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문처방 야행성 수면제

상뱅 / 뱀파이어

 다만 열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사내아이 하나가 막 물에 빠져 죽었는데 코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제야 자신이 마신 술이 피였음을 깨달았다.*

唯見一童子可年十五, 新溺死, 鼻中出血, 方知所飲酒, 是其血也。

* * *

 밤이 되면 그가 온다. 시궁쥐나 거미처럼 은밀하게. 거리에 내려앉는 스모그와 함께. 옷자락에는 무덤의 한기를 묻힌 채로. 물론 고색창연한 흑색 망토를 휘날리며 오는 건 아니다. 안개가 되거나 박쥐의 모습으로 오지도 않는다. 

 초인종 소리와 함께 내 아파트의 인터폰 화면에 비치는 건 평범한 십대 소년이다. 키가 꽤나 크고, 안색은 조금 창백하다. 색소 옅은 갈색 머리는 항상 이마 위에 흐트러져 있다. 그 아래의 두 눈도 머리카락과 같은 색이다. 탐정, 혹은 정보계 형사, 아니면 보험 조사관을 연상케 하는 눈빛. 사물을 탐색하고 분석하는 시선. 조사 결과에 마침표를 찍어 마무리하듯 왼쪽 눈 아래에는 눈물점이 있다.

 그는 흡혈귀다. 그리고 나에게 완벽하게 최면을 걸었다고 착각하고 있다. 

 * * *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피를 갈구하며 밤을 거니는 산송장들이 있다고. 그들은 교묘한 포식자이자 매혹자들이라고. 그들은 우리 사이에 있다.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다. 그들의 내력도 연원도 인류 문명만큼이나 오래되었다. 그들에게도 나름의 사회가 있고, 계급이 있고, 모든 것을 지탱하고 유지시키는 엄격한 규칙들이 있다. 그리고, 그리고….

 그는 흡혈귀들의 사회에서도 일종의 신참이었다. 끊임없이 본인의 쓸모를 입증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했다. 한 번의 실수를 만회하려 해도 백 년은 족히 걸리는 사회. 여러 세력 간의 역학관계는 거미줄과 같이 정교하게 얽혀 있으며 보이지 않는 칼날 위에서 곡예를 벌여야 한다….

 그는 피에 대한 갈증을 견디기 힘들다고 한탄했다. 인간이 먹잇감으로 보이는 게 싫다고 했다. 생전의 가족과 친구들이 보고 싶다고 했다. 더불어 이런 고뇌가 언젠가는 무감해질 거라는 게 가장 괴롭다고도. 

 모두 그가 나를 앉혀 두고 털어놓은 내용들이다. 무의미하게 허공을 떠돌다 아무도 모르게 사라질 거라 기대했겠지. 저런, 나는 상담사 같은 게 아닌데.(상담사라면 오히려 내가 더 필요하다. 보통은 으스러진 무릎 관절에서 흘러나온 체액이 무슨 색인지 알 일 없이 살아가니까. 나도 몰랐으면 더 좋을 뻔했다.)

 문제는 그의 이야기를 내가 모두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다. 최면인지, 세뇌인지, 그의 기이한 능력은 내 정신까지 조종하지는 못 한다. 몸은 내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지만 의식만은 언제나 또렷했다. 어째서인지는 나도 모른다. 덕분에 평생 알 일이 없었던 것들, 알아서는 안 되는 것들에 대해 알게 되었다. 찾으려면 어디에서든 그들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내게는 이것이 일종의 숨은 그림 찾기와 비슷하게 느껴졌다. 발견하기 전에는 모르지만, 발견한 이후부터는 선명히 눈에 띈다. 

 나는 편집증에 걸린 음모론자가 되는 대신에, 투사나 고발자가 되는 대신에, 한 발 물러나 새로 알게 된 모든 걸 외면하기를 택했다. 예전부터 그래 왔던 것처럼.

