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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우조로│버려진 것들이 가는 곳

네임버스AU


 

소금물에 녹아 부서진 햇볕이 떠내려오지 못하는 낮의 심해와 들어올 빛 자체가 없는 밤의 수면은 다를 바 없다.

와노쿠니에 잠입하기 위해 바다 밑바닥인 심해, 능력의 유무와 상관없이 모든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세상에서 가장 공평한 곳에 숨어 항해를 지속하는 폴라 탱 호에는 낮과 밤을 구분하는 특별한 방법이 있다. 소음. 낮의 잠수정은 제법 써니호와 견주어 볼 수도 있을 만큼 사람 사는 소리가 가득했고, 밤의 잠수정은 생명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 배처럼 고요했다.

시침이 숫자 9를 지난 뒤로 폴라 탱 호에서 허락된 소리는 곳곳에 있는 파이프들이 내는 증기 소리, 혹은 흔한 고철의 삐걱임 소리, 눈이 어두운 심해어가 선체에 부딪히는 소리뿐이다. 써니 호만큼은 아니어도 따르는 선장에 비하면 가볍다 못해 자유로운 선원들은 배의 규율만큼은 숨 막힐 정도로 철저하게 지켰다. 고철로 이루어진 잠수정의 섬세한 기계 장치는 한 자릿수라도 계산이 틀어지면 어둠에서 길을 잃어버리거나, 공평한 만큼 누구도 닿지 못할 세계에서 영영 고립되어 버리고 만다. 그 두 가지도 심해의 수압을 견디고, 산소 탱크가 가동하며, 식수가 보급된다는 점에서 희망적이었다.

요컨대 9시만 되면 조용해지는 폴라 탱 호는 나무가 아닌 철과 기계로 이루어진 배를 몰기 위해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엄격한 통제의 일환이다. 습관은 태도를 만들고, 그 태도는 사람을 만든다. 꽤나 강압적이기도 한 로우의 지론에 반대하는 선원들은 아무도 없었다. 로우의 선택은 곧 선장의 선택이기도 했거니와 그 강박적인 규칙이 결국 모두의 목숨을 살릴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무지한 자는 폴라 탱 호를 탈 수 없다. 모두에게 공평한 심해를 견디지 못한다.

그런 폴라 탱 호에 올라탄 밀짚의 손님으로 오하라의 고고학자인 니코 로빈, 가진 기계 공학적 지식을 몸에 쌓아둔 프랑키, 일당 중에서 가장 꾀가 뛰어난 우솝이 탄 건 우연일까, 운명일까. 로빈은 9시면 소등에 들어가는 배의 규칙에 이곳의 법을 따르겠다며 웃었다. 프랑키는 설마 개인실에서도 그래야 하냐며 질문했다. 우솝은 9시는 너무 깐깐한 것 아니냐며 우는소리를 하다가도 시끄럽지 않은 생활 소음 정도는 괜찮은 데다가 취침 시간은 알아서 하라는 대답에 역시 트라오라며 능청을 떨었다. 그들보다 나이가 많은 사무라이들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눈 부신 태양 아래서 살아온 이들 중 족히 일주일은 넘을 시간 동안 빛 하나 없는 풍경을 보며, 결코 심해를 거스르지 않는 폴라 탱 호에서 미치지 않을 이들이 배를 탄 건 우연일까, 운명일까. 우연을 붙이기엔 운이 좋았고 운명을 붙이기엔 아까웠다. 로빈만큼, 프랑키만큼, 우솝만큼 똑똑하진 못해도 심해의 침묵을 누구보다도 편안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조로의 등을 보며 로우는 생각했다.

이 남자의 승선에 운명을 붙이기엔 아깝다.

자신이 선장으로 있는 배였음에도 불구하고 앞에 선 조로를 따라 걷던 로우의 걸음이 천천히 느려진다.

“뭐냐.”

그 기척을 예민하게 눈치챈 조로가 물어왔다. 대답을 미루면 걸음을 완전히 멈추고 몸을 돌렸다. 오른손바닥이 시야에 닿게끔 손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하던 로우는 손바닥에 튀었던 위화감에 대해 설명하는 대신에 자연스럽게 여태까지 걸어온 길, 즉 자신의 뒤에 있는 복도를 가리켰다.

“길, 잘못 들었다.”

“…알고 있었어.”

“그랬겠지.”

신뢰라고는 조금도 없는 로우의 대답에 절대 헤맨 게 아니라든가, 애초에 좀 더 일찍 말하라든가 버럭 화를 낸 조로는 상대를 지나 다시 걸어온 길을 성큼성큼 걸었다. 길을 헤맬 때마다 지적하면 붉어지는 얼굴은 이번에도 잔뜩 구겨져 있었다. 그럼에도 앞장서라는 말은 죽어도 하지 않는 고집스러운 남자의 등을 보던 로우는 굳이 나서는 대신에 이번에도 조로의 뒤를 따라 걸었다.

“손에 문제 있는 건 아니겠지.”

얼마 되지 않아 앞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우의 오른손에는 아무것도 들려있지 않았다. 평상시에 들고 다니던 귀곡은 선장실에서 쉬고 있었다. 로우가 눈가를 가늘게 좁혔다.

“신경 쓰이나?”

“네가 발로 수술할 수 있을 것 같진 않아서.”

“손 하나가 없어도 발로는 안 해. 비위생적이다.”

“그러시겠지.”

직전에 제가 던진 비아냥과 비슷한 대답이 돌아온다. 어딘가 뾰족하기까지 한 말투였다. 양손을 바지 주머니에 꽂아 넣은 채 걷고 있던 로우는 말을 얹는 대신에 노골적으로 조로를 내려다보았다.

“손에 문제가 있어도 내 수술이 끝나기 전까진 제대로 붙여놓고 있어라.”

그것을 끝으로 대화는 더 이상 오가지 않았다.

 

9시가 되기 1분 전, 기적적으로 선장실을 찾아낸 조로는 로우가 의문을 표하기도 전에 대뜸 말했다. 진료 좀 봐줄 수 있냐, 고. 와노쿠니로 잠행하기를 택하며 무력 충돌은커녕 거대 심해어와 다투는 일도 없이 순조로웠던 항해에서 갑작스레 발생한 환자에 솔직하게 로우는 놀랐다. 전투가 없었어도 일상생활 중에 다치는 일이야 얼마든지 있다고 해도 상대가 조로였다. 집채만한 돌덩이를 베어버리는데 생채기도 나지 않은 것은 물론이요, 창자를 쏟아내는 일이 있어도 칼을 들면 들었지, 진료실은 절대 먼저 찾지 않는다던 조로.

밤 9시의 규율을 답답해하기보다도 운동 기구가 부족하다고 투덜거리던 조로까지 회상을 마친 로우는 쓰고 있던 안경을 빼놓고 그를 보았다. 어떤 말로 어디를 떠볼까 고민하던 그때였다. 조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직전과는 달리 주저함이 묻어나오는 모양새였다. 진료를 봐줄 수 있냐던 말과 이어지는 것도 같았다. 로우는 돌멩이를 상대로 심리전을 시도하는 대신 입을 다물고 그의 용건이 끝나기를 기다린다. 상대의 속내가 무엇이든 당장 자신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있음을 감으로 빠르게 눈치챈 조로가 그제서야 목소리를 냈다.

이름 좀 지우자.

악마의 열매를 한 입이라도 베어 먹는 순간 그전까지 살아온 삶이 어떻든 남은 평생을 능력자로 살아야 한다는 당연한 상식처럼. 대해적시대라는 이 세상에는 얼핏 이상하게 느껴져도 당연하게 쓰이는 상식이 있다.

운명의 이름은 반드시 몸에 새겨진다.

새겨질 그것은 신의 천적이라 불리우는 D의 이름보다도 성스럽고, 천룡인이 남기는 용의 발굽보다도 뛰어난 속박이다. 절대적인 자연의 물리 법칙을 거스르는 능력자가 발을 담그는 그 즉시 집어삼켜 버리는 바다조차도 받아들이는 고요한 운명은 무엇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 어느 학자가 남긴 말이었다. 로우는 묻는다. 운명을 감히 정하는 자는 누군지. 온몸에 하트를 새긴 로우는 묻는다. 운명이라는 게 존재한다면 이 세상에 억울한 삶이 너무 많은 거 아닌지. 몸에 있는 글자라고는 죽음이 전부인 로우는 묻는다. 고작 이름 따위에 얽매이는 운명이 정말로 귀중한지. 사랑과 자애의 힘만큼 위대한 것은 없다던 학자는 ‘용의 발굽보다도’라는 표현을 썼다는 이유 하나로 신성 모독죄를 물어 총살당했다.

그 모든 사실을 뒤로 미루고 그래서 할 수 있냐 없냐 묻는다면, 우습게도 로우는 할 수 있었다. 정확히는 로우의 능력만이 할 수 있었다. 세간에는 불로 수술만큼이나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었으나 열매에 달린 50억 베리 중 불로 수술의 값이 25억 베리라면, 나머지 절반은 이름 수술에 대한 값이었다. 그걸 누구도 아닌 조로가 알고 있을 이유야 뻔했다. 꽃과 함께 피어나는 고고학자의 깊이는 의사의 지식으로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깊었다. 그녀라면 분명 불로 수술에 관해서도 알고 있으리라.

운명론을 아름답게 삼키기엔 속에 남은 게 원한밖에 없던 로우였으나 그 능력이 제게 온 것만큼은 운명처럼 느껴졌다. 이상이 생기는 순간 몸의 기능을 완전히 멈추게 만드는 심장을 뽑고, 어떤 철학에서는 인간의 진정한 자아라고도 하는 영혼을 뒤바꾸는 열매는 운명이라는 걸 지워버리는 일에도 무리가 없었다. 이윽고 로우는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나, 되찾은 눈높이로 말했다.

내게 보여줄 수 있다면.

 

그리고 지금, 로우는 그의 머리색보다 훨씬 짙은 검초록색 도복을 빤히 보았다. 이름을 보여주는 건 수술 할 때라고 대답한 남자와 이렇게 길을 헤매는 것도 몇십 분째인지. 시계를 들고 다니지 않으니 알 길 없었다. 선원 대부분은 빛이 들어오지 않는 잠수함에서 미치지 않기 위해 시계를 들고 다녔으나 로우는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좁고, 어두운 곳, 에 갇혀 있는 게 역설적으로 안전하다는 걸 알아서였다.

쿵.

