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현] 바람
쌍현 합동지에 참가한 글입니다.
황도는 큰 도시라 돌고 도는 소문도 많다. 대부분은 그냥저냥 얼뜨기들 사이를 맴돌다 며칠이면 사라지는데, 개중 하나가 몇 주를 끈질기게도 버티고 있다. 가장 원하는 것을 보여주는 악몽을 꾸게 하는 요상한 귀신이 있다, 라는 소문인데.
“그러면 왜 악몽이지?” “그게 말일세.”
그 희생자가 되어 악몽을 꾼 이들은 아, 이것이 소문의 그 귀신이로구나! 하고, 곧바로 알아차린다고 한다.
“꿈에서는 제가 꿈을 꾸는지 아닌지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 아니던가?” “그러니 요상하다는 거지!”
꿈이어도 좋으니 ‘가장 원하는 것’에 잠겨 행복에 허우적거리지 싶으면 환영은 곧 사라져버리고, 딱 행복했던 만큼 고통스러워진다. 이러니 악몽이지.
“아, 그러면 평소에 바라던 게 별로 없던 사람에게는 그리 불리하지도 않구먼. 소소한 행복에 소소한 불행이 오는 건가.” “요 옆에 장 씨 알지? 그치는 비싼 명주를 마시는 꿈을 꿨다대. 실컷 퍼마신 뒤에 숙취로 머리가 깨질 듯 아픈 거 외에는 뭐 별것 없었다고 해. 것도 꿈속에서만 아팠다지, 깨서는 멀쩡했고.”
행복과 고통, 즐거움과 슬픔. 그 차이에서 힘을 얻은 귀신은 근처에 있는 다른 사람의 꿈으로 꾸물꾸물 기어간다는데.
“저번에는 누구였다지?” “나였어! 가족을 다시 보는 꿈을 꿨는데……. 염병, 또 그 지긋지긋한 기근을 또 겪을 줄은.”
그러니 옆 사람이 귀신에게 호되게 당했다면, 조심해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당할 이가 당신일 수 있으니!
“허어. 그래도 잠깐이라도 행복의 맛이라도 본다는 게 어디야. 이런 길바닥 인생에서 그 정도의 호사도 사치 아니겠나?” “이왕 말 나온 김에! 다들 꾸고 싶은 꿈이라도 있는가? 그래, 말해 보자고. 노풍! 자네는 어때?”
“어, 나는…….”
노풍, 사청현은 딱 거기까지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평소라면 누가 말릴까 두려워하는 것처럼 재빠르게 떠벌떠벌 입을 놀리고, 끊임없이 재잘거렸을 테지만……. 그럴 수가 있나. 신앙이 신관의 힘이 되는 것과 같은 원리다. 소문에 들뜬 사람들이 신나서 다시금 그 악명을 떠벌려주면 공포든 관심이든 그것의 힘이 될 테다. 더구나 이런 약삭빠른 귀(鬼)가 아무런 계산 없이 다음 먹잇감을 고를 리가 없다. 이 귀가 먹는 것은 사실 감정보다는 그 원인인 욕망 자체이다. 행복이 절망으로 바뀌는 건 욕망이 먹힘에 따른 결과일 따름이고. 더 먹음직한 희생자를 찾기 위해 귀신은 소문과 두려움을 이용한다. 소문이 퍼지는 가운데 지금처럼 사람들은 제 바람을 입 밖에 낼 테고, 그중 가장 거창한 소원을 비는 이가 다음 희생자가 될 거다. 그래야 더 큰 힘을 얻을 수 있으니까. 고작 숙취 꿈을 꾼 장 씨? 글쎄……. 늘 입맛에 맞는 먹잇감이 나타날 리는 없으니. 그냥 운 나쁘게도 주변에 그보다 더 큰 소망을 가진 사람이 없었을 뿐일 거다. 어쨌든 귀신은 움직여야 했으니까.
그것도 그렇고, 그게 아니라도 사청현은 함부로 입을 열고 싶지 않았다. 주둥이에 관한 요괴가 삶을 얼마나 파괴할 수 있는지 뼈저리도록 아는 사람은 셋 있었는데 그중 둘은 죽었고…… 그깟 요괴의 피해자가 되기에는 둘 다 너무 독했다. 이제 ‘살아있는’ 사람 중 그것을 두려워할 이는 사청현 밖에는 없다.
“그러니 말이야. 자네들도 입을 조심하라고!”
