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

K=Potassium by KPota
4
0
0

주간 기온이 갑작스레 떨어졌다. 학원은 점차 에어컨을 켜지 않게 되었다. 건물 곳곳에 난 작은 창이 열려있는 게 눈에 띄었다. 창문을 열어두기만 해도 건물 내부의 온도가 하강하는 계절이 온 것이다. 지구가 제대로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주경태는 교무실의 창문을 열었다. 과학 탐구 교사들의 교무실은 1층에 있어, 창문을 열면 곧바로 맞은편 건물의 벽이 보인다. 벽과 벽 사이의 폭은 그닥 넓지 않다. 아마 성인 남성은 지나가기 어렵지 않을까. 창문은 바깥을 향해 열리니, 경태가 창문을 연 지금은 더욱 지나갈 수 없으리라. 물론 여태껏 이 골목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건물의 틈새를 지나가는 사람을 목격한 적은 없다.

미량의 먼지를 머금은 찬 바람이 교무실 안으로 파고들었다. 앞으로 한 교시만 지나면 학생들도 강사들도 모두 귀가하리라. 경태는 방금 전 오늘의 마지막 수업을 끝내고 교무실로 돌아온 참이다.

"아, 추워. 슬슬 가디건을 입어야 되나."

은도가 중얼거렸다. 경태는 창가에서 멀어져 제 책상으로 복귀한다. 그의 바로 옆이 은도의 자리다. 같은 과목을 가르치니 당연한 책상 배치다.

"차에 하나 실어 둬."

"그러는 게 낫겠죠~"

그리 대답하며 경태를 보고 웃어보인다. 귓불에 매달린 귀걸이가 비스듬하게 기울어졌다가, 이윽고 진자 운동을 시작한다. 붉은 빛의 보석인지 큐빅인지 모를 것이 조명 빛을 받아 반짝반짝.

"주쌤은, 오늘 수업 끝?"

"응. 임쌤은?"

"저도 수업은 끝났는데~ 프린트를 좀 고칠까 해서...... 엇!"

책상에 놓인 애매한 가격대의 모니터를 들여다보던 그는 무언가 생각났는지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러더니 곧 시선을 경태 쪽으로 돌려 의외의 말을 꺼내는 것이다.

"주쌤, 오늘 생일 아니에요?"

전혀 예상하지 못한 화제라 경태는 그를 따라 눈꺼풀을 들어올리고 만다.

"어? 어떻게 알았어."

"제가 또 숫자 하나는 기가 막히게 기억해요~"

맞는 말이었다. 그는 화학 강사인 주제에 수 계산이 무척이나 빠르다. 두 자리 수 곱셈을 가볍게 암산으로 해내던 모습을 기억한다. 그건 타고난 능력이냐고 한 번 물은 적이 있었는데, 어렸을 때 배운 주산을 지금까지 요긴하게 써먹고 있을 뿐이라던가

경태는 어느 순간 메신저의 생일 표시 기능을 오프했다. 이 나이 쯤 되면 생일 같은 기념일은 잊고 지나갈 때가 많다. 하루하루를 비슷한 느낌으로 살아가다가, 어느 날 문득 메신저를 보면 생일을 축하한다는 메시지가 가득하다. 그것에 하나하나 답하는 것이 이상하게도 귀찮았다. 

남을 기꺼이 축하하러 와 준 상대에게는 물론 감사하다. 그 상냥한 마음에 무릎이라도 꿇고 싶어질 정도다. 하지만 마흔 넘어서 태어난 날을 축하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는지는 잘 모르겠다. 

나에게 생일은 별 의미가 없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또 어느 정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축하를 받고 싶은 사람만 이 기능을 켜 두면 될 일이다.

그런 다양한 감정과 판단이 오묘한 비율로 조합되어 생겨난 결과가 생일 기능 오프였던 것이다.

그 기능을 끈 지 일 년이 채 되지 않았다. 아마 작년 생일까지는 켜져 있었으리라. 임쌤은 이런 자질구레한 수까지 기억하는 건가, 싶어 참으로 신기하다는 감상 뿐이 들지 않는다.