벽 어딘가가 울리는 소리가 들린다. 뭔가 틀어 막히는 것 같기도 한 소리는 대부분 심해어의 지느러미가 선체를 가볍게 치고 간 소리였다. 그렇게 로우는 파이프들이 내는 증기 소리, 혹은 흔한 고철의 삐걱임 소리를 들으며 남자가 헤매는 길을 걸었다. 돌이켜보건대 제 능력 밖에 있는 일이었어도 할 수 있다고 말했을 것이다.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의 부탁 아닌 부탁을 받아준 것과 같은 이유로 말이다. 속에 있는 모든 원한을 이룬 지금에서는 운명이니 하는 것들을 전보다 무던하게 넘기게 된 로우였지만, 그럼에도 지나치게 흥미로웠던 것이다.

저 몸에 박혀 있을 운명의 이름이라니.

신이 잘못 새긴 흔적 그 이상도 이하도 되지 못할 것을 아름답게 포장하는 문장 중에 ‘롤로노아 조로’와 어울리는 단어라고는 정말이지 단 하나도 없어서.

검을 잡은 그에게 있어서 흉터도 아닌 주제에 남은 흔적이 있다는 사실이 낯설면서도 한 번 상상하니 그리 어렵지도 않았다. 가장 먼저 떠오른 건 밀짚모자를 쓴 선장의 이름이었다. 세상 모든 일에 무신경해 보여도 자기 선장에 대한 충성심만큼은 확실했으니 그 일환으로 몸에 새겨놨어도 크게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모든 운명이 사랑을 상징한다고 한들 그 사랑이라는 게 전부 성애로 귀결되는 건 아니었다. 지워달라는 걸 보면 충성심이 선을 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그다음에 떠오른 건 매의 눈이었다. 조로라면 평생의 목표라던 상대를 몸에 새겨놓고 살아도 이상할 것 같지 않았다. 따지자면 이쪽은 애정보다도 애증에 가깝겠다. 매가 남긴 흔적은 이름이 아니어도 충분했다. 몸 앞판과 왼쪽 눈. 그 위에 새겨진 흉터들은 쥬라큘 미호크의 또 다른 이름이자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그 남자만의 필체였다. 아니면 친구의 이름일지도. 대검호로서 매의 눈을 목표로 삼기 전부터 존재했다던 약속. 로우가 아는 것은 그것뿐이었으나 뭐든 그 약속의 뒤에도 어떤 사람이 있을 건 분명했다.

일당의 여성 크루부터 붙어있기만 하면 투닥이던 요리사까지 뻗어나가던 생각은 길쭉한 코를 지나 백골까지 갔다가 멈췄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닌 것 같긴 했는데, 지금까지 조로가 이어온 인연에 대해서는 조금도 모르는 탓이었다. 그나마 떠오르는 건 펑크 해저드를 찾아온 하얀 사냥꾼과 그의 부하와 일면식이 있는 것 같다는 정도였다. 감만 따지면 짐승보다 더할 남자의 울타리가 넓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남들과 의사소통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기는커녕 술병 하나만 쥐여주면 아무나 어깨동무를 나누는 게 오히려 문제였지만, 따지자면 조로는 무리 동물보다도 혼자 고고하게 서 있는 맹수가 어울렸다. 어깨를 나누던 술 동무도 해가 뜨면 미련 없이 남으로 돌아서는 모습이 특히 그랬다. 그런 남자가 애틋하게 여기는 상대가 있다면 필히 같은 배를 탄, 혹은 그만큼 그에게 강렬한 의미로 남은 존재일 것이다.

로우는 그런 존재에 대해서 전해 들은 적 없었다. 그만큼 친하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로우는 틈만 나면 조로와 술을 퍼마셨던 펭귄에게도, 샤치에게도, 하다못해 써니 호에 잠시 몸을 의탁하던 시절에 로빈에게도 들은 게 없었다.

자신이 가진 지식을 필요한 이들에게 적절히 나눌 줄 알았던 로빈은 정신 나갈 것 같이 소란스러운 배에서 로우가 적응하지 못하고 있을 때면 아무도 모르게 이 배에서 조용히 숨 쉴 곳이나, 낚시 트리오의 조합을 피해 도망치는 방법, 남자인 로우가 상디의 신경을 건드리지 않고 먹고 싶은 음식을 부탁하는 방법─솔직하게 부탁한다, 상디는 배고픈 자를 절대 외면하지 않으니─ 같은 걸 알려주고는 했다.

조로의 비밀은 앞서 들은 대처들과 무게부터 다르다고 하더라도 어떤 티가 나지 않았다. 이름을 몸에 얹고 살만큼 열렬한 애정을 가진 상대가 있다는 그 티가. 설렘으로 부풀든지, 이름만 아는 상대에 호기심을 갖고 살든지, 이름이 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든지, 하는 같잖은 운명에 휩쓸린 티가 조금도 나지 않았다. 설마 같은 일당도 모르는 건가? 바다에 던지면 능력자도 아닌 주제에 그대로 가라앉을 것 같은 남자의 고지식함이면 가능성이 전혀 없는 이야기도 아니었다.

마침내 마수의 가죽에 남은 이름을 봐도 모를 수 있다는 생각까지 들고 나면 속에서 끓던 흥미가 가셨다. 어차피 버려질 이름을 깊게 생각해서 남는 게 있나 싶었다. 저 몸에 새겨진 이름이 ‘몽키·D·루피’나 ‘쥬라큘 미호크’여도 결국 그들이 맞이할 운명은 롤로노아 조로에게 버려지는 것이다.

왼쪽으로 꺾어야 할 길에서 오른쪽으로 꺾다가, 아래로 가는 대신에 위로 올라가서 기어코 해치를 열려는 기적의 길치와 함께 폴라 탱 호를 끝없이 빙글빙글 도는 행위에 빠르게 질린 로우는 내내 바지 주머니에 처박혀있던 오른손을 꺼내 들었다. 능력을 펼치려던 그 한순간, 오른손 약지가 움찔거렸다. 로우의 표정이 험악해진다.

최근 들어 오른손이 이상했다. 이따끔씩 약한 마비가 오듯 손끝이 저리다가도 정전기 같은 따끔한 감각이 손바닥을 달렸다. 일상생활에 큰 무리가 있지는 않았으나 잊고 살기에는 이렇게 한 번씩 심기를 거슬렀다. 제 몸을 스캔해봤다가 기어코 스스로의 손목을 자르는 기행까지 벌이고도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괴롭힘이라고 하기엔 사소했고, 어떤 병의 전조 증상도 아닌 것은 어느 날부턴가 로우를 신경 쓰이게 만들었다. 조금 전 조로가 캐치한 로우의 이상이었다.

몇 번 손을 쥐었다 피기를 반복하다가, 물기를 털어내듯 손을 턴 로우는 이윽고 익숙하게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아마 빈말뿐인 걱정이었겠지만, 설령 남자의 수술을 하기 전에 자신의 손을 자르게 되는 일이 생긴다고 하더라도 문제는 없었다. 당장 남자에게 새겨진 운명을 뒤바꾸는 일에는 능력을 쓸 손가락만 있으면 가능했기에.

 

능력으로 편리하게 도착한 곳은 조로가 그토록 찾았던 수술실이었다. 능력을 쓰는 손가락만 있으면 되는 일은 사실 수술이라는 단어를 붙이는 게 민망할 정도로 간단한 처치였다. 당장 조로가 찾아왔던 선장실에서 시작해도 상관없었지만, ‘이름 수술’이라는 거창한 명칭에 어떤 오해를 하는 듯한 그에게 굳이 진실을 알리고 싶진 않았다.

생명을 다루는 방 안은 배의 조종실과는 또 다른 복잡한 기계 장치들과 검의 쇠와는 결을 달리하는 날붙이들로 가득했다. 최근 응급 환자는 받은 적도 없거니와 수술이 끝나면 당연히 청소와 소독으로 수술의 흔적을 씻어내는 그곳은 피비린내라고 할 것은 조금도 남아있지 않았다. 윤리적으로 당연히 챙겨야 하는 위생은 로우를 비롯한 하트 해적단에게는 굉장히 당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때때로 강박적일 정도로 풍기는 소독 향은 일반인에게 큰 괴리감을 불러일으키고는 한다.

이런 걸로 겁먹을 남자는 아니라는 건 알지만서도. 약품이나 수술 도구를 챙기는 척 미적대고 있으면 뒤에서는 이럴 거면 진작 능력을 쓰지 그랬냐며 투덜거리는 소리나 들려왔다. 1%의 가능성이 접히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얼마나 걸리는데.”

기척을 보건대 그는 수술대 위에 앉은 것 같았다. 그렇게까지는 할 필요는 없다고 말하려다 말았다. 쓰지도 않을 수술용 가위나 메스를 만지작거리던 로우는 금방 몸을 돌려 조로의 앞에 섰다.

“그거야 이름이 얼마나 크게 있는지에 따라 다르겠지.”

몸을 점령하는 이름은 뜨는 위치도, 크기도, 필체도 제각각이었다. 그 불규칙성은 논리로 증명되지 못했으나, 유력한 가설은 있었다. 몸에 새겨진 이름은 그 주인이 가진 특징을 따라간다는 것이다. 교육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면 유려한 필체로. 해적이라면 사람을 패 죽이는 손등에. 자기주장이 강한 사람이라면 가릴 수도 없을 만큼 크게…….

로우는 검초록색 도복을 입고 있는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언제나처럼 벌리고 다니는 앞섬으로 보이는 건 그랜드라인에 넘어오기 전에 새겨진 흉터뿐이다. 헐거운 소매 부근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무언갈 재단하는 듯한 시선은 점점 아래로 내려간다. 촌스러운 복대로 가려진 허리를 지나, 골반, 허벅지, 무릎, 종아리, 발끝. 부츠라고 하기엔 둥글었고, 워커라고 하기엔 끈이 없는 신발은 종아리의 반 정도 오는 길이로 바지 밑단이 퍼지거나 끌리지 않도록 단단하게 감싸고 있었다.

“환부는 어디지?”

유쾌하지 않은 단어 선정이었다. 그속에 담긴 악의에도 조로는 흔들림이 없었다. 로우는 그를 자극하는 일을 관두고 발등, 혹은 종아리, 무릎 뒤 그 어딘가에 있을 이름이 오른쪽일지 왼쪽일지 하는 의미 없는 생각이나 흘렸다. 일종의 기다림이었다. 무영등 밑에서도 아랑곳하지 않던 조로는 그때까지도 로우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로우가 조로를 잰다면 조로는 상대를 통해 무언갈 계산하는 것 같았다. 이윽고 큰 숨을 내쉰 조로는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다짐을 굳힌 것 같기도 했다. 남자를 수식하는데 그다지 어울리는 말은 아니었지만.

