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 로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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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폰을 끼고 나란히 걷는 하굣길, 금방이라도 눈이 내릴 것 같은 잿빛 하늘. 잇시키의 이어폰 줄은 짧아서 나눠 끼면 늘 서로의 손이 닿을 듯 말듯 스쳐 지나간다. 언제부턴가 매 순간 함께 있는 게 당연할 정도로 익숙해진 사이지만 손끝이 계속해서 부딪히는 그 애매한 거리만큼은 도무지 익숙해질 수가 없어, 친해지고 나서는 차라리 손을 잡거나 팔을 겹쳐 놓는 게 편했다. 그렇게 서로에게 겹쳐 걷던 그 겨울 밤도 평소와 다를 게 없는 날이었다. 여느 때처럼 무상한 얼굴로 걷는 호노카에게서 차이를 찾자면 이 길의 끝이 잇시키 유토의 집이라는 것 정도다.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왜? 안 그래도 되는데. 하지만 그날따라 호노카 앞에서 사양하는 말은 쉽사리 나오지 않아 대문이 보이는 골목까지 함께 걸어오게 됐다. 잇시키의 기억 속 호노카는 언제까지나 아이일 것 같았는데, 어느덧 자신을 배웅해주는 입장이 된 게 어색하기도 했다. 데려다줘서 고마워. 몇 걸음 이른 감사 인사에 멈춰선 호노카는 어깨를 으쓱였다. 뭘요, 그렇게 멀지도 않은데. 그렇지만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니라는 것처럼 느긋한 목소리가 말꼬리를 흐렸다. 잇시키는 잠시 기다렸고, 저, 그리고 선배. 그 뒤로 뭔가 중요한 말을 하려던 것처럼 달싹이던 호노카의 입에서 떨어진 말은 생각보다 짤막했다.
졸업 축하해요. 그리고 그 순간에 잇시키는 갑자기 해야 할 말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서 있다가 고마워, 그렇게 대답했다. 호노카는 인사 대신 어설픈 웃음을 지었다. 한 박자 늦은 대답이 서운하기라도 했던 건지.
그 날, 잇시키가 대문을 넘어설 때쯤에는 희뿌연 하늘에서 하나둘 눈송이가 흩날리기 시작하고… 무언가 잊어버렸다는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졸업을 하고 시즈우미를 떠나는 게 실감 나지 않던 것처럼 어쩌면 이번에도 중요한 것을 빠뜨려서, 그래서 호노카를 주저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텅 빈 주머니 안에서 손을 쥐락펴락하던 잇시키는 결국 몸을 돌려 걸어왔던 골목으로 되돌아갔다. 호노카를 따라잡으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는 잘 알고 있다. 아마 멀리 가지는 않았겠지. 그런 마음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내딛던 잇시키는 정작 첫 번째 갈림길에서 방향을 찾지 못하고 우뚝 멈춰 서고 말았다.
*
분명 저녁부터 눈이 내릴 거라고 했는데 기다리던 눈 소식은 없고 하늘이 뿌옇기만 했다. 잇시키는 뻐근한 고개를 젖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저 너머 빌딩에 박혀있는 벽 전광판에서 화려한 광고가 연신 번쩍거리며 달 대신 하늘을 밝히고 있었다. 손목으로 시선을 떨구면 시곗바늘은 이제 막 7시를 넘겼다. 오늘도 정시 퇴근에 실패했나 보네. 잇시키는 몇 달 전부터 호노카의 직장이 블랙 기업이 아닐까 진지하게 의심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다지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러시아워, 도쿄가 가장 활발할 시각. 출발한 지 얼마나 됐다고 슬슬 차가 막히더니 호노카의 회사 근처에 도착했을 때는 도로가 완전히 막혀 있었다. 평소처럼 나왔는데. 오늘 무슨 일이라도 났나? 중얼거리던 잇시키는 저 사이에 자신의 자리가 없으리라는 것을 일찌감치 깨닫고 곧장 핸들을 꺾었고, 빠른 판단 덕분에 너나 할 것 없이 각자의 용건으로 길가에서 비상등을 깜빡이고 있는 승용차들의 행렬을 피해 간신히 골목길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아무 주차장에나 차를 대어놓은 뒤 숨이라도 트기 위해 뛰쳐나온 게 지금이다.