"저, 이거만 끝나고 야식 먹으러 갈 건데. 같이 갈래요? 제가 쏠게요~"

안경 뒤의 두 눈이 초승달 모양으로 가늘게 휘어진다. 긴 속눈썹이 도드라진다. 현재의 데코레이션과 퍽 어울린다.

"뭐 먹을 건데?"

"집 근처에 맛있는 라멘 가게가 있어요."

"라멘? 집 근처에?"

은도의 거주지는 경기 남부. 대치를 떠나 고속도로를 타고 남하하면 이십 분 내외로 도착한다. 이것은 물론 평일 열 시라는 쾌적한 시간대의 이야기지만. 지금은 평일 아홉 시. 도로 상황이 크게 다를 것 같진 않다.

"거기, 교자가 진짜 바삭하니 맛있어서~ 생맥이랑 같이 먹으면 최고예요~"

황홀한 얼굴로 그리 말하기에, 경태는 마지막으로 먹었던 만두의 화상을 멍하니 떠올린다. 마트 냉동식품 코너에서 으레 볼 수 있는 흔해빠진 브랜드의 흔해빠진 냉동만두.

오늘 밤엔 딱히 할 일이 없다. 그렇다면 좀 어울려 볼까.

임은도라는 남자는 어울리기에 나쁜 편이 아니다. 성격이 기본적으로 밝고 명랑하다. 시키지 않아도 이야기보따리를 재잘재잘 잘만 풀어놓는다. 상대의 말에도 열심히 호응한다. 그리고, 이런저런 화장품과 악세사리로 커버된 외견이, 튄다면 튀는 편이지만. 적어도 지금의 경태에게 그것이 마이너스 요소로 작용하지는 않는다. 엄격하게 따지자면 플러스일지도 모른다.

"빨리 끝내. 기다리고 있을게."

경태는 최근의 모의고사 문제지를 꺼내 복잡한 몰 수 계산을 시작했다.

어두운 조명 아래의 테이블은 삼 분의 일 가량이 채워져 있었다. 평일 열 시에 가까운 시간인데도 이 정도의 사람이 있는 건 신기할 따름이다.

두 사람은 창가 자리를 찾아 앉았다. 네온사인이 반만 살아남은 도심의 야경이 내려다보인다.

경태는 메뉴판으로 시선을 옮겼다. 라멘이 보통 사이즈와 특 사이즈로 나뉘어 있다. 그 외의 식사 메뉴는 교자 뿐이다. 음료 란에는 어느 식당에서나 볼 수 있는 탄산음료와 맥주와 소주, 그 밑에, 라멘집이니 당연하게도 사케가 추가되어 있다.

"술 드실 거죠?"

"대리가 잡히려나?"

은도는 이상하다는 얼굴을 해선 경태를 바라본다.

"저희 아파트에 차 세워두셨잖아요."

"자고 가라고?"

"생일인데 술도 안 먹으면 좀 섭섭하지 않나?"

"가치관이 다른 것 같네."

농담조로 대답했다. 

곧 직원이 주문을 받으러 다가왔다. 라멘 두 그릇에 교자 한 접시, 그리고 생맥주 두 잔. 야식으로는 양이 좀 많을지도 모르겠다. 내심 건강 걱정을 하는 경태다. 마흔 중반을 쾌속으로 거쳐가고 있으니 자연스러운 염려이긴 하다.

벽 선반에 나란히 늘어놓은 일본 피규어들을 구경하고 있으니 은도가 얘깃거리를 꺼냈다. 경태는 서브컬처 문화에 대해 아는 게 없다.

"저번에, 비가 잔뜩 와서 학원가가 정전됐었잖아요?"

"그래서 내가 계단에서 굴렀지."

"아니이, 그 때 말고. 그 다음에. 한 번 더 그랬잖아요. 전선 보수를 대체 어떻게 한 건지."

