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왕, 구전

왕이 나셨도다. 미친 왕이 나셨도다. 영광된 자리를 검붉게 더럽힌 왕이.

아엘렌 by 얀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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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유시인이 찾아왔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로브를 뒤집어 쓴 그는 음유시인이었다. 허리에 두른 가죽 끈에 꽂힌 피리와 메고 있는 작은 악기가 신원을 보증했다. 목을 두어번 추스른 그는 피리를 입에 물었다. 해가 떨어질 무렵 마을 입구에서 시작된 피리 소리는 아이들을 불렀다. 아이들이 모여들고 나면 어른들의 차례였다. 시인의 발걸음 소리가 박자에 맞춰 턱턱 떨어졌다. 그는 광장에 멈추어섰다. 하늘이 붉게 물든 시간이었다. 광장이 붉어졌다.

“광장이 붉게 물든 날을 아시오? 미쳐버린 붉은 왕은? 고귀한 황금 옥좌가 더럽혀진 날은?

검붉은 얼룩이 채 지워지지 않았다는건?”

시인이 피리를 내려놓고 목을 가다듬었다. 하나의 외침에 박자가 붙고 음이 붙어 노래가 되었다. 메고 있던 작게 개조된 기타를 고쳐들은 그는 광장 중앙에 앉았다. 사람들이 그를 둘러쌌다. 저들끼리 수군거리는 목소리로 광장에 소리가 더욱 가득찼다. 가장 큰 것은 시인의 노래. 아래에서 받쳐주는 것은 사람들의 인기척과 목소리. 마을을 찾아온 시인이 골라든 이야기는 붉은 왕의 이야기다. 아무리 재밌는 이야기라도 세 번 네 번 들으면 질리기 마련이기에 잘 전해지지 않는 구전속의 이야기를 꺼내든 것이다.

“사람들이 아직 별에 대고 소원을 빌던 날, 태양의 축복을 받는 황금의자가 있었지. 모두가 그 의자에 앉으려고 다툼을 벌였지. 하지만 창검이 부딪치고 피가 튀었지만 아무도 그 자리에 앉지 못했어. 황금의자가 텅 비어 녹슬 때쯤, 그제야 태양이 그 주인을 비추었지. 태양은 자애로운 햇살로 그에게 가는 길을 안내했단다. 세 명의 현자가 그를 찾아가 몰약과 황금을 바치고, 황금 의자에 앉은 그의 머리에 관을 씌웠지. 왕이 나셨도다. 태양왕이 나셨도다.”

찬란하고 영광스러운 황좌. 핏물이 낭자한 시대를 종결시킨 위대한 자의 자리. 태양의 축복이 내린 신성하고 고결한 곳. 그의 노래는 황제를 찬미하듯 시작했다. 제국을 건설한 최초의 자, 태양왕을 부르는 노래. 노래를 이루는 목소리는 흙먼지가 떨어지는 낡은 옷을 걸친 그에게 흘러나오지 않은 것 같았다. 아름답고 매끄러운 음성은 흰 옷을 두른 성가대의 것에 차라리 가까웠다. 얇은 손가락이 기타줄을 할퀼때마다 나는 음이 여운을 남겼다. 마치 발자취처럼.

“태양왕께 영광있으라. 제국의 태양께 영광있으라. 신성한 축복은 태양왕의 피를 타고 그에게서 그의 아들로… 그의 아들에게서 아들에게로… 천대까지 이르렀도다.”

시인은 노래했다. 태양왕의 노래는 그의 아들에게서 아들에게로. 삼사대를 거쳐 천대까지 이르렀다고. 영원한 축복을 받아 거듭난 자들이 있음을 노래했다. 찬란한 제국의 창조를 담은 노래는 그들의 시대가 영원했을 것처럼 느끼게 했다. 뚝뚝 끊어지지 않고 몇 초간 더 남는 악기의 울림이. 목소리의 음이 그러했다.