수술대에 올라앉을 때까지도 매고 있던 세 자루의 검을 옆에 기대 놓은 뒤, 그다음으로 신발을 벗을 거라 생각한 조로는 등을 돌렸다. 미처 생각지도 못한 위치에 당황하는 것도 잠깐이었다. 어깨를 감싸듯 그의 등을 덮고 있는 옷깃이 흘러내린다. 단련을 위해 만들어진 근육은 짜임새 있게 느껴지기보다는 투박하게 다가온다. 가슴팍과 눈을 가로지른 흉터만큼은 못 돼도 자잘한 상처들이 남은 팔이나 손과는 다르게 누구에게도 허락한 적 없다는 듯 깨끗한 등에는 이름이 적혀있었다.

Trafalgar D·Water Law

쿵.

어디선가 심해어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철판을 덧댄 잠수함에서도 제일 깊숙이 있는 수술실에서는 결코 들릴 리 없는 소리였는데도.

“지워.”

눈 앞에 펼쳐진 상황을 이해하는 것보다도 먼저 조로가 말했다.

“언제부터였지?”

로우가 곧바로 대답했다.

“네가 내건 조건 정도는 지켜라.”

“조우에서도 있었나?”

“의미 없는 이야기야.”

“내가 그 배에 탔을 때는?”

“트라오.”

“대답해.”

“…….”

손을 뻗어 성과 이름 사이에 커다랗게 있는 공백을 매만지면 핏줄이 선 것같이 울퉁불퉁한 게 만져졌다.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었으나 화상이나 자상으로 살이 흉진 것과 비슷한 감각이었다. 손끝으로 그것을 따라 만지면 유독 긴 공백의 정체가 무엇인지 파악하는 건 어렵지도 않았다. 흉터 아닌 흉터는 세상으로부터 자신이 숨긴 이름이었다.

“…2년 전부터인가?”

“…….”

“대답해라, 이 이름을 가슴팍에다가 옮겨버리기 전에.”

“그땐 네 손목을 베어버릴 줄 알아.”

“조로야.”

“그냥 너랑 이름이 같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넘겨.”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안될 건 뭐 있냐.”

덤덤한 목소리에는 흔한 짜증조차 없었다. 운명을 부정해온 모든 시간들이 우스울 만큼 현실감이 없었다. 로우도 알았다. 눈앞에 있는 남자는 이름 따위에 매여있는 것과 어울리지 않는 남자라는 걸. 저 몸에 운명이 새겨졌다면 그것은 필히 지워지기를 타고난 운명이었을 것을, 트라팔가 로우도 알았다. 단지 로우는 상상해본 적 없을 뿐이다. 제 이름이 누군가에게 새겨질 경우에 대해서. 그걸 자신이 지우게 될 확률에 대해서. 그 누군가가 롤로노아 조로일 가능성에 대해서, 트라팔가 로우는 생각해본 적 없었다.

“뭐가 문제야.”

섣불리 대답하지 못하고 있으면 조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 등에 있는 이름이 이 세상에서 이걸 지울 수 있는 유일한 능력자의 이름이었을 뿐인 이야기잖아.”

“지금 그것뿐이라는 말로, 내 자신의 이름을 지워야 하는 상황을 그냥 넘기라는 건가?”

로우가 눈살을 찌푸렸다.

“만약 쵸파가 할 줄 알았다면 쵸파에게 갔을 거다.”

“토니야에게 등을 보였나?”

“이 등을 어디에 내놓을 수 있다는 거냐. 수치스러울 뿐이다.”

그렇게 말하는 조로는 여전히 등을 로우에게 내보이고 있는 채였다. 수치를 말하는 목소리는 이전과 크게 다를 것 없었다. 건조하고, 무덤덤했으며, 그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았다. 로우는 그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고집스럽게 그의 등에 남은 자신의 이름을 쓸었다. 공백을 알기 위해 조심스러웠던 직전과는 달리 거칠고 어떤 의도가 분명하게 담겨 있는 손길이었다. 깔끔하고 정갈한 글씨체는 쓸어도 번지지 않았다.

“왜 이걸 내가,”

로우는 아랫입술을 깨물어 약하게 나가려는 말을 가까스로 삼켰다.

“이걸 내가 왜 지워야 하지?”

사랑과 자애를 이길 힘은 없다고 하지만 때때로 그것은 약점이 되기도 한다. 역설적이게도 대부분의 희생은 자애로부터 시작된다. 이 세상에서 가장 고요했던 남자가 하얀 괴물을 대신해서 눈밭에 파묻히기를 택했던 것처럼.

“직접 자를 수 있었으면 여기까지 안 왔다.”

조로가 말했다. 결국 로우의 입에서 헛웃음이 샌다. 자애와 희생을 들먹였으나 남자가 정말로 그런 선택을 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애초에 그날의 희생은 로우의 인생에서 가장 고결한 것으로 분류되어 있었다. 다만 자신을 위해 희생을 자처하는 그를 떠올리는 건 머리에 해루석이라도 박히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영역이었는데도, 검을 잡는 큰 방해가 되지 않는 부위─이를테면 발목이라든가─를 잘라내는 그를 상상하는 일은 너무 쉬워서.

“도대체 뭘 망설이는 건데.”

이번에도 침묵을 깨는 건 조로였다. 그는 잠깐의 조용함도 참을 수 없는 것 같았다.

“이름도 갖고 있지 않은 주제에.”

등에 닿는 타인의 온도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던 그의 어깨는 조금 아래로 내려가 있었다. 조로가 보이는 변화는 그게 전부였다. 차라리 원망이라도 한가득 담겼으면 생각하기 편했을 것을.

조로의 말이 맞았다. 로우의 몸에는 이름이 없다. 로우는 운명을 믿지 않는다. 로우가 믿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자유 의지다. 자신이 걷는 길은 누군가가 깔아놓은 기차 레일이나 이미 결말이 정해진 시나리오 따위가 아니라, 자신의 생각과 의지로 직접 선택한 길이라는 믿음. 그곳에는 누구의 개입도 필요하지 않다. 자칫 반골로 분류될 수 있는 로우의 반항은 실로 짜여진 새장으로부터 도망치면서부터 시작된 저항이었다.

로우는 운명 따위가 모든 것을 인도했다고 믿지 않는다. 자신은 의사가 아닌 해적이 되기를 선택했고, 자유를 만끽하며 사는 것보다도 복수에 얽매이길 선택했다. 그 모든 순간이 비로소 지금의 자신을 존재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건 눈앞에 있는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써니 호가 아닌 배를 타는 것을 선택해서 이 배에 있고, 이름을 지우겠다는 의지로 그 이름을 가진 의사의 앞에 앉아 있다. 로우는 그것을 외면하지 못한다. 저항으로 삶을 시작한 로우는 조로의 선택을 꺾지 못한다. 벼랑 끝에 몰린 기분이다. 한 발자국이라도 뒤로 뻗는 그 즉시 바다에 빠지는 위험 앞에서 로우는 비로소 자신이 이름을 지우고 싶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제 와서 운명을 믿는다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그렇게 운명을 비웃어 놓고서 뒤늦게 무릎 꿇고 빌 생각은 없었다. 단지 로우는 조로에게 버려지고 싶지 않았다.

이 남자에게 지워지고 싶지 않았다.

“…부작용이 있다고 해도 선택을 바꿀 일은 없겠지.”

“당연한 소리를. 그리고 부작용이라면 이미 알고 왔다.”

“다른 이름이 새겨지는 일은 평생 없을 거다. 내 이름조차도.”

“오히려 잘 됐지.”

“매정하기는.”

로우가 옅게 웃음을 흘렸다. 자조하는 것도 같았다. 로우는 그때까지 주먹 쥐고 있던 오른손을 펼쳤다. 수십 개의 바늘로 손바닥을 찌르는 것 같은 통증이 느껴진다. 그러나 로우는 더 이상 개의치 않았다. 푸른색의 반구가 수술실을 덮는다. 손가락이 닿을 때마다 아랫배에서부터 열이 치솟는 기분을 가까스로 삼키던 조로는 생각했다.

누가 할 소리를.

*

“뭐야, 너 이름이 있었잖아!!”

최초의 발견자는 고성의 의사였다. 페로나는 붕대를 감는 일이라고는 미라를 만들 때 말고는 없는, 산 자보다도 죽은 자를 다루는 걸 훨씬 즐거워하는 사람이었으나, 검사들은 소염제와 소화제도 구분하지 못했으니 그녀 정도면 고성의 유일한 의사가 맞았다. 실제로 1년 정도가 흘렀을 때, 그녀는 외상, 특히 자상과 과다출혈 부분에 관련해서는 전문 의사 수준이 되어 있었다. 수련이 거듭되고 부상의 정도가 나날이 깊어지며 반강제적으로 보살피던 페로나의 의료 지식이 덩달아 성장한 것이다.

이름을 발견한 날은 아직 모두가 미숙했던 때였다. 이제 막 3D2Y 암호를 푼 조로는 훈련을 시작하기 전 치료에 전념하라는 말에도 아령을 들고 팔을 움직이고 있었고, 붕대를 감기 전에 지혈해야 한다는 걸 몰랐던 페로나가 낑낑거리고 있던 때. 마침내 움직이는 조로를 네거티브 홀로우로 진정시킨 뒤, 등에 붙인 거즈를 교체하려던 페로나가 목소리를 높인 것이다.

“새겨진 걸 보니 되게 최근인 것 같네? 여기 오기 전에 생긴 건가? 근데 이름이 뭐 이렇게 조각 나있어?”

“…뭐?”

바닷속 깊은 곳 마리모나 되고 싶다고 자학하던 조로의 정신이 드는 순간이기도 했다.

“하긴, 처음 왔을 때부터 몸 여기저기가 엉망진창이었지. 그게 이름이 새겨지느라 그랬던 거구나! 불쌍한 쿠마시, 앞으론 내가 잘 보살펴줄게.”

“누가 쿠마시냐!”

버럭한 조로가 급히 몸을 틀기 위해 움직이다가 입술을 씹었다. 스릴러바크에서 내장이 찢긴 고통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 탓이었다. 깜짝 놀라며 거리를 벌리던 것도 잠시, 조로의 상태가 이빨 빠진 호랑이보다도 못한 것을 눈치챈 페로나는 마음껏 그의 주변을 날아다니다가 금방 다시 그의 뒤에 앉았다.

“잠깐, 너 설마 이름이 뭔지도 모르는 거야…?!”

