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간다
페스나 헤븐즈필 스프링송 주제가 제목에서 따왔습니다.
알리사는 '인간으로서 하고 싶은 일'을 적어두고 리와 라스에게 하자고 졸랐다. 구출 직후 겉도는 나에게도 다가와서 하자고 했다. 내가 마스터인 걸 알고는 있나보다. 하지만 나는 이 아이한테 고철덩어리라고 모욕한 게 너무나도 미안했다. "나는…빠질게."라고 거절했다. 안타까운 미소를 지은 알리사를 보니 조금은 안쓰러웠다. 다행인 건 나의 숙부에 해당하는 리와 라스도 나에게 강요하지 않고 알리사에게도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되었다며 나를 빼고 하자며 다독여주었다.
나는 끝없는 악몽에 시달렸고 변함없이 겉돌았다. 당연하지. 나는 전쟁을 일으켰고 죽어야 했으니까. 왜 살렸냐며 라스의 멱살을 잡고 소리쳤다. 라스는 놀라지 않고 헤이하치는 죽었지만 카즈야가 살아있고 나는 아직 할 일이 있으니 당장 죽일 생각은 없다고 말했다. 그래. 카즈야가 살아있다. 그렇다면 그 녀석을 죽이고 나도 죽겠다. 그 집념만이 나를 움직였다.
그렇게 겉돈 지 몇 주 후에, 알리사가 벚꽃을 보며 소풍가고 싶다며 나도 같이 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나는 계속 안 간다고 거절해도 알리사는 같이 가면 기분전환이 될거라며 계속 조르는 바람에 결국 알겠다고 했다.
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혹시 모르니 안경과 후드도 쓰고 왔다. 전범자가 뻔뻔하게 기어다닌다고 욕먹을게 뻔해서 최대한 얼굴을 가리고 다녔다. 혹시 몰라서 라스에게 돌려받은 카메라와 삼각대도 챙겼다. 버스를 탔다. 벚꽃이 흩날린다. 힘없이 떨어지는 벚꽃잎을 보니 내가 저지른 전쟁 중에 죽어버린 무고한 사람들이 생각나 눈물을 흘렸다. 속죄의 눈물이다. 이미 죽어버린 그들이 내 속죄와 사과를 받아들일리가 만무하다. 저승으로 가도 절대로 내 사과를 받아줄리가 없겠지.
목적지에 도착하여 먼저 기다리고 있던 그들에게 늦어서 미안하다고 말하고, 샌드위치로 식사했다. 식사를 끝내고 리와 라스는 티타임을 즐기며 풍경을 감상 중이다. 나는 가방에 수동식 필름 카메라를 꺼내 목에 걸고 벚꽃 풍경을 찍기 시작했다. 많이 낡아서 작동이 되나 싶었지만 다행히 작동은 잘 되었다. 야쿠시마에서 미시마 저택으로 이사할 때 가지고 온 엄마와의 소중한 추억이 담긴 물건 중 하나였다. 엄마는 이 필름 카메라로 야쿠시마의 풍경과 나를 여러번 찍었다. 엄마는 나의 생일 때마다 사진 뒷면에 편지를 써서 생일을 축하해주었다. 일기도 있는데 왜 사진을 찍냐고 물었다. 엄마는 웃으며 사진으로도 추억을 남기고 싶었다고 말했다. 추억을 남겨서 언젠가는 그 사람…미시마 카즈야에게 우리는 잘 지낸다고 전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총수가 되어 냉혹해지기로 결심했으나 이 사진들과 카메라는 버리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나에게는 소중하니까 섣불리 버릴 수 없는 티끌의 미련일지도 모르지. 어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들을 오랫동안 보며 씁쓸하게 웃다 눈물을 흘렸다. 엄마는 이런 걸 원하지 않았을거다. 하지만 할 수 밖에 없다며 흘러나온 말은 '죄송해요.' 이 말 뿐이었다. 그리고 죽일 뻔한 그 녀석을 마주치면 '미안해.'라고 울어버릴 것 같았다. 그래서 일부러 표정을 보여주지 않고 냉혹한 말로 쫓아냈다. 나와 친한 아이한테도 다 털어놓아버릴 것 같아서 냉혹하게 쫓아냈다.
그리고 전쟁에 회의를 느껴 반란을 계획한 라스를 알리사를 이용해 감시했다. 조금 변수가 생겼지만 나의 계획대로 되었다. 하지만 그와 그녀는 나는 가질 수 없는 '소중한 사람과 함께하는 것'을 가지고 있다. 아자젤을 깨우려고 한 의도였으나 나도 모르게 질투가 나서 그들을 조롱했다. 내가 구출되어도 그들을 제대로 대화하지 못한 이유는 나의 졸렬함도 있었기때문에.
