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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VE a piacere 下

피아니스트 쿠로바 카이토 X 작곡가 쿠도 신이치

이전 포스타입과 같은 글입니다.

  • 리퀘스트 연성

  • 하편 약 4만 자.

너를 못 믿겠으면 나를 믿고 따라와. 나는 항상 너를 믿고 있으니까.

11.

등교거부. 벌써 2주차에 접어들자 카이토는 금세 지루해졌다. 케케묵은 매트리스 위에 누워서 천장을 보며 얼룩을 세는 것도 질렸다. 쿠도의 말대로, 신문은 금세 자신에 대한 이야기에 흥미가 식었는지 잦아들었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남의 일에 관심이 없었다. 그저 불이 옮겨붙듯 옆집으로 옮겨가 신나게 태워먹는 것이다. 며칠동안 집요하게 괴롭히던 잡음들도 이제 잦아들었다. 허공에서 건반을 두들기듯 손짓하던 쿠로바는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떨어진 명예. 생각해보면 애초에 명예는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그저 아버지의 이름에 편승해서 우쭐해져있던 것 뿐이었으니까. 시작도 해보지 못하고 져버린 꿈. 그게 꿈이라기엔 애매하긴 했다. 국내 콩쿠르는 내년이겠지만 국제 콩쿠르는 올 겨울에 있었다.

헌데 지금 가장 머리속을 꽉 채운 것은 그것들이 아니었다. 이게 바로 쿠로바 카이토가 아주 미치는 점이었다. 사실 복수같은건 아무것도 아닐지도 모른다. 복수를 하는 건 그냥 거창한 이유였다. 마치 어딘가 소년만화에 떨어진 주인공처럼, 내가 이렇게 당했으니 으레 갚기 위해 이렇게 해야한다는 둥 하는 그런 싱거운 내용.

그럼 나는 왜 그렇게 열심히 학교를 갔나. 왜 그렇게 죽을둥살둥 노력해서 실기시험을 치렀나. 왜 쿠도 신이치의 연주가 그렇게 좋았나. 그래 맞아, 쿠도 신이치의 연주의 이끌림이 무엇일까 고민했던 적이 있는데 이제야 알것 같았다. 쿠도 신이치는 누군가를 추억하고 좋아하는 연주를 하고 있었다. 그리움과 애틋함이 잔뜩 묻어나는, 좋은시절을 회상하는 그의 음색. 그게 쿠도 신이치의 연주였다.

나는 네가 좋아서 학교에 가고, 네가 좋아서 밥을 먹고, 네가 좋아서 살고, 살고, 살고.

간단한 이치를 깨달으며 쿠로바는 눈을 폭 감았다.

쿠도 신이치의 연주처럼 해보고싶다. 누군가의 마음에 들어갈 수 있는, 내 마음을 전달하는 연주. 내가 지금까지 간절하게 행동했던 모든 이유가 너였으니 나는 너를 위한 연주를 해보고 싶다.

그렇게 생각하니 머리 한구석을 누르고 있던 돌이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쿠도 신이치 처럼... 쿠도 신이치 처럼. 중얼거리다가 얼마전에 큰 맘 먹고 지른 전자 피아노까지 후다닥 기어가서 연주를 시작했다. 쇼팽의 왈츠. 다시 한 번 이곡을. 머릿속을 꽉 채운것은 이제 무겁고 끔찍한 트라우마가 아닌 쿠도 신이치였다. 그가 웃어줄때, 위로해줄때, 격려해줄때, 그리고 짐짓 조금 무섭게 피아노를 알려줄 때. 그 모든 순간을 떠올리다 눈앞에 플라스틱 요구르트가 내밀어져서 우뚝 손을 멈추었다.

"...이래서는 이번엔, 그 녀석의 모방 연주를 하고 있을 뿐이잖아...."

아버지에게서 벗어나는가 싶었더니 이번엔 고스란히 쿠도 신이치다. 평생 누군가를 흉내내는 것 말고는 못 하는 거냐고 난. 머리를 쥐뜯고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에어컨도 틀지 못하는 처지라 7월이 다가오는 이 날씨는 고역이었다. 전자가 아니라 진짜 피아노였으면, 이정도 습기와 온도는 적이었다.