페로나가 아이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몸에 새겨지는 이름과 그 운명에 관한 이야기는 능력자는 바다에 들어가면 안 된다는 것만큼 당연한 상식이었지만, 조로라면 모를 수도 있을 것 같아서였다. 동서남북도 구분 못 하고 이 좁은 성─스릴러바크에서 살다 온 페로나에게 이 고성은 좁은 게 맞았다─에서 헤매는 꼴을 보건대 조로는 상식이 크게 부족한 게 틀림없었다. 모리아를 박살 낸 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딱한 마음이 피어오른다. 조로는 혀를 차며 심기가 불편한 것을 티 냈다. 아무리 그래도 정말 이름과 운명에 관한 걸 모르진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세상에서 운명이 되는 존재의 이름이 몸 위에 새겨지는 거, 였나.

조로도 알긴 했는데, 문제는 정말 알기만 했다. 한 번도 깊게 생각해본 적 없던 것이다. 검이 아닌 것 중에 깊게 생각한 게 있냐 묻는다면 할 말이 없었다. 조로에게 있어 운명의 이름은 항해술, 고고학, 기계 정비와도 같은 분야였다. 검이 아닌 것 중에서도 자신과 엮일 일은 없다고 판단해 한 번도 담아두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페로나의 말을 듣고도 하품이 나오는 이유는 그래서였다. 현실감이 없었다. 그런 게 몸에 새겨졌다는 사실이.

“그래서 이거 누구 이름인데?”

그렇게 사라졌던 현실감이 그대로 몸을 짓누른다. 현실감은 중력과도 비슷한 형태를 띠고 있다고, 답지도 않은 감상이 들었다. 무심코 제 등에 남을만한 이름들을 간추린 탓이었다. 운명이 모두 사랑의 형태가 아니라는 건 알았다. 그래서 더 문제였다. 조로는 죽음 앞에서도 물러날 수 없는 약속이 있었고, 야망이기도 한 그것을 버려서라도 지키고 싶은 게 있었다. 검은 매는 둥지를 틀지 않는다. 밀짚모자를 쓴 선장은 자유를 사랑해서 본인을 죽이는 바다를 사랑하는 남자였다. 그리고 자신의 친구는.

묘비에 새겨진 그녀의 성을 되새기면 헛구역질이 날 것만 같았다. 조로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리던 그때였다.

“트… 라팔가, 로우?”

페로나가 말했다. 귀여운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이름이라고 투덜거리는 건 덤이었다. 그제서야 숨을 쉴 수 있게 된 조로는 망설임 없이 자신의 옆에 놓인 화도일문자를 꺼내 들었다.

“이 자식아! 매의 눈이 훈련은 몸이 낫고 나서라고…!!”

그녀를 따라 화내던 유령들의 표정이 멍청해진다. 위에서 둥실둥실 떠다니던 페로나가 천천히 아래로 내려온다. 시선의 끝에는 검이 있었다. 조로가 내민 것이다. 뭐 하는 거냐고, 의도를 물었지만 정말로 모르진 않았다.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널 찌르기라도 하라고?”

“그래도 상관없어. 살을 베어낸다면 가장 좋겠지만.”

“너 말이야, 이게 지금 단순히 문신 같은 건 줄 알아? 문신도 이렇게는 안 지워, 멍청아!! 차라리 몸에 불을 지르면 질렀지.”

“그럼 물을 끓일까? 난 뭐든 상관없다.”

“어이, 롤로노아.”

페로나의 목소리가 낮아진다. 덩달아 방 온도가 내려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어떨 땐 쵸파보다도 더 어린 애처럼 보이던 그녀는 이렇게 한 번씩 자신의 위치를 확실히 했다. 고스트 프린세스를 자칭해도 결국은 해적이라는 것을. 심상치 않음을 인지한 조로가 천천히 등을 돌렸다. 상대에게 건넬 심산으로 쥐었던 화도일문자를 고쳐잡았다.

“이건 사람 따위가 지울 수 있는 게 아니야.”

마주 본 페로나는 웃고 있지 않았다. 검은 동공에는 빛 한점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모욕당한 것만 같았다.

“운명이 너를 선택했다는 증거라고.”

“그렇다고 해봤자,”

“그 강력한 힘을 너 같이 약해 빠진 게 거스를 수 있을 것 같아?”

“…….”

“…라고 말했지만, 또 모를지도? 이 세상 어딘가에 이름을 지울 수 있는 능력자가 있을지!”

얼어붙는 듯한 냉기도 잠깐이었다. 금방 애처럼 바뀐 목소리가 얄밉게 웃었다. 급기야 방 위를 둥둥 떠다니는 그녀는 처음부터 기분이 나쁜 적도 없는 사람 같았다. 이 섬에서 십 년 넘게 더 있어야 한다고 한들 절대 익숙해지지 못할 변덕이었다.

“믿는 거야, 아닌 거야? 하나만 해.”

조로가 약간 질려하며 말했다. 마침내 땅에 발을 딛은 페로나가 허리에 손을 얹었다.

“넌 네 그림자가 널 떠날 거라고 생각해본 적 있어?”

“…….”

“나는 언제나 가능성을 봐왔어. 그걸 믿을 뿐이야.”

안개로 둘러싸인 그곳에서는 순리대로 흘러가는 게 없었다. 죽음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 그곳은 태어날 때부터 함께인 그림자가 발밑을 떠났고, 살아있는 사람은 해를 볼 수 없었다. 그곳에서 쵸파가 보이던 분노를 기억한다. 때문에 조로는 스릴러 바크가 가능성이 가득했던 섬이 아니라, 죽은 자에 대한 모독과 삶에 대한 모욕밖에 없는 섬이라고 생각했다.

“이름에 대해서 아는 게 많은 것처럼 보이는데.”

엉거주춤 윗옷을 추스르던 조로가 말했다. 페로나의 목소리가 낮아졌을 때부터 존재하던 위화감이었다. 아무리 그곳의 기만을 사랑했다고 해서 페로나가 운명이라는 걸 잘 알 수는 없었다.

“모리아님은 그 힘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사람이 곧 원피스를 가지는 거라고 했었, 는데 이 이야기를 너한테 왜 해줘야 해!!”

“뭐야, 시시한 이야기였잖아.”

“이 자식이! 말 다했냐? 애초에 이름 같은 건 모리아님보다도 호그백이 집착했었거든!!”

“뭐, 좀비에 이름을 붙이면 더 강해지기라도 하나보지.”

조로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양손을 주먹 쥔 채 빽빽거리던 페로나가 굳었다. 순식간에 조용해진 상대의 모습에 마지막으로 슈스이를 허리에 매던 조로가 고개를 들었다. 페로나는 여전히 가만히 서 있었다.

“뭔데.”

“좀비랑은 달라.”

“딱히 별로 진심으로 궁금했던 건 아닌데…….”

“호그백은 죽은 사람의 이름을 자기 몸에다가 새기고 싶어 했어.”

결국 조로가 입을 다물었다.

그때까지도 ‘트라팔가 로우’가 누군지는 미처 생각해보지도 못하고.

 

페로나의 말마따나 이름은 최근에 새겨졌을 것이다. 오래전부터 등에 이런 게 있었다면 진작 일당에게 들켰을 것이다. 써니 호에는 거짓말이 익숙한 사람은 많아도 동료에게 거짓말을 잘하는 사람은 없었으니, 보지 못한 곳에 이름이 새겨졌다 한들 그들은 자신이 알게 된 걸 어떤 식으로든 숨기지 못했을 것이다. 애초에 그전까지 이름이 새겨지는 고통을 느낀 적도 없었다.

페로나는 이름이 새겨지기 전, 이름이 나타날 부위가 불을 붙인 것처럼 뜨겁다 못해 피부를 찢고 싶은 아픔이 따라온다고 말했다. 어느 책에도 실리지 않은, 호그백이 연구와 실험을 통해 알아낸 사실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했지만 자세히 듣지는 않았다. 저도 모르는 고통 속에서 운명이 내려앉았다면 죽음을 각오했던 그때 말고는 없었다. 그러니까, 그때 스릴러바크에서 루피가 입었던 고통은 그것보다 더했다는 뜻이었다.

하필이면 등 위에 이름이 나타났다는 사실에 긴장했으면서도, 정작 만난 적 없는 이름이라는 것을 알고 나면 기분이 썩 좋지 못했다. 들어본 적도 없던 그것은 운명이라기보다는 예고장이 찍힌 기분이었다. 너는 언젠가 반드시 이놈을 만나서, 뭐, 그렇게 될 거라는. 운명인지 뭔지 별 관심 없이 그런가보다 살아가던 조로가 자신의 입장을 확실히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러고 나면, 정말로 자신이 약해서 새겨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정해진 길이 있다고 한들 그것을 거스를 만큼 강력한 의지가 부족하니까 이런 게 새겨지는 거다. 때문에 조로는 거울 없이는 보지도 못하는 것을 잊기로 택했다. 벌써부터 묘하게 낯이 익은 기분이 드는 게 끔찍할 만큼 싫어서였다. 그게 이름의 힘 같은 게 아니라, 실제로 만나본 적 있는 이름이어서라는 걸 알게 되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세상 모든 것에 관심 없어 보이던 미호크는 물자를 조달하기 위해 종종 섬 밖으로 나가고는 했다. 의식주 대부분을 자급자족으로 일궈내는 그였지만, 햇빛도 제대로 들지 않는 섬에서 나고 자라는 것만으로는 무리가 있었다. 대표적으로는 와인이라든가, 와인이라든가, 와인. 그럴 때마다 페로나는 집요할 만큼 미호크의 뒤에 따라붙었다. 안개 낀 섬의 축축함을 무엇보다 사랑하는 그녀였지만 마찬가지로 섬에서는 핑크빛 드레스나 봉제 인형 같은 건 자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시내로 떠났다가 돌아온 어느 날, 페로나는 돌아오자마자 사 온 인형도 내팽개치고 조로에게 향했다. 한 손에는 수배서를 든 채로.

우연히 길거리에서 네 등에 있는 것과 똑같은 이름을 발견해서 가져왔다며, 저보다 더 흥분해서 말을 쏟아내는 페로나의 손에서 수배서를 낚아챈 뒤에 문밖으로 밀어냈다. 그러면 금방 영체가 되어 벽을 뚫고 고개를 들이밀었다. 조로는 페로나를 마저 쫓아내는 대신에 ‘트라팔가 로우’의 수배서를 들고 온 그녀에게 한 가지만을 물었다. 혹시 매의 눈에게 무언갈 말했느냐고. 운명의 상대에 대한 반응을 기대하며 눈을 빛내던 페로나는 금방 싸늘한 표정을 지은 채 욕 같은 잔소리만 쏟아내고 돌아갔다.

