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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VE a piacere 上

피아니스트 쿠로바 카이토 X 작곡가 쿠도 신이치

  • 카이토 22 신이치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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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포스타입과 같은 글입니다.

세상에게 들려줘, 네 감정을. 네 소리를. 쿠로바 카이토를.


a piacere

*아 피아체레 : 연주자의 마음대로 템포와 연주를 자유롭게

쿠로바 카이토 X 쿠도 신이치

01.

건반 위에 살포시 손을 얹듯, 마치 살랑이는 봄바람처럼 귀를 스치고 마음에 앉았다 가는 산뜻한 음색. 둥실둥실 하늘을 나는 듯한 기분에 눈을 감고 마음껏 그 소리를 만끽한다. 이 순간만큼은 어떠한 체험보다도 더 감미로워, 음악을 듣는 동안은 우주여행도 할 수 있고, 바다 속 깊은 곳의 해저탐험도 할 수 있었다. 거실 너머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피아노 소리는 카이토가 태어나기 전 뱃속에 있을 시절부터 자라나는 내내 늘 카이토와 함께했다. 그 소리에 기분좋게 잠에서 깨어나 웃으며 거실로 달려가면, 마찬가지로 연주에 심취해 눈을 지긋이 감고 몸을 맡긴 아버지의 모습이 있었다. 자랑스러운 나의 아버지. 세계 최고의 피아니스트라고 불리우며 연주의 마술사라고 불리우는 쿠로바 도이치, 나의 아버지가, 가장 멋진 폼으로 피아노를 연주한다.

카이토는 어느 곳보다도 크고 훌륭한 무대가 되어버린 거실에 앉아 어머니와 함께 이 순간 최고의 관객이 된다. 격정적인 하이라이트를 지나 서서히, 건반이 노래하는 새가 지저귀듯 사뿐사뿐 잦아들면 연주가 끝나는 것을 알 수 있다. 도이치의 연주가 끝나면 치카게와 카이토는 일제히 함성과 함께 박수를 쳤다. 연주에 심취하느라 가족이 온 줄도 몰랐던 도이치는 그제야 그 소리에 만족스레 웃으며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두어번 두들겼다.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 찾아왔음에 아직 어린 카이토는 치카게 품에서 일어나 쪼르르 달려간다. 아직은 조금 높은 피아노 의자에 도이치가 들어올려 앉혀주면 검지 손가락을 들어 건반을 한 번 눌러본다. 마치 미지의 세계에 발을 들인양, 처음 닻을 올려 돛을 펴고 저 넓은 바다로 출항하는 모험가가 된 양 벅차오르는 심장을 진정시킬 수 없다. 

C음, D음, E음. 도레미, 도레미. 

카이토가 아장아장 걷기 시작할 때부터 알려준 피아노는 초등학교를 들어가고 중학생이 될때까지도 이어졌다. 또래 친구들이 학원에 가고 과외를 받을 때 카이토는 친구들의 놀자는 제안도 마다하고 쏜살같이 집으로 돌아와 피아노를 쳤다. 아버지가 돌아오면 오늘 이만큼 연습했다고, 이제 이것도 칠 수 있게 되었다고 자랑해야지. 카이토의 인생은 무수한 악보에 찍힌 음표와도 같았다. 태어나 지금까지 온갖 음색과 연주로 도배되어있었고 그에게 있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아버지였다.

아버지가 연주하는 녹턴이 좋아. 카이토는 문간에 서서 아버지의 연주를 바라보았다. 일평생 가족을 사랑하기보단 일을 사랑했을지도 모르는, 한결같이 저곳에서 그렇게 연주만 하던 아버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아버지의 연주가 좋고, 아버지가 좋으니까. 어느샌가 쇼팽의 녹턴 Op. 9, No. 2를 연주하던 아버지의 모습이 일그러졌다. 눈을 깜빡이고 다시 바라봐도 얼굴이,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열심히 피아노만 연주하는 아버지의 얼굴이 없어 깜짝 놀라 뒷걸음질을 치면 등 뒤에 텁 하고 무언가 걸렸다.

카이토. 연주를 멈추지 마렴.

