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애미 신드롬

마이애미 신드롬 02

켄펠잊 논씨피 하이틴 AU


알고 계셨나요?

- 전편: https://pnxl.me/cqmu10

- 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 미국을 배경으로 합니다. 고증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 모브 캐릭터 등장&날조&개인적인 해석이 많습니다.

- 캐릭터의 우울감 묘사가 있습니다.

- 모바일은 가독성이(...) PC 열람을 권장합니다.


Miami Syndrome 02

19XX년 6월 19일 오전 8시 55분

마이애미, 플로리다

모텔 "오버룩"

올리브색 카펫이 깔린 작은 모텔방은 이불이 촌스럽고 불법 카피 된 그림이 걸려있다. 높은 선반에 배치된 티비 볼륨을 죽인 이즈리얼이 창문을 흘끔거리며 느릿한 손짓으로 전화선을 꼰다.

"그럼요! 25일 저녁에 도착해요. 그다음 날부터는 다시 일할 수 있어요. 아, 물론 잘 지내는 중이고요! 당장 바쁜 일도 끝나서 시간 맞추기 쉬울 거예요."

그가 쳐다보는 창문은 커튼이 쳐져 빈틈없이 막혔다. 주차장을 코앞에 둔 2층 객실에는 투숙객이 한명 뿐이다. 침대에 앉아 전화기가 놓인 협탁으로 구부정하게 몸을 굽힌 이즈리얼은 초조하게 다리를 떤다. 전화선이 걸린 손가락으로 정신없이 날짜를 세면서 입으로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한다.

"······, 당연하죠! 저도 다들 보고 싶어요. 아이들 잘 있죠? 한동안 못 본 것 같은데 이러다가 얼굴 잊을 것 같아서, ······, 다행이네요! 연락 자주 못 드린 게 마음에 걸렸거든요. ······, 네, 그럼요."

상대의 잡소리가 길어진다. 지루함을 애써 참으며 부주의하게 시선을 돌린다. 건너편에 매달린 벽걸이 거울에 모습이 비친다. 자고 일어난 모양 그대로다. 눌린 머리와 아무렇게나 입은 옷에 눈은 신경질적이고 피부는 거칠다. 밝게 켜진 황색 스탠드는 보고싶지 않은 모습을 더 잘 보여준다. 구석에 처박힌 방이라 참 다행이다. 그러나 그걸 따지더라도 얼마나 더 참아야 할까. 슬슬 가야 할 시간인데 전화는 끊길 생각을 안 한다.

안부 정도로 끝낼 생각이었던 통화는 40분가량 질질 끌렸고 상대는 다음 일정을 5번은 넘게 확인한 뒤에 수화기를 내려놓는다. 아이들 외에 묻지도 않았던 어른들의 근황을 들어야 했던 이즈리얼은 진작에 벌렁 누워버렸다. 침대까지 끌려오던 전화기는 침대와 협탁 사이 틈에 걸리고 전화선이 팽팽하게 늘어났다. 이대로 전화선이 뽑혀 통화를 지속할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이유를 만들고 싶었다. 생기 없는 눈으로 천장 벽지의 무늬를 세던 그는 연락을 끊을 때가 되어서야 비쩍 마른 입술로 마무리 멘트를 던진다. 곧 봬요, 사랑해요! 전화가 끊긴다. 손가락이 풀리자 수화기는 한 바퀴 굴러 이불 위로 떨어진다.

급격하게 늙은 이즈리얼은 티 하나 없는 천장의 결함을 찾아내려 하다가 곧 벌떡 일어난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원래도 계획적인 성격은 아니지만 이번에는 충동적으로 온 감이 더욱 강했기 때문에 앞으로 뭘 할 수 있는지 생각해야 한다. 이즈리얼은 침대 위로 가방을 턴다. 선글라스와 미처 버리지 못한 쪽지, 폴라로이드 카메라와 지갑, 화장품과 열쇠 그리고 터진 스키틀즈 봉지와 알록달록한 사탕이 마구 쏟아진다.

지갑 안에 돈보다 많이 들어있는 건 낡은 흑백 사진들이다. 빳빳하고 반들거렸던 것이 이제는 인쇄가 벗겨지고 얇아졌다. 이즈리얼은 사진을 조심스럽게 들고 사탕이 굴러다니는 침대 위로 펼친다. 총 24장의 사진 중 5장을 대조했는데 일치하는 건 없었다. 허탕 친 5장은 다시 넣어두고 남은 사진의 뒷배경을 보며 장소를 추측한다. 여긴 어떤 기차역. 여긴 어떤 사막. 여긴 어떤 바다. 여긴 어떤 차 안. 여긴 어떤 산. 단서가 너무 적다. 엄지손톱을 물어뜯으며 최대한 플로리다와 비슷한 경치를 찾는다. 골라낸 사진은 전부 8장. 나흘 동안 장소를 전부 돌기에는 충분하지만 미국에 바다나 도시가 여기에만 있는 건 아니다. 지극히 원망스럽다. 이즈리얼은 고른 사진을 가방 옆에 난 주머니에 따로 넣어 챙긴다.

조금 전 통화한 대상은 친구나 가족이 아니다. 간단히 말하면 네 블록 옆에 사는 아주머니, 다르게 말하면 그의 고용주다. 파트타임으로 베이비시터 일을 하는 이즈리얼은 어른에게나 아이에게나 인기 많은 보모이며 일을 부탁하는 전화가 줄을 섰다. 사실 애들을 특별히 좋아하는 건 아니다. 그치만 외모는 훌륭하고 유머러스하며 어린이에게 상냥하기까지! 이 얼마나 인기인의 위상을 높여주는 일인가. 남의 부모에게 온갖 애교를 떨어대는 것도 온전히 자신을 위해서다. 혹은 그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시급을 후하게 쳐주기 때문이거나.

이즈리얼은 아직 정리하지 않은 사진에 찍힌 남녀를 무거운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가 삼촌과 지낸다는 사실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다. 이즈리얼의 부모는 고고학을 연구하는 학자였고 이즈리얼이 고고학이란 단어를 이해하기 한참 전부터 여행을 겸비한 연구를 다니고는 했다. 어린 아들을 두고 집을 비우는 날이 더 많았던 부부는 불규칙한 날에 돌아왔고 저녁 식탁에 앉아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간혹 탐사지에서 찍은 사진 뒤에 편지를 써 보내기도 했다. 달에 최소 한 번은 받을 수 있는 우편이었기에 그는 삼촌 손에 자라면서도 부모를 사랑하고 그리워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우편함이 텅 비기 시작했다.

삼촌은 그들이 사막 어딘가에서 죽었을 거라 말했고 시신이 없는 장례를 치르는 동안까지도 이즈리얼은 실감하지 못했다. 시체가 없으면 어딘가에 살아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로부터 매일 빈 우편함을 확인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고 언젠가 그들이 돌아올 거라 믿었다. 마지막 편지를 받은 게 8년 7개월하고도 12일 전이다. 찢어지고 접히고 긁히고 벗겨지고 젖고 글씨가 번진 사진 24장이 제 부모의 가장 최근 근황이자 유품이다. 가만히 기다리는 것을 멈추고 부모를 직접 찾아나섰을 때, 그러니까 이즈리얼은 홀로 여행을 떠날 나이가 되었을 때부터 전국을 돌며 사진과 유사한 장소를 찾았고, 일일이 사진과 대조하며 제 엄마 아빠가 서 있었을 위치를 찾았다. 이곳은 13번째 여행지다.

파뜩 생기가 돌아온 이즈리얼은 사진을 차곡차곡 정리한다. 쏟아진 사탕을 한 손에 모아 쓰레기통에 버리고 늘어놓았던 짐을 가방 속에 예쁘게 넣는다. 뒤집어진 전화기는 다시 협탁 위로 올려두고 전화선을 확인한 뒤 수화기를 살짝 들린 채로 걸쳐놓는다. 창문 근처로는 절대 가지 않는다. 햇빛이 커튼에 가려 방안은 차갑고 어둡다.

그 자리에서 옷을 모두 벗는다. 여벌을 가져오지 않았으니 새로 사거나 빨아야 한다. 벗은 옷을 가지런히 걸어두고 하나 남은 쪽지를 들고는 욕실로 들어간다. 드러나는 치아의 면적을 의식하며 웃는 입을 해보고는 변기통 안에 쪽지를 넣고 물을 내린다. 해소되는 기분이 들지 않는다. 샤워기의 물을 튼다. 데워지지 않은 물을 그대로 맞으면서 온수를 기다리지 않고 몸을 벅벅 문질러가며 씻는다. 소름 끼치는 온도다. 구석구석을 닦고 있으면 김이 천천히 피어오른다.

샤워를 마치고 이즈리얼은 김 서린 거울을 손으로 닦는다. 푹 젖은 얼굴이 보인다. 물기를 닦고 피붓결을 정리하며 오랜 시간을 들여 할 수 있는 치장을 모두 마친 그는 빛나는 금색 눈을 보면서 활짝 웃는다.

"안녕, 좋은 아침!"

19XX년 6월 19일 오전 10시 36분

마이애미, 플로리다

골든 쇼어스 해변

케인은 기어코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 사장을 먼저 퇴근시키고 정비소 안쪽에 난 작은 컨테이너에서 밤을 보냈다. 중년 남자가 케인의 외박을 허락한 데에는 밤중엔 절대 밖에 나가지 않는다는 조건 때문인데, 자신에겐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하다고 굳게 믿었던 그는 간판의 불이 꺼지자마자 속이 허해졌다. 한창 자존심이 셀 나이인 청소년은 이것을 외로움이라고 인정하려 들지 않았고 조금 전 헤어진 재수 없는 또래 남자아이 생각도 모른 척했다. 컨테이너 안에는 애들이 시간을 때울 만한 것이 전혀 없어서 남자는 문을 잠그면서도 많은 걱정을 했다. 케인도 그때까지는 어떻게든 되리라 생각했다.

남자가 떠난 지 20분 만에 적적함을 느낀 케인은 티비라도 켰다. 영화 채널은 온통 성인 영화만 방영했고 자칭 웃긴 사람들이 나오는 프로그램은 재미없었다. 밤이 아직 한참이나 남았음에 절망하며 책상 위로 납작 엎드렸다. 다친 얼굴이 눌려 아프지만 아무도 자기를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방송 출연진과 방청객의 익살스러운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 와중에도 파도는 멀쩡히 치고 있을 것이었다.

케인은 반쯤 누운 상태로 아버지께 어떤 식으로 연락해야 하는지 고민했다. 어쩌면 이미 학교에서 전화했을지도 몰랐다. 사람을 때렸다고 말하려면 누굴 때렸는지도 알려야 하고 누굴 때렸는지 알리려면 왜 때렸는지도 설명해야 한다. 그럴 수는 없다. 집을 비운 사이 아들이란 놈은 뺀질거리며 음악이나 하더니 이젠 또 친구들이랑 싸웠단다. 아버지껜 지금까지 그들이 친구라고 말했지만 사실 그다지 친하지도 않았다. 관계가 안 좋았으면 안 좋았지. 정상적인 친구 사이에서는 멋대로 부모 욕을 갈기지 않는다.

그럼 나는 이제 친구가 한 명도 없는 건가? 이런 개 같은 상황에서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이 단 하나도 없다는 걸 깨달은 케인은 뒷목이 시렸다. 그렇다 할 친구야 원래도 많이 없었다지만 이 사실을 알림으로써 아버지의 신뢰를 잃는 것이 더 큰 문제였다. 속했던 무리에서 쫓겨난 데다가 이제 음악이 싫다고 하면 과연 어떤 부모가 좋아하겠느냐고. 케인은 자기가 사랑받을 구석이 없는 자식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사실 집에 자주 올 수 있지만 날 보기 싫어 오지 않는다면서. 외로움은 비합리적인 사고를 곧잘 유도했고 쇠약한 신체는 감정적인 결론을 가속했다. 아픈 곳이 더 아팠다. 야심한 시간에 혼자 있음에도 음산한 인기척을 한번 못 느꼈다. 완전히 혼자가 된 기분이었다. 근육이 단단해질 정도로 입술을 꽉 닫고 있던 케인은 조금씩 힘을 빼고 완전히 늘어진다. 비관. 동시에 그날 바다는 잠잠했다.

