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미션 완료

FGO 멀린 커미션

잠깐 by 션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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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빨간 약과 파란 약이 있는데. 빨간 약을 먹으면 진실을 알 수 있고 파란 약을 먹으면 이대로 지낼 수 있어. 뭐 먹을 거야? 그런 옛날 영화처럼 들으면 두 번 다시 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순간이 있다. 둘 중 하나 꼭 골라야 해요? 둘 다 안 먹을래요. 뭘 해도 이미 겪은 건 돌이킬 수 없으니까. 철학적이고 인문학적인 고찰이나 뭐 그런 걸 하려는 건 아니고……. 릴리는 자기가 그런 분기에 또 서있는 듯 해서 생각이 많아졌다.

세상이 끝이 안 보이는 갈림길의 연속이라면 어느 시점부터 여러 갈래로 나뉜 길이 하나로 통합 된다. 칼데아에 들어갈지 말지. 그 사람을 따라갈지 말지. 그 때 손을 뻗을지 말지. 그런 걸로. 다른 길처럼 보이는 게 있어도 외길이라고 확인하게 되는 그런 때가 오는데. 그게 벌써 올 줄은 몰랐다. 왜 벌써 오지?! 좀 느긋하게 있어도 되는데!

특이점에서 만나 힘을 빌려주는 서번트를 좋아하게 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위험할 때 스스럼없이 도와주겠다고 팔을 걷고, 자기 일 맞지만 자기 일처럼 도와주니까. 그런 연이 있어서, 그런 연이 없다고 해도 칼데아 소환에 응해 동료가 되어주는 서번트를 좋아하는 건 더 당연했다. 그래서 릴리는 정말 평등하게 칼데아에 온 서번트를 좋아했고. 특이점에서 만난 서번트를 좋아했다. 누가 더 좋은가, 누가 더 싫은가 구분 없이 그들을 좋아했고 소중히 여겼다. 고르고 평평한 애정을 가지고 나눴다. 마력 리소스가 있으면 골고루 분배하고. 최대한 요망을 듣고. 정말 그랬는데!

나는 네 팬이니까!

떠오른 장면에 릴리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머릿속에서 시끄럽게 경종이 울리고. 그 소리와 진동에 맞춰 심장이 정신없이 뛰기 시작했다. 아니 근데, 그 상황에서 그런 말을 그렇게 말하는 건 좀 그렇지 않나? 좀 그래 역시. 뭐가 좀 그런지, 어떤 게 안 되는지 설명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서. 릴리는 확실하지 않은 언어를 속으로 막 토하고 나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어떤 장소라도 따스한 햇살이 들이닥치고. 향기로운 꽃이 피어나는 이상향에서 지내는 꽃의 마술사. 거기다가 사람을 홀리는 몽마가 릴리가 평소에 세우던 벽을 박살냈다. 단 한 마디로. 꽃이 피어나는 봄의 햇살 답게 부드럽고 사랑스럽고. 겨울에 쌩쌩 불어오는 찬바람 사이에서 처음으로 내려오는 함박눈처럼 반갑고. 예쁘다. 애틋하다. 귀엽다. 온갖 단어를 갖다 붙여도 다 어울리는 표정으로 그런 말을 하다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정말?

두 번 다시 그 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됐다. 그 말을 듣기 전에는 멀린은 평범한 동료고 여태까지와 다를 바 없는 소중한 친구였을텐데. 그 한 마디로 릴리의 세상이 한 번 빙 돌았다. 다시 떠올릴때마다 위력을 잊지 말라고 당부하는 것처럼 릴리의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그 감정에 중심을 잃고 이리저리 흔들리다보면 인정할 수 밖에 없게 된다니까. 그 누구도 아닌 멀린을 좋아한다는 걸!

…좋아하나? 아무리 세상이 어지럽게 돌아도. 사랑에 빠지기 딱 좋은 분위기가 릴리를 감싸도. 릴리는 멀린을 좋아한다는 생각이 들면 정신을 차렸다. 좋아하나? 좋은가? 두 번 다시 돌아갈 수 없을 만큼 나갔지만. 그 모습만 생각하면 온갖 것으로 몸이 반응하긴 하지만…….

좋아하나봐! 좋아해! 맞아 정말 좋아해. 멀린이 좋아. 느낌표도 마침표도 찍지 못하고 꼭 끝에 물음표를 붙여 의문을 만들었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게 맞나? 좋아해도 되나? 의뭉스러운 부분을 꼭 남겨두려고 했다. 왜 이런 귀찮은 태도를 고수하냐고? 욕밖에 나오지 않는 특수한 징크스가 있으니까.

