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음 속 노래

소음을 넘어 멜로디로, 하나의 노래로.

아엘렌 by 얀별
4
0
0


아, 시끄러워. 이른 아침, 유리창을 울리는 빨간 색 이층 버스 소리에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명백한 소음이다. 어제 분명 단단히 창을 닫고 커튼을 쳤었던 것 같은데. 두꺼운 천자락은 햇빛을 가려줄 지언정 소리는 그다지 잘 막아서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초아침부터 저리 요란한 버스를 몰아대니까 사람이 신경이 곤두서는거 아냐. 밤새 체온으로 데워진 부드러운 이불을 밀어내고 몸을 일으키며 속으로 불평했다. 이불더미를 벗어나기가 무섭게 서늘한 공기가 몸을 에워싼다. 서늘하고 건조한 공기는 온기로 부드러워진 살을 얕게 베고 지나간다. 온기가 아직 식지 않았을 침대로 뛰어 들고 싶은 충동이 치민다. 밤새 작업을 하다 간신히 잠에 들었는데, 소음에 깬 몸뚱이가 춥다고 소리를 질러댔달까. 그럼에도 일으킨 몸을 비척비척 끌어 창가로 향했다. 도움이라곤 되지 않은 커튼을 홱 걷어낸다. 드러난 유리창에서 한기가 몰려든다. 방 안의 약간의 습기가 모여 물이 맺힌 차가운 창에 손을 얹는다. 손을 타고 올라오는 한기에 그제야 몸이 깨어나는 기분이다. 손바닥의 감각이 무뎌지는 기분이 들수록 온몸의 감각이 예민하게 곤두선다.

창문을 살짝 열어 차게 식은 공기가 밀려들어오도록 두고나면, 회색 슬리퍼를 신고 발을 느릿히 끌어 원형 스톨 위에 놓인 전기포트의 전원 버튼을 눌렀다. 어짜피 제대로 자지도 못할텐데 작업이라도 마저 하는 것이 낫지. 전기포트를 하나 마련한 것은 굉장히 좋은 선택이었다. 근처 가게에 들러 바게트와 커피를 사들고 오는 것이 향과 맛을 더 잘 즐길 수 있는 선택이겠지만, 굉장히 많은 양의 커피를 자주 찾는 사람에게는 부적합했다. 가게에서 미리 커피를 몰아 사두었다가 그 날 저녁엔 커피의 향이 날아가고 삼키고 싶지 않은 쓰고 시큼한 액체만 남아있는 일을 겪었달까. 찬장 구석 어딘가에 파묻혀있을 주전자를 꺼내드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겠지만, 굉장히 자주 물을 끓여야한다는 게 번거로웠다. 거기다 물이 끓으면 알아서 전원을 내려주고 물이 적당히 식도록 알아서 기다려주는 전기포트와는 달리 시끄럽게 울어대며 자기를 집어들라고 소리를 지른다는 게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갑작스레 찾아온 깨달음마냥 귓가에 닿는 음을 다듬고 있을 때, 갑작스럽게 울어대는 소리가 그 음을 가려버리면 그렇게 화가 날 수가 없었다. 한 번 놓친 깨달음은 두 번은 다시 오지 않아서, 그 부근을 한 없이 더듬대기만 해야 했다. 그런 점에서 전기포트는 적절한 물건이 아닐 수가 없었다.

물이 끓는 것을 보며 검정색 머그에 커피가루를 세 개 털어 넣었다. 새카만 가루는 간편하다. 맛이나 향은 타지 않고 적당히 로스팅 된 원두를 갈아서 내리는 것만은 못하지만, 먹을 만은 하다. 잠을 깨우고 피곤을 잠시 미루어두는 것에 있어서는 비슷하고, 한 잔을 만드는데에 훨씬 적게 손이 갔다. 온 종일 소리에 빠져있으려면 쓸데없는데에는 시간을 오래 쏟고 싶지 않았다. 애초에 커피를 마시는 것이 작업을 하기 위해서인데, 커피를 마시느라 작업할 시간이 빼앗긴다는 게 말이 되기나 하겠는가. 끓어오른 물을 머그 안으로 붓는다. 검은 가루가 금세 녹아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다 금 색 티스푼으로 휘휘 젓는다. 코 끝에 닿는 커피의 향이 마음에 든다. 새카만 물 위로 갈색 거품이 떠오르고 그 위로 피어오르는 하얀 연기에 딸려 올라오는 씁쓸하고 향긋하다 시큼하게 사라지는 냄새.

