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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기사

푸른잔향 by R2di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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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9YFqFaY0mtU?si=rmgaLv47-Ax1-B2v

잃어버린 이야기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영웅은 끝내 모든 현실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도피를 택하였고, 아주 깊은 곳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그가 사라진 세상에는 다시금 혼란이 찾아왔지만 안일하게도 누군가 해결해주리라 항상 믿어왔었기에, 영웅이 등장한 이후로는 모두 허술한 상태라 속수무책으로 멸망이 눈앞까지 다가왔다. 세상이 지워지고 있다. 각국의 지도자들은 힘을 합쳐 멸망을 막아내려 애썼고, 민간인들은 최대한 피해가 닿지 않는 곳으로 도망치기 급급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영웅이 다시 나타나 자신들을 이 멸망해가는 세상을 다시 구원해주리라 믿었고, 그가 다시 돌아오리라 믿었다. 아주 오랫동안 쌓인 신뢰와 그가 이루어낸 업적들이 여전히 그가 돌아오리라는 기이한 현실 도피를 형성하였다. 단 한 사람만이 그가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영웅이 자취를 감추기 전 가장 마지막의 행적을 좇아 당시 주변에 있던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모두 하나같이 드디어 그가 미쳐버린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딱히 이상하다고 생각되지는 않는 부분이었다. 그의 담력과 정신력이 대단했던 것이지 어느 순간부터 혜성처럼 솟아올라 세상의 구원자로 칭송받으며 온갖 악과 기이한 것을 마주치는 것이 제정신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을 테니까. 누구라도 미쳐버렸을 것이다. 단지 그가 다른 사람들과 달랐던 것은 다른 이들에 비해 미쳐버리는 시간이 천천히 흘렀다는 것 뿐이다. 하지만 가장 최근이라고 하기에는 오래전부터 어딘가 불안정해 보이는 모습을 종종 보이곤 했다. 새벽 늦은 시간에 숙소에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가 싶으면 영웅이 거울을 바라보고 마치 누군가와 대화를 하는 모습을 본 손님이 있는가 하면. 대검을 손에 쥘 때면 다른 무기를 쥘 때와는 달리 허공을 바라보는 시간이 늘었다고 주변인들은 증언한다. 

" 그가 이상해진 건 어느 날 이슈가르드에 다녀왔다가 대검을 쥐고 나서야. "

영웅이 사라진 이후 빠르게 다가온 멸망에 언젠가 돌아오리라 생각하며 기다렸던 새벽은 더 이상은 가만히 앉아 기다릴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리고 이 모든 인과 관계를 짚어보기 시작하였다. 그 과정에서 알리제가 그럴 법하지만 마치 그것은 무기에 저주라도 걸린 것 마냥 미신 같은 이야기를 꺼냈다. 그가 말 없이 홀연 떠나버린 것에 대한 분노인지, 세상의 멸망이 다가왔음에도 모습을 보이지 않는 원망인지, 그에게 고통이 있었음에도 알아차리지 못했었던 아니 알고 있었음에도 이겨내리라고 안일하게 생각했던 죄책감인지 혹은 그 모든 감정이 담겼을 주먹으로 알리제는 테이블을 쾅 내리쳤다. 컵에 담긴 음료가 파동을 일으키며 찰랑거리다가는 잠잠해졌다. 그 누구도 알리제의 의견에 반박하지 않았다. 사람들의 증언이 담긴 종이 위를 만지작거리는 야슈톨라도, 그가 이슈가르드에 다녀오게 된 이유의 자료를 들고 있는 위리앙제도, 흩날린 종이들을 줍던 알피노도, 책장에 기대고 있는 산크레드도. 아무도 부정하지 못하였다. 물증은 없지만 모든 심증이 그 날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렇다고 누군가를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여태껏 눈치챌 수 있었음에도 그가 견뎌왔던 나날들을 믿었기에 이번에도 그러리라고 모두가 믿었었고 그렇기에 내버려 두었다. 좋게 말해서 내버려 둔 것이지 실은 방치나 다름없었다. 힘의 격차가 큰 사람에게 함부로 공감하기에는 되려 상처가 될지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그를 방치해둔 것이다. 항상 먼저 손을 내밀어 준 것은 그였는데 말이다.

" 이렇게 앉아서 지난 일을 이야기하는 것도 시간 낭비야. 그가 왜 우리를 떠났는지는 찾아서 직접 물어보자고. "

책장에 기대고 있던 산크레드가 테이블 쪽으로 다가오며 이야기했다. 평소처럼 비꼬는 이 한명 없이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상의 멸망은 자신들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별이 점지해준 운명, 영웅만이 이 모든 상황을 해결해줄 수 있었다. 

덜컹.