나 전직 신선이었던 것 알고 있지? 알지, 알지! 어휴, 노풍이 말해주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했네. 입이 방정이지……. 몇은 이렇게 주억거리고, 몇은 그다지 믿지 않아 재미있는 얘깃거리에 초를 쳤다고 핀잔을 했다. 뭐, 이 정도로 겁을 줬는데도 믿지 않고 떠든다면 어쩔 수 없지……. 별 해는 없고 악몽을 꾸는 정도일 테니, 그 정도는 본 풍사, 가 아니고. 이 사청현을 믿지 않은 벌이라고 생각해야지.
…라고 입단속을 한 게 무색하게, 정작 주의를 시킨 사청현 본인이 얻어걸릴 줄이야. 하필 잠꼬대를 해버릴 게 뭐야……. 사청현은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온종일 자기 전까지 시끌시끌 떠들면서도, 자면서도 더 할 말이 남았다는 양 사청현은 종종 잠꼬대를 했다. 본인이야 자면서 자기가 잠꼬대를 하는지 아닌지 알 도리가 없다. 그러나 주변 거지들이 시끄럽다면서 단잠에 빠진 그를 깨우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고, 또…… 지금은 영영 멀어진 벗 역시 너는 잘 때마저 형을 찾나? 하고 종종 타박하기도 했다. 그때는 아이 참, 본 풍사가 눈을 뜨자마자 찾는 게 명 형이 아니라 질투라도 하는 거야? 하고 묻기도 했으나…….
아무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사청현은 한숨을 쉬면서도 지금 이 상황이 꿈이라는 걸 직감했다. 귀신의 특성이건 뭐건 간에 이게 꿈이 아닐 리 없었다. 그 증거로, 열 손가락 다 깨져나가 이제 자라지도 않는 손톱은 매끄럽게 빛났고 이리저리 쓸려 거칠어진 피부는 뽀얗게 반들거렸다. 뒤틀려 이제는 팔꿈치 아래로 기능을 하지 못하는 한쪽 팔에서도, 마찬가지로 본래는 꺾일 수 없는 각도로 꺾인 한쪽 발목에서도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딱히 건드리지 않는대도 부러진 뼛조각이 염증을 일으켜 항시 욱신거려야 할 터인데.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은 그가 더는 취할 수 없는 여인의 모습으로, 푹신한 침대에 누워 있었다. 공기 중에 떠다니는 영력을 취해 – 사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이미 몸 안에는 풍부하다 못해 터질 듯이 법력이 충만했다 – 남상으로 도로 몸을 바꿀 수도 있었다. 이 정도의 영력이라면, 상천정일까. 돌아올 수 없는 곳이다. 이에 긴장한 사청현은, 한숨에 가까운 심호흡을 한 번 했다. 후우. 그러고는, 마음을 다잡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예상 외로, 상천정은…… 아닌 듯했다. 영력의 밀도는 비슷했고, 가구나 방의 생김새는 풍사전과 비슷하나 조금 더 소박했다. 마음속 깊은 데에는 부끄럽게도 돌아갈 자격 없는 그곳에 대한 그리움이 늘 자리 잡고 있었는데, 정작 꿈의 배경은 그곳이 아니라는 데에 사청현 자신도 조금 놀랐다. 몸을 일으켜 창을 열어보니, 바깥 풍경은 어렸을 적에 형과 함께 지낸 그 산 밑 마을과 비슷했다. 그러고 보니 여기에서도 그때의 따뜻한 분위기가 느껴졌는데, 형제가 살았던 그 집만큼 작지는 않아 – 물론 부자는 망해도 삼 년을 간다고, 젊은 청년과 어린아이 단둘이 살기에는 넉넉했다 – 마치 풍사전과 옛집을 반반 섞은 느낌이었다.
사청현은 눈을 감고 탄식했다. 아아, 내가 무슨 잠꼬대를 했는지 알겠다. 뻔하디뻔하다. 그래서 더 긴장되었다. 이건… 좋지 않은데. 이미 실수한 판이라,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무리 마음의 준비를 한다고 해도 이 귀신의 술수에 한 번 말려들었으니, 그리고 법력도 무엇도 없는 채로, 앞으로 일어날 일을 막을 수 없다. 막을 수는 없겠지만, 어쩔 수 없지만, 적어도…….
허나 귀신은 야속하게도 그가 마음의 준비조차 할 틈을 주지 않았다. 아아, 복도에 울리는 발소리마저도, 어찌.
“청현, 어찌 이리 늦게 일어나! 해가 중천에 뜨지 않았느냐.”
