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환대협/마키센] 내맘대로 슬덩 나폴리탄

능남 낚시꾼 by 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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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3 박경태 학교에서 야자하다가 깜빡 졸았는데 눈 떠보니까 전혀 낯선 풍경임. 아니, 아는 곳이기는 한데 분위기가 전혀 다르다고나 할까. 마치 눈 앞에 필터가 하나 씌워진 것처럼 이상한 느낌이었음. 사람이 전부 돌아가서 텅 비었기 때문에, 라고 하기에도 너무 고요함. 갈 거면 나도 좀 깨우고 가지. 친구들의 야속한 행동에 약간의 서운함을 느끼며 가방을 싸고 일어난 경태는 고요한 복도로 발을 내디뎠음. 어둠에 반쯤 삼켜진 복도는 묘하게 공포심을 불러일으켰음. 계단은 복도 끝에 있는데, 그 끝이 보이지 않는 느낌임. 경태는 마른 침을 한번 삼키고는 가방끈을 꽉 움켜쥔 채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음. 어쩐지 발소리를 내서는 안된다는 기분이 강하게 들어서, 진짜 발 끝으로 살금살금 움직이기 시작했음. 복도에 난 창문으로 바깥을 확인했는데 너무 깜깜해서 운동장의 형태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음.

이상하다. 핸드폰도 전원이 안 들어오고. 앞을 밝힐 것은 아무 것도 없었음.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오싹한 불안감을 애써 떨쳐내려고 하면서 걸음을 옮기는데, 계단이 나오지를 않음. 이쯤이면 복도 끝에 다다랐어야 했는데. 가방끈을 쥔 손에 땀이 축축하게 차올랐음. 너무 긴장해서인지 교실이 있는 쪽에서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음. 교실의 문은 꽉 닫혀 있었지만 문에 난 작은 창마다 눈이 달라붙어서 그를 보고 있다는 느낌임.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그 눈이랑 마주칠 거 같아서 경태는 정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멈추지 않고 계속 걸었음.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땀 때문에 젖은 교복이 등에 축축하게 들러붙었고 너무 긴장한 탓인지 숨이 차기 시작함. 이제쯤에는 진짜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음. 어쩌면 꿈이 아닐까? 이건 지독한 악몽이고 자신은 아직 야자 시간에 잠들어 있는 것일지도 몰랐음. 근데 그렇게 생각해도 기분이 좋아지기는 커녕 오히려 이 꿈에서 죽거나 다치면 현실의 나도 일어나지 못한다 라는 것이 본능적으로 느껴졌음. 반쯤 울 것 같은 상태로 고민하기 시작했음. 이 방향으로 걸어서 안되면 돌아서서 다른 방향으로 가볼까? 지금 자기가 복도의 어디쯤에 있는지를 파악할 생각으로 교실 팻말을  흘끗 보는데, 도저히 읽을 수 없었음. 숫자가 있는 것이 확실한데 숫자가 아님. 글자의 형태는 알겠는데 이해가 되지 않는 거임. 인지에 혼란이 오는 것을 느끼며 비틀비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음. 어쩐지 자기가 직선으로 걷고 있는지 빙빙 돌고 있는지조차 확신이 안가기 시작함.

그 와중에 등 뒤에서 근원을 알 수 없는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하고, 박경태는 완전히 패닉해서 앞으로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음. 뛰면서 발소리와 숨소리가 커지면 커질 수록 뒤에서 들리는 소리는 더 빠르게 더 가깝게 다가옴. 이러다 잡히겠다, 라고 생각이 드는 순간 경태는 앞을 막아선 무언가에 쿵 부딪혔음. 달려오던 힘이 있던 만큼 뒤로 볼품없이 나동그라진 그는 앞뒤로 둘러 싸였으니 이제 꼼짝없이 죽었다 라는 생각으로 새파랗게 질렸음. 팔로 머리를 막으면서 몸을 둥그렇게 말고 있는데 '그렇게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이제 괜찮아.' 하는 소리가 들림. 사람이다, 사람의 말 맞지!? 거의 울상이 되어서 올려보는데 흰색에 파란색 강조가 들어간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이 두명 서 있었음. 그 중에 키가 작은 쪽이 경태를 일으켜 세워줬고, 키가 큰 쪽은 장갑을 고쳐끼면서 앞으로 몇걸음 나아감. 알아서 처리하고 올 수 있지? 하고 경태를 부축한 사람이 묻자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린 남자는 코앞까지 다가온 어둠 속으로 사라졌음.