"젠장... 이래서야 여전히 만나러 가질 못하잖아...."

이번에도 쾅, 건반위에 이마를 박았으나 전자 피아노라 그런지 드라마틱한 소리는 나지 않았다. 그나마 반 지하에 위치하고 있는 낡은 집이라, 주위에 아무도 없어서 소음공해로 신고가 들어오지 않은 것만이 위안이었다. 결국 쿠로바는 기억을 더듬어서 입학 전 최종 실기시험을 떠올렸다. 쿠도가 쳤던 그 즉흥곡을 다시 한 번 끄집어냈다.

여기 다음이 이거였던가? 아니, 이거였던 거 같은데....

몇 번 건반을 두들기고 오선지에 하나하나 기록했다. 밤새도록 치고, 또 쳤다. 그 순간만큼은 분명 따라잡지도 못할 쿠도의 연주를 제것으로 만들어 쳐야겠다는 생각으로 필사적이었다. 아마 인생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연주를 한 시간이었을테니까. 그때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새벽 밤이 다 지나가는 것도 모르고 뻘뻘 땀을 흘리며 기록했다. 박자가 어떻고, 코드가 어떻고, 자신은 여기를 이렇게 바꾸었고,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금세 까마득한 어둠속으로 꺼졌다.

삐빗 단조로운 전자음 소리에 화들짝 놀라 눈을 뜬 것은 그로부터 세 시간은 더 지난 뒤였다. 대체 언제 잠든거람. 휴대폰을 켜기 전에 까만 액정 화면에 얼핏 제 얼굴을 비추어보니 뺨에 건반 자국이 제대로 움푹 파여 있었다. 이런 이른 아침부터 대체 누가 연락을 했지 싶어서 화면을 켰다.

[6월 21일. 생일 축하해. 아들.]

아. 난 또. 액정을 바라보자마자 헛웃음이 났다. 좋은데, 좋으면서도 복잡하고 미묘했다. 떵떵거리면서 예선 통과하면 생일날 만나자고 데이트 신청했던 과거가 떠올라서 죽고싶어졌다. 지금은 생일 데이트는 커녕, 얼굴도 피하고 있으니까. 허겁지겁 잡았던 휴대폰을 내려놓으려는데 한 번 더 진동이 울렸다. 아까는 소리였는데, 지금은 진동인걸로 봐서 별 거 아닌 알림이겠거니 하고 넘기려던 손은 금세 화들짝 놀라서 휴대폰을 꽉 잡았다.

생일 축하해. 아직 얼굴 보기 힘들어 할 것 같아 문자로 대신해.

나는 이미 그 장소에 도착해있지만,

너는 준비가 되지 않았을테니까 오지 않아도 괜찮아.

P.S  7월부터 시험인거 알지. 그땐 잊지말고 나와.

딱딱하고 요령도 없는 메세지의 내용이 꼭 쿠도답다. 이모티콘 하나 쓸 줄 모르는 티가 팍팍 난다고 해야 하나. 쿠도스러운 문자를 보고나니 무겁던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어제 밤을 새며 너랑 똑같은 곡을 연주해서 끙끙 앓았다는 걸 너는 모르겠지. 문자를 받고나니 우습게도 학교에 갈 마음이 들었다. 아주 쌩뚱맞았다. 학교에 나오라는 것도 아니고, 얼굴 보기 힘들다는 말과 오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에 학교에 갈 마음이 들었댄다. 이게 무슨 청개구리도 아니고.

혼자 쓸쓸하게 보내는 생일보다도, 너를 만날 수 없어서 조마조마한 이 시간이 난 더 괴롭다.

그걸 깨달아버렸으니 가야겠지. 눈앞엔 구깃한 악보가 있었다. 기억을 더듬어서 이것저것 기록해보느라 엉망이고 못생긴 악보였다. 기억을 살려서 다시 재생하는건 이다지도 힘들다. 이렇게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나는 고작 어릴적 아버지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대중들은 그점을 생생하게 기억할거라고 착각하고 있다. 웃기지 말라지 쿠로바 카이토. 좋았던 얼마전의 꿈같은 기억조차 이렇게 흐릿한데, 그들이 아버지의 아들인 너를 기억하겠어?

