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개, 허상

아엘렌 by 얀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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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절히 기도하는 자에게 신의 형상이 임하시리라. 간절히 기도하는 자 앞에 신께서 친히 자신의 심부름꾼을 내려보내사 말씀을 전하시니, 따르는 자의 걸음이 영광되리라. 그러니 간절한 자여, 기도하라.

 

몸을 피하기 위한 하나의 은신처로 삼았다. 민가와도 거리가 멀고, 새로이 정비된 길이 생겨 더이상 사람들이 잘 거닐지 않는 옛 산길의 작은 기도원을. 신전이라 하기에도 협소한 작은 건물. 하얀 대리석으로 지어진 건물은 비바람과 시간의 앞에서 마모되고 금이 가 있었다. 당장 무너지지야 않겠지만, 관리는커녕 사람의 손길조차 닿고있지 않는 것이 보였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것만큼 숨기 좋은 공간은 없다. 동시에 본질은 기도원이라는 점에서, 설사 누군가 들어닥친다한들 그저 지나가는 길에 잠시 기도를 하고자 했다며 둘러대기에 좋았다. 방랑사제나 여행객들이 잊혀져가는 공간에 들르는 것은 흔한 일이었으므로, 그저 그런 사람처럼 묻혀갈 수 있을테니까.

 

금이 간 대리석 틈으로 이끼가 자라있었다. 그마저도 습기가 부족했는지, 시커멓게 반쯤은 타죽은 모습이었다. 한쪽 입꼬리만 말아올려 비웃었다. 대단하신 신을 모시는 공간으로써는 참으로 형편없지 않는가? 세상을 굽어살피신다는 전지전능한 그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자신을 찾는 이들의 걸음이 끊기는 것도 자신을 찬양하는 건물이 마모되는 것도 막아서지 못하는 그가 어찌 전지전능하다 말할 수 있는가? 이끼 따위가 피는 것도 죽는 것도 막아서지 못하면서.

 

“하기사 신이 계셨다면 이리 내버려두지는 않았겠지.”

 

신이 인간들의 편이자 하나일 것이라 믿는 것도 이상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이리 떠받드는 것도 우습지 않은가? 거기다 그런 신이라면 차라리 없는 것이 낫지 않은가. 용서와 체념보다는 복수와 증오가 가까운 나이의 소년은 철학자들조차 평생을 풀지 못한 의문에 대해 차갑게 되뇌까렸다. 소년의 태를 채 다 벗지못한 남자에게는 원망할 대상이 필요했다.

 

매일 가장 날카롭고 예리한 칼로 겨누는 것은 자신이지만, 그럼에도 탓할 대상 하나는 필요했다. 누가 어떻게 이런 일을 벌였는지 알면서도 참고 인내해야 하기에, 당장 그들을 겨눌 수는 없기에 이런 상황이 왜 벌어지게 내버려두었냐고 모두를 탓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신이든, 사건을 몰랐던 자든, 누구든. 하나의 깊은 원한을 품고 되새기면 정말 모든 걸 제 손으로 망칠 것만 같았으므로.

 

“멍청하고 나약한 새끼.”

 

그렇게 존재 자체를 의심하였음에도, 아주 조금은...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이 상황을 타계할 무언가가 내 손에 쥐어지기를, 그것도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처럼 당장이라는 마음에 가까우리라. 그리고 그렇게 무의미하게 스러져간 내 소중한 이들에게 축복을 빌고 싶었다. 그들의 다하지 못한 몫을 전부 실현하게 해달라는 욕망과 그들이 편하게 눈감기를, 신과 발할라가 정말로 존재한다면 그들이 그곳에 닿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앳된 남성은 손을 모으고 눈을 내려감았다. 모은 두 손의 손 끝, 손톱 아래에서는 말라붙어 채 지워지지 못한 피비린내가 죄악처럼 일렁거렸다. 그럼에도 그의 간절함은 꼭 그렇게 될 것이라는 강렬한 믿음과도 같아서, 신을 불신하는 자임에도 성스러운 모습이었다. 여신상 앞에서 눈을 감은 그는, 가슴 아주 깊은 속에 묻어두었던, 영원히 잠들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중얼였다. 스러져간 이들을 잊지 않으리라. 그들의 원한을 되갚겠다 피로 맹세하였으나, 그저 전부 없던 일인 듯 잊고싶은 소년으로써의 마음은 그리 쉽게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갈라진 기도원의 천장 틈으로 달빛이 스며들었다. 무언가 속삭이기라도 하는 듯 조용한 새벽 속 달빛이 은은하게 반짝였다. 날개 돋은 자가 기도원에 내려왔다. 허상일까. 피곤한 나머지 환상이라도 보고 싶은걸까. 허상 따위를 볼 것이었다면 차라리 멍청했던 나 때문에 스러져 간 이들을 보았다면 좋았을텐데. 지금처럼 온화한 허상으로 그들을 만났다면, 밤마다 내 목을 조르는 그들과는 달리, 내 사과를 받아줄지도 모르는데.

