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조 단편

로우조로) 의과대학에 합격한 롤로노아 조로

현대AU / 부정 입학x

원피스 by 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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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어떤 사람들은 전생에 관한 기억을 지니고 있다. 트라팔가 로우도 그중 하나였다. 이성적인 사고로 판단하자면 로우가 지닌 기억은 ‘전생’이라 말하기엔 적절하지 않을지 모른다. 악마의 열매라느니 원피스라느니 허무맹랑하기 짝이 없는 개념을 바탕으로 삼고 있었으니까.

증명 불가한 기억은 비현실적인 망상이라고 하는 편이 온당했다. 그렇지만 로우는 동료와 은인을 만난 이후부터 제 기억이 거짓임을 한 치도 의심한 적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전생인지 뭔지 모를 과거의 인연을 다시 만나는 일이 익숙해지기까지 했다.

의과학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특이 현상이 더는 특별한 일이 아니게 되었다. 그랬기에 밀짚모자 일당과도 언젠가는 만나게 될 것이라 예견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로우는 크게 눈 뜨고서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벌렸다.

어지간하면 그러려니 하고 넘기겠지만,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만난 대상과 장소가 로우의 상식을 한참이나 벗어났기 때문에….

의도치 않게 참석한 의과대학 신입생 환영회에서 롤로노아 조로를 만났다. 해적 신분이면서 해적 사냥꾼을 이명으로 삼던 외눈의 검사. 지금은 양안 모두 멀쩡했고 허리춤의 칼집도 보이지 않았지만 왼쪽 귓불에 달린 귀걸이만큼은 여전히 반짝이며 금빛을 내고 있었다.

다시 만나서 반갑다느니, 여기서 만날 줄 몰랐다느니, 너도 기억 갖고 있냐느니 하는 이야기를 모두 건너뛰고서 로우가 물었다.

“조로야, 여긴 어떻게 온 거지?”

“신입생은 모두 참석하라길래 왔는데.”

“아니, 오게 된 경위 말야.”

“뭐 타고 왔는지 물어보는 거냐?”

“말장난 하자는 게 아니라….”

로우가 조로의 어깨를 붙잡고 진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조로야, 여기는 의술을 배우는 기관이다. 만에 하나 네가 의사 면허를 취득하게 된다면 병원에 근무하지 않더라도 사람들은 만일의 사태가 일어났을 때 너를 찾을 테고, 너는 의료인으로서 한 사람의 목숨을 책임져야 하는 상황을 맞닥뜨리게 될 거야.”

조로가 눈동자를 굴려 로우를 살폈다. 이제는 잠을 잘 자는 모양인지 눈 밑에 어두운 기운이 없었다. 손가락이나 손등은 무늬 하나 없이 깨끗했다. 멋 부리듯 착용하던 피어스도 보이지 않아서 언뜻 다른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으나 생명을 중하게 여기는 태도 만큼은 여전했다. 조로가 올곧은 시선으로 응수하며 말했다.

“트랑아, 나 여기 가벼운 마음으로 온 거 아니야.”

“…….”

거리낌 없는 눈빛에 거짓은 한 톨 보이지 않았다. 로우는 혼란스러운 심경 속에서 손을 떼어냈다.

“의과대학인 걸 알고서 온 게 맞다고?”

“당연하지. 애초에 장난삼아 올 수 있는 데가 아니잖아.”

“…편차치는 어떻게 맞췄지?”

“별 수 있냐, 죽어라 공부했다.”

그러자 로우의 눈이 조로를 처음 발견했을 때보다도 더 크게 떠졌다.

“공부를 했다고…? 네가…?”

“그게 무슨 섭섭한 반응이야?”

눈을 여러 번 깜빡여보았으나 조로는 환각이나 신기루 같은 존재가 아니었다. 로우는 지금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어떻게든 납득해보기 위해 기억을 더듬어 조로의 지적 수준이 돋보이던 순간을 회상해보았다.

