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라노바의 밤

555타입, 1차 / 5,733자

SAL by S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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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 섹스, 권총. 자기는 물질적인 것 앞에서 좀 더 솔직해지지. 감정적인 것 앞에서는 스스로를 감추고. 돈으로도 살 수 없는 네 솔직한 마음을 어떻게 해야 얻을 수 있을까? ¹⁾

*

비행기가 출발하기 전까지 시간이 좀 남았기 때문에 샤샤와 젠킨슨은 면세점에 방문했다. 비행 전에는 주로 라운지에서 시간을 보내는 편이었다. 면세점에 직접 들르는 건 오랜만이었다. 젠킨슨은 시계를 바꾸고 싶다고 했다. 휴일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선물해 줄까, 물었지만 그는 여느 때처럼 직접 고르는 편이 더 즐거운 듯했다. 태그호이어 정도면 좋겠는데. 라운지를 나서며 중얼거리는 젠킨슨의 목소리는 마치 저녁 메뉴를 고민하는 것처럼 가벼웠고 샤샤의 걸음 또한 그랬다. 그럴까, 날숨처럼 흘리며 젠킨슨의 허리에 팔을 걸치자 젠킨슨이 얼굴을 조금 찌푸렸다. 그가 손등으로 팔을 탁 쳐냈다. 보는 눈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가라는 말 한마디에 주눅이 드는 사람이라면 재키의 애인이 될 수 없다. 다시 한번 팔을 두르고 몸을 붙이면 그는 눈을 흘기면서도 굳이 밀어내지 않는다. 아무리 냉혈한이라도 오랫동안 몸을 붙이고 있으면 맞닿은 부분부터 따뜻해진다. 그래서 샤샤는 젠킨슨과 오래 붙어 있는 게 좋았다. 그도 아마 그럴 것이다.

주먹 반만 한 조명이 쉼 없이 빛나는 장식장, 젠킨슨은 뜨겁게 달궈진 유리 상자 속에서 장신구들을 꺼내주고 싶어 했다. 마치 제 몸이 명품관의 마네킹이라도 되는 것처럼 끊임없이 값비싼 것을 걸치고 싶어 했다. 젠킨슨이 질리지도 않고 명품을 사 모으는 게 귀엽게 느껴지면서도 가끔은 순수하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사주고 싶은데. 그 정도는 나한테 허락해 줘도 되잖아? 샤샤는 무언가를 갈망할 때 성급해본 적이 없었다.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그리고 이제는 젠킨슨도 마찬가지다. 샤샤의 배우자가 된 이상 세련되고 값비싼 모든 것들은 굳이 시간을 내지 않아도 언제 어디서든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런데도...

어쨌든 집은 넓었다. 젠킨슨이 갖고 싶은 것을 직접 갖지 말아야 할 이유는 없었다. 명품이 아니더라도 샤샤가 젠킨슨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차고 넘치고.

이건 저번에 산 거랑 손목 줄 넓이가 비슷한데. 지난번에는 불편하다고 했잖아. 젠킨슨이 유심히 보고 있는 시계를 흘끗 곁눈질한 샤샤가 넌지시 말을 건넸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진열장에서 반사된 빛을 받아 희끄무레한 그의 옆얼굴을 바라보던 샤샤는 괜히 입맛을 다셨다. 안중에도 없나 보네. 거기다 굳이 반짝이는 것에 눈이 팔리지 않아도 젠킨슨은 걸핏하면 샤샤의 말을 한 귀로 흘려보내곤 했던 것이다. 그동안 두 손을 공손히 모은 채 무례하지 않으려 애쓰며 샤샤와 젠킨슨을 훔쳐보던 직원이 구둣발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괜찮으시면 잠깐 앉아계실 수 있도록 안내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렇게 용기 낸 목소리는 가엾게도 말꼬리가 파르르 떨렸고... 눈을 내리뜨고 직원을 바라보던 샤샤는 입꼬리를 매끄럽게 올렸다.

글쎄, 재키는 내가 여기 있는 게 더 좋을걸.

그제야 젠킨슨은 샤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마음이 든 모양이었다. 그가 번쩍 고개를 들어 샤샤를 바라보았다. 늘 서늘한 눈동자가 오늘은 조금 온도를 띠고 있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직전의 발언 때문은 아닐 것이고. 시계가 어지간히 마음에 든 모양이지. 장난스럽게 웃으려는 제 입매를 억누르며 체면치레하듯 부드러운 미소를 띤 샤샤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렇지?

눈을 깜빡이던 젠킨슨은 곧 사뭇 진지한 표정이 되어 조금 전의 말을 곱씹어보다가, 얼굴을 찌푸리고 날카롭게 내뱉었다.

닥치고 있어.

이번 대답은 제법 온순한걸. 어쨌든 가라는 소리는 안 했으니까. 샤샤는 어깨를 으쓱였다. 직원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한 눈치였다. 그녀의 잘못은 없었다. 문제라면 재키가 지나치게 까탈스럽다는 거겠지. 그게 재키의 매력이지만. 이제 샤샤는 젠킨슨의 지한 고민에 동참하듯 나란히 서서 턱을 매만지며 슬그머니 그의 어깨 위에 팔을 둔다. 젠킨슨은 좀 전처럼 퉁명스러운 소리를 하는 대신 샤샤가 제 자리에 있을 수 있도록 두었다.

