真夏メモリアル
進むための「物語」


밤의 숲은 고요했다. 어슴푸레한 달빛 아래 만물이 흐릿해지고, 들려오는 것은 산벌레 우는 소리와 옆에 누워 잠든 동료의 숨소리뿐이다. 제 터럭처럼 검은 하늘을 내내 뜬눈으로 올려다보던 코우마루가 고개를 돌렸다. 대낮의 구름처럼 새햐얗던 형제의 털과 살갗은 곳곳이 너저분한 검댕으로 얼룩져 있었다. 아직도 코에 탄내가 감도는 것만 같아 코우마루는 인상을 찌푸린다. 세상 모르고 잠든 듯하면서도 이따금 악몽을 꾸는 듯 앓는 소리를 내는 동료를 가만 보던 그가 다시 하늘로 시선을 옮긴다. 눈동자에 냉기가 감돈다. 그대로 한참 사색에 잠겨 있다가 이윽고 부스럭거리며 몸을 일으키자 곁에서 나른한 목소리가 울린다.
“코우마루…?”
고개를 내리니 잠에서 깬 하얀 코마이누가 눈을 비비며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디 가려고요? 이런 밤중에….”
말갛지만 아직 졸음이 가시지 않은 눈동자를 잠시 마주보다 간단하게 답한다.
“그냥, 어디 좀 다녀오려고.”
그렇게만 말하자 레이마루는 조금 불안한 얼굴이 된다. 혼자 있고 싶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하루아침에 거처가 전소해 단둘이서 길바닥에 나앉게 됐으니 무리도 아니다. 그러나 나서서 가로막지는 않는다. 기껏해야 손끝으로 옷깃을 살짝 쥔 정도다. 이 녀석은 착한 아이니까. 생떼 같은 건 쓰지 않지. 바보 같을 정도로 반듯하니까. 그러니까, 두고 갈 수밖에 없다. 잠깐의 침묵 끝에 코우마루가 고개를 돌린다. 상대의 눈을 보지 않은 채로 말을 잇는다.
“선물 사 올 테니까, 그런 표정 짓지 마.”
“선물?”
“그래. 갖고 싶은 거 있어?”
“당고….”
“질리지도 않냐.”
“질리지는 않지만요….”
그대로 곰곰이 생각에 잠긴다. 평소 같으면 참지 못하고 재촉했을 코우마루는 오늘따라 말이 없다.
“그럼, 그러면요….”
종알종알 이어진 대화 끝에 코우마루가 선뜻 끄덕인다.
“그래, 구해다 줄게.”
“엇…? …고맙습니다….”
불평불만이 돌아오지 않는다. 좀 더 툴툴거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레이마루의 얼굴에 의아함이 서린다. 그러거나 말거나 자리를 털고 일어난 코우마루는 그를 등지고 걷기 시작한다.
“따라오지 마라. 혼자 갔다 올 거니까.”
그렇게 말하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손을 흔든 코우마루는 한밤중의 산길 속으로 사라져갔다. 그것이 레이마루가 본 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중요한 이야기를 하게 해 주세요.”
“모리모리….”
진지한 얼굴로 정좌한 타카모리를 보며 츠쿠지는 난처하다는 듯 입을 연다.
“무슨 중요한 얘기를 나 밥 볶을 때 해….”
“앗.”
비장하던 낯이 금세 당황으로 물든다. 나름대로 분위기를 잡아 봤지만 어딘가 엉성한 모습에 츠쿠지는 작게 웃음을 흘린다. 타카모리다웠다.
여름의 햇살이 창을 타고 들어오는 이곳은 둘에게 익숙한 절, 대조사다. 주말을 맞아 타카모리는 오늘도 여기에 놀러 왔고, 온 김에 식사를 대접하겠다는 말에 츠쿠지 특제 볶음밥을 기다리던 중이었다.
“죄송해요, 마음이 급했다고 할까…타이밍이 안 좋았네요.”
“아니, 사실 상관은 없지만…중요한 얘기라면 나도 집중할 수 있을 때 듣고 싶으니까.”
