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아

샘플, 2024년 12월 큰문온 신간 예정

데법원 by 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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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당 글에서는 가상의 역사와 사건, 지역을 다루고 있으며 실제와 관련이 없습니다.

- 초반에 인어의 고기와 그것을 섭취하는 이야기가 부분부분 있습니다. 자세한 묘사가 있진 않으나, 언급만으로도 카니발리즘이 연상되어 거부감이 느껴지신다면 추천하지 않습니다.


“오랜만에 가는 건데…… 어때?”

 

덜컹대는 기차의 유리창 밖으로 우거진 녹음이나 넓은 논밭 따위가 몇 번이나 지나갔다. 세진은 창에 머리를 기대고 그 풍경을 보다가 어머니의 모호한 물음에 고개를 들었다. 어떻다고 할 게 있나. 그러다가 질문의 의도를 생각하고는, 어머니의 옆에서 쪽잠을 자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았다.

 

“괜찮으셔야 할 텐데요, 할머니.”

“…… 그러게.”

 

속삭임과 같은 대답을 한 어머니는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다가, 이내 세진처럼 창밖을 보았다. 더 하실 말씀이 있어서 그러시는지 모를 일이었다. 아흔이 넘도록 건강하시던 할머니께서 위독하다는 말이 어머니께도 낯선 듯했다. 여태 단 한 번 만난 것이 전부지만, 사람 도리로 그런 소식을 들었으면 뵈러 가는 것이 맞았다. 세진은 대장부 같은 조모의 모습과 조모가 사는 곳에 대해 떠올리기 시작했다.

 

 

 


상아


 

 

세진의 아버지가 나고 자란 곳이자 아직도 조모와 큰고모 부부가 사는 곡왕리는 기차역에서도 한참 먼, 외딴 바다와 인접한 깡촌이었다. 어찌나 외지고 타지역과 교류가 없는지, 아직도 자급자족이 기본이고 서울로 바뀐 지가 오래된 수도의 이름을 한양으로 칭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

배를 타고 조금 나가면 있는 작은 섬, 호원도에서 살던 집단이 뭍으로 올라온 것이 바로 곡왕리의 시조였다. 그들이 뭍으로 올라오게 된 데에는 커다란 이유가 있었는데, 바로 교인, 대중적인 말로는 인어라 하는 것이다. 다수의 사람들에게 인어는 상상의 동물이라는 인식이 있지만, 세진의 아버지에게는 만났다 하면 목숨을 보상받지 못할지언정 희박하게 모습을 보이던 것이 인어였다. 세진 또한 어렸을 때부터 인어의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

인어가 곡왕리의 시조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고려 말부터 조선 초로 추정된다. 석영이라는 어부가 그물에 걸린 인어를 구해주어 많은 물고기로 보답을 받은 것이 최초의 기록이다. 이후로도 몇백 년을 시조들과 인어들은 서로를 육지에서 사는 종, 바다에서 사는 종 정도로 여기고 존중하였으나 뭍에서 온 도읍 출신 관리가 제 고향에서는 보기 힘든 인어라는 것에 눈이 돌아간 것이 문제였다.

고기를 그렇게나 좋아하더랬던 그는 안 그래도 이전부터 하루 한 끼는 꼭 육지에서부터 온 네발짐생의 고기를 먹었고, 남은 두 끼를 어민들로부터 징수한 물고기를 먹었다. 온갖 물고기를 다 먹고 나니 그의 눈에 보인 것이 인어였다. 인어는 무슨 맛일지 궁금하지 않으냐? 조용히 던진 물음의 뜻을 그의 수족들은 모르지 않았다. 결국 그 아랫것들은 시조들을 시켜 인어를 잡아 드시라 바치게 한다.