순간이었다. 영광된 노래가 끊어지고 불길한 음이 광장을 울린 것은. 갑작스럽게 커진 소리와 마치 연주의 실수인양 어우러지지 못하는 음은 그것이 마치 음유시인의 거대한 실수인 것처럼 보였다. 몇 초 간의 정적. 시인을 바라보는 시민들이 모두 눈만 커진 체 숨조차 뱉지 못하고 응시하던 순간. 신성한 찬가는 불길한 단조로 변조되어 작은 울림으로 시작하여 거대한 음성으로 퍼져나갔다.

“황금황좌에 거짓된 자가 앉았도다! 간악한 혓바닥으로 뱀처럼 고귀하신 황제를 꾀어낸 죄인의 아들이. 그는 제 아비를 죽이고 형제를 죽여 태양을 검붉게 더럽히고 오만하게도 스스로 그 자리에 앉았노라.”

불길하게 뒤바뀐 멜로디 위로 음유시인의 나즈막하던 음성이 얹어지고 곧 굳센 목소리로 굳어진다. 혼탁한 세상 속 유일하게 진실을 부르짖는다는 듯 공고하고 명확한 목소리다. 시인을 응시하는 그들 속에 진정 거짓된 자가 앉아있는 것만 같다.

“보아라, 세상의 현자라 자칭하는 자들아. 너희의 왕이 이미 죽었고 그의 아들이 숨을 거두었노라. 너희가 보필하는 것들이 모두 죽었으매 이는 너희의 죄악의 결말이니라.”

“너희는 내 어미를 간악한 뱀과 같은 자요 아담에게 선악과를 권한 뱀과 이브와 같은 자라 힐난하였으나 그의 아들이 태양의 축복을 받았느니라.”

“너희는 태양왕을 모시는 자인즉, 축복을 받은 나를 극진히 대접하고 모셔야 할 것이다. 나는 질투하는 왕인즉, 그리하지 않은 자의 죄를 삼사대까지 이르게 하니라.”

시인이 기타의 몸통을 손으로 두드려 말발굽 소리인양 긴장감을 만들었다. 큼큼 목을 두어번 가다듬더니 날카롭고 무거운 음성을 내었다. 서늘한 눈빛은 당장이라도 칼을 뽑아들어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는 듯 형형하다. 거짓된 자의 것이다.

너희들 중 죄없는 자만이 이 여인에게 돌을 던져라. 태양왕 본인의 말으로 전해지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원칙과도 같았다. 죄인을 정하는 것은 너희가 하는 것이 아니오 죄의 무게를 달아 비교하는 것도 너희가 하는 일이 아니매 너희도 죄인이오 어찌 죄인끼리 죄악을 처벌하냐는 꾸짖음. 현자들의 자손의 자손들은 원칙을 어겼다. 거짓된 자의 어미를 힐난한 것은 그들의 분명한 죄악이므로.

그들의 죄악이 경계한 거짓된 자의 출현을 불러일으키고야 말았으니 오이디푸스의 예언과도 같다. 거짓된 자의 출현은 필연적이었음을 시인은 노래했다. 새로 꺼내든 악기들이 맞부딪치며 나는 금속음이 창칼이 맞닿는 섬뜩한 소리같았다.

“거짓된 왕이여, 네가 스스로 태양의 축복을 받았노라 자처하니 위증의 죄를 지었노라. 스스로를 황제라 칭하였으니 끝 모를 탐욕이오 오만이도다. 태양을 지키지 못하였으니 어찌 현자라 칭할 수 있겠나만은 다른 왕을 섬기지 못하겠노라.”

“분노한 거짓된 자가 칼을 뽑아드니 달이 그 위상을 바꾸다 같은 모습으로 돌아오기를 여섯 번 하는 동안 창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우뢰와 같지 않은 날이 없고 붉은 비가 강이 되어 흐르더라. 죄를 지은 현자들이 모두 붉은 강이 되고 나서야 황금 옥좌에 새로운 피얼룩이 생기지 않았도다.”