"아, 맞아...... 그 땐 잘 들어갔어?"

썩 좋지 못한 사건에 휘말려 계단에서 구른 경태가 병원에서 퇴원하고 일주일 후, 또다시 집중호우가 대치를 덮쳤다. 이번에는 강풍에 시달린 전선이 뚝 끊어졌단다. 결국 학생들도 강사들도 평소보다 이르게 퇴근하게 되었다.

그 때 분명, 은도는 비가 잦아들면 귀가하겠다며 학원에 남았다. 그 후의 경과는 알지 못한다. 물어보지도 않았다. 물구덩이를 뚫고 귀가한 경태의 차는 어딘가 맛이 가 버려서, 근처 자동차 수리점을 전전하느라 나름 바빴다. 다음 날 학원에서 말짱한 은도의 얼굴을 보아, 어련히 잘 귀가했었거니 했던 것도 있지만.

은도는 작게 키득거리기 시작했다.

"열 시 넘어서까지 기다렸는데 빗발이 멈출 생각을 안 하는 거야. CCTV 보니 도로들이 무슨 침수 직전이라, 그냥 교무실에서 잘 결심을 했거든요."

보통 문장이 이렇게 끝나는 건 흐름이 결심과 같지 않았다는 의미다. 경태는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근데, 유쌤도 그 때 같이 있었거든."

"어, 유쌤이?"

교자 한 그릇과 생맥주 두 잔이 먼저 서빙되었다. 차가운 맥주를 머금어 하얗게 변해버린 500cc 유리컵. 두 사람은 가볍게 잔을 맞부딪힌다. 오싹할 정도로 싸늘한 알콜이 체내로 스며들어간다.

캬, 하는 감탄사를 뱉더니 기다란 젓가락으로 교자를 집어드는 은도. 한입에 쏙 넣어 오물대는 그 얼굴이 상당히 행복해 보이기에, 경태는 무심코 작은 코웃음을 치고 만다.

교자는 평균 이상의 맛이었다. 바삭하게 잘 익은 겉과 간이 제대로 밴 속. 술안주로 제격이다.

"무슨 얘기 하고 있었지? 아, 맞아, 유쌤."

"유쌤, 잠실 쪽에 사는 거 아냐? 근데 왜 그 시간까지 학원에 있었대."

"으음, 글쎄...... 프린트를 고치는 것 같았는데."

은도의 시선이 순간 흐리게 흔들렸다.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 경태는 본능적으로 깨닫는다. 그 은폐하려는 진실 또한 순식간에 꿰뚫는다. 꿰뚫고 자시고를 떠나, 경태는 애초부터 그것을 알고 있었으니 헛된 은폐다.

같이 살고 있는 형이라는 사람이, 유쌤을 데리러 온 거군.

그렇다면, 그 뒤로 이어질 내용은 조금 뻔한데.

사고의 진척을 표면으로 드러내지 않기 위해 맥주를 다섯 모금 들이킨다. 은도는 그가 동성연애자라는 사실을 알아버렸고,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는 숨기고자 한다. 평범하게 착한 행위다.

"그런데, 유쌤이 갑자기 나한테 자기 집에서 자고 가지 않겠냐고 하는 거야."

유탐정은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다. 

일전의 계단 추락 사고 후, 경태는 유탐정이라는 인물에 대한 평가를 다소 바꾸어야 할 필요를 느꼈다.

불의를 목격하면 참지 못한다. 흔히 말하는 정의감과 그에 따른 결단력이 그에게는 다소 높은 수치로 존재했다. 그 정의감이랄 것이 과연 어떤 조항을 갖고 있을는지는 애매하지만. 그래도 평균 이하의 모랄리티는 아니고, 평균치를 살짝 상회하는, 딱 그 정도의 정의감이다. 경태는 교자를 입 안에서 천천히 뭉개며 생각했다.

라멘 두 그릇이 테이블에 올라왔다. 큼지막한 차슈와 진해보이는 갈색 국물이 입맛을 돋운다.

