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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우조로│Memento Marimo

영화 메멘토 AU

영화 메멘토(2000)의 설정을 차용했습니다.

역순행적 구조로 글이 진행되며 처음에는 꼭!! 스크롤을 내리는 방향으로 읽어주세요


9

쏟아질듯한 빗속에서 남자가 손을 잡아온다. 동그란 뒤통수의 초록빛이 낯설다. 남자가 어디로 가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붙잡은 손이 뜨거워서, 로우는 막연하게도 그의 손을 놓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잊는다는 건 끔찍한 일이다.

트라오? 

8

남자가 입을 벌렸다. 다급하다 못해 절박하게 들리는 목소리가 부르는 건 자신의 이름이었다.


시전자의 생명을 갉아먹는 능력은 정말로 어느 날 갑자기, 생각하지 못한 방향으로 대가를 받으려 했다.

무심코 불러선 안 될 호칭을 입에 담았다.

7

뛰다보면 몸이 미친 듯이 차갑다 못해 소름이 돋는다. 쏟아지는 빗줄기에 그대로 고개를 꺾던 로우는 가까스로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본다. 뭘 하고 있었지? 직전까지 뛰고 있어서 숨이 조금 벅차다. 원래도 어두운 밤은 먹구름 낀 하늘 덕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몸을 적시는 게 위화감이 되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는다.

로우는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 어디를 가고 있는지 필사적으로 생각해본다. 제게는 해야 하는 일이 있었다. 가야만 하는 곳이 있었다. 그것들을 잊지 않기 위해 몸에 남겼던, 하트들. 로우가 눈을 깜빡인다. 해야 하는 일이 있었다. 12년 전의 복수. 코라 씨의 숙원. 가야만 하는 곳이 있었다. 드레스로자. 그곳에서 도플라밍고를 끌어내리기 위해 자신은, 이 빗속에서 뭘 하려고 했던 걸까.

오른손에는 언제나의 귀곡이 들려 있었다. 검집의 끝이 땅에 닿도록 내려 놓던 로우는 문득 자신의 윗옷 기장이 한 뼘 짧다는 것을 깨닫는다. 자신의 옷이 아니다. 저는 언제나 옷을 몸에 맞춰 입었다. 소매를 걷기 위해 다른 손을 뻗으면 그 안에 이미 다른 것이 있음을 깨닫는다. 손바닥에 겨우 들어올 종이였다. 뭘 하려고 했는지 적어뒀나보다. 안도는 오래가지 못 한다. 빗물에 젖어서 흐물거리는 종이는 글씨들이 전부 번져 있었기 때문이다. 놀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비가 더욱 거세진다. 그러나 로우는 여기서 기다려야 하는지 가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야 한다면 당장의 목적지를 몰랐고, 기다려야 한다면 그게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거나 슬퍼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가장 끔찍한 것은 잊는 것이다. 로우는 코라손을 잊지 않았다. 12년 전에 미니온 섬에서 벌어진 일들을 잊지 않았다. 해야 할 일을 잊지 않았다. 그러니 슬픈 건 아무것도 없었다. 가장 급한 일은 비를 피해야만 했다. 능력자는 비에 맞으면 무력했으니까.

다시 한번 주변을 둘러보던 로우는 자신의 등 뒤쪽에서 우뚝 서 있는 집 한 채를 발견한다. 뜬금없는 곳에 자리해 있는 집은 함정처럼 느껴졌으나 당장은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비가 멈출 때까지만 있자. 칠무해가 되며 수배서는 모두 만료되었으나, 민간인에게 쉽게 호의를 얻어낼 수 있는 인상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던 로우는 지붕 밑에서만 조용히 있다가 가기로 마음을 굳혔다.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쏟아지던 비로부터 시야를 확보한 로우가 눈을 찌푸리면서 앞으로 걷다 보면 그곳에서 누군가가 뛰쳐나오는 것이 보였다. 흔들리는 인영을 확인한 로우가 단번에 귀곡을 고쳐 들었다. 이 상황에서 적이라면 자신에게는 매우 불리했다. 그러나 상대는 싸워본 적이 없는지 본인의 기척을 숨기지 않고 달려들었다. 로우에게는 고마운 일이었다.

해군에서 영원히 제명되었다던 한 과학자를 찾던 중에 벌어진 일이었다. 해적의 심장 백 개를 바쳐 칠무해의 자리를 얻어낸 뒤로 하트 해적단에서 따로 빠져나와 행동하던 로우는 어느 날부턴가 볼펜을 쥘 수 없었다. 손이 심각하게 떨린 탓이었다. 펜을 쥐면 쥐는 대로 놓치던 그의 손은 나중엔 움직여지지도 않았다. 과로했을 뿐이라 생각한 다음에는 음식을 씹을 수가 없었다. 그다음에는 몸을 지탱하고 설 힘이 없어서 벽을 짚고 걷다가 땅에 여섯 번 정도 몸을 들이 박았고, 마침내 죽은 듯이 잠에 들었다가 깼을 때, 로우의 세상은 십 분에 갇혀 있었다. 살기 위해 신체 어딘가에 자리 잡은 악마에게 모든 것을 내어주던 몸이 마지막으로 악마에게 내준 건 기억이었다. 다시 펜을 쥘 수 있었고, 음식을 씹어 삼킬 수도 있었으며, 걷는 데도 무리가 없던 로우는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십분 이상 기억하지 못하고 잊어버렸다.