“….”

검정색 머그를 들어 진하게 탄 커피를 한 모금 머금는다. 조금 식었지만 목구멍을 따라 내려가는 것이 여실히 느껴진다. 식도를 데이는 짓이라고 한 소리를 들은 기억이 어딘가에 있긴 하지만, 자신은 이 느낌이 좋았다. 서늘한 공기에 휘감겨 식은 몸뚱이의 내부에서부터 온기가 퍼져나가는 기분. 커피를 몇 모금 더 들이키고 나면 그제야 몸이 데워진다. 냉기에 굳어있던 몸이 적당히 풀어진 느낌. 컵을 침대 앞 거대한 원목 책상 위에 올려두고는, 기지개를 쭉 폈다. 구부정하게 있던 자세가 쭉 펴지자 제법 키가 크다. 고양이같은 남자였다. 남자는 그루밍을 하는 고양이마냥 자느라 흐트러진 하얀 머리카락을 손으로 대강 쓸어넘겨 묶었다.

"머리카락을 좀 자르긴 해야하나.“

치렁거리는 것이 슬슬 귀찮아지던 참이었다. 머리를 감을 때 시간을 오래 들이는 것도, 자고 일어난 후에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돈하는 것도. 어디 보일 모습도 아니니 대강 묶어올리기만 하면 그만이라지만… 신경을 쓸 거리가 하나 더 늘어 좋을 건 없지 않은가. 거추장스러운 것을 걷어내고 나면 그제야 욕실로 터벅터벅 걸어가 하품을 한 번 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찬물로 졸음을 씻어냈다. 하수구로 밀려내려가는 것이 졸음이 아니라 이 묵직한 피곤이면 좋았겠더라지. 얼굴을 닦아내다 머리칼로 번진 물기가 마르고 나면 검은색 헤드셋을 푹 눌러썼다. 아무것도 흘러나오지는 않으나 적막이 존재했다. 창 너머 버스가 지나가는 소리마저 시끄럽게 받아들이는 귀는 뭐라도 뒤집어써서 틀어막고 싶을 때가 있었다. 컴퓨터 책상 저 아래 배선에서 흘러나오는 잡음이 유난히 거슬리는 오늘같은 날 말이다.

비싼 돈을 들여 구입한 헤드셋은 그만한 값어치가 있었다. 커피포트는 좋은 소비라 생각하면서도 큰 돈을 투자한 물건은 아니었지만, 헤드셋은 제법 비용을 들인 것이었다. 음향 엔지니어 겸 작곡가. 제 직함에 써먹을 수 있을 물건이여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전술하였듯 소음에서 해방처가 되어줄 물건이여야 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노이즈캔슬링이 잘 되는 검은색 헤드셋은 주변의 소리를 잡아먹고 고요를 돌려주었다. 제대로 잠을 청하기 못해 털을 세운 고양이마냥 바짝 선 예민한 감각에 걸리는 것이 제거된 느낌을 책상 앞 의자에 기대앉아 즐겼다. 반쯤 눈을 내려감고 발 끝을 까닥거렸다. 소음이 완전히 제거된 세상에서 천천히 박자가 느껴져서 작게 멜로디까지 붙혀 흥얼거리며 박자를 세고 있었다.

곤두선 감각은 단순히 피곤한 것을 넘어 사람을 히스테릭적으로 만들곤 했으나 종종 이로운 때도 있었다. 예를 들자면 작업에 들어가야 하는 지금같은 상황에서, 환경을 예민하게 느끼는 것은 온 세상에서 영감을 던져주는 것이기도 했다. 지나치게 많은 것이 몰려들어 어느 하나를 오래 부여잡고 제 것으로 끌어내기에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아무것도 떠올리지 못하는 백치 상태보다는 나은 것이라 생각했다.