그는 그렇게 까무룩 잠들었고 전등과 티비를 켠 채였다. 일찍이 출근한 중년 남자는 어제와 똑같은 담요를 덮어주며 알아서 깰 때까지 건들지 않았다. 목이 돌아가지 않을 자세로 선잠을 잔 케인은 왜 깨우지 않았냐며 신경질을 부렸지만 이건 감사 인사인 동시에 괜한 투정이었다. 남자는 일을 하루 빼주면서 바깥 공기라도 쐬고 집에서 쉬라며 등을 떠밀었다. 아직도 무언가 하고 싶은 생각이 없던 케인은 어제와 다를 바 없는 몸으로 컨테이너에서 내쫓겼다.

얌전히 집으로 돌아가기 싫은 마음에 케인은 다시 바다로 갔다. 아침 햇살이 따뜻하며 묵직하고 느린 바람이 불었다. 모래 범벅이 된 자전거를 세워두고 신발끈으로 핸들에 운동화를 묶어두었다. 윗옷을 벗어 안장에 걸쳐두고 고민 없이 바다에 걸어들어갔다. 아직 온전히 해수욕을 즐길 시기는 아니지만 이곳에선 아무런 상관도 하지 않았다. 갈아입을 옷이 없고 상처에 바닷물이 들어가 쓰려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수장당하는 수준의 수영을 마친 케인이 물에서 나온다. 바깥은 더운 바람이 불어 몸에 묻은 물기가 금방 마른다. 소금물에 빡빡하게 젖은 머리를 털면서 생각을 정리한다. 집으로 돌아가서 물건을 정리하고 아버지껜 내일 연락한다. 그리고 일을 하면 조금이나마 괜찮아질 것이다. 그러나 복잡한 건 마찬가지다. 아 씨발! 나도 몰라!

바지에서 물을 짜내고 발에 붙은 모래를 털면 이제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 핸들에 운동화를 묶어둔 채로 맨발로 페달을 밟을 생각인 케인은 혹시 중간에 발목이 부러질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는다. 웃옷은 대충 손으로 쥐고 자전거를 바로 세워 위에 오른다. 발판에 발을 올려두고 이제 정말로 가려고 하면 문득 옆이 신경 쓰인다. 무시할 수 있었지만 케인은 굳이 옆을 본다. 먼 거리다. 모래밭과 바다가 전부 눈에 들어온다. 어디서 본 적 있는 그 사람은 한가운데 서있다.

Crazy

19XX년 6월 19일 오후 1시 정각

마이애미, 플로리다

세탁소 "코랄 런드리“

번호 위로 가로줄을 긋는다. 깎은 지 오래된 연필은 부러진 상태로 몇 달은 방치되어 그을 때마다 줄이 두세 개씩 나온다. 다이너에서 적어 온 전화번호가 흑연으로 완전히 덮인다. 이리하여 구깃구깃한 종이에 쓰인 30개 남짓한 연락처가 모두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

황색지 마약상 123-4567

37-925 전화부스 장기 987-6543

상점가 데이팅 555-1234

184번가(CG) 데이팅 777-8888

다이너(BS) 마약상 867-5309

번호들의 출처는 말 그대로 '모든 곳'이다. 관광지와 버려진 신문의 귀퉁이, 오래된 식당의 화장실과 누군가 은밀하게 주고 간 명함······. 이 건전하지 못한 7자리 숫자는 잘만 보면 언제 어디에나 있다. 주로 데이팅 서비스나 수상한 청소업체 또는 진통제를 홍보하며 스프레이 내지는 악필로 쓰여있는 번호였는데, 아펠리오스는 전국을 여행하며 불건전한 목적의 전화번호를 되는대로 모았다. 그리고 하나도 빠짐없이 전화를 걸었다. 약 60%는 연결되지 않았고 남은 절반은 친구에게 번호가 팔린 청소년이 받았으며 나머지는 아펠리오스의 반응을 보고 먼저 전화를 끊었다.

아펠리오스가 전화부스 앞에서 죽을 치게 된 이유는 다름 아닌 흥미 때문이다. 누군지도 모르는 상대에게 전화를 걸 때의 긴장, 그리고 그 상대가 사나운 말투로 용건을 물을 때의 두려움, 연락 한 통으로 인해 어떤 사건이 발생할지 모른다는 공포, 혹은 그와 비슷한 것···,을 아펠리오스는 기대했다. 예사로운 삶에 완전히 질리지 않으려면 전환점이 될 만한 정서가 불가피했으며 강도는 강하면 강할수록 좋았다. 가장 강력하고 원초적이며 오래된 감정. 그건 바로 공포였다.

아펠리오스는 그러한 이유로 불쾌한 감정을 긁어모았다. 부정확한 기억을 짚어 가장 유사한 행위를 꺼내왔다. 놀이공원의 조잡한 체험 부스나 B급 슬래셔 영화는 도움이 되지 않았고 긁던 것마저 손가락 사이로 다 빠져나갔다. 보다 직접적인 방법을 찾아야 했다. 이를테면 범죄에 연루되는 지극히 현실적인 일이라든지. 인간은 불확실성과 처벌에 공포를 느끼므로 그는 마약이나 인신매매 같은 살벌한 키워드가 적힌 연락처에 아무렇지 않게 손을 댔다. 실제로 연락이 닿은 브로커는 꽤 되었다. 그러나 효과는 없었다. 새벽 시간 낯선 동네의 전화부스에서 어느 부위를 얼마나 원하냐는 물음에 300g짜리 심장을 요구하면서도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가해자도 피해자도 아닌 제삼자의 입장에서는 어떠한 경험도 공유받을 수 없다.

아펠리오스는 죽은 눈으로 드럼 세탁기의 유리문을 쳐다본다. 벗어 넣은 옷들이 쳇바퀴를 타고 천장까지 올랐다가 밑으로 떨어진다. 오래된 기계의 누렇게 변한 몸체가 덜컹거리고 묵직하게 쏟아지고 엎어지는 소리가 난다. 다림질되지 않은 소매를 당기다가 의자에 시체인 양 축 늘어져 기댄다. 머리가 등받이에 닿고 고개는 위로 꺾인다. 세탁기가 빙글빙글 도는 것처럼 천장에 달린 선풍기도 빙글빙글 돈다. 재미없는 도시. 좋아했던 일은 이제 좋아하는 마음이 안 들고 흥미를 위해 시작한 일은 전혀 흥미가 없다.

어젯밤 골목에서 세 시간가량 눈을 붙인 아펠리오스는 오늘 오전에도 바다에 갔다. 갈 생각이 없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도착해 있었다. 바닷물에 담긴 발등을 보면서 그는 자신은 이미 변했는데도 여전히 변하는 중이라 느꼈다. 버스커는 연주를 계획하고 동선을 짜는 능력이 필요했고 아펠리오스도 그것에 능했으나 이전보다 명확히 퇴화했다. 가는 중간 길을 잃어버리거나 같은 장소를 여러 번 돌기도 했으며 연주 도중 코드를 잊기도 하고 가끔은 물건을 두고 떠나기도 했다. 잦은 길거리 생활로 뇌가 망가졌으리란 건 자명하다. 바이크 고장이 잦아질 수록 신체도 기능을 멈추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펠리오스는 쉽게 집에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곳은 분명 마음에 안 들었고 떠나기 아쉽다는 표현도 맞지 않았으나, 꼭 발이 묶인 것처럼 미리 정해둔 날짜를 채우지 않으면 갈 수 없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마지막 여행지를 결정했을 수도 있고 어쩌면 이러한 생활 자체에 중독되었을 수도 있다. 손댈 일이 거의 없는 페이저에는 동생이 보낸 메시지가 쌓였다. 곧 돌아가겠다고 말한 게 3주 전이다. 이것 또한 자해의 일종이라고 누군가는 말했다.

세탁소에 방문하는 사람들은 아펠리오스의 지루한 눈빛을 보고 세탁기에 정말로 세탁물만 들어있는 게 맞는지 확인한다. 시커먼 옷에서 빨간 물이 빠지지는 않는지 제법 궁금할 테다. 칠이 벗겨진 오래된 오토바이는 붉은색 녹이 슬어 지나치는 사람을 뒤 돌아보게 했다. 아펠리오스는 그런 반응에 신경 쓰지 않았다. 의식하지 못했던 것에 가깝다. 상대방 감응을 하나하나 눈치챌 정도로 그는 섬세한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켜지지 않는 라이터의 점화를 계속 시도하면서 문득 생각한다. 결국 같은 감정이라면 겁을 먹는 것보다는 겁을 주는 쪽이 더 재밌지 않겠느냐고. 손에서 스파크가 팍 튀긴다. 불은 붙지 않는다.

조금 전 새로 들어온 젊은 손님은 아펠리오스를 힐끔거리며 그와 정반대에 있는 기계를 이용한다. 어떻게 해서든 그와 접촉하지 않으려는 모습이 세탁기 유리문에 비친다. 어젯밤 무슨 영화를 보고 잤길래 세탁소에 앉아있는 사람을 보고도 쪼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다. 동시에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기계에서는 소음이 난다. 바닥은 청소가 쉽도록 타일이 깔려있고 무인으로 돌아가는 외진 세탁소는 현재 손님이 둘 뿐이다. 건조기는 사람 하나 충분히 들어갈 만큼 크고 즐비한 세탁 도구는 흔적을 지우기 용이하다. 지금이 대낮이라는 점은 유일하게 안심할 구실이 되겠지만 창문에 블라인드가 쳐져 있고 입구와 현저히 가까운 사람은 아펠리오스다. 아펠리오스는 소리 없이 고개를 든다. 상대는 눈치채지 못한다.

그가 자리에서 덜컥 일어나면 의자 다리가 크게 들렸다가 내려오며 큰 소리를 낸다. 뒤편에 있던 불쌍한 그 사람은 기겁하면서 아펠리오스를 본다. 그의 시선이 아펠리오스의 등을 바라볼 때 아펠리오스는 그의 눈을 쳐다본다. 당혹감은 두려움과 긴장을 닮았다. 너무 놀라면 곧장 대처할 수 없는 것인지 당황스러워 하면서도 그 자리에 가만히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희생이다.

아펠리오스가 등이 유려하게 굽은 플라스틱 의자에 손을 가져다 댈 때 단 하나 있는 관중은 처참한 상상을 한다. 하지만 아펠리오스는 가장 중요한 결정 사항을 잊었다. 사람은 몇 대나 때려야 죽는지. 둔기가 있으면 더 빠를 테고 무기를 다양하게 쓴다면 재밌을지. 잘 모르겠다. 어차피 죽을 사람이라면 한대만 맞고도 죽을 거니까. 의자 끌리는 소리가 들린다. 세탁기에 비친 겁먹은 그 사람은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아도 감정이 느껴진다. 삐걱거리는 소음과 뒤섞인 빨래와 싸구려 재질의 유리와 바람 없는 선풍기와 꿉꿉한 냄새 모든 것을 제치고도 여전히 명확하게 남아있다. 아펠리오스는 작게 입을 연다. 소리가 존재하지 않는 탄식. 망령된 생각을 하며 천천히 몸을 돌린다. 두 사람의 눈이 맞닿기 직전이다.

그때 누군가 세탁소 안으로 들어온다. 다소 거칠게 열어젖힌 감이 있는 그 사람은 숨이 고르지 못하다. 정신이 없어 보이는 그는 어색하게 서있던 두 사람과 더 어색하게 눈이 마주친다. 불편한 기색이 맴돌았던 얼굴빛이 변하며 눈이 동그랗게 뜨인다. 안쪽을 한 번 보고 바깥의 간판을 세 번 본다. 오늘 영업 안 하나요? 같은 표정으로 눈을 끔뻑이며 두 사람을 번갈아 대답을 청한다. 결국 아무도 대답해 주지 않자 쭈뼛거리며 안으로 들어온다. 옷가지를 끌어안고 아펠리오스를 지나쳐 끝자리에 홀로 떨어진 세탁기를 사용한다. 두 사람 분의 시선이 작은 뒤통수를 따라간다. 지금 그는 매우 부담스러워하고 있다.

