シブヤ•メルトダウン
A타입, 1차 / 6,147자
초년의 활기로 시끌벅적하던 주점, 일면식 없던 호노카의 술잔은 빌 틈이 없었고 그는 주량을 제대로 조절하지 못했다. 조금 취했나. 시야는 노랗고 따뜻한 전등의 불빛을 따라 아른거리고 눈꺼풀은 무거워지기만 했다. 그러나 대학에 와서 첫 모임인 만큼 술에 취해 실수하는 일은 피하고 싶었다.
화장실을 가겠다며 슬그머니 일어섰다. 일렬로 앉아있는 사람들 사이를 게걸음으로 비집다 비틀거려서 사람들의 걱정을 사기도 했다. 그렇게 주점의 소란함에서부터 간신히 빠져나와 바깥 공기를 쐬고 있을 때 누군가 호노카의 어깨를 두드렸다. 고개를 돌려 보면 익숙한 얼굴이 웃으며 그를 반기고 있었다. 호노카는 어지러웠다. 왜 익숙하지. 저긴 온통 처음 보는 사람들뿐이었는데. 그러다 그를 어디서 봤는지 뒤늦게 기억해 냈다. 늘 사람들 사이에 둘러 싸여 있던, 그래서 더 눈에 띄었던 사람. 나와는 많이 다른 사람 같다고 생각 했던 그 선배. 그는 정말로 가까이 있었다.
바람 쐬러 나온 거야? 그렇게 묻는 목소리는 상냥했고, 안경을 쓴 눈매는 얼핏 보기에 둥글어 보였다. 호노카는 조금은 긴장이 풀려 어리숙한 발음으로 그렇다고 답했다. 그러자 잇시키가 눈을 가늘게 접어 웃더니 고갯짓했다.
너무 취하면 안 좋지. 우리 아이스크림이나 하나 먹을래? 술 깰 겸.
그렇게 우연한 만남이 있고, 그게 두 번이 되고 세 번이 되자 호노카는 잇시키가 좋아졌다. 그러나 나중에 동기들에게 들은 바로는 잇시키는 편력이 제법 있다는 모양이었다.
*
야, 저 사람 봐. 완전히 취했다.
비틀거리는 거 봐… 장난 아닌데?
호노카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홱 돌리다 비틀거렸다. 몸을 너무 급하게 돌려서 그런지 머리가 핑 돌았다. 호노카를 보고 수군거리며 떠들던 학생들이 깜짝 놀라더니 황급히 자리를 떴다. 술을 진탕 마신 건 저쪽도 매한가 지인지 도망치는 뒷모습이 어수선했다. 그러니 제 꼴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지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머지않아 시끄러운 상점가의 잡음 중 하나로 희석될 터였다.
그나저나 벌써 새 학기라. 그래서 이렇게 학생들이 많았구나.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보면 여기도 저기도 취한 사람들 뿐이었다. 잊을 법하면 불어오는 초봄의 저녁 바람은 정신이 들기는커녕 취기를 부추기기만 했다. 아직은 고교생에 더 가까운 천진한 웃음소리들이 여기저기서 들려오고……. 호노카도 한 때는 저 무리에 끼어서 소란스레 떠들곤 했지만, 이제는 어느덧 새내기의 설렘과는 거리가 먼 나이가 되어 있었다. 또 그의 1학년 시절 좋은 기억이란 대부분이 한 사람과 닿아 있었던 탓에, 시간이 지나서는 일부러라도 잊어버리려고 했었다.