다 돼 가니까 조금만 기다려 달라는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다. 평소 얼핏 가벼워 보이던 츠쿠지는 이럴 땐 제대로 상대에 대한 배려를 갖추고 있었다. 타카모리는 제 진심을 무시하지 않고 진중하게 마주해 주려는 그의 모습이 무척 믿음직하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때로는 속절없이 두근거리기도 했다. 바쁘게 움직이는 동그란 뒷머리를 멍하니 바라보던 그가 퍼뜩 정신을 차린다. 상대가 진지하게 들어 주려고 하는데 이런 사심 섞인 생각이나 하는 건 온당치 못하다. 작게 고개를 휘저어 상념을 떨쳐냈다. 붉어진 얼굴을 츠쿠지가 보지 못한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릇에 담겨 나온 먹음직스러운 식사에 눈을 빛내며 감사 인사를 한다. 숟가락을 입으로 가져가며 작게 미소 짓는 타카모리를 조금 뿌듯하다는 듯이 보던 츠쿠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래서…중요한 얘기라는 건?”
먹느라 바빠 잠시 잊고 있었던 타카모리가 멈칫했다. 입안에 있던 것을 씹어 삼키고는 자세를 가다듬고 말한다.
“타카모리, 한 달치 월급을 털어서 신비한 책을 샀는데요.”
“사기당한 거 아냐?!”
“…사…기?”
인간의 말을 처음 배운 몬스터 같은 대답이다. 얼떨떨하게 굳은 얼굴 안에서 눈동자만이 당황한 듯 흔들린다. 생각도 못 했다는 듯한 반응이다. 저보다 더 동요하는 모습을 보고 상대적으로 마음을 가라앉힌 츠쿠지가 우선 자세한 설명을 부탁하자, 타카모리는 기억을 더듬으며 천천히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며칠 전에…타카모리가 아르바이트를 하는 가게가, 사장님의 급한 사정으로 갑자기 하루 쉬게 된 적이 있었는데요.”
예기치 못하게 남는 시간이 생긴 타카모리는 평일 오후의 한적한 공원에서 비둘기를 쳐다보며 멍하니 햇빛을 쬐고 있었다. 그러다 그는 공원을 방문한 어느 떠돌이 전문가와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다. 상대는 직업상 타카모리가 괴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보았으나, 위협적이지 않다고 판단해서인지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는 않았다. 그리고는…마침 둘 다 한가했기에, 나란히 앉아 몇 마디씩 주고받았다고 한다.
전문가와 괴이가 느긋하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얼핏 묘한 광경 같으면서도, 생각해 보면 한때 타케시로 시에서는 그럭저럭 자주 볼 수 있던 풍경이긴 했다. 요즘엔 별로 없게 되었지만. 다들 어떻게 지내고 있으려나.
“그래서, 스몰 토크 삼아서 서로에 대해 얘기하다가…타카모리의 과거 얘기가 나왔는데요.”
“흐음, 그래? 과거 얘기라면….”
“네, 300년의 역사를 적당히 요약해서….”
“스몰 토크 치고는 상당히 빅해졌네.”
그런 빅 토크 끝에 타카모리는, 사라진 옛 동료를 찾고 싶다는 이야기를 꺼내게 되었다. 신사가 불타고 혼자 떠돌던 시절에는, 버거운 일이 연달아 일어나다 보니 제 몸 하나 건사하기도 어려워서 그를 찾아다닐 여력이 없었다. 타케시로 시에서 오랜 시간 잠들었다 깨어난 후에는 우선 사라지지 않기 위해 필사적이었기 때문에 여력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지금은 여러모로 안정됐으니까.”
쇼 덕분에요, 하고 작게 덧붙였다.
“그러니까, 정말 많이 늦어졌지만…이제 코우마루를 찾아 보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럴 때 그 사람을 우연히 만난 거예요.”
그 전문가의 집안은 제법 유서가 깊었는지 대대로 괴이와 관련된 일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괴이와 엮일 때마다 매번 기록을 남기는 것이 가풍이었는데, 마침 그의 선조 중 한 사람이 신사 밖으로 나온 어느 코마이누와 엮인 기록이 있다고 했다.
“그것의 복사본이 이건데요….”
