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fido

2부 3화

첫 오순절

“모처럼 평범한 옷을 입고 돌아다닐 기회였는데 지금 나가면 너무 늦게 돌아오겠지?”

“그러게…. 시장에서 밤에 뭐라도 하면 그걸 핑계로 나갈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네가 머무는 동안엔 오순절 행사에만 집중하느라 다른 행사는 아마 없을 거야.”

아쉬워하던 폰은 신전의 복도를 걸으며 노을이 예쁘다고 감탄했다. 매일 지나치던 복도라 감흥 없이 걷고 있던 카리타스는 폰의 말에 바깥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때, 예쁘지?’라고 말하며 져가는 해를 등진 시도폰이 카리타스와 마주 보았고, 아이러니하게 그런 폰에게 해가 가려졌지만, 카리타스는 어느 때보다 아름다운 노을 햇살을 볼 수 있었다.

복도 기둥 사이로 들어온 얼룩덜룩한 주황빛이 시도폰의 몸 가장자리를 물들이고 그의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갈색 눈은 바닥에 반사된 빛을 받기라도 했는지 금색으로 환하게 빛났다.

“정말 예쁘네, 여태 본 것 중에 제일인 것 같아.”

카리타스가 꼭 자신을 보고 예쁘다고 하는 것 같아 부끄러워진 시도폰은 ‘그, 그치 하늘은 정말 신기하다니까.’라며 고개를 돌렸다. 사실 카리타스의 얼굴도 평소보다 달아올라 있었지만, 노을빛에 절묘하게 가려져 시도폰은 그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복도가 거의 끝나가고 갈림길이 나왔다. 카리타스는 오른쪽, 시도폰은 왼쪽으로 나뉘어야 했는데, 시도폰이 카리타스의 소맷자락을 살짝 잡았다.

“카리타스, 이거 거절해도 되는 부탁이긴 한데, 그래도 들어줬으면 좋겠어.”

“내가 할 수 있는 거면 뭐든 해줄게, 뭔데?”

뜸을 들이는 시도폰에 카리타스는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내가 뭘 해달라고 할 줄 알고 바로 수락하는 거야? 이상한 거 부탁하면 어쩌려고!’라고 저도 모르게 크게 말해버린 시도폰은 ‘이상한 거, 뭐 어떤 거?’라는 대답에 입을 다물었다.

“오늘만 네 방에서 자고 가도 될까? 베론한테 허락 비슷한 건 받았어. 방주인이 허락하면 괜찮다고 하더라고.”

‘내가 방을 치우고 나왔나? 아, 아니야 정리해뒀겠지. 잠옷은 어제 입던 거 말고 가장 깨끗한 거로 달라고 하고, 시도폰 것도 같은 거로…. 괜찮겠지? 이상하게 생각하진 않겠지? 환기는 시켜놓고 나왔으니까 괜찮을 거야.’

“응, 문제없어. 근데 저녁 시간이니까 식당에 들렀다가 가는 게 좋을 것 같아.”

카리타스가 싱긋 웃고는 멈췄던 발걸음을 다시 옮겼고, 그 뒤를 싱글벙글 웃으며 따라가는 시도폰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지나간 복도의 기둥 중 하나에 제 몸을 숨기고 있던 솔라는 찬란했던 시도폰의 표정과 미세하게 떨리던 카리타스의 목소리를 곱씹으며 식당으로 향했다.


“와, 그때는 일꾼으로 와서 짐만 두고 바로 나와야 했는데.”

제가 제안하고도 여전히 부끄러웠는지 시도폰은 카리타스가 문을 여는 동안 계속 종알거렸다. 카리타스가 걱정했던 것과 다르게 방은 완벽한 상태였다. 이부자리도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깨끗한 잠옷도 두 벌이 준비되어 침대 위에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책상엔 처리 중인 서류와 읽고 있던 책들이 각을 맞춰 정리되어 있었고, 그 위의 창문은 손자국 하나 없이 투명했다.

“항상 이렇게 말끔하게 정리해두고 사는 거야?”

“좀 부끄럽지만 이건 내가 한 게 아니라 시종들이 한 거야. 난 이렇게까지 청소를 잘하진 않아.”

