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틀 써머 블랭크!
커미션 작업물 | 하이큐 |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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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인터넷에 이런 밈이 돌아다닌 적이 있었다. ‘복도에서 뛰지 말라는 규칙을 깨도 되는 때가 언젠지 알아? 바로 사랑하는 사람을 쫓아갈 때다!’
A는 실없는 생각을 머릿속에서 밀어둔 채 공항 한가운데를 전력 질주했다. 젠장, 늦으면 조지 삔다! 그의 손에는 부적이 들려 있었다. 커다란 손에 비해 앙증맞은 부적이 애처롭게 찌그러졌다.
귀여운 소품 가게 한가운데서 덩치를 구긴 채 한참 고른 부적이었다. 다른 선물도 아닌 부적을 고른 이유는 말하자면 단순하고도 복잡한데, 발상은 어제저녁 9시 뉴스에 비행기 추락 사건 속보를 본 뒤에 시작됐고, 결심은 문득 유독 입이 짧고 잔병치레가 잦았던 H를 떠올린 뒤에 마쳤다. A는 공항에 도착하기 전 왠지 모르게 멋쩍은 기분으로 소품 가게에 들렀다. 한참을 뒤적인 끝에 그는 검은 바탕에 푸른색 글씨로 ‘건강 기원’이라 쓰인 부적을 샀다. H가 어디에 있든 건강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굳이 지나가는 말인 체 좋아하는 색깔까지 물어 가면서.
저만치 H가 보였다. 약속 장소인 7번 게이트 앞에서 H는 캐리어에 걸터앉아 휴대폰과 전광판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시간이 촉박한 모양이었다. 발소리가 가까워지자, 그가 일어나 A를 향해 환히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A 씨!” A는 그제야 부러 규칙적인 숨소리를 내뱉으며 불쑥 부적을 내밀었다.
“내 쪼매 늦었제? 자, 이거.”
“어? 저 주는 거예요?”
의아한 시선이 잠시 제 손에 닿았다가, 찬 손이 손바닥 위에 놓인 부적을 가만히 쥐었다.
H가 건네받은 부적을 가만히 내려다보곤 풋,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부적은 그사이 조금 구겨져 있었는데, A는 의연한 표정을 가장하며 속으로 작게 욕설을 삼켰다. 아, 생각해 보니 포장도 없잖아. 신경 좀 쓸 걸, 이 쓰레기ぽんこつ!
“고마워요! 덕분에 올해는 여름 감기에 안 걸리겠어요.”
“하하, 아프지 마래이. 밥 잘 챙겨 묵고.”
“아하하, 그럼요~.”
속도 모르고 웃는 얼굴이 공항의 백색 조명을 받아 오늘따라 유독 말갛게 빛나 보였다. 어쩐지 볼이 화끈했다. 젠장, 뭐라도 지껄여야 하는데……. 하얘진 머릿속에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 사이 H는 액정을 터치해 시간을 재차 확인하고, 그를 향해 도로 고개를 들었다.
“슬슬 시간이 다 돼서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마중 나와 줘서 고마워요, A 씨!”
“어어, 가라.”
‘어어, 가라’가 뭐냐?! A는 스스로에게 저주를 퍼부으며 H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응?” H가 의아한 낯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때로는 생각보다 몸이 빠를 때가 있다. 지금이 그랬다. 그는 인지하지 못한 사이에 제 손에 쥐어진 옷자락을 힐끔 내려다보았다가, 뒤늦게 화들짝 놀라 손을 떼었다.
“아, 미안.”
“왜 그래요?”
“그으…….”
H의 고개가 모로 기울여졌다. 아, 씨.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더라.
“니 그거 아나. 프랑스 사람들은 만나면 반갑다고 뽀뽀뽀, 갈 때는 간다꼬 뽀뽀뽀 한다 아이가.”
“네?”
“그니까, 그… 친애의 의미로, 내 욕심 함만 부리면 안 되겠나.”
“…뽀뽀를 한다고요…?”
“아니! 포, 포옹! 포옹이다!”