가방을 뒤적거리던 타카모리가 복사 용지 몇 장을 꺼내든다. ‘신비한 책’은 스테이플러로 적당히 철한 듯한 종이 묶음이었다. 책이라고 부르기조차 민망한 모양새였다. 츠쿠지는 미심쩍다는 눈으로 종이를 쳐다본다. 원본도 아니고 사본으로 한 달치 월급을 뜯어간 거야…? 심지어 필사한 것도 아니고 복사기로 만들어낸 걸로…. 정작 그것을 들고 있는 타카모리는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는 듯한 얼굴이다. …진짜 사기꾼 아냐? 레이오한테 평소에 좀 더 주의를 주는 게 좋았을까. 이런 말은 미안하지만, 사기당하기 쉬운 타입 같으니까. 예방 교육의 필요성을 고려하기 시작한 츠쿠지를 향해 타카모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아직 읽지는 않았는데요, 그게…. 무슨 내용이 적혀 있을지 모르니까, 조금은 겁이 나서.”
탁자에 종이 묶음을 내려놓은 손이 어색하게 꼼지락거린다.
“그래서, 쇼만 괜찮다면 같이 읽어 줬으면 해서…실은 오늘 놀러 오고 싶다고 한 것도 이것 때문이었달까요….”
멋쩍은 듯 말끝을 흐린다. 사실 한편으로는 단순히 쇼와 같이 있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지만, 그건 부끄러우니 말하지 않기로 했다.
빈 식기를 정리하고 츠쿠지와 나란히 앉은 타카모리는 손끝으로 첫 페이지를 잡았다. 엉성하게 표지 역할을 하고 있는 백지 한 장을 넘기자 바로 내용이 시작된다. 상당히 옛날에 적힌 글이었지만 기록을 판 전문가가 친절히 적어 준 현대어 번역이 병기되어 있었다. 둘의 실제 연령을 생각하면 읽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만약을 위한 서비스라고 했다. 남는 공간에 볼펜으로 대충 휘갈겨 쓴 모양새였지만. 섬세한 건지 대충인 건지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기록의 내용은 대체로 사실 관계만이 담담하게 적혀 있는 편이었다. 전문가의 선조가 의뢰를 받고 어느 마을에 찾아가서 검은 털의 코마이누를 퇴치했다는 내용이었다. 탐문 결과 얼마 전 마을에 사는 일부 인간들의 손에 불타 사라진 신사 출신으로 추정되며, 원한을 품고 내려와 방화범들과 그 일가친지들을 해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덧붙여 사건의 원인이 된 방화에 대한 이야기도 적혀 있었다. 오랜 기간 마을에 역병과 재해가 이어지자 지칠 대로 지친 주민들은 원망할 상대를 찾기 시작했다. 결국 ‘신사의 신이 우리를 돌보지 않은 탓’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고, 그것을 진심으로 믿은 일부 주민들이 술김에 일을 저질렀다고 한다.
후손과 다르게 꼼꼼한 성격이었던 모양인지 뒷장에는 피해 규모도 제법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읽어내리는 타카모리의 손이 약하게 떨리기 시작한다. 두 자릿수의 사상자. 무너지고 불탄 건물과 시설들. 작은 마을에서는 충분히 큰 재난이었을 것이다.
마지막 페이지가 넘어가자 정적만이 남는다. 낯빛이 창백해진 타카모리 곁에서 츠쿠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하지만, 레이오. 어쩌면….”
코우마루가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뒷말을 읽어낸 타카모리가 고개를 저었다. 마을의 이름도 그가 기억하는 것과 같았고, 시기도 유사했으며, 검은 털인 데다가, 신사가 방화로 전소한다는 것도 그리 흔한 일은 아니었다. 츠쿠지는 더 말을 잇지 않는다. 그 또한 예감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으나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 입을 열었던 것이다. 타카모리의 얼굴이 무척 괴로워 보여 가만 두고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달싹이던 입술이 겨우 열리고 가라앉은 목소리가 새어 나온다.
“기록이 사실이라면, 코우마루의 죄…라고 생각해요.”
간신히 평탄을 가장한 어조로 무언가를 억누르며 천천히 이어진다.
“아마, 복수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거겠죠. 하지만…아무리 원한이 있다고 해도, 자신의 복수심만을 이유로 사람들을 해친다는 건 수호수의 본분을 저버리는 거니까.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에요.”