조로는 미호크에게 이름이 새겨진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아 했다. 그것을 약점 삼아 조로에게 코코아를 타오게 시킨다든가 했던 페로나의 유흥은 오래가질 못했다. 아무리 그래도 운명의 상대를 궁금해하는 것보다도 매의 눈을 더 신경 쓰는 그의 태도가 도통 이해되지 않아서였다.

마침내 혼자가 된 방에서, 조로는 최근에 현상금이 갱신된 것으로 보이는 수배서를 내려다보았다. 이름을 들었을 때부터 짐작은 했지만 역시나 남자였다. 그것도 어딘가 음침하고 위험하게 생긴 해적. 별개로 제법 봐줄 만한 외관을 갖고 있다는 건 사진으로만 봐도 느껴졌다. 꼭 만난 적 있는 것 같은 알 수 없는 위화감에 시달리던 조로는 미간만 찌푸리고 수배서가 뚫릴 것처럼 노려보았다. 그러다 기억이 난 것이다. 정확히는 얼굴이 찍힌 수배서에 같이 잡힌 그의 손을 보고 나서였지만. 분명 직접 본 적 있는 손, 아니 문신, 아니 얼굴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이 섬에 바로 날려오기 직전, 샤본디 제도에서.

말을 섞었다든가 하는 건 아니었다. 그 만남도 루피를 돕기 위한 휴먼 옥션에서, 스치듯 본 게 전부였는데. 어느덧 2억이 넘게 찍힌 현상금을 보던 조로는 이내 그것을 구겨버렸다. 그게 쿠라이가나에서 조로가 이름을 떠올리는 마지막 순간이었다.

*

써니 호의 불침번은 순번을 정해 번갈아 가며 맡는다.

언제 적습이 시작될지 모르니 상시 경계가 기본이었지만, 누가 불침번을 맡느냐에 따라 그날 밤에 불이 들어오는 선실이 달랐다. 써니 호의 완전한 어둠이 내려앉을 때는 배의 선수에 앉아 별을 보는 루피가 불침번을 맡을 때뿐이다. 펑크 해저드에서 동맹을 얻고 드레스로자로 떠나기 사흘째 되던 날 밤, 조로는 불이 꺼지지 않는 3층 도서관 앞에 섰다. 기색은 하나뿐이었다. 결심을 굳힌 듯 크게 숨을 쉰 조로는 두어 번 정도 문을 두드려, 자신의 방문을 알리는 것과 동시에 문을 열었다. 너무 밝지 않게끔 켜둔 간이 등불이 일렁인다.

“어머, 이 시간엔 무슨 일일까?”

로빈은 노크를 배워도 상대의 허락을 기다리는 예절은 못 배운 검사에게 배려를 가르치는 대신 조용히 웃었다.

“별건 아니고 몇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당연히 그가 길을 잃었을 거라 생각했던 로빈이 그제야 조로를 바라보았다. 그가 직접 진료실을 찾아가고 쵸파를 찾는 것만큼 좋지 않은 상황이 있다면 직접 조언을 얻으려고 할 때다. 왜냐면 조로는 그런 걸 하지 않으니까. 자유롭기만 한 루피를 대신해 무게의 균형을 잡는 조로는 이 배의 닻과도 같다. 그리고 닻은 사사로운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 단번에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은 로빈은 읽고 있던 책을 덮었다.

“동맹에 관한 거 말인데…….”

저도 모르게 로빈의 시선을 피한 조로가 말끝을 흐렸다.

화염과 얼음이 공존하는 섬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동맹에 관해 전해 들은 조로는 그 계획을 듣고 오히려 마음에 들어 했다. 언젠가 꺾어야 할 적이라면 꾸물거리며 이리저리 피해 다니고 싶지 않았다. 협력을 요구하며 밝힌 동맹 상대의 전략은 루피에게는 기대할 수 없는 수 싸움이 있었다. 아직 사황 세력과 전면전을 펼치기는 무리인 만큼 해볼 가치가 충분한 전략이었다. 물론 루피가 있는 계획이 계획대로 잘 흘러갈 수 있을지는 어떨까 싶지만서도.

동맹을 제안해온 이가 2년 전 샤본디 제도에서 만났던 초신성 중 하나라는 건 알았다. 음침하게 생긴 얼굴하며 뒤따라붙은 그의 이명에도 대수롭지 않게 넘기던 조로가 멈춰선 건 그의 이름을 세 번 정도 곱씹었을 때였다.

하루가 지날수록 강도가 거세지는 미호크의 수련 밑에서도 이름이 있다는 건 잊지 않았다. 새로운 항해를 시작하게 된 뒤로 조로는 누구의 앞에서도 등을 보인 적 없었다. 단지 그 이름이 무엇이었는지를 잊어버렸을 뿐. 다신 만날 일 없을 거라 생각했다. 설령 다시 만난다고 해도 타는 배가 다른 적이었다. 그와 자신의 사이에서 기다리고 있는 결말은 두 가지밖에 없었다. 베거나, 베이거나. 조로는 자신이 베어온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는 악취미는 없었다.

그렇게 흘리듯 떠나보낸 이름이 지금 써니 호의 갑판에 앉아 잠들어있었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동맹이라는 형태로.

“…혹시 이름을 지우는 능력에 대해서 알고 있어?”

2년 전에 비슷한 내용을 입에 담았을 때는 혼이 났다. 당시에는 그게 혼났다거나 하는 줄 몰랐지만, 페로나와 2년을 보내며 그날을 되돌이켜 보건대 그건 혼을 낸 게 맞았다. 그녀보다도 몇 살은 더 많은 로빈은 웃지 않는 것 빼고 평소와 다른 게 없었다.

“이름이라면, 운명을 말하는 걸까?”

“그래.”

“설마…….”

로빈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할 말을 고르는 것 같았다.

“이름이 생겼어.”

“언제?”

“수련하는 동안에.”

실제로는 스릴러바크와 샤본디 제도 사이, 그 어딘가였지만 일부러 다른 때를 말했다. 팔짱을 낀 조로는 고개를 돌렸다. 미약한 죄책감이었다. 결국 조로도 동료에게 거짓말을 잘하는 인물은 못 되었기에. 그의 왼눈을 가로지른 흉터를 보던 로빈은 다시 미소를 지었다. 아무것도 묻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조금 놀라운걸.”

“나도 그래.”

“이름이 생긴 것도 그렇지만…, 네가 수술수술 열매의 능력에 대해서 알고 있을 줄은 몰랐거든.”

“응?”

“동맹에 관해서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고 했었잖아?”

멍청한 소리와 함께 다시 고개를 돌려 본 로빈의 얼굴에는 의아함이 가득했다.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조로가 미간을 찌푸렸다. 대화가 묘하게 엇나가고 있음을 먼저 눈치챈 로빈은 주제를 바로 잡는 대신에 손을 피워냈다.

“자연계는 신의 열매라는 말, 혹시 들어본 적 있어?”

“…그, 하늘섬에 있던 놈 같은 거 말이냐.”

간신히 떠올리면 로빈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후후, 맞아. 신의 열매라는 말은 자연계의 희귀성도 있지만 대부분은 인간의 힘으로 거스를 수 없는 천재지변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되었어. 오래전부터 사람들은 이길 수 없는 미지를 신앙으로 삼고는 했지. 신의 열매라는 말은 자연계의 위험과 그들의 무한한 능력을 찬양하는 말이기도 해.”

“흠, 그렇군.”

팔짱을 끼고 있던 조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는 반 정도만 했지만, 반이나 했으니 일단 이해한 게 맞았다. 로빈이 미소 지었다.

“그런데 초인계 열매 중에서도 신의 열매라고 불리는 게 딱 하나 있어.”

책장과 책장 사이에 피어진 손은 책 한권을 찾아 조로에게 던졌다. 표지로 하트 모양의 과일이 그려져 있는 책은 어떤 열매에 대한 의사의 수기였다. 충분한 설명이었다.

“자연계가 신의 분노와 같다면 수술수술 열매는 신의 권리와도 같다고 해. 의사들의 꿈의 열매라고도 하는 그건 재기(才器) 있는 자가 먹을 때 모든 운명을 자신의 마음대로 한다고 하지. 육체를 분리하는 것뿐만 아니라 심장, 영혼, 더 나아가 이름까지도…….”

펑크 해저드에서 벌어졌던 소동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를 적대하던 해병들은 몸이 두 동강 나고도 살아 움직였고, 자신의 일당은 영혼이 뒤섞여 곤혹을 치렀으며 현재 배에 묶인 포로는 심장이 뽑힌 채 구금되어 있었다. 조로는 로빈으로부터 받은 책을 읽는 대신에 제자리에 돌려두었다.

“…그래서 트라오에게 가면 이름을 지울 수 있는 건가?”

“이름 수술에는 조건이 하나 있다고 들었어.”

“뭐지?”

“능력자가 운명을 믿지 않는 사람일 것.”

“…….”

“신을 믿지 않는 자만이 운명을 거스를 수 있다는 걸까? 나도 그 이상으로는 모르지만, 그에게 정말로 수술을 부탁할 거라면 늦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로빈은 그가 수술이 완전히 불가능할 거라는 가능성은 입에 담지 않았다. 이름을 지우고 싶어 하는 동료에 대한 배려였다. 그것을 눈치챈 조로는 말없이 그녀에게 등을 돌렸다. 그대로 문고리를 잡아 열려던 조로가 잠시 멈춰선다.

“누구 이름인지는 안 물어봐도 되는 거냐?”

“때가 되면 말해줄 거잖아?”

믿고 있으니까 괜찮아.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있는 로빈은 웃으며 말했다. 조로가 로빈을 당해낼 수 없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단지 나이나 지식의 차이 때문만은 아니었다. 다른 말을 얹지 않아도 오늘 있었던 대화가 다른 동료들에게 알려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비로소 안심한 조로가 문을 열려던 그때였다. 벽에서부터 수많은 팔이 튀어나와 나가려는 문을 가로막았다. 당황한 조로가 몸을 돌려 로빈을 보면 그녀는 여전히 턱을 괴고 있는 채 웃고 있었다.

“어디 가려고?”

“그야 볼일이 끝났으니까, 이제 자러…….”

“이름 수술에 대한 부작용, 들어야지?”

한기가 드는 기분이었다. 착각이 아닌 것도 같다. 눈까지 접은 채 웃고 있는 로빈을 보던 조로는 반항하는 대신에 결국 문고리를 놓았다. 그녀가 니코 로빈인 이상 조로는 당해낼 수 없기 때문이다.

