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 글 타입〉 샘플

언럭키걸 신드롬

커미션 작업물(당일마감) | 1차 | 페어

약 3000자

 

 

최악의 하루. M은 맨발로 횡단보도 한가운데 서 있었다. 그는 비에 젖어 어물거리는 눈가를 손으로 훔쳤다. 기껏 빗물을 닦아낸 보람도 없이 장대비가 속옷째 흠뻑 적시고, 뒤이어 옆에서 경적 소리가 귀청을 찢었다. 코앞에 정차한 차를 원망스레 째려본 그가 찰박거리는 바닥을 딛으며 횡단보도를 마저 건넜다. 굽이 부러진 구두가 손끝에서 달랑거리고, 채 인도에 도착하기도 전에 깜빡이던 신호등의 파란불이 빨간불로 바뀌었다.

정말이지 종일 되는 게 하나도 없네. 가까운 건물 아래서 비를 피하면서, M은 속으로 하루를 저주했다. 비가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으므로, 그는 홧김에 회사에 휴가를 통보한 뒤 빗길을 헤치고 집에 돌아갔다. 곧장 샤워를 했다. 적당히 손에 집히는 대로 짐을 쌌다.

M은 잠시 방 안을 서성였다. 고민은 오래 지나지 않아 끝났다. 그는 가장 빠른 플로리다행 비행기를 끊고 현관문을 열어젖혔다. 적막을 등지며 밤거리를 걸어 나갔다.

 

 

하루가 지나 다시 저녁. M은 벤치에 앉아 휴대폰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사방에 점차 노을이 지고 어스름한데도 디즈니랜드를 뛰어노는 아이들의 활기는 여전했다. 어른도 아이도, 하나같이 눈을 빛내며 다가오는 이벤트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스케줄 비는데 가도 돼?]

[난 신경 안 써. 어차피 불꽃놀이까지 보고 갈 거야.]

디즈니랜드에서 찍은 사진, U와 나눈 대화가 시야에 담겼다. 정말 오려나? 약속을 어기는 사람은 아닌데. 기왕이면 불꽃놀이가 끝나기 전에 와주면 좋겠다, 하며 그는 휴대폰을 도로 집어넣었다.

불꽃놀이는 본래 금세 빛났다 사라진다. 잠시의 눈요기를 위해 몇만 달러를 태우고 나면, 남는 건 지나간 시간과 잠시의 희열뿐이다. M의 연애가 그랬듯이. 그는 불과 작년까지만 해도 결혼을 결심한 상대에게 돈과 시간을 흘려보냈고, 마침내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M은 더 이상 깊은 인연을 만들지 않기로 결심했다. 연애보단 가벼운 썸 정도가 좋았다. 마음이 다치는 것보다는 애초에 여지를 주지 않는 게 나았다.

생각에 잠긴 사이 반대쪽 손에 들고 있던 아이스크림이 녹아 손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가 티슈를 꺼내 손에 묻은 크림을 닦아내던 찰나, 머리 위에서 첫 번째 불꽃이 튀어 올랐다.

“저것 봐, 엄마!” 근처의 아이가 들뜬 얼굴로 근처를 스쳐 달려 나갔다. M은 반쯤 녹은 아이스크림을 다시 입에 문 채 하늘을 멀거니 올려다보았다. 수십 개의 불꽃이 저마다 다른 형태를 띤 채 밤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불꽃놀이가 끝날 즈음, 까만 하늘에 흩어지는 연기를 바라보며 M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플로리다도 저녁엔 서늘하구나. 그가 아이스크림 포장을 휴지통에 던져 넣고, 자신의 양팔을 무심코 감쌌을 때였다.