두 사람이 누워야 가득 차는 침대에서 눈을 떴다. 방안은 차갑게 식어있었다. 침대에 혼자 있어서만은 아니었다.

6

작게 난 유리창에 부딪힌 빗방울이 흘러내리다가 창틀에 고인다. 유리에게 방해받은 빗방울의 모양이 다를 뿐 완벽하게 똑같이 반복되는 빗방울의 모습을 보던 로우는 눈을 깜빡여 초점을 되찾는다. 여기서 뭘 하고 있었지?

서 있는 곳은 평범한 가정집 현관이었다. 창밖은 어두웠고 틈새로 비바람이 들이치고 있었다. 여기 들어온 건가? 아니, 그건 아니다. 옷은 젖지 않았고 몸은 말라 있었으며 오른손에는 귀곡이 있다. 그렇다면 나가려고 한 건가? 왜? 자신은 몸이 젖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몸이 젖으면 모든 게 끔찍했다. 힘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고, 다른 사람이 자신의 목숨을 가지고 있는 기분이었으며, 죽어도 이상할 것 같지 않았고, 미친 듯이 우울했다. 그럼에도 자신은 쏟아지는 비를 맞고 나가려고 했다. 여기가 어디길래? 주변을 제대로 확인하기 위해 몸을 돌리려고 하다 보면 왼손 안에 바스락거리는 게 있었다. 종이 쪼가리였다. 로우는 그것이 자기 자신을 위해 남긴 기록이라는 것을 단번에 눈치챈다. 손안에서 고쳐쥐다가, 구겨지듯 접혀있는 것을 한손 가락으로 집어 폈다.

만나야 하는 사람: 롤로노아 조로

적혀 있는 필체는 자신의 글씨체가 분명했다. 과거에 머물러 있는 기억을 더듬으며 입안에서 남자의 이름을 굴리던 로우는 얼마 가지 않아 세 자루의 검과 녹색 머리가 특징적인 남자를 떠올린다. 1년 전 샤본디 제도에서 스쳐 지나가듯 봤던 남자. 다른 이름은 아마도 해적 사냥꾼. 이 남자를 만나서 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 그게 뭐였냐면, 12년 전 일이었다. 자신의 은인이 죽은 날. 방아쇠를 당긴 건 그의 친형이었다. 남자의 이름 밑으로 무언가가 더 적혀 있는 것을 본 로우는 귀곡을 어깨에 걸치고 종이를 완전히 폈다. 대부분은 검은색 줄들로 전부 지워져 있었는데, 딱 하나 선명하게 적혀 있는 게 있었다.

여기서 도망쳐

C인지 G인지 구분되지 않게 흘려 쓴 글자를 눈에 담은 로우는 곧바로 문고리를 잡아 돌려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이치는 빗물들이 금방 구두를 적셔왔으나 중요하지 않았다. 쏟아지는 빗소리는 사람의 기척을 감춘다. 젖은 풀과 물 비린내는 사람의 체향을 감췄고, 먹구름 낀 밤하늘은 사람을 어둠으로 집어삼키길 잘했다. 그래서 자신은 비가 쏟아지는 와중에도 나가려고 했을 것이다.

여기서 도망쳐서, 해적 사냥꾼을 찾아 코라 씨의 복수를 하기 위해. 로우는 미련 없이 앞으로 뛰었다. 종이가 젖지 않도록 바지 주머니에 넣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썩어도 준치라고 로우는 의학적으로 자신의 상태가 어떤지를 알고 있었다. 능력의 부담으로 깎여가는 몸이 완전히 기능을 관두기 전에 극단적인 선택을 벌인 뇌는 사실 십 분도 기억하지 못했다. 벌어지는 일들을 기억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에 가깝겠다. 어떤 일을 하다가도 강한 충격이 끼어들면 그전까지 하고 있던 일을 잊었다. 기억은 능력의 부작용으로 쓰러지기 전, 그마저도 단편적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몸이 그러니 어느 순간부터 자연스럽게 능력을 쓰지 못하게 되는 것도 당연했다.

밖에 비가 내려 다행이었다. 능력자는 비를 맞으면 능력을 쓰지 못 하니까. 

5

구멍에 팔을 꿰어 넣고 마지막으로 머리를 집어 넣어 옷을 입은 로우는 그대로 가만히 서서 멈췄다. 이전에 뭘 하고 있었길래 내가 옷을 다시 입고 있지? 기장이 맞지 않는 걸 보니 내 옷도 아닌 것 같은데.

밖에는 비가 오고 있었다. 밖은 비가 오고 있었고, 여기는 집안이다. 어디인지는 단번에 알 수 없었으나 자신은 비를 맞는 것을 싫어했고, 직전에 옷을 입었다. 그것만으로 상황을 이해하기는 충분했다. 곳곳에서 달라붙던 위화감을 금방 떼어낼 수 있었던 건 이러한 일이 기억이 망가지기 전에도 자주 있었던 일이기 때문이었다.

민간인들은 곧장 겁을 집어먹고 도망치는 인상이었으나, 반대로 그것 때문에 하루 이틀의 거처, 혹은 정보를 빌미로 몸을 붙여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상대방의 환심이나 욕망에 어울려주는 일들에 로우는 어떤 거부감도 없었다. 기억이 이 모양이 되고도 그 방법이 먹히는 건 오히려 다행이었다. 어쩌면 칠무해라는 이름값 때문일지도 모르고. 이러나저러나 십 분마다 기억을 잃는 남자가 침대에서 어떤 모습이었을지 떠오르지 않는 것만큼은 감사한 일로 여겨진다.

