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 글 타입〉 샘플

Trick and Treat

커미션 작업물 | 인외 | 페어

약 5900자

썸띵은 누군가 자신을 발견해 주기만을 염원하며 오랜 시간 세계를 떠돌았다. 그건 썩 유쾌하진 않았으나 낯설지도 않았다. 그가 그저 가만히 세계를 관조하는 동안, 인간들은 문명을 빠르게 발전시켰다. 문명이 만들어 낸 관습은 현대에 이르러 낡아빠진 구습으로 남기도 했고, 혁명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그 속에 썸띵은 잠시나마 속했으나 그보다 더 오랜 세월을 무의 존재로 살았다. 썸띵은 그저 썸띵Something. 어떤 것. 혹은 무엇도 되지 못한 것.

목 위에 둥둥 떠 있는 사람 얼굴 만한 구. 얼굴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잘린 목을 드러낸 채, 검은 구체가 눈을 깜빡인다. 썸띵은 안구뿐인 얼굴과 물체에 닿지 못하는 손으로 세계를 감각해 왔다. 보고, 듣고, 사유하면서. 그때 코튼이 자신을 꺼내준 것은 순전히 우연에 불과했을 것이다.

썸띵은 코튼의 발견으로 말미암아 세계에 다시금 현현했다. 코튼은 아무런 대가 없이 썸띵을 받아주었고, 집안에 그를 들이고도 어떤 대가조차 바라지 않았다. 돈도, 선물도, 집안일마저. 인간은 누구나 대가를 바란다. 그것이 여태껏 썸띵이 관측해 온 세계이므로, 그에게 있어 코튼은 무척 불가해한 존재였다.

시간은 금세 지나간다. 두 사람은 친구로서, 안온한 동거인으로서 마땅히 각자의 삶을 살았다. 사각사각, 실재하는 손으로 펜을 움직여 썸띵은 백지 위에 검은 흔적을 남긴다. 자취를 남길 수 없는 이가 세상에 족적을 남기는 건 퍽 기쁜 일이다. 아주 현실적인, 그가 뜻하지 않아도 보고 듣고야 말았던 미지 속의 세계를 그는 써내린다.

1. 10월 31일에 초대하지 않은 손님이 온다면 절대 문을 열어주지 마십시오. 초인종을 울리거나 문을 두드려도 반응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괴물입니다.

 

딩동. 초인종이 울린 건 10월의 마지막 날, 저물녘이었다. 때마침 코튼이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귀가했으므로, 그들은 막 함께 저녁을 먹고 TV 앞에 앉아 있었다. 해가 짧은 탓에 기울어진 노을빛이 반쯤 열린 커튼 새로 새어들었다.

잠시만요, 하고 코튼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조용조용한 발걸음이 현관 앞에 서는 순간, 어떤 직감이 썸띵의 뇌리를 스친다. 썸띵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코튼의 팔을 부드럽게 잡아당긴다. 딩동. 그 사이 초인종이 한 번 더 울린다. 썸띵은 서둘러 휴대폰을 꺼내 자판을 두드린다.

[나가지 마세요, 코튼.]

“왜 그래요? 사탕을 받으러 온 아이일 수도 있잖아요.” 썸띵과 달리 눈 대신 입술만 달린 구름의 형상이 작게 꿈틀거린다. 잡을 수 없이 아스라한 형체 너머로 의아한 시선이 느껴졌으나, 썸띵은 느리게 고개를 가로젓고, 다시금 작은 화면 위에 글자를 쓴다.

[아뇨, 부탁이니 문을 열지 말아요.] 보이지 않는 시선이 외눈을 지그시 응시하다가 곧 고개를 끄덕인다. 구름이 뭉실거리며 위아래로 흔들리고, 호선을 그렸던 입술이 미묘한 일자를 그린다.

