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날

발신자 불명 by 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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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시간이 제법 흐른 뒤에도 내가 당신의 뒷모습을 알아볼 수 있을까, 하는

그런 생각.

그리고 그런 생각의 끝에 답은 늘 그럴 것이다, 라고 단언했었다. 나는 늘 당신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으니까. 물론 진짜 만날 거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냥 다들 그리는 지나간 인연과의 우연한 만남, 그런 걸 나도 상상했던 것뿐이었다.

주중엔 야근, 주말엔 추가 근무. 바쁜 일상에 단비 같은 연차를 내고 밀린 살림을 하던 날. 멈춘 지 오래된 시계를 들고, 꽤 멀지만 당신과 만나던 때 자주 가던 수리점을 찾았다. 봄이라곤 하나 산들거리는 풀내음 하나 없이 버석한 먼지를 들이마시며 흔들리는 차창에 지끈대는 머리를 기대고 제법 오래 버스를 타고 가는 길. 지난 시간을 보여 주기라도 하는 듯 길가의 간판이 꽤 여럿 바뀐 게 보였다. 빠르게 지나는 풍경이 피곤해 눈을 감았다. 그날은 당신이 퍽 자주 머릿속을 헤집고 있었다. 내가 오랜 추억 속의 길을 걷고 있어서라고 이유를 붙였다. 그러고 나니 당신이 사그라들었다.

흔들림에 맞춰 까무룩 졸고 나니 예의 습관처럼 내릴 곳을 또 놓칠 뻔했다. 급히 하차벨을 누르고 무릎께 올려둔 큼지막한 가방을 한쪽 어깨에 둘러맸다. 손을 급히 움직여 흐트러진 머리칼을 대충 귀 뒤로 꽂아 넘기곤 버스에서 내렸다. 뒤를 이어 정차하는 버스들의 커다란 배기음에 낯을 잠시 찌푸리며 묶었던 머리를 풀어 정리했다. 조금 늘어진 검정고무줄 두어 개가 팔찌인 듯 걸음에 따라 흔들리는 손목에 감겨 흘러내렸다.

큰 길을 지나, 작은 골목으로 들어서고. 좀 더 으슥한 길로 들어가 몇 분은 더 걷고 나서야 동네 한 귀퉁이에 있는 오래된 수리점이 나타났다. 당신 시계의 건전지는 내가 늘 이곳에서 갈아줬었는데, 어느 날 함께 오더니 걸어온 길을 보고 위험한 거 같다 했던 길. 워낙에 한적한 동네라 별다른 사건사고가 없는 곳임에도 잔걱정에 이어지는 말이 좋았었다. 바쁜 일상의 우리가 나란히 걷던 몇 안 되는 날들이라서 그랬을까. 당신은 일로 바빴었고, 이후에는 꿈을 좇았다. 그러는 동안 나는 꿈을 좇는 당신을 따라갔다. 당신의 뒤를 보며 그 길의 끝에는 당신과 내가 나란히 있겠지, 하는 상상을 했었다. 앞을 보고 있다는 점은 우리의 닮은 꼴이었으니까. 그래서 나는 당신을 잘 알고 있다고 자신해 버렸는지 모르겠다.

열심히, 또는 성실함으로 당신과 매일을 보내며 나는 내 나름 이해한 당신의 감정에 이름을 붙이곤 했다. 그게 나의 방식이었다. 내가 바라본, 그래서 잘 알고 있다 생각한 당신이라 그래도 된다고 착각했었다. 마주 본 당신 눈빛이 어땠는지 제대로 느껴본 적도 없으면서. 그래, 이렇게 자꾸만 당신 생각이 꼬리를 무는 그런 날이었다. 가게 입구에 다다르자 잘 닦인 통유리 너머로 보인 남자의 뒷모습이 어찌나 당신과 닮았던지.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춰서 버렸다. 심장이 너무 세차게 뛰어서 온몸에서 진동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다시금 지끈대는 머리에 눈을 꽉 감았다 뜨고 보니,

당신이더라.

여전히 바쁜지, 아님 나이 탓인지 살이 좀 내린 모습이었지만 알아볼 수밖에 없었어. 손때가 타 반질거리는 오래된 의자도, 등받이도 없는 야트막한 의자에 앉아 팔꿈치를 무릎에 대고 조금은 구부정하게 앉아 수리하는 걸 지켜보는 모습도 어찌나 그날과 닮았던지. 나도 모르게 숨어서 지켜보고 말았지 뭐야. 그마저도 당신이 금방 일어날 것 같아 곧 끝났지만 말이야. 차마 가게에 들어가진 못하겠더라고.

집중하면 이를 악무는 습관도 그 때문에 도드라지던 교근도 여전하던데. 당신, 내가 선물한 시계도 여전히 쓰고 있니? 그 시계 선물할 때 내가 얼마나 많이 고민하고 골랐는지 당신은 지금도 모르겠지. 값나가는 유명하고 좋다던 시계들은 다 금속 줄에 근사하게 생겼던데 그런 걸 사줄 형편은 못돼서 얼마나 아쉬웠나 몰라. 그나마 내 형편에 고를 수 있는 시계들을 몇 개 놓고 보니 그저 그래 보이던 가죽 시곗줄, 그래도 더 예쁜 걸 고르고 싶어서 당신 피부 톤이며 가진 옷 색도 고민해 봤지만 결국엔 또 어디나 쓰기 무난한 검은색. 그때 내가 고를 수 있던 것들은 늘 그랬어. 그리고 그게 우리를 갉아먹는 것 같았지.

그런 일이 몇 번 반복되고 나니 애정도 짐이 되었어. 내 일상도 다분히 고단했던 터라 그저 견디고 있었지. 언젠가 내가 이별을 말하길. 왜인지 모르지만 나, 당신이 먼저 끝을 말하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우리 이별의 끝은 내가 말하겠구나, 알게 된 때가 있었어. 그날이 당신 합격 소식을 들은 날이었던 건 지금도 유감이야. 그런데 더이상 내가 당신을 인내할 수 없었어. 아니… 어쩌면 당신에게 있던 나의 책임이, 거기까지였던 것 같아. 경찰 출신, 뒷배도 돈도 없는데 부러질지언정 휘는 법은 모르는 성격하며, 근데 또 욕심은 있고. 대한민국은 검찰공화국이라는데 그래서야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끈 떨어진 연 신세일 거 같잖아. 그래서 결혼 장사로 뒷배라도 만들어라 하는 마음에 아무 설명도 없이 헤어지자 했는데… 당신, 내가 헤어지자고 할 거 알고 있었어? 이유도 묻지 않고. 그저 가만히 날 바라보던 눈이 어떤 마음이었는지 나는 아직도 몰라. 나는 늘 당신을 좇기만 해서, 그래서 당신과 눈을 맞춘지 오래라 그 마음에 뭐라고 이름을 붙여야 할지 알 수가 없었어.

이렇게 많은 시간이 지나고도 당신이 내 머릿속을 헤집는 이유를 몰라서 내 마음에도 뭐라 이름을 붙이지 못했거든. 그런데 당신을 보고 나니 알았어. 그리움, 애틋함, 아쉬움… 그런 것들을 한 데 모아보니 이건,

미련이더라.

보고 싶었어, 하명진.

로얄로더, 하명진_2.5D_@prxsecu 님의 흔적을 일부 차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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