아펠리오스는 의자에서 손을 떼고 밖으로 나간다. 빨래가 끝나려면 아직 40분은 더 남았다. 기계 속으로 동전 굴러떨어지는 소리가 난다. 그는 긴장이 턱 풀린 그 사람이 끝까지 자기를 쳐다봤다는 걸 안다. 무심히 바이크에 오르면서 길게 숨을 내쉰다. 나를 그렇게 볼 이유가 뭐 있나. 어차피 전부 장난인 게 뻔한데. 오토바이가 출발한다. 간신히 묶여있는 짐이 흔들린다. 옷은 도둑맞아도 괜찮다. 무슨 짓을 저지르든 모든 혐의는 도둑에게 돌아갈 것이다.

그날 밤

19XX년 6월 19일 오후 10시 23분

마이애미, 플로리다

???

멀미 때문에 죽겠다. 늘 체감하지만 타지에서 차 없이 돌아다니는 건 정말 미친 짓이다. 이제 버스 냄새만 맡아도 토가 나올 지경이다. 한바탕 쏟아내고 싶은 걸 간신히 참고 이즈리얼은 정류장에서 멀어진다. 축 처진 어깨에 발걸음은 힘이 없고 한 손에는 관광지에서 가져온 너덜너덜한 지도가 들려있다. 인근의 어트랙션이 표시된 지도는 인파가 자주 몰리는 명소를 위주로 소개했고 그중에는 역사적 의미를 담은 곳도 더러 있다. 오늘 안으로 돌아올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마이애미를 벗어나 북쪽으로 올라갔다 온 이즈리얼은 혼자 관광지 6곳을 돌았고 모든 곳에서 쪽박을 쳤다. 가족은 흔적도 없었다.

얼굴이 수척한 이즈리얼은 모텔까지 걸어가며 마이애미에 숙소를 잡은 걸 후회한다. 혼자 감당하기엔 너무 덥고 습하고 짜다. 새로 산 옷은 마음에 안들고 적적하고 재미없다. 정비소에 다니는 그 재수 없는 친구를 찾아가고 싶을 만큼. 장소를 선정하는 데에는 기준이 없고 단지 어머니의 편지에서 마이애미가 언급된 적 있기 때문에 온 것뿐이다. 언급된 지역은 총 열세 곳이었고 이즈리얼은 지금까지 열두 곳을 돌았다. 이곳 여행을 끝내고 돌아가면 이제 갈 곳이 없다. 오로지 혼자 힘으로 해야 한다. 그는 지도를 구겨버린다. 찾을 수 있을 거라는 믿음? 발바닥이 탄다. 목이 타고 눈이 따갑다. 주저앉으면 조금이나마 나을 것 같다.

모텔에 가까워지는 골목을 지나치고 있으면 무언가 얼핏 눈에 띈다. 온통 시커먼 게 거대한 쓰레기봉투 같은데 다시 생각해 보니 이상하다. 이즈리얼은 타인과 엮이는 걸 지독하리만치 귀찮아 하면서도 사회적 인격은 철저히 오지랖을 부려댔기에 그냥 지나쳐도 될 것을 굳이 확인한다. 뒷걸음으로 왔던 길을 돌아가 좁게 난 길에 머리를 집어넣는다. 가로등 빛이 들지 않아 완전히 어둡다.

거기에는 사람이 있다. 팔다리 형체를 확인하고 머리털이 삐쭉 선다. 벽에 기대어 힘없이 고개를 숙이고 앉아있는 사람은 미동이 없다. 자고 있는지 깨어있는지도 분간이 안 간다. 혹시 죽었나? 모르는 시체에 손을 대기는 처음인지라 이즈리얼은 가방끈을 꼭 쥐고 긴장한다. 아는 시체도 없었지만 모르니까 더 문제다.

뻣뻣한 몸짓으로 자세를 낮추고 아래로 고꾸라진 얼굴을 확인한다. 앞머리가 길고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겉보기가 비교적 깔끔하다는 것만 알 수 있다. 적어도 벽돌에 얻어맞거나 이마에 구멍이 뚫리지는 않았다. 위아래로 검은 옷을 입었고 얼마 드러나지 않은 맨살은 창백한데 밤이기 때문에 이마저도 확신할 수 없다. 숨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다. 설마 하는 심정으로 반쯤 장난삼아 시체라고 말했지만, 이즈리얼은 자기가 진짜로 시체를 들여다보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소름이 돋는다. 표정이 알아서 썩는다. 물론 그럴 마음도 없지만 멋대로 손대서는 안 되겠다. 구급차와 경찰 중 누구를 불러야 할까. 이즈리얼이 머릿속으로 공중전화 위치를 더듬으며 자리에서 일어서려 할 때 시체가 별안간 눈을 뜬다. 저쪽은 분명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도 눈이 마주친다.

“엄마야!!!!!!!”

다리가 와르르 무너지며 뒤로 한바퀴 구른 이즈리얼이 반대편 벽에 가서 박는다. 시체는 여전히 그를 보고 있다. 다행히 안 죽은 시체다. 살아있었구나. 동시에 엄청나게 잘못됐다는 느낌이 든다. 자길 보는 눈은 화난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은데 일단 확실한 건 해명할 기회를 주고 있다는 점이다. 만약 본의 아니게 오해를 사서 그걸 풀지 못하면······. 입이 마르고 얼마 없는 침이 겨우 넘어간다. 입을 열면 심장을 뱉을 정도라 입술이 쉽게 열리지 않는다. 시체가 천천히 일어선다. 철퍼덕 앉은 이즈리얼 위로 그림자가 내려와 덩치가 정말 커 보인다.

“어······, 저기, 그게······. 다른 생각이 있었던 건 아니고, 그러니까······.”

시체는 말이 없다. 살아있는데도 말이 없다.

“뭔가 훔치려고 했다던가 그런 건 절대 아니고, 음······, 혹시 죽은 건가 싶어서······.”

시체는 대답이 마음에 안 드는가 보다. 애써 겸연쩍게 웃어보지만 저 표정이 너무 무섭다. 빨간색 눈이 원래 저리도 무섭게 생겼던 건가 싶다. 차라리 말이라도 해주면 좋을 텐데. 일어선 그 상태로 굳어 한참이나 그를 내려다본 시체는 뼈 소리를 내며 손을 움직이더니 마스크를 내린다. 그제야 얼굴을 제대로 확인할 수 있다. 앳된 외모에 멋나는 스타일이 자기 또래 같다.

의외로 마음이 따뜻한 시체는 이즈리얼을 일으켜준다. 생각만큼 나쁜 사람은 아닌 듯하다. 이제 중요한 건 얘가 여기서 뭘 하고 있었느냐는 건데 세상에는 모르는 편이 나은 지식도 있기 때문에 도저히 물어볼 용기가 없다. 그리고 지금껏 용기가 없다고 하지 않은 적 없다.

“여기서 뭐 하고 있어?”

시체는 과묵하다. 표정 변화 없는 명백한 쿨 타입이다. 그는 아주 작은 소리를 내거나 입 모양으로 말했는데 그보다는 주로 손짓을 사용했다. 골목에 버려진 줄 알았던 낡은 오토바이는 그의 것이었다. 짐이나 오토바이 상태를 봐서는 시체도 오랜 여행 중인 듯한데 함께 실린 악기의 존재감을 보니 관광 목적은 아니다······라고 이즈리얼은 추측한다. 방금까지는 맨바닥에 앉아 자고 있었던 거고.

시체는 이름처럼 몸이 마른 사람이다. 와일드한 생활이 취향이 아니라면 한밤중 길바닥에 나앉을 사유가 거의 없을 테다. 혹시 길 잃었어? 시체가 고개를 젓는다. 혹시 돈 뺏겼어? 시체가 고개를 젓는다. 혹시 가출했어? 시체가 고개를 젓는다. 혹시······, 무엇을 더 물어야 할지 모르겠다. 건강해 보이지도 않고 누구랑 싸워서 이길 것 같지도 않다. 야심한 시간에 밖에 혼자 있어서 좋을 게 뭘까. 사실 보이는 것과 다르게 엄청난 사이코패스라든지 이미 사람 스물넷을 묻고 왔을 가능성을 백 퍼센트 배제할 수 없어서 이즈리얼은 제 갈 길을 못 가면서도 묘한 긴장감을 풀지 못한다. 표정으로 경직된 티가 난다. 이게 다 피곤하기 때문이다.

시체는 이즈리얼의 움직임 하나하나 눈을 떼지 않았는데 관찰당하는 느낌이라 싫다. 그러니 시체도 분명 낌새를 눈치챘을 것이다. 이즈리얼이 멍청하게 뒷머리나 긁고 있을 때 오토바이에 탄다. 가까이 오라는 듯이 손짓한다. 믿을 구석이 하나도 없지만 순순히 따른다.

‘타.’

“뭐?”

‘데려다줄게.’

타인의 제안을 거절하는 건 예의 바른 행동이 아니었고 이즈리얼은 예의 바른 완벽한 사람이어야 하므로 그는 둘은 커녕 하나 태우기도 버거워 보이는 바이크에 저항 없이 올라탈 수 있다. 시체의 검은 옷에서는 자기 것과 똑같은 냄새가 난다. 혹시 우리 아까 만났던······, 물어보려는 찰나 시체가 먼저 입을 연다. 어디로 가면 되는지 물어보는 그에게 이즈리얼은 모텔 위치를 알려준다. 얼마 걸리지 않는다. 도중에 오토바이가 터져 죽을 가능성은 현저히 낮다.

그를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모셔다드린 시체는 그대로 돌아가려 한다. 정말로 데려다주는 것만이 목적이었던 걸까. 인사도 없이 가려는 그를 보면서 이즈리얼은 내심 붙잡고 싶다는 기분을 느꼈는데 그 이유를 생각하기 전에 불러세운다.

“너 집이 어디야?”

‘멀어.’

“얼마나?”

‘좀 많이.’

“오늘 잘 데는 있어?”

‘안 자도 돼.’

말문이 턱 막힌다. 대하기 힘든 사람은 숱하게 만났지만 이건 다른 타입의 어려움이다. 어려운 사람은 곁에 두고 싶지 않은 법이고 그게 친분이 없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다. 이즈리얼은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입술을 더듬으며 한참 고민하다가 시체가 완전히 가버리려고 하자 앞뒤 없이 막 던져버린다.

“여기서 자고 가!”

달려가서 오토바이를 멈추고 시체를 끌어내린다. 시체는 단조로운 눈으로 이즈리얼을 쳐다보면서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딱히 거절할 생각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즈리얼은 한 자세 더 굽히며 제발 가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는 것마냥 그의 팔을 당긴다. 모르는 사람은 들이면 안되었고, 우리는 서로를 신뢰할 이유가 단 하나도 없으나······. 전혀 다르지만 어딘가 비슷한 또래는 청소년에게 아주 큰 호기심이 된다. 본 지 한 시간 채 안 된 그에게서 어떤 공통점을 찾았을까. 갈 곳이 없다는 것? 정확하지 않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면 이때의 심리를 단순 일탈 욕구나 외로움이라고 회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이즈리얼은 시체를 2층 방으로 데려가 열쇠를 꽂아 넣으면서 즐거운 척 떠든다. 묻지도 않은 사람에게 하루 종일 무엇을 했는지 술술 불고는 불 켜진 방 안에 가방을 내려놓고 나서야 통성명한다. 아, 내 이름은······.

약 10시간 전

19XX년 6월 19일 오후 12시 8분

마이애미, 플로리다

사우스웨스트 104번지 센트럴하이츠 505호

이즈리얼이라고?

몇 년 전 발행된 마이너 음악 잡지에는 그의 히트곡 ‘You Are My Museum’의 개략적인 설명과 짤막한 인터뷰가 실려있다. 그 시절 촬영한 화보가 함께 첨부되어 있고, 어린 아티스트를 최대한 어른스럽게 보이려는 그때의 트렌드에 맞추었는지 실제 모습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이때만 해도 머리가 노란색이었는데, 얼굴은 크게 바뀌지 않았어도 옛날 잡지에서 지나가듯 마주한 사진 하나로 사람을 기억하기엔 그다지 비중 있게 다루어지지 않았다. 곡 소개가 반 페이지를 차지했고 나머지는 소속사 이야기이며 아티스트의 자리는 구석, 그리고 또 구석의 단 몇 줄이다.

