離れていても

5년

푸른잔향 by R2di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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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LCScko4XF9k?si=imDDTckiSpgWhl9G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이 자리에 항상 돌아오는 것은 당신에게 속죄를 하기 위함이라. 잊히기 전까지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 다짐은 하였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이 있는 법이니까. 그래서 나는 이번 해의 오늘도 당신의 무덤 앞에 서 있다. 기억 속 그 누구의 육신도 남아 있지 않아 무엇도 묻히지 않은 무덤이라고도 부르기 애매한 것 앞, 들꽃밭에 서 있다. 절벽 위에 있어 조금만 더 앞으로 가면 나를 절대 놓아주지 않던 바다가 한 눈에 들어오곤 한다. 이제는 익숙해져 기시감을 느끼지 않게 된 짧아진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 정리한다. 바다의 짠내음이 불어오는 맑은 하늘의 풍경은 내가 이 세상에 동 떨어진 존재라는 것을 느끼게 만들었다. 묘비의 앞에서 나는 무슨 생각을 하느냐면 이상을 끌어안고 익사한 당신이 나름 부러울지도 모르겠다-라는 생각을 한다. 가장 완벽하며 완전하지 못한 모두가 손에 넣고 싶어 하는 실험체. 나는 그곳에서 나를 찾았다. 사람이 되지 못한 추악한 괴물, 그것마저도 나인 것을 나는 이제서야 받아들이기로 했다. 인간이 되지 못할 존재. 태어났을 때부터 당연한 사실이었지만 스스로가 그것을 외면하고 회피해왔음을 이기심 많은 자들의 목을 비틀고서야 인정하게 되었다. 난, 당신 같은 존재가 될 수 없다고.

어느 삼류 소설의 도입부분들이 그렇듯 처음으로 추격자들이 나를 발견한 날은 비가 내려 냄새가 흐려져 일반인과의 구별이 어려운 밤이었다. 나름 잘 숨어 다녔다고 생각했지만 개인과 다수의 정보력은 비교할 수 없으며 나를 찾기 위해 안달이었을 테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였다. 나의 것이며 나의 것이 아닌 기억에 의존하자니 저들의 목을 제 손아귀에서 비트는 것은 역겨운 것이었고, 치명상까지가 상한선이 되었던 것이다. 나를 지키면서 남의 목숨을 빼앗지 않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언니는 그리 살아왔다 자신이 무너져내려갔음에도 죽이지는 않는 그런, 미련하다고 생각될지도 모르겠다는 삶을 선택했다. 실제로 같은 선택의 순간이 오니 그것이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때문에 죽일 수 없어 도망을 치다 절벽을 구른 적도 있으며, 뼈가 부러진 적도 있으며, 칼로 난도질 당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들을 죽이지 않았고 그러지 못하였다. 언니는 그리 생각하지 말라고 하였겠지만 스스로 남은 죄책감의 흔적은 언제나 나를 붙잡아 선택을 좌우하곤 했었다. 나의 미성숙한 부분을 그런 유치한 사유를 명분으로 삼아 망설였다. 나를 찾기 위해 떠난 여행은 나를 찾기 보다는 나 스스로가 어떤 존재인지 눈을 돌릴 수 없게 하는 여행이었다. 나는 세상에 유일무이한 만들어진 초월자였으며. 그럼에도 완벽하지 못한 실험체라 만일에 내가 완벽했더라면 더 많은 것을 지켜낼 수 있었을 것이었다. 마주해야한다, 무너지지 말아야한다. 더 멀리멀리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이따금 당신을 추모하고 나는 모두에게서 잊혀져야 한다. 모두가 당신을 기억하고 나는 기억하지 못하는 지금보다 더 완벽한 세상이 온다면 그제서야 나는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정말 그런 세상이 온다면 난… 그 세상을 완벽하다고 부를 수 있을까.

첫 번째 날에는 빗길에 산의 낙엽들이 미끈거려 그것에 발을 헛디뎌 칼에 찔렸었다. 찔렸던 그 순간에는 아프다고 느낄 새도 없이 눈앞의 적을 해치우고 도망에 급급했었다. 잡힌다면 더 많은 칼들로 그들은 나를 난도질 할 테고 실험실의 통에 갇혀 온몸에 알 수 없는 약품들을 주입당하고 완전한 자유를 박탈당하게 될 것이었다. 보지 않더라도 당연한 결과였고 이미 오래전 실제로 나를 상대로 그들이 행해왔던 비윤리적인 실험들이었다. 형제들이 모두 같은 실험을 견디지 못하고 차갑게 실험대 위에서, 실험통 속에서, 바닥 위에서 죽어가던 순간들을 잊는 것 없이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다. 단 한 번도 밝게 웃는 형제는 실험실 속에서 한명도 없었고 모두가 감정이라도 잃은 듯 무표정한 얼굴에 규칙적인 숨소리만을 내쉬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죽어갈 때는 신이 그제서야 자비라도 베푸는 것인지 고통에 일그러진 단 하나의 표정을, 모두가 매 순간 똑같은 표정을 지은 채 천천히 숨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어갔다. 그 순서가 나일 때는 두렵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고 내가 그곳에서 그들과 똑같이 죽어가더라도 그것이 당연한 순리라고 생각했다. 같은 힘이 느껴졌던 철창 속 온갖 구속구로 봉인 당한 듯한 형체 또한 미약한 숨소리만을 내뱉다가, 내가 만들어진 지 2주일도 채 되지 않아 명을 다하여 불태워져 흔적도 없이 세상에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이 되었으니까. 그 형체가 나의 어머니되는 것이었다는 건 언니의 삶으로 살아갈 적 기억이 강제로 봉인되기 직전이었지만. 

