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 膳物
그 의미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느껴져서.
WAITING FOR YOU - TONE AND MANNER
“…그래서 조금이나마 내 기운을 담은 단주를 만들었다.”
두 눈가가 느리게 뜨였다. 오래도록 검을 잡아왔기에 있었을 리 없는 장신구가 어색하게 팔목 위로 겹쳐진다. 손목의 볼록한 부분이 유독 잘그락거리며 맞닿아 더욱이 생생한 감을 드러냈고 그럴 때마다 가슴 한 편에서 묘한 것이 스멀거렸다. 이는 왜, 의외인 곳에서 꼼꼼한 건지. 괜시리 아무것도 아닌 척 손가락을 옴찔거려보다가, 조심스럽게 마디를 펴본다. 언뜻 하얗지만 굳은살이 박혀 영락없이 검을 쓰는 자의 손이었다. 그러고보니 팔찌는 어릴적, 자령산의 신령이 풀잎을 꿰어준 이후 처음인가. 단주를 채워주는 사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짙은 눈매, 꾹 다문 입술. 완고하기 그지없는 인상. 이런 건 신경 쓰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새삼스럽게 바라보고 있을 때, 그의 고개가 살짝 들리자 급히 시선을 내렸다. 처음부터 보지 않았던 것처럼. 철판이라곤 어디서 밀리지 않는 주제에. 기분이 이상해서 그런 듯했다.
“앞으로 너를 감쌀 모든 위험에 기척조차 느끼지 못할 일이 없었으면 하니―.”
짧은 순간이었다. 손가락이 닿아서, 손톱이 스치고, 체온이 스며든 것 말이다. 그러니까, 이건. …지켜주겠다는 뜻이지? 평소라면 아무렇지 않게 내뱉었을 말들이 자꾸만 속으로 기어들어와서 고인다. 저도 모르게 반대편 손으로 잡고 있는 검집을 꼭 그러쥐었다. 제 소유에 상처가 날까봐, 그런 건가. 아니면―. 손목을 찬찬히 돌려보자 짙은 색의 단주가 자락자락, 알알이 빛났다. 둥글고 곱게 세공된 알 하나하나에 담아놓은 기운이 살갗으로 여실히 느껴졌다. 천계의 것이란 무엇이든 다 기분 나쁜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점차 선명하게 물결치기 시작하는 것을 내리누르며 떨어져가는 손을 바라봤다.
“―불편해도 몸에서 떼놓지 말고 항시 착용하고 다니거라.”
불편한 것보다…. 들고 있는 검과 비교치 못할 만큼 묵직한 존재감이 손목을 메웠다. 짙은 색의 소매에 가려질 법하건만 제 눈에는 오직 둥근 나무구슬만이 선명하게 보였다. 숨이 보다 크게 느껴졌고, 사그라드는 온기가 이상했다. ―그래서일 것이다. 완전히 떨어져나가는 손이 조금 아쉬워서, 덥석 그를 잡아버리고 말았던 건.
“…….”
뭐라고 말해야 할 거 같은데, 또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데. 순식간에 제게로 촉을 돌린 침묵 속에서 입술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고마워? 그건 너무 낯뜨거운 말이었다. 걱정하지 마? 무슨 자신으로 걱정이라 확신한담. 제 손아귀에 잡힌 손이 가만히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눈을 마주할 만한 자신은 없어 덥석 잡았던 그의 손을 느리게 죄다가, 어색한 양 놓았다. 그러게 나는 왜, 괜한 짓을 해서. 미아가 된 시선이 바닥을 이리저리 옮겨다니다 겨우 그의 신발코로 안착한다.
“…너라고 생각하면, 되는 거지?”
검을 쥔 손아귀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정신없이 침묵을 메꾸려 했는데, 오히려 고맙단 말보다 더 낯뜨거운 말을 한 게 아닌가. 손등의 붉음이 줄기처럼 뻗어 귓가까지 온통 물들인 듯했다. 아, 진짜. 왜 답지 않은 짓을 해서 당황시킨담. 꼭 지켜줄 것처럼. 결국 탓이 돌고 돌아 제 잘못임을 알면서도 그에게로 쏘아졌다. 아무튼, 그의 볼일은 아마 이 단주가 전부일 것이다. 실상… 딱히 장신구도 아니요, 팔찌의 형태를 한 것이지만 그 의미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느껴져서.
잘 챙겨다녀야겠지.
입안에서 톡 터진 웃음이 실타래처럼 너실너실 흐르기 전에 얼른 입술 닦는 시늉으로 감췄다. 몇 백년 전, 아랫마을의 푼수아이가 헤벌레 웃는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 얼굴이 웃겨서 한동안 놀리고 다녔었는데. 잘그락, 시늉을 하면서 단주가 흔들렸다. 빈 공터에 큰 무언가가 덜컥 자리잡은 듯한, 그런 충족감. 슬그머니 눈짓을 들어 그와 시선을 마주쳤다. 여전히 무심한 듯, 무던한 듯한 표정에 힘이 다 빠진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얼굴로 지키겠단 말을 하니 당황하는 거 아냐. 그런 생각과 달리 비식비식 웃음은 자꾸 잇달아 새어나왔다.
“준 거니까 팔아먹진 않을게.”
어설픈 농담으로 곧 터질 듯한 입가를 가리지 못한 채, 한가득 웃어버리고 만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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