 

" 아뇨, 굳이 찾으러 가지 않아도 될 것 같네요. "

야슈톨라가 의자에서 일어나서는 문 쪽을 바라보았다. 시력을 잃고 모든 것을 에테르의 흐름에 의존하는 그의 시야이기에 저 문밖에 있는 자가 누구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토록 찾던, 그리운…, 다만 조금은 이질적인.

문이 열리고서 보인 인물에 그제서야 다들 안심이라는 얼굴을 하며 바라보았다. 영웅이 돌아왔다. 

" 당신, 지금까지 어디에! 아니, 아니야…. 나름대로 당신의 고충이 있었겠지. 그렇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당신이 필요해. "

알리제가 속사포로 말을 내뱉자 영웅은….

" 아, 이래서 난 당신들이 싫은 겁니다. 언제나처럼 이자에게 미루는 꼴이란. "

고요한 적막이었다. 다들 입을 물고기마냥 입을 뻐끔거리기만 할 뿐 어떠한 목소리도 오가지 않았다. 이 방이 물에 잠긴 것도 아닌데 단어조차 내뱉을 수 없었던 것이다. 나름의 충격이다. 단 한 번도, 애초에 저런 문장을 내뱉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 없을 정도로 다정한 이었으니까. 그런데 그것 또한 오만이었나보다. 자신들의 눈앞에 있는 영웅은 누군가를 미워할 줄도 아는 그런 사람이었나보다. 단지 그것을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었나.

그래 오만이었던 것이다. 영웅도 단지 힘을 가졌을 뿐 모든 것을 초월한 현자 같은 것이 아니니까. 우리와 같이 감정과 고통을 느끼는 그저 평범한 사람일 뿐이다. 하지만 단지 눈앞의 이가 강한 힘을 가졌다고 모든 것을, 감정조차도 그에게 모두 미룬 것은 우리들이었다. 그 오랜 시간 동안 안에 담아둔 것은 무엇이었을까. 

" 잠깐. 에테르가 미묘하게 다르다 생각했었는데, 당신 '진짜'가 아니군요. "

모두가 방 속에서 자책에 절여져 갈 때 즈음 야슈톨라가 그 잠시간 동안 고민하던 것을 그제야 이야기했다. 자세히 보니 알던 영웅의 눈 색이 아니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을 수 있었다. 애초에 말투가 다른 것도 떠올릴 수 있었다.

" 당신도…, 아씨엔같은 능력을 갖춘 건가요. "

그럴싸한 가설을 위리앙제가 중얼거리자 영웅인 것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 내가 그런 비열한 족속들이랑 묶일 줄은 몰랐습니다. 과거에 사로잡혀 현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런 부류는 아닙니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이 사람 뿐이거든요. "

영웅의 거죽을 한 것은 자신을 가르키며 이야기했다. 그 거죽이 영웅의 모습이니 그 말은 영웅이 자신에게 중요하다 이야기하는 것이라 받아들일 수 있었다. 동시에 자신이 영웅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한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렇다면 '진짜'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 그는 돌아오지 않을 겁니다. 애초에 멀리 갈 필요도 없습니다, 진짜가 이 곳에 있기는 하니까요. 이 육체 말입니다. 의식이 나일 뿐인 것이니까요. 그런데 애초에 진짜와 가짜를 나눌 자격이 있습니까 당신들은? 그가 나이고 나는 그인데, 세상에서 나보다 그를 잘 아는 이는 없을 겁니다. "

묘한 느낌의 에테르도 설명이 되는 순간이다. 하지만 영웅이 이중인격자라는 이야기도 들어본 적 없거니와, 다중인격자의 에테르가 모두 다르다는 것도 들어본 적 없다. 옛 연구자료 중 다중인격자의 에테르에 대해 다룬 것이 있었나? 위리앙제와 야슈톨라, 알피노가 자신들이 읽었던 자료, 논문 가지고 있는 지식을 제 머릿속에서 찾아보는 모습이 빤했지만 그 누구도 정답을 내놓지는 못했다. 알리제는 충격을 받은 얼굴로 서 있다가는 다시금 자리에 올곧게 섰다. 

알리제는 눈앞의 이가 말하는 것을 믿지 않을 요량이었다. 그야 영웅은 세상을 사랑한다고 자신에게 말했었고, 언젠가 돌아오리라 믿고 있으니까. 그것이 모두 거짓말이라면 무너지고야 말 것이다. 찰나의 순간이라고 부르더라도 함께했던 시간은 자신이 만났던 이들 중 가족 다음으로 깊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니 저것은 거짓말이다. 간악한 아씨엔들처럼 멸망을 속삭이러 온 어둠이다. 어둠에 대항하는 것은 불변의 진리라, 제 품에 있던 무기를 쥐어잡는다.

" 그는 이 세상을 사랑한다고 했어! 돌아오지 않을 리가 없잖아! "

그는 웃었다.

