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엘렌- 질식

그 날 이후 늘 조여오던 숨통. 숨을 뱉으려 손으로 틀어막은 입술.

아엘렌 by 얀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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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잠시 감는 것이 좋겠구나. 아주 가까이. 들이키고 뱉어낸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 있어야만 알아챌 만한 작은 음성이었다. 본디 아무런 소리에도 담기지 않았다는 듯이 허공으로 흩어진 뜻은 음성보다는 입술의 움직임으로 전하고자 했다. 자신의 행동을 알아채야 하는 이와 아무것도 몰라야만 하는 이가 한 공간에 서 있었으므로.

'목숨을 부지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지. 무언가를 뒤에 숨겨두었다면 더더욱. 결국 그것은 약점을 늘리는 알에 불과하니까.'

생각을 길게 할 여유가 없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귓가에 내려앉은 남성의 목소리가 멤돌아 생각을 멈추지 못한다. 자신이다. 시니컬한 목소리는 차분하게 상황을 계산하기 보다는 과거라는 거울을 현재에 비추고 허무를 노래한다. 수 많은 적의 속에서 목숨을 계속해 부지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어? 다섯 번. 열 번. 백 번을 썰어넘겨도 네 목을 노리고 심장을 겨눌텐데? 그 칼날이, 독약이, 적의가 한 번만 가시처럼 손톱 밑을 파고들면 그걸로 너는 지는데? 순응해. 언제처럼 겁쟁이처럼 벌벌 떠는 삶을 영위할 셈이야? 너는 그 날 죽었었잖아. 머저리처럼 아무것도 지키지 못해서 말이야. 하하(...) 그럼에도 살고싶었어?

그러면 약점을 두지 말았어야지. 네가 살고싶었다면 말이야. 멍청하게도 똑같은 실수를 두 번이나 반복하는구나. 얄랑한 사랑. 그 깟 사랑이 뭐라고. 너는 결국 그를 떼어놓을 수 없을만큼 사랑해서 그를 위험에 빠뜨리는구나... 아하하... 머저리같은 엘. 실수로부터 배우지 못하는 멍청한 아엘.

허무를 노래하는 남성의 목소리는 자신의 귓가에서만 멤돈다. 가라앉고 갈라진 체 공기를 잔뜩 머금은 목소리를 악의로 가득하다. 스스로를 비웃으며 조롱하고 최악의 상상을 눈 앞으로 들이민다.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 서있는 제 연인의 하얀 셔츠가 소름끼치는 검붉은 색으로 일그러진다. 힘 없이 쓰러지려던 그는 상체를 애써 고정시키고 고개를 든다. 붉은 액체가 흩뿌러진 백금발 아래의 눈동자가 부르르 떨리다 겨우 자신을 마주한다. '지켜주신다고 하셨잖아요.' 간신히 마주한 눈동자엔 원망이 어려있다. 가슴이 답답하다. 비웃던 목소리의 주인이 제 상체 위로 올라탄다. 가슴팍을 짓누르는 무게는 숨통을 조여온다. 붉은 피를 뒤집어 쓴 여성이 목을 조른다. 지금은 목소리조차 가물거리는 옛 친우가 머리채를 잡아채 제 목에 밧줄을 걸어온다.

‘자유롭게 숨을 뱉었던 때가 언제가 마지막이었지?’

아가미도 없이 물 속에 던져졌다. 물 속을 헤엄친다한들 숨이 차오르자 않는 것이 아니다. 그저 한 없이 참고, 누르고, 탁한 공기를 되삼킬 뿐. 그러다 간신히 한 번. 수면 위로 고개를 내밀고 숨을 들이킬 뿐. 깊은 잠은 청할 수 없다. 한 없이 탁한 공기를 들이키다 죽어버릴지도 모르니까. 물 속에서라도 살아가라고 자신을 바다에 풀어준 이가 있는데, 멍청하게 잠에 빠져 죽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래도 요즘은 꽤 괜찮았지. 그래서 더 겁이 나는걸지도.’

수면 위로 떠오르는 일조차 어려웠던 시기가 분명 있었다. 떠올리기 어려울정도로 멀지도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과거형인 것은 적어도 지금은 숨구멍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아가미도 지느러미도 없이 바다에서 헤엄치는 자신을 물결 위로 밀어주는 이. 더 이상 한계까지 가라앉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은, 굉장한 위안이었다. 목을 졸라오는 남자의 속삭임을, 여성의 비명을 대신하는 잔잔한 이야기는 달콤했다. 결핍된 공기가 가까스로 폐에 닿았을 때 드는 황홀경을 안다면 쉬이 이해할 수 있으리라.