말이 안 통하는 인어라고 그 상황에 분노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노래로 사특한 재주를 부리기 시작했다. 인어들은 물놀이를 나온 관리와 그의 수족들을 홀려 그들이 탄 나룻배를 가라앉힌 것도 모자라 어부들이 탄 배 한 척까지 그들의 영역으로 잠기게 했다. 시조들도 이때는 의견이 분분하여 우리가 먼저 그들의 가족에게 몹쓸 짓을 하였으니 이대로 넘어가자는 파와 또 다른 이들이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니 그들을 척살해야 한다는 파로 나뉘었다. 시간이 갈수록 가족을 잃은 이들의 넘실대는 분노에 후자 측의 목소리가 커져, 결국 사람들은 떼로 인어를 죽이려 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노래에는 아무런 대책이 없이 분노만으로 그들의 영역에 입성한 탓일까. 배 일곱 척 중 두 척이 가라앉고 다른 두 척의 사람들도 홀려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위기의 순간, 역설적이게도 모두를 구한 것은 농인이라 천치 취급 받던, 어부인 배우자를 잃은 여자, 백운이었다. 백운은 활을 다섯 발 쏘아 인어 셋을 각각 머리, 심장, 목을 꿰뚫어 죽였다. 그때 흘러나온 인어의 흥건한 피로 바닷물이 녹색으로 보일 정도였다는 말이 있어, 그 지역의 바다에는 녹해라는 별명이 붙었다.

이후 백운과 그의 시어머니를 필두로 뭍으로 가 관아에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반년에 한 번 인어 고기를 어전에 진상하게끔 잡는 것을 조건으로 뭍으로 이주해 마을을 새로 형성했다. 여성체가 다수인 인어에게 조금이라도 저항하기 위해 바다에 나가 인어를 비롯한 물고기를 잡는 역할은 백운을 중심으로 여자의 역할이 되었고, 덩달아 남자의 역할 역시 농사나 집안일로 바뀌었다. 그 모습은 지금까지 이어져 곡왕리는 여성의 입김이 센 곳이다. 이곳에서 세진의 할머니는 젊었을 적 인어를 잘 잡는 어부였고, 할아버지가 바로 마을의 하나뿐인, 인어 고기를 손질하는 백정이었다.

조선이 대한민국이라는 민주국가가 되면서 왕에게 진상하는 일은 없어졌으나 돈깨나 있다는 사람들 사이에는 알음알음 인어 고기의 존재가 퍼져 일은 많아졌으면 많아졌지, 끊기지는 않았다. 살고자 했던 일이 관습이 되고, 관습이니 했던 일이 단순 욕망을 채워주는 직업이 되었다. 인어는 혼자 잡는 것이 아니라 수익을 마을이 다 같이 나누기는 했지만, 자급자족하던 형편은 오히려 그전보다 나았다. 곡왕리가 그나마 전기가 들어오는 정도로는 발전한 것도 그때 인어 고기를 팔았던 덕분이다.

당연히 세진의 아버지도 어릴 적부터 인어 고기 손질을 배우면서 자랐다. 인어 고기는 물고기의 살이라고 하기에도, 인간의 살이라고 하기에도 적절하지 않으니 인어 백정은 어려운 일이었다. 더구나 인어의 상반신, 그중에서도 인어의 얼굴은 인간의 것과 너무 똑같아 보고 있으면 거북한 수준이었다. 세진의 아버지로서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세월이 지나며 인어는 빠른 속도로 모습을 보기 어려워졌다. 너무 많이 잡은 탓인지를 생각하기에도 늦을 정도였다. 장성한 세진의 아버지는 결국 대를 잇는 일을 포기하고 여타 청년들처럼 일자리를 찾아 서울로 갔다. 곡왕리의 모두가 동의한 일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현명한 판단이었다. 세진이 태어났을 즈음 그들은 인간의 눈에 전혀 띄지 않게 되었다. 그런 적이 언제는 있었나 싶을 정도로. 여기까지가 어렸을 때 아버지가 남매를 앉혀놓고 했던 이야기다.

어느새 기차는 목적지 역에 다다랐다. 오는 내내 하늘이 점점 우중충해지더라니, 구름이 있는 방향으로 온 모양인지 짐을 가지고 내리자마자 비가 오기 시작했다. 세진은 양손에 들었던 짐가방을 한 손으로 옮겨 들고 자국이 남은 손을 올려 머리 위를 가렸다.

 

“고모부는 몇 시에 오신다고 하셨어요?”

“5시. 차표 도착 시간대로 알려드렸으니까 이미 오셨을 거야.”

 

아버지의 예상대로 역 앞으로 나가자 갓길에 낡은 차를 세우고 우산을 들고 선 고모부가 세진과 가족들을 보고 손을 흔들었다.