칭찬하면 적당히 받아들여도 괜찮은데 카리타스가 굳이 시종들에게 공을 돌리는 모습에 시도폰은 긴장이 풀렸다. 두리번거리던 시도폰이 카리타스의 의자에 앉아, 서랍 속을 구경해보고 싶다며 방주인을 불렀다.

“별로 볼 만한 건 없을 텐데, 자 이것 봐.”

드르륵거리는 소리와 함께 서랍이 열렸다. 그 말대로 황량한 서랍 안엔 노트 한 권과 나무로 된 작은 통 하나만 덜렁 놓여있었다. 자세히 보니 서랍 뒤쪽으로 레이스 같은 것들이 넘어가 있는 게 보였지만, 시도폰은 휑뎅그렁 비어있는 서랍의 상태에 말문이 막혀 지적도 할 수 없었다.

“…노트는 일기장인 것 같은데 이건 뭐야? 열어봐도 돼?”

카리타스는 직접 통을 열어 바싹 마른 적갈색의 꽃을 보여주었다. 그리운 물건에 시도폰이 반색하고 손을 가까이 가져다 대려고 하자, 카리타스가 장난스레 통을 제 등 뒤로 숨겼다.

“안돼, 사람 손 닿으면 상할 테니까 눈으로만 봐줘.”

“그치…. 근데 여전히 보관하고 있어서 신기했어. 꽃이 맘에 들었구나, 다행이다. 네가 받아주긴 했지만 어디서 사 온 꽃도 아니고 들에 있던 걸 꺾어온 거라 맘에 들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거든.”

“…잘 간직하겠다고 말했잖아. 책 사이에 끼워서 말려뒀더니 보관하기 좋게 잘 말랐더라고.”

살짝 눈살을 찌푸린 카리타스가 서랍을 다시 닫았지만 ‘다음번에 남부에 올 때는 꽃을 사서 올까?’ 같은 생각에 잠겨있던 시도폰은 그걸 눈치채지 못하고 책장을 구경했다. 흥미로운 책을 몇 권 뽑아서 이야기를 나누던 두 사람은 자야 할 시간이라고 시종이 알렸을 때가 되어서야 책을 덮을 수 있었다.

“푹신하네, 물론 북부에 마련된 침대도 좋지만 여기 게 훨씬 말랑한 것 같아. 평생 여기서 살까보다.”

“네가 원한다면? 나는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데.”

농담으로 던진 말에 카리타스가 언제나처럼 진지하게 대답하자 시도폰은 이불에 파묻혀있던 얼굴을 쑥 내밀었다.

“그럼 북부는 누가 지켜?”

“헤일로 님이랑 베론 님이 하시겠지. 옛날부터 그랬던 것처럼.”

“좀 있으면 내가 그분들보다 강해질지도 모른다고 하셨는데, 그렇게 내빼면 안 되지! 강한 사람은 약한 사람을 지켜줘야 한다고 했어. 그러려고 힘을 받은 거라고.”

카리타스는 ‘아쉽네, 네가 조금만 약했으면 같이 지낼 수 있었을 텐데. 적당히 강해지지 그랬어.’라며 시도폰의 옆자리에 나란히 누웠다. 천장 등이 꺼지고 탁상 위의 촛불만 켜져 있어서 방안은 어둑어둑했고, 창문 밖으로는 장미들이 듬성듬성 피어서 향을 뿜어내고 있었다.

시도폰이 ‘날씨가 따뜻하니까 창문은 열어둘까? 꽃도 잘 보이네.’라며 창문을 열어뒀기에 잔잔한 바람이 커튼을 흔들었다. 폰에게 자냐고 물어보려던 카리타스는 옆에서 들리는 숨소리에 조용히 입을 닫았다. 시도폰은 누가 업어가도 모를 것처럼 곤히 자고 있었다.

슬쩍 눈치를 보던 카리타스가 손을 뻗어 폰의 손을 잡아보려 침대 위를 더듬는 동시에 시도폰이 카리타스 쪽으로 몸을 돌려버렸다. 북부로 가는 동안 잘 자던 시도폰이 카리타스를 안고 놓아주지 않는 바람에 곤란해진 적이 있었는데, 그때 이후로 폰은 자는 동안에도 긴장하는지 다시는 그런 일이 없었다.

