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독백
하얀 것과 붉은 것, 향과 악취, 미지근한 것과 차갑게 식어버린 것들에 관하여
폐부 깊숙히 들이마신 숨이 차갑다. 겨울이 다가오는 모양이다. 이 차가운 바람결은 애증의 대상이다. 겨울의 공기는 언제나 고요하다. 별다른 향을 품지 않고 그저 단단하고 날카롭기만 하다. 봄꽃의 향기도 여름의 볕 냄새도, 가을의 구워진 빵의 냄새도, 그와 비슷하게 떠오르는 겨울만의 냄새도 없다. 굳이 떠올리자면, 잘 벼려진 금속 냄새... 정도가 떠오른다. 특별한 향이라기보다는 공기를 들이킨 폐를, 바람을 가로막고 선 몸뚱이를 에는 듯한 날카로운 바람의 감각에서 오는 것.
어떠한 향도 맡아지지 않는 것은 좋다. 어떠한 것도 과민한 감각에 거슬리지 않는다. 날카롭게 느껴지는 바람은 어쩌면 지나치게 맑고 차가운 물 같아서, 고요하게 사람을 가라앉게 만들어서. 그러나 저 금속 내음이 손 끝에 달라붙은 피비린내를 상기시킨다는 점에서 마냥 좋아할 수가 없다.
겨울은 창백한 소년을 숨겨주었다. 그러나 피로 얼룩진 소년이 존재하였음을 누구보다 명백하게 들이밀었다. 소년의 목숨을 살려 청년으로 키운 것은 겨울이었으나 청년이 된 남자의 숨통을 조르는 것도 겨울이었다.
어미도 둥지도 잃은 소년은 제 목숨보다 어미의 복수를 원했다. 그러나 허무한 개죽음을 맞이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당장 행동할 수 없었다. 인고의 시간을 견뎌야만 했다. 자신의 존재를 지우고 조용히 덮어두어야 했던 시간들. 무너진 둥지 안에서 똬리를 틀었다간 붉은 것들을 토해내는 것으로 끝이 날 것이 분명했기에, 소년은 도망쳐야만 했다. 새로운 장소에서 자신을 덮어두고 침묵하며 칼날을 벼려야만 했다. 도망친 곳은 죽은 어미의 출신 영지였다. 제국 북부. 눈과 얼음이 언제나 사방을 덮고 있는 곳. 겨울철 매서운 바람이 태어나는 자리. 하얀 눈은 허옇게 질린 어린 소년을 덮어주었고, 소년은 겨울에서 성인으로 자라났다.
그러하기만 하였다면 눈 덮힌 설산은 하얀 깃털이 덮힌 둥지로 남았으리라. 숨어들 은신처이자 보금처가 되었으니까. 겨울 바람이 불어오는 것은 한 숨 쉬어갈 수 있는 틈을 제공했을터다. 그러하기만 하였다면. 전제가 붙었다는 것은 사실은 그러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겨울철 바람은 피비린내가 난다. 소복히 쌓인 눈 위로 떨어지는 선혈은 훨씬 강렬한 대조를 이룬다. 스며들고 잊혀져야 했을 핏방울은 눈을 녹이고 작은 구덩이가 되었다가 검붉게 얼어붙는다. 강렬한 이미지상은 뇌리에 박혀 잊혀지지 않곤 한다. 그러다 한기가 몰려들기 시작하면 악몽의 근원이 되어 긴장을 연기처럼 피어올린다. 새하얀 설원에 붉은 꽃을 피웠던 것이 떠오르면, 붉은 것에 대한 기억들이 일제히 개화한다. 예를 들면 북부로 걸음을 옮기게 된 계기에 대한 것. 하얀 색과 붉은 색의 대비는 눈 위에서 피로 그려지기도 했지만 대리석 위의 피로 그려지기도 했었으니까.
어느 날의 기억 속에서는 뒤집어 쓴 피는 뜨뜻했던 기억이 난다. 곧 차게 식어 말라붙으면 잘 지워지지도 않는 금속 비린내가 들러붙었지만. 이 금속 비린내를 혐오스러워하면서도, 자의로 피를 뒤집어 쓴 날은 기뻐했다. 그것은 간절히 바라왔던 소원의 성취이자 잊지 않도록 자신에게 박아두었던 칼을 뽑아내 이룬 해소였다. 붉은 것은 제법 따뜻했다. 최초로 피를 뒤집어썼던 날 이후로는 늘 시리다고만 생각해왔는데, 작고 미지근한 온기가 생긴 기분이었다. 어쨌든 희고 붉은 것이라 스물스물 연기처럼 어미를 잃었던 그 날이 떠올랐기에 비누로 살갗을 벅벅 벗겨냈지만, 그 날 밤은 미지근하고 축축한 온기에 잠이 들었다.
뻐근하고 무거운 몸이 기본값이었기에 작은 안식은 정말 달콤했다. 그럼에도 피에 미친 광인이 되지 않은 것은 그러한 방법으로 언제까지나 잠을 청할 수 없을 것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이 작은 안식처는 피에서 온 것이 아니라 그토록 바래왔던 복수의 성취에서 온 것이니까. 그렇다는 것은 목적을 이룬 지금은 다시는 그 안식을 느낄 수 없다는 말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매년 시린 겨울이었다. 겨울은 하얀 것을 더럽힌 붉은 것들을 떠올리게 만들 뿐더러 비어있어서 느껴지는 시린 감각을 더 일깨웠다. 겨울, 찬 공기 속 집무를 보느라 펜을 오래 쥐어 손 끝이 차가워진 것을 느끼면, 죽어버린 자들의 몸뚱이가 떠올랐다. 그럴 때 필요한 온기는 벽난로 앞에 서 손을 조금 내미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았다. 비어있는 자리를 채워야 하는 문제였으니까.
그저 코 끝에 맡아진 계절 내음에 생각이 길어졌다. 고질병이 도진 모양이다. 애써 관자놀이 부근을 손 끝으로 꾹꾹 눌렀다. 길게 늘어지는 과거의 생각은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제 살을 깎아먹을 뿐이다. 이미 어느정도 답을 내린 고민이기도 하고. 마음 놓고 기댈 온기가 필요해. 동시에 지금은 해소할 수 있는 욕망이기도 하다. 단순히 살결을 맞대고 싶다는 욕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런 종류의 것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맞닿은 손이 서늘한 몸에 온기를 전해오면, 달콤한 감각이 밀려들곤 하니까.
그러나 단순히 그런 것이 아니라 긴장을 놓아도, 무방비한 자신을 드러내도 괜찮다는 믿음과 그것마저 사랑스러워 하는 손길이 닿기를 바라는 애정욕에 가깝다. 다 커버린 어른의 거죽에 어울리지 않는 어리광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애써 이제와 작은 안식을 얻었다면 애달프게 굴어도 넘어가줄만 하지 않은가. 내 작은 온기는 연민이 많아서, 답지않은 어리광을 감싸안으려 할테니 아마도 그리 되리라. 계산적이라는 생각도 들기야 하지만, 이정도의 계산은 애정을 갈구하는 이들의... 흔히 수작이라고 일컫어지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춥다. 잠은 오지 않지만 이불 아래에서 눈을 감고있는 것도 꽤 괜찮을 것 같다. 온기가 조금 더해진다면, 어쩌면 한 숨 자고 일어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말 없이 작은 체구의 그를 끌어안고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사람의 체온이 공기를 데우는 게 느껴졌다. 사람의 살 냄새는 가끔 햇볕에 잘 마른 이불의 것과 비슷해지기도 하는군. 나른한 기분이 들었다.
- 카테고리
-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