썸띵은 커튼을 치고, 자리에 가 앉는다. 그들은 다시 소파에 적당한 거리를 둔 채 앉아 TV를 본다. 낡은 TV에서 철 지난 슬랩스틱 코미디 프로가 흘러나온다. 애써 머릿속을 비우려 노력하며, 썸띵은 코튼의 옆모습을 힐끔거리길 관두고 화면으로 시선을 돌린다. 그러다 문득 한켠의 벽걸이 달력이 시야에 잡힌다.

10월 31일. 인간들은 오늘을 두고 죽은 사람이 되돌아오는 날이라 했다.

2. 인터폰 화면에도, 현관문의 외시경에도, 창밖에도 괴물의 모습은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그것의 형태가 보인다면 당신은 죽은 사람입니다.

 

초인종 소리는 끊이지 않는다. 딩동딩동딩동딩동딩동딩동딩동딩동. 높고 날카로운 종소리가 머릿속을 울린다. 분명 그럴 리 없음에도, 마치 초인종이 귓속에 들어있는 것만 같다고 썸띵은 생각한다. 몇 차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난다. 탕탕탕탕탕, 순간 거친 타격음과 함께 거실의 통창이 열리고, 차디찬 칼바람이 불어온다. 커튼이 정신없이 펄럭거린다. 코튼이 웃음기 하나 없는 입매로 주변을 부산스레 돌아본다.

“저게… 대체 뭐예요?”

코튼의 낯에 명백한 당황과 공포가 서려 있다. 썸띵은 소파에 다소곳이 앉은 채 기척을 죽이고, 그 사이 탁자에 놓아둔 노트를 집어 든다. 코튼이 그렇듯 글로써 차분한 말투를 흉내 내기 위해 노력한다.

[저건 과거의 저이자 이미 죽었던 괴물입니다.]

“당신이라뇨? 당신은 결코 괴물이 아니에요.”

썸띵은 쓰디쓴 감정을 삼키며 고개를 젓는다. 밖에 있는 것은 분명 자신이 맞을 것이다. 그가 생각하기에 한때, 그는 부정할 수 없는 괴물이었다.

딩동딩동딩동. 뇌리를 울리는 소음과 함께 푸르스름한 저녁 하늘이 순간 칠흑색으로 물든다. 휘날리는 커튼 새로 보이는 정경이 붉어졌다가, 검어지길 반복한다. TV 채널이 멋대로 돌아가기 시작한다.

기괴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웃는 기상 캐스터가 유럽 지도 속 한 점을 가리킨다. 노이즈와 함께 화면이 바뀐다. 코미디언이 서로의 몸에 불을 지르자 초인종 소리는 고통에 찬 비명으로 변모한다. 살려줘, 너무 뜨거워, 온몸이 불타고 있어, 살려줘, 나는 아무 잘못도 없어, 단지……. 불타는 코미디언들은 남성임에도 어린 여성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리다 멀어진다. 화면이 어지럽게 흔들린다.

제멋대로 돌아가던 TV가 멎는다. 타닥타닥, 초인종 소리보다 선명하게 장작이 타는 소리가 들려오자, 일그러져 있던 화면 속이 현실처럼 선명해진다. 이제 썸띵이 기억 한켠에 묻어두었던 과거가 그곳에 있다.

밤하늘에 검은 연기가 치솟고, 불길이 활활 타오른다. 잿가루가 시야를 어지럽힌다. 끼얹은 기름을 타고, 화마가 삽시간에 장작을 집어삼키며 가운데 묶인 소녀를 살라먹는다. 웃었을 땐 누구보다 맑았던 소녀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진다. 그는 애처로이 발버둥치지만 어떤 몸부림도 꽉 동여매인 몸을 자유롭게 하지 못한다.

저는 마녀가 아니에요, 잘못했어요, 살려주세요, 불, 불이…! 아아악…! 누가 나 좀, 살려줘, 뜨거워, 너무 뜨거워, 으흑… 잘못했어, 제발…, ■■… 날 구해줘…! 아아, 너무 아파, ■■…, 구해줘, 넌 특별하잖아, ■■, ■■….