가로등 아래 서서 막 식어가는 밤공기를 들이마시고 있으면 경적과 목소리 따위가 섞여 혼잡한 골목 바깥에서부터 잇시키와 비슷한 처지인 사람들이 하나둘 튕겨져 나오곤 했다. 지친 사람들이 몇 차례 그를 스쳐 지나가는 동안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던 잇시키는 뒤늦게 정신이 든 듯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러나 손에 익은 번호를 꾹꾹 누르던 손가락은 수화기 버튼을 누르기 직전에 멈추고, 짧은 고민 끝에 메시지 버튼 위로 미끄러지듯 옮겨갔다.
'늦을 것 같아요. 오늘은 안 데리러 와도 돼요.'
그리고 그 밑에 잇시키가 보낸 짤막한 대답이 붙어있다. '갈게.' 답장은커녕 읽음 표시조차 사라지지 않은 말풍선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잇시키는 납작한 창을 꾹 누르고 빠르게 자판을 두드렸다.
'유우, 오늘 차가 너무 많아서. 회사 앞에서 기다리려고 했는데 어렵네. 나오면 바로 옆 골목으로 들어와.'
그리고 땀 흘리는 이모티콘을 찾아 잠깐 헤매다…….
"저기요!"
얼결에 전송 버튼을 누른 잇시키가 고개를 들었다. 여성 한 쌍이 각자의 손에 핸드폰을 쥔 채 몇 걸음 앞에서 그의 얼굴을 살피고 있었다. 생판 모르는 사람의 관심에 의아하던 것도 잠시, 잇시키는 이 모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기억해냈다. 잇시키와 눈이 마주친 두 여성은 잠시 서로에게 시선을 던지는 것 같더니, 곧 좀 더 가까이 선 쪽이 불쑥 입을 열었다.
"혹시 DJ 아니에요? 저번에 시부야 카멜롯에서 봤는데."
"아, 네. 맞아요. 지난주 말씀하시는 거죠?"
아직은 신인이지만 연차가 쌓이고 공연 경험이 많아지면서 가끔 그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생겼다. 그리고 대부분은 지금처럼 클럽에서 그를 처음 목격한 경우가 대다수였다. 선선한 대답에 나란히 잇시키를 올려다보던 얼굴이 나란히 환해지더니,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시끄럽게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와, 저 그때 공연 엄청 재밌게 봤거든요. 분위기도 장난 아니고 노래도 완전 제 스타일. 그때 이후로 팬 됐어요. 야후에서 검색도 엄청 한 거 있죠. 정보량이 과한 잡담을 듣다 보면 골목 초입에서부터 또 한 명 지친 회사원이 뛰어오기라도 한 듯 휘청거리며 튕겨져 나온다.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지라 자연히 눈길이 갔지만 밝은 가로등 불빛 아래서는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유우라면 출발하기 전에 먼저 연락을 줬겠지. 호의적인 미소를 띤 채 곁눈질로만 흘끗 내려다본 핸드폰 화면은 아직 잠잠하다.
그리고 그 앞으로 또 하나의 핸드폰이 슬쩍 들이밀어졌다.
"번호 주시면 안 돼요?"
잇시키는 네모난 화면을 잠시 내려다본다. 그에게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은 사실 겉으로 보이는 잇시키와 비슷한 타입이다. 공간을 침범하고 내어주는 데에 스스럼 없는 사람들. 누군가에게는 가벼운 일이라는 걸 모르는 건 아니지만 잇시키에게 있어 사적인 공간을 내어준다는 건 좀 더 무게가 있는 일이었다. 짧은 정적 끝에 잇시키는 곤란한 웃음을 지으며 제 뒷덜미를 쓸어내렸다.
"번호는 조금 어려운데. 다른 걸로는 안 될까요?"
거절이야 대수롭지 않은 일인데다, 그녀 자신의 말대로 잇시키의 팬이라면 어느 정도는 예상하였을 테다. 아니나 다를까 조금 아쉬운 표정을 짓던 여자는 금세 아무렇지 않게 숄더백을 뒤적거리며 발랄한 목소리로 재잘댔다.
"그럼 사인해주세요. 아, 지금 종이가 이것밖에 없는데. 여기다가."