곡이라면 케인도 익히 들어봤을 정도로 화제였다. 시대를 풍미했다고까지는 못하여도 ‘인기가 끝내줬다’ 정도의 서술은 가능할 테다.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수요가 상당했고 하루에 신곡이 수십 개씩 쏟아져 나오는 지금까지도 잊을 만하면 회자될 만큼 상업적으로 성공한 노래다. 무명 가수들은 그의 곡을 심심찮게 커버했으며 음반 가게의 탑 셀러 매대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으니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할까. 그만큼 많은 사랑을 받은 곡이다. 다만 그 노래를 부른 아티스트 이즈리얼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었다.

케인은 머리에 덮은 수건으로 젖은 머리카락을 턴다. 금방 씻고 나와 뺨이 벌겋다. 욕실은 아직 뿌연 수증기가 빠지지 않았고 거울을 닦아낸 손바닥 모양이 남아있다. 잡지 위로 물방울이 떨어지는 것을 무시하면서 흥미 없다는 듯이 한 번에 페이지를 넘겨 덮는다. 약간 황당하기도 하다. 설마 잡지에서나 보던 사람을 현실에서 만날 줄이야. 심지어 그런 식으로. 머리 말리는 것을 미루고 신간을 찾아보았으나 그의 최신 근황을 다룬 호는 없다. 그 이후로 완전히 망해버렸거나 활동을 안 하는 모양이다.

활자에는 존재를 올렸다지만 아마추어 음악 활동을 적잖게 한 케인도 이름은 지금 처음 알았다. 먼지 쌓인 잡지를 발꿈치로 밀어 저 멀리 치워버린 케인은 머리를 마저 털면서 그렇게 대단한 사람도 아니었다,며 속으로 뒷소리한다. 첫인상부터 마음에 안 들었던 이유가 이거였나. 맨바닥에 남은 물기만큼 아쉬움인지 질투인지 모를 마음이 남는다.

머리가 빳빳하게 마르면 곧바로 빨래통이 가득 찬다. 지금 입고 있는 웃옷까지 몽땅 모아 겨우 돌아가는 구식 세탁기에 전부 몰아넣고 아무 버튼이나 누르니 어찌저찌 작동된다. 싱크대에 올려둔 얼마 없는 설거지를 마저 해두고 창문을 열어 환기한다. 주변에 튄 물기를 닦고 바닥을 간단히 청소한 뒤 침대를 정리하고 옷자락이 튀어나온 서랍장 안을 재배치한다. 그가 괜스레 집안일에 집중하는 이유는 오늘 아침 아버지의 편지가 도착했기 때문이다. 한 달 만이다.

아버지는 일정한 주기마다 편지를 보냈다. 가족 외에 손으로 쓴 글을 받을 일 없는 케인에게 매달 18에서 22일 사이는 우편함을 여는 날로 고정되어 있다. 친구 관계와 여러 가지 일로 까맣게 잊고 있었다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누군가 우편함을 여닫은 흔적을 보고는 기분이 어수선해졌다. 각 잡힌 봉투와 단호하지만 정갈한 필체. 굳이 이름을 확인하지 않아도 아버지의 것인 줄 알 수 있다. 단단히 봉인된 편지를 보면서 케인은 마음이 무겁게 내려앉는다. 분명 기분을 전환하려 바다에 들어갔다 나온 것인데 응어리가 털어지기는커녕 더 쌓인 느낌이다.

편지는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서랍에는 아직 읽지 않은 6개월분의 편지가 들어있다. 케인은 이것을 자기에게 관심 없는 아버지에 대한 일종의 반항 표시라고 여겼고, 마지막으로 둘이 어떤 대화를 나눴었는지 조금씩 잊어갔다. 서너 장의 종이 위로 무슨 말을 했을지 미치도록 궁금하지만 케인은 편지를 눈앞에서 치운 이후로 단 한 번도 꺼내보지 않았고 서랍을 자물쇠로 잠갔다. 그리고는 열쇠를 잃어버렸다. 자식은 모르는 아버지의 사랑이 자연스럽게 잊혔다.

서랍을 열 수 없으니 이제 어떻게 처리하면 좋나. 이에 대해서 케인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한다. 지금은 안 그래도 머리가 깨질 지경이다. 이불을 개키고 침대에 앉아 기타를 쳐보던 케인은 침대에 벌렁 누워버린다. 파란 머리 버스커가 연주하던 딥 퍼플의 곡인데 따라 하기 너무 어렵다. 재능과 노력의 한계. 이름도 모르는 사람에게 질투가 난다. 한 수 배우고 싶을 지경이다.

누워있던 케인은 침대 바로 옆 벽면을 쳐다본다. 이름 있는 밴드 로고부터 영화 포스터까지 다양하다. 그 사이에 친구들과 찍은 사진이 색깔 테이프로 붙어있다. 사진 속 그들은 각자 악기를 들거나 위협적인 자세를 취하며 카메라를 향한다. 행색이 깡패 같지만 자기들끼리는 행복해 보인다. 뭐가 좋다고 저랬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이제는 친구가 아닌 애들이다.

케인은 몸담던 밴드에서 나왔다. 정확히 말하면 내쫓겼다. 공격적이고 비협조적이라는 이유였는데 다 거짓말이라는 걸 케인은 안다. 사람은 명백한 이유가 없는 것에 핑계를 붙이기 좋아하니까. 사실 밴드라고 해 봐야 고등학생이 모인 허접한 음악 모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직접 곡을 쓰고 무대에 오르기도 했으나 그저 멋을 위해 음악을 하는 십대 청소년의 스케일을 못 벗어나 동네 사람들이나 아는 수준에 그쳤다. 보수적인 어른에게는 낯선 성향 때문에 누구는 학생이 공부도 안 하고 저러고 있다며 욕을 했다. 케인은 손가락질받아도 좋으니 그렇다 할 실적이 있는 활동을 하고 싶었다. 나머지는 아니었다.

생각해 보면 케인은 자의로 밴드에 들어가지 않았다. 마치 미래를 본 것처럼 모인 사람들 사이즈를 보니 딱 양아치들이 멋이라도 내려고 모인 꼴이었다. 과반수가 모르는 얼굴이었고 안다고 한들 그다지 어울려본 적 없는 애들이었다. 그들은 단순히 케인이 음악을 할 줄 알며, ‘끼워주기에’ 비주얼도 나쁘지 않아 제안한 것이었고 그 의도가 케인에게도 완전히 전달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그들과 함께하길 결정한 것은 어찌 됐든 누군가와 함께 음악을 할 수 있다는 기쁨과 ‘혹시나’ 하는 기대, 그리고 아버지에게 난 이렇게 잘살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구실이었다.

처음 몇 개월은 즐거웠다. 케인이 또래와 어울려 본 몇 안 되는 시간이었다. 심성은 나쁘지 않지만, 과한 머리색과 까칠한 성격 때문에 딱히 사고를 치지 않았어도 ‘아, 머리 염색한 걔…….’ 정도로 평판이 나있던 케인은 처음으로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이들이 생겼다. 함께 음악도 하고 일탈도 하며 담배도 처음 배웠다. 생각보다 어울리는 게 재밌었으며 학교를 빼먹고 라이딩을 할 때도 그는 잘만 하면 저들과 가까워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물론 밴드 활동도 계속하고 싶었다. 그러나 방향성은 금방 충돌했고, 음악에 진심인 케인과 다르게 그들은 단순히 그루피나 끌어모아 한 잠 땡겨보려는 생각만 했다. 그 후부터 케인은 그들과 빠른 속도로 멀어졌으며 처음으로 싸움을 일으켜 처음으로 교무실에 끌려간 것도 그쯤이다. 아버지한테 연락은 안 갔다.

불행하게도, 자의로 들어가지 않았으며 자의로 나오지도 못했다. 밴드에서 나와 유일한 친구인 그들과 연을 끊어버리면 아버지에게 할 말이 없어진다. 당신 없이도 또래와 이렇게나 잘 산다며 뻗대던 과거를 어떻게 청산해야 한단 말인가. 분명 자길 한심하게 생각할 거다. 그러면 이제 아버지는 뭘 보고 날 믿어줄까. 그런 생각을 하며 긴 시간을 보낸 끝에 케인은 밴드에서 쫓겨났다. 그의 빈 자리는 다음 날 바로 다른 사람으로 채워졌고, 그로부터 2주 뒤 그 패거리들은 케인을 찾아와 일방적으로 시비를 걸었다.

아버지 잘 계시지, 언제 나오신대? 어딜 나와? 쟤네 아빠 감옥 가 있잖아, 사람 다섯 죽였다고 했었나. 너무 그러지 마, 가서 이르면 어떡해. 그럼 출소하고 나서 우리도 죽이러 올 걸. 나올 수는 있대? 목소리 좀 줄여 봐. 불쌍한 애잖아. 안 그래도 마음고생 심할 텐데 너네까지 그러면 어떡해? 그래? 근데 뭐 어때?

“어차피 진짜 아빠도 아니잖아.”

확 눈물이 찬다. 훌쩍이는 것 한 번으로 모든 눈물을 삼켜버리고 케인은 벽에 붙은 사진을 손톱으로 긁어 떼어낸다. 종이로 된 가장자리가 구겨지고 밀린다. 떼어낸 자리의 벽지에는 네모난 흔적이 허옇게 자리한다. 남는 틈 없이 도배했던 포스터도 전부 제거한다. 엉망진창으로 치워버리고 전부 반으로 찢어 상자에 넣어버린다. 떼어도 떼어도 끝이 없다. 뾰족한 모서리에 찔려서 손톱 밑이 아프다. 하지만 이걸 그냥 둔다면 정말 미칠 것 같아서 멈추지 않는다. 그러던 중 케인은 낯익은 사진을 보고 손을 멈칫 떤다. 자기 어릴 적 찍은 것들이다. 원래 벽 가운데 붙어있었는데 나이를 먹고 다른 사진을 붙이다 보니 구석으로 밀렸던 것들. 시기는 대략 10년 전쯤이다. 사진 속 자신은 활짝 웃고 있는데 모든 사진이 자기뿐이다. 아버지는 어느 곳에도 모습이 없다. 당연하다. 카메라는 아버지가 들고 있었으니. 거대한 크리스마스트리 앞에 선 아이가 이쪽을 보며 손을 흔든다.

[ 1979. 12. 25 ]

입술이 비뚤어진다. 세상 모든 것이 싫어지는 때이다. 다리에 힘이 빠져 그대로 주저앉고 싶은 것을 겨우 버틴다. 결국 저것들은 떼지 못하고 텅 빈 벽 구석에 계속 남긴다. 폐기용 박스에 반으로 갈라진 종이들이 가득 찬다. 그 위로 아까 보던 잡지와 좋아했던 카세트테이프, 미완성곡이 쓰인 시트를 모두 집어넣는다. 무엇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모든 게 실망스럽고 모두에게 실망했다. 다시는 누군가에게 의존하지 않을 것이다.

3일 후

19XX년 6월 22일 오전 11시 39분

마이애미, 플로리다

모텔 "오버룩"

이즈리얼은 처음으로 늦잠을 잤다. 어제도 그저께도 하루 종일 아무런 수확 없는 헛걸음을 해댔다. 이제 희망은 무슨, 지치기만 해 마음 한구석으로 그냥 잠이나 퍼질러 자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진짜 그렇게 돼 버렸다. 계획된 출발 시간은 아침 9시였는데 벌써 점심이 다 되었다. 이즈리얼은 헐레벌떡 일어나 한산한 방 안을 둘러본다. 옆자리 이부자리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고 짐은 그대로지만 사람 그림자는 한 명분이다. 아펠리오스는 여기 없다.

