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후 여선 殞候 茹善

축제 祝祭

그냥 그런 말을 하고 싶었어.

심해 by LAN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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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ckground Music

홍등불에 일렁이는 연민이여



수많은 사람이 모여 밤의 파도처럼 일렁거린다. 어린아이가 신이 나 떠드는 웃음소리가 군데군데 울리고 상인이 너나 할 것 없이 드셔 보라 외치는 소리, 여러 새가 나무 쪼는 소리도 이따금 섞인다. 주홍빛 풍등이 낮은 바람결을 타고 살랑살랑 몸을 흔드는 밤. 여러 웃음이 강물 따라 졸졸 흘러가 마을 변두리까지 만연한 이곳. 이맘때쯤 한 번씩 열리는 한밤의 축제였다. ―붉은 염료가 예쁘게 물든 옷자락을 올려 등불 앞에 비추어본다. 야트막한 옷감 사이로 제 손목과 꽃무늬가 포개어져 보이는 듯하다. 선물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단주도 여전히 손목에 자리 잡고 있다.

“꼭 한 번 보고 싶었거든.”

 

손목을 내리곤 습관처럼 단주 알을 애꿎게 돌리며 중얼거린다. 잘그락잘그락 알 부딪히는 소리가 익숙히 귓가에 묻힌다. 새끼 호랑이에 불과했을 적, 어둑한 산등성이 사이로 보였던 마을 축제가 얼마나 예뻐 보였는지. 제 주제를 알고 자령산의 어린 신마저 벗 삼지 못했다면 진작 범 가죽까지 태워졌을 테다. 편린에 불과한 회상이 머릿속을 스치기도 전에 흰 신코가 시야에 걸렸다. …꼭 한 번 직접 보고 싶었다며 막무가내로 청하긴 했다만. 어쩌면 끌고 온 게 아닌가 싶어 붉은 눈동자가 양옆으로 비끼듯 데굴데굴 굴러갔다. 풍등의 옅은 온기가 뺨을 데우는 느낌. 단주 알 굴리는 소리가 느려진다. 제가 뭐라고, 끈다고 해서 순순히 끌려올 사내던가. 그러니 그도 좋다고 따라온 게 틀림이 없으렷다. 더듬거리듯 시선으로 신코부터 훑어 올라가자 주홍색 등에 비쳐 짙고 어두워진 이목구비가 보였다. 금술처럼 화려한 색의 눈동자와 퍼뜩 마주한 순간이었다.

 

“이런 풍경에 관심이 있었나.”

 

무심한 어투가 의외란 양 들려왔고, 괜히 입술을 댓발 비죽거렸다. 홀로 고고하게 흘러가는 구름을 닮은 이였다. 천계에 머무르는 대부분의 이들이 익은 벼처럼 고갤 숙이기 바쁜 이. 인파가 적잖게 몰려드는 축제와는 영 안 맞는 얼굴이긴 했다. 비죽거리던 입술이 슬며시 제자리로 들어가고 구순새를 우물거린다. 어수선하게 뺨을 긁적이면서도 이 상황이 나쁘지 않아 태연하게 웃음 지었다. 귓가에 몰려드는 여럿의 웃음 소리가 어딘지 가슴 한 편을 간지럽혔다.

"아직도 날 많이 모르네. 원래 도박 좋아했던 거 잊었어?"

"내게 져서 안겼던 건 기억한다마는."

붉은 기둥이 드높던 기루에 있었을 적부터 아주, 져주는 법이 없었다. 저 깐깐한 얼굴에 하늘도 울릴 배려까지 바란 건 아니지만. ―됐어, 그런 건 빨리 잊어버리시고. 볼멘 소리를 중얼거리며 그의 팔목을 붙들어 당겼다. 손아귀 속 한 움큼 느껴지는 체온이 가까운 등불의 열기보다 언뜻 더 거세게 느껴졌다. 강물 젖은 밤바람 내음과 등불 일렁이는 열기, 바스락바스락 일그러지는 흙의 감촉이 새삼 기꺼워 자잘한 웃음이 샜다. 다들 축제를 맞이해 색색의 장식과 다채로운 옷감을 두르고 지나쳐가는 모습들이 생경해서, 정말로 그 사이에 뒤섞인 듯한 느낌이 들었다. 실상 저들은 우릴 보지 못할지라도.

얼마간 걸었을까. 일각도 지나지 않아 노릇한 고기의 향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지금은 천계에서 지낸다 하더라도 예전엔 인간들 사이에 곧잘 묻히고는 했던 바, 꼬치 구이 냄새가 분명했다. 자연스럽게 지나치던 시선에 빛이 감돌았다.

"저거, 인간과 섞여 살 땐 자주 먹었는데. 요즘은 천계라서 그런가, 맘껏 못 먹지 뭐야."

"잡아먹은 괴만 해도 여럿일 텐데."

아니, 그건…. 그놈들이 먼저 화나게 하니까…. 문득 말문이 막혀 구순새를 달싹거렸다. 그럼에도 차마 너무 무서워하길래 호기심에 맛봤다가 그대로 삼켜버렸다곤 답하지 못해 입술만 꾹 다물었다. 물론 '사고 치기'야 모든 게 꽉 막힌 천계에선 마른 하늘에 날벼락 떨어질 만큼이나 제 전문 분야긴 했으나, 지금처럼 즐거울 적엔 꺼내고 싶지 않은 화제였다. 괜히 헛기침을 하며 음식 향으로부터 고갤 돌렸다.