갈피를 잡지 못한 채 낮은 시야로 올려다보는 썸띵을, 소녀는 숨이 끊어질 때까지 마주 보았다. 썸띵이 잠시 받았던 이름, 소녀가 애정으로 지어준 이름을 목 놓아 불렀다. 눈동자에 시시각각 다른 감정이 스쳐 지났다. 고통, 증오, 원망, 연민, 체념. 썸띵이 봐왔던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감정들. 그리고 끝내 그 눈은 감기지 않았다.

그날, 이제는 낡아버린 관습이 죄 없는 이를 죽였다. 소녀를 죽인 것은 그들이 한때 몸담았던 시대였다. 그 시대에 썸띵은 으레 괴물이라 불렸으므로, 소녀가 죽은 이유는 어쩌면 그를 발견한 탓일지도 몰랐다.

그러므로 썸띵은 소녀의 목숨이 다하는 순간 불을 붙인 이들에게 달려들었다. 날카로운 발톱으로 할퀴고, 물어뜯었다. 그러자 소녀를 죽인 병정들이 불씨가 남은 장작 위로 썸띵을 던져 넣었다. 잠시의 고통을 끝으로 그는 다시 형체 없는 자로 화했다.

화면 속에서 소녀의 비명은 날카로운 고양이의 울음소리로 치환된다. 불쑥 난입한 검은 고양이가 곁에 선 이들에게 달려들자, 화면이 별안간 암전된다. 코튼이 TV를 끈 것이다. 그제야 썸띵은 어느샌가 주변이 한결 잠잠해졌음을 깨닫는다. 코튼의 집은 그리 크지 않으므로, 그는 휘청이며 부엌에 가 날붙이를 쥔다. 제 뒤로 뒤따라오는 발소리를 듣고도 그는 망설이지 않고 현관에 섰다가 문득 우뚝 걸음을 멈춘다.

커다란 외눈을 통해 현관문에 달린 렌즈 너머를 엿보자, 같은 외눈이 이쪽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다.

3. 만약 당신이 문을 열기로 결심했다면, 가급적 그것의 존재를 긍정하십시오. 괴물을 사랑하려 노력하십시오. 그리하면 그것은 당신을 해치지 않습니다.

 

썸띵은 속으로 셋을 센다. 하나, 하고 그는 문을 벌컥 열어젖히며 검은 그림자를 향해 손을 뻗는다. 저것은 필시 사라져야 하는 과거의 자신일 것이다. 무고한 생명을 죽게 한 괴물에게 날붙이를 찔러 넣는 순간, 등 뒤에서 코튼이 썸띵의 허리를 잡아챈다. 동시에 손이 허공을 헛돌고, 앞으로 고꾸라지려는 것을 둘러싼 팔이 힘주어 당긴다.

“썸띵님…. 그러지 말아요. 그냥 고양이잖아요.”

눈앞에 어느샌가 잠잠해진 저녁 무렵의 바깥이 보인다. 할로윈 데이를 맞아 유령과 호박으로 색색이 장식한 가정집에서 따뜻한 불빛이 새어 나오고, 거리를 오가던 사람들이 놀란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시선을 내리자, 검은 고양이가 칠흑 같은 외눈으로 썸띵을 응시한다.

야옹. “그래, 착하지.” 코튼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고양이를 타이르며 한쪽으로 비켜서자, 고양이가 자신의 앞발을 핥아 얼굴을 몇 차례 문지르다 총총 집안으로 들어선다. 코튼이 썸띵을 뒤로한 채 조심스레 그를 따라간다.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그의 손아귀에서 텅, 하고 식칼이 떨어져 현관을 나뒹군다.

코튼이 옅게 웃는 얼굴로 소파 한켠에 몸을 말고 누운 고양이의 등을 사락사락 쓰다듬는다. 몹시도 사랑받은 듯 윤기가 반질거리는 털이 얇은 손 아래서 부드럽게 흐트러진다. 그것이 그릉거리며 몸을 뒤척이자, 코튼의 입에서 짧은 웃음소리가 터져 나온다.