작은 멜로디와 거기에 담겨있는 감정을 짚어낸 것은 며칠 전의 일이었다. 낮고 잔잔한 베이스 위로 동굴 안 거대한 호수에 물방울이 떨어지는 높고 여린 음을 잡아냈다. 안개가 낀 듯 뿌연 음계 사이에서 작지만 분명하게 들리는 물방울 소리. 잔뜩 예민한 감각으로 느껴지는 잡다한 소음들에서 힌트를 찾고자 며칠을 헤메이다 짜증이 치밀어 관둔 날. 내성이 생기기라도 하는지 점점 용량이 늘어만 가는 수면제를 목구멍으로 넘긴 날 그제야 찾아온 모티브였다. 수면제를 먹은 사람이 어떻게 잠에 드는지 아는가? 수면제는 졸음이 몰려오듯 저항할 수 없는 어느 물결이 몰려와 꿈결로 밀어넣는 것이 아니라, 뇌가 먼저 꿈결에 빠져버려서 몽유병 환자라도 된 것마냥 굴다가 어느 순간 픽, 배터리가 다 된 전자기기마냥 몸이 작동을 멈추게 만들곤 했다. 모든 수면제가 그렇다기보다는 잘 맞지 않는 수면제가 그렇다는 말을 들었던 것 같은데… 지금에 와서 그것이 집중해서 살펴야 할 중대한 문제는 아니리라. 어쨌든, 몽유병 환자라도 된 것처럼 굴 때의 일은 다음날 기억하지 못하는 일이 흔했지만, 종종 잔상처럼 기억에 남을때가 있곤 했다. 보통은 풀린 눈으로 배가 고프다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다 평소엔 먹지도 않을 소시지 따위를 잔뜩 사들고 오는 일이었지만, 가끔은 지금처럼 노래자락이 무의식에서 떠올라있곤 했다. 이성의 부재에서 오는 자유로움의 추구일지, 스스로의 힘으로는 뇌에서 꺼내올 수 없던 고장난 필름을 꺼내오는 것일지는 몰라도, 통과했었던 문 앞에 다시금 꽉 틀어막혀 있을 때 스르륵 나타나는 답안지의 모습은 꽤나 달콤한 경험이었다. 잔뜩 곤두선 신경 탓에 쉽게 잠에 들지 못하는 탓에 어짜피 먹는 수면제라면 창작에 있어서도 효과를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마음 한 구석에는 통제할 수 없는 무언가에 휩쓸려 만들어진 작품을 오롯히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과, 꼼꼼한 계산과 시도, 조정 끝에 나오는 완벽한 결과라는 미학을 추구하는 입장으로써 이 과정으로 도출된 작품은 모순되며 틀어진 것이라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그럼에도 평소의 제 성미대로 자신의 미학적 입장의 고찰에 빠져 시작 지점에서 멈추어있지 않고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은 제게도 마감기한이라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게 곡을 맡기면, 그 완벽주의적 성미 때문에 곡을 일찍 받을 수 없다는 것이 유명하므로 기다릴 각오를 하고 맡기는 것이긴 하지만, 그래도 맞추어야 할 납기가 있었으니까. 거기다 하나를 진부하게 잡고 늘어지는 것은 대체로 뻔하고 완성도가 떨어지는 작품이 나오는 결과로 이어지곤 했기에 더 이상 이걸 부여잡고 싶지 않았다.

“…마음에 안 드는데.”

모티브에서 가지를 뻗어나가듯 이어질 현상을 생각하며 살을 덧붙여야 귓가에 멤돌던 하나의 박자가 멜로디로 성장하고, 하나의 노래가 되어 퍼져나간다. 하지만 제 자식이 엇나가길 바라는 부모가 없다. 그런 것처럼 마음에 들지 않는 멜로디를 넘어가 줄 아량도 없었다. 멤돌던 박자가, 컴퓨터를 켜 프로그램 위로 찍어낸 멜로디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차라리 성장을 가로막고 전부 엎어버리게 되곤 했다. 모니터 속 트랙이 조각맞춤이라도 하듯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 것을 조금의 미련도 없다는 듯 혀를 한 번 차고는 전부 지워버렸다. 꿈결에서 느꼈던 그 은은하고 투명한 도입부만 빼고.

