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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페커미션 39. 양날의 판돈

1차 - 파이 + 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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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명] 양날의 판돈

유토피아는 말 그대로 낙원이었지만 인간의 손에 만들어졌기에 완벽할 수는 없었다. 인간이기에 발생하는 흠결을 보완하기 위해 낙원의 사람들은 여러 규칙을 만들었다. 그중 하나가 낭비하지 않을 것인데, 쓰지 않은 물건을 버릴 때는 반드시 신고해야 하며 폐기하는데 드는 각종 수수료 및 세금도 부담해야 했다. 정부는 버리는 품목과 사유 및 양에 따라 꼼꼼하게 가격을 매겼으며 그 가격은 절대 저렴하지 않았다. 그래서 낙원의 사람들은 사치를 잃어버렸다. 전근대 시기처럼 모든 물자를 못 쓰게 될 때까지 쥐어 짜내 써야 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구에서처럼 마구 낭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므로 파이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민하는 것의 근본적인 이유는 인간으로서 존재하기 때문이었으나 파이는 자신이 인간임을 탓하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고작 이런 걸로 엄청난 벌금을 내야 하는 것은 매우 비합리적인 일이며, 이 비합리의 원인은 인간존재의 흠결이 아니라 문명의 태만이었다. 부유하게 자란 파이에게 있어서 낭비할 수 없는 낙원은 낙원일 수 없었다. 그냥 더 좋은 동네에서 사는 것뿐이지.

“유토피아 같은 소리 한다, 정말…….”

그는 계산 결과 나온 예상 폐기 비용을 다시 쳐다보고, 다시 머리를 부여잡았다. 너무 아까웠다. 물론 울며 겨자 먹기로 버리지 않는 것 외에도 방법은 있었다. 정부가 세금을 붙이자, 사람들은 중고 시장을 키웠다. 종이는 귀한 데다 수요가 많으니 중고 시장에 내놓으면 금방 팔릴 것이다. 세금도 안 내고 돈도 벌 수 있겠지. 문제는 중고 거래가 필수요소로 자리 잡으면서 정부가 익명 거래를 금지했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물건 내놓은 사람이 내놓았는지 안다는 소리다. 무명을 포함해서.

무명만은 안 되었다. 온 세상 사람들이 파이가 뭘 파는지 알아도 상관없었지만, 무명은 알면 안 된다. 감정의 일부가 결여된 것과 눈치는 상관이 없는 문제라 파이는 무명이 수상하게 여기기 전에 자신의 계획을 수정할 수 있었지만, 계획을 세웠을 때 기합을 너무 넣은 나머지 잔뜩 과소비했고 그 결과 세금 덩어리가 잔뜩 생겼다. 아직까진 파이의 행동을 변덕이나 괴롭힘 정도로 생각하고 있겠지만 이게 중고 시장에 나오고 무명이 이걸 본다면 상황은 수습하기가 힘들어진다. 몇 번 더 머리를 쥐어뜯은 다음 파이는 결국 피 같은 돈을 정부에 바치고 쓰레기 배출 허가를 받았다.

망할 메모지. 망할 메모 녀석. 아니, 아니었다. 망해도 싼 놈은 무명밖에 없었다. 보통 사람은 추억을 재현해 주면 친근감을 느끼지 않나? 적어도 거부감은 덜해지지 않느냔 말이다. 어째서 무명이란 놈은 꼭 반대로 행동한단 말인가. 놀리거나 괴롭히는 것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누구나 정말 필요해서 메모를 남겼다고 인정할 만한 일로 메모를 남겨보았더니 돌아온 건 비인간의 가면에 금이 가다 못해 폭발하기 직전인 모습이었다.

무슨 의도로 이딴 걸 남겼느냐, 무슨 꿍꿍이냐, 어디서 뺨을 맞아서 여기서 화풀이냐……. 흡사 심문과도 같은 추궁이 이어졌다. 자의식 과잉이라고 맞받아치며 파이는 두 가지를 알았다. 제 계획은 처음부터 잘못되었다는 것과, 무조건 행동을 모방한다고 감정까지 모방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것.