이런 하나하나 기억과 꼭 같은데, 아니, 이제는 제법 흐려진 그의 기억보다도 더욱 형의 생전과 똑같은데, 어찌 울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청현은 눈물을 참으려는 노력조차 할 수 없었다. 사무도가 있다. 사무도가 저기에 서 있다. 당연하지 않은가, 그는 늘 잠꼬대로 형을 찾았다, 아니, 그것은 핑계다. 잠꼬대 때문이 아니더라도, 그는 늘 형이 보고 싶었다. 그에게 달리 소망이 있었겠는가……. 그는, 사청현의 유일한 가족이었다. 그는 사청현의 가족이고, 부모였고, 사청현의 좁은 울타리 속 거의 유일한 존재였다. 아무리 사무도가 죄인이라도, 사청현을 위해 사청현까지도 공범으로 만든 이라고 해도, 오히려 그렇기에. 그런 일을 저지를 만큼 사청현을 사랑하는 이는 이전에도 없을 것이며, 앞으로도 없을 것이었다. 사청현을 낳은 부모가 십 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그에게 준 사랑보다도 훨씬 큰 사랑일 것이고, 실제로도 그랬다. 어느 부모가 몇백 년이나 자식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사무도는 정말로 몇백 년을 그를 사랑했다.
사무도는 다 큰 동생이 질질 울음을 터뜨리며 그에게 안기자 몹시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으나 곧 정신을 차리고, 평소처럼 노성을 터뜨렸다. 청현! 제정신이냐! 라는 말로 시작하는 일련의 잔소리에는 어디 아픈지, 악몽이라도 꾸었는지 하는 걱정이 묻어났다. 평소처럼, 이라고 말하기에는 이미 사청현에게 있어 평소가 아니게 된 사무도는, 자신이 그 악몽의 등장인물이라고는 전혀 상상할 수 없겠지. 그래서 더욱 쓰라렸으나…… 지금은 짠 눈물이 닿아도 상처가 전혀 쓰리지 않을 정도로, 그저 그리웠다.
사무도는 그래 보이지 않지만 의외로 짓궂은 사람이라 농담에도 재능이 있었다. 저와 인성일지 성질일지 비슷하게 독한 벗들과 끼리끼리 어울리며, 영문과 함께 배명을 놀리거나, 반대로 배명과 함께 영문을 놀리며 실없는 소리도 하는 사람이었다. 자기가 궁지에 몰렸을 때는 뻔뻔하게 혹은 느물거리며 넘어가는 재치도 있었다. 그렇지만 원본을 뛰어넘어, 사청현을 달래기 위해 꿈속의 사무도가 친 농담은 훨씬 기가 막혔다.
“왜, 대체 왜 그러느냐 청현. 너무 서럽게 울어 가족이라도 죽은 줄 알겠다.”
뚝. 아니, 한참을 목 놓아 울다가도 이런 황당한 소리를 들으면 그칠 수밖에 없다. 허어?! 대체 꿈속의 형이 대체 어떻게 알고 이런 농담을 치는 거야? 나 지금 가족이 죽은 사람 맞잖아!? 아무리 귀신 그놈이 신통하다고 한들 어찌 이렇게 적절하게 뼈가 있는 농을 치게 할 수 있지!?
…이런 말을 입 밖으로 낼 수는 절대 없으나 어이가 없는 건 없는 거라 꾸욱 참고 형을 황당하게 쳐다보았다. 마찬가지로 걱정스럽게, 혹은 황당하게 쳐다보는 사무도는……. 수횡천이라고 볼 수는 없는 모양새였다.
물론 그의 뼈에 새겨진 오만함이 완전히 덜어져 수더분하다고 표현할 정도까지는 아니었으나 수사무도보다는 푸근했고, 의복 역시 고급스러웠으나 신관의 천의는 아니라 그가 만일 등선하지 않았다면 하계에서 걸쳤을 만한 옷이었다. 마치 상천정의 제신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평범한 인간 같았다. 무엇보다도 수사선이 없었다. 형과 그가 표정만 빼면 같은 사람이라 착각할 수 있을 정도로 닮았듯, 그렇게 꼭 닮은 법보가 없었다. 사청현 자신의… 풍사선도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법력을 자유로이 다룰 수 있는데도 저가 풍사 대인이 아니고 형이 수사 대인이 아니란 것은 기묘했으나, 원래 꿈은 그런 게 아닌가. 이 꿈은 가장 원하는 것을 보여준다고 했다. 사청현은 다시금 실감했다. 역시 그는 이. 죄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죄를 없는 것으로 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그와 동시에 사청현은 너무나 갑자기 너무나 낯설고 거친 세상에 내던져진 것도 사실이다. 두려움에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울컥울컥 올라왔으나 죄에서 눈을 돌릴 수는 없었고, 어차피 도망쳐봤자 갈 곳도 없었다. 그러나, 도망칠 곳이, 그러니까 ‘꿈’이라는 곳이 생긴다면…….