도입부의 은은한 가락이 검은색 헤드셋 아래로 몇 번, 몇 십번, 몇 백번이나 되돌려들었다. 화음이 좀 더 풍성해도 좋을 것 같군. 베이스가 더 부드럽게 깔려도 좋을 것 같아. 드럼의 날카로운 소리는 빼는 게 낫겠네. 곡 전체의 모티브이자 중심이며 수십 번의 수정과 재창조를 거친 도입부마저도 대장장이가 칼을 만들 때 사정없이 달구고 두드리듯이, 다듬어지고 또 날카롭게 벼려졌다. 날카롭게 다듬어진 노래를 몇 번이나 다시 듣고 나서야 고개를 작게 까닥였다. 노래가 말을 걸어왔다. 트랙 위 막대로 보이는 음표들이 다가와 귓가에 속삭였다. 나는 구름 속의 이슬이야. 맑은 물방울이 맺혀 진솔한 노래를 부르고, 차갑게 식어서 떨어지는 거야. 캄캄한 동굴 안 연못 위로. 안개 속을 헤매이는 상처받은 이의 맑은 노래야.

“….”

이것은 하나의 계시와도 같다. 꼼꼼한 계획과 계산을 통해 다가가야만 하는 하나의 이상이자 목표. 우연히 어디선가 쥐여지는 가장 아름다운 예술이 되고자하는 울림. 내가 창조해내고 싶은 것을 깨닫는 시간. 창작에서 가장 즐거운 시간이다. 내가 알아챈 흥미롭고 가장 아름다운 것을 다듬고 다듬어보면 찾아오는 예쁘게 연결해 완성시킬 수 있을 때. 머리속으로 생각만 하던 것이 구체화되며 내가 직접 듣고 느낄 수 있는 것이 되어서, 타인에게도 존재하는 것이 되었을 때, 그 때의 고양감은 잊을 수 없는 강렬한 것이다. 노래를 부르는 이라면, 만들어내는 이라면, 자신의 작품을 만드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알 그 감각. 내가 창작에 빠져들어 업으로 삼게되고야 마는 그 강렬한 것. 깨달음의 시간을 거치고나면 막혔던 둑이 터진 것 마냥 작업에 속도가 붙는다. 날카롭게 굳어있던 눈매와 꾹 다물렸던 입술이 조금 풀어진다. 손 끝이 바쁘게 움직이며 비트를 찍는다. 전부 들어엎기를 몇 백번이나 반복했다는 것이 무색하게 빽빽하게 트랙이 들어찬다. 음향을 매만지던 손 끝을 잠시 기계에서 떼어낸다. 가사가 아직 존재하지 않는 멜로디를 흥얼거리며 손 끝으로 박자에 맞춰 책상을 두드렸다. 노래가 살아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이 느껴진다. 완성이 된 것 처럼 풍성한 노래. 그러나 그 노래를 낳은 자신의 귀에는 딱 두 자리가 비어있는 것이 느껴진다.

“…가사랑 목소리는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고… 흠, 피아노를 조금 더 넣어볼까…. 아, 이거 부르는 사람 목소리도 고르고 싶은데.”

날 선 목소리는 나와는 어울리지 않아요! 화려하게 꾸밈이 많은 목소리도요. 허영이 많은 목소리도 싫어요. 부드럽고 온화한, 포근한 목소리를 얹어주세요. 하지만 마냥 순수하고 활기찬 소리는 싫어요. 나처럼 헤메이고 눈물 맺어야 해요. 하지만 동시에 다시금 물방울로 떨어지며 투명한 소리를 내야해요. 자신의 손 끝과 귀에서 태어난 노래가 마구 아우성쳤다. 의뢰를 받아 작업한 곡이니 제가 어찌 고를 수 있는 게 아닌데, 이 놈의 완벽주의적 면모는 그런 어른의 사정은 전혀 개의치 않고 울어댔다. 서늘한 방 안에서 태어난 노래는 어울리지 않게 맑고 투명한 것이라, 더 욕심이 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건 내가 데모로 가지고 있고 적당히 다른 걸 찍어서 줄까. 책상 옆 건반 앞으로 자리를 옮기며 고뇌했다. 다시 작업하기엔 시간이 빠듯해. 하지만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노래를 부족하게 끝맺고 싶지도 않아. 짜증이 난다는 듯 입술을 깨물다가, 곡부터 완성시킬 요량으로 눈을 가늘게 뜨고 건반 위로 손가락을 얹었다. 통통 가볍고 여리게 손가락이 건반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제야 아직 나는 비어있다고 소리치던 노래가 조화로운 소리를 냈다. 꿈결에서 얻은 하나의 갈비뼈를 가지고 마침내 하와를 빚어냈다. 아담을 빚은 이후에 가장 아름답고 완벽한 것이 하와이듯이, 이 것은 자신이 노래를 만들어 낸 이후로,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 자부할 수 있었다.