어쩌면 빨리 알아챈 것만 해도 다행일지 몰랐다. 파이가 시작한 건 시간이 정해져 있는 싸움이었다. 계획이 상당히 진행된 상태에서 일이 틀어지면 수습할 길이 없었다. 1년을 채우지도 못하고 그 망할 집안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새로운 계획을 위해 머리를 쥐어짜면서 파이는 이를 갈았다. 그놈의 사랑, 그놈의 빌어먹을 사랑. 대체 어떤 프로세스길래 사람을 저따위로 만들어 놓는단 말인가? 사랑으로 저렇게까지 유난스럽게 일그러질 수도 있나. 일그러질 수 있다는 점까지도 이가 갈리는 면모이긴 한데, 어쨌든.

혹시 배경지식부터 잘못되었을까? 계획을 세운답시고 모은 자료부터가 적절하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파이가 끌어모은 자료는 대부분이 사람의 마음을 돌리는 법과 호감을 사는 법에 관한 것이었다. 어쩔 수 없지 않은가? 파이는 호감을 사는 법, 특히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의 마음을 바꾸는 법 같은 건 배운 적이 없었다. 아니, 배울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겠다. 그는 상류층 출신이라는 점만으로도 쉽게 호의를 샀으며 저를 싫어하는 사람에게 매달릴 만큼 절박한 상황에 부닥쳐 본 적도 없었다.

그래서 파이는 몰랐다. 사람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데에는 호감이나 신뢰 둘 중 하나는 있어야 수월하다는 것을. 그가 모은 자료들도 ‘어느 정도 상대에 대한 호감이나 신뢰가 남아있는 경우’를 전제하고 말하고 있다는 것을. 호감도 신뢰도 없는 관계가 개선되려면 오랜 시간을 들이던지, 극적인 사건이 발생하기를 하늘에 기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쓰디쓴 실패 후에야 깨달은 일이었다.

파이는 둘 중 어느 것도 선택할 수 없었다. 오랜 시간을 들이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했으며 미로라면 모를까 평화로운 유토피아에서 극적인 사건이 발생할 확률은 매우 낮았다. 불신과 불호를 연료로 돌아가는 관계를 이른 시일 안에 확실하게 변화시키려면 올바르고 온건한 방법으로는 불가능했다.

이렇게 된 이상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빠르고 쉬운 방법은 무명이 기억을 상실할 때까지 뒤통수를 내려치는 것이었다. 막막한 기분에 진지하게 방법을 찾아보던 파이는 뇌의 어느 부위를 가격할지 계산하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정신을 차렸다. 영화에서야 한 번 맞은 걸로도 기억을 잊어댄다지만 현실에서는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그다음으로 쉬운 방법도 있었다. 일단 무명을 기절시켜 가둬둔 다음 사람을 사서 무명으로 분장시키는 것이다. 1년간 천천히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을 익히는 연기를 시킨다면. 생각을 이어가던 파이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일단 무명의 대역에게 약점을 잡힌다는 위험이 있었다. 마음에 안 들면 부모에게 돈을 받고 사실을 미주알고주알 말해버릴 수도 있는 노릇이다.

설령 좋은 호구를 대역으로 잡는다 해도 이 방법은 미봉책에 불과했다. 내기에서 이길 수는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다음이 문제였다. 대역을 3년 5년씩 쓸 수도 없는 노릇이니 언젠가는 진짜 무명이 다시 등장하고 대역이 빠져야 하는데 1년간 가둔 무명이 무슨 짓을 할 지도, 1년간 괜찮다가 갑자기 사람이 미쳐 돌아간 이유를 집안에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무슨 방법이 있지? 파이는 정말로 막막해졌다. 누구라도 붙잡고 물어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예 진심으로 무명에게 빠진 척을 하면서 주위에 조언을 구해보는 것도 생각해 보았으나 이 역시 기각되었다. 상상만으로도 구역질이 나는 일을 실제로 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나? 모두가 자신이 무명에게 호감을 느낀다고 착각하게 된다고? 자존심이 실시간으로 벅벅 깎여나가는 소리가 들릴 지경이었다. 그렇게 되느니 차라리 유토피아에서 처음 자살한 사람이라는 타이틀을 따는 게 나았다. 어차피 집안과의 내기에서 져도 따게 될 타이틀이다.