"임쌤이 어지간히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나 본데."

한 입 먹어보니, 기름지다. 하지만 가득한 지방을 애써 무시하고도 먹을 가치가 있는 맛이었다. 두 사람은 잠시 말없이 면을 입 안으로 옮긴다.

은도가 먼저 그릇에서 코를 떼어냈다. 맥주 한 모금으로 기름기를 싹 내려보낸다.

"아하하하, 비가 어지간히 안 그쳐야 말이죠~"

"그래서, 유쌤 집에서 잤어?"

자다, 라는 순수한 동사에 음란한 뉘앙스를 가져다 붙인 건 역시 선조들의 잘못이다. 경태는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다가, 제 주량이 이렇게까지 적어졌나 고민한다.

"집이 여기니깐. 염치불고하고 하룻밤 보냈어요."

"오호, 출근할 때도 편했겠어. 잠실이면 가깝잖아."

"아이, 어떻게 출근할 때까지 있어요~ 주차해뒀던 차도 걱정되고 해서, 아침도 안 먹고 후다닥 나왔지."

문득 은도가 제 손톱을 색칠했던 날을 떠올린다. 그 때는 분명 제가 출근할 때까지 같이 노닥거리면서 시간을 보냈던 것 같은데. 이건 친밀도의 차이인가?

단숨에 그건 아니라는 판단이 섰다. 그야, 유탐정은 그 형이라는 사람과 같이 살고 있을 테니까. 갑작스러운 손님인 은도가 오래 머물기엔 불편했겠지.

애초에 은도는 그가 동성연애자라는 사실도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동거인까지 있으면서 은도를 집에 들인 건 대단한 정의감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다.

하여간에 보통 사람은 아니군......

은도는 화제를 바꾸고 싶어하는 듯했다. 이 이상 그 날의 화제를 파고들면 민감한 주제를 건드리기 십상이니까. 유쌤 집은 어땠어? 저녁은 같이 먹었어? 등의 질문이라도 하면 곤란해지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애초에 다른 화제를 꺼내면 됐을 텐데. 딱히 다른 게 생각나지 않았던 건가......

경태는 기억을 더듬어 얼마 전에 스쳐지나가듯 보았던 예능 프로그램의 이야기를 꺼냈다. 다행스럽게도 은도는 예능 프로그램을 기피하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주쌤, 2차 어때? 2차."

"어우, 난 배부른데. 더 마시고 싶어?"

"아하하! 생일인데 2차는 해야죠~"

생일과 2차가 어떤 연관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것 역시 가치관의 차이라고 받아들였다.

두 사람은 가게를 나와 은도의 자택으로 향했다. 걸어서 십 분이면 도착한다. 경태의 자가용 역시 그 주차장에 있었다. 독신자용 아파트라 그런지 몰라도, 주차 공간은 생각 외로 널널했다.

자정 삼십 분 전. 평일의 밤거리를 지키는 24시간 영업 편의점이 사거리 귀퉁이에서 홀로 불을 밝히고 서 있다. 알딸딸해 보이는 은도에게 맥주를 사 가지 않아도 되겠냐고 물으니, 냉장고에 네 캔이 남아있던 걸 기억하고 있단다.

"요즘은 네 캔에 만 천원이던데."

편의점 맥주의 이야기였다. 경태의 이야기를 듣던 은도는 고개를 기우뚱 기울인다. 목과 어깨의 각도가 오십 도 밑으로 떨어지기에, 경태는 비틀대는 은도의 팔을 잡아 부축한다.

"이쪽은 네 캔에 팔천원도 하던데~ 음, 내 취향은 아닌 맥주였지만, 아마, 떨이 상품이겠죠?"

"팔천원? 그럼 그렇겠지."

몸의 중심이 제대로 선 걸 보고 경태는 팔을 움켜쥐었던 손을 떼어낸다.