이렇게 날씨가 좋은 날이면 잇시키의 차로 드라이브를 했다. 정체되는 도시의 도로망을 벗어나면 호노카와 잇시키의 드라이브 스팟이 나타났다. 잇시 키는 그곳이 도로가 한눈에 내려다보여서 좋다고 했다. 완만한 커브 길을 달리다 보면 그의 말대로 도시의 야경이 점점이 별 박힌 밤하늘처럼 보였다. 처음에는 조수석에 앉아 풍경 하나하나를 눈으로 외웠고, 그다음엔 직접 그 길을 달렸다. 핸들을 꽉 쥔 손바닥이 긴장으로 축축해질 때쯤이면 잇시키는 꼭 핸들을 너무 세게 잡지 말라고 한 마디 던지곤 했다. 그리고 반쯤 열린 창문으로 기분 좋게 부는 밤바람, 늘 틀어놓는 음악의 익숙한 멜로디가 뺨을 간지럽히면 차츰 긴장은 풀리고 마음이 편안해졌다. 운전할 때의 사소한 버릇마저 잇시키를 닮아갔다. 잇시키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무사고 운전을 축하하며 머리를 흩뜨릴 때면 자기도 모르게 그와 함께라면 좋은 일만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마지막 드라이브가 언제였더라? 다른 세계의 이야기 같던 이별이 어느덧 두 사람의 눈앞으로 다가왔을 무렵, 불 꺼진 방에 누워 멍하니 헤아려보았던 드라이브는 한 달 전이 마지막이었다.
호노카 그때 신입생이었으니까. 솔직히 쉬워 보였던 거 아니야? 동기들이 위로한답시고 내뱉는 말들을 호노카는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 내심 형은 그런 사람이 아닌데, 순진한 반발심도 들었지만 당장은 그렇게라도 잇시키의 탓을 하지 않으면 우울해서 죽어버릴 것만 같았다. 그러고 보니까 연애도 엄청 많이 했다 그랬지. 근데 진지하게 만난 사람은 별로 없었다나. 그럴 줄 알았어. 무엇보다도 그 길, 정말 예쁘다고 생각했던, 우리 둘만의 추억인 줄 알았던… 그 밤의 드라이브 코스에도 몇 명의 추억이 묻어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다시 생각해도 정말 못됐어. 어떻게 그렇게 기다렸다는 듯이 헤어져. 바람둥이, 카사노바, 이…….
나쁜 자식!
참지 못하고 허공에 소리치자 주변을 스쳐 지나가던 사람 하나가 또 화들짝 놀란 눈으로 호노카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번엔 호노카가 마주보기도 전에 허둥지둥 걸음을 재촉해 그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술에 취해 시비라도 걸어올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래, 마음대로 생각하라지. 이러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니까. 혼자서도 잘 되는 일 투성이일걸. 그리고 나중 가서는, 그때 날 붙잡지 않았다고 후회하게 만들어줄 거야…….
들뜬 취객을 유혹하기 위해 온 점포가 문을 열어놓고 노래를 틀어놓았다. 그러나 호노카는 이제 그런 것에는 좀처럼 마음이 들뜨지 않았다. 어지럽게 뒤섞여 멜로디가 되지 못한 소음 같은 것에 섣부르게 가슴이 뛰던 건 신입생 시절의 이야기였다. 호노카가 바라고 그리워하는 것은, 이를테면 좀 더…….
호노카는 문득 어느 상점 앞에 멈춰 섰다. 양옆의 널찍한 상점과 달리 겨우 한 뼘 정도를 얻어낸 듯 내부 공간이 길쭉한 그 점포 앞에는 간이 테이블이 여러 개 놓여 있었다. 그 위에는 카세트테이프와 시디 케이스가 여럿 올라와 있었다. 이런 것들을 아직도 파는구나. 무엇보다도 호노카가 멈춰 선 것은 스피커에서 익숙한 음악이 흘러나오던 탓이다. 요즘답지 않게 뭉개진 음질과 웅웅 울리는 멜로디가 더 아득한 기분이 들게 했다. 기억을 더듬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박자를 맞추어 흥얼거릴 수 있었다. 정확히 언제 들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저 잇시키와 수없이 지났던 그 도로 위에서 들었다는 것만을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기분 좋았지. 호노카는 취기와 향수에 잠겨 무심코 앞으로 다가갔다. 별생각 없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손끝으로 테이프들을 뒤적거렸다. 그 노래를 찾고 싶었다. 아니면 그때의 기분을 다시 느끼고 싶었나.