"저, 저기, 괜찮은 거예요?"
"저 녀석은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따라와."

경태는 자기 팔을 잡아 끄는 사람을 따라 걸음을 옮겼음. 얼마 가지 않아 그가 그렇게도 찾아 헤매던 복도의 끝이 나옴. 그 사람은 1층으로 향하는 대신에 올라가는 계단으로 발을 들임. 경태가 머뭇거리자 그는 조금 짜증이 난 듯이 출구는 위에 있다고 말했음.

"원래 여기는 우리가 청소한 곳이야." 그는 경태가 잘 따라오는지 곁눈질로 흘끔 확인하며 말했음. "그래서 더 이상은 문제가 없을 줄 알았는데."

3층에 도착하자 남자는 곧장 미술실로 향했음. 불이 꺼진 미술실은 진심으로 무서웠음. 어떻게 보자면 아까의 그 복도보다도 더.

"임시 출입구를 만들어 놔서 다행이네." 그는 미술실 한가운데 놓인 거대한 캔버스를 가리켰음. 그리고는 경태에게 그 안으로 들어가라고 명령하듯이 말했음. 여기를 어떻게 들어가요? 라고 물으려는데, 그러기도 전에 남자가 경태를 캔버스 쪽으로 확 밀었음. 기우뚱 기울어진 몸이 그림 속으로 순식간에 빨려들어갔고, 남자는 미술실 문 밖을 잠깐 봤다가 작게 한숨을 쉬고는 캔버스 속 통로로 들어갔음.

잠시 후 박경태는 딱딱한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음. 엄청나게 빠른 놀이기구를 탄 것처럼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속이 울렁거렸음. 결국 일어나지도 못하고 그대로 엎드려서 구역질을 하는 걸 보고 그 뒤로 따라 나온 남자가 등을 퍽퍽 두드려줌. 간신히 정신을 차린 경태를 일으켜세운 남자는 일단 회복실로 들어가자고 함. 제가 토한 거는요...? 저건 그게 알아서 할 거야. '그게' 뭔지 궁금하기는 했지만 거기서 질문을 하고 있을 정신은 없었음. 그는 회복실이라는 방에 들어가서 그 곳에 있던 직원에게 인적사항에 대한 질문을 받고 침대에 누워 있었음. 이상 있으면 나 불러라. 직원에게 그렇게 말하고 나가버리는 남자는 꽤 높은 직책의 사람이었나 봄. 푹신한 침대에 누워 있자 모든 긴장이 탁 풀리는 느낌임. 아, 누나한테 연락해야 되는데.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박경태는 눈을 감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음.





지금...정신을... 경태는 온몸이 욱신거리는 통증을 느끼며 눈을 떴음. 몽둥이로 온몸을 두들겨맞은 것처럼 아파서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든데 주변이 너무 시끄러웠음. 그가 끙끙거리면서 고개를 돌리자 익숙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음. 경태야! 박경태가 정신을 차린 것을 깨달은 여자가 급히 달려옴.

"...누나."

하진은 경태의 손을 꽉 잡았음. 경태는 조금 의아함. 누나랑 사이가 나쁜 건 아니었지만 하루 정도 이상한 곳에서 헤맨 걸로 이렇게까지 감격받고 눈물 흘릴 정도가 아닌데. 그가 아직 몽롱한 정신으로 눈을 깜빡이고 있는데 그를 데리고 나왔던 남자가 머리맡으로 훌쩍 다가왔음.

"너 3일을 내리 잤다. 이제 좀 정신이 드냐?"
"엑, 3일이요?"
"그래."