그는 아침 일찍 사라져 밤에 돌아왔다. 이즈리얼이 이틀 내내 이른 시간이 일어나도 아펠리오스는 이미 나가고 없었다. 처음에는 그가 진짜 하룻밤만 자고 가버린 줄 알았다. 그런데 엊그제 밤, 이즈리얼이 개고생 투어를 마치고 저녁 늦게 모텔로 돌아오니 아펠리오스는 한층 수척해진 얼굴로 잠긴 문 앞에 앉아서 졸고 있었다. 하루 종일 뭘 하고 왔는지 모를 일이다. 그걸 어제도 똑같이 했다. 이상하고 수상한 사람이긴 하지만 저러다가 진짜 죽을 것 같아서 이즈리얼은 나가지 말고 쉬라고 했다. 밥이라도 제대로 먹으면 모르겠지만 딱 봐도 안 그랬다. 죽으면 골치아파지는 건 본인이다.

그런데 지금도 방에 없는 걸 보니 나간 걸까. 옆자리를 만져보니 이불이 차갑게 식었다. 사방이 쥐 죽은 듯 조용하다. 뭐, 며칠 본 감상으로는 훌쩍 떠나도 이상하지 않을 사람이다. 말수도 적고 자기 얘기를 하지 않으니 그럴 만했다. 방을 쓰는 타이밍이 겹치는 단 몇 시간 동안 입을 여는 건 이즈리얼 뿐이었다. 아펠리오스는 작은 목소리로 짧게 반응하거나 손짓으로 의견을 표했다. 이즈리얼은 그게 싫지 않았다. 우글우글 모여서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다른 애들보다 훨씬 나았다. 자기를 모르고 관심 없어 보이는 게 오히려 이즈리얼을 편안하게 했다.

그때 아펠리오스가 방으로 들어온다. 문틈으로 보이는 바깥에 연기가 뿌옇다. 담배라도 피운 모양이다. 아직 이불에서 나오지 않은 이즈리얼의 입꼬리가 살짝 당겨 올라간다.

“그냥 가버린 줄 알았어.”

‘어디로?’

“어디든.”

아펠리오스는 말없이 문을 손짓한다. 이즈리얼은 그 의미를 곧바로 알아챈다.

‘오늘은?’

“아, 오늘은······.”

아펠리오스는 이즈리얼이 내내 뭘 하고 오는지 묻지 않았다. 처음 만난 날 사진을 보여주며 이 사람들을 아느냐고 물었지만 아펠리오스도 모른다고 대답했다. 개인적인 사연에 대한 암시를 준 것은 그걸로 마지막이었다. 그들은 서로 하루에 절반 이상을 통째로 사라져도 궁금해하지 않는다.

“오늘은 안 가려고. 어제 많이 돌아다니기도 했고, 음, 조금 힘들어서? 그리고 여행 좀 즐겨야지.”

‘그래.’

“아, 그래서 말인데 혹시…….”

아펠리오스가 남은 담배를 집어넣다가 이즈리얼을 본다. 이즈리얼은 조급하게 운을 띄워놓고 후회한다. 이건 어떤 종류의 오지랖인가? 아니면 그와 친구라도 되고 싶은 걸까. 오늘로써 계획이 틀어졌으니 시간이 흐르는 게 급격하게 아쉬워진다. 말을 잇지 못하는 그를 아펠리오스는 멈춘 자세 그대로 기다려준다.

“같이 놀러 안 갈래?”

조금 더 멋진 말을 꺼내고 싶었다. 그런데 완전히 망했네. 혀가 꼬여 말끝이 흐려진다.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진다. 아펠리오스는 대답하지도, 고개를 끄덕이지도 않는다.

19XX년 6월 22일 오후 12시 36분

마이애미, 플로리다

다이너 “찰리스”

점심 시간대의 다이너는 저녁만큼 붐비지 않는다. 마이애미에 온 첫날 아펠리오스가 다녀갔던 식당보다 내부가 한결 깔끔하다. 고장난 주유기나 야구팀 유니폼으로 벽을 장식하지도 않았고 갈라진 천장 틈에서 샌 빗물이나 시끄러운 다트판도 없다. 그만큼 시청각을 자극하지 못하니 손님이 거의 없다. 바 테이블에 앉은 사람 둘이 전부다.

광 나는 페인트를 바른 어두운 갈색 테이블에는 손자국이 묻어있다. 바닥과 천장은 깨끗하고 빵 데우는 냄새가 난다. 모서리가 둥근 2인용 테이블은 하얀색과 파란색이 교차하는 가죽이 씌워져 있고, 먼지 냄새가 나는 쿠션이 놓여있다. 분명 사장의 취향에 맞을 고전 명화와 패브릭 포스터가 벽면에 즐비하다. 한창 햇빛이 들어오는 시간을 대비해 창문에는 블라인드를 쳤다. 그 아래 가장 많은 빛줄기를 받는 자리에 투박한 컨테이너에 담긴 소금과 설탕이 있다. 함께 꽂힌 스푼에 달라붙은 하얀색 알갱이가 인상깊다. 조리대에서 덜그럭거리는 소리를 빼면 정말 고요하다. 잔잔한 노랫소리도, 그 흔한 손님들의 말소리도 없다. 이곳은 철저히 각자의 시간이 흘러가는 곳이다.

아펠리오스는 앞장선 이즈리얼을 따라간다. 널널한 자리를 보고 이즈리얼이 뒤를 돌아본다. 어디 앉을래? 사람의 위치와 빈 의자를 번갈아 보다가 아펠리오스가 손짓한다. 입구에서 가장 먼 창가 테이블이다. 먼저 가서 앉는 아펠리오스를 이즈리얼이 꿈뻑 보다가 천천히 뒤따른다. 창문 일부가 끝자리까지 이어지지 못하고 중간에 끊겨, 아펠리오스가 앉은 자리에는 햇빛이 들어오지 않는다. 이즈리얼에게는 블라인드 모양의 얇은 직사각형 빛이 드리운다.

“너무 어둡지 않아?”

‘이게 좋아.’

“건강하려면 햇빛도 자주 봐야 돼.”

걱정어린 목소리에도 아무런 감흥이 없다. 반응하지 않자 이즈리얼은 전혀 개의치 않아하며 화제를 돌린다. 아펠리오스는 거의 보이지 않는 창밖으로 고개를 두며, 블라인드 틈으로 보이는 각진 자동차의 차종을 유추하다가 이즈리얼을 본다. 혼자 웃으며 이야기하다가 설탕 스푼을 뜨며 굳어버린 설탕을 보여주기도 한다. 전부 재밌다는 투다. 아펠리오스는 그저 신기하다. 그가 하는 말과 하는 행동을 전부 지켜본다. 아펠리오스의 흥미는 철저히 실험실의 표본 내지는 동물원의 동물을 보는 것 같은 의도로 시작된다.

“마이애미는 꼭 여름이나 겨울에 오고 싶었거든. 이것도 어쩌면 로망 중에 하나였을지도 몰라. 티비에 나오던 게 너무 좋아 보였거든. ‘마이애미 바이스’ 같은 거.”

‘들어본 적 있어.’

“그치? 근데 여기까지 오려면 품이 꽤 든단 말이야. 학교랑 아르바이트 가려면 시간 빼기도 힘들고. 그래서 벼르고 벼르다가 시험 끝나자마자 날아왔어.”

‘이 근처에 사는 게 아닌가 보네.’

“난 뉴욕에서 왔어. 맨해튼에 있는 어떤 멍청한 고등학교에 다니는···, 거기서는 나 엄청 인기 많다? 아마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면 알 걸?”

개구지게 웃는 이즈리얼을 보며 아펠리오스는 떠올린다. 그의 노래. 음반점에서 본 그의 CD. 어린 시절 뭣 모르고 찍은 화보와 싸그리 망해버린 이후 행적. 황색지에 보도된 폭행 기사와 가십거리가 된 오명들. 그는 사실 이즈리얼을 처음 봤을 때부터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심지어 그의 포스터라면 이미 하나 갖고 있다. 그럼에도 아는 척 하지 않은 이유는, 글쎄, 아마 자기에게 돌아올 이득의 총량 때문이다. 대중의 입맛에 따르면 이즈리얼은 완전히 실패했다. 하지만 ‘실패한 가수’라고 낙인찍힐 만큼의 명성도 얻지 못했다. 기억되는 건 오로지 노래 뿐이었으므로, 자길 아는 사람을 만난다면 당사자에게 좋을 것 하나 없다. 처음에야 감격스럽겠지. 하지만 이후 보도된 기사와 실적을 생각하면 괴로워지기만 한다. 그럼 금방 도망쳐버릴 것이고……. 그러면 아무것도 관찰할 수 없다.

“너도 여행 다니는 거지? 어디서 왔어?”

‘조지아.’

“아니, 그러니까······. 집! 집이 어디야?”

‘많이 멀어.’

“안 알려줄 거야?”

“······.”

남의 고향이 무슨 상관이 있는지 아펠리오스는 이해할 수 없다. 남의 마음에 공감하지 못한다는 건 종종 그를 당혹스럽게 만들었고, 이 당혹감마저 생소하여 아펠리오스는 쉽게 답을 찾지 못한다. ‘어울리는 방법’이란 항상 어렵다.

‘와이오밍.’

“진짜 멀리서 왔네!”

그의 개인적인 한 가지 사실을 알아낸 이즈리얼이 또 신나서 떠든다. 뉴욕과 와이오밍은 지도에서 일직선상에 있다느니, 근데 자기는 지도 따위는 필요 없다느니, 사실 와이오밍은 별로 들어본 적 없다느니······. 저 작은 몸에서 어떻게 저렇게 많은 말이 쏟아져 나오는지. 아펠리오스는 입을 작게 벌리고 묘하게 혼이 빨리는 것처럼 그에게 집중한다. 아펠리오스가 이즈리얼의 양기에 잡아먹힐 때쯤이면 음식이 나온다.

이즈리얼은 딸기와 블루베리, 시럽이 올라간 팬케이크와 소다 한 잔을, 아펠리오스는 아몬드와 건포도가 박힌 머핀과 진한 커피를 시켰다. 나이프로 빵을 자르며 맨해튼에는 이렇게 조용하고 분위기 있는 식당을 찾기 힘들다고, 어딜 가나 사람으로 북적인다며 하소연한다. 그러고는 설탕과 과일에 절인 밀가루를 먹고 행복해졌는지 쌜쭉 웃는다. 배가 전혀 고프지 않았던 아펠리오스는 포크로 머핀의 겉면을 조금 긁어 먹는다. 별맛 나지 않는다. 계란 비린내와 건포도 향만 살짝 난다.

“원래 조금 먹는 편이야?”

‘대체로.’

“너 쓰러질 것 같아.”

‘그런 적 없어.’

“앞으로도 안 그러리란 법 없지!”

‘그러리란 법도 없고.’

아펠리오스의 충격적인 식사량에 이즈리얼이 깜짝 놀란다. 제대로 먹는 것도 아니고 부스러기나 주워먹는 수준이다. 함께 나온 블랙커피의 빛깔은 이즈리얼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색으로, 쓴 내가 시럽 향을 뚫고 전해진다. 이즈리얼은 두려운 눈빛으로 커피잔을 본다. 저런 걸 먹으면 분명 죽는다는 그런 얼굴이다.

아펠리오스는 위에 올라간 건포도를 떼어 먹고 이즈리얼은 비뚤게 자른 팬케이크와 블루베리를 입에 넣는다. 이즈리얼의 작은 입술이 끈적한 시럽으로 번들거린다. 냅킨으로 입을 닦던 그는 문득 아펠리오스를 보고 웃음을 터뜨리며 나이프로 머핀을 가리킨다.

“건포도 맛없지?”

‘맛없어.’

“표정 엄청 웃겨.”

아펠리오스는 자기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모른다. 벽에 가로막혀 유리창에 비추어 볼 수도 없다. 아펠리오스는 내키지 않은 향이 퍼진 입가를 손으로 매만진다. 입꼬리, 미간, 눈가, 전부 그대로인 기분이 들어 의아하게 이즈리얼을 바라본다. 아직도 웃고 있다. 거짓말이었을까.