로우는 손바닥을 들어 얼굴을 쓸었다. 세상을 잡아먹을 듯이 쏟아지고 있는 비 때문인지 몰라도 집안은 식어있다 못해 냉기가 돌았다. 추위에는 익숙했으나 비 오는 날 밤의 냉기는 공기가 차가운 것과는 다른 서늘함이 있었다. 보아하니 정보 때문은 아닌 듯했고 하루 이틀의 거처를 위해 들어온 집인 것 같았다. 마른세수를 하다가 마지막으로 머리칼을 쓸어 올리던 로우는 문득 완전히 덮이지 않은 오른쪽 손목 안쪽에 처음 보는 글자가 적혀있음을 깨닫는다. 미간이 좁혀진다.

The Facts

어쩐지 건방지게 읽히는 글자들이었다. 엄지손가락으로 문질러도 지워지지 않는 그것들을 더듬던 로우는 천천히, 한 뼘 짧은 옷 소매를 내리며 허리를 숙였다. 제 뒤에 놓인 소파에 앉기 위함이었다. 복도 저편에서부터 새어 나오는 빛에 의지하며 문신을 읽으려던 로우는 문득 왼쪽 손등에도 기억에 없는 글귀가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한다.

몸에 새긴 것을 잊지 말 것

문장을 입 안에서 굴린 로우는 반사적으로 자신의 가슴을 짚었다. 그곳에는 오래 전에 남긴 하트가 자리 잡고 있었다. 해야 하는 일을 잊지 않았다. 12년 전부터 기억이 망가진 지금까지도 로우는 그날을 잊은 적 없었다. 하지만 사실들이라니. 도플라밍고에 대한 정보라도 새겨둔 건가? 문서는 유출될 위험이 있었고 훼손되거나 조작되기도 쉬웠으니까…. 자연스레 이어지려던 문장은 끝맺어지지 못한다. 앉으려던 그곳에 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귀곡이었다. 수족처럼 여기며 함께 했던 자신의 검. 그 손잡이 근처에는 반쯤 접혀 있는 종이가 놓여 있었다. 미간을 찌푸린 로우가 종이를 집어 들었다. 그 안에는 자신의 필체로 적힌 메모가 있었다.

만나야 하는 사람: 롤로노아 조로

이 집에 누군가가 있다

검이 숨겨져 있었음

위험을 경고하는 내용에 로우는 곧바로 기척을 죽였다. 고개를 들어 빛이 새어 나오는 복도를 그제서야 제대로 보았다. 편한 대로 상황을 해석하고 있었을 뿐이었던 스스로는 탓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추위 따위로 옷을 입은 게 아니다.

이곳에서 도망치기 위해 옷을 입은 것이다.

밖에서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자신의 상태를 교묘할 이용할 적이라면 이 세상에서 한명밖에 없다. 도플라밍고. 기어코 사람을 보낸 걸까? 저에게 복수하려는 것을 알고서? 급하게 견문색을 넓히면 집에 있는 상대는 아직 자신의 낌새를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소리 나지 않게 귀곡을 챙겨 들던 로우는 자리에서 벗어나는 대신에 바로 앞에 있던 탁자로 손을 뻗었다. 아무렇지 않게 굴러다니는 펜을 쥔 로우는 다급하게 종이에서 판단이 끝난 글들을 지웠다. 자신을 믿었으나 믿지 못해서였다.

이런 곳에서 허무하게 붙잡힐 수는 없다. 자신에게는 해야만 하는 일이 있었다. 이곳을 빠져나가 롤로노아 조로를 만나야만 한다. 의식적으로 집중하기 위해 노력하던 로우는 다급히 종이 밑에 한문장을 집어넣는다. 여기서 도망쳐. 그것을 움켜 쥔 로우가 집안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기억에 이상이 생기면서 로우는 쓸데없이 사고하는 버릇을 잘라냈다. 제게 허락된 십 분을 제대로 쓰기 위함이었다. 시간에 갇히며 로우는 자신만큼은 의심 않고 믿었다. 저답게 살려면 그래야만 했다. 인간의 기억이라는 것은 생각보다 빈틈이 많다. 사람들은 자신이 정확히 보고 들은 것만 기억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제로 인식된 무언가가 저장되는 과정에서는 기억하기 편하도록 압축되거나 요약되는 사실들이 있으며, 그것은 기억의 왜곡을 불러일으키기 쉽다. 그런 오류를 방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기록이다. 자신이 겪은 일들과 다시 떠올려야 하는 것들을 빠짐 없이 적어두는 것. 로우는 기억에 남는 모든 것을 적기 시작했다.

 온 집에 불을 켜고 찾아도 새까맣게 물든 남자는 보이질 않았다. 침착하게 생각하려고 했다. 그와 달리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은 많았으니까. 

4

로우는 아랫입술을 깨물어 새어나가려는 목소리를 참아야만 했다. 문을 열자마자 쏟아지는 검 자루 때문이었다. 가까스로 다른 팔을 뻗어 그것들이 넘어지지 않도록 받은 로우는 이 상황이 굉장히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이상한 건 그 검 자루들에 섞여 있는 것 중에 툭 튀어나와 있는 귀곡이다. 너덜거리는 듯한 문 밑에는 걸쇠처럼 보이는 쇳조각들이 떨어져 있었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오래 걸리지 않는다. 이 문은 이중으로 잠겨 있었고, 자신의 귀곡은 숨겨져 있었다. …그래서 여긴 어디지?