깜빡, 당황한 듯한 고동색 눈동자가 이쪽을 향했다. 망했다……. A는 다시금 스스로를 저주하며(이 쓰레기!) 멋쩍은 웃음을 띠었다. ‘아이다, 못 들은 걸로 해라….’ 그리 말하려던 차였다.
“그래요!” H가 언제나처럼 밝은 표정으로 답했다. 왠지 모를 거리감을 느끼게 하는, 단정하고 견고한 미소. 짧은 답을 끝으로 저보다 한참 작은 체구가 팔을 들어 자신의 몸을 둘러 안았다. 그야말로 이성인 친구 사이의 가벼운 스킨십이었다. 가슴이 닿지 않고, 짧게 몸이 죄었다 풀려나는 짧은 접촉.
그 팔이 자신에게서 떨어지기 전에 A는 저도 모르게 작은 등을 꽉 끌어안았다. 크게 숨을 들이마시자 머리칼과 목덜미에서 좋은 향기가 났다.
“…….”
“…A 씨?”
“어, 미안타. 쪼매 답답했제.”
A는 그를 조심히 밀어내고 고개를 돌려 주먹을 입가에 댔다. 큼큼, 괜히 시선을 돌리고 헛기침을 내뱉는 사이 H는 아무 말도 없었다. 아, 젠장……. 또 내 욕심 땜에 H만 곤란하게 한 거 아이가…….
“…저! 진짜 가 볼게요. 이제 출국 시간이 얼마 안 남아서요.”
“어, 어어! 얼른 드가라! 난제 보자, H!”
“네, 방학 끝나고 봐요!”
캐리어를 끌고 수색대 안쪽으로 들어가는 H를 향해 A는 손을 크게 휘둘렀다. H가 평소보다 붉어진 얼굴로 마주 손을 흔들어 주었다. 가냘픈 뒷모습이 문 안쪽으로 사라지고 나서야 그는 천천히 등을 돌려 공항을 걸어 나갔다.
‘쳇… 도대체가 뭐 하는 짓거리고, 나.’ 흑역사로부터 도망치듯 걸음이 점차 빨라졌다.
*
우예 해야 생각을 안 할 수 있는 기고? 가를 생각하지 않을라 카믄 생각 안 한다는 생각도 생각이라 자꾸만 연쇄적으로 가를 생각해 뿔고, 가를 떠올리면 그때 샴푸 향기가 생각나가 머릿속이 허얘진다 아이가…….
“니 은제까지 그칼끼고? 생각 풍선 다 빈다.”
시야 끝에 O의 얼굴이 불쑥 끼어들었다. 무한한 생각의 굴레를 끊어낸 그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쯧쯧, 차면서 덧붙였다. “중증이다, 중증.”
어느덧 여름방학 3주 차. A와 O, S는 A의 방 가운데 둘러앉아 있었다. 가운데에 놓인 휴대폰에서 잠시 알림이 울렸다 사그라들기를 반복했다. 덩치 큰 남자애 셋이 좁은 공간에서 같은 공기를 들이마시는 것도 꽤 고역인지라, 세 사람은 적당히 거리를 두고 자세를 고쳤다. 그 사이 휴대폰의 화면이 또 켜졌다가 잠잠해졌다.
“O. 이래 갑자기 찾아가도 되는 기가. 그것도 시커먼 머스마 셋이서.”
“그럼 혼자 갈라꼬?”
“그게 아이고….”
“그래, 가라, 마. 가서 H랑 껴안고 뽀뽀하고 다 해라.”
“뽀… 니 미칬나!”
A의 발길질에 O가 나동그라졌다. “와 때리노!” “니가 방금 주둥이로 똥 쌌다 아이가!” “공항에서 안았다매!” “친구로서 친애의 표현이라 안 캤나!” 시끌벅적한 드잡이질 가운데 셔터 소리가 찰칵, 하고 울렸다.
“얘네는 언제까지 싸울 생각이냐….”