그걸 자각하자 푸스스 웃음이 다 나왔다. 가야지. 학교. 그래, 학교에 가야지.

그곳에 쿠도 신이치가 있잖아. 그곳에 음악이 있고 피아노가 있다. 이전처럼 복수를 위한 준비는 아니더라도, 내 목소리를 내기 위하여, 나만의 감정을 전달하기 위하여, 나는 더 연습해야만 해.

12.

오랜만에 돌아온 학교는 그대로였다. 아니, 7월로 접어든 날씨는 꼭 그렇지만도 않게 만들었다. 과할정도로 내리쬐는 태양열이 대놓고 전투를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너한테 뭔가 잘못한거라도 있냐. 툴툴거리면서 눈을 가늘게 떠 사납게 노려봐봤자, 강렬한 태양을 보는 제 눈만 아플 뿐이다. 쿠로바가 궁시렁거리면서 간신히 이 더위를 이겨 작곡과 연구실로 향하자 뒷통수를 때리듯 노기를 꾹 누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작곡과 연구실이 아주 동아리방이지?"

이거 말야, 엄연히 기악과의 에이스가 설렁설렁 작곡과 연구실이나 뺀질거리게 들르고 말이야. 조만간 열쇠라도 쥐여 줘야지 이래서 안 된다니까. 나무라는 음색은 오랜만에 들어도 정겨웠고 그 내용은 심지어 친절했다. 쿠로바는 지금까지 자기가 등교거부를 해서 못 만났다는 사실을 잊은양 바로 뒤돌아 달려가서 그의 허리춤을 감았다.

"아, 가뜩이나 더워 죽겠는데! 안 떨어져!?"

"세상에, 시원하다... 어떻게 한 여름에도 이렇게 서늘한 사람이 있을 수가 있지? 역시 마음의 온도와 실제 체온은 비례하나 봐...."

"너 은근 깐다?"

"좋은 향기... 우리 쿠도 교수님은 바디워시 뭐 쓰시지?"

어리광 잔뜩 얹은 칭얼거림으로 품에 파고들자 쿠도는 헛웃음도 포기한채 더운 땡볕을 걸어와 후끈한 녀석의 등을 툭툭 쳤다. 바디워시 좋아하시네. 내 타고난 살 냄새야. 체향이라는 것도 몰라? 그렇게 말하니 갑자기 또 그 잘난 얼굴에 시선이 꽂힌다. 하얀 뺨, 붉은 입술, 자신감있고 언제든 매서울 준비가 되어있는 날카로운 눈매.

"그렇다고 또 뭘 빤히 보냐. 얼른 떨어져."

파리라도 쫓듯 훠이 훠이 밀어내는 통에 제 아무리 쿠로바라도 어쩔 수 없이 히잉, 눈썹을 휘며 물러났다. 이 더운 여름에도 한 점 흐트러짐 없는 쿠도 신이치의 모습. 모든 사람이 부족한 부분이 있다는 걸 알지만 쿠로바 눈에는 쿠도 만큼은 그런게 없을 것 같았다. 늘 완벽하고, 멋지고, 이상적이다. 동경하는 상대가 눈앞에서 자신을 뒤흔드는데 별 수가 있나.

"11시 부터 시험인 것 같던데, 일찍왔네. 그러고보니 너, 연습 하나도 안 했지? 낙제 받아도 난 모른다."

"에이, 왜 그래. 내가 일찍 올줄 알고 속성으로 나 가르쳐주러 온 거잖아요 교수님."

"이럴때만 교수님이지?"

"그럼, 형?"

익살스럽게 불러보면 바람 빠진 웃음이 돌아왔다. 여튼, 손 많이 가는 자식. 어깨를 두 번 툭툭 치고는 느릿느릿 앞장섰다. 솔직하지 못한 감정으로 저리 구는 것이 6살이나 연상인 교수라 할지라도 퍽 귀여워서 쿠로바가 씩 웃으며 뒤따라갔다.

"그런데 이번 시험, 자작곡 아냐? 뭐 생각해온 건 있긴해?"

"아니. 그래서 큰일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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