사청현은 무엇보다 밝고 희망차게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장기로 삼은 사람이라서, 그리고 그가 그리워하던 형을 이렇게라도 다시 보고 싶기에, 다시 꿈에 집중했다. 무얼, 내 의지로 이리 도피한 게 아니니까. 그러니까, 지금 잠깐만. 어차피 꼭 이만큼 불행해진다고 했어. 잠시만은 괜찮겠지. 그런 마음으로 오히려 저보다 더 놀란 것 같은 꿈속의 사무도에게,
“……아무 일도 없었어. 그냥, 무서운 꿈을 꿔서.”
“무슨 꿈. 그렇다고 이리 울어?”
“아하, 하하하, 그럴 수도 있지! 진짜야, 형. 하하. 그래서 그래.”
하고 답했다. 이런 얼버무리는 말에 미심쩍어하는 것이 생전의 형과 같았다. 사청현은 사무도를 누구보다 잘 알았다. 사무도는 저에 관해서는 끔찍하고 집요해서 절대 이 정도에 마음을 놓지 않는다. 특히 사청현이 당황하거나 난감해할 때 웃어버리는 버릇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더더욱. 그래서 더 ‘진짜’ 형 같았다.
그러나 사청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 역시 사무도였다. 사청현이 한번 잡아떼면 절대로 대답해주지 않는 고집이 있다는 것을 사무도는 잘 알았다. 이 꿈속의 사무도가 진짜 형이 아니더라도, 사청현이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꿈속의 형은 그대로 행동할 것이다. 뒷조사는 샅샅이 하더라도 우선은 그냥 미간을 찌푸리고, 한숨을 쉬며 한마디 하겠지. 그리고 사무도는 그대로 했다. 장탄식과 함께 내뱉은 그 한마디가 다소 충격이었으나.
“어휴. 곧 있으면 시집갈 녀석이 지금 이게 무슨 소란인지.”
……응? 사청현이 흠칫, 굳었다. 지금 뭐라고…?! 사무도는 그런 사청현의 표정은 보지 못한 듯, 골이 지끈거리는지 관자놀이를 두 손가락으로 지그시 누르며 계속 잔소리를 이어갔다. 네 부군 될 사람 앞에서는 절대 이런 모습을 보이지 마라, 자칫 소박맞을까 두렵다. 그놈이 성에는 절대 차지 않고, 아니 누굴 데려와도 네 격에는 맞지 않을 테고, 아니 그놈에게 아우가 장가도 아니고, 하물며 여인으로서 시집을 간다는 것도 마음에 안 드는데…… 응, 응? 시집!?
사청현은 기겁했다. 아니, 형, 이게 무슨 소리야! 하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으나 그리하면 꿈속의 사무도는 더욱 의혹을 품으리라, 이 모든 게 그에게는 당연한 일인 듯하니까! 그야 당연하지, 꿈속의 사무도는 당연히 사청현의 꿈속의 인물이라, 사청현이 은밀히 품었던 마음속 소망이 이 꿈에는 그대로 구현될 테니……. 그 바람에 맞추어 행동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제 터무니없는 날것의 욕망을, 그것도 형의 입을 빌어 듣는 건 너무나, 너무나 부끄러웠다! 그리고 수치 이전에, 이건, 잘못되었다. 그제야 사청현은 직감했다. 시작됐구나.
귀신의 꿈이 행복이 아닌, 딱 그만큼의 절망을 주는 단계로 넘어왔다.
사청현은 바람 같은 사람이라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만큼, 그리고 여상과 남상을 자유자재로 오가는 만큼, 자기가 꼭 사내라고 강하게 의식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제가 계집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한때는, 죄스럽게도, 연모하는 마음을 조금이나마 품었던 이에게 있어 더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었다. 그는 사청현을 대할 때 남상이건 여상이건 똑같이 퉁명스러웠고 또한 똑같이 신의가 있는 친구(로 가장하)였으나, 아무래도 조금이나마 더 무르고 다정해지는 건 사청현이 여상을 했을 때였던지라. 그런 그라면 역시 귀엽고 어여쁜 여인을 사랑하겠지, 그도 무릇 정욕이 있는 사내이니, 여인을 품에 안고 입 맞추고 싶겠지? 하는 생각에, 그런 식으로라도 좋으니 조금이나마 더 그에게 특별해지고 싶어서…….