남자는 경태의 팔에 연결된 수액을 확인하고는 들고 있던 패드에 대충 뭔가를 휘갈겼음. 일어났으니까 됐죠? 하진한테 팩 쏘아붙이는 걸 보니 아까 시끄러운건 두 사람이 말다툼을 하던 거였나봄. 하진은 경태의 상태를 보느라 남자에게 대꾸할 정신도 없어 보였음. 경태는 남자가 나가고 어느 정도 진정한 하진에게 얘기를 좀 해달라고 함.

"너 일년 동안 실종 상태였어. 알아?"
"일년?"

아무리 생각해도 복도에서 헤맨 시간은 길어야 몇 시간일텐데, 그렇게나 시간이 지났다는 걸 믿을 수가 없었음. 하진의 말에 의하면, 경태는 야자시간에 갑자기 사라졌다고 함. 가방만 놓고 땡땡이 치는 경우가 종종 있어서 학교에서는 박경태도 비슷한 케이스일 거라고 생각했음. 그런데 다음날이 되어도, 그 다음날이 되어도 나타나지 않는데다가, 경태 가족들이 학교에 와서 애가 집에 안 돌아온다고 하니까 난리가 난 거임. 실종자 전단지부터 방송, 기사, 인터넷 글 다 올려봤는데 아무런 연락이 없던 차에, SLAM (Supernatural, Legends, And Misteries) 이라는 단체에서 연락이 왔다는 거임. 실종자 가족들 등처먹는 사기꾼 같은 단체인가 했는데 애를 찾을 수 있다고 하니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믿어보자고 한 거지. 아무튼 엄청 신임이 가는 사람들은 아니었는데 그렇게 말하고 하루만에 경태를 찾아가지고 데려오니까 완전 뒤집어짐. 그런데 또 그렇게 경태가 돌아왔다더니 계속 잠만 자니까 걱정되어서 따지고 있었던 거. 막상 안영수-경태의 상태를 확인하던 남자-는 진짜 아무 문제 없으니까 좀 내비두라고 틱틱대다가 결국 머리 끝까지 열이 받은 하진이랑 말다툼을 하던 거였음.

하진은 진짜 괜찮은거 맞냐고 몇번 더 물어보고, 경태는 자기 정말 괜찮으니까 이제 조금만 쉬게 해 달라고 함. 그렇지않아도 일이 바쁜데 미뤄두고 있었던 하진이 마지못해 나가고 나서, 경태는 베개에 머리를 대고 한숨을 푹 쉬었음. 일년이라니. 내가 재수라니. 그런 생각이 드는 걸 보면 확실히 괜찮기는 한 거 같다. 경태는 스스로의 상태에 대해 짧은 판결을 내림. 그러면서 멍하니 누워 있는데 누가 또 문을 두드림. 그러더니 머리를 빳빳하게 세운 남자가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들어왔음.

"어, 당신은..."

학교에서 경태를 구해준 사람들 중 큰 쪽이었음. 경태는 그의 유니폼에 적힌 이름을 흘끗 봄. 윤대협. 이름 신기하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대협이 옆의 의자를 끌고 와서 앉았음.

"몸은 좀 괜찮나 해서."
"예,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뭐 장기 한두개 없어진 것 같은 기분이 든다거나 그런 건 없고?"
"에?"

하하하, 농담. 대협은 그렇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남. 그럼 난 간다. 여기 있는거 영수한테 들키면 혼나서. 그러고는 경태가 뭐라고 말할 틈도 없이 다시 나가버림. 뭐 하는 사람이지. 자기 할 말만 쏙 하고 가버리니까 어이가 없음. 장기 얘기는 또 뭐고. 어째 황당한 상황만 계속 이어지는데, 슬슬 호기심이 커지기 시작함. 리포터인 하진이랑 비슷하게 경태도 취재와 정보 수집에 대한 관심이 많았는데, 그 성격이 다시 살아나는 거였음. 방 안을 휘휘 둘러보자 자신의 학교 가방이 한쪽 구석에 얌전하게 놓여 있는 것이 보임. 경태는 그 안에서 노트와 볼펜 하나를 꺼내들었음. 그는 팔에 꽂힌 주사기를 조심스럽게 빼내고는 침대에서 내려와 병실 문을 열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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