 

자료로 존재하는 이름 수술에 대한 모든 것을 말해주는 등 그의 행동력을 걱정한 로빈의 근심과 달리 조로는 해가 뜬 뒤에도 곧바로 로우를 찾아가거나 하지는 않았다. 복합적인 이유에서였다. 언제 적이 될지 모르는 동맹에게 괜히 등을 내보였다가 어떤 변수가 될지 몰랐다. 사사로운 감정은 때로 독이 되고 약점이 된다. 자신의 개인적인 판단으로 인해 일당에 부정적인 영향이 갈 바에야 차라리 달궈진 쇠로 등을 지지는 쪽이 백번 천번 나았다. 그러니까 확신이 서지 않았다.

트라팔가 로우가 적힌 등을 트라팔가 로우에게 보였을 때, 그가 어떤 반응을 할지에 대해서.

아무리 봐도 감동을 받거나 할 것 같진 않았다. 내심 로빈은 로우에게도 운명의 이름이 있다든가, 보기완 다르게 운명을 믿는 사람이라서 조로가 수술받지 못하게 되는 쪽을 바라고 있었지만, 그것과 관련해서 조로는 확신할 수 있었다. 로우는 운명을 믿지 않는다. 그리고 운명을 거부하는 사람에게는 이름이 나타나지 않는다. 로우가 배에 탄 뒤로부터 남들 몰래 그를 관찰하던 조로가 작게 혀를 찼다.

*

의도치 않은 조로의 관찰은 써니 호에서 고잉 루피 선배 호─기괴한 네이밍이다─를 타고, 폴라 탱 호에 탈 때까지 이어졌다. 다행이라고 할만한 건 배를 바꿔탈 때마다 그를 관찰하기 좋은 타이밍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가 써니 호에 탔을 땐 처음 맺는 동맹을 신기해하는 시선이 많아 조로의 것도 같이 묻힐 수 있었다. 써니 호보다 몇 곱절은 시끄러웠지만, 딱히 로우에게 큰 관심을 두는 사람도 없었던 루피 선배 호에서는 오히려 로우가 경계를 풀었다. 속에 쌓아둔 숙원을 해결한 사람 특유의 초연함이었다.

내심 조로는 그가 이대로 발을 빼진 않을까 싶었다. 그러나 피로로 누적된 다크써클이 하룻밤의 숙면으로 사라지지 않듯, 드레스로자에서 한을 풀었다고 해도 로우는 로우였다. 확인되지 않은 인기척을 경계했고, 갑작스러운 전투에서도 빈틈이 없었다. 단지 펑크 해저드에서 만났을 때와는 또 다른 분위기가 느껴졌을 뿐. 드레스로자를 코앞에 둔 그에게서 죽음을 각오한 냄새가 났다면 조우에 도착한 그에게서는 어떤 안정감이 느껴졌다. 사황 중에서도 최강의 생물이라 불리는 카이도를 한 걸음 앞에 둔 상황에서 오른팔까지 잘렸다가 다시 붙은 로우는 훨씬 생기있어 보였다.

말고도 조로가 로우를 관찰하면서 몇 가지 알아낸 사실들은 대략 이러했다. 빵을 싫어했고, 노스 블루 출신치고는 이스트 블루의 식당에서나 팔 것 같은 주먹밥을 좋아했으며, 생선 가시를 잘 바른다는 것. 동료를 두고 다니지만 그만큼 그들을 믿어서 가능한 일이었다는 것. 해적이지만 의사의 소양을 버리지도 않았다는 것. 막무가내로 구는 루피에 의해 번번이 계획이 망가지는 꼴을 보고서도 꿋꿋하게 다음을 설계하는 고질병이 있다는 것. 낮은 목소리를 가졌지만 기분이 나쁠 때는 그보다 훨씬 내려간다는 것. 자기가 잘난 걸 안다는 것. 칠무해에 들어간 건 성격을 정말 많이 죽여서 가능한 일이었다는 것. 그리고 여자에게는 관심 없다는 것. 물론 남자에게도.

드레스로자에서 로우와 함께 도플라밍고를 상대한 루피는 그를 동료처럼 여겼다. 비단 루피뿐만이 아니었다. 새장에서 함께 살아남은 밀짚의 선원들은 더 이상 로우를 경계하지 않았다. 편하게 여기다 못해 그의 승선에 굉장히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조우에서 다시 만난 쵸파는 로우가 정말로 일당에 들어오는 줄 알고 그와 함께 나눌 의학 이야기에 굉장히 설레하기까지 했으니. 그가 얼마나 일당의 마음에 들었는지는 더 말하는 게 입 아플 정도였다. 당연하게도 로우는 그런 신뢰를 바라지 않았던 데다가 그 역시 누구 밑에서 머리 숙이고 있을 위인은 못 되었기에, 그의 영입은 항상 로우의 신경을 긁는 일방적인 태평함으로 마무리되고는 했다.

요컨대 더 이상 조로에게 수술을 미룰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안다. 등에 박힌 운명을 보고도 그것을 약점 삼거나 할 남자가 아니라는 것을. 그게 생사를 함께한 동맹이 아니었어도 말이다. 스스로가 환자임을 인정하고 의사인 그에게 수술을 부탁했다면 로우는 지나치지 못했으리라. 허구한 날 자신과 부딪혀도 결국 배고픈 사람을 지나치지 못하는 상디처럼. 그리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먼 미래에 자신은 그런 수술 같은 건 한 적 없다고 잡아뗄지도 몰랐다. 문제는 그런 로우가, 어느 순간부터 꽤 마음에 들었다는 것이다.

정신 나갈 것 같이 시끄러운 루피 선배 호에서 조용한 곳을 찾고 또 찾다가 제 옆에 앉던 로우는 조우에서도 종종 자신의 옆을 찾았다. 사람의 시선이 닿지 않을 때면 꼭이라고 해도 좋았다. 처음에는 드디어 시선이 들킨 건가 싶었다. 남모르게 긴장하고 있으면 로우는 성격 나빠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너, 역시 길치인 거 아닌가? 하고. 그런 뒤에는 자신의 길잡이를 자처했다. 처음엔 능력을 펼쳐 빠르게 상대를 옮겼던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제 옆에서 같이 걷기를 택했다. 결전을 앞둔 상태에서 계속 능력을 쓰며 체력을 낭비할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같이 걸을 때면 사실상 말이 길잡이지, 로우는 조로가 방향을 정하면 정하는 대로 군말 없이 걸었다. 어떤 대화를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다 앞에 절벽이나 바다가 나오면 여긴 이미 왔던 길이라고 지적하는 게 전부였다. 기어코 날이 다 저물어서 목적지를 찾게 되었음에도 로우는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다음날이 되어도 똑같았다. 조우의 숲에서 헤매는 조로를 로우가 찾았고, 조로의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같이 걸었다. 그럴 때마다 조로는 자신이 정말로 미아가 되어 버린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로우와 함께 걸을 때면 목적지가 어디였는지 기억나지 않은 탓이었다.

모든 이름은 성애를 뜻하지 않는다. 나미의 어깨에는 벨메일의 이름이 있었다. 그러나 등에 새겨진 이름이 몽키·D·루피도, 쥬라큘 미호크도 아니라면 조로에게 새겨질 이름이 뜻하는 건 결국 하나밖에 없었다.

끔찍한 일이었다.

*

조로는 다소 강압적일 수 있는 폴라 탱 호의 규칙에도 순순히 따랐다. 로우가 써니 호의 갑판에서 군말 없이 적응했던 것처럼 말이다. 중장비급 운동 기구도, 햇볕도 허용되지 않는 잠수함 속에서 조로가 할 수 있는 건 한정되어 있었다. 술을 마시거나, 프랑키를 등에 얹고 맨몸 운동을 하거나, 창밖에 있는 심해어를 보면 죽는 병에 걸린 우솝을 지켜주거나 하는 것들.

대부분은 앞서 말한 두 가지를 자기 전까지 반복했고, 마지막은 세 번 중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하는 일이었다. 그마저도 우솝이 방을 아예 프랑키와 같이 쓰기로 택하면서 없어졌지만. 자기 전까지 운동과 음주 두 가지로 고정되어 단조로워진 패턴에 장점이 있다면 자신의 생활 패턴에 익숙해지다 못해 친근함을 느낀 이들이 옆으로 붙어온다는 것이다.

자연을 벗 삼아 마시는 술도 충분히 맛있지만 사람이 웃고 떠드는 소리가 곁들어진 술은 또 다른 맛이 있다. 폴라 탱 호에도 그 맛을 아는 사람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집요하다고 할만큼 조로와 어울리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하나는 펭귄이었고 다른 하나는 샤치였다. 불침번이라든가, 의료 당직이라든가 하는 이유로 한 명이 빠질 때도 있었지만 그런 날이면 다른 하나는 꼭 붙어있었다. 이 배의 술은 너희들이 전부 거덜 내고 말 거라는 같은 크루의 타박에도 그들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조로는 그 둘이 붙어올 때마다 반가움을 느끼면서도 셋이서만 술을 마시고 싶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까 우리 캡틴은 어땠어?? 왜, 너희 배에서 말이야!”

셋이 모이면 꼭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주제가 한 가지로 고정되는 탓이었다. 말을 꺼낸 건 샤치였다. 항상 모자 그늘에 눈가를 가린 펭귄이 웃음을 터트렸다. 야, 임마! 너 그거 저번에도 물었어! 벌써 취했냐?

“뭐… 여기서랑 똑같지. 맨날 어디 틀어박혀서 안 나오고.”

조로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대답했다.

“하하하!! 어쩐지 예상이 되네!”

“그래도 우리 캡틴 멋있지? 요즘 그런 사람 어디 없다니까.”

“그럼! 우리 캡틴은 부족한 게 없지!!”

“원피스도 분명 우리 캡틴이 찾을걸!!”

“너네 벌써 취한 거 같은데.”

아니, 전혀! 일어서서 사이 좋게 어깨동무한 펭귄과 샤치가 동시에 말했다. 샤치는 몰라도 펭귄의 주량이 보통 사람보다는 셌던 걸 기억하던 조로는 작게 한숨만 내쉬었다. 오늘 그들이 들고 온 술은 쌀을 발효시켜 만든 사케였다. 잔을 든 손을 움직여, 의미 없이 그것을 빙글빙글 돌리던 조로가 이내 잔을 입으로 가져다 댄다.

“트라오한테 없는 거 있던데.”

“우리 캡틴한테?? 아, 혹시 그런 건가? 단점이 없다?”