벚꽃이 떨어지는 풍경을 찍고있는데 옆에서 알리사가 카메라로 찍어보고 싶다며 눈을 반짝이며 다가왔다. 이 아이는 안드로이드면서 호기심이 왕성했다. 카메라 기능도 있으면서…라고 말하고싶지만 서운해할테니 그 말은 속으로 삼켰다. 너도 찍고싶어?하고 물어보니 알리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필름 카메라를 몇 번 조작한 뒤에 그녀의 목에 카메라를 걸어주며 찍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내가 어릴때 어머니가 카메라로 찍는 방법을 가르쳐준 게 생각나서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진 씨, 기분이 좋아보여요!"
"그런가? 어머니를 떠올렸더니 나도 모르게 웃게 되네. 이미 돌아가셔서 다시 보고 싶어도 그럴 수 없지만."
"…그렇군요."
"알리사는 왜 나한테 같이 소풍가자고 했어? 난 너를 모욕했잖아."
슬퍼하는 알리사에게 물었다. 누군가에게는 인간이나 다름없는 아이임에도 나는 이 아이에게 모욕을 줬다. 그녀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진 씨가 상냥한 사람이란 걸 저는 알고있어요. 예전에 진 씨가 저의 마스터였을때 제 마음대로 살아가라고 말해주셨잖아요."
"…그랬었지."
"진 씨가 죽으면 제 사명을 다 하지 못한 느낌이 들어서…있을 수 없는 전제조건이라고 말했더니, 제가 기억한 진 씨는 굉장히 슬퍼보이는 미소를 짓고 계셨어요."
"어쩌면…"
"어쩌면?"
"그 때는 너에게 동질감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네."
총수였을 때 알리사가 라스와 싸우고 난 뒤 재정비로 누워있기 전에 잠시 단 둘이 있고싶다며 부하들을 전부 밖으로 보냈었다. 그리고 알리사의 손을 두 손으로 잡고 말했다. "내가 아자젤과 함께 죽으면 네 마음대로 살아가."라고. 한정모드가 해제된 그녀는 "있을 수 없는 전제조건입니다."라고 딱딱한 말투로 대답했지. 내 명령대로만 움직이는 그녀와 오로지 아자젤과의 동귀어진을 목적으로 아무에게도 맘을 터놓지 않고 움직이는 내가 겹쳐보여서 슬픈 미소를 지었다. 아직도 안타까운 미소를 거두지 않은 알리사에게 나는 물었다.
"이제 누군가에게 얽매일 필요도 없어졌는데…라스와 함께 가기로 한 건 네 스스로 선택한거야?"
"네! 제가 로봇이어도 라스는 저를 인간으로 대해줬어요! 저에게 제일 소중하고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이예요! 진 씨도 그런 분이 계신가요?"
라스의 이름을 부를때마다 그녀는 밝게 미소지었다. 그 미소에 나도 그 녀석을 떠올렸다. 붉은 노을빛의 머리칼의 남자가. 나를 집요하게 쫓아다니며 신경써주는 그 녀석에게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었지.
"응, 나한테도 있어…소중한 사람. 그런데, 그 녀석은 나한테 화났을거야. 내가 악마가 되어서 그 녀석을 다치게 만들었고, 말해달라고 달려들어도 도망쳤어. 약속도 못 지키게 되었으니 화났겠지. 꼴도 보기 싫겠지. 그 녀석은 내가 악마가 되었든 아니든 나 자체로 봐줬는데…왜 나는 그 때 그 녀석에게 터놓지 못했을까…그 녀석이라면, 들어줬을텐데…"
화랑을 생각하니 후회와 죄책감에 눈물을 흘렀다. 울려던 건 아니었는데…알리사는 그런 나를 안타깝게 보며 등을 토닥였다. 나의 흐느낌이 잦아들때까지 리와 라스도 기다려줬고 알리사가 원하던 소풍을 끝내고 헬기를 탔다. 알리사는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살짝 웃었다.
"세상이 평화로워지면 더 많은 사람들과 또 소풍가요!"
"그래, 그러자. 알리사가 기뻐하니 다행이네."
알리사의 말에 대답하고 라스와 눈이 마주쳤다. 라스는 화내지 않고 물어보았다. 조금은 마음이 편해졌냐고. 미시마 가의 핏줄을 이은 남자지만 올곧고 남을 걱정해주는 마음은 진심이었지. 처음에는 믿을 수 없다며 저 남자마저도 의심했지만, 지금은 믿을 수 있어. 알리사도 리도 저 사람에게 의지할 정도면 믿을 수 있어.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림음에 놀라 눈을 떴다. 그러고보니, 세상이 평화로워지면 다시 한 번 벚꽃을 보러 더 많은 사람들과 소풍가자고 알리사와 약속했었지. 오늘이 약속날이다. 힘껏 기지개를 키며 정신차리려고 찬물로 세수하고 부엌에서 레트로트 감자수프를 네 봉지 정도 꺼내 데워서 반은 내 그릇에 부었고, 나머지는 화랑의 그릇에 부었다.
