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취

발신자 불명 by 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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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 없이 연락이 끊기는 일은 드물었지만, 간혹 당신이 많이 힘들던 그런 날에는 날 꼭 기다리게 하는 때가 있었다. 당신이 어떤 결심을 했던 그 시기 즈음에는 더더욱. 지친 마음을 안주 삼아 술 한 잔과 삼키고, 그렇게 마시다 보면 술이 술을 먹고 결국엔 당신도 흠뻑 적시던 때. 밤은 깊어만 가는데 일어나지를 못하는 건지, 아니면 자리를 옮겨서 또 한 잔 넘기고 있는 건지. 드문드문 이어지던 연락도 아예 끊긴 다음에는 도무지 집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날이 제법 차가워진 초겨울, 옷깃을 여미고 나와 올려다 본 어둑한 하늘에는 진눈깨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여기저기 비추는 가로등 불빛에 날이 궂은 깊은 밤임에도 걷기에 나쁘진 않았다. 이런 으슥한 시간에도 배짱 좋게 오갈 만큼 당신과 나의 집은 지척에 자리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도착한 당신의 집. 자연스레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간 집은 온기도 없이 어두웠다. 기척에 반짝, 켜진 현관의 불빛을 길잡이 삼아 얕게 한숨을 쉬곤 거실 등을 켰다. 주방이 붙은 자그마한 거실, 집에서 밥해 먹는 기색은 없어 보이던 냉장고를 열어 보았다. 역시나 별거 없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 밖으로 나섰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편의점에서 콩나물을 한 봉지 샀다. 마트에서 보다 두세배는 주고 샀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 시간에 해장거리 마련한 게 어디랴.

외투를 벗어 한 켠에 걸어두고 마치 제 집인 양 이것저것 살뜰히도 꺼내어 맑은 콩나물국을 끓여두었다. 한소끔 포옥 끓여 콩 비린내가 날아간 다음에야 뚜껑을 덮어두고, 침대에 걸터앉아 당신이 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당신이 오지 않았다는 불안함에 깊이 잠들지는 못하면서도 워낙 잠이 많아 금방 눈꺼풀이 닫히고 말았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이 애써 몰려오는 수마를 못 이겼구나, 싶을 때.

띡, 띡, 띡, …

천천히 도어록을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화들짝 놀라 일으킨 몸이 제대로 말을 듣진 않았다. 눈을 부비며 비척대는 걸음과 달리 내 목소리만큼은 서운한 기색이 역력한 선연한 목소리였다.

- 하명진.

잔뜩 수그리고 비틀대며 들어온 당신이 소리가 난 쪽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이렇게나 취했으면서도 남들한테 내색하지는 않았겠지. 내가 있단 걸 알아채고 나니 얼굴이 허옇게 질렸으면서도 어떻게든 초점을 맞추고, 바로 서려는 듯이 눈에 잔뜩 힘을 주고 있었다. 깊이 꺼진 눈두덩이, 벌건 눈가에 아차, 싶던 차 당신이 무너지듯 내게 안겨왔다. 아직 덜 깬 잠에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비틀대며 당신 제복의 등허리를 움키니 단단한 손이 바싹, 허리를 받쳐 안았다. 다른 손으론 그 비좁은 현관의 벽을 딛고 내 무게를 받아 그대로 뒤로 넘어지듯 문을 쓸며 스르륵 문에 기대어 앉았다.

내가 이름 석 자 온전히 부르면 나 잔뜩 성이 났다, 하고 티 내는 모양인 걸 알아서인지 한숨을 푸욱 쉬는 당신이었다.

- 명진아.

한숨에 퍽 짙은 주향이 끼쳤다. 풀 죽은 모습이 못내 마음에 아려 당신의 품에 안긴 채 몇 번이고 이름을 고쳐 불러 주었다.

- 명진아.

- 진아아.

현관 바닥에 주저앉아 있어 제법 살이 시렸을 텐데도 그저 나만 꼬옥 그러안은 채, 그 흐릿한 정신으로도 내 몸 어느 구석도 바닥에 닿지 않게 중간중간 보듬기만 할 뿐이었다. 대답도 않고. 도무지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이는 당신을 또 한 번 불렀다.

- 진아.

뭐가 그리 힘든지 말도 않는 당신 가슴팍을 도닥이며 물었다.

- 오늘은 무슨 일로 이렇게 또 마셨을까, 응? 명진아.

무어라 답하는 듯한데 정작 당신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어딘가 젖은 목소리였나. 어렴풋하게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며 갸웃대길 몇 번. 무언가 다른데, 하고 느꼈으면서도 알은체 하기 싫어 으레 취한 날의 당신과 내 모습인 양 당신을 잘 재우고, 그 밤. 나도 당신 품 안에서 잠이 들었다.

- 명진, …….

까슬한 목의 통증과 그만큼의 거친 파열음에 이질감이 느껴졌다. 낯을 찡그리며 목을 감싸곤 지금의 상황을 머릿속으로 되새겨 보았다.

아, 나 헤어졌지 참.

전날 거하게 마신 술의 독한 향취가 아직도 느껴지는 것 같았다. 입안이 까끌하니, 마신 술 탓에 열이 도는데. 여전히 당신 생각에 아득히 몸이 꺼지는 기분이 들었다.

한동안 헤어졌다는 게 실감 나지 않았다. 다음 날 출근길, 당신에게 연락을 해야 할 것 같고 연락이 올 것도 같았지만 전화기는 울리지 않았다. 마치 매일 쓰고 있던 일기가 통으로 증발한 것만 같은 기분. 쌓였던 시간도 써 내려가던 문구도 그대로 멈춘 채 페이지가 덮이고 그렇게 끝. 펜도, 일기도 어딘가에도 있던 적이 없는 것처럼 홀연히 사라진 기분.

이 막연한 상실감을 어떻게 갈무리 지으면 좋을지 모르겠어서 술기운을 빌려 본 건 그다지 좋지 않은 결과뿐이었다. 빙빙 도는 머릿속 그 안에 맴도는 것도 결국엔 당신. 푹푹 꺼지는 몸과 반대로 쨍하니 울리는 머리도 당신 탓이었다. 뭐가 됐든 당신 때문이라고, 내가 거기 당신을 두고 나왔으면서도 모든 이유는 당신 때문이라고 탓하는 못난 날이었다. 네 생각이 나를 좀먹고 있었다.

있잖아… 내가 탓하는 게 싫거든 제발 내 머릿속에서 나가, 명진아.

골 울린다.

로얄로더, 하명진_2.5D_@prxsecu 님의 흔적을 일부 차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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