평범한 가정집 같지만 기억에 익숙하진 않다. 주변은 눈을 찌푸리지 않으면 자세히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웠는데, 검들이 있던 곳은 마치 물감으로 덧바른 것같이 새까맸다. 이 너머에 무엇이 있길래. 고민은 오래가지 않는다. 이곳에는 귀곡이 있었다. 어두운 방 안으로 손을 뻗어 벽을 더듬던 로우는 얼마 지나지 않아 스위치를 발견한다. 손끝에 힘을 주면 딸깍이는 소리와 함께 빛이 들어온다. 방은 창고처럼 쓰이는 것 같았다. 가장 많이 보이는 건 책이었다. 그리고 신문들.

귀곡을 챙기고 자연스레 그것들로 손을 뻗던 로우는 신문을 잡기도 전에 자신의 팔뚝이 기억에 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글자들로 새겨져 있음을 깨닫는다. 자신이 윗옷을 입고 있지 않았다는 건 그다음이다. 그제야 자기 자신을 살피던 로우가 들어가려던 방으로부터 조금씩 뒷걸음질 쳤다. 몸에 적혀있는 게, 너무 많아서였다. 자신이 읽기 편하도록 기록된 글자들을 손가락으로 더듬어가던 로우는 자신의 오른쪽 팔뚝을 쥐었다.

The Facts

사실 1. 하트 해적단은 해체됐다.

피부에 새긴 글자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로우는 그것을 몇번이고 문질렀다. 그렇게 하면 그게 없던 일이 될 수 있을 것만 같아서. 로우는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어디에 가든지 끝까지 자신을 따라오겠다던 스무명의 선원들을. 혼자 움직이는 것을 이해해주고, 조우에서 만나기를 약속한 그들의 모습을. 베포의 고향이라던 그곳을 약속 장소로 삼은 건 그들을 살리기 위함이었다. 로우는 도플라밍고와 함께 죽을 생각이었으니까. 해군에게 체포됐을 리는 없다. 자신이 칠무해가 된 건 그들을 지키기 위함도 있었으니까. 칠무해의 해적단을 섣불리 건드릴 만큼 멍청한 해적에게 자신의 크루원이 당할 리도 없다. 그렇다면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자신의 해적단을 노릴 사람은.

12년 전부터 잊어본 적 없던 불길한 웃음이 뇌리를 스친다. 다시 한번 로우가 몸을 뒤로 빼는 그 순간이었다. 발아래 각진 것이 밟혔다. 황급히 다리를 들어 확인한 그곳에는 펜과 종이가 떨어져 있었다. 문을 열기 전에 놓친 건가? 그것들을 들어서 본 로우는 그대로 벽을 짚었다.

만나야 하는 사람: 롤로노아 조로

이 집에 누군가가 있다

만나야 하는 사람의 이름이 적힌 것을 보면 이곳은 그의 집인가? 아니, 만났다면 이 집에 누군가가 있다고 경고하고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빠르게 굴러가는 머리로 상황을 판단할 수록 로우는 자신이 침착해지고 있음을 느꼈다. 펭귄과 샤치, 베포에게 큰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궤멸이라는 단어를 썼겠지. 그 밑에 복수해야 할 상대를 적어놨을 것이고. 절망하긴 이르다. 아직 만날 사람이 있었고 들을 게 있었다.

롤로노아 조로, 입안에서 세 번쯤 굴리다 보면 그가 1년 전 정상 결전에서 살렸던 밀짚모자의 부선장이었다는 사실이 떠오른다. 그 밑에 자신이 알게 된 사실─검이 숨겨져 있었음─을 적던 로우는 자신의 몸에 적힌 문신들을 바라보았다. 당장 이곳에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있다면 이것들을 가릴 필요가 있었다. 자신에게 중요한 모든 것들을 적어놓은 문신들은 약점이 되기에 충분했다. 귀곡과 펜을 챙긴 로우는 길게 나있는 복도를 빠져나왔다. 보통의 가정집이 그렇듯 가장 크게 나 있는 거실의 소파 등받이에는 누군가가 벗어던져 둔 듯한 옷이 걸려 있었다. 로우는 탁자 위로 펜을 던지고 소파에 귀곡과 종이를 내려놓았다.

로우는 기억이 이렇게 되고도 한 번도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억이 이렇게 되고도 매달릴 일들이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오랫동안 방치해둔 것을 찾기 위해 창고로 향하면 그곳에서는 이미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바닥에는 쓸모없게 된 쇳조각들이 굴러다니고 있었고, 그 안에는 검 하나가 비어 있었다. 또 그 남자를 찾으러 간 것이다.

3

계단에서 내려와 고개를 드는 것과 동시에 걸음이 멈춘다. 로우가 천천히 주변을 살폈다. 여기가 어디지? 처음 보는 집이다. 밖에서는 비가 내리고 있다. 한밤중에 집안을 돌아다니고 있었나? 왜? 펜이 꽂힌 손에는 종이가 들려 있었으나 주변이 어두워 글자를 쉽게 읽을 수 없었다. 로우가 눈가를 찌푸리고는 종이를 가까이 했다. 쓰여 있는 건 두 문장이었다.

