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재不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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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날의 기울어진 햇살이 유리창을 투과했다. 눈은 점차 녹고 있었지만, 바깥을 물끄러미 내다보는 푸른 눈에는 아무런 감상도 비치지 않았다. 바깥엔 새해를 맞은 사람들이 저마다 들뜬 얼굴로 눈 쌓인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 집 안은 평소와 다를 것 없이 고요했다.
그 나직한 정적의 순간에도 동생 A는 부산스레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는 시선을 창밖에 고정한 채 물었다.
“너도 참…. 어차피 며칠 뒤면 헤어질 친구들이 그렇게 좋아?”
그 무렵, ▒▒▒는 무척 지쳐 있었다. 한두 해 간격으로 반복된 이사는 지겨웠고, 이별은 늘 슬픔을 채 흘려보낼 시간도 없이 찾아왔다. 그는 학창 시절의 인연 따위 가볍기 그지없는 것이라 여겼으나 그의 동생은 자신과 달리 늘 겁 없이 뛰어들곤 했는데, 그날도 A는 거울을 바라보며 스스로를 꾸미기 바빴다.
“응! 당연하지!” 그제야 그는 동생을 돌아보았다. 늘 보던 얼굴에 말간 웃음이 맺혀 있었다.
A는 언제부턴가 유독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쾌활하게 굴곤 했다. 너무 일찍이 세상의 무상함을 깨달은 언니를 부추겨 일으켜 세우기라도 하려는 듯이. ▒▒▒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자리에서 일어나 흘러내린 오비를 바로 고쳐주었다.
“A, 네가 그 꼴이 될 때까지 아무도 말리지 않은 거야?”
“내가 뭐 어때서! 언니는 나한테만 뭐라구 그런다?”
“…그래, 미안해.”
조용히 입을 다물며 ▒▒▒는 동생이 서툴게 묶은 머리를 고쳐주고, 얼마 전 새로 산 머리끈으로 동생의 머리를 장식했다. 동생에게 물려줬던 자신의 가방을 똑바로 메준 뒤, 작은 손을 꼭 쥐고 현관문을 열었다.
새해 첫날의 신사는 유독 요란했다. 한 해의 시작. 새로운 인연과 새로운 각오, 이번 한 해는 무엇인가 달라질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 사람들의 근거 없는 두근거림을 부추기듯 신사의 지붕 위로 고운 눈이 내렸다. 눈밭에 발자국을 남기며, ▒▒▒는 동생의 손을 잡고 층계를 올랐다.
그때 나는 무슨 소원을 빌었더라. ▒▒▒가 떠올리길, 그때의 그는 바라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의 안은 그저 비어 있기만 했다. 다가오는 한해도, 인연도 모두 스쳐 지나갈 뿐. 그러니 당시의 자신이 어떤 생각을 하고 무슨 바람을 가졌는지 따위 이제 와 중요하지 않다.
그렇다면 존재를 실재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나’라는 존재는 누군가가 기억해 주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 아직 이름이 생기기 전, 태곳적의 자신이 고유한 호칭으로 불리지 않았듯이. 부모님이 이름을 주었을 때 ▒▒▒는 비로소 ▒▒▒로 존재했다. 그렇다면 학생으로서, 혹은 친구로서의 ▒▒▒는? 교실이라는 세계 속에서 자신의 존재는 얼마나 희미하고 무상했던가.
짧은 기억의 조각이 물에 젖은 종이처럼 흐트러진다. ▒▒▒는 흩어져 가는 육체를 감각하며 눈을 깊이 깜빡였다.
분명 정해진 끝임에도 소멸은 한순간에 찾아오지 않았다. 인계에 퍼진 낭설처럼 사자가 찾아오지도, 강을 건너지도 않았다. 그저 환한 빛을 발하는 블랙홀 안에 뛰어든 것처럼 그는 어떤 공간 속에서 천천히 융해되고 있었다. 홀로 영화관에 앉아 있듯 눈앞에 과거의 단편이 고요히 흘러갔다. 그건 비유하자면 주마등에 가까웠으나 알려진 것처럼 짧은 순간 스쳐 지나가지는 않았다.