그래서 사청현은 그에게 시집을 가고 싶다는 마음을 품었다. 깜찍한 발상이다. 그 감정이 연심이라는 걸 깨닫지 못했는데도 제법 그런 깜찍한 생각을 했다. 그에게 단 하나뿐인 존재가 되고 싶어, 마치 그가 나에게 내 ‘가장 친한 친구’라는 단 하나뿐인 존재인 것처럼. 그런 마음에 이미 몇 번이고 여인의 몸으로 몸을 겹친 바는 있었으나 그 정도로는 확실하지 않았다. 그와 혼인하고 싶었다. 정식으로 삼서육례를 거쳐 세상 사람들과 형과 그에게 정식으로 그의 처로 인정받고, 그의 여인으로서 그에게 안겨 태에 그의 씨를 받아 그의 아이를 품고 싶었다. 그러면 그에게 있어 단 하나뿐인 존재가 되어, 사랑받을 줄 알았다.
물론, 지금 와서는 그가 제 여상에 무른 면모를 보였던 다른 이유를 안다. 아무래도 여동생과 정혼자를 떠올린 거겠지. 그런데 그걸 알게 된 지금까지도 이런 욕망을 가슴 한 쪽에 숨겨두고 있었다니, 추악하지 않나. 누가 그의 처가 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을 해했는데? 누구 때문에 그의 ‘가장 특별한 이들’이 죽었는데? 그 자리를 비집고 들어가고 싶다고? 아직도?
“……그, 형, 아니. 아니지. 그, 이, 이건 좀 아닌 것 같아.”
얼굴이 시퍼레진 사청현이 더듬거렸다. 사무도 역시 따라 굳었다.
“청현, 청현? 다시 안색이 좋지 않은데……. 역시 안 되겠다. 말해 봐라. 대체 무슨 꿈을 꾸었기에 이러는 거야.”
“이건, 이건 아니야! 아냐, 아냐 역시 취소할래, 이, 이건 안 되지…. 아무리 그래도, 나 여기 있으면 안 돼……!”
“아니, 대체 어딜 가려고!”
스멀스멀, 공포가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아까까지는 형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잊고 있었다. 잊고 싶었다는 게 정확할지 모른다, 이 악몽이 악몽인 이유를. 그렇지만, 그 형의 입으로, 제가 생각해도 끔찍할 정도로 뻔뻔한 죄를 토하게 만들면, 이쯤 되면 직시할 수밖에 없다! 이건, 단순히 형을 보고 싶다는 꿈이 아니다. 단순히 현실에서 도피하려는 꿈이 아니다. 도망치는 게 아니라, 탐하는 꿈이다. 물론 귀신은 단순히 잠꼬대에서 형을 애처롭게 부른 그가 만만한 먹잇감이라 홀랑 집어먹은 것이겠지. 그런데 그 먹잇감이 훨씬 깊고 추하며 건방질 정도로 거대한 걸 원할지 어찌 알았겠는가? 지금쯤 그 귀신은 환호성을 지르고 있을 터다.
“형, 그, 그는… 그 사람은……, 아니, 지금, 난……. …그 사람 누구야? 지금 어디 있어?”
사무도가 입술을 악물었다.
“그가 누구냐니……. 아니, 그만두자. 그래. 그라면, ■■ 말이냐?”
들리지 않았다. 그 두 글자가 들리지 않았다. 무언가 희미하게 가려진 것처럼 들린다. 마치 사청현이 그 이름에 닿는 걸 방해하는 듯한 괴이한 잡음이다. 이 역시 그의 추악한 바람이리라, 그 두 글자를 떠올리기만 해도 죄악감과 공포심이 솟으니까, 또 그리 느꼈다는 데에 다시금 죄책감이 드니까! 그러니 가리는 것이다. 그게 사청현이 바라는 바이니까! 사무도의 입에서 나온 그 두 글자, 명의라는 이름이라는 걸 사청현은 잘 알고 있다. 그런데…… 그러면 안 된다.
-이름이 틀렸잖아.