‘애초에 그 이후로는 침대를 따로 썼지, 나중에 다시 같이 자긴 했지만.’

내심 아쉬우면서도 카리타스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뜨기 전까지는.


‘빠져나가는 건 불가능하려나. 옛날엔 물 먹은 나무 같은 느낌이었는데 이젠 돌덩이 같잖아.’

시도폰이 팔로, 이번엔 다리까지 동원해서 카리타스를 가두고 있었다. 이대로 시종에게 발견되면 그가 풀어주리라 기대하던 카리타스는 ‘집행자의 이런 꼴을 보여줘도 괜찮은가’라는 생각에 정신을 차리고 시도폰을 깨우려고 노력했다. 코지가 하던 대로 옆구리를 찔러도 보고 두코의 방식대로 볼을 꼬집어 보기도 했지만,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손에 힘이 들어갈 리가 없었다.

“일어났어?”

“…응?”

믿었던 시종도 감히 제가 어떻게 집행자의 몸에 손을 대겠냐며 카리타스의 부탁을 거절했다. ‘그럼 지금 이렇게 계속 있으라고? 일정도 있는데, 냉수라도 가져다줘.’ 인내심이 폭발해버린 카리타스는 시종에게 물은 자신이 뿌릴 테니 들고 오기만 하라고 명령했다. 다행히 물이 도착하기 전에 시도폰이 눈을 떴고, 시종은 나란히 침대에 앉아있는 두 사람을 발견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앞으로 한 침대에 같이 자는 건 금지야, 또 오면 바닥에 재울 줄 알아.”

“미안해, 한동안 안 그래서 괜찮을 줄 알았는데.”

시무룩하게 앉아있는 시도폰을 내버려 두고 자리에서 일어난 카리타스는 시종이 가져다준 물을 한 번에 들이키고 책상에 앉았다. 방엔 사각거리는 소리만 울렸다. ‘정말 화났나 봐 어떡하지?’라고 폰이 제 옆에 서 있는 시종에게 말을 걸어보았지만 그라고 해서 딱히 해답이 있는 게 아니었기에 시종은 입을 다물고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아침 햇살이 방을 환하게 밝히기 시작했지만, 분위기는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눈치를 보던 시도폰은 은근슬쩍 카리타스의 뒤로 다가갔다.

“…뭐해? 아침부터 독서야?”

“아니, 일기 쓰는 거야. 어제 일기.”

“부지런하네, 나는 그때 북부에서 다 같이 수행할 때만 쓰고 지금은 안 쓰고 있는데.”

“재밌는 일이 없었어?”

“응. 밥 먹을 때랑 정해진 수행 시간 외에는 혼자 있었으니까 별다른 일이 없었고, 매일매일 훈련이랑 공부만 하니까 그걸 굳이 기록해야 할 필요가 있나 싶어졌어.”

과거의 자신과 같은 고민을 하는 시도폰에게, 카리타스는 이해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래서 일기는 잘 안 썼어. 네가 꽃을 준 그 날 일기도 되게 오랜만에 쓴 거였는데.”

“지금은 어때, 매일 쓰고 있어?”

“나도 북부에 있을 때 보다는 드물게 쓰고 있는 것 같아. 그렇지만 이번엔 네가 와줬으니까 이런 건 기록해둬야 하지 않겠어? 오늘 아침 일 같은 거 기억해뒀다가 갚아줘야지.”

시도폰은 그 말에 잠결에 자신을 꼭 끌어안는 카리타스를 상상했고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자신이 카리타스를 벗어나는 건 힘들지 않을 것 같았지만, 그 과정에서 카리타스를 다치게 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먼저 들었던 시도폰은, ‘조심히 해야 해.’라며 충고했다.

“내가 널 다치게 할 리가 없잖아. 농담이었어.”