이런 거 좋아하세요?
그러다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저 멀리 계산대에 서 있던 상점 주인이 어느샌가 다가와서 호노카를 바라보고 있었다. 멍하니 눈만 끔뻑일 뿐 대답을 않자 잘 못 들었다고 생각했는지 주인이 친절한 목소리로 다시 말을 걸어왔다.
테이프, 관심 있으세요? 아, 아니면 이 노래 때문에 그러시는 건가.
찾아드릴까요? 그러면서 주인이 테이프가 담긴 박스 위에 손을 얹는 순간 갑자기 얼굴이 확 달아오르며 술이 깨는 기분이 들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있는 힘껏 미워하고 있었으면서, 고작 같이 듣던 노래 하나에 이끌려 그 기억을 더듬고 있었다니.
호노카는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를 냈다.
아뇨, 아뇨… 괜찮아요… 죄송합니다.
길거리를 누비던 기세는 어디 가고 발음이 잔뜩 허물어졌다. 정신을 차리려 고개를 저으며 급하게 돌아서던 호노카는 몸으로 테이블을 치고 말았다. 간이 테이블이 휘청거리며 반듯하게 놓여 있던 테이프가 흐트러졌다. 원래라면 다시 돌아서서 정리를 도왔겠지만 지금 당장은 이 상황에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호노카는 주인의 당황한 목소리를 애써 외면했다. 어느덧 많이 쌀쌀해진 바람이 재촉하듯 등을 떠밀었다.
앞뒤 가리지 않고 멀찍이 도망치는 동안 어깨 너머 음악이 차츰 멀어지자 그제야 집으로 가는 길이 보였다. 띄엄띄엄 가로등이 서 있는 좁고 어두운 길. 거리를 헤매던 비슷한 처지의 취객들도 하나둘 사라지고 거리의 소음도 조금은 잦아들어 있었다. 문득 호노카는 혼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 싫었 다. 언제까지고 이 저녁의 분위기에 기대 강한 척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늘 그렇듯 관성대로 걷는 수밖에 없다.
호노카는 재킷을 한껏 여미고 부지런히 걸었다. 그를 한껏 으스대게 해주던 술기운은 어느덧 바람에 많이 희석되어 이제는 저 자신이 조금 우습게 느껴졌다. 골목길은 바람이 더욱 냉랭하게 불어서, 어깨가 움츠러들고 고개가 무거워졌다.
*
열쇠를 들고 계속 열쇠 구멍 근처를 찌르기만 반복하던 호노카는 세 번째 시도에야 간신히 현관문을 열었다. 채도 없는 어둠과 냉기가 호노카를 덮치기 직전 현관의 센서등이 작게 소리를 내며 켜졌다.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노란 불빛에 눈이 부셨다.
한쪽 구두 뒤꿈치를 밀어 벗으려 했다. 그러나 정장 구두는 자꾸 미끄러지기만 할 뿐 제대로 벗겨지지 않았다. 귀찮고 짜증이 났다. 허리 굽히기 싫은 데. 일단은 신발장에 비스듬히 기대어 선 채 연락을 보내려 휴대전화를 꺼내던 호노카는 문득 멈췄다. 내가 집에 무사히 도착했다는 걸 궁금해하는 사람이 누가 있지? 이제는 아무도 없지 않아? 그리고 호노카를 기다리는 사람도, 호노카가 기다려야 할 사람도 없었다. 참을성 없는 센서등이 툭 꺼졌다. 동시에 꼭 바람이라도 분 것처럼 몸이 오소소 떨렸다. 그러나 호노카는 오기가 생긴 듯 휴대전화를 마저 꺼내 화면을 열었다.
