨리 흐를 것이다.
마이애미의 날씨처럼 불안정했던 청소년들. 그들은 이제 서로에게서 떨어져 홀로 시간을 견딜 수 있다.
······
그러고부터 약 4개월 후, 크리스마스 시즌. 그들은 바쁜 연말 탓에 다시 모이지 못했지만 케인과 이즈리얼은 동시에 같은 소포를 받는다. 누가 보냈는지 적혀있지는 않지만 아펠리오스가 보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작은 택배 상자에 편지 한 장 없이 카세트테이프만 덜렁 들어있는데, 겉표지에는 세 사람의 이름이 모두 적혀있다.
테이프를 재생해 보면 그들이 만든 곡이 하나씩 나온다. 노래 1, 노래 2··· 아직까지도 이름이 없는 그것들은 두 사람을 놀라게 하면서도 동시에 미소 짓게 한다. 이런 건 또 언제 만들었기에. 두 사람은 홀린 듯이 음악을 듣는다. 음질은 좋지 않지만 그들만 알아들을 수 있다는 것도 공통점이 생긴 것이라 나쁘지 않다. 그들이 완성한 4개의 곡 다음으로, 마지막 곡이 재생된다.
노래 5. 끝까지 미완성으로 남은 곡. 그걸 어느새 완성했는지 익숙한 인트로를 시작으로 처음 듣는 멜로디가 나온다. 가사는 없지만 악기 소리가 충분히 두 사람을 끌어들일 만하다. 곡에 빠르게 적응해 노래를 흥얼거리는 두 사람은 마지막 곡에 유일하게 제목이 붙었음을 알아차린다. 마지막으로 완성된 곡의 이름은······.
Miami Syndrome
Remember Our Season!
All Star · Smash Mouth
1년 후
19XX년 12월 24일 오후 4시 5분
뉴욕시, 뉴욕
록펠러 센터
맨해튼의 크리스마스 풍경은 화려하고 활기차다. 록펠러 센터의 거대한 크리스마스 트리는 수십 개의 조명과 장식을 달았고, 트리 앞의 아이스 스케이팅 링크는 시즌마다 사람들로 붐비는 로맨틱한 장소다. 5번가 백화점의 화려한 쇼윈도우, 센트럴 파크의 눈 덮인 경관, 그리고 타임스 스퀘어의 반짝이는 조명과 장식들. 모두 크리스마스를 고대하는 이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며 걸음을 멈추게 한다. 겨울이지만 따뜻하고 아름다운 경치. 금빛 눈에 밝은 노란색 조명이 비친다.
트리 점등식을 함께한 이즈리얼은 얼어붙은 손을 입으로 불면서 난간에 기대어 스케이팅 링크를 내려다본다. 그의 발치에는 스케이트화 한 쌍이 기대어져 있다. 스케이트보단 보드 취향이라 올해는 타지 않으려고 했지만 고향에서 맞는 크리스마스 이브를 조금이라도 즐겨주려는 의도로 링크를 돌다가 막 나온 참이다. 몇 달 전 때려치운 아르바이트로 연말까지 애들을 돌보지 않아도 되고, 도망치듯 끝내고 나온 가을 학기로 올해는 늘 둘러싸였던 또래들 없이 혼자 이브를 맞는다. 센터 앞에서 그를 알아보는 이들이 여럿 있었으나 그는 약속이 있다는 핑계로 그들과 어울리지 않았다. 지금 그의 옆에는 아무도 없다.
이즈리얼은 카메라를 꺼내어 거대한 트리와 링크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긴다. 빛이 번진 폴라로이드가 금방 나온다. 저녁에 찍었다면 조금 더 멋진 샷이 되었겠지만 저녁까지 남아있을 시간이 없다. 약간의 아쉬움이 생겨도 눈 덮인 크리스마스 트리는 마이애미에서 볼 수 없는 것일 테니 이것만으로도 괜찮다.
이즈리얼은 사진을 가방에 넣는다. 선물이 담긴 종이봉투가 부스럭거린다. 쑥스러운 편지는 없고 봉투의 모서리는 조금 구겨졌다. 최대한 조심히 가방을 메며 그는 센터 앞을 떠난다. 사람들을 조금 더 구경해도 좋겠지만 오늘은 시간이 빡빡하다. 예정된 비행시간은 얼마 남지 않은 저녁, 잠깐의 비행을 마치고 도착하면 그리운 얼굴을 마주할 수 있을 테다. 이곳과 사뭇 다를 마이애미의 크리스마스를 상상한다. 그곳에는 없을 것들을 건네며 그곳에만 있을 것들을 즐기면서. 그들은 시간이 되는 순간 말할 테다. 메리 크리스마스, 라고.