‘아, 이건 안 되겠군.’

노래를 완성시키는 순간 확신 할 수 있었다. 불규칙한 박자가 멜로디가 되고 허밍이 되었다가 노래로 태어난 순간 느꼈다. 아무 목소리와 가사나 얹어서 완성시킬 수는 없어. 그것은 자신의 미학를 깨는 짓으로 용납할 수 없을 뿐더러, 막 빚어낸 하와의 숨을 끊어버리는 잔혹한 짓이 되리라. 헤드셋을 통해 살아숨쉬는 노래를 들으며 그제야 입꼬리 한 쪽을 말아올렸다. 두 어번 고개를 까닥이는 것은 만족의 신호였다. 노래를 완성한 파일을 닫는 동시에 이것을 완벽하게 살아숨쉬게 해 줄 목소리의 주인을 만나기 전까지 세상에 풀어놓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파일을 데모곡 폴더에 밀어넣었다.

그 이후로 해야 하는 일은 뻔했다. 데모곡 폴더로 도망친 하와의 역할을 대신할 더미를 만드는 것. 성공적인 한 번의 창작을 통해 터진 영감의 강물은 여전히 콸콸 흐르고 있었다. 지금이라면 오래 걸리지도 않고 적당히 넘겨줄 만하면서도 아름다운 것을 만들 수 있겠지. 수십 번 곡을 갈아엎고 짜증스러워 하다가 엷은 미소를 짓는 사이, 시간은 하염없이 달려 오후였다. 서늘했던 새벽 공기를 지나 햇빛이 방 안을 찌르고 있었다. 곡을 만들어내는 것은 반드시 지금 해야하는데, 고작 햇살 따위에 방해당하는 것에 짜증이 치밀었다. 커튼 틈새를 통해 모니터를 비추는 아주 약간의 햇빛이 시야를 방해나는 것이 굉장히 거슬렸다는 뜻이다. 재빨리 몸을 일으켜 커튼을 단단히 닫고 모니터에서 새어나오는 푸른 빛을 제외하고는 어두워진 방 안에서 짙게 탄 커피를 목구멍 너머로 빠르게 밀어넣었다. 지금 해야 해. 마치 전투에 도입하기 직전의 기사마냥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나면 다시금 모니터와 스피커, 음향장비 앞에 앉았다. 오랜 시간 눌려 답답하던귀를 잠시 달래주려고 벗었던 헤드셋도 다시금 푹 눌러쓰고.