"어, 저거 노점 아니야?"

갈색 담을 반 바퀴 돌았을까. 한참 꿀 절인 당과나 노릇하게 구운 닭고기 냄새가 지겨워질 적, 장식품을 주로 취급하는 노점이 양쪽으로 즐비하게 들어선 모습이 보였다. 어디는 노리개를, 어디는 고른 화장품을 선보이며 손님을 모으기 급급했다. 개중 둘씩 짝지어 소곤거리는 이들은 거의 연인으로 보였고, 자연스럽게 눈이 옆자리에 있는 그에게로 향했다. 이전부터 신경 쓰였던 점이 있던 탓이었다.

"잠깐 들를까?"

"웬일로 장식에 관심을 두는지 모르겠군. 별 관심 없지 않았나."

"관심 없었지. 지금은 관심 있고."

아주 능청스럽고 뻔뻔하게 답하며 그의 팔 한쪽에 제 팔을 끼워 넣은 채 앞으로 당겼다. 어차피 졸라서 온 거잖아. 조금만 더 같이 놀아줘. 산등성이 아래 축제를 동경하던 시기의 아이처럼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웃음 지었다. 그는 한쪽 눈썹을 들썩이다 마지못한 듯 나와 걸음을 맞추기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기대듯 그에게 무게를 얹으며 입꼬리를 느슨하게 올렸다. 우습게도, 이제는 퍽 익숙해진 그의 체향이 달가울 지경이었다. 그렇게 웅성거리는 인파 사이를 지나 노점 앞에 멈추면, 호객 행위 없이도 다가온 손님이 기뻤는지 상인이 과장되게 손을 비비며 허리를 반쯤 숙였다.

"무엇을 보러 오셨습니까?"

"아까부터 눈여겨 본 게 있었는데…."

"……?"

매대 앞에 서자마자 주인이라도 된 양 손을 뻗어 술 하나를 들었다. 말 그대로 이전부터 눈에 들어와 거의 하나만 보고 직진한 참이었다. 제 손에 잡힌 건, 다름 아닌 검은 실타래에 붉은색 끈으로 매듭을 더한 술 장식이었다. 조심스럽게 실이 상하지 않게 윗부분을 들어 제 얼굴 가까이 대본다. 보자마자 생각난 게 있었다.

"닮지 않았어?"

"…지금 술을 가지고 닮았다고 하는 건가."

아니, 좀 어울려주면 뭐가 어때서. 하여간, 저 치는 낭만적인 부분이 없어 문제였다. 부드러운 술을 한 번 쓸어내려 정리하곤 잠깐 이리 오라며 가까이 손짓했다. 내가 이런 놈한테 매 밤마다 매달린다니, 어이가 없어서. 한참 불만 남은 이처럼 속으로 중얼중얼 무어라 읊으면서도 손은 노련하게 그의 허리에 자리한 칼로 향했다. 그렇게 손잡이에 실을 둘러 매듭을 짓고…. ―자, 다 됐다. 뿌듯한 목소리와 손을 떼어내자 손잡이 부분엔 원래부터 제 자리였던 것처럼 붉고도 검은 술이 공중에서 흔들거리고 있었다.

"이건……."

"선물 주고 싶었거든."

이거 받았잖아. 한 쪽 손목을 들자 그의 기운이 섞인 단주가 달그락거리며 흔들렸다. 그에겐 별 의미가 없을지 몰라도 타인에게 걱정이란 걸 받아본 건 오랜만이었기에, 꼭 치르고 싶은 값이나 다름 없었다. 붉음 가득한 눈매가 가늘게 휘어지며 웃음 지었다. 그가 준 단주 만큼 큰 의미 같은 건 없어도, 받기만 하는 건 제 성미와는 영 어울리지 않았다. 상인에게 값을 치르곤 자연스럽게 다시금 옆자리를 꿰차며 앞으로 당겼다.

"어차피 내 기운 같은 건 쓸모 없을 테니까… 내가 생각나는 장식이라도 쓰라는 뜻이야."

"……."

"버려도 상관 없어. 그래도 내가 이걸 갖고 있는 동안은… 으음."

애꿎은 단주 알만 멋쩍은 듯 굴리며 그의 눈치를 보듯 고갤 올렸다. 선물이라는 게, 얼마만에 하는 건지 기억도 나지 않을 지경이었다. 나름 태연자약하게 움직이던 표정이 답지 않게 굳어 우물거렸다. 

"…그때까진 갖고 있어주면 좋겠다고."

그냥 그런 말을 하고 싶었어. 얼른 덧붙여 말하며 부슬부슬 입꼬리 올려 웃었다. 그의 대답이 들리기도 전에 꿰찬 팔을 당기며 앞으로 이끌었다. 아직 못 본 곳이 많으니까, 얼른 가자. 그리 중얼거리며 한 발 먼저 이끄는 이의 뒷덜미는 길거리마다 수많은 홍등에 가려지듯 붉게 물들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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