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연 隱然
사실 뭐든 상관 없어. 네 목소리, 그냥 듣고 싶은 거니까.
직감 (直觉) - Superluckyqix
사각의 방, 상아색 소파, 땅거미 붙어 불투명한 창문. 발끝에 희미한 주황색 거스름이 묻는다. 푹 눌린 소파 한 가운데 앉아 멍하니 고개를 젖히면 민무늬 천장에 달랑 불 꺼진 전등 하나가 보인다. 소리 죽인 TV가 홀로 돌아가고, 째깍째깍 시계 초침이 작은 몸으로 힘겹게 정적을 깨운다. 초침이 스칠 때마다 얇은 머리칼 가닥이 눈앞을 스륵스륵 간지럽히며 떨어진다. 애매하게 손이 닿지 않는 리모콘과 마음에 들지 않는 온도. 적당한 갈증. 괜히 마른 입술을 맞물리며 숨소릴 닫는다. 고요를 품 삼아서, 눈꺼풀을 느리게 감았다 뜨면서. 그렇게, 나직한 휴일의 잠결로 빠져들 찰나.
띠링.
늘 진동만 울리던 핸드폰에서 카랑카랑한 알림이 똑딱거리던 초침을 부순다. 리모콘보다 가깝고 시계보다 시끄럽다. 굳은 것처럼 멎어있던 손가락 마디가 부드러이 풀어지며 휴대폰을 잡아올린다. 온도보다 차가운 금속 촉감이 피부로 느껴진다. 민무늬에 꽂혀있던 시선이 마침내 온갖 이모티콘으로 꾸며진 메시지창으로 향한다. 무심하던 시선에 얼핏 웃음이 감도는가 싶으면서, 은근한 기대가 뒤섞인다.
[뭐하고 있어? 나 안 보고 싶어?]
멍 때리고 있었어. 보고 싶었지. 화면 위로 적히지 못한 무수한 생각이 스친다. 메시지창에 1은 사라진지 오래인데 손이 굳었다. 아니, 나름 고민하고 있는 중이다. 보다 빠릿해진 눈길이 시계에 한 번 맺혔다가 TV로 향하다가. 의미없는 눈짓은 곧 고민의 흔적이다. 세 마디 손가락이 전갈 꼬리라도 흉내내듯 움직이고 마침내 키패드를 누른다. 신호음이 흐른다. 한 번 뚝 끊기고 나면 목소리가 건너온다. 온정이 느껴지는 목소리, 웃음기 맺힌 네 모습이 눈에 훤하다. 두 눈가를 내리감으며 숨처럼 짧은 웃음을 짓는다.
“네가 보기엔 어떤 거 같아?”
보고 싶어서, 그래서 이렇게 전화했잖아. 너는? 그래서 문자한 거지. 둥그런 입안에 몽글몽글 퍼져나가는 속말을 누른다. 네가 대답해줘. 사실 뭐든 상관 없어. 네 목소리, 그냥 듣고 싶은 거니까. 소피 위에 두 다리를 끌어모아 한 팔로 감싸안는다. 열 발가락을 꿈지럭거리며 고민하는 척 비음을 흘린다. 스피커 너머에서 소소한 웃음이 터져나온다.
[사실 다 알고 있다고 해도 돼?]
“음, 이런 거 잘 안해주는데. 특별히 허락해줄게.”
[그럼…….]
발등에 묻어나는 주황 거스러미가 따스하다. 하얀 상아색 소파에 희끗한 어둠이 맺힌다. 그런데 네 목소리 기다리는 순간은 조금 느린 것 같다. 기계음 섞인 스피커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뜸들이는 걸까. 느릿하게 흘러가는 시간과 두근거리는 고동. 흔들리는 두 개의 감각에 이상한 기분이 든다.
[사실 집앞에 있다고 하면….]
덜컹, 소리가 날 만큼. 내심 꼭 잡고 있던 휴대폰을 미련 없이 내버렸다. 리모콘에 부딪혀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조차 모른 채 문을 벌컥 열었다. 그러자 벽에 기대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웃고 있는 네가 있었다. 눈앞에 들어찬 새하얀 머리칼과 살갑게 휘어지는 눈매. 익숙하고, 또 머릿속에 그리고 있던 사람. 마치 예상했다는 듯 이미 휴대폰을 뺨에서 뗀 모습이 얄미웠다. 입술이 비죽, 심술을 티냈다.
“…이렇게 나올 줄 알았지.”
“너, ….”
얄밉게도, 정말 약삭빠르게도. 빈말로도 보기 싫다고 하긴 싫어 하순만 잘근잘근 물었다. 너 진짜 밉상이야. 보란 듯 입술을 톡톡 건드리는 그를 아주 노릇노릇할 만치 노려보다 빠르게 팔을 뻗어 코트를 휘어잡아 당겼다. 바깥 바람에 오래 쐬어 차가워진 코트자락이 맨살에 닿았다. 얇은 옷자락에 한기가 어렸으나 너를 감싸안으며 닿는 촉감이 더욱 뜨겁고 아른하여 상관 없었다. 단지 입술을 포개어 맞추는 게 좋으면서도 밉살스러운 혀를 못내 잘근잘근 물었다. 그런데 너는 뭐가 좋다고,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허릴 당기고 대강 묶은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대답은?”
“다 보고도.”
입술을 비낀 비스듬한 곳에 입맞춤을 남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장난 치긴. 부스스 나오는 웃음을 숨기지 않으며 품에 안겼다. 어쩔 수 없지. 한 번 봐줬다.
“보고 싶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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