꾹꾹 누르듯이 뱉는 말은 어쩌면 자기 자신에게 들려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냉정한 분석으로 시작된 말은 끝내 자책으로 이어진다. 저는 왜 눈치채지 못했을까요? 그렇게나…옆에 있었는데. 힘이 빠지기 시작한 목소리가 물기를 띤다. 그럼에도 부릅뜬 눈에서는 아무것도 흐르지 않는다. 뒤따르는 사고가 가감 없이 입밖으로 흐르며 오열을 대신한다.
“진작 찾으러 갔어야 했는데…. 아니, 처음부터 헤어지지 말고 따라갔다면, 막을 수 있었을지도…아무도 죽지 않았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제가, 상황이 좋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손을 놓아 버려서, 찾을 생각도 하지 못해서….”
문득 중얼거림이 사그라든다. 타카모리는 긴 침묵 끝에 한 가지 고백을 덧붙인다.
“사실은…사실은요, 쇼. 혹시 그 애가, 저까지 싫어져서 버리고 떠난 걸까봐…. 그걸 확인하는 게 무섭다는 마음도, 한편으로는 있었던 거예요.”
무릎 위로 꼭 쥔 작은 주먹은 어느새 잘게 떨리고 있었다.
“그래 놓고 이제 와서, 혼자가 아니게 되었으니까, 여유가 생겼으니까 그 애를 찾고 싶다는 생각이 든 걸지도 몰라요. 혹시 그 애한테 미움받는다고 해도, 타카모리 옆에는 이제 친구들이 있고…쇼가 있으니까. 그걸로 견딜 수 있을 테니까.”
말 사이로 들이키는 숨소리가 유독 크게 들린다.
“저는…비겁했던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늦어버린 거예요. 어쩌면, 이게 제가 받는 벌….”
레이오. 나긋하지만 단호한 부름이 말을 멈추고 사고의 폭주를 막는다. 흠칫하며 입을 다문 타카모리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한다.
“넌…. 정말 여력이 없는 상황이었던 게 맞아. 갑자기 전부 다 잃고 혼자가 된 상황에서 무서운 생각이 드는 건 당연한 거야.”
조심스럽게 고르는 말이 천천히 이어진다.
“넌 살아남는 것만으로도 벅찼을 거고…그건 네가 잘못한 게 아니야.”
잔뜩 힘이 들어간 손을 츠쿠지의 손이 살짝 감싼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따뜻하다. 그제서야 타카모리는 시선을 올린다.
“그렇게 자책하지 마, 레이오.”
겨우 마주한 츠쿠지의 눈은 자신 못지않게 슬퍼 보였다. 그제서야 눈물이 소리 없이 방울져 떨어지기 시작한다. 순순히 내어 주는 품에 고개를 묻으며, 타카모리는 그의 경멸이 돌아올까 두려워했음을 깨닫는다. 하지만 다가온 것은 깊이를 알기 어려운 다정이다. 끌어안은 팔에 힘을 준다. 당신은 어째서 이렇게나 따뜻할까. 무심코 영영 기대고 싶어진다. 그래서는 안 되는데. 그러나 타카모리는, 좋아하는 아이를 밀어내는 법을 모른다. 떨리는 어깨를 감싸 안은 양팔은 타카모리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결코 멀어지지 않았다.
흐느낌이 서서히 가라앉을 무렵, 천천히 등을 토닥이던 츠쿠지가 무언가를 발견하고 입을 연다.
“모리모리, 저거….”
타카모리가 눈가를 문질러 닦으며 뒤를 돌아본다. 스테이플러 침이 찍히지 않은 한 장의 종이가 가방 밖으로 살짝 드러나 있었다. 꺼내어 살펴보니 아까 읽은 기록에서 이어지는 내용인 듯했다.
“찍을 때 한 장 빼먹은 걸까요?”
“진짜 대충대충인 전문가구나….”
둘은 다시 글을 읽어 내려간다. 퇴치 이후에 있었던 일에 대한 기록이었다. 사태가 진압되고 나니, 마을에 큰 해를 입힌 코마이누에게 분노하는 자들이 하나둘씩 나타났다. 하지만 상대는 이미 퇴치되어 해소할 길이 없었기에, 그들은 전소된 신사 터에 남아 있던 코마이누 상이라도 부수겠다며 찾아갔다.