예의 무기력한 목소리로 중얼거린 S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갤러리를 넘겼다. A와 O가 서로 멱살을 쥐고 엎치락뒤치락하는 사진만 네 컷이 담겼다. 이제 이것도 식상하구만……. 자신의 휴대폰을 대충 던져둔 S가 가운데 놓인 A의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계속 싸워라. 그사이에 내가 라인 대신 쓸 테니까. 어디 보자… ‘안녕H야너를처음본순간부터좋아했어방학전에고백하고싶었는데바보같이그땐용기가없더라지금은이수많은사람들앞에서’….”
“어이! 잠깐, 타임―!”
처절한 외침을 끝으로 A가 휴대폰을 휙 낚아챘다. 화면에는 아무것도 띄워져 있지 않았다. “S, 이 자식….” 덩그러니 배경 화면을 내려다보던 그가 결심했다는 듯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가 경건한 자세로 앉았다. 굳이 정좌를 하고, 양손으로 휴대폰을 들고서.
크게 숨을 들이쉬고 내쉰 다음, A는 발신 버튼을 눌렀다. 수신인은 H. 몇 차례 신호음이 울리자 휴대폰 너머로 그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A 씨!] 그런데 반가운 듯한 인삿말에 잡음이 섞여 있었다. 야, 힐 해! 힐! 징크스 반피, 징크스 반피! 야, 씨바, 아악! 에반데!
“어, 저거 오버워치 할 때 쓰는 말인데.” “뭐꼬, 그게?” “너 모르냐? 경쟁 게임에선 한국어가 암묵적 공용어다. 가자, 뭐 해, 오른쪽, 반피, 피1, 아, 씨.” “엑. 진짜가.” 주변에서 끊임없이 잡소리가 들려왔다. 휴대폰을 댄 오른쪽 귀에도 트여 있는 왼쪽 귀에도 잡음이 섞이자 정신이 몹시 사나웠으므로, A는 “시끄럽다!” 하는 호통을 끝으로 스스로를 방 한구석에 처박길 택했다.
“아, 내 물어 볼 게 있어가 그런데.”
[네, 뭔데요? 야, 야! 저거 잡아, 바텀에 카이사! 피1! …아! 미안해요. 지금 친구들이랑 게임 중이라….]
어라, H 원래 이런 목소리던가? 평소 묘하게 경직된 듯이 높고 명랑한 목소리와는 달리 상대적으로 저음인 목소리가 귓가에 꽂혔다. 한국어를 할 때는 이런 톤이었나……. 쫌 므찌네…….
팔불출도 병이라면 병이었으나 A는 진심으로 자국의 언어를 쓰는 그가 좋았다. 조금 더 솔직하고 자유로워 보이는 모습, 한 겹의 벽을 넘어선 듯 솔직함이 묻어나는 목소리. 한국에 가면 저 목소리를 더 많이 들을 수 있으려나. 잠깐의 사색을 끝으로 A는 보는 사람도 없는데 고개를 저었다.
“아, 미안. 바쁘나? 난제 전화하까?”
[아뇨! 잠깐이면 괜찮아요.]
대답과 동시에 주변에서 누군가의 욕설과 함께 그를 향한 말이 들려왔다. 야, H. 너 누구랑 통화하냐? 아, 친구. 네 일본 친구? 아오, 말 걸지 마! 중요한 통화야! 한국어라 통 알아먹을 순 없었지만 죄 남자애들이었다.
잠깐, 친구가 전부…… 남자……? 아니, 아니. 딱히 상관없지만. 여기 있는 셋도 물론 시커먼 머스마지만, 절대 감정 상하거나 한 건 아니지만, 정말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생각이 무색하게도 통화 내내 호선을 그리던 입꼬리가 묘하게 내려갔다.
“H, 일본에 언제 오나.”
“응? 이틀 전 도착으로 끊어 놨는데, 왜요?”
“아, 긋나?”
“아하하, 깜짝 이벤트라도 준비하려고요?”
어떻게 알았지. “아이다! 궁금해가 무본 기다!” 다급히 변명하는 목소리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궁색해서, A는 이마를 짚고 몸을 웅크렸다. 그 사이 책장과 벽 사이에 박혀 있는 그를 향해 힐난의 시선이 쏟아졌다. “자 와 저카노, 참말로.” O의 목소리가 뒤통수를 후리고 지나갔다.