스스로의 죄악을 빌 기회를 주었음에도 회개하지 못하는 자들을 바라본 아엘리노는 다시금 분노했다. 황좌에 앉았다한들 모든 것이 손아귀에 들어온 것이 아님을 뼈저리게 느끼는 시간이었다. 그의 손에서는 핏물이 흐르지 않는 날이 없었다. 손톱 아래로 마른 피가 끼어 쇳냄새가 났다. 혈액 속 지방질이 끈질기게 달라붙어 손을 값비싼 비누로 벅벅 문질러도 피냄새가 떠나질 않았다. 허리에 찬 칼은 칼날이 무뎌지고 틈으로 살점과 핏물이 마구 엉켜 엉망이었다. 매일 칼날을 다시 세워도 무뎌지기 일수였다. 결국은 칼날에 혈조를 파내야만 했다.

분노한 거짓된 왕을 노래한 시인은 마치 히스테리가 있는 사람처럼 로브를 쥐여뜯으며 제자리를 배회했다. 빠르게 연주되는 음악은 위태했다. 결국 한 음을 틀리고 나면 황급히 노래의 첫음으로 되돌아갔다. 템포가 더욱 빨라졌다. 마구 질주했다. 빽빽하다. 마침내 실수가 나오면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간다. 시인은 마치 의도했다는 듯 숨을 헐떡거렸다. 그리고 마침내 쾅! 거대한 소리가 나며 상황을 종식시켰다.

“거짓된 자는 황금옥좌에 앉아 새롭게 세상을 굽어살폈으나 그 또한 결국 죄인이오 죄악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느니라. 그는… 살인을 저질렀고 분노하였으며 오만하고 탐욕스러웠으니. 피비린내를 풍기며 황금을 더럽힌 최악의 죄인이었느니라!”

“그러니 그 또한 죄악의 업을 져야만 했도다. 그에게 재앙이 닥쳤노라. 분노한 태양이 영원히 지평선 아래로 내려가지 않으니 영원한 아침이라. 땅은 이글대고 물이 메마르니 사람들이 휘청이고 풀이 말라죽었노라. 해가 지지 않으매 달이 뜨지 않고 그는 안식을 누리지 못하였느니라.”

광장 바닥을 쾅 내려친 시인은 그를 죄인이라 선언했다. 이글거리는 시인의 눈은 마치 그 죄악을 두 눈으로 목격했던 자의 것처럼 보였다. 그는 분노하여 명확하고 부정한 수 없는 하나의 진실이라는 듯 선언하고, 마치 다른 사람인 양 속삭이는 소리를 내었다. 역사를 기록한 사서, 혹은 재앙을 예언했다 확인하는 예언가 같았다.

“거짓된 자는 사십 일을 견디다 휘청이는 자들을 보며 슬퍼하매 안식을 취하지 못하고 깨어있는 시간동안 그들을 돌보니 그가 일순 진실된 태양같았느니라. 그가 자신의 죄악에서 도망치지 않으매 태양께서 그에게 기회를 주었노라. ”

“태양은 달빛을 닮은 천사를 보내시며 그가 천사의 음성을 듣는 날 안식을 취하게 도우시매, 그가 평안을 얻었도다. 그는 거짓된 자였으나 천사께 감사하고 그를 사랑하는 마음은 진실되었도다. 거짓된 핏빛왕이 백성에게 온화한 햇살으로 비추어지니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

시인의 목소리는 진실되게 자신의 잘못을 비는 죄인의 것인듯 애달프고 솔직했다. 곧 신성한 하나의 존재인양 서늘하고 날카로웠다가, 천사의 음성인듯 다정하게 흩어졌다. 이내 자애로운 황제의 것인듯 무게감이 있으면서도 보드라웠다. 그를 예찬하는 백성들인 듯 악기의 소리가 관중들의 박수소리처럼 변주되고, 목소리도 환호음으로 바뀌었다.

이렇게만 맺어졌으면 흔해빠진 해피엔딩의 스토리였을테다. 그랬다면 거짓된 자라는 오명도 붉은왕 이라는 악명도 드물게 전해지는 구전으로도 남지 않았겠지. 시인의 노래를 듣는 관중들의 집중력을 이만큼이나 끌어올리지도 못했을 것이고.