자신의 어깨를 덥썩 잡으며 귓가에 속삭이는 아버지가 있었다. 거짓말. 분명 저기서 연주하고 있었잖아. 다시 뒤돌면 그곳엔 연주자가 없었다. 피아노는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었고 도이치와 치카게는 나란히 바닥에 자는 듯이 죽어있었다. 거짓말, 거짓말이야. 엉겨붙듯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소매로 닦고 카이토는 그들에게로 뛰어갔다. 그러나 끝이 다가와 점점 작아지는 야상곡처럼, 그들의 존재도 희미해졌다. 뻗어올린 손이 허공에서 허우적대고 한 발 내딛은 순간 바닥이 푹 꺼지며 아래로 추락하자마자 카이토는 눈을 번쩍 뜨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헉...! 허억, 허억... 헉...."

식은땀으로 온몸을 다 샤워한 카이토는 이불을 쥔 손을 벌벌 떨었다. 고장난 로봇처럼 덜그럭거리는 목을 움직여 간신히 주위를 살피면 칙칙한 벽지가 깔린 작은 방, 가구조차 없이 삭막한 한 칸짜리 원룸에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한동안 좀 괜찮은가 싶더니 망할 악몽. 지끈거리는 머리에 머리맡을 뒤져 휴대폰을 찾았지만 밤 사이 배터리가 다 나갔는지 전원이 꺼져있었다. 시간을 볼 수 없었으나 높게 뜬 해의 위치로 보아 지각은 확정이었다. 하기야 한 번이라도 지각이나 결석을 걱정한적이 있던가. 찬물이나 끼얹기 위해 매트리스에서 나온 카이토는 감옥 창살같은 반지하 방 창문을 응시했다. 저 멀리 시내에서 쩌렁쩌렁하게 틀어주는 곡이 빌어먹게도 녹턴 야상곡이었다. 이러니 악몽을 꾸지. 냉장고에서 찬 물을 꺼내 벌컥벌컥 들이키던 카이토의 손에서 페트가 볼품없이 구겨졌다.

"...아. 이거 또 써야 되는데."

정수기에서 물을 담아오는 식으로 식수를 해결하고 있었다. 카이토의 재정상태는 최악이었다. 예전같은 명예도, 커다란 정원이 딸린 2층 저택도, 그 어떤것도 이젠 없었다. 심지어 부모님 마저도. 지나간 일에 무어라 더 말을 얹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 빠르게 찬물을 끼얹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푹 적셔주는 차디찬 물이 다른 생각은 하지도 말라고 핀잔을 주는 것 같았다. 예쁘게 상처하나 없이 희고 고왔던 손은 이제 여기저기 상처나고 굳은살이 박혔다. 학교를 가는 이유는 단지, 그래야 하루 한끼라도 먹을 수 있으니까. 거기서 식수를 구할 수 있고 수업시간에 잠을 자며 시간을 때울 수 있으니까. 여름엔 에어컨이 나오고 겨울엔 히터를 틀어주는 곳이니까.

어차피 아직은 미성년자라 부모님 동의서 없이는 변변한 아르바이트조차 구하기 힘들었다. 애초에 구할 수 있어도, 등교 거부를 한 상태로는 무리였다. 1년만 더, 아니 이제 반 년만 더 지나면. 그래서 졸업을 하면 정식으로 공사판에서라도 구를 수 있게 되겠지. 애써 구겨진 페트병을 다시 펴 배낭에 넣고 이제 조금 충전이 된 휴대폰을 열었다.

[6월 21일. 생일 축하해 아들.]

클라우드에 연동해 놓은 캘린더는 제멋대로 치카게가 입력한 기록을 불러왔다. 한 달 생활비도 변변찮은 형편이지만 이것때문에 클라우드 서비스를 끊을 수가 없었다. 마지막 남은 가족의 흔적마저 돈이 없어서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니.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다가 무슨 궁상인가 싶어서 픽 웃고는 주머니에 휴대폰을 찔러넣었다. 아무도 없고 삭막한 집안, 습기만 그득히 차서 불쾌한 그곳을 한시빨리 나가고자 문을 열었다. 마을엔 여전히 녹턴이 잔잔하게 흐르고 있었다.

02.