은도의 집은 불과 몇 달 전에 방문했었다. 해가 쨍쨍 나는 여름날. 별안간 네일아트를 해 주겠다며 초대받았다. 손톱이 마음에 든다고 했던가. 그런 방면의 꾸밈에는 전혀 흥미가 없는 경태였지만, 은도와 단둘이 있는 시간을 갖는 건 썩 나쁘지 않을 듯하여 승낙했다. 실제로도 괜찮은 체험이었고. 어른의 깨끗하지 못한 심리 사정을 숨기는 건 이제 익숙하다.

아기자기한 인테리어는 이전과 별반 다르지 않다. 선반 한켠에 프랜차이즈 카페의 MD가 주르륵 나열되어 있는 모습을 훑으며, 경태는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은도와 마주앉았다. 오늘은 테이블 위에 네일아트 도구가 굴러다니지 않는다.

생맥주와 같은 용량의 캔맥주. 한끼 식사 대용으로 판매하는 견과류 믹스 두 봉지. 냉장고에서 차갑게 식어있던 레토르트 양념곱창(물론 지금은 마이크로파의 힘으로 충분히 데워졌다). 맞은 편에서 자꾸만 실실 웃어대는 한참 어린 나이의 동료.

유탐정과 동갑이라고 했으니 올해로 서른 일곱. 경태는 그보다 여덟 살이 많다. 그들보다 세상에 팔 년 일찍 나와 이룬 업적이 뭐가 있느냐 하면, 무려, 여덟 살을 더 많이 먹었다. 그뿐이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 은도에게 열심히 맞장구를 쳐 주며 머릿속으로는 그런 생각을 했다. 대화 상대로서 무척 좋지 못한 행동이다. 자각은 있다. 하지만 저런 상태의 은도에게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진 않을 것 같았다.

한참을 말하고 나서야 은도는 입을 다물었다. 얼굴에 졸음 요정이 두 마리 앉아있다. 맥주 두 잔으로 저러는 걸 보니 술이 그리 센 건 아닌 모양이다.

"요즘 유쌤이랑 같이 다니더라?"

궁금했던 화제를 꺼냈다. 궁금해서 잠을 못 이룰 정도로 궁금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런 상황에서 꺼낸다면 어느 정도 괜찮은 수준의 답변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가 알기로 유탐정은 사교적인 성격이 아니다. 적어도 쉬는 시간에 사람을 구태여 만날 정도로 사람을 좋아하진 않는다. 퍼스널 스페이스가 확실한 타입. 경태는 그 틈을 은근슬쩍 파고들려다가 실패했다. 이미 바운더리 안에서 편히 쉬고 있는 사람이 있으니 당연하다.

턱을 괴고 멍하니 있던 은도는 놀란 얼굴로 경태를 올려다본다. 비주얼적으로 괜찮은 모습이다. 곧이어 경태는 스스로의 사고 과정에 의문을 제기하다가, 알코올의 탓으로 얼버무렸다.

테이블에 두 팔을 올려 그를 내려다본다. 허리를 조금 구부려 얼굴을 가까이했다.

"왜 그런 표정이야. 뭔 일 있어?"

"어, 아니. 아뇨."

"유쌤, 몸이 많이 안 좋대?"

그는 얼마 전 학원을 하루 쉬었다. 몸이 좋지 않다는 이유였다. 경태는 내심 걱정했지만, 다음 날 직장으로 복귀한 그의 얼굴은 평범한 학원 강사의 얼굴이었으므로. 몸조리 잘 했어? 라는 드라이한 인사만 가볍게 남겼던 것이다.

한 층 솔직해진 은도의 얼굴이 미세하게 구겨졌다.

경태는 이것 역시 건드려서는 안 될 화제임을 깨닫는다.

정말로 몸이 안 좋은가, 유쌤?

하지만 그걸 임쌤이 말하면 안 될 이유가 달리 있나.

삼 초 간의 침묵.

경태는 화제를 돌릴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한다.

누군가의 벨소리가 울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소리의 근원지로 향한다. 경태의 휴대전화가 진동하고 있다.