 그가 언제부터 내 일상에 파고들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수면제를 먹고 겨우 잠들었던 어느 날 밤, 눈을 떴더니 나는 소파에 앉아 있었고 그는 내 목을 물고 있었다. 갈색 머리카락이 뺨을 간질였다. 당장이라도 소스라치며 뿌리쳐야 했겠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눈을 깜빡일 수도 없이, 양 어깨를 단단히 붙들린 채 피를 빨렸다. 송곳니가 박힌 목으로 전신의 감각이 몰린다. 심장은 요동침 없이 평온하고, 가느다란 숨결이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빠져나온다. 마치 혈관에서 빠져나가는 피처럼. 220볼트의 콘센트와 닮은 두 개의 자국으로 열락이 스며들어 흘렀다. 낯설고 현란한, 산산히 부서지는 유리 조각처럼 작고 예리한 기쁨들이었다. 이것이 피를 내준 대가일지도. 나는 겁에 질리거나 경악하는 대신 생각했다. 이런 대가를 얻을 수 있다면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교환이 아닐까. 

 잠시 후 그가 천천히 입을 뗐다. 아직은 갈증에 압도당하지 않은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잘 먹었어요.”

 먼 지방의 사투리 억양이 느껴지는 말투였다. 그는 혀를 내밀어 내 목에 남은 송곳니 자국을 핥았다. 피를 머금고 따뜻해진 혀가 스치자 상처는 곧바로 아물어 없어졌다. 안녕히 주무시라는 그의 인사와 함께, 내 다리는 휘청이고 비척거리며 어슴푸레한 거실을 지나 침실로 향했다. 그리고 나는 꿈도 꾸지 않고 깊이 잠들 수 있었다.

 이후에도 그는 나를 자주 찾아왔다. 인터폰 화면 너머로도 최면이 걸리는 줄은 몰랐다. 눈을 마주치는 게 중요한 걸까? 아무튼 나는 그에게 매료당하지도, 공포를 느끼지도 않았지만, 그와의 기묘한 교류는 기꺼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비록 그게 초자연적 존재에 의해 시작된, 전적으로 일방적인 교류더라도. 그는 생존에 필요한 피를 내게서 얻어 가는 대신 피가 빠져나간 자리에 그만큼의 기쁨을 채워 주었다. 약이 없어도 숙면할 수 있는 건 덤이었다.

 그는 흡혈하지 않는 밤에도 나를 찾아왔다. 조그만 아이스박스는 왜 들고 왔나 했더니, 그 안에는 혈액 팩들이 들어 있었다. 전부 O형 혈액이었다. 그러고는 나를 앉혀 두고 흡혈귀로서의 비애에 대해 털어놓았다. 예의 그 한탄들이었다. 한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혈액팩 하나를 비우고, 또 다른 주제로 넘어가고, 이하 반복. 글쎄, 친구의 술주정은 관대한 마음으로 들어줄 수 있지만 이건 뭐라고 해야 할지. 바닥에 피만 안 흘리면 좋겠는데…. 

 어느 날 갑자기 초자연적인 존재가 된다면, 살인 면허라도 발급받은 것처럼 날뛰는 부류가 있고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는 부류가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본 그는 후자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들과 섞여 살아야 하는 평범한 인간으로서도 전자보다는 후자가 나았다.

 어떤 날은 교복 차림이었다. 그냥 입어 보고 싶었다고 했다. 교복 재킷에 달린 명찰을 보고 그의 이름이 기상호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상호야, 네가 실제로 몇 살인지는 모르겠지만, 혼자 사는 성인 남자 집에 고등학생처럼 보이는 사람이 드나들면 이상해 보이지 않을까. 사람들은 이웃 일에 무관심한 것 같으면서도 다 보고 있더라고. 

 어쨌든 내 의견이야 입 안에 갇혔으니 말하고 싶어도 말할 수 없었다. 기상호는 자신의 이름을 내보인 만큼 사적인 이야기를, 인간이었을 때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고 자란 곳은 부산.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좋아했고, 컴퓨터를 아주 잘 다뤘다. 올림피아드나 경시대회에 출전해 상을 타기도 했다.(뭐라더라, 무슨 툴에 대해서도 한참 설명을 했는데 난 잘 못 알아들었다.) 숨겨진 무언가를 찾아내는 데에도 솜씨가 좋았다. 그리고 그건 인생에 유용한 결과를 가져다 주지 않았다고 한다. 