사청현은, 이 이름을 틀리면 안 된다. 기만의 꿈같은 나날들 가운데 그를 ‘명 형’이라고 불러댔던 시절과 지금 이 꿈은 다르지 않다. 이 얼마나 큰 거짓이고, 이 얼마나 큰 죄악인가? 다시 그를 ‘명의’라고 부르고 싶다고? 모든 걸 잊고 그를 기만하며 저 혼자 행복해하고 싶다고? 또다시? 그 두 글자는 그의 삶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이름이다. 그가 ‘이름’ 때문에, 그리고 ‘사청현’ 때문에 얼마나 큰일을 당했는데? 그 모든 걸 잊고 가려두고 덮어두고 싶다는, 어리석고 더러운 ‘행복’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싶다고? 그러나, 그러나 그러고만 싶다! 행복이 달콤해서가 아니다. 반대다. 눈을 돌려서는 안 된다는 걸, 제 잘못에 책임을 지고, 형과 그의 몫만큼 열심히 삶을 살아야 한다는 건 알고 있다. 그러나 눈앞에서 목이 뽑힌 형과 비천한 거리의 삶이, 그리고 은애하는 동시에 두려운 그가-
사무도의 형상은 점점 그날과 같아지기 시작했다. 사무도의 옷이 점점 신관 수사무도의 옷으로, 그러다 그날 그를 속이기 위해 장포를 벗은 그 차림으로, 그러다가, 더럽게 물든 흰옷 차림으로 바닥에 꿇어앉아……. 팔이 툭, 떨어졌다. 피가 번졌다. 툭, 툭, 툭. 핏방울이 떨어진다. 머리도, 툭. 땅에 떨어져 데구르르 굴러간다. 그 머리가 말한다. 웃는다. 기기묘묘하게 올라간 입꼬리가 말을 건다. 청현, 청현! 형이 말하지 않느냐. ■■와, 이 형과 영원히 살아야지. 이렇게 행복할 수가 없지 않으냐? 청현. 형은 먼저 내려가서 널 기다리고 있었다. 너도 따라와야지! 이 형과 함께 가자!
-안 돼, 안 돼 형! 형, 말하지 마. 이제 그만 말해! 형, 제발, 제발 부탁할게. 이제 그만 말해. 제발 입 다물어! 살려 줘……! 사청현은 그때와 같이 저항하며 울부짖었다. 수많은 광인이 제 사지를 비트는 듯 고통이 찾아왔으나 그보다는 형의 저 입, 저 입이 더 괴로웠다. 그 입보다 저 스스로가 더 괴로웠다. 안 돼, 안 돼! 미안해! 명 형! 명 혀… 아니, 아니야아니야아니야!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전부 우리 잘못이야, 내 잘못이야! 내가, 과분한 마음을, 아니, 형이, 내가, 나를 위해서, 미안해! 내, 내가 몰라서, 속아서, 아니야……, 아, 아니야. 내가 전부, 속, 속여서, 몰라서, 무지해서, 알 수도 있었지만 몰라서! 그래서 당신을 고통스럽게, 그리고, 내 마음이, 미안해, 혀, 형을…… 말리지 못해서, 안 돼, 안 돼! 명…, 아니, 하 공자! 하현!
순간, 무언가가 쑥 뽑히는 느낌이 들었다.
노풍은 몇 날 며칠을 깨지 못했다.
처음에야 다들 그냥 노풍이 늦잠을 자는구나, 싶었다. 거지나 한량이나 할 일이 별로 없는 것은 마찬가지라 늦게 일어난다고 책할 사람은 없다. 늦잠을 잔다 해도 손해 볼 건 아침나절 자기 밥벌이를 못 하는 것뿐인데, 거지가 새벽 댓바람부터 구걸을 한다고 해서 벌이가 얼마나 차이가 나겠는가. 그래서 거지들은 한낮이 다 되어서야 노풍을 대충 흔들면서 어이 노풍, 이제 그만 일어나지? 하고 깨웠다. 그러나 노풍은 일어나지 않았다. 거칠게 흔들어 재끼고 쿡쿡 찔러도 봤으나 일어나지는 않고 꽤나 행복한 듯 실실 웃으며 잠꼬대를 했다. 그제야 거지들은 짐작했다. 아, 이거 그 귀신이다.