침실로 가서 일어나라며 어깨를 두드리자, 화랑이 끙끙거리며 뒤척이다 일어났다. 잠이 덜 깬 얼굴로 나를 보고있다. 고양이같다고 생각해서 붉은 머리칼을 쓰다듬고 싶었지만 참았다.
"오늘 뭐, 특별한 날이야?"
"이그드라실 대원들하고 협력자들이랑 소풍가는 날이잖아."
"누가 그런 걸 생각했는데."
"…알리사가."
"대련도 있냐?"
"응."
대련도 있냐는 물음에 대답하자 화랑은 귀찮다는듯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침대를 나갔다. 사실 대련이 없어도 화랑은 웬만한 부탁이나 약속은 잘 들어주는 배려심은 있는 녀석이다. 귀찮다면서 나를 끝까지 신경써주었다. 이게 바로 내가 한 때 그 녀석에게 본심을 제대로 말하지 않고 밀어낸 이유이자, 그 녀석에게 끌린 이유일것이다. 본심을 뱉으면 그는 분명 제 몸 사리지 않고 나를 구하려고 할 것 같았다. 안 그래도 데빌화된 내가 그를 죽일 뻔했는데 또 그가 죽는 것이 보기 싫어서였을지도 모른다. 부엌으로 데리고 가서 수프만 있는 테이블을 보자 그는 장탄식을 뱉었다.
"다음엔 그냥 김치랑 밥으로만 차려라."
"수프는 속이 느글거려서 별로야?"
"그래. 너도 밥 정도는 안칠 줄 알잖아?"
"알았어."
스트리밍으로 드라마를 보며 아침을 먹고 차례대로 샤워하고 옷을 입었다. 하얀 맨투맨을 입고 남색 남방 겉옷을 입었다. 내 딴에는 이정도가 무난하다고 생각했다. 소풍이니 엄청난 격식을 차릴 필요도 없고. 필름 카메라와 여분의 필름, 삼각대도 챙겼다. 그도 옷을 입고 머리를 정돈하는 동안 짐을 뒷칸에 싣고 차에 탔다. 도착할 때 깨울테니 더 자라고 한 뒤에 약속장소까지 운전했다. 그가 좋아하는 락 음악으로 틀어놓고 그걸 흥얼거렸다.
약속장소까지 도착하니 모두가 반겨주었다. 카즈야와의 싸움에서 나를 도와준 사람들이 반겨주었다. 미시마 재벌 총수라는 패권을 쥐고 모든 악의를 받아들여 죽을 생각 밖에 없었던 나에게 살아서 속죄의 길을 걷게 도와준 사람들이 반겨주었다. 알리사가 대련 중인 리와 라스에게 나와 화랑이 왔다고 알렸다. 안부인사를 하고 나는 카메라를 목에 걸고 풍경과 나를 도와준 사람들이 웃거나 대련하는 모습을 찍었다.
아스카가 뭘 찍냐며 화내거나 리리가 찍을거면 최대한 아름답게 찍어달라는 무리한 부탁을 해서 조금 힘들었고, 더 시끌벅적했지만 나쁘지 않았다.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엄마였다. 엄마는 벚꽃나무 옆에서 물었다.
'진, 지금 행복하니?'
응. 지금 행복해요. 난 외롭지 않아. 걱정마요, 엄마.
나 외에 보이지 않는 엄마를 향해 나는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엄마도 주변을 보더니 말없이 웃으며 사라졌다. 화랑이 소리쳤다.
"야, 출사 끝났냐? 대련 약속 안 잊었지?"
"알겠어! 지금 갈게!"
나는 끊임없이 속죄해야한다. 이 죄는 나의 자의로 저지른 일이기때문에, 하지만 괜찮아. 나는 혼자가 아니야. 소중한 사람의 옆에서 살아갈테니까. 내가 추억으로 찍은 사진이 엄마에게 제대로 전해지길 바라며 나는 모두의 곁으로 돌아갔다.
봄은 간다 가사가 8편 이후의 진하고도 어울릴 거 같다 생각해서 썼습니다. 헤필 주제가라 사쿠라의 시점이긴한데. 어쨌든 진도 사쿠라도 비극으로 점철된 삶의 반복으로 궁지에 몰려 큰 죄를 저지르다, 자신을 소중히 여긴 사람의 도움으로 속죄하며 살아가는 점이 비슷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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