느즈막히 등교한 학교는 이미 수업중이었다. 왜 이렇게 늦었냐는 질문에 그냥 늦잠 잤다고 퉁명스럽게 대답한 카이토는 선생님의 혀차는 소리를 들으며 맨 구석 뒤쪽 자리로 걸어갔다. 책상엔 유성펜이나 칼로 긁어서 [범죄자의 아들] , [사기꾼의 자식] 등등 질나쁜 낙서들이 있었다. 이런건 또 어디서 구했는지 이전 도이치 관련 신문을 찢어 덕지덕지 붙여놓기도 했다. 카이토는 대충 그것들을 팔로 밀어 바닥에 떨어뜨려놓고 책상에 엎드렸다. 어차피 선생님도 뭐라하지 않는다. 처음엔 몇 번 주의를 주었지만 카이토가 들은체도 안 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죽음은 카이토에게 슬픔보다는 분노를 가져왔다. 세계 최고의 피아니스트라고 손꼽히며 [연주의 마술사]라고 불리었던 자신의 아버지가 죽었다는 사실에 눈물흘리기도 전에 찾아온 누명이 카이토를 떠밀었다. 

"너네 아버지 사실 돈으로 전부 매수해서 콩쿠르 우승했던 거라며? 명성도 전부 돈으로 샀다던데!"

"잘 죽었다! 꼴 좋지! 떳떳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렇게 되는거야!"

아니라고 말할 기운은 전부 소멸되었다. 기운만 넘치고 패기있던 중학생 시절엔 그런 헛소문에 발악할 힘이라도 있었다. 내 아버지는 사실, 그들의 제안을 거절했기 때문에 살해당한거라고. 그저 피해자일 뿐이라고. 입이 터지도록 소리치고 목이 쉬어 찢어지도록 외쳐도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시선과 손가락질을 다 견뎌내기에 카이토는 단 두 개의 눈과 열 개의 손가락을 지니고 있을 뿐이었다. 방어할 수 없으며 공격조차 불가능했다. 홀로 세상을 등지고 눈앞의 모든것을 부수어도 돌아오는 건, 

역시 사기꾼의 아들이다.

하는 비웃음이었다. 아비나 아들이나 아주 똑같다고, 이미 죽어서 모욕당해 더 추락할곳도 없는 아버지를 깎아내렸다. 많던 돈은 누명 기사가 나간 직후 항의하며 손해배상을 청구해온 관계자, 사실 이 일의 주범인 '판도라'기업, 그리고 지금은 등을 돌려버린 전前 팬들의 환불 요구로 전부 내주었다. 이제 더 내어줄 것도 없는데 사람들은 계속 카이토를 공격한다. 그럼 뭘 주면 되지? 남은 건 목숨 밖에 없는 거 같은데.

극단적인 생각으로 이어지기 이전에 카이토는 눈을 폭 감았다. 지금 '판도라'는 명실상부 가장 거대한, 세계적인 기업이다. 주로 음악 산업을 하고 있는데 아이돌 같은 엔터테이먼트 사업부터 클래식 오페라와 뮤지컬까지 섭렵한 대규모 단체였다. 사람들에게 얼마나 대중적이고 팬들이 많던, 그저 카이토에게 있어서는 아버지에게 더러운 제안을 하다 거절당해서 보복성 살해 후 누명을 씌운 악당 무리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대회를 열어서 당신네 아티스트에게 져달라고? 내가 살아있는 동안은 그런 제안에 응할 일은 일절 없소.'

아직도 그때 차분한 목소리로 거절하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선명하다. 그때 거절하지 않고 고분고분 말을 들었으면 좀 달라졌으려나. 아니. 그럼 카이토는 예전과 같은 눈으로 아버지를 볼 수 없었을 테니 그건 그것대로 싫었다. 우습다. 이 모든게, 운명이 마치 자신이 불행해지도록 설계된 것 같아서 우스웠다.

"거지 새끼. 콩쿠르 조작으로 돈 받아 먹고 살았으면서 이젠 물도 없어 학교 정수기에서 훔쳐먹네."

옆에서 뭐라 하든말든 카이토는 묵묵히 생수병을 채웠다. 학교에선 아무도 자신을 반기지 않는다. 아마 자신이라도 그랬을 것이다. 고등학교 올라오자마자 아버지 욕을 하거나 건드는 녀석들이 너무 많아서 전부 흠씬 두들겨 패주었다. 맨 주먹도 있었지만 책상이나 의자를 집어 던지기도 했고 옆에 있던 대걸레 자루를 들어 휘두르기도 했다. 소년원에도 여러번 다녀왔다. 상담실에서 대화를 나누며 들려오는 쇼팽의 곡이 듣기 싫어서 레코드판을 부수기도 했다.