제가 경고를 해 놓고 뻔히 걸리는 것도 노풍답다면 노풍다웠지만, 이미 일어난 일. 가만히 놔두다가 저녁 즈음 깨어나면 실컷 놀려먹으려 했다. 그런데 이게 하루 이틀이 넘어가면, 아무리 그래도 좀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여태까지 도성에 돈 소문 중 이렇게 깨어나지 못하는 경우는 없었다. 사흘째에는 더더욱 심해져, 행복에 찬 미소는커녕 점점 신음을 흘리더니 미안하다고, 미안하다고 누군지 모를 이에게 뭔지 모를 사죄를 하는 게 아닌가. 이 바닥 거지 중 사연 하나 없는 사람 없을 테지만, 그래도 사죄가 너무나도 간절하다 못해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거기에 식은땀에 경기에 고열까지. 어이, 이거 위험한 거 아냐? 위험한 정도가 아니지 이 사람아! 당장 누가 보제촌으로 달려가서 사 도장이라도…, 그럴 여유가 있겠는가? 귀신도 귀신인데, 사흘을 굶으면 노풍 죽어! 근처에 아무 도사라도 아는 사람 있어? 거지한테 그런 인맥이 퍽이나 있겠다! 답례로 제를 올릴 돈도 없고 말이지……하고, 거지들이 당황해 쑥덕대는 차에.
나흘째 아침. 노풍은 갑자기 벌떡 깨어났다.
와글와글 모여 그를 걱정하는 거지들의 목소리가 들리지도 않는 듯 노풍은 정신없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허리춤의 망가진 부채를 더듬다가, 무언가를 부르려는 듯 입을 크게 벌렸다가…….
“노풍!”
“아이고, 노풍!”
“노풍, 괜찮나?”
하는 소리에, 이내 그만두었다. 사청현은 입을 다물고, 무언가를 꾹 삼키고는, 웃어 보였다. 응, 나는 괜찮아…….
“뭐 그런 일이 있었어요.”
아 이거 맛있네, 한 그릇만 더 사주실래요? 사청현은 아무렇지 않은 듯 내뱉었으나, 오늘의 물주 – 그러나 고물 선인의 자금은 넝마를 주워 판 얼마 안 되는 돈 이외에는 대부분 그의 남편에게서 나오므로 진짜 물주는 혈우탐화라고 하는 것이 옳겠다 – 사련은, 사청현의 오랜 – 사실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몇 년 정도의 사귐은 유한한 인간의 삶에서는 꽤 긴 거니까, 그러니까 오랜 친구라고 치자 – 친구이기에 그의 말끝에서 쓰라림을 잡아낼 수 있었다. 그렇다고 사청현이 밝음을 무리해서 연기하는 것은 아니었다. 타고난 발랄한 천성 덕분에 그 쓰라림까지도 감당할 수 있고 감당하려 하는, 옛 신관다운 성숙함이기도 했다. 그래서, 사련 역시 그저 여상히 대답했다.
“그랬군요.”
“네, 정말 두 번은 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더라고요.”
사청현은 한 번 크게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역시 좀 추한 건 알지만……. 전하는 제 벗이니까요! 이런 건 서로 나눠야 하는 거겠죠? 그럼요, 청현. 편하게 말해 주세요.
“…역시 너무 추했어요.”
“청현. 그런 말 말아요.”
“사실 지금도 추해요. 알아요! 알고 있어요. 무언가를 원하는 바람 자체는 추한 게 아니지요.”
그런데, 그럴 자격이 없는 사람이 원한다면…, 역시 추하죠? 머리를 감싸 쥐고는 흐리게 하하하, 하고 웃는 사청현이었다. 사련은 그가 잘 웃다 못해 당황할 때도 긴장할 때도 난감할 때도 웃는 걸 알고 있다. 또, 그가 ‘자격’이라는 데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는 것도 뼈저리게 알고 있다.
“어쩌면. 그 귀신이 청현을 속이기 위해 그런 식으로…, 음, 왜곡? 청현의 마음을 그런… 부정적인 방식으로 곡해하지 않았을까요?”
“에이, 그렇게 말씀하시면서도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시죠? 본 풍…, 저도 압니다. 그래도 제가 몇백 년을 신관 노릇을 했는데요. 그 귀신에게 그 정도의 힘은 없을 거예요.”
역시 억지 위로는 도움이 안 되는 법이다. 사련이 사청현을 아는 것보다, 당연하게도, 사청현 본인이 훨씬 사청현을 잘 알았다. 그의 천성이 밝을지언정 이는 그가 무지하다는 뜻이 아니었으며, 그가 몇백 년을 형의 안온한 보호 안에 살았을지언정 그는 그 성곽 안에서도 그 나름의 혜안을 키웠으며, 비록 진짜 ‘세상’에 내던져진 지 얼마 되지 않았을지언정 그 몇 년은 강제로 세상사는 지혜를 머리에 넣어주기에 충분히 냉엄했다. 그런 사청현이기에 지금 더욱 염치없어하는 것이다.