그러고 보면 글자를 읽을 수 있었지. 한 글자 한 글자 더듬으며 읽는 게 아니라 술술 읽어내리곤 했다. 그뿐만 아니라 어디서 교육이라도 받은 것인지 붓을 힘 있게 긋는 편이었고… 그리고 셈도 계산할 줄 알아서 제가 받아야 하는 몫을 명확하게 요구할 줄도 알았다. 그리고 또….

“…….”

더 떠올리고 싶은데 머릿속이 백지장과 같았다. 한참을 멍청하게 서 있다가 얼떨떨한 어조로 물어보았다.

“너는 내가 알던 조로야가 아닌가…? 세계관이 다르다던가….”

로우가 낼 수 있는 최선의 결론이었다. 글자 읽고 셈하는 정도로는 의대에 진학할 수 없었다. 조로가 눈썹을 치켜떴다.

“내가 그렇게 엉성하게 보였나. 나도 내키면 공부쯤은 한다고.”

“…….”

“꿈 아니니까 꼬집지 마.”

“…….”

“나는 뭣하러 꼬집는 거냐? 내가 공부했다는 게 그렇게 이상한 일이야?”

“…….”

“나참, 그 정도로 못 믿겠으면 문제라도 내보던가.”

툭 내던진 말을 흘려넘기지 않고 받아들였다. 로우는 시험에 자주 출제되는 유형의 문제를 내고. 올해 시험과 재작년 시험에 나온 문제 유형을 비틀어서 내고. 교과서에 실리지만 수험에는 영원히 나오지 않을 법한 생뚱맞은 문제도 냈다. 조로는 모두 정답을 맞혔다. 로우가 몹시 충격받은 표정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역시 넌 조로야가 아닌….”

“얌마, 적당히 해.”

믿기 어려웠지만, 믿기 어려운 부분 빼고는 로우가 알던 롤로노아 조로 그대로였다. 로우는 다시금 눈을 깜빡이고서 조로의 모습을 살폈다.

몸통이 다소 얄쌍해진 감은 있으나 풍겨 나오는 기백만 보아도 해적 사냥꾼의 호기로운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귀에 매달린 3개의 금기둥도 어떻게 구한 것인지 디자인이 똑같았다.

공연히 갈증이 느껴져 목울대를 넘겼다. 운명이란 참으로 기이한 녀석이다. 예측 가능하게 흘러가는 듯 굴면서도 이따금 말도 안 되는 변수를 내던지곤 하니까. 로우는 인간의 두뇌로 감히 이해하기 어려운 우주의 신비로운 법칙을 마주할 때와 마찬가지로 조로의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럼 조로야 너 정말로 의사가 될 생각인가.”

“그래.”

“아픈 사람을 치료하는.”

“그렇겠지.”

“…….”

맞다고 한다면 조로는 앞으로 로우와 깊게 얽힐 수밖에 없다. 당장은 학교 선배기도 하고, 나중에 같은 병원에서 근무한다면 또 선후배가 될 테고, 어쩌면 평생 같은 근무처에서 얼굴을 마주할지 모르고… 설령 엇갈리더라도 이전의 삶까지 포함하여 수십년의 임상 경험을 보유한 숙련의는 여러모로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일 터였다.

“…밀짚모자야는 어떻게 지내지? 지금도 연락하나.”

“요즘은 안 해. 그 녀석 지금 아이슬란드에 있거든. 자세한 근황은 모르겠는데 분명 잘 지내고 있을 거야.”

“…….”

전생에서 방해물이라고 느꼈던 존재도 사라졌다. 180도 변모한 상황에 묻어두었던 감정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또 궁금한 거 있냐.”

그의 질문에 고개를 저었다. 궁금한 것이야 많았지만 지금 이 순간에 물어보고 싶진 않았다.

“놀라울 따름이군. 너와 같은 소속이 되다니….”

“그러게. 너 지금 몇 학년이야?”

“졸업반이다.”

“그렇군. 5년 과정이면 한참이나 위네.”

조로가 로우의 가슴팍을 손등으로 치며 씩 웃었다.

“잘 부탁해, 선배.”

“…….”