미친놈이지. 지 아비를 꼭 닮아서 저래.

그 말에 꼭지가 돌아 피가 튀길때까지 상대를 후드려 팼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조용히 살고 있는 자신을 굳이 건들어서 히죽거리며 꼭 아는 척, 말을 건넨다. 얼마 받았대? 실제로는 피아노 칠 줄은 아신대? 비행기는 쳐본 적있대? 홀로 걷는 하교길에 큭큭 거리며 깐죽거리는 그 얼굴이 하도 꼴 보기가 싫어서 그대로 뒷덜미를 잡아 아스팔트 바닥으로 처박았다. 인원은 그들이 훨씬 많았으나 카이토는 어느새 전부 정신을 잃고 쓰러진 녀석들을 패고 있음을 알았다. 아직 의식이 남아있는 한 놈이 울며 제발 그러지 말라고, 정말 그러다 죽는다고 웅얼거렸다. 웃음이 났다. 아니야. 사람은 이 정도로는 안 죽지.

오늘은 내 생일인데. 카이토는 여전히 시내에 울려퍼지는 곡들을 들으며 천천히 전진했다. 피가 튄 얼굴, 흙먼지에 굴러 엉망이 된 옷, 다 까진 손. 험악한 인상 탓인지 아무도 카이토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다 부질없어 진 것 같아. 누구에게 하는건지 모를 말을 중얼거리며 눈앞에 보이는 편의점으로 홀린듯 걸어들어갔다. 이 세상은 빌어먹을 저 곡 밖에 없는지, 편의점에 틀어놓은 라디오에서도 녹턴 작품번호 9, 2번 곡이었다. 또. 또! 세상이 사실은 자신을 둘러싸고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될 지경이다.

"흔해빠진 녹턴. 많고많은 21개 중에 2번 곡 밖에 모르나."

궁시렁 거리면서 바구니를 들어 물건을 쓸어 담듯이 했다. 평소라면 사지 않았던 과자도, 초콜렛도. 자신에겐 사치다 싶어서 사지 않았던 물건과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다른 물건들도 쓸어 담았다. 바구니를 꽉 채운 물건을 보다 계산대 줄을 서니 맨 뒤에 있던 사람이 혼잣말처럼 내뱉었다.

"몸에 안 좋은데. 차라리 요구르트를 먹어요. 설탕 덩어리라해도 어쨌든 유제품이야."

"......."

이젠 하다하다 정신나간 사람도 제게 말을 거나 싶어서 무시하려고 했다. 그러나 뒤의 남자는 도저히 흘려들을 수 없는 말을 뱉었다.

"죽으려고요?"

"......."

"왜 놀란 얼굴을 해요. 딱 보니까 그런 것들만 골라 샀는데. 일산화탄소중독으로 가보려고요?"

잠깐 바구니 안의 내용물을 둘러본 것 만으로도 알 수 있다는 듯이 남자가 샐쭉 웃었다. 이사람도 단단히 미친 사람이지. 보통 피를 묻히고 험악한 표정을 진, 그의 말마따나 죽으려고 결심한 사람을 이렇게 건들진 않을 테니까.

"신경 끄세요."

그러면 이번에 남자는 완전히 다른 말을 했다.

"음악 좋아해요?"

"음악 같은 거, 완전 싫어."

"아쉽네... 손이 그렇게 예쁜데. 마치 피아노를 치기 위해 태어난 손 같아."

"...허,"

"그런데 왜 녹턴을 좋아해?"

반말로 응수하니 도로 반말이 들어왔다. 쪼잔하고 치사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먼저 시작한게 본인이라 대꾸도 못했다.

"좋아하긴 누가!"

좋아한다는 말에만 대꾸를 했다. 방금 음악 절대 싫다고 말 했는데도.

"그냥 클래식 곡만 듣고도 '흔해빠진 녹턴'이라고 했으니까."

"...유명한 곡이잖아. 모르는 사람도 있어?"

"보통 녹턴 넘버가 몇 번까지 있는지 아는 사람은 드물지."