한편 기록을 남긴 전문가는 그들보다 먼저 도착해 상을 조사했고, 작은 비밀을 한 가지 알게 되었다. 그는 신사 터로 몰려온 주민들에게 상을 부수면 더한 재앙이 올 거라고 거짓 주의를 주고는 거처로 돌아갔다고 한다. 뒤이어 적힌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다른 한 마리는 마을 근처에 없는 것 같았지만, 언젠가 돌아올 수도 있으니까. 이런 이유로 거짓 주의를 주는 건 전문가답지 못한 행동일 수도 있고, 딱히 내게 이득이 되는 것도 없지만…그렇다고 해가 될 것도 없으니. 뭐, 약간의 선행인 거다.
두 사람은 나란히 고개를 기울이며 생각에 잠긴다.
“그러니까…저희가 갔을 때 상이 남아있었던 이유는, 상이 부서지는 걸 이 사람이 막아 줬기 때문에…?”
“그런 것 같아. 위치는 옮겨졌지만 아마도….”
어쩔 수 없이 보존해 두었던 것이, 어느새 이유는 잊히고 등산로를 수호해 주는 석상처럼 여겨지게 된 듯하다고 둘은 결론 지었다. 차례차례 다음 의문점을 짚어 나간다.
“다른 한 마리…라는 건 타카모리 얘기겠죠? 선행이라는 건 무슨 의미일까요?”
“으음…. 상의 비밀을, 모리모리가 확인할 수 있도록 남겨두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뭐 그런 뜻일까?”
“비밀….”
짐작 가는 거 있어? 그렇게 물었지만 타카모리는 도무지 떠오르는 것이 없는 모양이었다. 심각한 얼굴로 기억을 하나하나 되짚던 타카모리의 정신이 슬슬 아득해지기 시작할 무렵, 츠쿠지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가자, 모리모리!”
“네…. 네?”
“고민해봤자 알 수 없는 일이라면, 직접 확인하러 가는 게 더 낫잖아. 너도 답답하지?”
그렇게 묻는 그를 올려다보는 타카모리의 눈이 희미하게 반짝거린다. 그러나 뒤따라 일어서려던 타카모리는 어정쩡하게 멈춰 선다. 어느덧 붉게 물들기 시작한 창밖의 하늘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를 따라 시선을 옮긴 츠쿠지가 어색하게 웃는다.
“오늘…은 시간상 어렵겠네. 내일은 어때? 시간 괜찮아?”
“네, 내일은 일정이 없어요.”
“좋아, 그럼 내일 가는 걸로 결정인 거다?”
부러 밝은 목소리로 말한 츠쿠지는, 잠깐 머뭇거리더니 작게 헛기침을 하고 덧붙인다.
“오늘도…자고 갈 거지?”
적막 속에서 곁에 얌전히 누워 있는 상대를 츠쿠지가 곁눈질한다. 어둠에 익숙한 소쩍새의 눈에 꼭 감고 있는 하얀 속눈썹이 들어온다. 이미 잠이 든 걸까. 어쩌면 이런저런 생각을 하느라 아직 잠들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대로 시선을 둔 채 생각을 이어 간다.
옆에 있어 주고 싶었다. 이럴 때 혼자 두면 더 심란할지도 모르니까. 그래서 구태여 자고 가라고 붙잡아 버렸다. 싫은 기색은 아니었으니 다행이지만…. 이불을 펼 때쯤엔 다시 평소처럼 차분해 보였으나, 눈을 감으면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던 그 얼굴이 떠올랐다. 그런 모습을 봐 버렸으니 혼자 둘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다시 웃게 해 주고 싶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최소한 외롭지 않게 해 주고 싶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레이오가 다시 기운을 차리게 될 때까지 곁에서, 아니, 가능하다면 그 후에도…. 그때 타카모리의 눈꺼풀이 스르륵 열린다. 자그마한 입술이 움직인다.
“…쇼, 잠들었나요?”
“으응, 아직. 잠이 안 와?”
