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어로즈 플랜비

[팀 히어로즈] 기일

“올해는 작약으로 정했거든.”

* 히어로즈 플랜비 연재 10주년 축하합니다!!

* 히플비 10주년 교류회에서 오타쿠 발표회 대신에 배포했던 배포본을 웹공개합니다

* 옛날에 썼던 글을 고쳐쓴 것이라, 살짝 캐해가 어긋나있지는 않은가-싶지만… 저는 팀 히어로즈의 가좍적 모먼트가 너무 좋아요. 얘들아 사랑해! 바니언니 사랑해!!


어느 날인가 바니가 한품 가득 작약을 들고 온 일이 있었다. 온갖 색깔의, 조금은 비현실적이기까지 한 꽃잎들에 지나가던 요원들마저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그녀는 답지 않게 싱글벙글 웃기만 할 뿐이었다. 여느 때처럼 쾌활해보여도 그를 둘러싼 분위기는 평소와 달랐으므로, 기민한 이들은 묵례만 하고 지나갔다. 애초에 스타코어 초기 멤버인 그가 답하지 않는 건을 억지로 들을 깡이 있는 사람도 얼마 없었고.

그 얼마 안 되는 사람이 히어로즈 멤버들이다. 레트로 바니가 애지중지하는 델릭을 필두로 이 사람들은 이미 레트로 바니의 또 다른 둥지이며 집이었고, 소중한 만큼 가질 수 있는 인내심은 깊었다.

“바니, 그 꽃은 다 뭐야?”

궁금한 건 못 참는다던 안티가 눈을 깜빡거리며 제일 먼저 물었고, 마찬가지로 얼굴에 ‘저게 뭐야’라고 쓰여 있는 일렉도 머그잔에 담긴 코코아를 홀짝이면서 슬금슬금 다가왔다. 질문은 바니가 들었는데 어쩐지 로우가 멈칫하며 “어, 안 될 텐데―,”하고 다 들으라는 식으로 중얼거렸지만 두 사람에겐 씨알도 안 먹혔다. 로우는 바니와 눈이 마주쳤다. 반투명하게 겹친 채 일렁이는 가능성들이 갑자기 다른 것으로 바뀌어 선명해졌다. 괜한 참견이었네요. 알면 됐어. 눈짓으로 대화를 마친 바니는 제 답을 기다리는 이쁜이들에게 활짝 웃어보였다.

“올해는 작약으로 정했거든.”

“정해? 방 꾸밀 거면 너무 많지 않냐? 내 방은 안 된다.”

“음….”

멤버들 방마다 꽃병 두세 개는 너끈히 나올 양이라 혼자 앞서 생각한 일렉이 손끝으로 작약을 툭 건들며 말했고, 곧이어 바니가 침음성만을 내자 멈칫했다. 비번이라고 선글라스를 벗은 채라 오랜 세월에 매끈하게 갈린 금안이 이리저리 다글다글 굴러대는 모습이 보였다. 바니는 이렇게 말을 망설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저 꽃다발은 붕괴된 세계에 관련이 있겠지. 젠장. 로우 자식이 다 들으라던 혼잣말, 이거 때문이었냐. 좀 알아듣게 하라고. 애꿎은 타임 패트롤만 속으로 욕하는데, 임무에서 복귀한 델릭이 어쩔 줄 모르는 두 사람 입장에선 폭탄을 떨어뜨렸다.

“? 바니 아직 안 갔어요? …다들 모여서 뭐해요?”

“으응, 이 꽃다발 뭐냐고 물어와서 말이야~.”

어정쩡하게 굳은 분위기가 단번에 누그러졌다. 곧, 레트로 바니가 짧게 심호흡했다. 일말의 망설임을 떨어내는 동작은 미미했으나, 오히려 그래서 그가 다음 말을 꺼내기 위해 많은 용기를 끌어다 쓰는지가 느껴졌다. 본래라면 이런 불안정함을 내비칠 사람이 아니니까. 레트로 바니는 늘 괜찮은 모습만을 보이려 하는 편이므로.