 우연히, 그저 순전히 우연으로 그들이 모이는 다크 웹 같은 걸 발견했고, 곧 역으로 추적당했고, 그 다음에는 그들이 직접 기상호를 찾아왔다…. 인간 기상호의 짦은 삶은 그렇게 끝났다. 기상호의 죽음은 비 오는 밤, 맨홀 뚜껑을 잘못 밟고 빠져 실종된 사고로 위장되었다. 

 그리고 기상호를 흡혈귀로 만든 어버이 같은 존재가 있었다. 능묘에 장식된 화강암 문인석만큼이나 해묵고 냉담한 주인. 문자 그대로 피로 이어진 관계. 그를 두려워하면서도 경애했고, 되도록 언급하려 하지 않는 것 같았다. 내가 그를 닮은 것 같다고 짧게 말하고 넘어가는 정도였다. 그래서 나를 찾아내 택한 걸까.

 나는 이전부터 기상호의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해 왔다. 어떤 구조나 집단에, 체계에 속하게 된다면 무력한 개인으로 남는 건 인간이나 흡혈귀나 비슷한 것 같다고 말이다. 모든 게 불합리하다는 걸 알아도 딱히 할 수 있는 건 없다. 대개 순응하거나, 타협하거나, 아니면 나처럼 다 관두고 떠나 버리거나. 이런 말을 해 준다면 꼰대나 패배주의자, 혹은 패배주의자 꼰대 소리를 듣겠지만. 

 내 상념이야 어찌 됐든 기상호는 자신의 이야기를 계속했다. 같이 어울리던 친구들은 어른이 되었을 거고, 나이를 먹으며 평범하게 살아갈 거고, 이미 모두 자신을 잊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어느 샌가 기상호는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투명한 눈물 대신 엷은 붉은색의 핏물이 뺨을 따라 흘러내렸다.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지 입술을 계속 달싹였지만 잘 들리지 않았다. 살아 움직이는 시체라면 호흡도 의식적으로 해야 할 거라는 게 새삼스러웠다.

 

 “…괜히 이런 얘길 했나 봐요. 죄송해요.”

 기상호가 어린 아이처럼 손등으로 눈과 뺨을 문질렀다. 창백한 뺨에 핏물이 번져 연지를 펴바른 듯 발그레해졌다. 아니, 그렇게 죄송해할 것까지야. 

 “그럼 가 보겠습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나는 기상호의 괴로움을 완벽하게 이해하거나 공감할 수는 없었다. 문제를 해결해 주거나 삶의 무게를 같이 짊어져 줄 수도 없었다. 그가 내 삶을 위로해 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도 그를 진심으로 위로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우리의 거리감은 대개 그 정도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래도 그날 밤은 그가 더는 울지 않기를 바랐다. 이건 진심이었다.

 * * *

 기상호가 오지 않는 밤은 조금 더 고독하고, 더 무료하다는 걸 문득 깨달았다. 동시에 의문이 들었다. 그는 내 이름을 알던가? 아무래도 모르는 것 같았다.(내 지갑을 몰래 뒤진 적이 없다면.) 

 그래서 달의 표면처럼 적막한 거실에 내 이름이 있는 명세서를 놓아 두었다. 원래는 매달 날아오는 그런 종류의 종이와 거기 적힌 숫자들만이 내가 세상에 발붙이고 있다는 걸 증명해 주었다. 최근에는 하나 더 늘었다. 

 

“…병찬, 병찬이 형.”

 이렇게, 내 이름을 낯설게 불러 주는 손님이. 꽤나 시간차가 있는 통성명이 드디어 완료되었다. 서로의 직업이나 소득, 아니면 사회적 지위에 대한 탐색전을 벌이는 관계는 아니다. 다행스럽게도.