우리 캡틴이 또 그런 부분에선 지나치게 이기적이긴 하지!! 샤치가 웃으며 말했다.

“아니, 이름.”

조로는 웃지 않고 대답했다. 펭귄과 샤치가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다가, 가운데에 조로를 두고 양옆에 앉았다. 야단떠는 몸짓들이었다.

“이름이 없긴 한데, 캡틴이 그걸 너한테 말했어?”

“딱히 숨기지도 않는 것 같더만.”

“맞아, 사실 숨기는 사람도 아니긴 한데.”

“뭐, 괜찮지 않아? 요즘은 없는 사람이 더 많기도 하고, 그건 캡틴의 선택이니까.”

“선택? 그냥 운명을 안 믿는 게 아니라?”

조로가 코웃음 치며 말했다. 어쩐지 비난하는 것 같이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그때까지도 실실 웃던 펭귄과 샤치가 슬그머니 눈빛을 교환했다.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뭐라고 할까, 캡틴은 일부러 만들지 않는다는 느낌이지.”

“어, 확실히. 캡틴은 운명을 미워하니까.”

결국 조로가 소리 나게 술잔을 내려놓았다. 적이었다면 분명 압도될 기백이었다. 기분 나쁜 티를 더 이상 숨기지도 못하고 입만 다물고 있으면 목 위로 무게가 느껴졌다. 펭귄이 팔을 걸어온 것이다. 그러다 못해 친근하게 몸을 붙여왔다. 동생 취급, 이라기에는 묘한 위화감이 느껴진다. 그것을 파악할 새도 없이 빈 잔에 술이 채워진다. 이번에는 샤치의 짓이었다.

“자, 간단하게 비유해보자고. 그러기 위해서 묻는 건데, 매의 눈에게 도전하는 이유가 뭐야? 단순히 최강이 되겠다는 야망?”

다시 펭귄이 목소리를 냈다. 거리가 좁혀진 시점에서 조로는 확신할 수 있었다. 샤치면 몰라도 펭귄만큼은 술에 취하지 않았다는 것을. 꼭 로빈과 우솝을 합쳐놓은 것만 같다. 두 사람이 들으면 우솝은 몰라도 로빈 쪽은 인간으로서 불쾌하다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솔직히 그랬다. 자신의 위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능청을 떠는 건 우솝 같았고, 그러면서도 자신보다 더 많은 수를 내다보고 있는 건 로빈 같았다. 펭귄의 꿍꿍이가 무엇인지, 샤치의 속내가 무엇인지 재던 조로는 채워진 술잔을 다시금 입에 갖다 댔다.

“…친구와의 약속이다.”

“우와!! 뭔 이유가 있을 거 같다고 생각했지만 역시 멋있네, 너! 이렇게 좋은 남자여도 돼?!”

샤치가 호들갑을 떨었다.

“좋아! 그럼 이렇게 생각해보자.”

덩달아 감탄사를 내뱉던 펭귄이 검지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만약에 그 친구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가 네가 매의 눈에게 도전하기 위한 동기뿐이었다면 어떨 것 같아? 그러니까 그 친구가…….”

보다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려던 펭귄이 말끝을 흐렸다. 조로의 등 뒤에 있는 샤치 때문이었다. 가슴 앞에 손을 X자로 모은 채 고개를 젓는 그는 더는 위험하다고 경고하고 있었다. 다시 확인한 조로의 표정이 험악하다는 말로도 부족했다. 적막이 감도는 건 찰나였다.

“하하, 미안, 미안. 역시 좀 예민한 이야기지?”

분명 동맹으로 묶였을 상대의 살기에도 펭귄은 사람 좋게 웃었다. 정말로 그냥 하는 사과가 아니라는 듯 붙여왔던 몸까지 떼고서 결백을 주장했다.

“근데 우리 캡틴의 생각이 그래.”

그때까지도 한없이 가벼웠던 목소리가 단번에 가라앉는다. 모자 그늘 속에 가려진 눈은 웃고 있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알아채는 데는 견문색도 필요 없었다.

“자세히는 말 못하지만, 과거에 로우는 어떤 사람에게 큰 은혜를 입었어. 그 은인이 어떻게 됐을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너라면 눈치챘겠지. 그런 로우에게 있어서 운명을 받아들이라는 건, 그 은인이 자길 위해 설계된 존재였다는 걸 믿으라는 말과 다름없다는 이야기야.”

묘하게 바뀐 칭호 속에서 조로는 그가 로우의 선원이 아닌, 로우의 친구로서 말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매정하게 보여도 이해해줘. 저래 보여도 막상 운명 같은 사랑을 느끼면 또 모르지. 차갑게만 보여도 열정적인 면이 있으니까. 무엇보다도 로우가 자유를 믿는다면 우린 변화를 믿거든!”

펭귄과 샤치가 짠 것처럼 주먹을 부딪쳤다. 조로는 여태까지 들었던 말 중에 그게 가장 듣기 힘들다고 생각했다.

“뭐, 이렇게 말해도 우리도 캡틴의 이름을 가진 사람은 동정하고 있지만!”

아니면 샤치의 말이 더 힘들었던가.

 

*

거울 앞에 선 조로는 윗옷을 벗고, 매일 같이 닦던 화도일문자를 꺼내 들었다.

성년을 코앞에 두고 맞이한 새로운 스승은 시야가 좁아지는 것을 경고하고 또 경계했다. 앞으로 펼쳐질 바다는 사실상 능력자와의 싸움이다. 능력자가 비능력자를 상대로 우위를 점한다면 그것은 악마로부터 빌린 화력의 차이가 아니라 정보의 차이다. 우리는 그들이 무슨 힘을 쓰는지 모른다. 정직하게 검을 휘두르는 이상,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풀조차 나를 죽일 수 있는 흉기가 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드레스로자에 도착하기 전부터 가라앉아있던 로우는 도플라밍고를 만난 뒤부터는 그를 죽이는 것만이 목표인 사람처럼 굴었다. 살의로 시야를 좁히다 보면 누군가가 나를 죽이려는 악의를 읽기도 어려워지는 법이다. 오른팔에 남은 그의 흉터는 지독한 악연의 끝을 알리는 증표이자 매몰된 침착함과 섣부른 무모함이 새겨진 흔적이었다. 그 시점에 조로는 로우에게 무엇도 요구할 생각이 없었다. 거대한 새와 함께 추락하고 싶어 하는 남자에게는 이름을 보이는 일도 아깝다고 생각했을 뿐.

그랬던 그에게 등을 보이기 두려워진 것은 언제부터였나. 조우에서 언제 도착할지도 모르는 길을 같이 걸으면서? 그게 아니면 루피 선배 호에서 같이 술을 마시던 때에? 설마 새장에서 해방되던 그 순간부터? 뭐가 됐든 스스로를 비웃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조로는 드레스로자에서 살아 돌아온 그 남자에게 무언가가 새겨지지는 않을까 기대했던 것이다. 그리고 로우는 운명이 아닌 자유를 믿는다고 했다. 더 이상 조로가 무엇도 바랄 수 없는 말이었다.

매일 같이 관리해온 덕에 전투 한 번 치르지 않았음에도 날이 서려 있는 검을 등 뒤에 가져다 댔다. 앞에 놓인 거울을 보면 칼날에 비친 이름이 보였다.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손잡이를 움직여 새겨진 글씨체를 훑던 조로가 금방 팔을 내렸다.

거울 속에는 등을 비출 검 같은 게 없어도 선명히 보이는 것들이 있다. 자신의 가슴팍을 가로지르는 흉터를 훑던 조로는 이내 벗었던 윗옷을 추슬렀다. 갈 곳이 정해진 것이다.

헤매고 헤맨 뒤에서야 선장실에 도착하면 9시가 되기까지 1분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걸린 시간은 2년이 넘었으니, 수술실에서 매정한 것은 로우가 맞았다.

*

 

이름을 없앤다고 마음이 지워지진 않는다.

마침내 이름 수술을 받다가 사망한 사례를 발견한 로빈이 조심스럽게 꺼낸 말이었다. 조로는 당연한 소리를 뭘 그리 심각하게 하나 싶었다. 이름 때문에 그에게 답지 않은 관심을 쏟았고, 그게 번져나간 게 문제였으나 이름 하나 때문에 흔들리지는 않는다. 조로는 그의 이름이 새겨져서 로우가 좋은 게 아니었다.

조로는 생선을 바르는 로우의 젓가락질이 지저분하지 않아서 좋았다. 자신을 무서워하는 쵸파를 은근히 귀여워하는 그가, 칠무해라는 칭호를 달아놓고도 로빈에게 이기지 못하는 게 좋아서, 그 남자가 좋았다.

트라팔가 로우가 새겨지지 않았어도 트라팔가 로우를 알게 되었다면 자신은 분명 그에게 이끌렸을 것이다. 살아 있는 동안에는 절대 입 밖에 내지 못할 말이었다.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 듯, 삶에 정성을 다하는 그의 태도가 좋았다. 책에 둘러싸여도 위화감이 없는 주제에 전투가 벌어지면 검을 뽑고 최전선에 서는 그의 당연함이 좋았다. 2년 하고도 세 개의 섬과 세 척의 배에 걸친 마음을 담아내기에 운명이라는 말은 너무 작다. 기실 운명에게 부당함을 느낀다면 무턱대고 싫어하는 그보다도 몸에 새기고 살아온 자신이 더 잘 알 것이다.

그런 자신의 마음이, 그에게 있어서 결국 정해진 운명으로만 느껴진다면 더 이상 할 말은 없었다. 무엇보다도 자유를 뒤쫓는 이를 붙잡아서 이겨본 적이 없었다.

비록 로우가 말하는 자유는 루피가 사랑하는 자유만큼 낭만적이진 않았지만, 뭐가 됐든 자신의 선택만을 믿는 자에게 이름을 들이밀며 강요할 수는 없었다. 이름을 지운 뒤로 선실에 틀어박힌 조로는 깨끗한 등을 침대 위에 뉘었다. 운명 따위로 매인 마음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지워지는 이름 따라 사라지는 마음인 게 더 나았을 거란 생각을 막을 수는 없었다.