파이는 잠시 생각을 멈추고 깊게 심호흡했다. 초조한 나머지 생각이 자꾸 이상한 방향으로 흘렀다. 누가 그랬더라, 급할수록 돌아가라고. 막막하면 처음으로 되돌아가서 다시 보라고. 기억나지 않는 조언자에게 마음속으로 감사 인사를 한 뒤 파이는 무명과의 관계를 시작점부터 짚어보기로 했다.

메모가 살아있을 때부터 친구라고 지나가듯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얼굴을 마주하며 처음 만난 것은 그의 장례식장이었고 무명은 파이가 진실을 들췄다는 이유로 폭력을 행사했었다. 그때를 떠올린 파이는 손톱을 세워 제 팔을 긁었다. 야만적인 새끼. 파이는 제 손톱에 살이 붉게 일어나는 것도 모른 채 몇 번이고 더 긁다가 생각을 이어갔다.

무명과는 관리자로 들어간 미로에서 다시 만났고, 건드리면 건드리는 대로 반응이 돌아오는 게 재미있어서 상대해 주다 보니 왠지 모르게 자존심이 벅벅 긁혀서 저 자식에게만은 절대 지고 싶지 않아졌고, 그리고 이야기 흐름을 따라가다 보니 사랑은커녕 호감 한 톨도 없는 ‘연인’이 되기로 했고…….

유토피아에 들어왔을 즈음에는 장난이었다며 접고 물러나기에는 너무 멀리 와 버린 사이가 되었다. 달리 큰 변화 없이 더 싸우다 덜 싸우다가 하며 지내고 있었다. 요즘 좀 이상해 보이긴 했는데 무명은 원래 이상한 놈이었기 때문에 무슨 일이 있는 건지 그냥 빠그라진 어딘가에서 정신머리가 줄줄 새는 건진 알 수 없었다.

그러니까 재미로 시작했다가 지고 싶지 않아졌고 상대를 꺾고 싶어서 관계를 쥐고 있다 보니……. 파이는 이마를 쳤다.

무명이 제게 진심으로 빠지게 하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힌 나머지 본질을 잊고 있었다. 부가적인 목표가 너무 달콤한 나머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었다. 그래, 집안과의 내기에서 중요한 건 ‘진심으로 무명을 꼬실 것’이 아니었다. 진심이든 뭐든 그게 무어 그리 중요하단 말인가? 요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처럼 ‘보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

파이는 크게 웃고는 모든 잡생각을 훌훌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은 방법을 생각해 낸 기념으로 비싼 온수를 가득 욕조에 채워 목욕하고 지구 마지막 다원에서 수확한 차를 마시고는 기분 좋게 침대에 몸을 뉘었다.

꿈 없이 푹 자고 난 다음 그는 무명이 한때 자주 드나들던 도서관으로 향했다. 어울리지도 않게 도서관엘 다니길래 무슨 일이 있나 했는데 몇 번 가고 나서는 다시 발걸음이 뜸해지길래 그러면 그렇지, 하고 비웃어 넘겼다. 지금 저를 보면 무명도 그런 생각을 하려나. 파이는 이번 일이 아니더라도 교양과 상식을 위해 도서관에 자주 다니기로 결심했다.

낯선 전문 서적을 몇 개나 뒤적인 뒤에야 파이는 자신이 원하는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놀랍게도 자신이 필요한 지식은 타인과의 상호작용에 대한 지식이 아니었다. 넓게 보자면 그에게 필요했던 지식은 자극과 반응이었다. 그래,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파블로프의 개 말이다. 먹이를 주기 전에 항상 종을 치면 나중에는 종소리만 들어도 침을 줄줄 흘린다는 그거.

헛웃음이 나왔다. 생각해 보면 무명과 저 사이에 고급스러운 인간관계론 따위가 제대로 작동할 리가 없지 않은가. 그와 자신의 관계에는 그저 야만적이고 본능적인 레벨의 이야기가 어울렸다. 파블로프가 실험을 위해 개의 턱과 위에 구멍을 뚫고 학대한 것처럼, 둘에게도 서로의 안위 따위 생각도 하지 않는 방법이 어울리는 것이다.