따라서 거짓 위로는 그에게 영 위안이 되지 않는다. 사련이 그의 친구로서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담담히 들어주는 것뿐이리라. 잠시 침묵. 사청현이 입을 열었다, 잠시 주저하다, 말을 꺼냈다.
“사실 있죠,”
사련은 아까까지 사청현이 귀신에 대해 장광설을 늘어놓던 것은 이 이야기를 하기 계면쩍어 그랬던 것이리라고 직감했다. 결국 하고 싶었던. 말은 이거겠지. 사련은 조금 더 몸을 가까이 기울여 앉았다.
“제가 어떻게 깨어날 수 있었는지 아시나요?”
“궁금해요. 말해 주세요.”
사청현이 한창 꿈속에서 사무도의 거죽을 한 그것에게 악다구니를 쓰며 괴로워하는데, 그의 이름을 부르자마자 무언가 몸에서 쑤욱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아마 사청현에게 들린 귀신이었으리라. 이번에는 옳은 이름을 불렀기에 귀신을 내쫓은 것인지, 하고 생각했으나 그건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한 근거는, 귀신이 무언가에 머리채를 잡혀 끌려 올라가는데, 그 찰나의 시간이 너무나 길게 느껴지며, 시야에 사무도의 환영 이외에 다른 광경이 점멸했고, 지지직거리는 소리가 들리며 겹쳐 보이는 광경은…….
“간단히 말해서, 하생이라는 청년이 행복한 가정에서 어여쁜 아내를 맞고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하늘을 기쁘게 하는 명문을 지어 등선하는 장면이었지요.”
사청현은 피로하게 웃었다. 그들 형제만 없었어도, 아니, 사청현만 없었어도, 그래서 사무도가 그리하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흘러갔어야 할 터였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그러면서도 소박했다. 마땅히 돼야 했을 것들이 당신의 욕망이구나. 당신은 그 정도로 소박했구나. 동시에 당신은 그것이 그 정도로 절박했구나. 그런데도…… 당신은 나를 구하는구나. 이 다정함에 나는……. 사청현은 어느새 떨고 있었다. 목소리가 떨리고, 갈라지고, 눈물이 고이다가 한 방울, 두 방울 흘러 국수 그릇에 떨어졌음에도 사청현은 그저 두었다. 그의 다정함에, 그래서 내 마음이 제멋대로 흔들리는 게, 염치가 없어서 어쩔 수 없어요…….
사련도 그저 두었다. 사련은 가만히 그의 어깨를 다독였다.
노풍은 그 후로 다시는 잠꼬대를 하지 않았다.
신나게 사청현의 소망을 탐하던 귀신은 오히려 자기가 삼키려던 것을 못 감당해 체한 상태였다. 한때는 신관이었던 인간이다. 아무리 지금 범인이라고 한들 진짜 ‘범인’들보다는 몇백 년간 쌓인 희로애락의 농도와 양이 압도적으로 짙고 많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귀신은 욕심이 났는지 평소의 약삭빠름은 내다 버리고 정신없이 탐했다. 아둔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타인의 욕망을 삼키다 그 자신이 욕망에 삼켜진 꼴이란. 귀신을 먹는 귀신, 흑수현귀가 제 곁에 다가온 것도 모르고!
결국 그 말로는 이것이다.
현귀는 손을 털어 귀신의 터진 머리통의 잔해를 이리저리 흩었다. 묻은 액체가 지저분하다. 이런 더러운 것을 먹어봤자 기분이 더럽기만 할 것이다.
하현은 다시 흑수귀역으로 돌아가, 검은 바닷물에 손을 씻었다.
바닷바람의 소리가 거슬린다. 마치-
“하 형!”
이라고 그를 부르는 목소리처럼. 사청현이 미처 엿보지 못한 그의 꿈의 마지막 장면에서, 반갑게 그를 맞던 목소리처럼.
“…….”
그 귀신은 정말로 악몽을 보여주었다.
가장 바라는 추악한 바람이라는 악몽을.
흑수침주는 몸을 돌렸다. 흑수도가 그를 반갑게 맞았다. 거기에도 바람이 불었다. 역시나 거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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