 

“오랜만입니다, 자형.”

“날도 구진디 여꺼정 오느라 고생들 혔어! 오메, 은진이도 다 커뿔고~ 세진이 야는 인쟈 장가보내도 되겄어!”

“안녕하세요, 고모부!”

“느그들 나 기억은 나냐? 생전 어릴 때 봐서 기억도 안 날 건디~”

“비 더 오기 전에 가야겠어요, 아주버님.”

 

싱글벙글 웃으며 말을 붙여오는 고모부의 말머리를 어머니가 얼른 잘랐다. 어머니 답지 않게 다소 날 선 것처럼 느껴지는 말투가 의아했지만 고모부는 전혀 불쾌한 기색 없이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하고는 세진과 은진에게 가까이 와 우산을 같이 쓰고 반대쪽 손에 들고 있던 우산을 아버지에게 건넸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먼저 뒷자리에 태운 후 조수석에 앉고, 고모부 역시 남매를 뒷자리에 태우고는 운전석에 앉았다.

시동을 켜자 낡은 와이퍼가 이상한 소리를 내며 앞의 창문을 닦았다. 차는 천천히 앞으로 가며 빗속을 달렸다. 소란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둔탁한 빗소리가 나는 밖과 다르게 조용한 차 안의 분위기가 어색해서 세진은 일부러 입을 열었다.

 

“오늘은 날씨가 별로라 배도 못 떴겠어요.”

“그려, 그러잖어도 어젯밤부터 구름이 요상시러워서 느 고모도 안 나간다 혔응께.”

“그럼 지금 집에 계시겠네요?”

“어엉, 느그들 간만에 온다고 직접 민어를 꿉는다드라!”

“큰 누님이요? 누님이 요리를 하신다고요?”

“놀랄 노자제? 나가 나이 묵고 팔이 쑥쑥 애린다 긍께 우짜다 자기가 한 번씩 헌다고 혀, 하하!”

 

세진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곡왕리에 갔던 날은 열두 살 무렵으로 이 땅의 마지막 인어 백정이 숨을 거둔 날이다. 요란한 꽃가마에 실려 사진으로만 본 할아버지가 가시던 날.

그렇게 많이 어리지 않았는데도 당시는 별로 기억나지 않는다. 처음 보는 어른들 사이에 둘러싸여서는 침울하면서도 소란이 넘실대는, 기묘한 장례의 분위기를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했었다.

큰고모 이야기를 하는 아버지와 고모부의 말소리를 배경으로 세진은 그때를 떠올리려고 애썼다. 세진아 너 인물 났다, 야, 너 바다에 나가지 마라. 이웃서 모인 어부 어르신들의 장난스러운 말과 그때만 해도 낯을 가리던 어린 동생을 밖으로 데리고 나와 구멍가게에서 사탕을 사 입에 물렸던 것만이 선명하다. 할머니와 큰고모의 얼굴은 기억에 없다. 다만 할머니는 어르신들 뒤에서 어머니께 조용히 한마디 했었다. 할머니의 목소리는 두꺼우면서도 쇳소리처럼 쉬었었다. 바닷바람이 할머니의 목소리를 바랜 듯했다. 세진이 쟈는 키가 빌라도 커서 인어가 보면 과년한 청년인 줄 알고 홀리려고 하겄어. 공기가 어수선했으니 어머니가 어떤 대답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그것도 거진 10년 전의 일이 되어간다.

문득 창밖의 세찬 빗줄기 너머, 도로 옆에 낀 바다 위로 하얀 잔영이 보였다가 말았다.

그것은 분명 사람의 것이었다.

방금 눈이 마주친 것 같았는데. 세진은 순간 그렇게 생각했다가 정신을 차렸다. 이렇게 비가 오는 날, 바다에 사람이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러나 잔영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유리창 가까이에 머리를 붙이고 다시 그 자리를 보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부표 같은 것을 잘못 보았는지도 몰라, 세진은 고개를 돌리고 고모부를 불렀다.

 

“고모부.”

"응?”

 

동시에 기이할 정도의 정적이 다시 차 안에 내려앉았다.