이번에는 실패하지 않도록 파이는 도서관이 문을 닫을 때까지 전문 서적을 옆에 낀 채 꼼꼼하게 계획을 짰다. 파이는 인정했다. 무명을 꺾어버리고 싶은 나머지 승리욕에 눈이 멀었다고. 애초에 무명에게 이렇게 악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 자체가 제게 없는 것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그런데 제게 없는 것을 그대로 다루려고 했으니 제대로 이해하지도 실행하지도 못한 것이겠지.

해가 질 무렵부터는, 특히 저녁 시간은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방문하기엔 썩 좋은 시간이 아니었다. 그래서 오히려 좋다고 생각하며 파이는 힘차게 무명의 집 문을 두드렸다. 흡사 채무자를 찾아온 악덕 사채업자 같은 모양새였다.

잠금장치조차 풀어주지 않으려는 무명을 ‘드디어 내게 빠졌습니까? 그래서 만나기 두려운가 보군요!’라는 두 마디 문장으로 해결한 파이는 뻔뻔하게 눌러앉아 저녁까지 얻어먹었다. 이러면 약이 올라서라도 파이의 식량을 축내러 올 것이므로 저녁도 해결하고 다음 만남도 기약하니 일석이조였다.

야무지게 식후 디저트까지 뜯어낸 파이는 마치 자신이 식사를 대접한 것처럼 당당하게 소파에 앉았다.

“이쯤이면 가르쳐줘도 될 텐데요. 무슨 일로 왔습니까?”

“아, 맞다. 용건.”

파이가 제 용건을 잊을 리가 없었지만, 잊은 척을 하면 약을 올리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인상을 쓰는 무명을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마주하며 파이는 말을 이었다.

“심심한데 내기 하나 해보지 않을래요?”

“뭐?”

한 글자 안에 고작 그딴 이유로 자기 식량을 축냈냐는 힐난이 담겨있었다. 한 마디에 저 정도의 뜻을 함축하다니, 이제 완벽한 기계 되기 따위는 그만둔 모양이지. 결국 그럴 거면서 쓸데없는 고집은. 무명의 죄책감과 고통을 이해할 생각이 없는 파이는 무명의 변화를 가볍게 낮춰보며 다시 말했다.

“내기 하나 하자고요. 요즘 우리 관계가 의미가 없어지는 것 같아서 말이지요.”

“우리 관계에 의미가 있었습니까? 몰랐습니다만.”

“있잖아요? 네가 내게 굴복하는 의미가요.”

“웃기는군요. 의미가 있다면 정 반대가 아닐지.”

“그럴 리가 없지만, 어쨌든 이 이야긴 너무 많이 했으니 일단 내버려 두고. 요즘 우리는 목적을 잊고 의미 없이 싸우기만 했단 말이죠.”

무명은 관자놀이를 몇 번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그냥 하십시오. 서두 떼고 본론만.”

“아, 재미없기는. 뭐, 좋아요. 이제 슬슬 누가 굴복할지를 판가름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래서 말인데.”

의미심장하게 말을 끊은 파이는 다음 말을 하기 전에 내심 긴장되는 속을 웃음으로 감추었다.

“겉으로라도 진짜 연인처럼 굴어보는 건 어떻습니까? 솔직히 너와 나 같은 연애를 하는 연인은 한 번도 본 적이 없거든요.”

“이건 또 무슨 개소리인 겁니까?”

“서로에게 겉으로라도 친절하고 상냥하게 대하자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에게 안 넘어가는 쪽이 이기는 걸로 하고요.”

자신의 목적을 감추고 싶으면 오히려 대놓고 드러내는 것도 좋은 방법이었다. 특히나 신뢰 따위 한 톨도 없는 사이라면 더 효과가 좋았다. 상대는 쉽게 나온 목적이 진짜일 거라고는 믿지 않을 테니까. 무슨 꿍꿍이가 더 있을 거라며 의심하고 또 의심할 것이다. 자신이 납득할 만한 이유를 스스로 만들어 낼 때까지.

“지적할 데가 한두 군데가 아닙니다만……. 일단 제가 왜 그래야 합니까?”