*

이탈리아 밀라노의 어느 테라스가 딸린 카페에서 샤샤와 젠킨슨은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샤샤는 에스프레소 콘파냐를, 젠킨슨은 카페 프레도를 주문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마시고 싶은데. 잔을 입가로 가져가며 중얼거리는 젠킨슨에게 샤샤는 선글라스 너머로 눈짓했다. —여기는 이탈리아잖아, 재키. 젠킨슨은 별말을 하지 않았지만 눈을 굴리는 모습을 보아하니 어쩌라고, 그렇게 대답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렇게 대답하지 않은 이유는 기분이 썩 나쁘지 않기 때문이었을까.

젠킨슨은 테이블에 손을 올려놓고 있었다. 그의 창백하고 뼈가 두드러진 손목을 넓은 시곗줄이 가리고 있었다. 그는 그게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는데, 샤샤는 썩 좋지도 싫지도 않았다. 재키의 안목은 뛰어난 편이라서 그가 고르는 장신구가 졸작이었던 적은 없었다. 다만 가리기엔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서. 젠킨슨이 팔을 움직일 때, 소매가 당겨질 때 슬며시 드러나는 손목을 저만의 광경이라 여기고 좋아하던 탓이다.

초가을 오후의 햇빛이 아직은 뜨거워 젠킨슨은 짜증을 냈지만 들어가자는 말에는 손을 내저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차양의 그늘이 두 사람의 테이블에까지 다다르면 샤샤도 무의식중 숨을 돌리게 됐다. 휴, 하는 소리와 함께 머리를 한 차례 쓸어 넘기고 있으면 젠킨슨이 불쑥 입을 열었다.

벗지 그래.

선글라스를 말하는 것이었다. 갈기처럼 나풀거리는 머리를 정돈하던 샤샤는 선글라스를 살짝 내리고 젠킨슨과 맨눈을 마주쳤다. 젠킨슨이 방금보다 선명하고 채도 높은 모습으로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벗으면 너무 눈길을 끌 것 같은데.

뭐 어때, 아는 사람도 없는데. 그리고 네가 눈길을 끄는 건 선글라스 때문이 아니야.

흐음… 칭찬 맞지? 어째 묘하게 들리네.

딱히 나쁜 뜻도 아니었겠지만. 샤샤가 괜히 투덜거리거나 말거나 무감정한 표정으로 샤샤의 얼굴을 뜯어보던 젠킨슨이 문득 피식 웃었다.

일부러 그래? 멍청하게 보이려고?

왜?

젠킨슨이 입꼬리를 비뚜름하게 올린 채 제 입가를 손으로 톡톡 두드렸다. 샤샤는 휴대폰을 들어 검은 액정에 비친 제 얼굴을 확인했다. 확실히 재키의 말대로였다. 코에 느슨하게 걸친 큼직한 선글라스에다 흰 수염마냥 윗입술에 묻은 크림까지. 조금 바보 같아 보이나. 하지만 이탈리아에 와서 콘파냐를 먹지 않는 건 대단한 손해였다. 아무렇지 않게 핥아먹을까 하던 샤샤는 젠킨슨에게로 고개를 휙 돌렸다.

닦아줘.

뭐?

닦아주라, 재키.

내가 왜? 손이 없어 발이 없어. 네 앞의 그 냅킨은…….

샤샤는 냅킨을 구겨서 주머니에 쑤셔 넣어버렸다. 말문이 막혀 입을 벌린 채 샤샤를 바라보던 젠킨슨의 미간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그가 큰소리를 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눈을 가늘게 뜬 채 입을 벙긋거리던 젠킨슨은 욕설 대신 땅이 꺼져라 깊은 한숨을 내쉬고선—물론 그 숨소리 아래 나지막한 욕설이 섞여 있었던 건 못 들은 체했다—안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주둥이 대.

주둥이라니, 남자 친구한테…….

입 닥쳐.

그가 손수건을 든 손으로 샤샤의 입을 때렸다. 샤샤는 목을 쭉 뺀 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다물었다. 그 모습이 퍽 만족스러웠는지 젠킨슨의 표정이 한결 유순해졌다. 건성으로 입가를 두드려 닦은 젠킨슨은 충분하다고 느꼈는지 손수건을 대충 접어놓고는 다시 손을 뻗었다. 벗다 만 선글라스를 직접 벗겨주는 손길이 아까보다는 섬세했다. 가까워진 젠킨슨의 얼굴을 빤히 마주 보며 샤샤는 채 닦이지 않은 제 윗입술을 슬쩍 핥아 먹었다. 달고 씁쓸한 맛이 동시에 났다. 젠킨슨의 시선이 찰나 샤샤에게 머물렀으나… 그는 금세 아닌 척 눈을 돌려 버렸다. 선글라스를 접어 내려놓는 손길이 살짝 거칠어진 것 같았다. 조금 더 애교를 부려 볼까. 길지 않은 고민 끝에 샤샤는 젠킨슨의 관심을 끌기 위해 어리광을 부리는 대신 다른 방법을 택했다.