다른 생각을 하던 사이, 두 분이 무언가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을까. 세진은 갑작스레 제게 주의가 몰린 차 안의 모습에 조금 당황했다. 특히 반대쪽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금방이라도 잠이 들 듯하던 어머니까지 눈을 뜨고 이쪽을 보는 것이, 세진에게는 사뭇 이상하게 다가왔다. 어쩐지 무언가를 봤다고 하기가 멋쩍어 언제쯤 도착하냐는 물음으로 말을 돌리자, 차 안의 형언하기 힘든 긴장감이 깨지는 것이 느껴졌다. 고모부는 웃는 얼굴로 흘긋 뒷좌석을 보고 잠시 세진과 시선을 맞췄다.

 

“으응, 막 멀지는 않은디 비가 쏟아징께 조심히 운전헐라고 허다 보니까 늦네. 피곤허면 한숨 자야.”

“아, 네…….”

 

대답은 했지만 조금 전의 기묘한 위화감이 자꾸 머리에 맴돌아 잠이 오지 않았다. 옆에서 어머니보다도 먼저 잠든 은진의 숨소리만이 약하게 색색 들렸다.

 


 

한참을 달려서 도착한 곡왕리는 어렸을 때의 희미한 기억 속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골짜기에 들어서 집집마다 초가집이고 담장이랄 것이 없어 언뜻 보면 보이는 곳 전체가 하나의 커다랗고 낡은 집 같은 풍경이었다. 외가는 같은 시골이라도 여기저기 시멘트 기와 지붕이 들어섰는데, 확연히 달랐다.

세진과 가족들은 도착하자마자 큰고모께 인사를 드린 후 바로 할머니를 뵈러 갔다. 자리에 누워계신 할머니의 낯빛이 별로 좋지 않았다. 아버지가 할머니께 천천히 말을 거는 사이, 세진은 문 너머서 들려오는 어머니와 고모의 대화를 가만히 들었다.

 

“…… 원래는 안 부르려고 혔는디 노인네가 참말로 오늘내일 허는 것 같고 심상찮어서.”

“…… 그래도 애들 아빠 직장에 있을 때 전화 하셨어도 되고…… 전 정말 오고 싶지 않았어요. 애초에……”

 

뒤의 말이 속삭임에 가까워져 들리지 않자, 그는 이미 들었던 말을 곱씹었다. 어머니가 할머니의 방에 들어오지 않는 것도 그렇고, 오고 싶지 않았다는 말이나 기차를 타고 올 때부터 묘하게 날이 서 있던 태도까지 생각하면 어머니와 할머니의 사이는 그렇게 좋지 않은 듯했다. 어머니 동년배의 고부 관계가 으레 그런 법이라는 것 정도야 주변에 조부모님과 함께 사는 친구들을 보면 대충 알 수 있으니, 그다지 놀라운 것도 아니다. 세진의 원형과도 같은, 누구에게나 서글서글한 어머니가 저렇게까지 말한다는 것은 할머니가 어지간히도 모진 성정을 가졌으리라 짐작게 했다.

 

“…… 좀 쉬세요, 어머니.”

 

대화가 끝난 아버지가 돌아서 뒤에 있던 세진과 은진에게 나가자고 손짓했다. 세진은 아버지의 어깨 너머로 할머니를 흘긋 보고는 밖으로 나갔다. 문이 열리자마자 어머니와 큰고모는 약속이나 한 듯이 입을 다물었다. 일부러 아는 체 않고 아버지께 저희는 인사 안 드려도 되나요, 하고 묻자 아버지가 고개를 저었다.

 

“인사 받는 것도 힘겨워 보이셔서 어렵겠다. 괜찮으니 들어가서 식사들 해라. 꼭두새벽부터 기차 타고 오느냐고 시장하겠다.”

“아버지는요?”

“동네에 인사 좀 하고 오마. 당신도 따라오지 말고 애들이랑 같이 들어요.”

“알겠어요.”

 

어머니가 남매의 어깨를 감싸듯이 잡았다. 세진은 힘을 빼고 이끌리는 대로 안으로 들어가면서, 돌아서서 가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슬쩍 보았다.