만나야 할 사람: 롤로노아 조로

이 집에 누군가가 있다

위에는 정갈했는데, 밑에는 그렇지 못했다. 좋은 상황은 아니다. 여기는 비를 피하기 위해 머무르고 있던 곳인가? 스위치를 찾아 불을 켜는 대신에 어둠에 눈이 익기를 기다리며 주변을 살폈다. 그러고 나면 묘한 초조감이 따라온다. 무언갈 잊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로우는 동요에 휩쓸리는 대신에 자신이 아는 것들을 되뇌인다. 이름부터 숨겨진 성, 나이, 출신, 살아온 과정…… 코라 씨. 그리고 12년의 세월은 그렇게 단번에 속에서 사라진다.

집안은 폐가처럼 보이진 않았다. 빛이 있어야 확신하겠지만 얼핏 보기에도 생활감이 묻어나왔다. 이를테면 소파 등받이에 올려진 옷가지 같은 것들. 견문색을 펼쳐 인기척을 찾으면 한 명, 그것도 자는 듯했다. 로우는 도플라밍고의 사람들을 기억한다. 왕을 기쁘게 만들기 위해 죽음도 불사르는 자들. 그들이 자신을 죽이거나 열매를 빼앗기 위해 이 집에 들어왔다면 태평하게 자고 있을 린 없다. 그렇다면, 하룻밤 재워준 사람인가. 필요한 가구만 들어가 있는 집은 굉장히 깔끔해 보였다. 전체적으로 낮은 채도로 통일된 집안은 묘한 안정감이 있었다. 집에 대한 짧은 감상을 마친 로우는 기척이 느껴지지 않은 방문을 열고 다녔다. 예의가 아니라는 짓은 알았지만 더 이상 평화에 젖어 있을 시간 따위는 없었다. 제게는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코라 씨의 복수와 드레스로자의 탈환, 도플라밍고의 죽음. 그걸 위해 찾아야 하는 롤로노아 조로.

발음하기 위해서는 혀를 많이 써야 하는 이름들은 곱씹을 수록 떠오르는 게 많았다. 녹색 머리에 삼도류가 특징이던 검사. 로우는 그의 흉터에 대해 주의 깊게 봤던 것을 기억한다. 선장에게 달린 D의 이름만큼이나 그 흉터들이 흥미로웠다. 깨끗하게 잘린 단면에도 불구하고 꿰맨 바느질들이 엉성해서 남은 상흔들. 그리고 감겨 있던 왼쪽 눈. 그것을 보라는 듯 왼쪽 귀에는 세 개의 피어싱이 달려 있었다. 남자는 그것을 만져도 별로 경계하지 않았다. 제 몸에 몇 배나 큰 적을 베고도 상처 하나 나지 않고 태연하게 술을 마시던 그는 분명 도플라밍고를 쓰러트리는데 중요한 전력이 될 것이다.

눈앞에 있는 방문을 열면 정리되어있는 옷방과 운동 기구들이 놓여 있는 등 지극히 평화로운 일상의 모습만 반복되고 있었다. 한손에 종이를 들고 계속해서 방문을 열다 보면 어느 한 곳에서 문고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그곳이 잠겨 있음을 안 로우가 힘을 줘서 문고리를 돌리기를 반복했다. 손등에 핏줄이 서면 금속이 튕겨 나가는 소리와 함께 문고리가 돌아간다. 평범한 가정집의 잠금장치를 부수는 것 정도야 별일도 아니었는데, 문제는 문이 열리다가 말았다. 안에 걸쇠로 이중 잠금장치가 되어있던 것이다. 그곳에 집주인이 숨기려던 비밀이 있음을 직감한 로우는 잠시 자신이 걸어온 복도를 바라보다가, 문을 잡아 뜯듯이 열었다.

몸의 한계가 오고 기억이 멈추던 그때, 로우는 코라손을 잊지 않고 12년 전 있었던 일을 잊지 않았음을 감사하게 여겼다. 그렇지 않으면 이러고 살아 있을 이유가 없었으니까. 꿈에서 깨어나는 듯한 기분을 느낄 때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다정하고 상냥한 사람의 이름이 아닌, 해야만 한다는 초조함인 건 그 때문일 것이다. 기실 그랬기 때문에 더더욱 기억과 기록에 집착하는 걸지도 몰랐다. 떠올려야 할 이름을 단번에 떠올리지 못한 내가 싫어서.

서랍에 숨겨놓은 전보 벌레를 꺼냈다. 그가 갈만한 곳으로 가장 유력한 이들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곧바로 끊었다. 집 문이 열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근처에는 들이친 빗물이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았다.

2

눈을 깜빡이던 로우가 주변을 살폈다. 밖에선 비가 내리고 있다. 겨울인가? 날씨가 차갑고, 자신이 있는 곳은 침대 위다. 그리고 자신은… 메모를 하고 있었고, 손은 조금 떨고 있다. 몸의 후유증은 자주 나타나는 증상이었다. 메모에 적은 건, 만나야 할 사람: 롤로노아 조로. 그 이름을 두 번 정도 읽은 로우는 금방 그의 또 다른 이름을 기억해낸다.

해적 사냥꾼. 그를 만나라고 적었는지에 대해서는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그건 십 분을 헛되게 쓰는 일이다. 메모를 쓸 때는 추론이 들어가서는 안 된다. 하얀 섬에서 사황이랑 붙을 지도 모른다는 말에 신이 나던 그의 모습을 떠올리던 로우의 눈에 문득 종이를 잡고 있던 왼손 손등이 들어온다. 몸에 새긴 것을 잊지 말 것. 우스운 당부라고 생각했다. 왜냐면…… 하트를 잊을 일은 없었으니까.