썸띵은 코튼의 옆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조용히 현관문을 닫는다. 그들을 지나쳐 걸음을 옮기고, 열린 창을 모두 닫는다. 커튼을 치고 내내 꺼져 있던 불을 켜자 그제야 사위가 밝아진다. 그는 조용히 노트를 들어 글자를 쓴다.

[조심해요, 코튼. 그건 분명 괴물이에요.]

“어떻게 이렇게 착한 아이를 괴물이라고 부를 수 있죠, 썸띵님? 취급이 너무 박하네요.”

[코튼은… 그 고양이가 무섭지 않나요?]

“네. 이 아이, 과거의 썸띵님이라면서요? 제가 아는 썸띵님은 사람을 함부로 해치지 않아요.”

소파에 앉은 채 코튼은 검은 털을 가만 쓰다듬는다. 기분 좋게 골골대는 소리가 멎고, 그것의 눈이 꿈뻑꿈뻑 감기자 코튼이 손을 조심스레 떼어낸다. 어느새 고양이는 규칙적인 숨을 내쉬며 잠들어 있다. 괴물이라고 여겼던 것이 무색하게도 평안한 낯이다.

“귀엽네요. 제가 원하면 썸띵님도 고양이가 될 수 있나요?”

[코튼이 원한다면 그럴 수도 있죠.]

“하하, 아녜요. 저는 지금의 썸띵님이 더 마음에 들어요.”

근처에 어색하게 서 있던 썸띵을 코튼이 부드럽게 붙잡아 소파에 앉히곤, 자신의 입가에 손가락을 댄다. 쉬이, 하고 조용히 TV를 틀자, 이번엔 할로윈 데이를 맞아 거리를 누비는 인간들이 보인다. 저마다 들뜬 얼굴로 코스튬을 입고 서로에게 사진을 찍어주는 사람들. 손에 잭 오 랜턴을 본뜬 바구니를 들고 사탕을 받으러 돌아다니는 아이들. 혹시나 고양이가 깰까 소리를 작게 줄여 놓았으므로, 집안에는 잔잔한 침묵이 감돈다.

[고마워요, 코튼. 어떻게 해야 당신에게 은혜를 갚을 수 있을까요.]

“뭘요. 이미 이 고양이가 보답인걸요? 그러니 마음 쓰지 말아요.”

4. 자정이 되어 잠긴 문이 저절로 열린다면 건들지 말고 지켜보십시오. 망자가 당신에게 원한이 없다면 그것을 데리고 조용히 사라질 것입니다.

 

할로윈의 저녁이 평화롭게 흘러간다. 두 사람은 TV를 보다가, 몇 차례 일어나 간단한 간식을 가져다 먹었다. 시간이 흘러 늦은 밤. 세상모르고 잠든 고양이를 어떻게 내보내야 할까, 그들이 멀찍이서 고민하던 차에 누군가 잠갔던 문을 소리 없이 열고 들어온다.

무척 그리웠으나 어제 본 듯이 선명한 얼굴. 불에 타 죽었던 소녀가 옅은 광채를 띤 형상으로 달려온다. 흰 드레스 자락이 나부끼고, 주근깨가 점점이 내려앉은 앳된 낯이 환한 미소를 머금고 있다. ■■! 명랑한 목소리가 옛 이름을 부르자, 검은 눈이 스르르 뜨인다. 소녀가 말간 얼굴로 고양이의 이마와 턱을 간질인다. 그것이 작은 손에 얼굴을 비빈다. 야옹.

소녀가 고양이를 한 품에 안아 들고 부드러운 털에 뺨을 댄다. 까슬한 혀가 여린 얼굴에 난 솜털을 핥는다. 간지러운지 소녀가 품 안에 고양이를 소중히 안은 채 꺄르르 웃음을 터트린다. 부드러운 맨발이 거실 바닥을 사뿐히 딛고, 소녀에게 안긴 것이 품속에서 몸을 둥글게 말아 자리를 잡는다.

문간에 선 채, 소녀는 썸띵을 돌아보며 미소 짓는다.

맑은 눈동자에 어떤 원망도 비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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