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탄생
오리지널 빛의 전사
가장 고통스러운 죽음은 소사라고 한다.
그 말이 왜 인제 와서 기억나는 것일까? 까마득한 옛날, 사춘기 시절에 읽었던 책에나 나올 법한 정보인데. 그때의 히카루는 변성기가 온 것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말수가 적었고, 존재 자체를 이유로 사람을 싫어했고, 야생동물을 흉내 내며 모든 것에 예민하게 반응하곤 했다. 그때를 떠올리면 부끄러움에 못 이겨 얼굴이 달아오르는 한편 주변을 돌아보지 않고 전진했던 치기와 행동력에 감탄이 나오기도 했다…….
아니, 지금은 그럴 생각을 할 때가 아니지.
히카루는 쓸데없는 상념과 함께 이마에 맺힌 땀을 훔쳐냈다. 손목을 휘둘러 떨쳐낸 땀방울은 공중에 흩어지는 순간 증발하여 사라졌다. 피부 위에서 말라버린 땀은 소금기를 남겨 따갑게 얼굴을 찔렀다. 들이마시는 숨이 너무나 뜨거워, 기도도 폐도 산 채로 구워지는 것 같았다.
목 안은 이미 사막이 된 것처럼 물을 갈구하고 있었다. 입을 열면 쩍 갈라진 가뭄의 땅 같은 목소리밖에 나오지 않으리라. 그러나 물을 마실 여유는 없다. 주변을 둘러보면 시뻘건 화염으로 둘러싸여 물러설 곳이 없다.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어도 다른 사람들은 신도가 되어 초점을 잃은 공허한 눈을 한 채로,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오직 히카루 한 명뿐이다. 히카루는 검자루를 더욱 꽉 쥐었다. 장갑이 마찰하며 끼익, 하고 괴상한 소리를 냈다.
화근이 남지 않도록 말살해주마.
목으로 넘어가는 침이 따갑다. 소문으로만 들었던 존재를 눈앞에 마주하니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야만신, 화염의 이프리트는 불길에 휩싸인 절벽처럼 거대하고 위압적인 존재였다. 한마디 한마디 말이 온몸을 뜨겁게 짓눌렀다. 히카루는 무릎이 꺾이지 않도록 다리에 힘을 주었다. 꽉 짓씹는 입술이 마음에 여유가 없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히카루는 옛날부터 불을 두려워했다. 모험가라면서 불을 무서워한다고? 산크레드가 의아하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거렸던 것이 떠올랐다. 모험가인 탓에 노숙이 일상이었으나 히카루는 그 많은 밤 중 단 한 번도 제 손으로 불을 피운 적이 없었다. 마법을 배웠다면 빛을 낼 수도 있었겠지만, 검술사의 검과 방패로는 어둠 속에서 빛을 만들어 낼 수 없는 법이다.
그럼 위험하지 않았어? 이다의 물음에 히카루는 대답했다. 위험한 사람처럼 보이면 다 벴어. 그러자 이다는 히카루는 깊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구나!라며 놀랐고, 파파리모는 불 피우는 법 정도는 배워두는 게 좋아라고 충고했고, 야슈톨라는 질렸다는 얼굴로 쳐다보았다. 죽이지 않고 잘 설교해서 돌려보냈다고 몇 번이나 변명하고 나서야 야슈톨라는 경멸의 눈빛을 거두어주었다. 진땀을 흘리며 쩔쩔매는 히카루를 보고 슬쩍 올라가는 입꼬리를 숨기던 위리앙제의 모습까지 선명하게 떠올랐다.
아, 왜 갑자기 과거의 일이 지나가는 것일까. 이게 바로 주마등이라는 걸까.