익숙한 미소에 지우려 애쓰던 감정이 되살아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

“로우 선배님 너무 자주 보이지 않아?”

“그러게. 다른 선배님들은 바쁘다고 난리던데….”

학과생들 사이에서 이상하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로우는 학교에 자주 나타났다.

“선배님, 또 오셨어요? 오늘은 무슨 일로 오신 거예요?”

“…조로야는 어디에 있지?”

별나다는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향했다. 조로는 동기생 사이에서 재량껏 술을 즐기고 있었다. 혼자서 신나게 퍼마시고 있다는 뜻이다. 지난 생에서도 자주 보던 모습이었다.

“이렇게 매일같이 마셔대면 금세 유급하고 말걸.”

“엇, 트랑아.”

취해서 금방이라도 고꾸라질 것 같은 사람을 벽에 기대게 하고 조로의 곁에 앉았다. 같은 테이블에 앉은 학생들의 상태는 다른 테이블보다도 좋지 않았다. 인간의 범주를 벗어난 주당의 페이스에 휘말린 것이 뻔하다. 취기 오른 시선들이 로우와 조로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트랑이가 뭐야요…?”

“아아아! 나 알 거 같아! 트라팔가라서 트랑이!”

“에엥, 귀여워어.”

대체 어떤 점이 재밌던 것인지 웃음소리가 크게 터졌다. 조로도 크게 입 벌려 웃으면서 한 잔을 털어 마셨다.

“저도 트랑이라고 불러도 되나여?”

누군가 말했으나 흘깃 쳐다보는 표정이 하도 무감정하여 술이 깰 지경이었다. 대선배에게 장난치려던 신입생이 머쓱해하면서 화제를 전환했다.

“두 분은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였나봐요.”

“…뭐, 지긋지긋한 악연이지.”

아까와 달리 로우의 입꼬리가 호선으로 그려졌다. 조금 전 했던 발언은 신경쓰지 않는 듯 하여 신입생이 마음 놓고 어깨를 늘어뜨렸다. 실없는 대화가 오가던 중 로우가 물었다.

“복대는 이제 안 하는 건가?”

“어어. 나미가 죽어도 하지 말라더라.”

“무슨 의도인진 알겠다만 너는 배를 따뜻하게 해주는 편이 좋은데.”

“트랑아, 간지러워.”

일순 주변이 조용해져서 좌중을 둘러보았다. 단순하게 아는 사이라고 하기엔 너무 가깝게 굴었을지 모른다. 어쩌면 뒷말이 나올지도 모르고. 그렇다 해도 로우는 상관없었고 조로도 아마 상관하지 않겠지만… 그래도 이제 막 학교 생활을 시작해야 하는 새내기를 위해 거리감을 조정하기로 했다.

*

집에 바래다주는 길. 두 사람이 눈 덮인 길을 걸었다. 현대의 조로는 내비게이션을 이용할 줄 안다고 말했다. 그랬기에 바래다줄 이유도 없고 의무도 없었지만, 언젠가 노란 잠수정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목적지에 당도하는 모습을 보아야만 마음이 놓였기에 동행을 자처했다. 로우는 왼쪽과 오른쪽을 구별할 줄 아는 조로를 신기하게 쳐다보면서 용무를 전했다.

“트랑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그편이 좋을 것 같다. 예전과는 상황이 달라졌으니까.”

“그럼 뭐라고 불러야 하는데?”

“평범하게 선배면 되지 않나.”

“트랑이 선배?”

“앞에 건 제외하고.”

“로우 선배.”

“…….”

조로로부터 이름으로 불린 건 이번이 두 번째였다. 언뜻 떠오르는 밤의 기억이 얼굴을 달뜨게 했다. 예전이었으면 모자를 눌러 써서 가렸을 테지만 지금은 고개를 숙이는 것이 고작이었다.

“얼굴이 너무 자주 빨개지는 거 아니냐? 홍조증 있어?”

“…너야말로 나사 빠진 사람처럼 웃음이 많아졌더군.”

“그런가? 나는 별반 달라진 거 없다고 생각하는데.”