“네…. 저어…, 그래서 말인데요.”
잠시 머뭇거리던 타카모리가 조금 더 작아진 소리로 말을 잇는다.
“지난번처럼…안고 자도 괜찮을까요?”
속삭이듯 건넨 물음에 고동이 속도를 높인다. 답이 금방 돌아오지 않자 무언가 변명을 덧붙이려던 타카모리는,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 않아 결국 입을 다문다. 두근거림 때문에 머릿속이 엉켜 버린 건 서로 마찬가지였다. …응. 짧은 허락이 떨어지고 타카모리가 부스럭거리며 다가온다. 두 사람의 거리가 한없이 가까워진다. 이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타카모리 쪽에서 팔을 뻗어 껴안았다는 것이다. 나직한 목소리가 이어진다.
“전에 쇼가 그랬잖아요. 이러고 있으면 안심이 된다고.”
타카모리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수줍은 듯 중얼거린다. 츠쿠지는 대답 대신 몸을 돌려 마주 끌어안는다. 조금 높은 체온이 서로에게 번지고 스며든다.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에 타카모리는 마음을 놓는다. 머릿속을 떠돌던 불안과 잡념이 서서히 가라앉는다. 그러면서도 다른 종류의 걱정거리를 하나 떠올린다. 시끄러운 제 심장 소리가 상대에게 들리지 않을까 하는 염려. 하지만 동시에 떨어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부상해 수치심을 밀어낸다. 함께 몰려오는 것은 온갖 불순한 감정들이다. 쇼가 안아 주었으니 이제 잠들어야 할 텐데. 조금만 더 욕심을 부리고 싶어진다. 쓰다듬어 줬으면 좋겠어. 입을 맞추고 싶어. …좋아한다는 말이 듣고 싶어. 입술을 달싹이며 홀린 듯 고개를 든다.
그러나 어슴푸레하게 보이는 금빛 눈동자를 마주하는 순간 미약하게 이성이 돌아온다. 전부 입밖에 냈다가는 분명 곤란해하겠지. 제게는 상당히 오래된 감정이지만, 쇼에게는 갑작스러울 테니까. 속으로 거르고 거른 끝에 겨우 용기를 내어, 머리를 쓰다듬어 달라는 부탁 하나만을 한다. 여러모로 자중해서 내린 선택이었지만 막상 쓰다듬을 받게 되니 타카모리는 금세 만족했다. 머리칼을 천천히 쓸어내리는 손길이 무척 편안하게 느껴져서, 저도 모르게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다.
몇 시간 뒤 아침을 맞이할 타카모리는 지난밤의 어리광을 떠올리고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 채 사과하게 되겠지만, 그것은 또 다른 이야기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둘은 다시 코마이누들의 고향으로 향한다. 도보와 전철을 오가며 이동하는 과정은 지난번과 꼭 같았지만, 차이가 있다면 전에 비해 타카모리가 조용하다는 점이었다. 원래 곧잘 멍하니 있는 편이기에 남들이 보기엔 미묘한 변화일지 모르겠으나, 매일같이 함께 시간을 보내는 츠쿠지는 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 제 어깨에 기대어 졸기까지 했던 지난번 여정에 비하면 확실히 다소 긴장하고 있다는 게 보였다. 격려의 의미를 담아 조심스럽게 손을 잡으면 이쪽을 돌아본다. 눈을 마주하고는 조금 풀어진 얼굴로 미소 짓는다. 쇼.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나긋하다.
“그러고 보니, 이 말을 안 한 것 같아서…어제는 고마웠어요.”
타카모리의 얘기도 들어 주고, 기록도 같이 읽어 주고…좋지 않은 모습을 보였는데도 상냥하게 대해 줘서. 되짚듯 느릿하게 말하다 고개를 살짝 떨군다. 타카모리는 쇼한테 도움만 잔뜩 받는 것 같아요…. 중얼거리는 목소리에는 미안함과 분함, 아쉬움이 섞여 있다. 신경 쓰지 말라고 답해도 영 개운치 않은 얼굴이던 그가 잠시 생각에 잠긴 끝에 덧붙인다. 만약 쇼에게 곤란한 일이 생긴다면 꼭 타카모리도 도울 수 있게 해 주세요. 약속이에요. 진지한 얼굴로 내미는 새끼손가락을 마주 걸며, 응, 약속. 그렇게 답하면 맑은 녹빛 눈동자는 그제서야 다시 웃음을 띤다.