불쑥 어깨 위에 커다란 외투가 걸쳐졌다. M은 놀란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운 얼굴이 부드러운 웃음을 머금은 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M이 무심코 웃음을 터트리자, 웃음소리가 불꽃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흩어졌다. 그는 다시금 쏘아 올린 불꽃을 바라보았다. 시선이 자꾸만 옆으로 향하다가 돌아오길 몇 차례. 시끄러운 폭죽 소리와 짧은 정적, 사람들의 환호가 번갈아 울렸다. 끝물이었던 불꽃놀이가 끝났을 때에야 M은 곁을 돌아보았다. 절로 웃음이 새어나왔다.

“진짜 올 줄은 몰랐는데.”

“이런 날도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가만 미소지은 채 M은 U를 응시했다. 시간이 아주 느리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불꽃놀이가 남긴, 마냥 허무하지만은 않은 여운. 사방에서 색색이 반짝이는 놀이공원의 불빛. 문득 주변을 둘러싼 모든 게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감상에 젖은 사이 U는 좀 망설이는 기색이더니 곧 다시 입을 열었다.

“…집에 같이 갈래요?”

 

 

회사 근처에 마련했다는 새집은 대단히 근사하진 않았지만 두 사람이 예전에 살던 빌라보다는 훨씬 나았다. M은 간만에 U가 차려준 식사를 하고, 간만에 늦은 시간까지 밤을 보냈다. M은 한결 나른해진 몸을 침대 위에 놓였다. 머리맡의 수면등이 은은한 빛을 발하고, 살짝 열린 커튼 새로 오렌지빛 가로등 조명이 새어들었다.

U가 긴 머리칼을 베개 위에 흐트리며 돌아눕자, 잔잔한 조명 아래서 시선과 시선이 얽혔다. M은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평안하고 안온한 침대 위에 누워 있자니 문득 오늘과 대비되는 그저께의 기억이 떠올랐다.

왜 가장 끔찍한 날, 이 사람의 얼굴이 생각난 걸까?

M이 플로리다행을 결심한 건 순전히 충동이었다. 어떻게든 보상받고 싶었다. 최악인 하루를 보냈다면 머잖아 최고의 하루가 찾아오길 바랐다. 꼭 플로리다여야만 하는 이유는 없었으나 굳이 이곳으로 온 이유를 꼽자면, 아마 U의 얼굴이 가장 먼저 떠올랐기 때문일 것이다.

U가 무척 보고 싶었다. 그 또한 충동일지도 모르지만, 감정만은 진실이었다. M은 U가 무척 고마웠다. 늦기 전에 자신을 맞이해준 그. 새집에 초대하고, 멋진 식사를 대접한 그. 때때로 얼굴을 붉히고, 멋쩍은 미소를 짓는 그는 변함없이 다정했다. 어쩌면 자신이 바란 막연한 보상은 어쩌면 애초부터 U였을지도 몰랐다. 그래서.

“우리, 파트너라기엔 그것만 원하지는 않고… 친구라기엔 너무 더한 것까지 하는 것 같은데.”

M은 가만히 읊조리며 흘러내린 머리칼을 넘겨주었다. 사락사락 익숙한 감촉이 닿았다.

“그냥 만나볼래요?”

잠깐의 정적. 머리맡에서 따뜻한 빛이 두 사람을 비췄다. 당황한 듯 갈 길을 잃은 푸른 눈동자가 데굴데굴 굴러갔다. 그게 퍽 귀여워서, M은 키득키득 웃으며 그의 머리칼을 한 번 더 쓸었다.

“당신은 괜찮은가요?”

“내가 빈말로 물어보는 사람 같아요?”

“그건 아니지만….”

“그럼, 대답은요?”

한참 우물거리던 U가 M에게 고개를 기울여 입술을 포갰다. 쪽, 하는 짧은 입맞춤 끝에 그가 말을 이었다.

“…좋아요.”

최악의 날, 한순간의 충동. 불꽃놀이가 끝나기 전에 U는 가장 최고의 선물로 M에게 왔다. M은 그에게 깊이 입맞추며 생각했다.

이 사람이라면, 한 번쯤 더 충동에 스스로를 내맡겨도 될 것이라고.

카테고리
#기타

해당 포스트는 댓글이 허용되어 있지 않아요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