“아니, 평상시에 말야. 예전엔 술을 앞에 두었을 때에만 웃는 편 아니었나.”

“아아, 너랑 지내던 무렵에는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당시엔 여러 일이 있었으니까.”

“…….”

로우가 조용히 숨을 내뱉었다. 모든 일이 엊그제처럼 선명했다. 파도 소리가 귓전을 스쳤고 규칙적인 기계음이 상념 속에서 달각였다. 바다를 등 뒤에 두던 녹색 머리의 검사는 품 안에서 요란하게 흔들리던 귀걸이의 주인이기도 했다.

기억이란 잊고 싶다고 해서 지워지는 대상이 아니었다. 풀빛을 닮은 색깔은 로우가 원치 않을 때에도 의식을 지배하는 날이 많았다. 조로의 소식을 신문으로만 접해야 하는 나날 또한 뇌리에 깊게 새겨져 있었다. 밤하늘의 달을 올려다 보며 반가움을 느끼는 것 말고는 어찌할 수 없던 존재가 지금은 바로 곁에 있었다.

로우는 조로가 어떤 최후를 맞이했는지 알지 못하고 새로운 삶도 어떻게 보냈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과거가 언급된 김에 물어보자 싶어 질문했다.

“의대엔 어쩌다 오게 된 거지? 검술은 어쩌고.”

“그건 취미로 할 거야. 진검 들다가 가검 들려니까 맛이 영 안 살더라고.”

“설마 사람 피부를 베기 위해 진학한 건 아니겠지.”

“그렇겠냐?”

시시껄렁한 잡담을 주고받다가 조로가 말했다.

“의대는 트랑이 너… 아니, 선배 때문에 온 거나 마찬가지야.”

“…뭐?”

“다시 태어나도 의사가 되고 싶다고 말했었잖아. 그래서 궁금했어. 생명을 구한다는 게 어떤 일인지.”

로우가 우뚝 멈춰 섰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이 많았다. 둘만 있을 때는 선배라고 부르지 않아도 된다거나. ‘그날’의 일이라면 서로 언급하지 않기로 암묵적인 합의가 이루어진 것 아니었는지. 그리고 로우 때문에 의대에 진학했다고 말하는 의중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정신 차리고 보면 조로의 팔목을 붙잡은 후였다. 조로는 잠자코 시선을 내린 후 말을 이었다.

“의사 말고 경찰을 할까 싶기도 했는데, 가능하면 선배가 좋아하는 일을 해보고 싶단 생각이 들더라고.”

심장이 점차 크게 뛰기 시작했다. 내뱉은 숨결이 하얀 증기가 되어 공기 속으로 흩어졌다. 떨어지는 눈꽃이 가로등 불빛을 받아 주황색으로 물들었다. 로우는 주변 풍경이 느려지는 것을 의식하면서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왜…?”

“…왜겠냐. 이 정도 말하면 알아들을 수 있잖아.”

“제대로 듣고 싶어.”

애원하듯 손에 힘을 주자 조로의 뺨이 붉게 물들었다. 허공을 떠돌던 눈송이가 기다란 속눈썹에 안착했고 이내 녹아내려서 방울로 얼룩졌다. 조로가 물기에 젖은 촉촉한 눈망울로 로우를 올려다보았다.

“선배를 좋아하니까.”

“…….”

“정말 좋아해.”

화목한 4인 가정에서 태어나 건실한 삶을 지내온 트라팔가 로우. 평탄하기 그지없던 삶에 태풍같은 존재가 나타났다. 눈꺼풀을 연신 깜빡여도 하얀 풍경을 등진 머리칼은 조금도 흐려지지 않았다.

눈이 내리는 영하의 날씨는 손끝을 무디게 만들 정도로 추웠으나 전신에 감도는 홧홧한 기운 때문에 덥기만 했다. 손에 쥔 체온도 마찬가지로 뜨거웠다. 로우와 조로, 둘은 같은 소속이었고 방해물은 어느 것도 없었다. 이전과는 다른 삶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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