[아, 그래요? …어! 야, 한타 났다! 미드, 미드에 한타! 애쉬 딸피, 애쉬 딸피! 와앗! …으앗! 정말 미안해요, A 씨! 나중에 라인 할게요!]
“어어, 알았다….”
통화가 끝났다. 시끌벅적한 잡음이 일시에 사라지자 방 안에 순식간에 적막이 감돌았다.
‘닌 나 없이도 잘 지내는 갑네….’ 분명 기쁜 일인데, 입안이 쓴 건 어째서일까. 괜히 심란해진 기분에 A는 내내 노려보던 벽에 이마를 댔다. 더운 몸이 그제야 식는 기분이었다. 방 안에는 선풍기만으로 해갈할 수 없는 한여름의 열기로 가득했고, 등 뒤에서 자꾸만 서성이는 소리가 났다.
“뭐래.”
“뭐라카드나?”
에휴. 복잡하게 생각해가 뭐 하노. A는 긴 한숨을 내뱉고, 뒤돌아 잠시 마른세수를 했다.
“아니, 뭐. 방학 끝나기 이틀 전에 온다 카던데.”
“아, 그래? 그럼 인자 비행기 표 끊으면 되겠네. 근데 니 표정이 와 그라노? 실연당했나.”
“실연 아이다! 이 쓰레기야!”
“와 내한테 화를 내노!”
“또 시작이다.”
가벼운 다툼을 끝으로 세 사람은 한국에서 뭘 할지 간단한 계획을 세웠다. 일단 공항에서 짜잔! 하면서 H에게 한국 도착을 통보하고, 도착한 다음에, 그 다음엔……. ……그런데 H 친구가 저래 많은데 마중 나올 수 있나?
“나 간다.”
“드가라.”
아홉 시가 넘어서야 그들의 토론은 끝이 났다. 애초에 H를 만날 목적이었으니, 계획이랄 게 무색하게 수도권의 관광지를 몇 군데 고른 게 전부였지만.
A는 S를 배웅하고 잘 준비를 마쳤다. 침대 위에 눕자 부드러운 정적을 배경으로 바깥에서 풀벌레 소리가 들려오고,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가 유독 선명하게 느껴졌다. 여름을 맞아 얇고 까끌한 이불이 살결에 닿았다.
그러고 보니 H는 피부도 희고 고왔지. 어둠에 익숙해진 눈으로 천장 무늬를 세던 A가 무의식적으로 H를 떠올린 찰나 라인 알림이 울렸다. A는 벌떡 몸을 일으켜 근처에 놓인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생각, 그놈의 생각 좀 멈추라고! 속으로 아우성치면서도 그는 부신 눈을 찌푸리며 액정을 빤히 보았다. H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사진].
사진 속에서 H는 밤거리를 배경으로 환히 웃고 있었다. 가로등 불빛 아래, 한껏 멋을 부리고 당차게 브이를 그린 모습이 무척 예뻤다. 왜인지 평소보다 꾸밈없는 웃음이 만면에 피어 있어서, A의 입가에도 미소가 맺혔다. 언제 질투했냐는 듯, 정말이지 속도 없이.
[오! 잘 나왔네!] 답장과 동시에 읽음 표시가 뜨고, 화면에 헤헤 웃는 여우 이모티콘이 올라왔다. 그런데 이 여우, 옛날부터 꾸준히 쓰네. 귀엽그로……. [조심히 드가고, 잘 자.] A는 이모티콘에 작게 반응을 남기고 휴대폰을 덮었다.
침대 위에 누워 눈을 감고, 가만히 H를 떠올렸다. 공항에서 자신을 반갑게 맞이하는 H. 번화가를 활보하며 환히 웃는 H. 자연스레 한국어로 대화하는 H. 그의 말간 얼굴이 머릿속에 스치자 자꾸만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아무래도 내 니를 많이 좋아하긴 한갑다.
쫌만 기다리래이, H야. 내가 가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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