속으로 ‘나 말고 네가 다칠 것 같다는 뜻이었어’를 꾹 삼킨 시도폰이 어색하게 웃었다. 얼렁뚱땅 아침을 보낸 둘은 식사를 하고 헤어졌다. 더 오래 같이 있을 수 없겠냐는 시도폰의 말에, 한때 거주관에서 그를 노려보았던 수행원이 쩔쩔매며 일정이 있다고 변명했다. 과로를 직감한 카리타스는 마지막 힘을 짜내 웃으며 시도폰을 배웅했고 미련이 남았던 폰은 느릿한 발걸음으로 제 숙소에 돌아갔다.

“그래서, 그러고 그냥 오셨다는 겁니까?”

“왜 그렇게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보는 거예요?”

베론은 검을 손질하다가 우중충한 기운을 몰고 들어온 시도폰을 보곤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었다. 미주알고주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 털어놓은 시도폰에게 대뜸 베론이 내뱉은 첫 말이 저것이었다.

“다음 일정이라도 잡으셨어야죠. 저희가 북부로 돌아갈 날이 3일밖에 남지 않았는데 이렇게 느긋하게 돌아오셔도 되는 겁니까?”

혹시 베론이 무슨 도움 되는 얘기라도 하려나 싶어서 귀를 기울인 시도폰은, 남부와 북부 교회 관계 개선과 관련된 정책 이야기를 장장 1시간에 걸쳐서 들어야 했다. 들어두면 도움 되는 이야기인 것은 분명히 알겠지만 지금 시도폰에게 필요한 위로나 조언은 아니었다. ‘기억해둘게요, 다음번에 만나면 물어볼게요.’라고 말하고 자리를 피한 폰은 정처 없이 걷다가 막, 신전 입구로 돌아오는 무리를 발견했다.

‘조그만 애가 제일 앞에서 걷고 있네. 누구지? 오순절 행사 때 본 것 같았는데 이름이 기억이 안 나네. 뒤엔…, 귀부인이랑 사제들이 섞여 있고.’

“집행자를 뵙습니다.”

시도폰이 바라보고 있던 아이가 그를 알아보고 먼저 인사했다. 그러자 뒤에 서 있던 무리가 허겁지겁 덩달아 고개를 숙였고, 시도폰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자기들을 소개하려 들기 바빴다. 무슨 부인, 무슨 부인, 이름을 듣던 폰은 인사 후에 입을 열지 않고 있던 아이에게 어디에 다녀왔는지 물었다.

“아, 투르스 거리에 다녀왔습니다. 여기 온 이후로 주기적으로 가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어요.”

처음 인사를 건넸던 용기는 어디로 간 건지 아이는 말을 할수록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한 부인이 두 분께서 이야기 나누시게 비켜드리자고 하지 않았다면 아이는 그대로 도망쳤을지도 모르겠다.

“다들 가셔서 이제야 말씀드리지만, 죄송합니다. 제가 자매님의 이름이 기억이 안 나서요, 혹시 소개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때 제가 뭘 하진 않았으니까 기억하긴 힘드셨을 거예요. 아세쿠토레 수페르피키에스입니다. 하지만 신전에 들어왔으니 아페라고 불러주세요.”

“그럴게요. 제 이름은….”

“집행자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은 금지되어 있어요.”

씁쓸한 표정으로 아페는 손을 꼼지락거렸다. 폰은 슈바헨이 ‘당신의 이름을 함부로 입에 담는 이들은 바로 처벌하실 수 있습니다. 기억해두십시오.’라고 말했던 것을 기억해냈다. 하지만 폰은 이미 아이들에게 자신을 집행자가 되기 전과 같이 대해달라고 당부하면서 돌아다녔었다.

“이름을 알려준다고 함부로 불러댈 사람으로 보이진 않는데요? 저는 사람들이 저를 이름으로 기억해주는 게 좋아요. 그래도 누가 들으면 문제라고 하려나.”

아페는 고개를 끄덕이다, 제게 다가온 그림자에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폰은 아페의 귓가에 제 이름을 작게 속삭였고 ‘카리타스랑 잘 지내주세요. 신전에서 또래는 아페 말고는 없을 것 같아요.’라고 부탁했다.

“…네.”

“아페는 여기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었다고 들었어요. 카리타스가 말해줬는데, 저보다 세 살 어리시더라고요. 지내기 불편한 점은 없나요?”