금방 올 것 같던 아버지는 낮부터 밤까지 내내 보이지 않았고, 어머니나 큰고모도 아버지가 언제 올 것이라고 먼저 말해주지 않았다. 식사를 마치고 씻은 세진은 곁방에 누워 아버지 몫의 빈 이부자리를 보고 있다가, 이윽고 몸을 돌려 천장으로 시선을 옮겼다. 불을 끄니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어떻게든 자자고 눈을 감았다. 의식은 천천히 깊은 곳으로 가라앉았다.

 


 

 

세진은 눈을 떴다.

몸이 푹 젖어 무거웠고, 닿는 공기마다 차가웠다. 기침이 나오려는 것을 참지 않고 토해내자 바닷물이 딸려 나왔다. 늘어지는 몸을 겨우 가누고 뒤를 돌아보자, 그 애가 서서히 멀어지고 있었다.

 

“―야!”

 

이름을 부르자 그 애가 몸을 돌려 뒤를 돌아봤다. 수평선 너머까지 낀 먹구름이 세진을 한층 불안하게 했다. 이별의 때라는 것이 직감적으로 다가왔다. 더 가까이 가기 위해 일어나 발을 옮겼지만, 무언가가 세진을 뒤로 끌어당겼다. 도망쳐, 그렇게 말하면서 괴로운 마음을 갈무리 해야 했다. 사실은 가지 말았으면 하는데. 옆에 있고 싶은데.

그 애는 그 말속에 담긴 마음을 알았는지 몰랐는지, 괴로운 표정을 짓다가 눈물을 터트렸다. 눈물을 닦아주고 싶은데,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어서 세진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 애는 그 모습을 보다가, 곧 무언가를 결심한 듯 천천히 노래하기 시작했다. 알아듣기 어려운 노랫말이 세진의 귀에 박혔다.

―, ―, 몇 번이나 이름을 불렀지만 부를수록 기억이 나지 않았다. 대신 세진의 눈에서도 눈물이 났다.

어쩐지 사무치게 외로워졌다.

 

 


 

 

“오빠, 일어나!”

 

은진이 커다랗게 소리를 질렀다. 세진은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 몸을 일으키고 은진을 보았다. 은진은 어딘가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세진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왜 그렇게 못 일어나? 평소에는 5시면 일어나면서.”

“지금 몇 신데?”

 

그는 세진의 뒤쪽, 베갯머리에 있는 세진의 손목시계를 가리키듯 턱짓했다. 벌써 11시였다. 세진은 시계를 집어 들고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비스듬하게 열린 창문 사이로 대낮의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오래 잤네.”

“하도 안 일어나길래 죽었나 싶어서 봤더니 식은땀까지 흘리면서 잠꼬대를 하잖아.”

“내가?”

“그래! 악몽이라도 꿨어?”

“…… 기억이 안 나.”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누르는 것을 본 은진이 어깨를 으쓱였다. 술이라도 왕창 마신 사람 같네. 은진이 중얼거렸지만 세진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곧바로 부엌에서부터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문을 열고 고개를 들이민 것은 고모부의 웃는 얼굴이었다.

 

“인쟈 인났나? 밥 묵어야제? 내리 잤응께 시장하겄다. 은진이도 점심 묵고!”

“고모부, 감사한데…… 제가 지금 몸이 조금 안 좋아서요~”

“오메, 어짜쓰까나! 벵언은 저기 시내까지 가야 허는디…….”

“아뇨, 그 정도는 아니에요! 누워있으면 나을 것 같아요, 그냥 속이 더부룩한 것뿐이라서. 그보다 아버지는 어제 안 들어오셨나 봐요?”

 

손을 내저으며 웃은 세진이 문득 옆자리를 보고는 다시 고모부에게 물었다. 고모부는 소리 내 하하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녀, 오셨는디 일찍 나가셨제~ 느 어무이랑 아부지랑! 아부지가 고향에 간만에 왔응께 한번 보자 허는 사람이 많은갑다. 오늘은 날이 개서 느 고모는 배 타고 나가시고~ 나도 밥 묵고 밭에 나가야 쓰고~”

“아아…….”

“많이 아프면 한심 더 자, 잉? 은진이는 가서 식사 허자. 고모부가 흰조기 맛있게 꿨다! 헤튼 세진이는 덩치에 안 맞게 허약해서 문제다.”