“…너희의 죄는 아비에게서 아들에게로 천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핏빛강이 되어 흐른 현자들의 자손들이 감히 천사를 해치매 그의 날개를 꺾어비트니, 다시금 해가 지지 않고 달이 뜨지 못하매 안식이 사라졌도다.”

노래에 담긴 박수소리가 천천히 잦아들고 잔잔하지만 온화한 분위기가 감돌던 것이, 새벽녘 휙 불어들어온 바람에 기온이 떨어지듯 서늘한 공기가 멤돌았다. 작지만 날카로운 악기소리들은 긴장감을 천천히 고조시키다 단숨에 쨍강, 명확한 소리를 내었다. 시인의 목소리가 얹혀져 천사의 비명과 비틀린 날개의 끔찍한 소리가 보여졌다. 타악기의 소리가 큰 일이 벌어질 것을 암시하듯 쿵 쿵 소리를 더했다.

“감히! 네깟 놈들이 감히! 너희가 너희에게 내린 자비를 몰라보는구나! 아하하, 그래. 내가 감히 잊었으니라. 용서가 얼마나 헛되고 헛된 일인지 감히 잊었으니라!”

“내가 너희를 용서한 것이! 저 잘난 태양이 나를 용서한 것이 얼마나 부질없고 멍청한 짓인지 모르겠구나! 모든 것을 잃었으니 두려울 것이 없도다. 잃을 것이 없으니 어찌 나를 처벌할 수 있겠는가? 나는 붉은 강이오 이미 안식을 잃었으매 죽는다한들 지옥이 두렵겠느냐?”

“나의 회개를 들을 그가 없는데 내가 너희를 다시금 용서하는 일이 얼마나 헛되고 또 헛된 일이겠느냐! 멍청하기 짝이 없는 짓이지. 하하하! 너희가 나에게 죄악을 갚으라 하였으니 나는 너희에게 그의 죽음을 부른 죗값을 묻겠노라.”

시인은 일순 붉은 왕이 되어 포효했다. 원한이 뼈에 사무친 듯 억울해하는 음성은 상처를 입고 분노한 맹수와도 같았다. 그는 상처입었으나 살을 찢을 송곳니가 있었으며 잘 벼려진 발톱이 있었다. 다시 한번 악기들이 맞부딪치며 창검이 마주하는데 그 전과는 달리 사뭇 애달프고 처절했다. 포효하는 시인이 어찌나 목에 힘을 주었는지 핏줄이 서고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붉은왕은 혈조를 파낸 검을 다시금 휘두르고 손에 피를 묻히니 죄인들의 피로 광장을 물들였노라. 그들은 제 아비의 아비의 아비와 같이 핏빛 강으로 변하니 죗값을 치뤘노라.”

“용서를 잃은 붉은 왕또한 그에게 안식을 내려줄 천사를 잃었으니 그 자리에서 심장이 멈추어 그 또한 핏빛강으로 흐르매, 죗값을 치뤘도다. ”

“죄를 지은 현자들, 그들의 아비에게서 아들에게로 천 대, 지키지 못한 자들의 아비에게서 아들에게로 천 대, 그들이 모두 붉은 강으로 흐르니 이야기가 기억되지 못했노라. 붉은왕의 시대와 황금옥좌는 그렇게 스러지고 잊어지더라.”

시인의 노래가 끝을 맺었다. 붉은 왕과 천사를 노래하였으나 그것을 진실이라 믿을 것은 관객 중에 몇이나 될까? 시인의 노래를 잊지않을 사람은? 죄인으로 태어나 칼부림 끝에 황좌에 앉아 진실된 사랑을 하고 그를 잃고 미쳐버린 황제. 미사여구가 마구 덧붙은 황제의 이야기는 매력적이기에 믿을 수 없는 이야기가 되리라. 그러니 책에도 쓰이지 못하고 드물게 전승되는 구전으로나 남으리라. 노래하는 시인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다 흩어지고 스러지면 마침내 잊혀지고야 말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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