“호오, 내게 안 넘어올 자신이 없는 건가요?”

“대체 누가, 아니. 그 이야기가 아닙니다. 제가 왜 당신의 말에 따라야 합니까?”

“아하. 보상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군요. 그래요, 보상이라…….”

보상을 주면 하겠다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무명의 항의는 귓등으로 넘기며 파이는 열심히 고민하는 척을 했다. 사실은 고민하는 척이 아니라 타이밍을 재고 있었지만.

“유토피아에서는 특히나 누구에게 큰 보상을 주기 쉬운 구조가 아니라서 고민이 되는군요. 으음, 내가 너에게 보상씩이나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아, 그렇지.”

마치 방금 알아챘다는 것마냥 한 손을 주먹 쥐어 다른 손바닥 위에 가볍게 치며 파이가 발랄하게 말했다.

“네가 다정하게 구는 게 내 마음에 흡족하면, 네가 모르는 메모에 관해 이야기를 해주겠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궁금하지 않나요?”

“……뭐?”

무명이 무어라 더 말하기 전에 파이가 잽싸게 말꼬리를 낚아챘다.

“내가 줄 수 있는 것 중에 네가 기꺼워할 만한 거라곤 이것밖에 없는 것 같군요.”

파블로프의 개는 종소리만으로 침을 흘렸다. 종소리와 먹이라는 두 가지 자극을 지속해서 함께 받아 종소리는 곧 먹이라는 도식을 학습한 것이다. 이 법칙이 적용되는 건 동물만이 아니었다. 인간도 충분히 두 가지 자극을 동시에, 지속해서 받게 되면 언젠가부터 그 둘을 동일시해서 반응하게 된다. 그리고 무명은 기계가 되지 못한 인간이었다. 파이라는 자극과 메모의 이야기라는 자극이 함께 주어지면 처음에는 메모의 이야기를 기대하고 상냥하게 굴어보려 노력하겠지만 점차 시간이 지나면 파이를 보는 것만으로도 표정을 바꾸게 될 것이다.

무어라 몇 마디를 더 주고받고 나면 무명이 고민에 빠진 얼굴로 침묵을 지켰다. 침묵이 끊어질 기미 없이 늘어졌지만, 파이는 언제까지고 즐겁게 기다릴 수 있었다. 고민한다는 것 자체가 자신의 미끼가 제법 먹음직하다는 이야기였으니까. 파이는 무명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감이 왔다. 새로운 방법은 먹혔다는, 기분 좋은 감이.

 

 

계획은 놀랄 정도로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하도 얼굴근육을 안 쓰다 보니 무명의 표정은 어색하기 짝이 없었지만, 저를 보는 표정에서 냉기가 가시는 것만으로도 일종의 쾌거였으며 순조롭다는 증거였다. 1년이라는 시간은 짧지만, 누군가의 표정을 자연스럽게 바꾸는 데에는 충분한 시간이기도 했다. 파이의 말대로 무명의 태도가 조금씩 달라지자, 집안에서는 당황한 눈치였다. 좋아, 계속 그렇게 멍청하게 믿으라고.

한 가지만 빼면 모든 게 순조로웠다. 그건 너무 사소하고 희미하게 껄끄러운 것이라 파이 자신도 이게 중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정도였다. 무엇인가 하면, 파이가 보상으로 메모의 이야기를 할 때마다 의도하지 않은 간격을 두고 말을 시작한다는 것이었다. 무명은 파이가 일부러 제 속을 태우려고 그러는 줄 알고 있지만 그건 아니었다.

애매모호하게 말을 꺼내기 껄끄러운 이유는 말하는 본인도 알 수 없었다. 그저 단지, 희미하게, 둘의 대화에 메모가 계속 있는 게 꺼림칙하다고 느꼈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메모의 이야기가 필수라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대화 내용에 메모가 많은 게 왜 꺼림칙할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알 수 없었다.

결국 파이는 제 감정을 무시하기로 했다. 그야,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면 꺼림칙할 이유가 없으니까. 그래, 무명이라는 인간 자체가 꺼림칙하니 그 감정이 옮았겠거니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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