목을 조르던 손이 툭 떨어져나가면 다급하게도 숨을 들이킨다. 언제든 숨을 들이킬 수 있는 트인 숨통이 되었음에도 공기를 들이키는 꼴이 그리도 급박한 것은, 들이켜야 할 것이 쌓여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호흡의 자유를 다시금 박탈당할까 두렵기 때문이리라. 한 번 잃었다 얻은 것은 얼마나 소중하던가. 대가를 바라지 않는 애정이, 오로지 자신을 향해 뻗은 그 다정함이. 서늘한 피부 위로 맞닿는 체온이 얼마나 소중한지. 의심하지 않아도 되는 신뢰란 얼마나 달콤한 것인지. 갈망하고 있었다는 사실조차 잊을만큼 오랜 시간 잃어버린 것이 자신을 찾아와주었다.

자신을 찾아온 이 것이 얼마나 과분한지 안다. 이전에 그리 잃어버린 자신은 자격이 없으니까. 한 번 잃어버린 것은 두 번도 잃어버릴 수 있을테니까. 자꾸만 바닷가의 모래 한 줌처럼 손아귀에서 새어나가고 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차라리 처음부터 다시 갈망하지 않는 것이 좋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제 다정을 주지는 못했을지언정 위험을 쥐어주지도 않았을테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놓아주지 못하는 것은 한 번 깨달은 욕망이 배가 고픈 아이처럼 울어대고 있기 때문이었다. 서늘한 몸을 휘감는 저 체온을 갈구하고, 고질병이 된 의심을 거두고 싶다고 소리치기에. 애정어린 따스한 목소리가 귓가를 한 번 더 간질여주기를 바라서. 그래서 놓아주지 못했다. 곁에 두었다. 끝끝내 곁에 두었으니 자신이 없다한들 해내야만 하리라.

‘시끄러워… 자기 전에 온 종일 지껄였으면 됐지 지금도 야단을 떨어대는구나.'

애써 지나치게 선명하게 떠올랐던 핏빛 광경을 잊어버린다. 애써 끈덕한 늪과도 같은 목소리를 야단을 떨어대는 것으로 치부해본다. 아직 아무것도 벌어지지 않았다. 사태가 벌어지기도 전에 최악을 목도하는 자신은 겁쟁이가 맞을지도 모른다. ...아니다. 겁쟁이라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리라. 하지만 그저 일이 벌어지도록 손 놓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벌어지지도 않은 일을 상상하며 움츠러들었다지만 움츠러들만큼 두려운 일이 벌어지도록 방치하지 않으면 망상이 현실을 잡아먹지 못할테니까. 그저 한 순간의 우려와 걱정으로 남을 뿐.

두려워. 공포스럽다. 숨을 쉬는 것 중에, 심장이 뛰는 것 중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몇이나 될까? 죽음의 핏 빛 그림자를 보았던 이 중에서는 그 몇이 있기는 할까? 그럼에도 자신은 그런 사람이 되어야만 하리라. 애써 자만해보자면, 몇 번, 수십 번을 겪고도 살아있지 않던가. 여전히 심장이 뛰고있지 않던가. 지켜야 할 심장이 하나 늘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할 수 있으리라. 아. 지켜야하는 것은 자신의 전부나 다름없으니 여전히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해내야하는 일은 이전과 같다.

호화스러우면서도 신성해보이는, 마치 불가침의 영역같이 보이는 황궁의 하얀 대리석 바닥은 조심스러운 걸음에도 어김없이 진동하며 울었다. 낮고 조용히 우는 것을 짚어본다. 많아야 둘. 아마도 하나. 금속이 저들끼리 부딪치며 절그럭거리지 않는 것을 보아서는 은신을 위해 보호는 어느정도 포기했으리라. 판금이나 사슬 갑옷은 아닐테고, 잘해봐야 안에 덧대입은 가죽 옷 정도. 늘 피곤할 정도로 예민하게 곤두선 감각은 이럴 때는 도움이 됐다. 서늘한 적의를 감지하는 직감을 넘어 인기척의 수를 셀 수 있는 것은 한둘을 해치고 긴장을 간신히 놓아줄 때 그제야 나타난 칼날이 살을 파고들곤 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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