카이토는 이제야 이 이상한 남자에게 말려들어간다는 사실을 알았다. 진즉에 신경 끄라면서 내쳤어야 했는데, 대화를 시작한 이상 계속 말리고 있었다. 인제라도 고개를 홱 돌렸다. 때마침 타이밍 좋게 계산대에 자리가 나서 허겁지겁 다가가 바구니를 올렸다. 점원은 수상한 카이토의 모습에 긴장한듯 보였다. 이상한 짓 안할건데, 이렇게 생각해봤자 점원은 지금 제 앞 진상일지도 모르는 손님에 꺼려하고 있겠지. 빠르게 계산을 마친 뒤 가게 문을 나서는게 도와주는 일인 것 같아 도망치듯 봉투를 받아들고 편의점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눈앞 광경에 잠깐 얼이 빠져서 멈춰있었다. 분명 제 뒤에 있던 남자가 떡하니 밖에 서 있었다. 그러고보니 계산대 줄 뒤에 있었긴 했지만 그가 바구니를 들고 있었는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어이가 없어, 카이토는 비아냥 거리듯 입을 열었다.

"인신매매, 뭐 그런거 하는 사람이야? 미안하지만 내가 아무리 죽고 싶은 사람이라도 그런 취미는 없거든."

어딘가 긴장하여 딱딱하게 나오는 목소리에 남자가 웃었다. 그의 고운 입이 컴컴한 밤 편의점 조명을 받아 붉은 색이었다.

"죽으면 남는 건 살아남은 자들이 제멋대로 떠드는 소문뿐이야."

"......."

"딱 그것만이 남지. 죽은 자는 말이 없거든."

지나치려던 발걸음은 남자의 말에 우뚝 멈추고 말았다. 첫째로는 그 말을 하는 그의 얼굴이 어딘가 쓸쓸해보였기 때문이고, 둘째는 그의 말마따나, 지금 죽어봤자 그 사기꾼의 아들이 죽었다고 신문에 날게 뻔했기 때문이다. 꼴 좋다고 떠들어대시겠지. 오징어나 뜯고 씹으면서 그보다 못한 존재처럼 아버지와 자신을 가십거리로 만들어 부풀릴 것이다. 그건 그 망할 판도라 기업이 원하는 형태이기도 했다. 자신이 죽으면 누구보다 발뻣고 신나게 잠들 놈들이니까. 갑작스런 상황에 굳어 멈춘 카이토에게 남자는 명함을 한 장 내밀었다.

"...뭐야?"

"내 명함. 만약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철부지 꼬맹이 하나 봐 줄 정도는 되니까."

"...아저씨 대체 뭐야?"

"아저씨라니. 난 대학 다녀."

"아, 대딩이었어?"

"아니, 교수인데."

"......."

요즘엔 이런 미친놈도 교수를 하나. 카이토는 눈을 찡그렸다. 얼굴은 반반하게 생겨서 솔직히 아저씨라고 내뱉은건 반쯤 오기였다. 여리여리하게 생겨서는, 한 대 치면 넘어갈 것 같은데 막상 옷 태 안으로 보이는 몸은 근육이 잡혀있는 것 같았다. 게다가 죽은 자는 말이 없다는 그 말을 하고 있는 남자의 얼굴이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것이어서 카이토는 한 대도 치지 못하고 명함만 손 안에 구겨 그대로 집으로 돌아왔다. 사놓은 물품들도 있었지만 쉽사리 행하지는 못했다. 구겨진 명함만 손에 쥐고서 쪽방에 웅크리고 앉아 눈을 감았다. 빌어먹게도 눈을 감으면 피아노 소리가 들려온다. 죽기 전까지 계속되겠지. 죽기 전까지 지속될거야. 

누가 나에게 길을 좀 알려줘. 뭘 해야 할지 알려줘. 내가 지금, 뭘 해야 해?

03.

"우리 아들 얼굴 좀 보세요! 사람을 이렇게 패 놓다니! 학생이라고 봐주지 말고 이번에야말로 그냥 감옥에 처넣어요!!!"

"맞아요! 애초에 범죄자의 아들이면, 뭐 그런 거 없나!? 분명 나중에 살인이라도 저지른 다니까!?"

"아이고, 진정하세요 어머님들."