그것은 자신의 평생의 숙원이었다. 그리고 그 문장이 의미하는 문신이 다른 것들이라고 알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는다. 팔뚝에 다른 것들이 적혀 있었던 것이다. 사실들. 어쩐지 불쾌한 단어다. 몸에 적혀있는데도 그랬다. 로우가 상체를 일으켜 자신의 몸을 내려다 보려는 순간이었다. 침대가 출렁였다. 옆에 누군가가 누워있던 것이다. 로우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의식하지 못하고 있던 스탠드를 껐다. 빛이 사라진 방에 단번에 어둠이 가라앉는다. 순식간에 앞도 보이지 않는 그 상황에서, 로우는 보이지 않게 된 문신을 읽는 대신에 종이를 고정했다. 잊으면 곤란한 사실을 적기 위함이었다.

이 집에 누군가가 있다.

같은 침대에 누워서 자고 있었다면 해석할 여지는 하나 밖에 없었음에도 로우가 그런 식으로 말을 적었던 건 불을 끄기 직전 얼핏 보였던 그의 발목 때문이었다. 아킬레스건 바로 위쪽에는 발목을 자르는 게 아니고서야 나기 힘든 흉터가 있었다. 평범한 사람은 몸에 그런 것을 갖고 살지 않는다. 설령 몸을 섞었다고 할 지라도 경계해서 나쁠 건 없다. 감각에 의해 적은 글씨체는 평소보다 더 날려있었으나 읽는 데 문제는 없었다.

로우는 종이를 들고 서둘러 방을 빠져나갔다. 당장 자신의 몸에 적혀 있는 문신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아직 시간이 충분히 남아 있었다. 불안해하지 말고, 천천히, 집중해서, 자신에게 있었던 일을 더듬고, 잊지 않고자 한다면.

로우는 정말로 잊고 싶지 않았다. 잊는다는 건,

망설임 없이 밖으로 내달리면 이곳을 향해 걸어오는 인영이 보였다.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잊는다는 건 끔찍했으나,

1

천둥 소리가 고막을 울린다. 눈을 뜬 로우는 등을 떼고 곧바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전신에 닿는 감각이 지나치게 생생해서였다. 습관적으로 오른팔을 뻗어 스탠드를 찾으면 눈이 놀라지 않을 만큼의 빛이 켜진다. 로우가 급히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선장실인가? 아니, 아니다. 적당히 높은 천장과 넓은 방 안에 놓인 커다란 침대, 그 위에 올려진 침구들은 전부 하얀색과 연회색으로 꾸며져 있었다. 손이 닿을 만한 곳에는 간이 탁상과 그 위에 스탠드와 함께 종이와 펜이 올려져 있었고 벽 한 쪽에 넓게 난 창에는 남청색 커튼이 달려 있었다. 평화가 잠들어있는 듯한 이곳이 침실이라는 자각은 그 뒤에 들었다. 옆에는 사람이 누워 있다. 이런 젠장. 욕을 씹어 삼킨 로우가 이불을 걷었다. 그러고 나면, 몸 안에 가득한 문신들이 보였다. 목 아래부터 시작된 검은 선들은 어깨를 타고 가슴을 지나, 팔, 손등 위, 하다 하다 손가락 위까지 물들여 놓고는 그것으로도 부족했는지 배부터 허리 아래까지 이어져 있었다. 기억해야 하는 건 살아 있는 이유였다. 자신이 살아서 하는 모든 일은 코라손의 업적이었으니까. 잊지 않으면 되는 것은 그것 뿐인데, 번질 일 없는 그것들은 하트를 위해 새겨져 있지 않았다. 로우는 침착하게 스탠드 불빛에 자신의 문신을 비춰보기 시작한다. 왼쪽 손등에는 몸에 새긴 것을 잊지 말라는 가소로운 당부가 적혀 있었고, 팔뚝에는 사실들이 적혀 있었다.

The Facts 

사실 1. 하트 해적단은 해체 됐다

사실 2. 칠무해는 박탈 당했다

사실 3. 코라 씨의 숙원은 해결 됐다

사실 4. 나는 찾을 사람이 없다 

사실 5. 내가 해야 할 일은 더 이상 없다 

모든 게 끝났다고?

내가 해야 할 일이 더 없다고?