 

“복수의 칼날을 내려놓고 정의를 실현해라.”

 

온화한 달빛 아래에서 날개가 속삭였다. 그리하면 네 걸음에 영광이 따르리라... 날개는 기도원을 넘어 높은 곳으로 데려가 환상을 보여주었다. 너는 누구보다 위대하게 기록되리라. 용서와 자비를 베풀면 평화와 안식이 찾아오리라. 더 이상 누구도 죽지 않으리라...

 

속이 뒤틀렸다. 누구를 위한 평화와 안식인가? 떠나간 이들은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으며 남아있는 것은 탐욕에 눈멀어 타인을 죽음으로 떠민 추악한 이들 뿐인데. 무엇을 위해 그들에게 평화와 안식을 주어야 하는가? 차라리 같이 스러져버렸더라면 나았을 자신이 기록될 가치가 있긴 한가? 차라리 그들이 잊혀지지 않는 것이 올바른 결말 아닌가.

 

날개의 말은 그에게 모든 것을 포기하라는 말과도 다름없었다. 적어도 아직 체념과 수용보다는 증오와 복수가 이해하기 쉬울 나이의 남자에게는 더더욱 그러했다. 참혹했던 그날 밤의 일은 여전히 생생했디. 아무도 막아서지 않았고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는데 왜 나는 그들을 위한 선택을 해야하는가? 그것이 자신을 위한 선택이기도 하다는 점을 이해하기에는 그의 상처가 채 아물지도 못했고, 그는 아직 어렸다.

 

저리 말하는 것은‘이미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이 들고 있는 마지막 하나를 빼앗는 것이 탐욕스럽게 양 손에 원하는 것을 가득 쥐고 창고 문을 겹겹이 잠구는 자의 것을 빼앗아오는 것보다 쉽기 때문이겠지.’

 

‘이딴 것을 허상으로 보는 것은 나약한 내가 포기하고 싶다고 생각해서 그런걸까. 나 하나가 편안하고 싶어서?’

 

뒤틀리던 속은 하나의 늪이 되어 발목을 삼키고 사람을 가라앉혔다. 스스로가 역겨워 참을 수가 없었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내를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가, 달빛 아래에서 일렁거리는 날개가 참을 수 없을만큼 위선적이라, 숨겨두었던 칼을 빼어들어 그를 가르고 또 베었다. 온전히 환상이 맞긴 할까? 흰 피가 기도원을 더럽히고 찢겨진 날개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달은 구름 아래로 몸을 숨기고, 새벽이 더욱 깊어졌다. 휘두른 칼날을 따라 흰 피가 떨어지고, 칼을 든 소년은 남성으로 자라있었다. 그에게는 검은 날개가 돋아있었다. 두 번은 흔들리지 않으리라. 잊혀진 이들과 그 날의 사건을 모두에게 낙인 찍기 전까지는 눈 감지 않으리라. 증오와 복수가 되어보일테니, 어디 이것은 정의가 아니라 입을 놀려보아라. 나는 그날의 너희는 무엇을 했느냐 죗값을 물을테니.

 

잠 못 드는 밤이 깊어지게 되었던 그 날. 그 날 보았던 것이 정말로 허상에 불과했는지는 알 수 없다. 지금에 와 생각하면, 그것은 하나의 죄책감이었을지도 모른다. 사람이 사람을 베어넘기고자 하는데에서 그는 당연한 머뭇거림 같은 것. 머뭇거리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그래서 너무 많은 피를 손에 묻혔는지도 모르겠다. 나의 안식을 찾았지만, 그를 지켜낼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은 서지 않는다. 생각이 많아지는 밤이다. 날개의 말을 따랐더라면 그를 지키는 일이 더 쉬웠을까? 이제와서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애써 그러지 않았기에 추악한 자들을 벌했고 그가 찾아온 것이라 생각을 곱씹어본다. 구원의 날개는 달빛 속의 그자가 아니라, 엘렌이 달고 찾아왔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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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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