그는 움직임이 없는 은도에게 양해를 구하는 듯 마는 듯하며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

"생일이라면서?"

"자정이 지났으니까...... 엄밀하게 말하자면 생일은 아냐."

한숨 소리.

"생일이었다면서?"

"너한테 생일 축하를 받을 줄은 몰랐네. 어떻게 알았어? 카카오톡에도 안 뜰 텐데. 혹시 캘린더에 저장해 뒀어? 아, 이거 기쁘다."

"술냄새가 여기까지 나네."

"어, 술 마신 것 같아?"

"선배가 알려줬어. 오늘 누구 생일이었던 것 같은데, 하다가. 네 이름이 튀어나와서 솔직히 어이가 없더군."

"아직도 연락해? 강 선배랑?"

"하면 안 되나?"

"어, 같이 사는 애 있는 거 아냐?"

침묵, 오 초. 경태는 망설이다가 먼저 입을 연다.

"너도 참......"

"조카야."

"음, 조카라고 치고, 아무튼. 강 선배가 내 생일을 기억하고 있었다고?"

"자기한테 생일을 알려준 사람은 전부 기억하고 있다데."

"대단한데. 대학생 때부터 느꼈지만, 역시 사는 세계가 달라. 강 선배. 발도 넓잖아? 그럼,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오늘은 누구 생일, 하고 떠오르겠는데. 왜, 한 반에 생일이 같을 사람이 있을 확률은 80퍼센트가 넘는다잖아. 요즘은 애들이 적어져서 그보다 더 낮을지 모르겠다만. 아, 양력이랑 음력도 따로 기억하려나?"

"내 알 바 아냐, 이젠."

"실연의 아픔을 남한테 풀진 말고."

"뭐야?"

"조카랑 잘 지내. 널 꽤 좋아하는 거 같던데."

침묵, 삼 초. 이번에는 전파 너머에서 먼저 목소리가 들렸다.

"알아."

"오호, 알아?"

"네 알 바 아니다."

"음, 그렇겠지. 올해는 이상하게 이쪽 운이 없구만."

"이쪽?"

"생일 축하해줘서 고맙다."

아마 그 선배가 '생일이니까 전화나 한 번 해 줘~'라고 부추겨서 어쩔 수 없이 전화한 거겠지만.

"그래. 끊는다."

"어~ 잘 자고."

전화가 끊겼다.

경태는 그 후 이 분 정도를 뻐기다가, 초인종을 눌러 귀가했다.

다시 테이블에 모인 두 사람은 아무렇지 않게 다른 이야기를 시작했다. 알코올이 들어가면 평범한 대화도 한 줄기로 이어지지 않는 법이다. 물론 그런 이유에서 비롯된 화제 전환은 아니었지만, 두 사람은 대화의 랠리를 나름 매끄럽게 이어갔다. 무언가 대답하기 껄끄러워 침묵이 야기되는 일이 없었다는 의미다.

이런 스킬은, 어쩌면 학원 선생이라 더욱 연마된 건지도 모른다. 경태는 슬슬 취기가 오르는 머리로 생각한다. 눈앞의 은도는 이미 두 팔을 테이블에 올려 무게중심을 그쪽으로 이동시키고 있다. 목이 이리 흔들렸다 저리 흔들렸다 하는 모습이 광고용 바람 인형을 상상케 한다.

"졸려?"

"집주인이 먼저 취하다니, 이거, 면목이 없네요......"

왜 면목이 없는지는 모르겠지만 경태는 슬쩍 미소지어 보였다.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니 어느덧 새벽 한 시를 넘어가고 있다.

"슬슬 치우고 잘까?"

"앗, 으음, 내가, 내일 일어나서 치울게요."

"알았어."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잡다한 쓰레기를 한쪽으로 모으는 경태다. 은도는 멍하니 쓰레기를 치우는 경태의 손가락을 시선으로 쫓고 있다.

"아직 안 지웠어. 네일아트. 지우는 법을 몰라서."