이젠 그렇게 어렵지 않은 일이다. 호의가 넘쳐나는 사람을 대하는 것도, 쾌활하게 웃는 것도. 펜을 받아 몇 번 딸깍거리던 잇시키는 몸을 숙여 손바닥만 한 종이에 사인을 휘갈겼다. 미나미에게라고도 적어주세요. 와, 고마워요, 응원해요, 다음 공연도 파이팅… 의례적으로 이어지는 인사를 끝내고 짐짓 주먹까지 쥐어 보이며 멀어지는 팬에게 손을 흔든 잇시키는 문득 시선을 끌었던 인기척이 아직도 지나가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너무 소란을 피웠나. 고개를 돌려 그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게 아니면.
도심에서부터 떨어져 나온 소음이 다시금 옅어져 가면 비로소 그가 가까이 다가온다. 그리고 은은하게 퍼져나가는 가로등 불빛의 경계로 그가 들어올 때 잇시키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새하얀 불빛 아래 흐릿하던 윤곽이 차츰 또렷해진다. 희미해서 금세 묻히고, 그래서 더욱 익숙한 인기척이.
"유우?"
"유우 형."
이름이 불리자 호노카가 어정쩡한 자세로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한 차례 숨을 들이킨 그가 제 뒤통수를 괜히 긁적였다.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아서… 방해될까 봐. 기다렸어요."
"아냐, 데리러 온 건데 어떻게 유우가 방해가 돼."
왜 안 불렀어, 혀끝까지 차오른 의문을 삼킨 잇시키는 호노카의 팔을 잡아 품으로 가깝게 당겼다. 발을 끌며 다가온 호노카의 손에서 가방을 뺏어 들며 타이르듯 말을 이었다.
"그냥 부르지 그랬어. 아니면 오기 전에 문자라도 하지."
"막 나왔는데 형 차가 안 보여서, 전화하려고 했는데 바로 문자가 와서요. 답장하는 것보다 그냥 빨리 오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그래서……."
그의 호흡이 어쩐지 조금 빨랐다. 흐트러진 앞머리가 이마에 붙어있는 것을 보니 어쩐지 가슴이 따끔거렸다. 잇시키의 손이 머리에 닿자 변명처럼 이야기를 늘어놓던 호노카가 입을 다물었다. 괜찮아. 미안해. 차분한 잇시키의 목소리가 온점을 찍고, 호노카는 한참 그의 손길을 받으며 잇시키가 바라는 대로 피로한 목소리를 쥐어짜내는 대신 침묵을 지켰다. 헝클어진 머리를 넘겨주는 손 안에 차갑게 식은 이마가 닿았다. 그 아래 흐릿한 눈은 눈부신 가로등 불빛에 물기가 어린 채, 미처 하지 못한 말이 새어 나오지 않도록 애쓰고 있는 듯했다.
*
"오늘은 어땠어?"
"응, 뭐 평소랑 다를 거 없었어요."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없었다는 뜻이다. 호노카가 작게 하품하며 대답하고선 자리에서 뒤척거렸다. 이 시간이면 피로에 찌들어 연신 하품을 해대다 중간부터는 꾸벅꾸벅 조는 게 호노카의 패턴이었다.
그나마 퇴근 시간을 넘긴 게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대로를 메우고 있던 차들은 이제 제법 물이 빠져 도로 한복판에서 지체될 일은 없었다. 일정한 간격으로 놓인 가로등이 규칙적으로 시야를 스쳐 지나갔다. 능숙하게 액셀을 밟으며 잇시키가 한숨을 내쉬듯 입을 열었다.
"그러게. 색다른 일이라도 좀 있었으면 좋았을걸."
"조기퇴근… 뭐 그런 거요?"
"그렇지. 집에서 기다리는 사람 있다고 해. 유우 없으면 외로움 타서 큰일 난다고."
"그럴까요? 그럼 진짜 정시에는 보내줄지도……."
웅얼거리며 슬그머니 웃던 호노카가 곧 어깨를 으쓱이며 등받이에 좀 더 깊게 기댔다. 호노카의 몸 위에 덮인 잇시키의 겉옷이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냈다.
"뭐, 그래도 연말이니까… 바쁜 건 어쩔 수 없죠. 말일에는 일찍 퇴근시켜줄 걸요. 아마도."