 

고모부는 걱정스럽다는 듯 한숨을 푹 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나갔다. 기억하는 한 늘 또래 평균 키를 웃돌았던 오빠와는 매우 어울리지 않는 단어를 들은 은진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방에서 나가는 고모부를 뒤따랐다. 시골에 온 이튿날부터 아프다고 하니 저런 오해를 하셨나보다 싶어, 그는 그냥 웃고 말았다.

밖에서 두 사람의 수저가 달그락거리는 소리나 조그만 말소리 따위가 들리다가 얼마 뒤 조용해졌다. 그러는 동안 세진은 몇 번이나 잠자리를 고쳐 누웠으나, 이내 다시 수면하기를 포기했다. 심장이 커다랗게 쿵쿵 뛰어서 도저히 잠들 수가 없었다. 무슨 병이라도 든 건지 걱정이 될 정도로 요란스러워서, 결국 세진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방 밖으로 나가니 고모부는 이미 밭에 나가셨는지 없었고, 문 닫힌 큰방에서는 은진이 노래를 흥얼거리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워크맨으로 노래라도 듣는 모양이니, 방해하지 않으려고 일부러 말없이 집을 나섰다. 잠깐 바닷바람이라도 맞으면 조금 나아질지 모르는 일이었다.

세진은 어제 왔던 길을 대충 떠올려 바다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너무 멀지는 않을까 걱정했는데, 어제는 확실히 빗길 운전이라 느렸던 것인지 저 멀리에 금방 바다가 보였다. 여름의 초입다운 더운 바람이 수평선에서부터 불어왔다. 세진은 멈춰서서 숨을 들이켰다. 바다의 짠내가 코끝으로 들어왔다.

머릿속이 조금 맑아지는 기분과 동시에, 바다에 상반신을 담근 사람이 세진의 눈에 들어왔다. 해수욕장은 아닌데, 여기서도 수영을 하나? 의문이 머리에 떠올랐지만, 해수욕장의 기준 따위가 세진의 관심사는 아니었기 때문에 곡왕리에 거주하는 사람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 따위를 하며 천천히 바다에 다가갔다.

모래가 밟히기 시작하는 거리에서 얼핏 보기로는 세진과 동년배의 남자 같았다. 그와 가까워질수록 점점 기묘한 감각이 세진의 어깨를 타고 오르는 것이, 남자는 육지를 등진 채 혼자 수평선 방향을 보고 가만히 있었다. 수영이 목적이라면 다른 이와 함께 들어가 물장구도 치고 그러는 게 보통 아닌가. 일을 하는 것이라고 해도 문제였다. 작업 도중 저렇게 가만히 있을 턱이 없을뿐더러, 애당초 남자들은 바다 근처에도 가지 않는다고 들었다. 일련의 생각을 거치고 난 세진의 발걸음이 점점 느려졌다가, 이윽고 파도가 들이치는 곳에서 두 발짝 떨어진 곳에 멎었다.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았는데도 남자가 뒤를 돌아본 것은 그때였다. 동시에 수면 위로 상아색의 꼬리가 튀어 오른 것도.

 

“인어……!”

 

자기도 모르게 흘린 말에 놀란 세진은 한 손으로 제 입을 가렸다. 그 남자, 인어 역시 세진을 보고 동요한 듯했다. 세진은 곧장 다시 입을 열었다.

 

“잠깐만, 가지 마! 아니…… 미안, 혼자 있던 걸 방해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그는 스스로도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파악하지 못할 만큼 순식간에 바다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바짓단이 젖었으나 그다지 무겁지 않았다. 어른들은 인어가 위험하다고 했지만, 눈앞에 있는 인어는 전혀 그렇지 않아 보였다. 검은 머리에 순한 인상과 단정한 이목구비, 특히 가로로 길고 커다란 눈은 위협적인 존재보다는 차라리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강아지와 더 비슷하게 느껴졌다.

이렇게 말해도 인어는 제 말을 못 알아들을 텐데. 그보다 인어는 사라진 줄 알았는데. 인어에 대해 들었던 이런저런 말들이 생각났음에도 그런 것들보다 이 인어가 이곳을 떠나지 않는 게 더 중요한 것만 같았다.