새벽이 지나가기도 전에 끌려온 경찰서는 시장 한복반처럼 북젹였다. 모두 카이토가 흠씬 패놓아서 떡이 된 얼굴로 저마다 어머니 손을 잡고 왔다. 물론 처음에는 '쟤가 먼저 저에게 욕했어요.'라고 몇 번 반박했으나 저들에겐 절대적인 편이 되어서 높게 소리쳐줄 어머니가 있었고, 카이토는 혼자였다. 입을 열면 부모를 닮아서 범죄자라느니 하는 말들만 되돌아 왔다.

"이거 흉지면 어떡해... 아이고. 아이고...."

마음에도 눈에 보이는 흉터가 있다면 아마 자신은 너덜너덜하겠지. 카이토는 빨리 이 상황이 끝나기만 바라며 묵묵히 시간을 보냈다. 아직 카이토의 신원을 모르는 경찰이 보호자는 어디있냐고 물었지만 금세 다른 입 싼 놈들이 고아잖아요, 쿠로바 카이토. 그 쿠로바 도이치의 아들이요. 하면서 키득거렸다.

"저 아줌마 말이 맞아요. 저 그냥 감옥 갈게요."

그럼 이번엔 또 싸가지가 없다며 한소리 들었다. 우리 아들은 잘못 없어! 그렇게 말해줄 사람이 있다는건 좋은일이지. 카이토는 의자에 걸터앉아 이 시간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사건은 거칠게 경찰서 문을 열고 들어온 마지막 사내에 의해 전개되었다. 누군가의 아버지로 보이는 남자는 성큼성큼 걸어와서 거칠게 카이토의 뺨을 내리쳤다. 아버지에게도 맞아본 적 없는 뺨에 고개가 돌아갔다.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국제 사기극을 벌여놓고도 아직 살아있으면 너라도 쥐죽은 듯이 살아야 할거 아니야. 쓰레기 같은 놈."

그 다음엔 또 기억이 없었다. 이제 눈에 뵈는게 없이 절벽 끝 한계까지 몰린 카이토의 행동은 쉽게 폭력으로 분출되었다. 휘두른 주먹이 남자의 턱을 갈기고, 말리는 경찰들을 주렁주렁 매달고서 옆의 물건들을 던지며 난동을 피웠다. 합의는 결코 없을거라고 무리들이 돌아간 뒤에도 카이토는 유치장에 갇혀 보호자 이름이나 대란 말을 듣고 있었다.

"없어, 씨, 없다고. 몇 번을 말하냐고요. 나 없다고. 아무도 없다고. 없는데 어떻게 불러오라고 해. 내가 하늘나라 가서 데려와? 내 좀 죽여줘봐요. 내가 데려오게."

경찰도 당황해서 서 있으면 다시 한 번 새벽 늦은 시간 짤랑이며 누군가 들어왔다.

"여기 전화받고 왔는데."

네가 불렀어? 경찰들이 서로 두리번 거리다가 구깃한 명함을 집어든 다른 동료를 보고 다시 들어온 사내를 보았다. 그들은 익숙한 얼굴에 잠시 기억을 더듬거리다가 일제히 아, 하는 소리를 내었다. 카이토는 창살 너머로 아까 저녁에 보았던 그 남자란 것을 확인했다. 이제 경찰들이 제 소지품까지 막 뒤져서 사람을 불러냈다 이거지. 멍하게 바라보던 시선은 남자와 공중에서 딱 마주쳤다.

"아니 그런데, 이 놈과 정말 아는 사이인지...."

"네. 보호자입니다. 따로 부모가 안 계시다보니까."

"...아. 그러, 그러셨군요."

쿠도라고 불리운 남자는 경찰들과 면식이 있어 보였다. 그뿐 아니라, 되려 경찰이 쩔쩔매는 모습까지 보여줬다. 원래라면 절대 빠져나올 수 없던 유치장에서 나오게 된 것도 이 쿠도라는 남자 덕분이었다. 그들은 설설 눈치를 보면서 다음부터는 꼭 좀 주의 부탁드린다고 신신당부했다.