"안 그러면 신고할 거야. 유우 동거인 외로워서 죽었다고. 나 의심 중인 거 알지?"
"큰일이네… 유우 형 죽으면 저도 외로워서 안 되는데."
능청스럽게 중얼거리던 목소리가 멎었다. 한 번 더 크게 뒤척인 호노카가 입술을 달싹이다 반 박자 늦게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방금 그 사람들… 아는 사람들이에요?"
구태여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그 사람들이 누구를 의미하는지는 알고 있다. 힐끔 호노카를 바라보면 그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응, 그쪽에서만. 저번에 시부야 쪽으로 공연하러 갔었는데 그때 봤나 봐."
"팬이에요?"
"그렇지? 얼굴까지 기억하고 말 거는 사람은 별로 없거든. 번호 달라길래 그건 좀 어려울 것 같다고, 사인으로 대신했지."
한 번 더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옆얼굴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중얼거리는 말투가 어딘가 멍하다.
"그랬구나……."
그 뒤로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기 때문에 한동안은 조용히 엔진이 돌아가는 소리와 차창을 훑고 지나가는 바람 소리만이 사이의 공백을 채웠다. 그 동안 입을 다문 채 짐짓 미간을 좁히고 이 침묵의 의미를 가늠하던 잇시키의 얼굴에 차츰 웃음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신경 썼어?"
"아니요?"
아마 곧장 잇시키에게로 향하다 멈춰선 호노카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거리에서 가로등 불빛 아래 잇시키가 뭘 하고 있는지 전부 목격했을 것이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얼굴에 다 쓰여 있는데."
"……."
"어떡하지. 다른 사람이랑 이야기하는 것도 다 허락 받아야 하나."
"저 그렇게 하나하나 통제하는 타입은 아니거든요……."
"그래? 난 좀 더 집착해줬으면 좋겠는데."
표지판을 곁눈질하는 와중에도 흥얼거리듯 혼잣말하자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돌아왔다.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받아치며 고개를 살짝 돌리면 눈이 마주쳤다. 호노카 특유의 순한 눈동자가 잇시키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시선을 돌려버렸다.
"…취소예요. 형은 오늘 집 가서 숟가락 쓰는 것도 허락 받아요."
볼멘소리에 잇시키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누가 들어도 귀엽게만 보는 웃음이라 호노카의 입술이 완전히 튀어나왔다. 아까보다도 한결 가벼운 마음이 되어 핸들에 쥔 손끝을 까딱이던 잇시키는 그제야 한결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미안해, 기다리게 한 거. 못 알아본 것도."
그러자 반쯤 등을 돌리고 있던 호노카가 고개만 살짝 돌려 잇시키를 힐끔 바라보았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호노카는 잇시키에게 살짝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괜찮다는 것처럼. 어딘가 어설픈 그 웃음이 깊게 묻어두었던 기시감을 불러일으킨다.
"괜찮아요. 기다린 건 제가 아니라 유우 형이잖아요. 또… 귀찮았을 텐데 데리러 와줬으니까."
귀찮지 않은데, 그렇게 말하려던 잇시키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 지금의 호노카는 잇시키의 앞에서는 도무지 무언가 숨길 줄 모르는 사람이지만 분명 그렇지 않았던 때도 있었다. 서로가 유우가 아니라 잇시키와 호노카였을 시절에. 그 시절에 불온전한 매듭을 지었던 졸업식 날의 하늘도 딱 이런 잿빛이었다.
갓 성년이 된 고등학생들의 설렘과 아쉬움이 뒤섞여 시끌벅적한 자리에 잇시키 유토는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졸업식 날 누구와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 알지 못했고, 데려다주겠다던 호노카가 왜 그렇게 대문 주변을 빙빙 돌았는지도 그 때는 제대로 알지 못했다. 비단 그것만이 아니었다. 고집스럽게 몸집을 늘려가던 구름이 결국 참았다 토해내듯 눈송이를 뿌리기 시작할 때 왜 그렇게 가슴이 달음박질했는지. 그리고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 함께 걸어온 길을 되짚던 걸음이 왜 첫 번째 갈림길로조차 나아가지 못했는지.