하와를 만들어내기 전부터, 곡을 만들기 위해 보았던 의뢰 이메일을 다시금 읽어본다. 여성 그룹이 부를 것이고, 대강의 컨셉트는 어떠하고 바라는 분위기는 어떤 것인지. 노래에 맞추어 진행되는 부분이 많으니 요구사항을 지키기보다는 어울리는 노래를 재량껏 제작해주시면 좋겠다는 코멘트. 당신 노래를 한 곡이라도 얻고싶다는 투가 강한 메일에서 성취를 인정받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아무도 알아주지 못해도 자신이 만들어낸 가장 아름다운 것의 존재여부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었지만, 인정받는 것을 싫어할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이메일의 주 요청을 간략히 정리해보자면 이러했다. 메르헨 풍의 몽환적이고 동화풍의 분위기를 띄지만, 발랄하고 활기찬 분위기에 치우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 멜로디는 느릿하지만 bpm은 빠르고 풍성하게 깔리는 베이스 위로 통통 튀는 신스가 들어가는 구성을 떠올렸다. 지금까지는 하와의 탄생과정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와는 개인의 목소리를 통한 스토리가 담겨야 완벽한 완성을 만들 수 있다는 점때문에 데모곡 폴더로 집어넣은 것이므로, 이 작업에서는 그 부분을 배제시키려고 노력했다. 어떤 가사를 붙혀도 납득할 수 있을 것 같이 듣는 이에 따라 밝고 명랑하게도, 아늑한 분위기 속 침울한 소리도 느낄 수 있게끔 노래를 채워나갔다. 개성이 강하기보다는 무던하게 잘 어울러지는 노래. 부르는 이가 채워야 하기보다는 능동적으로 빈틈을 알아서 메우는 노래. 무던하면서도 아름다운 것은 보편적인 미의 기준에 맞추면서도 대중의 기억에 남을 만큼 완벽해야한다는 것이므로, 이 또한 하와와는 다른 방향으로 시간을 잡아먹는 작업이었다. 갈고닦히지 않은, 무디고 녹슨, 먼지가 내려앉은 작품을 내놓을 수 없다는 것은 자신의 지론이었으므로.

꼬박 이틀 밤을 샜다. 커피를 내리고 바게트 반쪽을 먹는 시간, 더러워진 몸뚱이와 피곤에 절은 몸뚱이로는 음과 박자를 명확히 짚어낼 수 없었으므로 투자한 샤워 따위의 활동을 제외하고는 전부 모니터와 음향기기 앞에 앉아있었다. 그제야 두 번째 노래가 눈을 떴다. 통통 맥동하기 시작한 노래는 누가 제 주인이어도 좋은 리트리버처럼 움직였다. 리트리버의 갈색 두 눈동자가 모두를 그렇게 사랑스럽게 비추는 것을 알면서도 다정한 모습에 한 번은 쓰다듬고야 마는 것처럼, 누구라도 한 번은 귓가에 멤돌 법한 노래를 만들었다. 수십 번을 가다듬고 자신의 기준을 넘어서야만 존재한다고 치는 자신이므로, 한 번 완성해 움직이기 시작한 노래들에 대해서는 자부할 수 있었다. 곡의 완성 소식과 데모 파일을 메일로 넘기고 나면, 그제야 작은 휴식 시간이 찾아왔다. 이틀을 꼬박 앉아있었던 푹신한 검은색 가죽 의자에 기대 누웠다. 꽤나 늦은 새벽이었으며 동시에 이틀밤낮을 샌 다음이었으나, 하와의 탄생에서 느꼈던 그 전율때문에 졸음이 오지 않았다. 온통 시선이 그것에 쓰여있었다는 표현이 적절했다. 컴퓨터 폴더 저 구석에 밀어넣어둔 노래에 재빨리 어울리는 가사를 가진 목소리의 주인을 찾아 얹어두고 싶은 욕망이 샘솟았다. 가진 것 중에 가장 완벽한 미완성품을 완결짓고 싶은 것이었다.

하지만 기준이 높아 스스로 만드는 곡 조차 몇 백번이나 갈아엎은 자신인데, 그 자신의 귀에 턱 걸리는 가사와 목소리를 가진 사람이 빨리 나타날 리가 없었다. 노래의뢰는 많았기 때문에, 자신의 목소리나 자신의 회사에 소속된 가수의 목소리를 담아보낸 이메일은 꽤 많았지만, 마음에 드는 것이 있기는 커녕 죄다 신경을 긁어댔다. 고작 이깟 걸로 내 작품에 참여하고 싶어한다고? 적당한 흠은 그것으로도 예술이 되곤 하지만, 지나치게 많은 흠결과 다듬어지지 않은, 그러니까 실력이 부족한 것들은 자신의 심기를 건드렸다. 너무나 완벽한 하와를 만들었기 때문에 고작 돈을 탐하는 것들이 망쳐버리게 두고 싶지 않았다. 짜증스런 목소리를 입 밖에 내고는 읽었으나 불쾌함만 가져다 준 메일들을 모조리 삭제시켜버렸다.