마을에 들어선 두 사람은 곧장 등산로 입구로 향했다. 한 쌍의 석상은 지난번과 같은 위치에 변함없는 모습으로 서 있었다. 각자 하나씩 붙잡고 이곳저곳을 살피던 중 츠쿠지가 무언가를 발견하고 타카모리를 부른다. 입을 벌린 쪽의 코마이누 상이다. 자세히 보니 열린 입은 실제로 조금 뚫려 있었고, 안쪽에 약간의 공간이 있어 보였다. 다소 굳은 얼굴로 손을 넣어 뒤적거리던 타카모리가 이내 무언가를 하나씩 꺼내 든다. 그렇게 그의 양손에 쥐어진 것은 아주 조그마한, 두 개의 나무인형이었다.
“선물?”
“그래. 갖고 싶은 거 있어?”
“당고….”
“질리지도 않냐.”
“질리지는 않지만요…. 그럼, 그러면요…인형은 어떤가요?”
인형? 되묻는 형제에게 레이마루는 설명을 덧붙인다.
“옛날에요, 신사에 찾아왔던 인간 아이들이 나무나 헝겊으로 만든 인형을 가지고 놀고 있었잖아요.”
무척 귀여웠으니까, 그런 게 하나쯤 있어도 좋겠다, 싶어서…. 눈치를 살피듯 상대를 힐끔 본 레이마루는 별다른 타박이 없자 조금 머뭇거리며 덧붙인다.
“우리를 닮은 거였으면 좋겠어요. 그러니까, 각각 하나씩….”
그리고는 다시 한 번 곁눈질한다. 평소 같으면 바라는 것도 많다고 투덜거렸을 텐데.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할 무렵 상대가 입을 연다.
“그래, 구해다 줄게.”
순순히 승낙하는 코우마루의 눈빛은 어쩐지 평소보다 부드러웠다. 그러나 등을 돌리고 걷기 시작한 코우마루는, 다시는 이쪽을 돌아보지 않았다.
곱게 조각된 강아지 두 마리 중 하나는 희었고, 하나는 먹으로 검게 칠해져 있었다. 단단한 석상 안에서 세월을 보낸 덕분인지 수백 년이 지났음에도 보존 상태는 썩 양호했다.
“정말…바보 같아요.”
인형을 꼭 움켜쥔 손이 잘게 떨린다. 힐난하는 어조와 달리 목소리는 또 한 번 물기를 머금고 있다.
“저는, 하나씩 나눠 가지고 싶었던 거란 말이에요.”
바람에 스치는 나뭇잎 소리만이 이따금 울리던 한적한 등산로의 초입에 어느덧 가느다란 흐느낌이 섞인다. 작은 어깨를 감싸는 손길 하나가 그 곁을 지키고 있었다.
사태가 진정된 후 점심 식사(타카모리가 감사의 의미로 샀다)를 마친 두 사람은 다시 정류장으로 향했다. 다음엔 해수욕장을 비롯해 더 많은 곳을 둘러보자고 지난 방문 때 약속했었지만, 이번 재방문은 예상치 못한 것이었고 너무 일렀기에 충분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무엇보다 놀러 온다면 홀가분한 기분일 때 오고 싶다는 게 둘 모두의 생각이었다. 그건 지금의 타카모리에게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한 일이었기에, 둘은 별다른 합의를 거칠 필요도 없이 이른 귀갓길에 올랐다.
올 때와는 달리,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나 지하철에서 타카모리는 제법 말수가 늘었다. 그러면서도 분위기가 가라앉을까 걱정하는 듯, 과거나 고향에 대한 화제는 가급적 피했고 주로 학교 생활이나 일상에 대해 언급했다. 다소 염려한 츠쿠지는 무리하지 말라고 말하려 했으나, 이야기의 끝 무렵에 타카모리가 덧붙인다.
“여름방학 때 또 오기로 한 거, 타카모리, 잊지 않았으니까요.”