그 때 호노카는 잇시키의 생각대로 멀리 가지 못하고 직전의 골목길에 멈춰 서 있었다. 겨울의 가로등은 여름보다 조금 더 이르게 켜지고, 어슴푸레한 저녁 하늘 아래 다급한 발소리조차 듣지 못하고 멍하니 눈발이 날리는 걸 바라보던 호노카의 눈은 창백한 빛이 비쳐서, 어쩐지 꼭 눈물을 참고 있는 것처럼 보였었다.
"귀찮긴. 그리고 날도 추운데 어떻게 늦은 밤에 혼자 집에 오라 그래. 데리러 와야지."
잇시키는 평소처럼 너스레를 떨며 정면에 시선을 고정했다. 뒤이어 농담처럼 던진 질문에는 사실 잇시키의 본심이 녹아 들어 있다. 정말…….
"유우는 나 없으면 어떻게 할래?"
"그런 소리 하지 마요……."
알면서. 대번 눈이 가늘어져 불퉁하게 중얼거리는 유우의 얼굴은 평소와 다르지 않다. 여전히 토라진 것 같은 모습이지만 그가 사실 잇시키에게는 늘 순순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유우가 아닌, 아직 젖살이 채 빠지지 않았던 시절의 호노카는 아니었다. 유순한 얼굴은 거짓말을 할 줄 몰라 분명 눈물이 고여 있었지만, 잇시키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지 지금까지도 헤아리기 어려웠다. 무심코 차창에 기댄 호노카에게 그 모습을 겹쳐 보는데, 그 순간 호노카가 돌연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형, 출구."
"뭐?"
급하게 눈을 들자 고속도로의 출구를 가리키는 표지판이 몇 미터 되지도 않는 거리에 서 있었다. 아차 싶었지만 핸들을 꺾기에는 너무 늦었다. 순식간에 사이드미러 안에서 깨알만 한 크기로 작아져 가는 출구를 보며 허탈한 표정을 짓는 잇시키를 보던 호노카가 숨죽여 웃었다. 별로 놀라지 않은 눈치라 입을 벌리고 있던 잇시키는 자기도 모르게 불평하는 목소리를 냈다.
"왜 말 안 해줬어?"
"저도 몰랐죠. 형이 자꾸 놀리니까."
잇시키로선 보기 드문 실수였다. 그게 그렇게나 재밌는지 가늘게 이어지는 웃음을 거두지 않던 호노카가 목소리를 가다듬고 넌지시 말을 건넸다.
"그러지 말고 드라이브 하는 셈 쳐요. 한동안 안 했으니까."
형이랑 드라이브 하는 거 좋아요. 수줍은 듯한 목소리가 귀여우면서도 동시에 잇시키의 예민해진 노파심을 긁어 일으켰다. 저 출구를 지났으니까 앞으로 한참을 더 지나야 고속도로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 텐데. 유우, 너 내일도 출근하잖아. 피곤하진 않겠어? 왜 네가 귀찮을 거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사실 나오기 전에도 집에서 저녁거리를 준비하고 있었거든. 도착하자마자 따뜻한 밥을 먹이고 싶어서. 들어가면 저녁 시간은 한참 지나있을 텐데…….
그리고 그 모든 말을 삼킨 채 잇시키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날숨과 함께 웃음을 흘리며 핸들을 만지작거렸다.
"그래, 그러자."
곁눈질한 호노카의 얼굴이 환해져 있었기 때문에 잇시키는 안도했다. 그리고 자신이 무의식 중 그를 많이 걱정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달빛이 번져 희뿌연 하늘에서는 여전히 눈이 내리지 않고, 다시 눈 소식이 찾아오기까지는 조금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때 잇시키는 호노카에게 끝내 어떤 말도 하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그를 놓아두게 됐지만, 이번에는 그런 얼굴을 한 유우를 다시 내버려 둘 생각은 없었다. 그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라도.
*
그나저나 형 완전 스타 다 됐네요. 인기쟁이, 길거리에서 알아보는 사람도 있고. 아냐, 원래 공연 같은 곳 아니면 만날 일이 없는데 오늘은 우연이 좀 겹친 거지. 그래도 유우가 띄워주니까 기분 좋다. …그런데 유우, 나한테는 비밀 같은 거 안 만들면 안 돼? 네? 저 형한테 비밀 같은 거 없어요. 알잖아요, 저는 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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