잇시키의 연락처는 주소록에도 라인에도 남아있지 않지만 잊어버릴 일은 평생 없었다. 기억이 흐릿해도 손이 기억하고 있었다. 눈을 잔뜩 찌푸린 채 한 자 한 자 신중하게 키패드를 두드리면 이윽고 한 줄의 익숙한 번호가 완성되어 눈앞에 나타났다. 심장이 뛰었다.
얼마나 취했는지 손이 제 것 같지 않았다. 그렇지만 최대한 침착하게. 안 취한 것처럼. 뭐라고 해야 할까. 자요? 이건 너무 취해서 전 애인한테 연락하는 것 같잖아. 잘 지내요? 안 돼, 이건 나 미련 있어요 광고하는 꼴이야. 날이 춥네, 이건 수작 부리는 것 같고. 그렇지만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되면 도대체 뭐라고 연락해야 해. 물론 연락하지 않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걸 떠올리기에 호노카는 너무 춥고, 외롭고, 잇시키가 보고 싶었다. 현관에 들어서면 그와의 메신저 창을 켜는 게 자연스러웠던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었다.
호노카는 차가운 철문에 등을 딱 붙인 채 눈을 끔뻑이며 자판을 두드렸다.
춥네요
호노카는 몇 글자 안 되는 그 문장을 전부 지웠다. 그리고 오타 가득한 문장을 다시 적기 시작했다.
저기, 진짜 내 생각 하나도 안 했어요? 나는 진짜 엄청 엄청 많이 했는데 선배는 그렇게 헤어지고서 말 한마디 없고 정말이지 그렇게 안 봤는데 심하네요!
그리고 백스페이스를 꾹 눌러 한 번 더 전부 지웠다. 이번에는 차근차근히, 심호흡하고.
졸업 축하해요
이건 너무 늦었나. 호노카는 한참 눈을 감고 있다가 찌푸리듯 눈꺼풀을 들었다. 추위와 취기에 얼어붙은 엄지가 아주 느리게 움직였다.
합격 축하해요
아, 모르겠어. 선배가 졸업한 게 언제였지. 올해가 아니라 작년이었나?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호노카는 짜증스럽게 머리를 헤치다 현관문을 따라 주르륵 주저앉았다. 술에 절인 몸이 곤두박질친 것처럼 흔들렸다. 호노카는 핸드폰을 손에 꽉 쥔 채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고 보니 올해 합격한 건 잇시키가 아니라 호노카였다. 호노카는 잇시키의 졸업식에도 임명식에도 가지 않았다. 그때 그에게 전하지 못했던 말이 앙금이 되어 줄곧 안에 고여 있었다. 실은 그때, 가장 앞에서 축하해주고 싶었어. 그리고 오늘 선배한테 축하 받고 싶었어. 함께 힘냈다고, 이제 쭉 함께라고…….
*
곧잘 꾸는 꿈이 있었다. 같은 침대에서 눈을 뜨고 함께 아침밥을 먹는, 평소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꿈. 하지만 호노카는 꿈속의 두 사람이 한참 시간이 지난 후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 꿈은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가서도 함께 사는 꿈이었다. 그게 너무, 혼자 들뜬 어린애가 되는 기분이라서, 잇시키의 앞에서는 한 번도 이야기한 적 없었다. 그러나 헤어지고 나서는 오히려 그게 옳은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야 그런 거 말했다가는 정말 우스운 꼴이 됐을 거 아냐. 바보처럼 혼자 좋아하고, 혼자 차버리고, 이제는 혼자 그리워하는…….
고장 난 센서등처럼 눈앞이 깜빡거렸다. 일어나야 하는데. 바닥과 문에 닿은 곳이 얼어붙을 것처럼 차가웠다. 그러나 이미 기력을 다 쓴 몸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고, 부동자세로 한참을 스스로와 씨름하던 호노카는 어느 순간 몸을 짓누르는 무기력함에 굴복하고 말았다. 짧은 한숨을 마지막으로 의식이 수마에 완전히 잡아먹혔다.
그리고 현관의 불이 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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