그가 이건 맛있어, 하며 포크로 딸기를 찍어 가까이 내민다. 딸기의 새붉은 색은 누군가 상상했을 세탁기 안 핏물과 비슷할 테다. 눅진한 설탕물을 뒤집어쓴 번들거리는 딸기는 입에 넣기 주저되게 생겼다. 시럽이 아래로 길게 늘어진다. 테이블 위에 한 방울 떨어지자 아펠리오스는 그제야 딸기를 먹는다. 맛없다. 싸구려 시럽 향이 잔뜩 풍긴다.

이즈리얼은 높은 잔에 가득 담긴 소다를 원샷한다. 탄산이 목을 긁을 텐데도 아무렇지 않게 잘도 마신다. 아펠리오스는 단 몇모금으로 하얀 머그잔에 입술 자국을 남기고 내려둔다. 정신이 번쩍 들기를 기대했으나 여기 커피는 형편없다. 만족스럽게 배를 채운 이즈리얼은 음식에 거의 손대지 않은 아펠리오스를 염려한다. 자기 건강은 자기가 챙겨야 한다며 충고하면서 더 먹을 때까지 지켜보려 한다. 더 먹을 생각이 없는 아펠리오스는 다른 곳으로 가자며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고, 이즈리얼은 얼떨떨해하며 따라 일어선다. 나오는 길 눈을 여기저기 굴리니 그 어디에도 전화번호가 없다. 거미. 거미와 전화번호. 악어와 고무와 오토바이는 언제까지 구를까. 단일메뉴와 영수증, 밋밋한 인테리어와 시끄러운 동행인과…….

“펠.”

이즈리얼이 오토바이 시동을 걸던 아펠리오스를 부른다. 합의되지 않은 애칭이다. 이거 받아, 이즈리얼이 가볍게 뛰어오며 뭔가를 내민다. 사탕 자판기로 뽑은 딱딱하고 동그랗고 거대한 파란색 껌이다.

“이런 건 또 그냥 지나칠 수 없거든.”

단단한 코팅을 쉽게 깨부순 이즈리얼이 즐겁게 껌을 씹는다. 아펠리오스도 입에 넣는다. 껍데기가 부서지고, 속살이 드러나니 인공적인 냄새가 난다. 겉만 번지르르한 전형적인 불량식품이다.

19XX년 6월 22일 오후 13시 3분

마이애미, 플로리다

아케이드 “제네바 캐슬”

마이애미 도심지에는 제네바라는 이름의 일본제 게임을 들여놓은 기묘한 오락실이 있다. 좀 놀아봤다는 중고등학생의 성지였고 어두운 내부는 선명한 보라색 조명이 내리쬔다. 오락기의 테두리에 감긴 파란색 라이트가 눈부시다. 볼륨을 한계까지 올려둔 음악은 골과 바닥을 쿵쿵 울리고 어디에나 빠지지 않는 네온사인이 머리 위로 반짝인다. 어려 보이는 아이들이 저마다 오락기를 붙들고 소리를 지르거나 짜증을 내며 기계를 두들긴다. 뭐 재밌는 것이라도 있는지 한곳에 몰려들어 환호나 욕지거리를 퍼붓기도 한다. 이즈리얼은 이런 분위기가 익숙하지 않은지 잔뜩 위축되어 있지만 애써 아닌 척한다.

아펠리오스는 익숙한듯 이즈리얼을 이끌며 비교적 사람이 적은 안쪽에 자리를 잡는다. 인기 게임은 전부 앞쪽으로 내놓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찌라시가 덕지덕지 붙은 기계 앞에 선 아펠리오스는 동전을 집어넣고 능숙하게 버튼을 조종한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이즈리얼은 그의 게임 실력에 감탄하면서 눈부신 화면으로 시선을 고정한다. 처음 보는 게임이지만 엄청나게 잘하고 있다는 게 눈에 보인다. 아펠리오스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최고점을 따내고 게임이 끝났을 때 이즈리얼은 이미 빨려들듯 화면으로 고개가 기울어져 있다.

“엄청 잘 한다.”

‘너도 해 봐.’

사실 이즈리얼은 오락실이 처음이다. 그가 살던 도시에서 오락실은 진성 긱Geek이나 학교를 잘 빼먹는 양아치가 오는 곳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이즈리얼도 별반 다르지 않게 생각했기 때문에 아펠리오스가 오락실 앞으로 차를 세웠을 땐 정말 공포였다. 최대한 눈 마주치지 않게 시선을 깔면서 아펠리오스의 옷자락이나 잡고 들어오니 이제 팔자에도 없는 게임을 시킨다. 이즈리얼이 살면서 해 본 게임은 친구 (정확히는 ‘아는 애’) 집에서 했던 패미컴 밖에 없다.

아펠리오스가 하던 게임은 너무 어려워 보여서, 이즈리얼은 바로 옆에 놓인 게임기에 동전을 넣는다. 게임 방법도 모르면서 조작을 시작하니 주인공이 움직인다. 그렇게 아펠리오스가 총을 쏘며 랭킹 1위를 강탈하는 동안 이즈리얼은 고릴라가 던진 오크통에 맞아 죽는다.

이즈리얼이 3번을 내리 죽어 모든 라이프를 소모했을 때 아펠리오스는 어느새 옆으로 와서 그걸 다 보고 있다. 아펠리오스 기준으로 웃음을 참으려는 표정에 가깝다.

“…못 피한 게 아니야! 거의 피한 거지.”

‘알았어.’

이건 거의 돈을 기부한 꼴 아닌가. 이즈리얼의 처참한 점수를 보고 아펠리오스는 다른 게임기에 손짓한다. 아무도 안 하는 애들용 게임이다. 자기 수준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의심스러워지면 그는 동전을 넣어버린다. 2인용으로 설정된 게임이 바로 시작된다. 이즈리얼은 당황하며 급히 컨트롤러에 손을 올린다. 그들과 꼭 닮은 1P와 2P 캐릭터가 나와 입으로 거품을 뱉는다.

아펠리오스는 장르에 구애받지 않고 게임을 정말 잘한다. 이즈리얼도 이번 건 꽤 손에 맞는 듯하다. 레몬이나 복숭아 아이템을 먹으면서 아까 점심에 먹은 것과 비슷하다고 깔깔 웃기도 한다. 이즈리얼은 처음으로 죽지 않았고, 그동안 혼자서 2인분 이상을 해낸 아펠리오스는 당당하게 두 사람의 이름을 랭킹에 올린다. 이즈리얼이 손뼉을 친다. 두 사람은 눈치 못 챘지만 안 그래도 아래 있던 케인의 이름이 아예 랭킹에서 사라진다.

다만 아펠리오스는 안전불감증이 있는 것 같다. 원래 오락실에서 멋있어 보이는 격투 게임은 고등학교 최고 학년 내지는 성인 양아치의 차지인 게 불문율이다. 그래서 게임을 하고 싶다면 깡패 짱들을 하나하나 이겨서 실력을 증명해야 하는데, 그들 특징이 덩치가 크고 너무 무섭게 생겨서 어린 학생들은 시도도 못하고 개박살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이즈리얼도 험상궂은 건달이 모인 입구를 지날 때 고개를 못 들었다. 자긴 싸움을 못 하고 아펠리오스도 그래 보인다.

그런데 아펠리오스는 툭 치면 죽을 것 같으면서 자기보다 덩치가 두 세배인 깡패에게 잘만 시비를 건다. 정확히는 아무 말 안했는데 그쪽에서 아펠리오스의 존재만으로 시비가 걸린다. 그냥 근처에 가기만 해도 싫은가 보다. 그의 어떤 점이 성질을 돋웠는지는 몰라도 장내 분위기가 험악해진다. 오락실 내의 모든 사람의 시선이 그 둘에게 향한다. 이즈리얼은 어떻게 손도 못 쓰고 넋이 나간 채로 바라만 본다.

화가 났다면 승부를 내야 하고 오락실에서 승부는 깡패들이 지키던 격투 게임으로 치러진다. 왕좌를 떳떳하게 지키고 있던 일진 삼대장이 아펠리오스를 가로막는다. 아펠리오스는 지금부터 혼자만의 싸움을 해야 한다.

첫 번째 게임은 너무 재미없게 끝났다. 아펠리오스가 무심한 손동작으로 상대를 무참히 발랐다. 순식간에 3세트를 패배한 상대는 너무 놀랐는지 벙쪄서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한다. 게임이 끝나자마자 상대는 자리에서 쫓겨나 다음 상대가 꿰찬다. 그 사람도 2분도 안 되어 3세트 내내 처맞다가 죽는다. 그가 주먹으로 키패드를 꽝 친다. 이건 게임기가 잘못되었다며 자리를 바꾸라는 여론이 생긴다. 흥분한 상대가 애먼 게임기나 때릴 동안 아펠리오스는 이즈리얼에게 은밀하게 오토바이 키를 건넨다.

‘시동 걸 줄 알아?’

“알기야 알지. 그건 왜…?”

‘부탁해.’

아펠리오스는 순순히 자리를 바꿔주면서 이즈리얼을 툭 치고 간다. 마지막 승부가 시작할 즈음이다. 사실 이즈리얼은 마지막 경기를 보고 싶다. 원래 가장 강한 사람은 마지막에 나오는 법이니까. 하지만 아펠리오스가 등을 떠미는 바람에 이즈리얼은 반강제로 오락실을 나와 오토바이 시동을 걸고 얌전히 기다린다. 왜 고분고분 말을 듣고 있는지 의문이 들기도 하면서, 저 안에 더 있어 봤자 좋은 꼴은 못 볼까 싶기도 하다. 그러면서 걱정된다. 모두가 적대감을 드러내는 상황에서 나는 믿을 만한 사람이었던 건가? 어른스러우면서도 낯선 또래에게서 나는 향기가 어렵게 얽힌다. 여기저기 긁힌 오토바이 위에 걸터앉아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고 있으면 오락실 안에서 큰 소리가 난다. 잠시 후 아펠리오스가 뛰어나온다.

“응…?”

‘빨리 타.’

뒤도 안 돌아보고 이즈리얼 곁으로 뛰어온 아펠리오스가 빠르게 자리에 앉으며 이즈리얼을 재촉한다. 어리둥절하며 어영부영 뒤에 올라탄다. 이즈리얼이 그의 옷자락을 쥐기도 전에 빠르게 출발한다. 몸이 뒤로 크게 젖혀 떨어질 뻔한 걸 간신히 버텨 올라온다. 대체 무슨 일인지 물으려니 뒤에서 깡패 셋이 우르르 나와 의자를 던지며 욕을 해댄다. 상당히 상스러운 내용이다. 화가 많이 났나 보다. 의자나 가방 따위가 날아오고 한명은 바로 근처까지 쫓아온다. 그 모습이 엄청 무섭다. 이즈리얼은 간담이 서늘해진다. 옆에 있었으면 아마 뼈도 못 추렸을 것이다.

“뭘 한 거야?”

‘장난 좀 쳤어.’

뭔가 알면 안 되는 일 같다. 하나 확실한 건 앞으로 저 근처에는 발도 들이면 안 된다는 것이다. 두 사람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린다. 아무런 안전 장비 없는 드라이브는 위험하고 살 떨린다. 시원하게 부는 바람에서 흐릿한 바다 냄새가 난다. 피부에 닿는 느낌이 점점 익숙해져 바람에 서가暑氣 더해진다. 질서 있게 움직이는 자동차 사이로 바퀴가 빠져나가는 것이 날래다. 펄럭이는 야자수의 방향대로 이즈리얼의 옷이 휘날리고 뒤통수에 박히던 욕지거리 대신 무게 있는 엔진 소리가 가득하다.

나약한 오토바이가 코너를 아슬아슬하게 돈다. 오토바이가 바닥에 누울 듯 기울어진다. 창문을 연 운전자와 눈이 마주치기도 하고 담배 냄새나 작은 노랫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사고 치고 도망치는 입장인 것을 생각하면 앞으로 어떻게 될지 전혀 모르겠다. 괜히 뒤를 돌아보며 누가 따라오지 않는지 확인한다. 다행히 없다. 선팅이 된 앞 유리로 지루한 표정의 운전자만 보인다. 창밖으로 내민 손에는 짧은 담배가 들려있다. 익히 지어왔던 표정이나 손가락 사이에 껴두었던 궐련……. 마치 제 모습을 보는 듯하여 그 느낌이 익숙하게 다가온다. 눈을 덮던 머리카락이 바람에 모두 뒤집혀 날린다. 이즈리얼은 다시 고개를 돌린다.