큰마음 먹고 세차하면 비오고. 경기를 보면 꼭 지고. 급할 때만 버스가 안 오고. 고민해서 고른 답은 다 틀리고. 그런 누구에게나 있는 불행이 릴리에게도 있었다. 좋아하게 되면 그 사람과 틀어진다. 의견이 안 맞고 관계가 엇갈리다가 완전히 어긋나는 이상한 징크스가 있었다. 진짜 이상하고 치명적인데 해결할 방법이 보이지 않아 문제였다. 불행을 극복하고 징크스를 완전히 없앨 방법 누가 개발 안 하나?

누가 알고 있었다면 그걸로 책을 쓰거나 특허를 내서 부자가 될 테니. 그런 방법이 나오면 모를 리 없는데. 불행이라는 것이 추상적이고 애매모호한 개념이라 영 소식이 없었다.

불행하지 않기 위해선. 아니 조금만 덜 불행해지긴 위해서 뭘 해야할까? 일단 조심해야겠지? 근데 이 조심이 쉽지가 않았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면……. 식물을 키우면 무조건 죽이는 징크스를 사람이 있다고 치자. 처음에는 아끼고 좋아하는 마음으로 매일 같이 하루 세 번 물을 주다가 뿌리를 썩게 만들었다. 그럼 뿌리가 썩지 않도록 급수 량을 조절하면 되는 거겠지?

이렇게 보면 간단한데. 뿌리가 안 썩게 조심해야지. 다짐하다 보면 줘야 할 물도 못 줘서 식물을 말려죽이게 된다. 말려 죽이지 않으면서 뿌리가 안 썩는 적절한 급수량을 알면 다 해결 되나? 그러면 정말 좋을 텐데. 그 이후로부터 몰랐을 뿐이지 원래는 당연히 챙겨야할 요소들이 나와 족족 식물을 죽이게 된다. 햇빛과 온도 영양제 식물의 습성. 문제 하나 해결하면 하나가 또 새로 생기고. 하나 수습한 줄 알았는데 아무것도 수습이 안 되고. 그 모든 과정을 이겨내고 무사히 식물을 키운다면 징크스를 깨게 되겠지만…. 대부분은 한두 번 시도하고 실패한 자리에서 아, 나랑 안 맞는구나. 나는 이런 징크스가 있구나. 받아들이고 끝이 나니까.

릴리도 그랬다.

인간관계를 퍼즐로 비유하자면 아래 배경 쪽 조각인 줄 알고 한 군데에 다 모아뒀는데. 사실 그 조각은 아래가 아니라 중간 즈음에 있어야하는 조각이라서 맞는 게 하나도 없었다. 옆이 뚫려 있길래. 삐쭉 튀어나온 부분을 가져다 맞추니… 들어가는 줄 알았는데 끝에서 걸렸다. 일정 부분을 맞춰 다른 곳으로 옮기면 어느새 한 조각이 빠져 나가 있고. 다 맞춰 큰 그림을 이룬 줄 알았는데, 분명 상자엔 남은 조각이 없는데 어디 하나 비어있고.

그런 식으로 잘 해보려고 했는데 잘 안 된다. 뭐 해보려고 했는데 어딘가 모자라다. 친한 줄 알았는데 그런 사이가 아니었네. 다양한 경험을 하고 난 뒤로 릴리는 사람을 좋아하는 걸 꺼렸다. 아니 내가 식물 키우면 다 죽으니까 이젠 안 키워. 선을 긋는 그런 꺼림은 아니고. 이번에도 또 그렇게 될까? 혹시 모르잖아. 사람 일은 모르는 거라는데. 괜찮지 않을까? 머뭇거리다가 진짜 이번엔 정말 괜찮지 않을까아…? 나서고 징크스를 확인하고 돌아서 아 역시 안 되는구나. 피하는 그런 꺼림이었다.

그러다보니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물음표를 계속 갖다 붙일 수밖에 없었다. 좋아하나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게 맞을까? 이 감정이 사랑인지 우정인지 모르겠어. 그런 건 아니고 불행을 피하기 위한 일종의 학습이다. 확실하면 되물을 일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 확인하고 싶고 생각하고 싶은 건 받아들이는 방법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사랑은 구분 못할 리가 없다는 걸 제일 잘 알면서도!

계속 아닌 척, 눈 가리고 아웅 하면서 버텼다.