G인지 C인지 구분가지 않게 흘려 쓴 글자들을 보던 로우는 그것들이 전부 거짓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정말로 자신이 코라 씨의 숙원을 해결했다면, 그래서 해야 할 일이 없다면, 복수를 위해 찾을 사람이 없다면, 이 끔찍한 기분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모든 걸 끝냈고 더 이상 기억할 게 없다면 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든단 말인가? 로우는 급히 다른 문신들을 짚었다. 그러면서도 떠올리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자신의 마지막 기억은, 마지막 기억은 하얀 눈밭이었다. 미니온 섬? 아니, 펑크해저드였다. 하루에도 몇번씩 반대편 지대에 있는 화산이 터지던 섬. 사람이 살 수 없던 그 섬에는 도플라밍고가 숨기고 있던 게 많았다. 기억을 믿지 마라. 쇄골 밑에 문신을 더듬어 읽은 로우는 그 문장은 제 몸에서 지워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찾기도 힘들다던 섬으로 용케 휘말려든 불청객들. 그들의 선장은 자신이 예전에 살렸던 신의 천적이었다. 그렇게 톱니바퀴를 부쉈다.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고, D가 또 한 번 폭풍을 일으키며, 신의 천적은 마침내 하늘에서 군림하던 천룡인을 끌어내렸다. 로우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 하지만 어떻게? 발버둥 치지 않으면 언제나 죽음이 끝에서 자신을 기다렸다. 삶에 대한 의지가 강한 건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죽음을 기다리며 무력하게 살고 싶지 않았다. 무력하게 꺾이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도플라밍고를 땅에 끌어내리고도 자신은 살아있어서, 조우에 갔다. 다시 만나지 못할 줄 알았던 크루원들을 만나기 위해. 그곳에서는 약속을 지켜야 했다. 또 다른 D에게, 밀짚모자에게, 약속했던 사황을 끌어내리기 위한 동맹을 이어 나갔으며, 사황의 섬으로 출항할 준비를 하던 그때, 20명의 몫보다 더 많은 짐들을 챙겨야만 했다. 자신의 선원들이 아닌 이들이 배를 타서. 그들과 함께 사황의 섬으로 먼저 도착하기 위해. 항상 메모해둘 것. 모든 기억을 적어둘 수는 없다. 혼란함이 없기 위해서는 규칙이 필요했다. 이를테면 번호를 매겨둔 사실 같이 체계가 있어야만 했다. 남들은 모르는 규칙이 필요했다. 와노쿠니로 가던 폴라 탱 호에서 어떤 남자가 매번 똑같은 곳에서 같은 방향으로 길을 헤맸던 것처럼. 자신과 같은 결을 가진 듯 완전히 반대에 서 있던 남자가 걸을 때면 남몰래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짐승만큼이나 사나운 감각을 가진 남자는 걸을 때마다 생각보다 많은 소리가 났다. 무식한 덤벨들을 그렇게 휘두르고도 구두 소리가 무겁지 않아서였을까. 세 개의 검 자루가 자기들끼리 부딪히던 소리들. 그러다 걸음이 빨라질 때면 짤랑거리는 소리들도 같이 들렸다. 왼쪽 귀에 달린 피어싱 때문이었다. 로우는 그게 좋았다. 항상 등만 보여주던 남자가 자신에게 걸어올 때가, 그렇게 자신의 앞에서 멈춰서서 손을 내밀었던 남자가. 

미친 사람처럼 자신의 몸에 남은 문신을 읽어가던 로우의 손이 가슴팍에서 멈췄다. 그곳에는 몇번이고 덧씌워서 오히려 읽기 힘든 글자들이 있었다. 열 한글자의 알파벳은 누군가의 이름이었다. 

롤로노아 조로 

다급하게 스탠드 밑에 있는 종이와 펜에게 손을 뻗었다. 로우는 자신이 읽은 이름을 적었다가, 그 옆에 단어들을 덧붙였다. 그를 만나야만 했다. 만나서, 말해야만 했다. 잊지 않았다고. 기억하고 있다고. 그 모든 일들을 없던 일로 만들 수는 없다고. 애써 초조하지 않으려 했다. 침착함을 잃는 건 위험 신호였다. 칠무해에서 박탈당했다면 앞으로는 해군들도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지금은 집중해야 할 때다. 불안한 기억을 갖고 그에게 돌아가기 위해서는 남겨진 기록들을 따라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게 주어진 십 분을 영리하게 활용해야 했다. 추론을 남기는 건 위험하다. 자칫하다간 십 분을 낭비하게 될 지도 몰랐으니 적혀있는 건 언제나 상황을 정확하게 설명하거나 판단하는 말들이어야만 했다. 잊고 싶지 않을 수록 정확한 기록은 필수적이어야 했으며 절대적이어야 했다.

로우는 정말로 잊고 싶지 않았다. 왜냐면 그 남자는. 한쪽 눈을 잃고, 무식한 상처를 가슴에 달고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 남자는. 죽을 때까지 말하지 못할 거라 여겼던 자신의 꿈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웃으며 긍정했던 롤로노아 조로는.

─8

“로우!!”

억센 힘으로 팔이 붙잡힌다.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나온 이름에 로우가 몸을 돌리면 그곳에는 크게 당황한 듯한 남자가 있었다. 비가 쏟아지는 게 보통이 아니긴 했는지, 금방 집에서 달려온 것처럼 보이던 남자는 금세 젖어가고 있었다. 로우는 애써 당황함을 누르고 자신의 이름을 부른 남자가 누군지 기억해내려고 했다. 기억이 불완전하다는 것은 들켜서 좋을 게 없었다. 남자는 자신의 팔을 놓는 대신에 천천히 숨을 골랐다. 어쩐지 지쳐보였다. 왼쪽 귀에 걸린 피어싱이 짤랑거리고, 비에 젖은 초록색 머리칼이 내려앉는다. 긁힌 상처에 의해 영원히 닫힌 듯이 보이는 왼쪽 눈꺼풀이 파르르 떨린다. 로우는 그제야 그가 누군지 기억해낸다. 한 번이었지만 분명하게 마주친 적 있었다. 선장을 위해 사황에게 덤벼들던 남자. 겁도 없이 다른 해적단의 선장인 자신에게 뒤를 맡기고 사지로 걸어갔던 남자. 떠올리면 속이 따끔했다. 기억이 온전하던 그때는 그게 싫었던 모양이다.