 

써니 호에서도 해본 적 없던 칩거 생활이 일주일 넘게 이어지던 어느 날이었다. 그동안 조로는 술을 마실 일이 있어도 선실 밖을 나가지 않았는데, 그럼에도 배에 있는 대부분의 얼굴은 볼 수 있었다. 답지 않은 조로의 행동을 걱정한 선원들이 한 번씩 문을 두드린 덕분이었다. 귀찮아도 반드시 해야 하는 일들이 있다. 동료와 동맹 선원들의 불안을 달래고 호의를 받아들이는 일이 거기에 속했다. 기어코 배에 있는 스무 명의 선원들과 사무라이들까지 조로의 얼굴을 보고 가는 와중에도 한 번도 오지 않는 놈이 있었다. 밀짚모자가 없는 이 기회에 완벽하게 잠입할 계획을 짜야 한다는 말로 폴라 탱 호에 돌아온 그 날부터 방에 칩거했던 놈이었다.

기다리는 건 아니었다. 그런 건 원하지도, 바라지도 않았다. 펭귄과 샤치에게서 운명을 미워한다는 말을 전해들었을 때부터 그의 외면은 짐작했던 일이다. 운명은 그에게 어떤 가치도 없다. 뼈와 장기를 뽑아내는 고통과 다를 게 없다던 이름 수술이 그렇게 아프지 않았던 이유이기도 했다.

수많은 부작용을 들었던 것과 달리 조로에게 남은 후유증은 가끔씩 등이 시려오는 게 전부였다. 혼자만 계절감이 다른 듯 뼛속부터 차갑게 얼어붙는 한기가 피부를 긁어 내리는 것 빼고는 딱히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때문에 조로는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갈 것이라 믿기로 했다. 겨울이 지난 뒤에는 반드시 봄이 오듯이.

9시가 지나고 본격적으로 적막이 내려앉은 잠수함에서 조로가 눈을 감았다. 호흡을 가다듬다 보면 언제나의 소리가 들려온다. 파이프들이 내는 증기 소리, 혹은 흔한 고철의 삐걱임 소리, 눈이 어두운 심해어가 선체에 부딪히는 소리……, 그리고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

조로가 하나 남은 눈을 떴다. 이 시간이 지나서 문을 두드리는 상대는 대충 예상이 됐다. 하트 해적단의 선원은 절대 아니었다. 그들은 선장의 명령을 어기지 않는다. 비슷한 맥락으로 사무라이들도 아니었다. 무사도의 정신이니 뭐니 하는 이야기였다.

남은 가능성은 단 두 가지다. 기어코 모든 것을 알아버린 로빈이거나, 결국 프랑키에게서 쫓겨난 우솝이거나. 우솝은 정말로 심해어를 무서워하지는 않았다. 단지 어둡고 좁기까지 한 잠수함에서 오랫동안 고립되고 싶어하지도 않았을 뿐. 루피만큼은 못 해도 루피만큼이나 사람을 좋아하고 잔치를 즐겼던 놈이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있으면 노크는 문을 부술 듯한 굉음으로 바뀐다. 늘어지게 하품이나 하던 조로가 즉시 검으로 손을 뻗는 건 그 때문이다.

우솝은 아니다. 로빈은 더더욱 아니었고, 프랑키라면 애초에 목소리를 높였을 것이다. 심해의 어둠 속에서도 앞을 헤매지 않는 조로가 문밖에 서 있는 상대의 기색을 읽어내는 다음 순간, 쫓기듯 문을 열었다. 밖에 서 있는 기색은 그와 같은 마크를 달고 있을 선원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무거워서.

“나오는 게 너무 늦지 않나?”

문을 열면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입 밖으로 새어 나간다. 아니나 다를까 밖에는 로우가 서 있었다. 폴라 탱 호에서만큼은 선장실에 보관하는 듯 보였던 귀곡까지 들고 있는 채였다. 조우에서 마주칠 때마다 가장 많이 보던 모습이었다. 조로는 그의 앞에서 도망치는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일부러 목에 힘을 줬다.

“갑자기 뭐냐.”

“부탁하기 위해 왔다.”

속에 있는 모든 것을 덜어낸 목소리로 말하면 로우의 고개가 살짝 숙여진다. 모자챙 밑으로 얼굴 그늘이 진다. 쳐다보기 위해서는 고개를 들어야 하는 남자는 원래도 그리 색이 밝진 않았는데, 오늘은 기어코 모든 채도를 바다에 빼앗긴 것만 같았다. 그의 이상함을 감지하고 나면 목소리도 어딘가 긁혀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조로가 지적하는 것보다도 먼저 로우가 손을 들었다. 귀곡을 들지 않은 오른손이었다.

보란듯이 펼친 손바닥에는 자상을 입은 듯 투박한 흉터들이 가득했다. 보기만 해도 고통이 가늠되는 그것들은 모여서 하나의 글자를 만들고 있었다.

Roronoa Zoro

운명의 이름은 반드시 몸에 새겨진다.

새겨질 그것은 신의 천적이라 불리우는 D의 이름보다도 성스럽고, 천룡인이 남기는 용의 발굽보다도 뛰어난 속박이다. 절대적인 자연의 물리 법칙을 거스르는 능력자가 발을 담그는 그 즉시 집어삼켜 버리는 바다조차도 받아들이는 고요한 운명은 무엇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

“지울 수 있는 건 너뿐이다.”

로우가 말했다. 조로가 그의 손을 쳐냈다.

“헛소리 집어치워라. 아니면 손목이 잘리고 싶은 거냐?”

“잘라도 상관없어.”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는 귀곡을 챙겨온 이유가 있다는 말을 대신하고 있었다. 조로는 그의 이름을 수식하는데 있어서 기분 나쁜, 음침한, 불쾌한 같은 말이 따라붙는 이유를 비로소 알 것만 같았다.

페로나는 잘린다고 잘리는 건 줄 아냐며 자신을 혼냈다. 로빈은 단순히 신체에서 떨어지기만 하면 끝나는 간단한 이야기가 아닌 것 같다고 자신을 설득했다. 그런 게 아니어도 조로가 로우의 손을 자를 수는 없었다. 그는 카이도를 잡는데 중요한 전력이다. 무엇보다도 이 동맹은 선장과 선장이 맺은 동맹이었다. 아무리 본인이 원했다고 한들 일개 선원에 불과할 조로가, 한 배의 선장인 그의 손을 자를 수는 없었다. 하나의 검만 쓴다고 해도 손은 그가 능력을 쓰는 데 꼭 필요한 부위였다. 아니, 능력이 아니어도 그가 외과의로서 수술을 집도하기 위해서는 저 오른손은 반드시.

“네가 자르는 거면 상관없다.”

로우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오래전에 다 타버린 것 같은 회색빛 눈동자 속에는 희미한 열이 있었다.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군. 넌 운명 같은 것도 안 믿는다며.”

가까스로 울컥이는 마음을 참아낸 조로가 날카롭게 대꾸했다. 사나워 보인다면 대부분은 다크써클과 모자 그늘 때문이었던 그의 눈이 가늘게 좁혀진다. 발언의 경위를 찾는 것 같았다. 네 선원들에게 들었다. 엄한 데 불똥이 튀지 않도록 조로가 말을 덧붙였다. 이윽고 로우가 살짝 주먹 쥐었다. 길쭉한 손가락에도 손바닥을 가득 채운 이름은 완전히 가려지지 않았다.

“딱히 지금도 믿는 건 아니다.”

“하.”

“단지 네 등에 박힌 이름을 지우면서, 네 옆에서 걸을 수 있다면 운명이라도 괜찮다 생각했을 뿐이지.”

조로의 비웃음에도 아랑곳하지 않던 로우가 마저 입을 열었다. 꽉 쥔 주먹의 힘이 풀리고 다시금 이름이 보인다. 상대방이 읽기 쉽도록 새겨진 손가락 문신과 달리 조로의 이름은 오직 로우만이 읽기 쉽게끔 새겨져 있었다.

“…이름이 새겨진 지금의 내가 말해봐야 우스울 건 알지만, 지금도 난 운명이 아닌 사람의 의지를 믿는다. 이름을 지울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고 해도 이름을 지우기로 선택한 사람의 의지는 바꾸지 못했던 것처럼.”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냐.”

“지우고 싶지 않았던 내 이름을 지운 건 그것 때문이다. 그게 네 선택이었고, 나는 그런 걸 믿으니까.”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냐고.”

조로가 참지 못하고 속에 있던 혼란함을 내뱉었다. 담담하게 말하는 로우를 보며 그가 정말로 운명을 믿고서 제 앞에 서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아버린 탓이었다. 단지 로우는 선택했을 뿐이다. 어느 때보다 강렬한 확신을 가지고 제 앞에 서 있는 로우를 두고서, 조로는 초조함을 느꼈다. 얼핏 보면 단순한 자상으로밖에 생각되지 않는 이름이었음에도 소중한 무언가라도 되는 듯이 보던 로우가 다시금 시선을 마주해온다. 자신의 의지로 운명을 선택한 사람의 모습이었다.

“다시 날 선택해.”

결국 조로가 뒷걸음질 쳤다.

“운명이 아닌, 너로서 직접 나를 선택해.”

그렇게 벌려진 거리만큼 로우가 앞으로 다가온다.

“못하겠다면 내 손을 잘라라.”

고개를 돌리고 몸을 빼면 그의 오른손이 손목을 잡아 왔다.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린다. 그의 어깨에 놓인 귀곡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였다. 그다음에는 조로가 들었던 검들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부드럽게 자신을 잡아 앞으로 이끌던 남자가 조금씩 품으로 파고들었다. 많이 늦었다는 건 알아. 어쩌면 내가 너보다 길을 더 못 찾는 걸지도 모르지. 변명할 생각은 없다. 원망해도 괜찮아. 하지만 이제 누구도 담을 수 없게 되었다면 나를 선택해라. 싫다면 지금 밀어내고 내 손을 잘라. 더 이상 나는 이름을 지우지 못한다. 네 이름만큼은, 나는…. 어깨 위로 열렬하고도 열정적인 고백이 쏟아진다. 끝에는 애원과도 같았다.

그와 함께 뒤로 넘어가지 않도록 버티던 조로가 가까스로 입을 벌렸다. 아무리 그래도 입장이라는 게 있다고 따져야만 했는데. 안에서 무언가가 틀어막고 있는 것 같았다. 목소리가 나가질 않았다. 지금 당장 검을 들지 않는 것에 대해서 착각하지 말라고 말해야만 했다. 그도 그럴게, 발로 수술하는 의사라니 웃기기만 할 뿐이잖아. 애초에 네 선원들이 널 얼마나 아끼는 줄은 알아? 거기다 너는 아직 루피한테 지켜야 할 약속도 남았으니까…….

속에서 얼버무리는 말들이 희미해진다. 로우의 오른손이 이미 비어버린 자신의 등 위를 더듬는다. 결국 조로가 로우의 옷깃을 붙잡았다.

아, 젠장.

등이 뜨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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