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와 기사

창천의 이슈가르드

푸른잔향 by R2di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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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I6QDcnoJ0qw?si=Wwh6W77tUnaU4CUo

당신은 새벽을 잃어버린 이들의 발아래를 비춰주는 이름 없는 별. 액자 속에 장식된 이름 없는 추억들. 세공된 유리조각같이 반짝이는 미소. 나는 아무도 바라봐주지 않는 북극성. 마녀의 눈물. 깊어지는 마음을 따라 저녁노을처럼 늘어지는 그림자. 내가 기억하는 우리 둘의 모습은 그랬습니다. 도망쳐 온 나를 의심없이 받아주고 나를 위해 제 목숨을 내어준 당신은 항상 그랬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모두를 구할 능력이 되고 마녀가 아닌 세상의 구원자가 된 나는 그대를 구하지 못한 것을 여전히 후회합니다. 당신이 들었다면 웃으며 걱정하지 말라는 위로를 건네주었겠죠. 동화 속에 등장하는 기사와는 아주 먼 이미지의 당신이지만 그게 중요하겠나요, 나의 눈에, 나의 기억에 아주 빛나는 기사로 남아있다는 것. 그것이 중요한 일이죠. 내가 마녀로 추락한 그 날, 당신은 그때부터 나의 기사였습니다. 

지하수로는 소리가 울려 저 편에서 우리를 잡으러 오는 위병단들과 우리를 배신한 이들이 쫓아오는 소리가 웅웅 울렸다. 두고 온 동료들이 여전히 눈에 밟혔지만 오히려 이 곳에서 잡히게 된다면 우리는 다음이라는 걸 장담할 수 없게 됨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온갖 오물이 옷과 몸에 튀더라도 개의치 않고 뛰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하여 어디에도 갈 수 없었던 우리는 이슈가르드로 향하기로 하였다. 만약 우리가 이슈가르드로 가기 위하여 적어도 당신이 아닌 다른 이에게 도움을 청했다면 당신을 이 일에 엮이지 않게 할 수 있었을까. 그랬다면 좋겠지만 역시 생각해보아도 소식을 전해 들은 당신은 나에 대한 진위여부를 직접 듣기 위하여 나를 찾았으리라,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이슈가르드의 첫인상은. 아, 마녀가 외로이 죽음을 맞이하기에 딱 좋은 장소였다. 눈으로 뒤덮여 따뜻한 날은 찾아오지 않는, 누군가 저주를 걸어 이 곳의 계절을 없애버렸습니다-같은 걸 덧붙일 수 있을 것 같았으니 말이다. 나는 마녀가 되고 싶었다. 오랜만에 누군가와 함께 한다는 소속감에 마음이 안일해져서는 결국 배신당하니 도피처마저도 없어 그만 눈을 돌리고 싶은 것이다. 밧줄로 묶여 화형을 당하자. 불에 내 살점이 녹아내리고 머리카락이 타는 냄새에 고통스러워도 언제나 미움을 받고 있는 것은 다르지 않아 그것에는 이야기의 종결이 있으니 잠시만 버티면 편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했다. 그래서, 당신이 음료를 건네주었을 때 손으로 쳐내었다고 한다. 나의 어깨에 닿는 그 손길이 무척이나 다정해서, 나는 마녀라, 마녀에게 다정은 무척이나 역겨워서. 생각에 잠긴 나의 어깨를 두드린 당신은 놀란 얼굴을 하다가는 다시 가져다준다며 자리를 비우고 나서야 나는 내가 어떤 짓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사과를 해야 한다. 미안해, 미안해요. 모든 것이 나의 탓이에요. 바닥에 엎어져 차갑게 식어가는 음료의 향이 속을 메슥거리게 만든다. 크리스탈이 나를 선택하지 않았더라면 지금보다 더 나은 상황이었을까. 사람의 본질은 변하지 않기에 누가 선택됐더라도 이런 일이 벌어졌을 것이라는 걸 알지만. 그렇지만. 다른 이였다면 지금보다 더 현명하게 일을 대처했을 수도. 그것도 아니라면 도망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는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 아. "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나서는 문을 열고 눈밭으로 뛰어나갔다. 알피노도 타타루도 나를 붙잡지 않았다. 알피노는 그 나름대로 충격을 받았고, 타타루는 나의 이름을 부르긴 했지만 끝까지 쫓아오지는 않았다. 지쳤던 것이다, 우리 모두. 우웩. 먹은 것도 없는데 신물이 올라와 헛구역질만 연신 해대니 고통스러웠다. 전쟁 때의 감각이 살아 돌아온 것만 같았다. 사람을 처음 죽였던 날의 밤, 그날도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물도 마시면 몸이 받아들이지 못해 게워낼 뿐이었다. 힘든 내색을 보이지 않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몸이 거부할 경우는 별다른 방도가 없었다. 한참을 눈밭 한가운데에서 서 있었을까. 헛구역질이 멈춰 겨우 숨을 고르고 생리적으로 생긴 눈물을 닦아내고 돌아가려고 등을 돌리니 그 사람이 서 있었다. 그러니까 언제부터? 