폰은 어쩐지 계속 쩔쩔매는 아페가 신경 쓰여 숙소로 돌아가는 것도 잊고 계속 질문을 던졌다. 아페에게 카리타스를 처음 만났을 때 울고 있던 모습이 계속 겹쳐 보였기에, 잠깐이지만 대화 상대가 되어주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어색하게 대답하던 아페도 대화를 하다 긴장이 풀렸는지 대화가 마무리될 즘에는 활짝 웃고 있었다.

“이렇게 오래 서서 대화할 거면 자리를 따로 잡을 걸 그랬네요. 오후 일정이 어떻게 되시나요?”

“그러게요, 오후엔 개인 훈련을 할 것 같아요. 저희는 여기서 딱히 해야 할 업무가 없다 보니까 엄밀히 말하자면 자유 시간이긴 하지만, 남부로 내려오는 길에서 만난 사람들을 보니까 훈련을 게을리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럼 혹시, 훈련하는 걸 구경해도 괜찮을까요? 조용히 있을게요.”

“볼 건 딱히 없으실 텐데…. 그래도 궁금하시다면 데려가 드릴게요. 날붙이들이 날아다니는 곳이니까 여기저기 기웃거리면 안 되시고 제 뒤에 딱 붙어서 따라와 주세요.”

결연한 얼굴로 아페는 고개를 끄덕였다. 베론은 폰의 뒤에 찰싹 붙어있는 아페를 보고 폰에게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훈련 시간에 왕녀님을 데려오셨냐 물었다. 변명하려던 폰의 등에서 불쑥 튀어나온 아페가 자신이 보고 싶어서 졸랐다고 털어놓았고 베론은 폰과 똑같이 경고하고 참관을 허락해 주었다.

“집행자께서는 어떤 분과 대련하시나요? 아, 이건 임명식 때 봤던 창이네요!”

날붙이에 안색이 파랗게 질릴 줄 알았던 아페는 의외로 무기를 무서워하지 않았다. 폰의 상대로 베론이 걸어 나와서 서자, 그제야 아페가 당황하며 자신의 옆에 서 있는 헤일로에게 저래도 괜찮은 거냐 물었다.

“괜찮습니다. 집행자께서는 실력이 이미 베론과 비등한 상태이니까요. 아직 다인 훈련은 해본 적 없습니다만 조만간 하게 되셔도 괜찮을 것 같군요.”

불안한 표정으로 아페가 자신을 바라보자 폰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웃어주고 창을 내질러 먼저 공격을 시작했다. 베론이 가볍게 창을 피하자 폰은 그대로 창을 휘둘러 베론을 쫓아갔다. 날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쨍-하게 울리고 두 사람은 거리를 벌렸다.

“베론 님 정도 되시는 분과 저렇게 강하게 부딪혔는데 전혀 밀리지 않으시네요.”

아페가 감탄하는 순간 이번엔 베론이 먼저 나섰다. 아래에서 빠르게 올라온 검을 간신히 막아낸 시도폰은 ‘제가 제일 약한 공격을 하필!’이라고 투덜댔다.

“이제 이 정도가 아니면 제가 유리한 공격은 몇 없지 않겠습니까?”

“허….”

시도폰이 짧게 숨을 내쉬고 들이마셨다가 순식간에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날에 그대로 자신의 무게를 실어서 내리찍은 공격이 베론의 검신을 쪼갤 것처럼 보였지만, 다행히 검은 무사히 그 공격을 튕겨냈다. ‘아직 가벼우셔서 다행이군요.’라며 베론은 진심으로 안도했다. 창과 함께 튕겨난 폰은 바닥에 착지하곤, 아쉬워하며 창을 고쳐잡았다.

“신성력 사용해도 되나요?”

“안됩니다. 아페 님도 계시잖습니까, 불이 번지면 어떡하시려고요.”

“아, 그쵸…. 아쉽다.”

“그리고 신성력까지 사용해버리면 제가 불리합니다.”

“사실 그게 본심인 거 아녜요?”

“그럴지도 모르죠.”