과거로부터 조금씩 시간이 흘렀다. 중학교 교복을 입은 ▒▒▒. 짧은 사이에 바뀐 교복을 입고 등굣길을 오르는 ▒▒▒. 고등학교 교복을 사고, 익숙하다는 듯 새 건물로 향하는 ▒▒▒. 어느 것 하나 특별하지 않은 하루. 다만 어느 한 점에서, M는 홀로 선명한 색채를 지닌 채 등장했다.
찰칵, M는 ▒▒▒를 향해 셔터를 눌렀다. 흰 백색 종이 위에 ▒▒▒의 모습이 점차 선명해졌다. 그것을 들고 팔랑팔랑 흔들며, M는 말갛게 웃었다. 그건 영원을 믿고 싶게 하는 미소였다.
그 무렵부터 M는 유일하게 ▒▒▒의 존재에 의미를 부여했다. M와 함께 보낸 시간이 잠잠히 흘러갔다. 일상과 비일상의 경계를 넘나들며, 두 사람의 어떤 날이 사진으로 남았다. 한 장, 두 장. ▒▒▒의 방 한쪽 벽에 사진이 붙었다. 어느새 메모가 적힌 폴라로이드 사진이 벽면을 가득 채웠다.
“H…!”
그리고 가장 찬란한 순간, 비명과 같은 부름을 끝으로 영상은 끝났다. 암전.
마법사는 본디 언어를, 무정형의 개념을 통해 세계의 인과를 바꾸는 존재. 우자로 태어난 ▒▒▒는 가장 마법사다운 결말을 남긴 채 소멸했고, 마지막으로 본 M는 ▒▒▒로 인해 생생히 존재했다. 그렇다면 그걸로 될 것이다. 당분간 자신은 그의 안에서 존재할 테고, 몇 년의 유예를 끝으로 완전히 부재할 것이다.
문득 ▒▒▒는 끝의 끝에서, M가 자신을 기억해 주길 바란다. 무상한 세상 속에 단 하나의 발자국이나마 남기를, 단 한 순간이라도 좋으니 누군가 자신이 실재했음을 알아주기를 소망한다.
얼마나 무상한 욕심인지. 짧은 자조를 끝으로 ▒▒▒는 눈을 감는다. 이제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더 이상 어떤 빛도 들지 않는다. 사방이 고요 속에 잠긴다.
이제 정말 마지막. 안녕, M.
무의식 속에서 ▒▒▒가 그의 이름을 부르자, 별안간 감긴 눈꺼풀 위로 불쑥 빛이 쏟아진다. 깜빡. ▒▒▒는 눈을 뜬다.
흐린 눈앞에 익숙한 인영이 서 있다. 익숙한 흑발. 어느새 길게 자란 머리칼을 살랑이며 누군가가 낡아빠진 집의 벽면을 바라본다. 이미 수십 년은 지난 듯, 누렇게 바래고 갈라진 벽지 사이로 변색된 추억이 빼곡히 남아 있다. 사진 속에 ▒▒▒의 존재는 이제 없다. 오직 M만이 어색한 공백을 곁에 둔 채 이쪽을 바라보며 환히 웃고 있다.
“너는 누구일까? 내가 이렇게 밝게 웃는 걸 보면, 분명 나한테 아주 소중한 사람이었겠지?”
이윽고 낡은 추억을 배경으로, 가운데 실재하는 존재가 뒤를 돌아본다. 불과 몇 분 전과 다름없는 얼굴. 그럼에도 수십 년의 세월을 보낸 노인과 같이 성숙한 낯이 이쪽을 향한다. 마치 그의 존재를 눈치채기라도 한 것처럼, 익숙한 목소리가 ▒▒▒를 향해 재차 입을 연다.
“너를 기억하지 못해도 네가 남긴 흔적은 내게서 사라지지 않아. 나는 모든 상실을 등에 업고 힘차게 살아갈 거야.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한 일상은 계속될 테니까.”
벚꽃색 눈동자가 반달을 그리고, ▒▒▒는 멀어져가는 의식 속에서 살며시 웃음을 흘린다. 미소 지은 얼굴이 서로를 마주 보자 마침내 소멸의 문턱에서 멈추었던 초침이 움직인다. 세계라는 이름의 책에서 하나의 존재가 지워진다.
“그러니까, 나는 괜찮아!”
짧게나마 실재했던 존재는 부재로도 자취를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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