둘째 날에 스스로의 치료를 할 새조차 없이 여전히 추적자들을 따돌리는데 집중해야 했다. 여기저기 부딪치고 움직이느라 엉성해진 복부의 붕대에는 피가 묻어나왔고, 나뭇가지에 긁힌 생채기들은 따끔거렸다. 이 육체는 애매하게 인간과 닮아 쉽게 죽지 않았지만 느껴지는 고통은 그대로였기에 1%의 부족함이 이런건가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하지만 당장 있는 99%를 활용했어야 했기에 추적자들을 따돌리기 위해 높은 폭포 위에서 뛰어내리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나와 달리 그들은 온전한 인간이라 높이에 대한 공포와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있었기에 나는 겨우 틈을 만들어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온몸이 쫄딱 젖어서는 무거운 솜뭉치가 된 몸을 질질 끌어 가장 높은 나무 위에 오르니 그나마 안심할 수 있었다. 그 위에 오래 머무를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다친 육체를 종일 움직이게 하는 것은 아무리 나라도 충분히 무리였으니 잠깐의 휴식도 달콤한 것이었다. 천상의 수호자를 불러 스스로를 치유하며 바라보자니, 수호자의 날개가 눈에 들어왔다. 날개. 인간에게는 없으며 새들이 자유로이 하늘을 활공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 나에게도 그런 것이 달려있기는 했다. 용과 섞여 생긴 것이었지만 생김새는 마치 새의 수인들이나 천사들이 가질법한 깃털로 이루어진 기이한 것으로 말이다. 하지만 나는 날지 못하니 그저 거추장스럽게 달린 것 뿐이었다. 날기 위해서는 연습이 필요하지만 어느 쪽으로든 시선을 끌게 되니 연습을 할 수도 없었다. '언젠가'라며 항상 붙이는 그런 날이 온다면 연습할 수 있겠지만 당장은 아니라는 것이다. 하늘이 검게 점멸한다, 해가 지는 게 아니라 내 눈이 감겨 검게 되어버리는.

눈을 떴을 때에는 해가 아직 뜨지 않은 세 번째 날의 초 새벽이었다. 가장 높은 나무 위에 있어서인지 추격자들은 다행히도 여태껏 날 찾지 못했었다. 한 번에 뛰어내리니 몸이 충격에 징징 울렸지만 몇 번 몸을 털고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다만 조금 사뿐히 착지를 했어야했던건가 떨어질 때의 충격으로 추적자들이 눈치를 채고는 금세 따라붙었다. 꾸준히 치명상을 입힌 덕에 첫 번째 날보다 따라붙는 수가 줄긴 했지만 여전히 수가 꽤 되긴 했다. 이제 더 물러설 곳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한 손에 딱 쥐어지는 목에 힘을 주려고만 하면 마음 한켠이 그것을 방해해 기절시키는 것으로 그만둘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왜 그들의 목을 으스러뜨릴 수 없는 것인가.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부정해왔던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당신에 대한 죄책감을 이제는 버리고, 당신을 기억한다는 명분이며 나의 속죄를 위함이었던 내 속에 남아있던 당신의 신념을 나는 지워내야한다. 신념은 변한다. 시간이 흐르면 변하는 것이고, 상황이 변하면 본질이 흐트러져 버리고야 마는 것이었다. 알고 있었음에도 눈을 돌리는 것과 마주하는 것은 앞으로의 나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었기에 그래서 눈을 돌리는 것을 택했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내가 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눈을 돌린 것으로부터 피하지 않고 마주해야 하는 것을. …. 당신은 죽었다.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입에 발린 말로 신념은 남겨졌으며 이 세상에 기억하는 이들이 있다…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게 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죽은 이의 신념을 나는 더 이상 따르지 않으려고 한다. 나는 내가 되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의 목을 나는 으스러뜨렸다. 내가 살기 위하여, 나의 복수를 위하여, 나의 이기심을 나는 진정 내세울 것이다.

사람이 죽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들을 죽이지 못하여 나는 이 멀고 먼 길을 내 몸을 희생하며 달려왔는데, 한 사람을 죽이는 모습을 보고서야 추적자들은 물러서기 시작했다. 손아귀에 쥐어진 기이하게 꺾인 차갑게 식은 몸뚱아리를 바라보니 이상하리치만큼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밀어낸 신념이 고통스럽지도 않았고, 당신을 잊는다는 것에 죄책감이 들지 않았다. 이기적인 생각을 앞세워 이런 나도 당신은 나를 이해해줄 것이라고 생각하니 훨씬 나았다.

그는 시체의 위를 밟고 서기로 했다. 스스로를 괴물이라고 인정하기로 했기에 그는 비로소 그가 될 수 있었다. 진정한 모습. 완전하지 못한 실험체, 인간들이 신에 가까워지고자 만든 존재, 이 세상을 어둠으로 물들이고 싶어 하는 자들이 가장 손에 쥐고 싶어 하는 존재. 죽은 이의 신념을 밀어내고서야 닳도록 말하던 자유가 될 수 있었다. 스스로를 지칭하던 말뿐만이 아닌 괴물이 아니라 진짜 괴물이 되고서야, 가장 되고 싶지 않던 존재가 되어서야. 

묘비 앞에 선 그는 후련한 얼굴이었다. 처음과는 다른 모습으로 죄책감이라는 것은 가지지 않은 모습으로 서 있었다. 길던 머리는 어깨 위로 올라오고, 브릿지로 남던 흔적은 아무것도 없이 온전한 짙은 흑발로. 바다는 더 이상 그의 발목을 붙잡지 못할 것이다, 그건 죽은 이의 기억일뿐 자신의 것이 아니니 두려워할 필요가 없으니까. 그는 괴물이다. 괴물이었고, 괴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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