히카루는 그렇게 짐작했다. 아무리 초월하는 힘을 지녔다 한들 히카루는 한낱 인간이었다. 두려움이 일면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고, 손톱 밑의 거스러미에도 아파하는, 어디에나 있을 법한 평범한 인간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히카루더러 빛의 전사의 재림이라며 떠받들곤 했지만, 히카루는 자신이 그 명예로운 이름에 어울린다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 이 상황에서도 도망치고 싶다는 비명이 귓속을 가득 메우고 있지 않은가.
단신으로 야만신과 대치하게 되다니. 심지어 가장 싫어하는 화염의 야만신과. 히카루는 자꾸만 구겨지는 인상을 애써 바로잡았다. 노숙하면서도 모닥불을 피우지 않았던 것처럼, 목숨을 거는 일 따위 가능하면 평생 마주하지 않고 지나치고 싶었다. 무사하고 안일한 하루하루를 지내다 평화롭게 눈 감고 싶었다. 그러나 히카루는 땅을 단단하게 딛고 검날을 세웠다. 싸워야만 한다.
눈꺼풀 뒤 순식간에 흘러간 주마등 속에서 눈이 마주치고 말았으니까.
울다하에서 만났던 난민 여자와.
그 여자를 내버려 두었더라면 어쩌면 히카루는 이런 상황에 맞닥뜨리지 않고 평온하게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히카루에게 실망하여 파파리모도 이다도 민필리아도, 히카루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무엇도 부탁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히카루로서는 그편이 훨씬 마음 편했다. 타인을 돕는 것이 미덕으로 통하던 시대는 지나갔다. 양심의 가책 없이 금화 몇 푼에 나라를 팔아먹는 사람도 버젓이 존재하는 것이 작금의 시대였다. 난민을 도울 때만 해도, 히카루가 나서기 전에는 모두 그 여자를 외면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때, 히카루마저 모른 척했다면 그 여자는 인생의 한 부분이 망가졌을 것이다. 페이지 한 장이 반으로 접힌 책, 바퀴가 찌그러진 장난감, 소리가 늘어지는 오르골처럼, 멀쩡하게 보이는 외피 속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가 남아 평생을 살아갈 것이다. 아무런 일도 없었던 척 자신을 속이고 가장하는 생애를 보내게 될 것이다.
히카루는 그것이 싫었다. 공허한 것은 자신 한 사람만으로도 충분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사막, 수평선만이 이어진 대해 속에 홀로 내버려진 채, 아무리 울고 소리쳐도 돌아오는 것은 탈력감뿐인 끔찍한 허무를, 그런 비극을, 여러 사람이 겪을 필요는 없었다.
히카루는 이프리트를 마주하고 있는 이 상황이 그때와 똑같다고 생각했다. 지금 도망쳐버리면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이 망가질 것이다. 히카루가 끔찍이도 두려워하는 불꽃에 녹아, 슬픔과 괴로움이 더 늘어날 것이다. 그러니 맞서야 했다. 싸워야만 한다.
잘 가거라, 신을 모르는 인간이여!
이프리트가 내지른 포효에 공기가 떨려 온몸이 저릿저릿했다. 금방이라도 장갑과 살갗과 뼈가 녹아 한데 뭉쳐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 눈알은 수분이 말라 뻑뻑하고 쓰라렸다. 그래도 히카루는 눈을 부릅뜨고, 야만신을 노려보았다. 방패를 내세우고 검을 들어 올렸다.
히카루 본인은 이 행동이 얼마나 고귀한 희생인지 알지 못한다. 그는 이대로 지나치면 마음이 불편하다는 지극히 당연한 이유라고 둘러대겠지만, 그 사소한 구실 하나로 죽음까지 각오하는 것은 누구나 쉽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토록 다정한 천성은 하이델린이 히카루를 선택한 이유이기도 했다. 그러나 초월하는 힘이 없었더라도 히카루는 이곳에서 야만신을 쓰러뜨리기 위해 몸을 던졌을 것이다. 설령 이 자리에서 홀로 타죽더라도 더 큰 비극을 막고자 하는 결의, 죽음을 불사하고 타인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가짐.
비로소 빛의 전사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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