같은 시각
19XX년 12월 24일 오후 4시 5분
샤이엔, 와이오밍
다운타운
다운타운의 거리 조명과 상점 장식은 볼 만하다. 소도시 특유의 아늑하고 따뜻한 분위기는 일 년에 한 번씩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홀리데이 마켓이나 조그마한 퍼레이드도 다른 도시 못지않게 잘 꾸며놨다. 동생과 성탄 전 미사를 끝내고 아이들의 찬송가 소리를 들으며 교회를 나온 아펠리오스는 기차역 앞에 세워진 트리 점등식을 구경한다. 올해는 늦은 감이 있긴 해도 주민들이 모여 함께하는 소박한 축제도 나쁘지 않다.
아펠리오스는 윈터 액티비티 같은 것에 흥미가 없기 때문에 동생과 함께 마을에 즐비한 크리스마스 부스에 들른다. 빨간색과 초록색으로 꾸며진 각종 조형물과 아기자기한 기념품이 가득하다. 뭘 고르든 투박한 청소년의 마음에 들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수록 동생은 가장 귀여운 것을 골라준다. 리본 달린 작은 곰인형이나 트리 모양 양초 같은 것이 가방에 담긴다. 눈 쌓인 거리에 찍힌 발자국만큼 선물 받을 사람을 아끼는 행인들의 마음이 모인다.
이젠 돌아가지 않으려고 했는데, 같은 말을 하면 동생이 웃는다. 그런 것이 다 애정이라며. 아펠리오스는 애정이란 무엇인지 생각한다. 잘은 모르겠지만 애정을 생각하는 것 자체가 애정일 테다. 가족 단위로 방문한 손님들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아펠리오스도 살짝 웃어본다. 마냥 건조하고 춥기만 한 겨울에 웃을 일이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손이 무거워진 아펠리오스는 또 동생에게 이끌려 다른 상점으로 들어간다. 이미 네 사람의 몫을 채우기엔 차고도 넘친다.
이번엔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하기로 했다. 오토바이에 동생을 태우고 장거리 운전을 할 수 없거니와 그러려면 며칠은 꼬박 새워야 하고, 무엇보다 오토바이가 완전히 고장 났다. 집 하나를 팔아야 고칠 수 있을 만큼의 고철 덩어리가 되었기 때문에 그냥 버리는 길을 선택했다. 그 후로 새 바이크를 구하지 않아 운전을 안 한 지도 꽤 되었다. 하지만 걷는 것도 생각보다 할 만한 것이었다. 이즈리얼과 케인처럼 보드와 자전거를 타 보기도 했다.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기분이 더 나았다.
쇼핑을 마치고 경관을 충분히 즐긴 쌍둥이는 사이좋게 한 자전거에 타 눈길을 헤집고 달린다. 집에서 짐을 챙겨 출발하면 된다. 가방을 마이애미에 두고 왔기 때문에 짐이라고 할 것이야 선물과 기타 하나뿐이지만 그래도 언제나 출발 전엔 준비가 필요하다. 동생은 오빠의 친구들을 궁금해한다. 마이애미의 겨울은 이곳과 다르겠지, 덧붙이며 가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미리 생각한다. 그들 사이에 어떤 말이 필요하든, 그들은 시간이 되는 순간 말할 테다. 메리 크리스마스, 라고.
같은 시각
19XX년 12월 24일 오후 4시 5분
마이애미, 플로리다
베이프론트 파크
야자수에는 눈 대신 여러 색깔로 빛나는 조명이 걸렸다. 이미 시내에서 익히 본 것이라 해변가라고 새롭지는 않다. 반바지를 입은 사람들은 서핑을 즐기고 개중에는 산타를 연상시키는 빨간 옷을 입은 사람도 있다. 그들은 파란색과 빨간색 음료가 든 잔을 들고 건배하며 아이들은 파도와 멀리 떨어진 곳에서 모래성을 쌓는다. 지극히 일상적인 마이애미의 크리스마스. 그곳에는 케인도 있다.
아펠리오스가 준 테이프를 수십 번 들은 그는 휴대용 플레이어로 같은 노래를 다시금 듣는다. 카세트 외부에 적힌 이름은 검은 줄을 그어 새로운 이름을 적었다. 그는 이제 예명을 쓰기로 했다. 아펠리오스가 말한 ‘멀리 가보라는’ 말의 결과였다. 보컬 이즈리얼. 기타 아펠리오스, 그리고··· 라아스트.