“다듬어볼 노력도 없는 것들이 얹어가는 것만큼 작품을 끔찍하게 망쳐놓는 방법도 없지.”

그러는 사이 잘 진행되고 있는 것은 하와 다음으로 만든 노래의 발매를 향한 여정이었다. 앨범의 타이틀곡으로 들어간다는 그 아이에게는 머메이드라는 이름이 붙었다. 인어공주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삼아 재해석한 가사를 붙이고 동화풍으로 만들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보통은 다른 사람과 협업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디렉팅을 맡는 것은 받는 쪽에서도 지나친 완벽주의라며 힘들어했기에 곡만 넘겨주고 마는 편이었으나, 하와의 여파로 만들어졌다는 것 때문인지 괜히 신경이 더 쓰여서 세세한 디렉팅까지도 하기로 했다. 콘셉트와 가사의 확인과 수정을 거치고 난 지금 시점에서 해야하는 것은 녹음이었다. 곡이 제작된 지도 몇 달이 지났고, 그 사이 보컬을 더 가다듬고 노래에 가사가 붙었으므로, 이제 그 노래를 부를 차례였다.

‘녹음실도 집 안에 있으면 더 편하지 않을까. 지금처럼 가이드 녹음을 하는 정도로 최소한의 장비 말고… 방음부스도 보강하고 마이크랑 음향도 좀 추가하면…’

녹음실에 가기 위해 까만 코트 차림으로 새벽마다 시끄럽다고 생각했던 빨간 버스 안으로 몸을 실었다. 턱 부근까지 올라오는 하얀 목티는 제법 냉기를 잘 막아주었지만, 그럼에도 서늘한 새벽공기에 뺨이 조금 붉게 물들었다. 덜컹거리는 소리와 버스 정차시의 안내문구가 흘러나오는 소리 출입구가 여닫히는 소리와 버스 안에 빼곡히 서있는 사람들의 걸음소리 숨소리 옷자락끼리 부벼지는 소리 지나치게 많은 소음이 웅성거렸다. 그 가운데 서있는 마르고 늘씬한 체형에 허여멀건 남성은 새카만 헤드셋을 뒤집어 쓰고 눈을 가볍게 감았다. 그제야 남자의 세상에 정적이 존재했다. 이게 싫었기 때문에 종종 하는 것이 제대로 된 녹음실을 집 안에 구축하는 것에 대한 부분이었다. 그나마 가까이 지내는 지인들은 그리 했다가는 아주 집 안에서 나오지 않을 것이라며 반대했지만, 자신으로써는 그것도 썩 나쁘지 않지 않냐고 생각했다. 녹음실에 대한 고찰을 하다 도착시간을 고려해 눈을 뜨면 내려야 할 정거장이었다. 차를 운전하는 것이 버스를 타는 것보다 작은 소음과 더 적은 자극에 노출되는 것 같아 좋아했는데, 이 시간에 이 곳은 트램이나 버스를 이용하지 않으면 제법 혼잡했기에 썩 좋은 대체 수단이 되지 못했다. 버스에서 내려 인상을 찌푸리며 관자놀이 부근을 꾹꾹 눌렀다. 목 뒤가 뻐근해진 기분을 느끼며 비척비척 녹음실이 있는 건물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곡의 완성도를 위해 참여는 하지만 기왕이면 집에 일찍 돌아갈 수 있으면 좋겠군.’

작은 기대를 품고 들어선 녹음실에는 노래를 불러야 할 여자애들은 소파에 앉아있고, 음향 엔지니어는 기계 앞에 앉아있었다. 자신이 오는 것을 기다리던 것이냐 하면 그것도 아닌 것이, 방음 부스 안에는 또 다른 남성이 들어가 있었다. 분명 이 시간부터 작업에 들어간다고 했던 것 같은데. 틀어진 계획에 미간을 찌푸리며 담당자를 바라보았다. 고작 오 분이나 십 분 남짓 기다려야하는 일이라면 그것도 싫지만, 제가 녹음실에 오는 것을 기회삼아 의뢰하지도 않은 이의 노래를 들어주고 살펴주기를 바라는 것이라면 그건 더욱 싫은 일이었다.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발 끝을 까닥거리며 불쾌한 기색을 내비칠 즈음, 그제야 가이드 녹음 차 보컬 시범을 보여주시는 거라고 곧 끝난다는 담당자의 설명이 덧붙었다. 여전히 불쾌하기는 매한가지였으나, 납득한다는 듯 두어번 고개를 까닥였다.