" 돌, 아…가려던 참이에요. 내가 걱정을 끼쳤나 보군요. 여러모로 미안해요 곤란하게 하고 무례하게 했으니…. 할 말이 없네요. …. 미안해요…."

" 이슈가르드의 차가운 눈밭은 네가 서 있을 곳이 아니야. 게다가 전혀 신경 쓰고 있지 않으니 걱정하지 말고. 자, 돌아가자 네가 있어야 할 곳으로. "

내가 돌아가야 할 곳은 어디었을까. 그 당시에 당신이 하던 말은 모두 이해할 수 없는 것들 뿐이었고, 아마 마음 한구석에서는 화가 났으리라 생각한다. 나의 고향은 전쟁으로 불탔고, 나에게 있을 곳을 만들어준 자들은 모두 흩어져버렸는데. 눈밭 한가운데에서 미아가 된 나에게 어찌하여 웃는 얼굴로 당연히 내게 돌아갈 곳이 있다는 듯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인지. 

빛나는 기사님은 그래서 싫었었다. 마녀로서 눈을 감고 사람들의 심판을 받아 저 눈밭 아래에 묻히더라도 개의치 않는 마녀의 손을 잡아 앞으로 이끄는 기사님이 싫었다. 당신의 신뢰는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가. 신뢰의 조각을 잃어버린 마녀는 기사가 가지고 있는 자신을 향한 온전한 신뢰가 부담스럽고 그 형태가 의심스러웠다. 그것은 정말 신뢰라는 형태를 하고 있는 것인지 가장. 기사도 결국 다를 것 없는 사람이기에 명명되는 것은 신뢰지만 그 형태가 창이라면 언제든 마녀를 찌르고 재판에 넘겨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하던 참이니까. 가장 변두리에 위치한 기사가 저 중앙에 올라가기 좋은 도구, 마녀는 자신 스스로를 사람의 형태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 생각까지 다다를 수 있던 것이다. 마녀는 마음을 다잡았다, 저 빛나는 기사가 자신의 뒤를 찌르더라도 아파하지 말자고. 웃으면서 아, 역시 인간이란 같은 유치한 대사를 뱉어 눈밭에 쓰러져서는 피안화가 피게 만들어 유치한 동화를 만들자며. 마녀는 불행하지 않았다고 누군가 자신을 연민하지 않도록. 마녀는 불쌍하지 않아. 마녀는 불행하지 않아. 마녀는…, 외롭지 않아. 악행을 저질러 당연히 심판을 받아야 하는 나쁜 마녀, 기사는 그런 마녀를 찔렀을 뿐이므로.

영웅이라는 칭호는 버겁다. 억울하겠지만 오히려 죄인이나 마녀라고 손가락질 당하는 것이 더 마음이 편할 것이다. 그때는 정말 악인이 되어버리면 그만이지만 영웅은 그러면 안되니까. 자격을 운운하던 이들을 떠올린다. 그래, 나는 자격이 없다. 마녀에게는 자격이 없다. 휘몰아치는 눈발에 누더기 같은 망토 하나를 걸친 채 이슈가르드 성문을 넘어설 때 나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눈을 뜨기 어려울 정도로 휘몰아치는 눈발에 타타루도, 알피노도, 나도 겨우 발걸음을 이어갔다. 돌부리에 마차가 덜컹거리고 걸을 때마다 사각사각 모래가 밟히는 소리가 들리던 울다하와는 정반대의 감각들이었다. 져버리고 와버린 나의 동료들을 나는 눈 아래에 나의 마음을 묻고 성문을 넘어섰다.