은도가 해 주었던 왼손의 투명한 네일아트. 차가운 것에 닿으면 파랗게 변하고, 어두운 곳에선 형광 주황으로 빛난다. 다기능 네일아트라고 할 수 있겠다.

"응...... 그런 거 같아요."

"눈썰미가 좋네."

"그랬어야 했는데......"

답변이라고 하기엔 이상한 말이었다. 아무래도 몸에 알코올이 쌩쌩 돌고 있는 모양이다. 경태는 얼마 없는 식기를 싱크대로 옮긴 후 테이블로 되돌아온다.

은도는 그새 테이블에 엎드려 있었다. 침대로 옮겨야 한다는 생각이 대뇌를 지배한다.

"임쌤~ 안방 가서 자."

테이블 근처에 있는 소파는 적당히 푹신해 보였다. 하룻밤을 지낼 정도는 되리라.

은도는 천천히 굽은 등을 일으켰다. 대답 하나 하지 않는 걸 보니 어지간히 취한 듯하다.

"저...... 뭘 그렇게 잘못했던 걸까요?"

"어?"

"뭘 그렇게 잘못해서......"

"무슨 소리야?"

인식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체험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다만 그것이 작용하는 범위와 영향에는 차이가 있다. 

인터넷 쇼핑몰에서 산 옷이 몸에 맞지 않는다. 그렇다면 한 사이즈 크고 작은 옷으로 교환을 신청하면 된다. 남들의 호평을 듣고 관람한 영화가 재미가 없다. 그렇다면 두 시간을 버린 셈 치면 된다.

자신은 남자이지만 남자를 좋아한다. 그렇다면 남자와 연애행각을 벌이면 되나? 이것은 위의 사례들마냥 간단하게 결정할 수 없다.

자신의 돈과 시간을 들여 옷을 반품해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다. 영화가 재미없다고 느껴 악평을 늘어놓아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서로의 취향을 이해해준다. 하지만 동성애는, 적어도 현 시점에서는, 그렇지 않다.

경태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사회에서 배척당하고 싶지 않아 스스로 구석진 동지들의 커뮤니티에 기어들어갔다. 아이러니한 현실. 멀쩡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에 하얗게 그어진 선.

계속 선 밖에 있을 수는 없었기에 멀쩡한 사람의 탈을 쓰고 선을 오갔다. 제법 정교한 탈이었다. 같은 부류의 사람들에게는 금방 들통나기도 했지만, 일단 그 외의 멀쩡한 이들은 그를 멀쩡하게 여겨주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경태는 의심의 시선을 받았다. 또다시,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정교한 탈이 원인이었다. 당신 같은 멀쩡한 사람이 어째서 결혼을 하지 않느냐는 의문이 주변에서 자꾸만 터져나왔다.

그런 질문을 몇 년 째 받으니 솔직히 귀찮았다. 탈을 내던지고 싶은 충동이 간혹 일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사회에서 튕겨나와 살아갈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리고, 그런 고민에 한창 빠져있었을 때 눈앞에 나타난 사람이 임은도였다.

그는 이상했다. 일단은 남자이면서 퍽 여자다운 치장을 당당하게도 하고 다녔다. 남성적이니 여성적이니 하는 건 시대착오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경태는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를 향한 비난과 멸시의 시선 또한 시야에 고스란히 담겼다. 그럼에도 은도는 자신이 좋아하는 자신의 모습을 유지했다. 남의 평가는 그의 삶에 어떠한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는 것처럼.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진정한 자신을 드러내고 살아가는 사람이란 얼마나 아름다운가.

아마 동경에 가까운 마음이었으리라.

사람은 자신이 이룰 수 없는 것을 끊임없이 동경하는 생명체다.

그래서, 경태는 제 눈앞에서 동경의 대상이 무너지는 것을 견디지 못했다.

정확한 상황 설명은 되지 않았다. 꼬인 혀와 젖은 목소리가 발성에 해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있는 힘껏 청취자의 자세를 취했고, 그 덕에 최소한의 정보 전달은 이루어졌다.