차분하고 어른스러운 운전자와는 다르게 운전은 거칠고 미련 없다. 이즈리얼은 아펠리오스의 허리를 끌어안았던 팔에 힘을 푼다. 빠른 속도에 익숙해지니 슬슬 주변 풍경을 둘러 볼 여유가 생긴다. 평소라면 겁 먹었을 테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하늘이 맑고 구름은 느리게 흘러간다. 당혹감이 서렸던 심정이 점점 옅어진다. 이즈리얼은 아펠리오스의 옷을 느슨히 잡고 몸을 뒤로 천천히 눕힌다. 구름 하나 없이 곧바로 내리쬐는 태양 빛에 눈이 시리다. 갓길에 차를 대고 돌로 만든 조형물 옆에서 사진을 찍던 관광객이 엔진소리에 고개를 든다. 뒤로 고꾸라지던 이즈리얼과 눈이 마주치고 저쪽에서 먼저 손을 흔든다. 모르는 사람이다. 이즈리얼도 똑같이 인사한다.

바다에 가까워진다. 정겨운 갈매기 소리와 젖은 옷을 입은 사람들, 부끄러울 만치 노출이 심한 수영복과 트렁크가 열린 캐딜락이 이곳에 발 디딘 사람들의 설렘을 반영한다. 저런 마음으로 여행을 했던 게 언제였을까. 부서지는 파도 소리는 폭풍이 오기 전 하늘이 울렁이는 소리와 닮아서, 이즈리얼은 그 둘의 경계를 확실히 하려 눈을 감았다 뜨기를 반복한다. 뒤를 쫓아오던 이들의 표정을 생각한다. 낯선 환경과 숨이 막히던 긴장감을 떠올린다. 제게 몰리던 시선과 쏟아지는 편지를 기억한다. 그러나, 지금은 모르겠다, 아무것도. 목적지가 정해지지 않은 이 순간마저 미래를 걱정할 필요는 없다.

부정할 이유가 뭐가 있을까. 지금은 확실히 기분이 좋다. 뭐든, 어떻게든 될 것 같다. 웃음이 터져 나온다. 전부 별일 아닌 듯한 기분이 들면서 흥분이 기어 올라온다. 이즈리얼은 아펠리오스에게 바짝 기대며 하얀 치아를 훤히 드러낸다. 이곳은 최악이지만 지금은 최고다. 차체는 쓰레기지만 드라이브는 환상적이다. 천장을 깐 오픈카가 노래를 시원하게 내지른다. 이상하고 수상한 아펠리오스는 멋들어진 검은 옷을 입고 돌아왔다.

I've been looking at the sky
'Cause it's gettin' me high
Forget the hearse 'cause I never die

3일 후

19XX년 6월 25일 오후 14시 24분

마이애미, 플로리다

테리 레인 정비소

케인은 목구멍까지 차오른 욕을 참는다. 진상을 상대하는 건 인내심을 키우긴커녕 인성만 버리는 일이다. 당장이라도 두들겨 패고 싶은 걸 간신히 억누르면서 이미 몇 번이고 했던 말을 다시 천천히 읊는다.

“볼 일 없으면 나가.”

“까칠하게 굴지 마, 같이 놀자는데 왜 그렇게 화가 났어.”

진상의 80% 이상은 변태다. 돈을 더 얹으며 맨몸 세차를 요구하거나 밴드 할 적 만난 그루피가 그를 꼬시려고 찾아오기도 한다. 케인이 자긴 미성년자이며 경찰을 부르면 대부분이 돌아갔으나 미자라는 사실에 더 관심을 두는 이들도 있었다. 케인은 그럴 때마다 본인의 액면가를 진지하게 걱정했다.

“배관이나 고치고 와서 말해.”

“고쳐졌는지 안 고쳐졌는지 궁금하지 않아?”

“어. 너처럼 줄줄 새게 생긴 파이프는 싫더라.”

그러니까 이제 꺼져! 케인이 주먹을 드니 상대는 좋아한다. 폭력이 취향인 변태는 케인이 상대할 수 있는 부류가 아니다. 환장한다. 가끔 변태 중에도 이런 진성 변태가 찾아와 일을 방해하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아저씨는 자리를 비우고 없다. 지금도 집에 일이 생겼다며 정비소 일까지 맡겨놓고 사라졌다. 케인은 부글부글 끓는 속을 도저히 진정시킬 수 없다. 결국 견디지 못한 케인은 신발로 손님을 마구 두들겨 팬다. 알바생이 손님을 패는 일이 세상에 있을 수 있겠냐마는 케인에게 추파를 던지는 변태들을 함께 봐온 사장 아저씨도 이건 눈 감아 줄 만하다.

사실 이건 상대만 좋은 일이다. 욕까지 한껏 퍼부으니 상대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는다. 소름 끼친다. 더 이상 상종하기 싫어 전화기를 드니 그제야 차를 뺀다. 다음에 또 올게! 또 오면 진짜로 죽여버려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세차장을 유유히 빠져나가는 차의 번호판을 씩씩거리며 노려본다. 한 손에는 신발을 들고 한발은 맨발이다. 아직 낫지 않은 발목이 아프다.

차가 멀어지고 더 이상 차 소리가 들리지 않자, 케인은 성질을 추스르며 신발을 신고 머리를 넘기며 정돈한다. 케인이 여기서 일을 하는 건 주인아저씨가 좋아서이지 절대 일이 좋은 게 아니다. 안 그래도 컨디션 난조인데 저런 미친놈까지 상대해야 하는 기구한 처지에 절망하면서, 케인은 중간에 끊겼던 세차장을 이어 정리하려 몸을 돌린다. 그러니 뒤에 난데없이 누가 서있다.

“아 씨, 깜!!!!!……,”

‘…….’

짝이야…. 시원하게 욕을 지르려다가 급속도로 소리가 작아진다. 놀라고 보니 본 적 있는 사람이다. 18일부터 4일 내내 바닷가에서 버스킹하던 그 사람. 계속 같은 장소에 있길래 매일 찾아갔더니, 언젠가부터 갑자기 안 보이길래 떠난 줄 알았는데 여기 멀쩡히 있다. 사람이 너무 당황하면 말이 안 나온다고, 굳어버린 혀로 할 말을 찾지 못하던 케인은 급속도로 부끄러워진다. 언제 온 거지. 아까 그 장면을 다 봤나. 별로 보여주고 싶지 않았는데. 케인이 답답하게 나오자 상대는 잠시 기다리다가 먼저 입을 연다.

‘저기?’

“…아, 그, 그래. 어떤 일로 왔어?”

급히 정신을 차리고 그가 끌고 온 오토바이를 확인한다. 폐기 직전인 상태를 보아 정비가 필요한 듯하다.

“수리하려고? 근데 지금 아저씨 안 계셔.”

'…….‘

“견적이라도 봐줄게.”

남자는 대답이 없다. 알았다는 거 맞나? 케인의 당황스럽던 눈빛이 점차 의심의 눈초리로 바꿔가며 바이크를 점검한다. 심하게 낡았고, 긁히고, 고장나지는 않았지만 거의 박살 나기 직전이다. 심지어 앞면은 둔기로 때린 듯한 손상이 있다. 새로 사는 게 더 싸게 먹히겠다. 이걸 여기까지 가져온 것만으로 경탄스러울 정도다. 아슬아슬하게 실린 짐과 기타는 케인이 바닷가에서 본 그것일 테다. 케인은 그의 연주 실력을 상기하며 침을 꿀꺽 삼킨다. 정비소에 왔다는 건 분명 곧 떠난다는 뜻이다. 이제 어디로 가려는 걸까. 마음이 편치 않지만 그럴 이유도 없으니 케인은 내색하지 않는다.

그러는 동안 남자는 담배를 꺼내 입에 문다. 시커먼 패션과 라이터 대신 성냥을 쓰는 것마저 케인의 낭만을 자극한다. 연기가 가득 풍긴다. 담배는 나가서 피우라고 하고 싶지만 아저씨가 벽에 붙여 둔 ‘금연 금지’ 사인을 생각하면 그럴 수 없다. 제발 좀 고치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아직도 안 고쳤다.

“이거 어디까지 손 볼 거야? 최소 몇 주는 걸려.”

‘상관없어.’

“못 고치는 부분은 통째로 바꿔야 돼. 돈 꽤 많이 들 텐데.”

‘괜찮아.’

“…너 몇 살이야?”

‘너랑 비슷해.’

아니면 너보다 많든지. 담배를 피우는 게 어지간히 마음에 걸렸던 케인이 묻자 남자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다. 뭐야, 진짜. 기타 칠 땐 멀쩡하게 보였는데 이 사람도 사실 이상한 사람이었는지. 그러나 실망스럽지는 않다. 원래 사람은 적당히 이상할 때 끌리는 법이다.

케인을 보며 담배를 쭉 빨던 남자가 나지막이 입을 연다.

‘켄?’

“뭐?”

‘너.’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말의 저의를 잡지 못한 케인이 인상을 확 구긴다.

‘아니야?’

“뭐라는 거야?”

‘네 이름.’

“케인이야.”

‘반은 맞췄네.’

“반도 못 맞췄거든.”

두 글자 중에 하나도 못 맞췄지만 절반은 맞춘 기적을 선보인 남자가 흐린 눈으로 케인을 본다. 연기를 머금은 입술이 휘어지다가 원래대로 돌아온다. 어딘가 이상해진 분위기, 그리고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정체에 케인이 짜증스럽게 추궁한다.

“어떻게 알아?”

‘네 친구가 알려줬어.’

“무슨 친구?”

‘녹색 머리. 키는 작고 시끄러운.’

“아니, 뭐라고? 걔 내 친구 아니야.”

‘걔는 친구라던데.’

케인은 곧장 이즈리얼을 떠올린다. 얼굴 한 번 봤다고 친구란 말인가, 자기를 그렇게 불편하게 했으면서. 또 이 둘은 어떻게 아는 사이인지. 한꺼번에 몰려오는 정보량이 너무 많으면서도 적다.

‘난 이제 집으로 갈 거야.’

“그래서?”

‘여기서 멀어. 많이.’

“그걸 왜 나한테 말해?”

‘네가 날 따라다녔으니까.’

연기가 빠르게 퍼진다. 케인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간 뿌연 기체가 맵다. 손을 휘저으며 연기를 쫓던 케인은 심장이 덜컥 떨어진다. 케인은 그 말 뜻을 이해한다. ‘따라다녔다’는 말. 매일 남자의 버스킹을 보러 가고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 끝끝내 눈이 마주친 뒤에야 도망치듯 떠난 것을 의미한다. 그래도 사람이 많았으니 모를 줄 알았는데 다 알고 있었나 보다. 부끄러워 죽을 것 같다. 케인은 얼굴로 몰리는 피를 무시하지 못한다. 그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남자는 가방에서 돈다발을 꺼내 건넨다.

“이건 또 뭔데.”

‘수리비.’

“……합법적으로 번 돈 맞아?”

‘관중이 돈 던지는 걸 4일 내내 봤잖아.’

“그 얘기는 그만 해!”

케인이 역정을 내니 남자는 그새 짧아진 담배를 비벼 끈다. 그리고 케인의 격한 감정을 하나하나 주시하며 마치 은밀한 거래라도 할 듯 눈을 게슴츠레 뜬다.

‘떠나지 않을 방법이 있어.’

“뭐라고?”

‘네 집에서 살게 해줘.’

“야, 기다려. 뭐?”

‘오토바이가 수리될 때까지.’

“잠깐 내 말 좀,”

‘대가는 있어. 너도 아쉽지 않겠지.’