가이드 녹음이라 하니 제 곡에 있어 저 안의 당신도 영향을 끼칠 것이므로, 마이크를 타고 스피커를 통해 들리는 네 목소리에 바짝 신경을 곤두세웠다. 약간은 독특한 음색. 대체로 따스한 목소리지만 분명한 구석이 있고, 동시에 망설임이 느껴지는 듯한 묘한 목소리. 예상에 없던 일의 발생에 잔뜩 예민해진 탓인지 유독 귀에 거슬리는 목소리였다. 노래와 가사를 해석하는 능력은 괜찮아. 하지만 이 곡이 어울리는 옷인지는 잘 모르겠어. 왜 불쾌하게 느껴지는지도 잘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마저 노래를 감상했다. 곡이 끝마쳐지고 여러 미사어구로 점칠된 대화가 오가고 나면, 방음부스 안의 당신은 인사를 하고 금세 녹음실을 벗어나 자취를 감추었다. 신경에 굉장히 거슬리는 남성이었지만 지금 거기에 포커스를 맞출 때가 아니었다. 머메이드의 흠없는 완성을 만들어야 했으므로, 아엘은 날카롭게 곤두선 신경의 대상을 녹음부스에 긴장해서 들어간 여자애에 두었다. 노래를 끊고 다시, 처음부터. 여기서부터 다시 가는게 낫겠습니다를 반복해하고 지적을 덧붙혀가며 완성도를 높히는 데에 빠져들었다. 귓가에 거슬렸던 남성의 목소리는 무의식 저 아래로 밀어두고서.

“생각해보면 여자 노래를 남자가 가이드한다는 것부터 이상하지.”

녹음을 한 지도 두 달 남짓의 시간이 지났다. 그 사이 다른 준비를 마치고 머메이드, 제 작품이 담긴 앨범이 프로모션 되기 시작했다. 통통튀지만 여러 해석의 여지가 남아있는 노래는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기에 사람들의 귓가에서 계속 멤도는 모양인지, 이곳저곳에서 흘러나오곤 했다. 오늘도 그랬다. 긴 작업에는 쉽게 넘길 수 있는 가벼운 커피보다 적당한 당과 지방을 공급해줄 라떼가 필요해서 온 카페에서, 제 노래가 틀어져있었다. 라떼를 기다리며 작게 허밍하는 것으로 자신의 완성품을 감상하던 남자의 머릿속에 다른 목소리가 스치고 지나갔다. 여리고 따뜻한, 독특한 목소리. 노래를 처음 녹음하던 그 날. 그 날 마주쳤던 남자다. 계획과는 달리 약간의 지연이 있었던 그 날의 사건을 되짚어본다. 그러던 중 유독 높았던 불쾌감의 정체를 깨닫는다. 그 노래가 아니라, 다른 노래를 불러야하는 사람이야. 데모곡 폴더에 잠들어 있는 그 노래.

라떼를 버려두고는 자신의 집으로, 제 방으로, 컴퓨터의 앞으로 향한다. 컴퓨터에 전원이 들어오고 모니터가 침침한 방 안에서 빛을 발하면 괜스레 손 끝을 매만졌다. 키보드 위에 창백하고 긴 손가락을 얹어놓고 재빨리 타자를 친다. 자신이 다음 곡의 제작을 위해서 물어볼 것이 있는데, 협업을 하고 싶기에 머메이드를 처음 녹음했던 날 가이드 녹음을 했던 남성의 연락처를 알 수 있냐는 것이 골조인 메일을 빠르게 써내렸다. 지금이 옛 낭만주의의 시대였다면, 만년필을 들고 편지지 위를 휘갈겼으리라. 구석에 밀어 넣어두었던 투명하고 맑은 그 노래가, 다시금 멤돌았다.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