나아진 듯했던 심장이 예고 없이 재차 빠르게 뛰었다. 세진은 울렁거리는 기분을 참지 못하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운동화 속으로 온통 바닷물이 들어찼다. 의식이 먼 곳을 향하는 듯했다.

 


 

 

눈가에 물방울이 떨어졌다. 차가워. 혼자 중얼거리며 눈을 뜨자, 그곳에는 저를 내려다보는 인어가 있었다.

세진은 헉, 하고 놀란 숨을 삼키고 서둘러 일어났다. 세진의 머리칼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인어가 세진이 쓰러진 자리까지 와 그의 머리를 제 하반신 위에 뉘었던 모양이었다. 파도가 넘실대는 자리이니 그냥 두면 물을 먹겠다 싶었겠지. 그러잖아도 입안에 짠맛이 남았다. 답지 않게 별안간 기절했다. 정말로 병이라도 생겼나 하고 제 가슴에 손을 얹었지만, 기절하기 직전과는 다르게 평온했다. 어쩌면 단순히 곡왕리에 올 적부터 잠을 제대로 못 잔 탓인지도 몰랐다. 결론을 내린 세진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색이 달라지지는 않은 것으로 보아 시간이 그리 많이 지나지는 않았으리라. 그는 시선을 내려 인어와 눈을 마주쳤다.

 

“…… 일어날 때까지 있어준 거지? 고마워.”

 

인어는 대답 없이 다시 물속으로 돌아가기 위해 바닥을 짚고 제 몸을 끌었다. 세진은 그가 가기 전에 서둘러 그의 팔꿈치께를 부드럽게 잡았다. 팔이 잡힌 인어가 그를 쳐다보았다.

 

“저기, 난 여기 사는 사람이 아니야. 할머님과 큰집 식구분들이 계시긴 하지만 널 해치려는 생각은 조금도 없어! 안심해! 그냥, 인어는 사라졌다고 들었는데 처음 봐서…….”

 

이 인어도 가족이 있을까? 이 인어가 마지막으로 남은 인어라면, 이 이의 가족을 제 가족이 사냥한 거라면, 그래서 이 인어는 계속 혼자일 수밖에 없었다면. 이런 가정들이 문득 세진의 가슴 속을 따끔하게 찔렀다. 현실이라면 조금 전의 말은 인어에게는 별로 듣기 좋은 것은 아닐 터였다. 세진의 눈썹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미안해, 못 알아듣겠지만…… 조금 전에는 무신경했어. 사실 다른 건 핑계고, 아마 너하고 얘기하고 싶었나 봐. 좀 이상하지? 내가 하는 말 모를 거 아는데.”

 

인어의 연갈색 눈동자가 일렁였다. 그는 조금 주저하나 싶더니, 미간을 찌푸리고 입을 열었다.

 

“모를 거 알면서 굳이 말하는 이유는 뭐야?”

 

인어의 입에서 나온, 저와 같은 언어에 세진이 당황했다. 알잖아, 말! 세진이 얼떨떨하게 대답하자 인어가 담담한 투로 받아쳤다. 나는 육지 말을 공부했으니까. 인어의 목소리에는 인상과 닮은 잔잔함이 있었다.

 

“그걸 누가 가르쳐줬어?”

“…… 혼자 했는데.”

“그래?”

 

혼자 공부했는데 저렇게 잘할 수가 있나.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영락없이 사람으로 생각할 것이다. 긴가민가한 표정을 지은 세진을 말없이 한참 보던 인어가 옆으로 고갯짓했다.

 

“여긴 너무 트여있어. 내일은 저 바위 뒤쪽으로 와.”

“내일?”

“지금은 돌아가야 하잖아, 너.”

“내일도 와도 돼?”

 

인어가 아차, 하는 표정을 짓더니, 금세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 귀는 눈 깜짝할 새 분홍색으로 물든 것이, 원래는 내일도 오라는 말을 할 생각은 없었나 보다. 아는 체하면 싫어할 듯싶어, 세진은 그저 한번 히죽 웃고는 내일도 올게, 그렇게 약속하고 돌아섰다.

그런데 인어가 제가 지금 돌아가야 하는 것은 어떻게 안 걸까? 그는 망설이다 뒤를 돌아보았지만, 인어는 이미 사라져 잔물결만이 자리에 남았다.