 “병찬햄.”

 

 방금 알게 된 것. 이름을 불려도 최면 상태는 풀리지 않는다. 기상호는 더 짧아진 호칭만큼 거리를 좁혀 다가왔고, 그대로 고개를 숙이다 멈칫했다. 아마 양쪽 목빗근에 비스듬하게 붙여 둔 파스를 보았을 것이다. 딱히 불편한 곳은 없었지만 그가 어떻게 나올지 궁금해서 붙여 보았다. 만약 목을 물 수 없다면 어디를 물까? 팔목? 팔목을 문다면 왼쪽일까, 아니면 오른쪽일까.

 다 틀렸다. 허벅지 안쪽이었다. 기상호는 어깨를 잡았던 손 그대로 나를 부드럽게 밀어서 소파에 눕혔다. 비스듬하게 뜬 다리를 잡은 다음, 적당히 구부려서 마저 밀어 넣었다. 그리고는 내 바지를 내리기 시작했다. 살짝 허리를 들어 보라는 지시는 덤으로. 

 결국 나는 죽은 개구리 같은 자세로 누워 있게 되었다. 맨 살갗에 와닿는 공기가 생경했다. 기상호는 바닥에 앉아 상반신을 내 쪽으로 기울였다. 오른쪽 허벅지를 붙잡은 손이 무척 차가웠다. 혈색도 온기도 없는 죽은 사람의 손. 다리가 억지로 벌려지자 굳어 있던 고관절이 비명을 질렀다. 글쎄, 벽을 보면서 손을 짚고 그대로 있으라는 명령보다는 나으려나. 아무튼 은유와 실제에는 다소간의 차이가 있다.

 곧 오른쪽 허벅지 안쪽에 기상호의 송곳니가 박혔다. 입술의 감촉이 까슬했다. 피와 함께 빠져나가는 건 당혹감과 혼란스러움. 불쾌하게 조여들었던 심장은 다시 느슨하게 풀려난다. 잠시나마 일었던 마음의 동요는 혈류에 녹아드는 희열보다도 먼저 녹아내린다. 그리고 모든 게 찰나와 같이 끝난다. 그가 입을 떼자, 처음으로 아쉬움을 느꼈다. 

 어쩌면 나는 이 기묘한 관계에 정이 붙어버린 걸지도 모르겠다. 이대로 조금만 더 있으면 좋겠다거나, 가지 말라는, 밀어조차 될 수 없는 그런 상투적인 말은 오로지 내 머리 속에서만 맴돈다.

 하지만 기상호는 몸을 일으켜 올라왔다. 여전히 벌려져 있는 양 다리 사이로 파고들었다. 멈추지 않고 심장 위로 머리를 포갰다. 낡고 작은 소파가 나와 그의 무게로 삐걱였다. 두 사람분의 무게, 한 사람만의 심장 박동. 

 여느 때보다 더욱 말이 없던 기상호가 짧게 입을 열었다. 

 “형, 안아 주세요.”

 내 팔은 순순히 그의 등허리께를 감싸안고 끌어당긴다. 몸을 겹치고 있어도 맥박이 뛰는 소리는 결코 겹쳐지지 않는다. 우리의 교류가 상호적일 수 없는 것과 비슷할 것이다. 

 나는 기상호의 표정을 볼 수 없었고, 그래서 그가 오늘 밤의 고해를 시작했을 때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도 확인할 수 없었다. 이번에는 울지 않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하지만 사람을 잡아먹는 제가, 사랑을 해도 괜찮을까요, 하는 읊조림은 확실히 들었다. 나야말로 묻고 싶었다. 이런 내가 너를 연민해도 될까? 질문은 전해질 수 없고 대답은 돌려줄 수 없다. 

