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lting point
0℃
TRIGGER WARNING: 교통사고
* 러닝 중 오갔던 대화를 일부 인용하였습니다. 언급이 불편하신 분은 편히 컨택 주시기 바랍니다.
한 조각,
달콤함이 닿았다가 쌉싸름하게 퍼졌다.
끝내 사르르 녹아 사라지는 것이 어쩌면 덧없었다.
하나씩 꺼내먹으면서 준 사람을 생각하면 된다.
그리고 다 먹었을 때에는 미련 없이 보내줘.
과연 정말로 보낼 수 있을까.
그러나 보내지 않는다고 해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
'그래도, 미련을 가지면 더 슬퍼지겠지?'
한 조각,
바퀴가 바닥과 마찰하며 내는 소리가 날카롭게 공기를 찢었다. 이윽고,
쾅!
귓가를 울리는 굉음, 무언가에 부딪히는 감각, 욱신대는 통증, 그리고.
괜찮아, 한아. 괜찮아.
꼭 끌어안은 팔, 속삭이며 떨리는 목소리.
눈을 뜨면 점차 익숙해지는 천장이었다. 식은땀이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렸다.
아, 또. 또다시.
‘반복되는 과거를 꿈에서 보면 어떤 기분일까?’
‘잊히지 않는 과거가 되풀이된다면, 어떤 기분일 것 같아?’
욱신.
시린 감각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헤집어진 것은 머릿속만이 아닌 것도 같았다.
바짓단 아래로 언뜻, 커다란 흉이 비쳤다. 차게 식은 손끝이 시큰대는 곳을 건드렸다.
‘나는 꿈에서 깨고 싶지 않았던 걸까, 아니면 꿈에서 깨고 싶었던 걸까?’
‘이미 벌어진 일이었고, 그 결과에서 나는 도망쳤달지.’
느릿하게 숨을 내쉬었다. 물에 잠겨 있는 듯 무거워진 폐부가 느릿하게 부풀어 올랐다가 가라앉았다.
또다시 긴 불면의 시간이었다.
한 조각,
잘그락.
금속이 서로 부딪쳐 작게 소리를 내었다. 새겨져 있던 글자가 희게 비쳤다.
“成”
“astrum”
이룰 성. 한자는 어때. 소원 잊지 않을 겸 해서 만드는 거니까… 다시 만나 소원권 써서 소원 이루자는 뜻.
자장가는 이제 못 불러주겠지만, 대신 팔찌라도 끼고 자. 그럼 좀 나을지도 모르잖아.
피부에 와 닿는 금속은 차가웠으나, 그에 담긴 것은 차갑지 않았다.
반짝반짝 작은 별…
작게 노래를 흥얼대고 있자면 어딘가 울렁대는 느낌이 들었다.
한 조각,
휴대전화에 녹음되어 있던 음악을 재생했다. 잔잔한 선율이 흘러나와 귓가를 간지럽혔다.
그대로 모닝콜로 설정하시고, 볼륨을 최대로 설정하신 후 귀 바로 옆에 두고 주무신다면 조금이나마 궁금증을 해결할 수 있겠습니다.
언제나 상쾌한 아침 맞이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반복해 듣기를 한참, 손을 움직여 휴대전화를 조작했다.
[ 알람이 설정되었습니다. ]
화면에 떠오른 글자를 잠시 응시하다 머리맡에 휴대전화를 두었다.
과연 효과가 있을까. 효과가 없다면 알람 시계를 다섯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터였다.
한 조각,
요리책을 뒤적이던 손이 한 곳에서 멈추었다.
“반숙 오믈렛 만들기”
난 아마 그 때까지도 쭉 요리에는 소질 없는 상태로 남아있을 것 같으니까.
달걀이 얼마나 있더라. 넉넉하다면 몇 개만 써도 괜찮지 않을까.
어느새 냉장고와 찬장을 뒤져 필요한 재료를 찾고 있었다. 다행히 달걀은 부족하지 않았다.
달걀은 미리 냉장고에서 꺼내 식혀줍니다. 달걀을 풀어준 뒤 잠시 상온에 두면 흰자와 노른자가 더욱 완벽하게 섞입니다…
손을 씻고 앞치마를 둘렀다. 노른자를 닮은 색이었다.
한 조각,
꽤나 두꺼운 노트의 표지를 매만지다가 펼쳤다. 새하얀 종이는 꼭 눈이 쌓인 것 같았다.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표면을 손으로 쓸어보았다. 이곳에 무엇을 담으면 좋을까.
‘지구는 계속해서 자전과 공전을 하고 있으니까, 오늘의 하늘과 내일의 하늘은 다르다고 해.’
‘한 지점을 설정해서 매일 같은 시간에 그 풍경을 그려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나. 늘 같아 보이더라도 조금씩은 다른 게 있을 테니까.’
창밖을 내다보면 벽 너머로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세상이 시리게 덮인 지 백 년.
과거엔 가히 절경이라 불렸을 풍경이겠지만 그저 낯익은 일상일 뿐.
연필꽂이에서 연필 한 자루를 집어 들었다. 흑색의 심이 사각대며 흰 표면 위로 궤적을 그렸다.
이다음에는 동화를 읽어볼까.
그렇게 한 조각,
그리고 또 한 조각.
어느덧 거의 비어버린 상자 안을 보다 고개를 돌렸다.
벽 바깥으로 내리는 눈이 유독 새하얗게 보였다. 이런 날이면 꼭,
때맞추어 불규칙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절뚝이며 발을 옮기는 소리가 귓가를 후비며 들어왔다.
고개를 돌리면 닮은 얼굴의 이가 잘 잤냐고 물으며 미소 지었다. 레몬보다는 짙고 호박보다는 옅은 노란색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말문이 막혔다. 가느다란 숨과 함께 입이 열렸다. 어쩐지 목이 죄어드는 기분이었다.
“…형, 나는.”
잔뜩 잠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자장가도, 모닝콜도 그의 악몽을 완전히 흩어내지는 못했다.
어느새 소파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무슨 일이 있냐며 묻는 얼굴은 여전히 상냥하고 다정해서.
분명 그의 잘못이었다. 그가 바깥에 나가자고 하지만 않았더라면, 그가 달려오는 차를 눈치챘더라면, 그가…
“나 때문이야, 미안해.”
꿈을 꿔. 그날의 꿈을 계속해서. 나는 그게 무서워.
만약에 잘못되었더라면, 그래서 더 크게 다쳤더라면, 그래서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면.
마른 뺨을 타고 무언가 흘러내리는 감각. 그 위에 와 닿는 온기. 그는 불에 덴 듯 어깨를 움찔 굳혔다.
“울지 마, 한아. 형은 괜찮아. 네 탓이 아니야.”
내리는 비를 직접 맞으면 이런 느낌일까. 그렇다면 역시 비는 싫을지도 모르겠다.
잘게 떨리기 시작하는 어깨를 감싸 안는 팔이 있었다. 그 온기는 익히 알고 있던 것이었다.
잊으려야 잊을 수 없어서, 돌아가고 싶었으나 돌아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힘들었지, 한아. 이제 괜찮아.”
그제야 터져 나온 것은 분명한 그의 감정이라, 목 놓아 울었던 것도 같다. 아주 오래, 아주 길게.
응어리가 녹아내리듯 저 눈도 녹는 날이 있을까.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