 

 


 

 

초여름이라고는 해도 예년 이맘때보다는 더운 햇빛이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내리쬐었다. 바닷물에 젖은 옷이 소금기를 머금은 것이 찝찝하게 느껴졌다. 집 근처 고샅길로 접어드는 지점에서 모양새를 대충 점검하고 마저 걸음을 옮겼다. 은진이 대문 앞에서 이어폰을 귀에 낀 채 쪼그려 앉아있다가, 세진을 보고 손을 흔들었다. 귀에서 이어폰을 빼고 워크맨을 청바지 주머니에 찔러넣은 은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말도 안 하고 어디 갔다 왔어?”

“그냥 누워만 있으려니까 답답해서~ 너야말로 왜 나와 있어? 무슨 일 있었어?”

“아니~ 엄마가 오빠 바다에 못 나가게 하랬단 말야.”

“바다에? 왜?”

 

그는 속으로 뜨끔 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시치미를 뚝 뗐다. 은진은 눈치채지 못하고 어깨를 한번 으쓱였다.

 

“몰라~ 나가시기 전에 나한테 일러두고 가셨어. 여기 전설인가 뭔가 때문에 그러시는 거 아냐? 남자는 바닷일도 가는 거 아니라며? 배에 태우면 재수 없다고.”

“바다 근처에 가는 거랑 일 가는 건 다르지~ 그리고 인어는 안 보인지 좀 됐다고 아버지가 말씀하셨잖아?”

“그런가? 그럼 왜지?”

“난들 알까~”

 

대충 대답을 하고는 은진을 지나쳐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동생이 뒤에서 느리게 터벅터벅 따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은진에게는 사실대로 말하고 입막음을 하면 될 일인지도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어머니 앞에서 같이 거짓말을 해달라고 하기에는 미덥지 않은 구석도 있고, 썩 내키지도 않는다. 그보다 인어를 본 적 없는 은진이 고작 오빠의 말 한 마디를 믿을 리는 없다. 저를 골탕 먹이는 것이라 여기고 어머니께 고자질이나 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남매의 사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남매이므로 오히려 그런 부분이 있다.

걷다 보니 땀이 나더라는 핑계를 대고 짐가방에서 갈아입을 옷가지를 대충 챙겨 욕실로 들어왔다. 바닷물에 젖었던 옷을 벗어 빨래 용도인 듯한 빈 대야에 넣고, 그 옆에 놓인 가루세제를 적당히 퍼 물에 풀었다. 설치한 지 오래된 듯한 낡은 샤워 호스에서 물이 나오다가 시원찮게 질금질금 멈추다 말기를 반복했다. 고모 부부는 이런 것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모양이다. 위생적으로 문제가 있지는 않아 보인다만 씻으려면 시간이 좀 걸리겠다.

한참 샤워기와 씨름을 하고 있자니 밖에서 어머니와 아버지가 들어오시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차분하게 문을 똑똑 두드렸다.

 

“세진이니?”

 

어머니의 목소리가 욕실 문 안으로 들어와 울렸다. 바다에 갔던 것을 들킬까 봐 일부러 못 들은 척 대답하지 않고 있었더니, 밖에서 은진이 오빠가 씻고 있다고 대신 대답해 주었다. 세진이 바다에 간 거 아니지? 아냐, 아프다고 누워있다가 답답해서 동네 걸어 다녔나 봐. 두 사람의 대화 소리가 어렴풋이 들리다가 멀어졌다.

어머니의 염려를 느끼고 있으니, 저절로 낮에 본 인어가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이름조차 묻지 못했다. 오늘은 일찍 누워 충분히 자고, 내일은 멀쩡한 모습으로 인어와 이야기하고 싶었다. 욕실에 들어오기 전이 4시쯤이었으니 내일도 점심을 먹은 후 움직이면 될 터다.


- 일부 서술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 원고를 멈춘 지가 오래 돼서…… 정신 좀 차리고자 공개합니다. 뒷이야기는 큰문온에서 보실 수 있도록 힘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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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

댓글 5


  • 섬세한 캥거루

    큰문온진짜무조건가야겠다....꼭내주세요🥹 기대돼요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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