 형, 이건요, 특권도 무엇도 아니예요. 제게 특권이 있다면 더 이상 죽지 않을 거라는 거 말곤 없겠죠. 기상호는 그렇게 말을 마치고 내 품에서 빠져나갔다. 일어서서 나를 내려다보는 표정이 묘하게 애처로워 보였다. 이제 안녕히 주무시라는 인사와 함께, 침실로 향해 머리를 누이게 될 것이다. 그렇게 나의 일과가 끝난다. 지금까지는 그래 왔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달랐다. 기상호는 옷을 다시 입혀 준 뒤 나를 안아들었다. 등 뒤쪽과 무릎 뒤쪽으로 손을 넣어서, 마주 볼 수 있도록.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 것처럼 가볍게. 마치 어린 아이나 인형을 안아드는 듯한 자세였다. 사람을 어깨로 짊어지는 도수운반법 같은 걸 배운 적도 없을 테고, 그나 나나 교련 세대는 아니니까…. 

 

 “매번 말 한 마디로 사람을 조종하는 게, 좀 그렇더라고요. 기억은 못 하시겠지만….”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하고 기상호는 겸연쩍게 말을 덧붙였다. 거기까지는 괜찮았다. 나는 안겨서 들어올려지다 커피 테이블 모서리에 종아리를 찍혔고(평균보다 큰 키의 단점이다.), 그는 나보다 더 놀라며 몸을 틀었다. 반시계 방향으로 반 바퀴 정도. 그 서슬 그대로 거실에 쌓아 놨던 책 더미에 머리를 부딪혔다. 스트라이크. 오래된 반양장본 시집들이 홰를 치듯 펄럭이며 나뒹굴었고, 하드커버로 제본된 책들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묵직했다. 

 나는 이마가 부딪히려는 순간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그럼으로 최면이 풀렸다는 걸 깨달았다. 작게나마 충격을 받아서일까, 아니면 최면을 건 본인이 당황했기 때문에 그런 걸까?

 자, 기상호에 대해 새로 알게 된 것들을 정리해 보자. 성인 남성을 가볍게 드는 괴력이 있고, 정신을 조종하는 능력도 완벽한 건 아니고, 잊어버리지 않고 바지를 도로 입혀 줄 정도로는 상식이 있다. 고맙기도 해라.

 기상호는 고장난 녹음기처럼 연거푸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하며 침실로 향했다. 나로서는 벽에 부딪히지 않아서 다행일 뿐이었다.

 “정말, 정말 죄송해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그건 나도 안다. 사람 머리통으로 볼링을 하는 취미도 없겠지. 앞으로도 인간성을 잘 간직하고, 그런 취미는 만들지 말길 바란다…. 

 “책은 원래대로 정리해 두고 갈게요. 좋은 밤 되세요, 형.”

  

 방문이 닫혔다. 잠이 오지 않았고,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았다. 기상호가 있는 밤에 작별 인사를 남기고 싶었다. 입 안에만 머물렀던 말을 꺼내어 놓을 수 있을 때에. 밤이 다시 무의미하고 공허한 시간이 되기 전에. 

 나는 침실 문 앞까지 다가가, 어둠 속에서 그의 발소리가 가까워질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또 보자.”

 

 기상호는 내 인사를 들었을 것이다. 얇은 나무 문 너머, 가볍게 바닥을 디디던 발소리가 순간 멈추었으니까. 잠시 동안의 망설임과 침묵. 그 다음, 발소리는 다시 멀어지고 현관문 도어락의 전자음이 들린다. 안녕. 

 나는 네 유일한 이해자도 동반자도 될 수 없겠지만, 너를 기억하고 받아들여 줄 수 있어. 네 이야기를 얼마든지 들어줄게. 그렇게라도 네게 위안이 되면 좋겠어.

 * * *

 

 “계세요? 형, 저 상호인데요….”

 


*한문 원문은 『낙양가람기(洛陽伽藍記)』권3의 '대통사'조에서, 번역문은 양현지 저, 서윤희 역, 『낙양가람기』(눌와, 2001), p.121에서 인용하였습니다. 

이번엔 트친분들을 위해 썼읍니다 ◠‿◠  부족한 소설이지만 부디...

뱀파이어 연대기 뱀파이어 더 마스커레이드 월야환담 등등의 영향을 받았음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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