무게가 안 되면 속도로 승부를 보겠다며 시도폰은 더 빠르게 날을 휘둘렀다. 왼쪽에서, 오른쪽에서, 방향을 바꾸어가며 날아 들어오는 창에 베론은 공격을 전혀 하지 못하고 방어에만 집중했고, 신나게 공격하던 폰은 땀범벅이 되어서야 창을 떨궜다.

“오늘은 여기서 끝! 아페 님도 기다리시니까 너무 길게 하면 안 될 것 같네요.”

“…예, 쉬십시오.”

어쩐지 10년은 늙어버린 듯한 베론을 뒤로하고 폰은 개운하다는 얼굴로 땀을 닦았다. 아페에게 다가가려다 제 몸에서 냄새가 날 것 같다며 적당한 거리에서 발걸음을 멈춘 폰은, 심심하지 않았냐고 물었으나 아페는 강하게 고개를 저으며 ‘정말 멋있었어요!’라고 외쳤다.

“그러셨다면 다행이에요. 저는 이제 씻으러 가야 할 것 같은데….”

“다녀오세요!”

아페는 방긋 웃으며 시도폰을 배웅했다. 기다릴 거냐고 물어보려던 시도폰은 어쩔 수 없이 평소보다 배는 빠르게 씻고 돌아왔고 두 사람은 같이 저녁 식사 자리에 나타났다. 온종일 업무에 시달리다 돌아온 카리타스에게 두 사람의 희희낙락하는 모습이 아니꼽게 보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내가 놀아줄 수도 없으니까…, 티 내지 말자.’

카리타스 앞에 놓인 고기가 난도질당하는 모습에 옆에 있던 사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정작 당사자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오늘따라 유달리 말을 자주 거는 교황 때문에 식사가 늦어진 카리타스는 식사가 끝나 먼저 자리를 뜬 두 사람을 쫓아가지 못했다.

“오늘 정말 재밌었어요. 언제 북부로 돌아가시나요? 그 전에 한 번 더 뵙고 싶어서요.”

“아… 그게, 공식 일정으로는 5일 후에 돌아간다고 되어있는데 저랑 베론 님, 그리고 몇 명은 3일 뒤에 출발하기로 했습니다. 아무래도 방어선을 비우고 온 게 신경 쓰이기도 하고, 올 때와 다르게 모든 인원이 함께 이동할 필요는 없어서 소수 인원이 먼저 복귀하는 거로 결정했어요.”

“3일 후면 금방이네요. 아쉬워라….”

“내일은 친구들이랑 놀 것 같은데 그럼 남는 시간이 돌아가는 날 바로 전날밖에 없겠네요. 복귀일엔 아침 일찍 여기서 출발할 거라 인사만 하는 게 전부일 것 같아요.”

“그러면 모레 말씀하시는 거죠? 알겠습니다. 최대한 시간 내볼게요!”

아페의 말에 무언가 생각난 듯 시도폰은 허공을 잠깐 보다가 다시 시선을 내렸다.

“혹시 일정이 있으신 건가요? 그러고 보니 카리타스가 무슨 회의가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회의가 있는 건 맞아요. 하지만 전 아직 어려서인지 맡은 일이 딱히 없어서 준비해야 할 것도 없을 거거든요. 회의가 끝나면 사람을 보낼게요. 대충 어디 계실지만 알려주시면….”

“아마 도서관이나 훈련장에 있을 것 같아요. 거기도 없으면 제 숙소에 있을 것 같고요.”

잠깐 머뭇거리던 아페는 시도폰의 말에 그때 보자며 손을 흔들고 돌아갔다. 시도폰은 소화도 시킬 겸 산책하는 동안 시장에서 무엇을 사 올지 고민했다.

‘카리타스는 일이 많다고 했으니 수고했다는 뜻으로 단 걸 사주면 될 것 같은데 아페는 웬만한 건 다 가져봤을 것 같네, 어떡하지?’

어느새 카리타스를 만났던 정원에 도착했다는 걸 알게 되었던 시도폰은 다른 곳으로 가지 않고 정원을 빙글빙글 돌았다. 그때 복도에서 조심스러운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이거 카리타슨데, 아는 척할까 모르는 척할까?’