나의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이 곳의 문제도 만만치 않았다. 곪고 썩었지만 그 누구도 개혁을 생각치 않는 귀족사회. 기사가 실은 귀족의 종자라는 것을 알았을 때에는 그가 왜 변두리에 있어야 했는지 깨닫고야 말았다. 오래 살아온 사람에게는 놀랍지도 않은 멍청한 사람들의 되지도 않는 정신머리. 당신도, 버림받은 거나 마찬가지구나. 동정하지는 않는다. 이 상황에서 누군가를 동정하기에는 그럴 감정을 소모할 아주 조그마한 감정도 남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나를 위하는 당신이기에 조금은 마음이 쓰였다. 

마녀는 또다시 여행길에 올랐다. 지친 육신과 정신을 이끌고 자신의 것도 아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지만 이 곳이 아니라면 저 밖으로 나가 처형대로 끌려갈게 뻔했다. 마녀만 끌려간다면 문제가 되지는 않겠지만 주변인들도 포함되며, 마녀를 숨겨준 이방인들에게는 전쟁의 시작이 될 수도 있다. 마녀는 100년이 넘도록 전쟁을 지켜봐 왔으니 그것에는 이골이 나 결국에는 멈추었던 발걸음을 다시 옮기고야 만다. 기사는 그런 마녀와 함께하지 못함에 아쉬움을 표한다. 기사의 빛나는 가정과 마음은 마녀에게 올곧이 향해 마녀는 그것이 따뜻하면서도 부담스러웠다. 모든 문제의 방아쇠가 되고 있는데 어찌하여 기사는 자신을 친구라고 부르는지 말이다.

" 넌 또다시 험난한 여정에 오르는구나. "

얽히고설킨 실타래를 푸는 와중에 오르슈팡은 빛나는 웃음으로 말을 걸어온다. 이제 더 이상 그 모습이 울렁거리지는 않지만 여전히 부담스러울 따름이다. 다정하게 굴지 말았으면 한다. 내 마음속 한 구석에 자리 잡지 말았으면 한다. 당신의 다정을 내친 나쁜 사람으로 남게 해줬으면 한다. 그래야 내가 여정을 떠나 다쳐 돌아와도, 혹은 돌아오지 않더라도 당신이 마음 쓰는 일이 없을 테니까. 이미 이런 생각을 한다는 시점에서 마음속 깊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겠지만 애써 부정해야한다. 잃는 슬픔과 배신당하는 분노를 당신에게서마저 느껴야한다면 세상이 너무나도 밉게 느껴질 테니까.

" 내가 해야 할 일이고, 해야만 하는 일이니까요. 마음 쓰지 말아요. 당신도 당신 나름대로 바쁠 텐데. "

모진 말이었나? 알게 뭐람.

" 후후. 이번에야말로 돌아온다면 점점 듬직해지는 그 몸으로 나와 대련을 해주지 않겠나? "

" 전부터 말하고 싶었던건데, 당신 꽤 변태같답니다. "

처음에는 농담으로 던지는 질이 나쁜 말인 줄 알았지만, 매번 마주칠 때마다 한결같은 반응에 받아들이는데 조금 시간이 걸렸다. 그가 날 붙잡아둘 명분이 사라졌기에 아쉬움이 남아 하는 말임을 이제는 알 수 있다. 혐의가 풀리고 크리스탈 브레이브의 문제도 해결되었으니, 나는 동료들이 기다리고 나를 위해 마련해준 돌아가야 할 곳으로 돌아갈 수 있고 이제 남은 것은 당신 나라의 문제만 해결하면 되는 것이었으니까.

" 이런, 그렇게 느껴졌나? 하지만 네 육체미는…. 알았네 그만 둘테니 그런 경계하는 눈빛은 거두어주겠나? 물론 나는 네 그 경계하는 눈빛도 좋아하지만 말이야. "

한결같은 기사님 같으니라고. 

" 돌아가고 싶은 곳으로 돌아가게 되었구나. "

한참의 침묵을 깨뜨린 건 오르슈팡이었다. 

" 문제가 해결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하지만 전에도 말했듯이 이곳을 눈의 집이라 이름 붙였다는 것을. 이곳도 네가 돌아올 곳이야, 내가 언제나 기다리고 있는. 그러니 이번 일이 끝난다면 또 들러줘. "

기사는 마녀에게 거처를 내어주고 그곳을 집이라고, 우리의 집이라고 명명하였다. 마녀는 그저 떨떠름할 뿐이다. 집이라는 것을 만들지 않고 떠돌이나 마찬가지였던 마녀에게 집이라는 단어를 입 밖으로 뱉는 것은 무척이나 어색한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기사가 하는 말이 더이상 기분 나쁘지도, 싫지도 않았다. 빛나는 그 기사는 마녀의 등을 떠밀어 줘 걸음을 내디딜 수 있게 해주었으니까. 그래서 마녀는…, 마녀는 그제서야 마음을 열었는데.