“해적 사냥꾼인가.”

마침내 목소리를 낸 로우는 부자연스럽지 않게 웃었다. 그를 기억해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네가 왜 여기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침 곤란하던 차였다. 갑작스럽겠지만,”

“그런 이름은 이제 쓰지 않아.”

남자가 입을 열었다.

난 대검호가 되었다.”

비가 내렸다.

“…하트 해적단은 해체 됐어. 네 선원들은 모두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해적보다는 훨씬 나은 삶을 살고 있다. 대해적시대가 끝났거든. 미안하지만 해적왕은 루피가 됐다. 별로 아쉬울 것도 없겠지. 코라손의 복수는 다 했으니까. 그리고 넌 D의 이름 때문에 또 크게 골치를 썩였는데… 그래서 그게 뭐였는지는 나도 이제 기억이 잘 안 난다. 나이가 든 거지.”

남자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러면, 주름이 잡혀 있는 눈가가 접혔다. 로우는 그제야 그를 쉽게 떠올리기 힘들었던 이유를 깨닫는다.

남자는 저가 기억하고 있던 것보다 훨씬 나이 들어 있던 것이다.

“네가 운이 없다던 말이 뭔지 이제야 좀 알겠다. 하필 걸려도 이런 날이 걸리냐. 천둥이 계속 네가 집중하길 방해했겠지. 날이 추워서 윗옷을 입었을 거고. 너 지금 입고 있는 옷이 내 옷인 건 알아? 뭐, 날이 이러고 시간이 이러면 벗고 있었어도 문신은 안 보였겠네. 눈도 굉장히 나빠졌으니까. 그러게 내가 내 이름 새길 시간에 안경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나 적어놓으라고 했지. 말이 나온 김에 하는 말인데 너 또 창고 부숴놨더라. 이럴 거면 거기다 이중 잠금은 왜 해놓으라고 한 거냐? 네가 도망쳐 나온 곳이 우리가 같이 살던 집인 건 알아? 정확히는 네가 고른 집이었어. 외딴곳에 있어야 내가 길을 헤매다가도 여기로 돌아올 거라면서 막무가내로 위치를 고르고 네 취향대로 가구를 집어넣은 집이었다. 네 꿈이었거든."

한 글자 한 글자 뭉개지지 않도록 신경 쓰며 말하던 조로는 비가 너무 많이 내려서 말을 잇기가 힘들다고 생각했다. 그런 와중에도 조로는 능력자인 상대가 왜 이런 빗속에 우두커니 서 있는지 알았다. 기억하지 못하는 선장을 데리고 끝나지 않을 항해를 해도 괜찮다던 하트의 선원들을 돌려 보내고, 보다 못한 자신의 동료들이 어떻게든 만들어온 해결책을 거절한 이유이기도 했다.

“넌 날 찾으려고 나온 거야. 내 이름이, 네 몸에 새겨져 있었을 테니까.”

로우는 잊는 것을 두려워했다.

“네 손안에 남겨진 메모는 비 때문에 읽을 수도 없겠지만, 트라오, 트라팔가…. 너는 나를,”

비가 내렸다. 그리고 모든 것을 쓸어내릴 듯이 쏟아져 내리는 비에도 지워지지 않는 것들이 있었다. 조로는 마침내 고개를 들어 자신의 연인을 바라보았다. 십분에 갇힌 남자를. 그리고 십년도 더 전에 복수에 성공한 남자를. 눈가에 주름이 잡히고도 짙은 다크써클 때문에 티가 나지 않는 그를. 그럼에도 항상 찌푸리고 있던 입매에 주름이 생긴 연인을. 항상 자신을 찾아 다니며, 기억하지 못하는 로우를.

시간이 지날수록 색이 옅어지는 회색 눈이 깜빡인다. 스물다섯, 스물여섯 언저리에 살던 그의 홍채에 수많은 세월이 지나간다. 그에게는 꿈이 있었다. 한 배의 선장이 갖고 있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작고, 하찮은 꿈이었다. 조로는 그것을 듣지도 않고 함께 하겠노라 긍정했다. 이윽고 로우가 입술을 벌렸다. 비가 내렸다. 

“내가 또 너를 잊었구나, 조로야.”

끔찍한 목소리였다.

그리고

조로는

잊는 것이 두렵지 않았다.

때문에 조로는 대답을 돌려주는 대신에 이대로 비에 젖어서 그대로 사라지고 싶어하는 남자를 조용히 끌어 안았다. 제 이름이 적혀 있는 곳에 귀를 갖다대면 심장 뛰는 소리가 들려온다. 천둥 따위가 감히 앗아갈 수 없는 소리였다. 잊는 것이 끔찍할지언정 조로는 그것이 두렵지 않았다. 로우가 자신을 그렇게 부르는 이상, 자신은 그의 어떤 것도 잊지 못함을 알았기에. 어디로 가야할 지 알지 못하는 남자를 말 없이 다독인다. 십 분이 훨씬 넘은 시간이 흘렀을 때, 조로는 마침내 젖어도 번지지 않는 로우에게 손을 뻗었다.

이제는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쏟아질듯한 빗속에서 남자가 손을 잡아온다. 


시간 순서

로우 시점 1, 2, 3... 8(-8), 9 

조로 시점 회색 > 검정 

로우와 조로의 시점이 겹치는 곳 -8, 9 (현재)

로우의 독백(검정>회색)은 어느 시점이든 상관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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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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