" 네, 사랑합니다. 그래서 숨어버린 겁니다, 이 세상을 미워하는 것도 두려워서. "

그제야 영웅과 이 앞의 거적이 무엇이 다른지 알 수 있었다. 청량한 푸른 하늘을 담은 것만 같았던 눈이 아닌 밤중에 고양이에게서나 볼 수 있는 기분 나쁜 금안이었다. 알리제는 그 눈을 본 적 있다. 영웅이 어느 날부터인가 혼자 제 방안에서 중얼거리던 거울 속에서.

알리제의 가설은 틀린 것은 없었다. 그가 이상해지기 시작한 것은 이슈가르드에 가서 누군가에게서 대검을 건네받던 그 날부터였다. 하지만 그 모습을 이상하다고 본인이 아닌 다른 이들이 말할 수 있을까. 자신의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던 영웅에게서 보이지 않던 모습이기에 이상하다고 생각할 뿐. 두려움을 가지고, 도망치기를 바라는 영웅의 모습이 진짜 가지고 있던 모습이라고 생각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는 어느 날 갑자기 힘을 가진 것을 깨달아버린 사람일 뿐이니까.

대검을 쥐고 있을 때면 그림자가 속삭였다. 바다, 사랑, 안전, 이기심 그리고 다시 바다. 아주 깊이 묻어두었던 그림자가 말을 걸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자신이 돌아보지 않으려고 했던 것들을 돌아보니 두려움이 앞선 것이다. 세상을 사랑하는데 이 세상을 미워하게 될 것만 같아서. 그림자는 어디서든 말을 걸어왔다. 길거리를 걸을 때, 사람들과 있을 때, 홀로 있을 때, 거울을 바라보고 있을 때 언제 어디서든. 그림자는 영웅을 위했다. 그가 하는 말들은 타박과 다정과 원망이 섞인 미묘한 감정들이었다. 묻어두었던 것을 받아들였다. 그러므로 바다로 되돌아갔다, 우리가 그토록 함께 보고 싶어 했던 곳으로. 영웅은 바닷속으로 그림자는 뭍으로 올라왔다. 

" 내가 무엇인지 압니까? 난 그가 묻어두었던 그림자입니다. 난 그저 있는 사실과 묻어두었던 것을 다시 끌어올린 것 뿐 간악한 거짓말을 속삭인 적은 없습니다. 이 모든 건 온전한 그의 선택이라는 거죠. "

그러니 내가 당신들을 미워하는 감정을 가지고 있어 여기까지 온 것 아니겠습니까. 어느 말도 들리지 않고 단 한 문장만이 귀에 박혔다. 영웅이 자신들을 미워한다. 어느 한켠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지는 것과 직접 이야기를 전해 듣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었다. 누군가는 부정을 했고, 누군가는 수긍했으며, 누군가는 말 없이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영웅을 벼랑 끝으로 내몬 것은 세상 모두였다. 곁에서 돌아봐 주지 못하고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자신들이라는 것도 변하지 않을 사실이고. 

그림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실로 한심하고 제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이들. 손에 쥔 대검에 힘을 주다가는 이내 천천히 풀었다. 그들을 미워하는 감정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묻어둔 감정일뿐, 또한 사랑하는 감정도 있으며 되려 사랑이 더 큰 편이라 자신이 무얼 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경고를 하러 온 것이었다 이렇게 거창하게 오며 말이다.

" 멸망은 알아서들 이겨내기길 바랍니다. 그는 돌아오지 않을 거니까요.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멍청한 인간들에게 나는 질렸습니다. 이건 경고입니다. 다시는 우리를 찾지 마십시오. 그가 다시 돌아오겠다하면 보내주겠지만 그것이 지금은 아닙니다. "

선물이라며 영웅이 쓰던 환술봉을 바닥에 꽂고 그림자는 유유히 방 밖으로 걸어 나갔다.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였다. 사물들은 모두 온전했지만 방 안에 있던 이들의 마음은 엉망진창이었다. 영웅이 걱정되면서 멸망은 어떡하지하는 생각도 드는 자신들에게 어쩌면 혐오감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웅은 없다. 우리가 그를 내몰았던 만큼 그를 기다리고, 기다리는 수 밖에.

멸망을 방관하는 공범자는 만족스럽다는 웃음을 지었다. 영웅이 세상을 멸망시키겠다 하더라면 더욱이 두 팔 벌려 환영했을 것이다. 그는 그럴 그릇이 되지는 못하지만. 하지만 어찌 되었든 이제서야 온전한 단 둘이 되었으니 한시름 덜 수 있었다. 

온전한 둘 뿐인 곳으로. 바다로, 그 바다로. 우리가 기억하는 것보다 더 찬란할 바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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