피 웅덩이가 된 바닥에 무릎을 꿇고 차갑게 식어가는 손을 붙잡았다. 한걸음이 부족해서 당신이 나를 감싸게 만들었다. 기사의 부서진 방패와 파편들이 무릎을 찔러 피웅덩이에 마녀의 방울진 피가 섞이지만, 그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지 개의치 않고 마녀는 기사의 이름을 몇 번이고 불러본다.

" 오르, 슈팡. 오…,르슈팡. 돌아가야죠…. 돌아가야죠…, 우리의 집으로. 기다려준다고 했잖아요. 맞이해준다고 했잖아요. 약속했잖아요! "

일방적인 외침이었다. 동료들과 떨어지게 됐을 때에도 이런 참담한 기분은 아니었다. 적어도 그들이 눈앞에서 죽어가지 않았기에 어쩌면 살았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있었기에. 하지만 명백히 숨이 꺼져가는 이를 눈앞에 두고서는 그럴 수가 없었다.

마나를 쏟아부어도 밑 빠진 독에 물을 채워 넣는 것처럼, 오르슈팡의 배에 뚫린 구멍 사이로 흘려보낸 마나들이 그곳으로 빠져나오기만 했다. 치유를 할 수가 없다. 기사가 죽어간다. 

" 아아…. 무사, 했구나…. 넌… 잃어선 안 될…, 사람이니까…. "

입을 열때마다 오르슈팡의 잇새로 피들이 울컥거렸다.

" 돌아갈 곳을 만들어 주었잖아요. 같이 돌아가야죠, 내가, 내가 이제야 일어설 수 있는데. 왜, 왜. "

마녀의 시야는 기사가 죽어가는 것을 또렷하게 볼 수 있었으니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표정은 일그러져 오히려 고통스러운 것은 기사보다는 마녀의 쪽인 것으로 보였다. 

" 슬픈 표정은… 영웅에겐, 어울리지 않아…. "

내가 영웅인가? 오히려 비릿한 미소를 머금은 그가 영웅일 것이다. 나의 영웅, 나의 기사. 이리 원통하게 당신을 보내고 싶지 않은데. 당신은 나를 배신했어. 돌아갈 곳을 만들어주고는 정작 당신이 없는 곳이라니, 어떻게 돌아갈 수 있겠어. 

" 웃을게요, 웃을 테니 제발. 제발…. "

마지막으로 기억에 남을 나의 얼굴이 고통에 일그러진 모습이 아니기를. 그래서 당신의 그 시답잖은 대련 이야기로 눈앞에 닥쳐온 상황을 부정한다. 돌아가서 당신이 원하던 대련을 하자. 몸과 몸이 맞부딪치는 그런 열정적인…, 당신이 그리 바라던…. 

" 후후…. 역시 넌… 웃는 얼굴이, 좋아…. "

기사의 영혼이 육체의 구속으로부터 자유롭게 되고 명계로 기사만의 여행을 떠난다. 마녀의 여행은 끝나지 않았으니 마녀의 앞길을 응원한다는 서랍장에 고이 접힌 편지를 남겨두고. 마녀는 차갑게 식은 기사의 육체를 끌어안고 고통스러운 탄식을 내뱉을 뿐이다. 늦은 진심은. 

" 당신은. 다정, 했어요. 당신은 나의 등불, 이 되어줬어요. 따뜻한 음료도 다시 마시고, 싶었는데. "

다시금 찾아온 밤에 빛나는 별들이 보이는 창가에 앉아 이곳에서는 내리지 않는 눈을 떠올리며 마녀는 기사를 그린다. 마녀는 그 후로 슬픈 표정을 짓지 않았고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명백한 세상의 구원자가 되었다. 그 누구도 이제는 마녀를 막지 못할 정도로 강해졌다. 그러므로 마녀는 언제나 기사를 그리워한다. 자신이 강했더라면 기사를 잃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기사를 잃었으므로 마녀는 강해졌음에…. 마녀는 웃는다. 비릿한 미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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