자신을 버린 어머니와 여동생이, 그를 사이비 종교 존립의 제물로 삼으려고 했다. 은도를 납치하여 사이비 종교 안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만들려고 했다. 그 과정에서 무언가 잘못되었는지 은도 대신 탐정이 납치되어 황당한 수난을 겪었다.

그리고 탐정은 은도에게 모든 사실을 이야기했다.

계단 추락 사건의 범인을 밝혔던 때처럼, 무엇 하나 빼놓지 않고 낱낱이 전부.

은도의 가정사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가 어렸을 적에, 사이비에 심취한 어머니는 그의 여동생을 데리고 집을 나갔다. 첫째인 은도가 아닌 둘째인 여동생을 데리고 나간 이유는, 그가, 어렸을 때부터 여자아이들의 치장 물품을 너무 좋아했기 때문에.

그는 사탄의 자식이라면서.

진짜 사탄 같은 건 당신네들이잖아......

"어디부터 잘못된 거죠?"

잘못된 일 따윈 없다.

"내가 그렇게까지 나쁜 짓을 한 거야?"

나쁜 짓 같은 건 하지 않았다.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멀쩡하게 사회에 섞이고 싶었다.

"괜찮아......"

라는 말이 과연 닿긴 할까 싶었다.

품 안이 묵직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상대를 끌어안고 있었다. 상대가 끌어안긴 건지 제가 끌어안은 건지 판별할 수 없었다.

"네 잘못이 아니야......"

누가 한 건지 애매한 말이었다. 첫 글자가 나인지 너인지조차 모호했다.

정신이 공명했다. 동요해선 녹아가고 있다. 경태는 문득 생각한다. 자신이 떠올렸다기엔 지나치게 감상적인 연상이다. 이것 역시 알코올의 탓으로 얼버무린다. 어쩌면 맞닿은 온기의 탓일 수도 있겠다는 일말의 비상구를 설치해 둔 채.

"네 잘못이 아니야......"

귓가에 들려온 문장을 앵무새처럼 되읊는다.

그는 한참을 서럽게 울었다.

"여보세요."

"어, 도천영 씨 휴대전화,"

"맞아요. 얘기하세요."

"음, 그 조카 분이신가?"

"예."

"그 친구는 어디 가고?"

"집 앞 편의점."

"이거 타이밍을 잘못 잡았네."

"용건 없으시면 끊고요."

"아, 며칠 전에 내 생일을 축하해 줬거든, 그 친구가. 고맙다는 얘기를 하고 싶어서."

침묵. 어딘가 못마땅해 보이는 숨소리.

"여보세요?"

"강재진이 누군지 아세요?"

"음, 우리 대학 선배. 천영이랑 과는 달랐는데 꽤 친했지 아마. 중학교 고등학교를 같이 다녔댔던가."

"대학 선배? 핫......"

비웃음을 치는 건지 한숨을 쉬는 건지 분간하기 어려운 날숨.

"강 선배가 걔한테 시킨 거지? 남 생일 정도는 축하해 주라고."

"누구 생일 챙기는 걸 본 적이 없으니."

"하나 뿐인 조카 생일도 안 챙기나?"

또 다시 침묵.

"그래도 강 선배 생일은 챙길 건데. 하여간 짝사랑이라면 걔도 참 징글징글하게 했지. 아니, 지금도 하고 있는 건가......"

"그걸 상담하고 싶었던 거죠?"

"누구 조카랄까봐 눈치는......"

"예, 뭐. 전해드리겠습니다. 딱히 좋아하실 것 같진 않네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뒤의 세 글자를 말하기도 전에 전화가 끊겼다.

하여간 비슷한 녀석들끼리 살고 있구만......

경태는 그의 전화를 기다릴까 말까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 휴대전화와 전자담배를 챙겨들고 아무도 없는 교무실을 나섰다.

카테고리
#오리지널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