그럴 수밖에 없지. 좋아하니까 엇갈리고 싶지 않아. 오래오래 함께 하고 싶은 걸. 어딘가에서 금이 가 망가지거나 꼬이고 꼬여 자를 수 밖에 없는 인연이 되는 건 싫었다. 당연하잖아 좋아하는 걸.

헉. 징크스를 피하기 위해서 애를 써도 이미 앞지른 감정은 이길 수 없었다. 멀린을 좋아하나봐! 어쩌지?!

아직까지는 칼데아에 멀린이 없지만. 특이점에서 도움을 준 서번트이자 릴리의 팬이다 보니 시간 문제였다. 정말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부름의 응할 생각은 충분히 있으니 어느 날 소환 될지도 모른다. 소환 된 이후에 엇갈리게 되는 걸까? 어떤 식으로 엇갈리게 되는 거지? 왔지만 미안해. 여긴 내가 있을 곳이 아닌 모양이야. 네 길을 축복할게. 잘 있어. 앞으로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응원할게. 웃으면서 가버리는 걸까?

영령은 죽은 영웅이고. 서번트 소환은 죽은 이들을 부르는 일종의 강령술인데. 멀린은 어떤 외부 충격에도 끄덕 없고 누구도 들어갈 수 없는 곳에 유폐 되어 있는 몽마니까. 아직까지 살아있다. 세계가 멸망했으니 나도 죽은 것과 다를바 없지. 그런 논리로 서번트 소환 될 수도 있는데. 본인이 직접 걸어와 칼데아 문을 두드릴 수도 있고. 몽마답게 꿈 속에 찾아와서 잘 지냈냐고 인사할 수도 있어서. 칼데아에 멀린이 없다는 건 그렇게 큰 위로가 되지 못했다.

직접 찾아온 멀린과도 엇갈리게 되는 걸까? 꿈속에서도 뭘 잘못해서 엉망진창으로 일어나게 되는 걸까? 팬이라며 웃어준 멀린을 실망시키기도 싫었고. 좋아하는 사람과 사이가 틀어지는 것도 싫었다. 기껏 찾아와줬는데 그렇게 헤어지는 것도 싫고. 그런 꿈으로 일어나는 것도 싫었다. 어쩌면 좋지? 불행을 해결하는 방법 어디 없나? 행운의 영웅. 축복받은 영웅. 불운이 찾아오지 않는 떨어지지 않는 태양. 그런 이들에게 찾아가볼까?

이렇게 많은 영웅이 있고 온갖 설화가 모여 있으니 불행을 이겨낼 방법 하나 둘 정도 머리를 모으면 나오겠지만. 릴리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방법을 못 찾을까봐? 소득이 없으면 더 절망스러울 테니까? 그것도 있지만. 남한테 이런 징크스가 있는데 징크스를 피하고 싶다. 좋은 방법 없을까? 정말, 정말, 뭐라도 좋으니까. 상담하는 건 좀 그렇지. 그렇게 입 밖으로 꺼내버리면.

멀린을 좋아하는 게 되잖아!

좋아한다고 공인하는 게 되잖아!

속으로 끙끙 앓고 혼잣말로 삼아 떠드는 것도 오랜 시간 겪은 징크스로 힘든데. 남한테 말해서 못 박는 건 정말 심리적인 장벽이 너무 컸다. 정말 어쩌면 좋지? 감정이 하루 아침에 식을 것도 아니고. 세계가 빙빙 돌고 있는데 정말 어떻게 해?

멀린은 몽마. 사람의 탈을 쓰고 있으나 사람이 아닌 것. 이야기꾼과 관찰자적인 면모를 빼면 전부 어딘가에서, 누군가에게 흉내내 써먹고 있을 뿐인 이질적인 것이라는 걸 깨닫고 어,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괜찮지 않으려나? 배우는 게 아니라 흉내낸다고 하다니. 배우는 것과 흉내내는 게 차이가 있나? 완전히 자기것으로 삼는지 아니면 몰라도 따라하는 건지 뭐 그런 차이인가? 그러면, 멀린은 모르는데도 감정이나 행동을 따라하고 있는 거면. 사랑도 애정도 그럴 테니까. 징크스를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게?

그렇지. 그 말대로. 인간의 상식은 몽마인 나에게 통용되지 않거든. 멀린이 꿈 속에서 릴리의 의문에 정답 도장을 찍어 완전히 안심하게 될 때까지. 릴리는 발을 동동 구르면서 이 사랑을 어떻게 할지 고민하게 되었다. 그 날이 언제 오냐고? 글쎄 언젠가 오지 않을까? 멀린은 팬인 릴리를 항상 주시하고 있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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