경찰서 건물을 빠져나오자마자 쿠도는 가까운 벤치에 앉아 카이토의 뺨과 손등에 반창고를 붙여주었다. 만난지 얼마 되지 않은 상대로부터 치료를 받게 되는건 처음이었다. 새벽의 거리는 고요했고 달빛이 은은하게 비추는 동안 카이토는 쿠도의 얼굴을 보며 즉흥환상곡을 떠올렸다. 화려하고 격정적인 부분을 지나 어느때보다 부드럽고 따뜻한, 고요한 장조의 선율. 은은한 달빛과 화려한 네온 사인 불빛을 받아 빛나는 흑발, 새파란 눈.

"...당신 이거 불법이잖아."

"위법행위도 좀 하지 뭐."

"형 나 좋아해?"

답답해서 충동적으로 내뱉은 말이었지만 금세 크게 후회했다. 되도않는 양아치가 되어버렸음에 큼큼 헛기침을 하고는 다시 주제를 돌렸다.

"당신 정말 누구야? 왜 경찰도 한 수 접어줘?"

"그냥 예전에 잘 아는 사람이 의원 아들이었을 뿐이야. 겸사겸사 사건일로 좀 도울 것도 있었고."

"...세상은 정말 썩을대로 썩었네."

그 말에 휴대용 구급 상자 케이스를 딸깍 닫은 쿠도가 고저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너는?"

그 말에 머리에서 울려퍼지던 환상곡이 뚝 끊겼다.

"내가 보기엔 사람 패고 방황하고 다니는 네가 더 심각해 보이는데. 차라리 살아. 그렇게 미우면 살아. 세상이 널 굶기면 악착같이 도둑질을 해서라도 살아야지. 음악이 밉고 원망스러우면 음악으로 상대를 해야지. 사람을 패서 살인지가되면, 너만 손해라는 이 뭣같은 사실을 왜 몰라."

분노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아무곳에나 방출하던 카이토에게 처음으로 따끔한 말이 내려왔다. 구급 상자를 다시 편의점 봉투에 넣고 뒤적이는 동안 카이토는 눈을 깜빡였다.

"음악을 해. 쿠로바 카이토."

혼자서 여기까지 온 것도 수고가 많았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상처럼 제게 내밀어진 딸기맛 요구르트를 보고 다시 쿠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음악을 해. 이 말은 이제껏 길을 찾지 못하고 정처없이 떠도는 카이토에게 처음으로 길이 되어주는 말이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찌르르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전율이라고도 하나, 그런게 있었다. 시간은 멈춘듯 느리게 심장을 두들겼다. 얼떨결에 손을 뻗어 요구르트를 받아들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요구르트와 함께 다시 받은 명함을 이번엔 구기지 않았다.

도쿄예술대학 음악학부 작곡과 

교수 쿠도 신이치

일본 명실상부 가장 큰 예대의 교수였다.

'음악을 하렴. 카이토.'

어렸을때 자신에게 길을 제시해주었던 아버지의 말처럼, 성인을 앞두고서 어찌할 줄 모르고 방황하던 카이토에게 다시 한 번 길을 제시하는 목소리였다. 쿠도 신이치가 떠나간 뒤에도 카이토는 미적지근해진 요구르트를 뜯으며 훌쩍였다. 달디단 요구르트를 먹으며 이제껏 받지 못한 위로와 치료에 펑펑 울어버렸다. 누구도 자신의 편에서서 보호해주지 않는 끔찍한 고독 속에 손을 내밀어 준 존재였다. 음악을 한다고 뭐가 달라질 것 같진 않지만 적어도 무언가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마음이 편해졌다. 별것도 아니었다.

사실은 음악을 계속 하고 싶었을지도 몰라. 

입으로 들어오는 요구르트가 무슨 맛인지 느껴지지도 않았지만 기계적으로 그걸 입에 넣으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내 손이 닿는 곳까지 올라와. 그럼 네가 원하는걸 하나 들어주지. 쿠도 신이치의 그 문장만을 되새기며 소매로 눈가를 벅벅 문질러 닦았다. 지금 내 모습이 얼마나 볼품없고 추할까. 다 큰 녀석이 애들 먹는 요구르트나 쥐고 울면서 꾸역꾸역 먹고 있으니. 성인이 되기 전에 목숨을 내버릴 예정이었던 쿠로바 카이토는, 성인이 될 준비를 시작하기로 했다.

꼭 최고가 되겠어. 그래서, 네가 있는 곳까지 너를 만나러 가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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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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