그러므로 답은 짐작이 갔으나, 본인이 선언하도록 기다렸다. 오래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기일이야. 내 세상의.”

잠시 묵념과도 같은 침묵이 흘렀다. 단 한 번의 상실 없이 온전한 삶을 살아온 사람은 여기 아무도 없으니까. 각얼음 같은 침묵은 곧 일렉이 열어제꼈다. 함께에 익숙해져 본래 상냥한 성정(본인은 절대 인정하지 않는)이 곧잘 튀어나오게 된 저희 팀 리더가 말을 대표했다.

“잘 다녀와.”

겨우 네 음절에 담긴 것은 많았다.

다 끝나버린 세계가 있는가하면 이렇게 다 함께 찌그락대며 살아가는 세상도 남아있다고. 뒤를 돌아보면 언제나 우리가 있을 거라고.

레트로바니는 그 말에 드디어 웃었다.

“그럼 다녀올게~ 우리 이쁜이들 집 얌전히 지키고 있어요!”

“이게 꼭 말 한 마디가 많지…….”

평소와 같은 농담조에 일렉은 곧장 떫은 표정을 지었지만 쑥쓰러움을 감추려는 행동인 걸 다 아는 사이라 타격은 없었다.

“다녀와, 바니—그리고 들쑤셔서 미안.”

“으응, 아냐. 이젠 당당하게 말하고 다녀도 되니까!”

팔랑팔랑 손을 흔들어주려다 품에 가득한 작약을 쏟을 뻔한 그녀는 이내 눈짓으로만 인사하고 공간이동으로 스윽 가버렸다. 따로 배웅을 던지지 않았던 델릭은 잔영처럼 남은 푸른 일렁임에 어, 소리를 냈다.

“왜?”

“아니, 저런 기일이라는 건 처음 알았지만—매번 걸어서 갔거든요. 능력 안 쓰고 갔는데. 마음 정리가 된 걸까요, 바니는.”

“…글쎄다. 토끼 쟤는 멀쩡한 척을 잘 하니까.”

올해는 평소와 다르다고 델릭이 증언하니, 일렉은 오히려 저희가 몰아 붙여서 저랬나 싶었는지 말을 우물거렸다. 우리 친애하는 델릭 요원께서 제기한 의문이니 친절한 타임패트롤이 대답해줄까요, 하고 말을 꺼낼까 하던 로우는 갑자기 툭 끼어든 장면을 보고 맘을 고쳤다.

“아, 그러면 있잖아!”

안티가 좋은 생각이 났다며 눈을 난란하게 빛내면서 소리쳤다. 괜찮은 생각이라고 끄덕이는 이들의 시선이 우르르 로우에게 꽂혔다.

“야, 넌?”

“넹? 뭐가요, 캡틴?”

“못들은 척 하지 말고. 넌 어쩔 건데.”

“아. 아아, 그야―팀 멤버로서는 역시 참여해야겠죠? 그리고 곧 돌아와요. 숨길 거면 확실히.”

관측자로 오래 지낸 덕에 아직도 ‘여기 소속’이라는 자각이 뒤늦은 로우는 저절로 올라간 입아귀를 누르며 작은 선물에 도움이 될 조언을 귀뜸했다.

바니가 공간이동으로 돌아와, “빨리 돌아왔네요, 바니.”하고 여상히 말을 던진 델릭을 필두로 마구 끌어안아댄 소동이 벌어지기 5초 전.

 

그리고 이듬해.

올해는 무슨 꽃다발을 바칠까, 하던 레트로 바니―넘버 제로 앞에 히어로즈 멤버들이 제각기 아담한 꽃다발을 들고 섰다. 이게 다 무슨 일인가 싶어 눈을 끔뻑이고만 있자, 대표로 일렉트리컬 캡틴이 눈을 슬몃 피하며 답했다.

“같이 추모하러 가자고.”

하얀 꽃처럼, 혹은 각자 손에 들린 각양각색의 꽃다발처럼 레트로 바니는 행복하게 소리 높여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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