이번에는 타카모리가 츠쿠지의 손을 꼭 잡는다. 반짝이는 두 쌍의 눈이 지근거리에서 마주친다.
“꼭 다시 와요, 쇼.”
산에도 오르고 바다에도 가요. 둘이서 같이. 그렇게 말하는 눈빛은 이미 더없이 올곧았기에 츠쿠지는 마음을 놓는다. 그라면 이겨낼 수 있으리란 확신이 들었다.
후일담이랄까, 이번의 결말.
타케시로로 돌아온 뒤 처음 맞이하는 등교일, 츠쿠지는 타카모리의 가방에 달린 키링 두 개를 목격한다. 하나는 전에 츠쿠지가 선물한 부엉이 키링이었지만, 그 옆에 다른 하나가 늘어 있었다. 전날의 그 흰 강아지 나무 인형이었다. 물어보니 키링 만드는 방법을 조사해서 손수 부자재를 달아 봤다고 한다. 제법 깔끔한 만듦새에 감탄하던 츠쿠지는 문득 의문을 하나 품는다.
“근데, 검은 강아지는?”
“그건 키링으로 만들지 않았어요. 지금은 혼자서 집을 보고 있어요.”
손끝으로 흰 강아지를 만지작거리며 타카모리가 말을 잇는다.
“코우마루는 확실히 타카모리에게 소중한 존재지만…이젠 돌아오지 못하니까. 그래서, 추억할 수 있는 위치에 두는 게 제일 좋을 것 같아서요.”
추억은 하루종일 함께하기보다는…앞을 보고 나아가다가 가끔 생각이 날 때 꺼내 볼 수 있는 정도가 딱 좋으니까요. 조곤조곤 설명하던 목소리가 불현듯 살짝 작아진다. 그, 그리고….
“지금 타카모리는 쇼 옆에…있고 싶으니까요….”
쑥스러운 듯 중얼거리는 목소리를 따라 시선을 옮기면 문득 가방에 함께 달린 부엉이와 강아지가 눈에 들어온다. 잠깐…너무 붙어 있지 않나, 둘이…? 방금까지 신경도 쓰지 않았던 부분이, 타카모리의 말 때문에 괜히 의식되기 시작한다. 아니, 이런 것까지 의식하는 건 이상한가? 모리모리는 아무 생각 없을 수도…. 생각을 고르느라 잠시 굳어 있던 츠쿠지의 손끝을 타카모리가 살며시 잡는다. 옆을 보니 뺨을 새빨갛게 물들인 채 눈을 살짝 내리깔고 있다. 간질간질한 기분에 결국 츠쿠지는 작게 웃음을 터트리고 손을 맞잡는다. 둘은 다시 소소한, 그러나 진심 어린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걷기 시작한다. 곁에 있고 싶다는 마음은 서로 같았으며, 이제 미련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기에. 나란히 걷는 두 사람의 걸음에는 그 어떤 망설임도 없었다.
살면서 쓴 글중에 제일 긴 것 같아요(ㄹㅇ 과제도 이렇게 안써본듯) 그래서 너무 구구절절하진 않은지? 노잼은아닌지?? 뇌절은아닌지??? 그게 걱정입니다…….(ㅜㅜ) 글고 츠쿠지쿤 캐조종도 상당히 한거같아서…………에바였다면 2차창작. 날조. 적폐. 어딘가 다른세계선.으로 봐주시길…(정말 ㅈㅅ해요)
성에 차지 않아서 오래 붙잡고 있었는데 그래도 제목이 이러니(+츠쿠모리의 계절이니까)여름 안에는 드려야할거같아 힘냈네요...막막해서 한동안 방치하고 있다가 입추 지났다는 말 듣고 ㅈㄴ 헐레벌떡 재개함
희대의 갓연성 초여름인섬니아와 문어님의 격려가 없었다면 이 <캐자의 그뭔씹 과거사 해소로그(연애도 함)>는 세상에 나오지 못했겠죠 정말정말 감사드립니다…츠쿠모리가 정말 좋아요(갑자기 고백) 천년만년 두 쇼넨의 사랑을 지켜보고 싶습니다 저도 다음엔 뭔가 보여드리고 싶네요 추악한걸…(여기서 더 추악해진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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