그는 공원 내부를 홀로 둘러본다. 조금 전 아버지와 통화했는데 올해도 못 온다는 듯하다. 예상했지만 예상에 들어맞았기 때문에 더 아쉽다. 공원은 부모의 손을 잡은 아이와 친구들과 연말을 즐기는 청년들로 가득하다. 그 가운데 케인은 혼자 귀를 막고 트리를 올려다보며 서 있다. 사방이 사람 소리로 시끄럽고 붐빈다. 일찍이 문을 열었던 크리스마스 마켓들은 여전히 성황이다. 그는 사람 넷이 잘 공간을 만드느라 정신을 쏙 뺐기 때문에 상점들을 방문할 여력이 없다.
올해 만나자고 먼저 제안한 사람이 누구였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마치 당연한 듯이 모이게 되었다. 모이는 장소가 자연스럽게 자기 집이 된 것이 황당했지만 그래도 몇 해 동안 홀로 맞았던 크리스마스를 생각하면 그것보단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버지는 거기서 연말을 어떻게 보낼까. 이런저런 상념에 잠겨있으면 뛰어놀던 아이가 와서 부딪힌다. 그럼 정신이 번쩍 든다. 사과하는 아이를 괜찮다며 보내고 이제야 눈이 뜨인 케인은 뭐라도 준비해 놓아야 할지 고민한다. 걔들은 뭘 좋아할지 모르겠다.
그 애들은 오늘 저녁쯤 도착할 예정이다. 늦은 오후가 될 수도 있고 한밤중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12시를 넘기지 않는다는 것으로, 이미 다 지나간 이브는 즐기지 못하겠지만 적어도 크리스마스 당일만큼은 함께 맞이할 수 있다. 어차피 이브는 각자 고향에서 알아서 즐기고 왔겠지. 케인은 공항에 몇 시에 나가야 하는지 가늠하며 공항에도 여러 조명과 장식을 달았을지 상상한다. 게다가 그 애들이 있는 곳은 지금 눈이 오고 추울 텐데 그럼 걔네는 무슨 옷을 입고 있을까. 여름 날씨에 한겨울 옷을 입었을 생각을 하면 웃기다. 한껏 놀려줄 생각을 하며, 케인은 조그만 선물이라도 사기 위해 가장 먼저 보이는 상점에 들어간다. 아직 도착하기까지 시간이 많이 남았다. 하지만 언제 다시 만나게 되든, 그들은 시간이 되는 순간 말할 테다. 메리 크리스마스, 라고.
언젠가 이 시절을 그리워하게 될 그날까지.
마음을 담아,
마이애미에서.
“굿모닝, 마이애미! 아, 모닝이 아닌가요?” “아무렴 어때요, 오늘은 특별한 날이잖아요.” “그렇죠! 더 특별한 날보다 더 특별한 날이죠.” “그거 말장난인가요?” “진짜라고요, 크리스마스 당일보다 그 전날이 더 아름다운 법이에요. 그렇게 생각 안 해요?” “저는 뭐든 좋아요, 말마따나 아름다운 날이잖아요.” “지금쯤 크리스마스를 준비하느라 다들 정신이 없을 겁니다. 아, 어쩌면 이미 준비를 끝냈거나요.” “언제나 준비하는 과정은 설레죠. 안 그래요?” “그럼요, 저희는 당일에도 일을 해야겠지만 말이에요.” “그것참! 하지만 이 말은 빼놓을 수 없겠죠.” “그렇네요. 그럼, 미리 말해둘까요?” “좋아요, 셋 하면 하는 거예요.” “하나.” “둘.” “셋.” ““메리 크리스마스!””
라디오 진행자의 과장된 목소리가 끊긴다. 계획된 연출인 정적이 이어지다가, 곧이어 음악이 흘러나온다.
Should I Stay or Should I Go · The Clash
안녕하세요, 어스입니다. 마이애미 신드롬이 근 반년만에 완결이 났네요! 응원해주시고 마지막까지 함께 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급전개에 급마무리에··· 분량상 잘려나간 장면도 많아서 아쉬움이 남는 글이지만, 그래도 무사히 완결을 낼 수 있었던 건 전부 여러분 덕분입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7월 행사에 나올 재록본도 많은 관심 부탁드려요.
결제창 아래에는 짧은 후기와 비하인드가 있습니다. 그럼 좋은 하루 되셨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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