정신이 아찔하다. 이건 말이 통하는 사람이 아니다. 차라리 아까 변태처럼 물리력으로 쫓아낼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런 부류마저 아니다. 차원이 다른 미친놈, 그리고 자기가 본인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다 꿰고 있다. 케인은 본인이 도망치고 싶은 기분이 든다. 그의 입에서 나온 대가라는 마지막 문장마저 정확히 자신의 심정을 저격한 것이라 케인은 자리에서 얼어붙는다.

네 집에서 살게 해줘.

오토바이가 수리될 때까지.

대가는 있어. 너도 아쉽지 않겠지.

따라다닌 거 모른 척해줄게.

그리고, 기타 가르쳐줄게.

어때.

하루 전

19XX년 6월 24일 오후 22시 51분

마이애미, 플로리다

모텔 “오버룩”

이즈리얼과 아펠리오스는 침대에 가로로 누워있다. 이미 친해진 사이처럼 가까이 붙어서 두 눈을 특징 없는 천장에 둔다. 1인용 침대는 폭이 좁고 아펠리오스가 방바닥에 발이 닿는 동안 이즈리얼은 발바닥이 대롱대롱 떠 있다. 그는 허공에 가볍게 발길질하며 아직도 할 말이 남았는지 재잘재잘 떠들다가, 손가락으로 천장 한구석을 가리킨다.

“거미다.”

거기엔 조그만 거미가 있다. 다리가 얇고 발이 빠른 새끼다. 거미줄도 없이 광활한 천장을 돌아다니며 집 지을 곳을 찾는다. 아니면 숨을 곳을 찾고 있는 건지. 두 사람은 거미가 싫지 않다. 이즈리얼은 새끼 한정으로 귀엽다는 이유로 거미를 좋아했고 아펠리오스는 눌러 죽이려고 하면 잽싸게 빠져나간다는 점이 퍽 마음에 들었다. 저 높이까지는 손이 닿지 않으니 직접 확인해 볼 방법은 없으니 그저 그대로 누워있는다. 거미. 이 방은 살 만한 곳인가?

거미가 전등 안으로 들어간다. 불을 켜면 보이는 벌레 사체처럼 이제 밤이 되어야만 그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아펠리오스가 한곳으로 쏟았던 흥미는 빠르게 식고 금방 지루해진다. 이즈리얼은 거미는 벌써 잊었는지 또 다른 이야기를 꺼낸다. 주로 요즘 유행하는… 으로 운을 띄웠는데 모르는 것 없이 전부 꿰고 있긴 하지만 본인은 썩 즐기는 느낌이 아니다. 마치 말을 붙이기 위해 단순히 좋아하는 척 하는 것 같다. 남을 쉬이 이해해 주지 않는 아펠리오스는 그 부분에 대해서는 굳이 지적하지 않는다.

“너 기타 쳐? 며칠이나 같이 있었는데 한 번도 못 봤네.”

‘조금은.’

“저번에도 낮 동안 버스킹하다 온 거지? 전국에서 그렇게 하는 거야?”

‘대충 비슷해.’

“그럼 뉴욕에도 온 적 있겠네!”

‘아주 오래전에.’

“길에서 기타 치는 사람 가끔 봤는데 그거 너였을 수도 있겠다.”

이즈리얼은 추억하듯 말한다. 세상에는 재능있는 사람이 많고 들었던 곡 중 어떤 게 특히 좋았다며 아펠리오스에게 설명하는데, 이즈리얼이 나열한 곡 중 아펠리오스가 연주했던 곡은 단 하나도 없다.

“음악 하는 거 재밌어?”

‘잘 모르겠어.’

“나도 예전에 음악 한 적 있거든. 그냥 노래만 불렀지만.”

‘재밌었어?’

“음, 글쎄……. 사실, 재미없었어. 전부 망했거든. 그나마 잘 된 게 하나 있었는데….”

‘다들 그래.’

“그렇지, 그런 사람 많겠지. 아는 사람도 없고, 괜히 얼굴 비췄다가 이상한 소문이나 나고…….”

손바닥으로 눈을 덮는다. 눈이 부실 정도의 빛이 아닌데도 이즈리얼은 한참이나 그러고 있는다.

“그래서 그만뒀어.”

‘완전히?’

“글쎄…. 다시 하고 싶어진 적이 몇 번 있긴 했는데, 자신이 없더라.”

‘무슨 자신?’

“그러니까, 나보다 뛰어난 사람이 너무 많더라고! 이미 천재들이 널리고 널렸는데, 나 같은 건 굳이 없어도 되지 않을까 싶어서.”

그건 이즈리얼이 처음 내뱉은 자기비하다. 아펠리오스는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는다. 나도 저렇게 생각한 적이 있었나?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아티스트로서 살아온 그 누군들 저런 생각을 품지 않을까. 아펠리오스는 똑같이 손으로 눈을 가려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손을 치웠더니 빛이 강하게 비추어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이즈리얼은 자신의 발언으로 분위기가 무거워진 것을 눈치채고 어색하게 웃는다.

“아니, 그래도, 음. 나 노래는 꽤 했는데.”

‘제목이?’

“창피해서 말 안 해줄래.”

아펠리오스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다. 모른 척하기로 한 건 잘못된 선택이 아니다. 어슴푸레한 미소를 지은 이즈리얼은 고개를 사선으로 하여 아펠리오스를 보며 잠깐 말이 없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외롭지 않아?”

‘뭐가?’

“혼자 여행하는 거.”

‘혼자가 편해.’

“가족이나 친구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 없어?”

‘동생이랑 연락해서 괜찮아.’

“동생이 있구나.”

불안정한 청소년에게 가족과 친구의 존재는 얼마나 큰 의미인지, 아펠리오스는 이해할 수 없겠다고, 이즈리얼을 생각한다. 말끝에서 풀이 죽어버린다. 아펠리오스는 감정의 변동을 느끼고 드물게 먼저 질문한다.

‘넌 그렇게 생각해?’

“그럼, 난 혼자 있는 거 싫거든. 그때 널 붙잡은 것도 사실 나 때문인지도 몰라.”

‘뭐든 관계없잖아.’

“그래도,”

‘뉴욕에 친구 없어?’

“아으, 난 걔들 친구라고 생각 안 해.”

먹먹한 목소리다. 그럼에도 둘은 서로의 사연을 묻지 않는다. 언젠가 스스로, 본인 입에서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할 테다. 이즈리얼은 어쩐지 눈물이 나올 것 같아 눈을 빠르게 깜빡인다. 시린 빛에 물기가 빠르게 마른다. 늘 떠나고 싶다고 생각했고 떠나기 싫은 적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는 아쉬운 마음을 애써 감추면서 낮게 가라앉은 투로 말한다.

“펠, 있잖아.”

‘응.’

“내 내일 돌아가야 해.”

‘그래.’

“아니, ‘그래’가 아니지! 너 잘 곳도 없잖아.”

‘응.’

“모아둔 돈은 있고?”

‘어느 정도.’

“여기 얼마나 더 있을 생각인데?”

거미는 눈과 다리가 8개나 있으면서 스스로 집을 지어야만 살 수 있다. 조금 더 복잡한 형체를 가지고 있는데도 징그럽다는 이유만으로 벌레로 오인당하기도 하고. 거미에게 별다른 유감은 없지만 아펠리오스는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기분이 좋지 않다. 그 또한 몸을 숨기고 잠들 곳을 찾으려 6개나 부족한 다리와 눈을 움직였던 경험이 있으므로, 이즈리얼과 똑같이 내일부로 떠날 생각이었던 아펠리오스는 죄책감도 없이 거짓말을 하고는 한다.

‘한 달 정도 더.’

곧이곧대로 믿은 이즈리얼은 큰 고민에 빠진다. 지금까지 봐온 모습을 보면 스스로 방을 구해서 들어갈 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10대에게 한 달씩이나 장기 투숙할 돈이 어디 있겠는가. 다시 만나게 된다면 한밤중에 객사했다는 뉴스 기사로 만날 게 분명하다. 사실 자기 일도 바쁜데 남의 앞일까지 신경 쓸 여유는 없지만 이즈리얼은 굳이 수고를 들였다. 도움을 줄 만한 사람이 떠오른 이유가 한몫한다.

“혹시 말이야, 갈 곳이 없으면…….”

‘…….’

“근처에 내 친구가 살거든. 걔한테 한번 가 봐.”

‘친구?’

“인상은 좀 더러워도 애가 착해. 걔도 음악 좀 하게 생겼더라!”

이즈리얼은 간단한 약도를 그려준다. 해안도로로 들어가기 전 길목에 있는 한 정비소다. 거기에 케인이라는 애가 일하는데 머리색이 번쩍이니 쉽게 알아볼 수 있을 거란다.

“저번에 만났을 때 바빠서 얘기 제대로 못 했어. 만나면 꼭 안부 전해주고.”

아펠리오스는 고개를 끄덕인다. 이즈리얼과의 관계를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지, 그리고 친구가 소개해 준 친구는 어떤 의미인지 답을 구할 수 없다. 생소하다. 알게 된 지 고작 며칠 만에 이 정도의 호의를 베푸는 이 사람도. 또, 처음 만난 사람한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그 사람도.

마지막이라는 걸 실감했는지 이즈리얼은 밤새 말을 걸며 떠든다. 아펠리오스도 유난히 잠이 오지 않아 끝까지 눈을 감지 않았고, 동이 틀 새벽이 다 되어서야 꾸벅꾸벅 조는 이즈리얼을 제대로 눕힌 뒤에야 짧게 눈을 붙인다.

19XX년 6월 25일 오전 9시 30분

두 사람은 25일 아침 헤어진다. 이즈리얼은 비행기를 타기 전 마지막으로 들릴 곳이 있다며 오전부터 빠른 준비를 마쳤고, 모텔을 나와 방향이 갈릴 때까지 전화번호나 연락할 수단을 물어보며 질척거린다. 펠, 사진 한 장만 찍으면 안 될까? 아펠리오스는 거절하지 않았고 그의 사진만 찍으려는 이즈리얼을 강제로 끌어와 함께 폴라로이드를 찍는다. 자기까지 나올 생각은 없었던 이즈리얼은 쭉 뻗은 팔을 떨면서 간신히 셔터를 누른다. 동그란 카메라 렌즈가 두 사람을 보다가 찰칵, 시원한 소리를 낸다.

사진은 두 장을 찍어 나누어 갖는다. 이즈리얼은 사진 뒷면에 집 전화와 페이저 번호를 적고 하단에 사인까지 해준다. 사진에 나온 미소와 똑같은 표정을 지으면서 아펠리오스에게 건넨다. 비슷한 걸 요구하는지 펜을 내밀기에 아펠리오스도 같은 것을 적어준다. 사인을 적어 내리는 손짓이 막힘없다.

폴짝폴짝 뛰며 멀어지는 이즈리얼은 뒤로 걸으며 양손을 흔든다. 안녕 펠! 또 보자! 연락해! 사람과 부딪힐 뻔하고 발이 걸려 넘어지기 직전이어도 앞을 보지 않던 이즈리얼의 모습이 점점 작아진다. 전봇대와 모퉁이에 가려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어서야 아펠리오스는 정면을 보던 시선을 바닥에 둔다. 기가 빨린 기분. 엄청 시끄럽다가 의식될 만큼 조용해진다. 친구는 힘들고 귀찮고 시끄럽지만 의외로 재밌을지도 모른다. 방금 떠나간 이즈리얼의 모습이 아른거린다. 그리고 저를 보던 케인의 모습도.

아펠리오스는 구석에 굴러다니던 벽돌을 주워 온다. 벽돌의 억센 표면과 흙먼지에 손바닥이 긁힌다. 끄트머리를 양손으로 단단히 쥐고 오토바이 가까이 서서 생각한다. 친구는 새로운 자극이 될까? 벽돌로 오토바이를 강하게 내리친다. 차체가 긁히고 찌그러진다. 다시는 탈 수 없다고 해도 상관없을 것 같다. 아펠리오스는 만족할 모양이 되고 나서야 벽돌을 내던지며 손을 턴다. 바닥에 떨어진 벽돌은 두 동강 난다. 손바닥에 남은 기다란 상처처럼 저 단단한 진흙도 한동안 치워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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