조심스러워하는 것치고는 잔디 밟는 소리가 너무 크게 났다. 카리타스도 그걸 알아챘는지 거기서 굳어서 움직이지 않는 것 같았고 결국 점점 카리타스에게서 멀어지던 시도폰은 등을 돌렸다.

“거기서 뭐 해?”

“몰래 놀라게 해주려고 했는데 실패했네.”

들킨 마당에 굳이 숨어있을 필요도 없으니 카리타스는 평소처럼 걸어서 정원으로 들어갔다.

“혼자 뭐 하고 있었어?”

“산책. 오늘따라 많이 먹었나 봐, 속이 더부룩하더라고. 자려고 돌아가는 길이었어?”

“나도 산책하려고 나왔어. 종일 앉아있었더니 몸이 찌뿌둥해.”

카리타스는 팔을 하늘로 쭉 뻗으며 기지개를 켰다.

“남부로 돌아와서 훈련은 했어?”

“아니, 전혀. 덕분에 간신히 붙은 체력이 다 빠진 것 같아.”

“그래서 더 피곤할 수도 있겠다. 자기 전에 몸 풀어주고 자!”

시도폰은 카리타스의 등 뒤로 돌아가 어깨를 주무르다가 아프다고 소리치는 카리타스에게 놀라 뒤로 자빠질 뻔했다. 카리타스가 제 어깨를 감싸고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시도폰을 노려보았다.

“나 세게 안 했는데? 근육이 아주 돌덩어리가 됐어!”

변명 아닌 변명을 하는 시도폰에게 ‘몰라!’라고 소리치곤 카리타스는 쌩하니 복도로 달려갔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뒤쫓아오는 시도폰이 더 빨라서 금방 잡혀버리고 말았다.

“이제 안 할 게! 근데 많이 아팠어? 정말 약하게 주물렀던 것 같은데.”

“아프기도 아팠고….”

숨이 너무 가까워서 당황한 게 먼저였다는 말은 삼켰다. 카리타스는 간질간질한 생각을 어딘가로 날려 보낼 만한 화제를 고민하다가 ‘그 사람’은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봤을 땐 기사단 감옥에 갇혀있었던 것 같은데.”

“아무래도 동료를 배신한 일인 데다가 신전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을 위협하기까지 했으니 벌이 강하게 나왔어. 앞으로 7년 동안 모든 훈련과 활동은 금지당한 데다가 신성 도구에 신성력 채워 넣는 노예 비슷한 게 됐지. 그 기간에 참회하고 동료들에게 용서를 받으면 복귀할 수 있다고 하시긴 하셨는데, 아직까진 다들 없는 사람 취급하고 있어.”

“마음에 안 들어. 7년도 짧다고 생각하는데 그쪽 기준은 좀 다른가?”

중얼거리듯 카리타스가 말했고 폰은 고개를 끄덕였다.

“북부는 인원수가 부족하니까, 당장 투입 가능한 기사를 그렇게 빼버리는 건 솔직히 말해서 손해야. 옛날 우리 같은 수습 기사 서넛 보다 그 사람이 더 필요한 인력이라는 건 말할 필요도 없어.”

“아마 남부에서 그런 일이 있었으면 평생 지하 감옥에서 썩었을 거야.”

냉랭한 카리타스의 반응에 시도폰은 무섭다며 오들오들 떠는 시늉을 했다. 시간이 늦었으니 각자 자러 가자며 시도폰이 말을 꺼내자 카리타스가 복귀하기 전까지 어떻게 시간을 보낼 생각인지 물었다.

“내일은 일단 거주관 애들이랑 시장에 다녀오려고. 모레는 아페 저하께서 시간을 내달라고 하시던데 그날 회의 있지? 세 명에서 같이 놀면 좋을 텐데 혹시 시간 있을까?”

“아…. 그건 좀 힘들 것 같아. 보통 회의가 있으면 그날은 여유 시간이라고 할 게 거의 없거든, 밤까지 회의하고 그러니까.”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오래 카리타스와 함께 있을지 고민하던 폰은 좋은 생각이 났다며 즐거워했고 카리타스는 못 말리겠다며 한숨을 쉬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카테고리
#오리지널
페어
#GL

해당 포스트는 댓글이 허용되어 있지 않아요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