나도 너랑 같이 시계를 하나 살 걸 그랬나 봐.

굳이 그런 데에서? 차라리 룸에서 몇 개 뽑아다 달라고 하는 편이 낫지.

하지만 코웃음을 치며 그렇게 말하는 그야말로 굳이 발품을 팔아 시계를 차고 나오지 않았던가. 샤샤는 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을 숨기지 않았다.

기왕 똑같은 걸로 장만할 거면 그 자리에서 같이 사는 게 편하잖아.

잠깐의 침묵.

…오늘은 징그럽게 굴기로 작정한 거냐?

하루 이틀 일도 아닌데 왜 모른 체를 하실까.

재키, 말미에 달짝지근한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며 샤샤는 다리를 슬그머니 밀었다. 발끝으로 젠킨슨의 구두 끝을 건드리자 그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좋아하는 건지 싫어하는 건지… 또 알 수 없는 얼굴… 그렇게 생각할 때쯤 덜컹 소리가 났다. 상황을 파악할 새도 없이 젠킨슨이 샤샤의 정강이를 퍽 걷어찼다. 아야! 앓는 소리를 내며 샤샤는 테이블 위로 몸을 숙였다. 아무래도 조금 전의 덜컹거리는 소리는 젠킨슨이 의자를 뒤로 빼는 소리였던 모양이다. 눈을 질끈 감고 아픈 척 엄살을 부리다가도 흘러나오는 웃음을 삼키지 않자 젠킨슨은 질린 표정을 지었다. 혀를 차며 한 번 더 잔을 집으려는 젠킨슨의 손목을 샤샤가 잡아끌었다.

재키, 그러지 말고…….

시곗바늘이 이제 막 오후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손목을 놓아주는 대신 그대로 겹쳐 잡으며 웃으면 젠킨슨의 얼굴이 조금 풀어졌다. 젠킨슨은 제 좋을 대로 마음껏 짜증을 부리다가도 샤샤의 애정 공세가 이어지면 무심코 그 경계를 느슨히 할 때가 있었다. 이번에는 자신도 그 변화를 자각했는지 그가 괜히 눈을 흘겼다. 샤샤의 생각을 영 모르겠다는 눈치였다. 목소리를 가다듬은 샤샤가 말을 이으며 그의 손등을 살살 어루만졌다. 테이블 위에서 이루어지는 가벼운 스킨쉽을 젠킨슨은 굳이 떨쳐내지 않는다.

이 근처가 몬테나폴레오네잖아.

가자고?

응. 선물해 줄게. 기념으로.

무슨 기념?

몰라. 새 시계를 산 기념?

하여간 김새는 소리는…….

뾰족하게 내뱉으면서도 싫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말꼬리를 흐리며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하려는 틈을 놓치지 않고 샤샤는 한 마디 잽싸게 덧붙인다.

내 시계도 골라줄 거지?

실은 굳이 똑같은 게 아니어도 젠킨슨이 골라주는 거면 뭐든 괜찮았다. 제 손을 탄 것을 젠킨슨에게 선물하고 싶은 만큼 그의 손이 탄 걸 갖고 싶었으니까.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맞잡은 손을 내려다보며 말없이 고민하던 그가 곧 입을 열었다.

봐서.

볼멘소리도 다정한 소리도 아닌 그 대답에 샤샤는 흡족함을 느꼈다. 일부러 그를 시험하듯 손아귀에 조금 더 힘을 주어 봐도 젠킨슨은 얌전했다.

*

불가리, 몽클레어, 프라다. 이름 하나로 정의와 설명을 함께 할 수 있는 값비싼 것들. 사치품에 욕심을 느끼는 편은 아니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그 값어치를 드러내기에 그만큼 편리한 도구가 없다. 곁눈질로도 가격을 알아볼 만한 차, 옷과 가방, 온갖 장신구… 그런 것들이 즐비한 거리를 샤샤와 젠킨슨은 함께 걷는다.

샤샤는 젠킨슨을 곁눈질한다. 벨라노바의 이름은 어느 정도의 값을 가질까? 돈으로 환산하고자 한다면 할 수 있겠지만, 글쎄.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 그 이름에 수억의 가격표가 붙는다 해도 젠킨슨의 마음을 사기엔 부족하니까. 하지만 벨라노바는 젠킨슨을 얻을 수 있었다. 황금과 보석, 얼굴이 비쳐 보일 만큼 반지르르한 가죽 따위로는 살 수 없는 것을 샤샤 벨라노바는 살 수 있었다.

한산한 거리였다. 샤샤는 자꾸만 제 옷깃을 스치며 흔들리는 젠킨슨의 손목을 슬며시 그러쥐었다. 이번에 재키는 그 손길을 밀어내지도, 모른 척하거나 괜히 얄궂은 시선을 던지지도 않는다. 다만 그의 손아귀 안에 가만히 손을 맡기고 있다가, 머지않아 샤샤의 손을 약하게나마 맞잡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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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폴 배럿, 글록,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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