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화 - 티타임(2)

“...대마법관님.”

“내, 그래도 정리한 걸세.”

“이게요..?”

손님이 온다고 기대한 게 잘못이었다. 자료건 뭐건 필요하다면 무작정 구해와 쌓아놓는 것 또한 아르크의 나쁜 습관 중 하나였는데, 그 양이 보통이 아닌지라 집무실뿐 아니라 응접실까지 짐이 넘어오는 경우가 허다했다. 어차피 평소에는 서류 결재를 받기 위해 찾아오는 마법사들이 대부분이라 크게 신경은 안 썼는데, 그래도 오늘은 정말 너무했다.

아르크의 말대로 정리를 한 흔적은 보였다. 흔적만 보일 정도로 청소한 게 문제지. 응접실 테이블의 반이 책과 서류탑이라 노아가 아주 도시를 만들지 그랬느냐고 비아냥거릴 정도였다. 테이블의 양옆에는 1인용 소파 네 개가 마주 보며 놓여 있었는데 세 사람이 쓴다고 세 개만 비워두고 나머지 하나에 짐을 몰아넣었다. 

노아가 제 스승을 흘겨보았다.  

‘이 스승님이 진짜..!’

그러나 그 시선을 뒤로한 아르크가 레인을 자리로 안내했다. 얼결에 사제사이에 끼인 레인은 말없이 소파로 가 앉을뿐이었다.

그새 노아가 행주를 챙겨와 테이블을 닦고 레인의 옆에 앉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자동 청소용 샬레인이 바닥을 분주히 돌아다니며 먼지를 빨아들이고 있던 덕분에 다과에 무언가가 더해지는 일은 없다는 점이었다.

레인이 컵을 들자, 아르크가 천천히 들라며 온화하게 얘기했다. 그가 가볍게 고개를 까딱이고 컵을 입에 갖다 대었다. 피곤함을 커피로 눌러보려는 발악처럼 보였다. 내용물을 반 정도 비운 레인이 컵을 내려놓자 기다리고 있던 아르크가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두 사람, 이 자리가 첫 대면은 아니었지?”

찻잔 손잡이를 잡은 노아의 손이 멈칫했다. 아, 시작이다.

옆자리의 레인을 곁눈질로 바라보았지만, 그는 익숙하다는 듯 태연히 쿠키를 베어물었다.

“뭐.. 비공식적인 자리도 대면이라 치면 그렇지.”

“상황이 상황이었던 지라, 인사를 나눌 겨를도 없었죠.”

레인의 말에 아르크가 손뼉을 치고 그 어느때보다 부드러운 시선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면 소개부터 다시 하겠네. 이쪽은 노아. 나우 중앙 마법사단의 수석 마법사이자, 내 수제자일세. 노아, 이쪽은 레인. 자네도 알다시피 나우 수석 연구원이자 공학자일세. 아까도 말했다시피 내 친우이기도 하고.”

“벌써 거기까지 얘기했나?”

“뭐, 비밀도 아니지 않은가.”

형식적인 인사였던걸까, 들어오면서 아르크에게 존칭을 사용하던 레인은 어느 새 말을 놓고 있었다. 레인의 태도를 보니 친우라는 아르크의 말을 거짓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무엇이 그들을 이어지게 한 것일까, 자신이 가질 수 없는 것을 알기에 진작 포기했던 마음이 일렁이는 것이 느껴졌다.

“악수도 해야 합니까?”

“하면 좋지.”

활짝 웃는 아르크가 오늘따라 참 얄미웠다. 겸연쩍게 볼을 긁고 있자니 레인이 먼저 손을 내밀고 있었다. 노아는 순간 두 사람이 저를 놀리기 위해 오늘 자리를 만든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레인의 표정이 너무 진지해 보여서 결국 그의 손을 맞잡고 가볍게 쥐었다.

“레인, 자네도 꽤 부드러워졌구먼.”

“아무렴. 누구 덕분 아니겠어.”

노아는 생각을 정정했다. 진지한 게 아니라 아르크에게 어떻게 맞춰야 할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고. 하지만 레인의 표정이 편안해보여서 노아는 그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제 얼굴에 뭐 묻었습니까?”

“아닙니다. 잠깐 딴생각 좀 하느라.”

“아무래도 자네랑 나랑 친우인게 믿기지 않는 모양일세그려.”

“믿을 수 없다면 믿지 않아도 좋습니다. 애당초 아르크와 내가 친우라고 소개하려 온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것도 그렇지. 어쨌든 두 사람, 앞으로 잘 지내보게. 레인 자네도 봐서 알겠지만, 내 제자의 실력은 정말 믿을 수 있다네.”

“그렇게 말씀하셔도 뭐 없습니다.”

“성격은 스승을 안 닮아서 다행이군요. 그 점 하나는 맘에 듭니다.”

“...자네들, 이 늙은이 놀리면 좋은가?”

“늙은이라고 하지마, 나도 늙은이 되니까.”

찻잔을 들고 돌리던 레인이 아무렇지도 않게 아르크의 말에 대꾸했다. 너무 지나가듯 말한 탓에 노아는 하마터면 그대로 고개를 끄덕이며 레인의 말에 수긍할 뻔 했다. 그제서야 여태 느끼고 있던 위화감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기사에서 본 레인과 아르크의 모습이 과거라면, 현재의 모습도 비슷해야 할 텐데. 레인은 아르크가 아니라 노아 또래처럼 보이고 있었다.

“나도-라는건, 당신 설마 스승님이랑..?”

“친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나이따위, 아무것도 아닌 그런 친우라고 생각했습니다! 연배도 같으리라곤 생각도 못했습니다만..?”

“뭐, 알아도 크게 달라지는 건 없으니까요.”

아르크는 제자의 흔치 않은 모습에 재밌다는 듯이 배를 잡고 웃기 바빴다. 그러나 5분도 채 되지 않아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열기 위해 일어난 아르크의 어깨가 순식간에 실망으로 축 늘어졌다. 대마법관의 자리를 받은 이후엔 쉴 시간도 없다며 울상짓는 스승의 모습에 노아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누가 누구의 스승이고 제자인지 원.”

“그래도 편해 보이는군요.”

“착각입니다.”

딱 잘라 끊은 노아의 말에 레인이 슬며시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줄곧 딱딱하게 굳어만 있었던 인상이 웃음기를 머금자 부드러워졌다는 아르크의 말이 비로소 이해되었다.

어느새 잔을 다 비운 레인이 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보고 있었다. 노아가 슬쩍 들여다본 시곗 바늘은 오후 4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빈 잔을 정리해 쟁반위에 얹은 노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입원해있던동안 쌓인 일들이 노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이 남아있어서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레인, 당신은?”

“저는 한 시간 정도 있다가 연구실로 다시 갈겁니다.”

“그럼 가시는 시간에 맞춰서 데리러오겠습니다.”

“그러지않아도 됩니다. 정식으로 시작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내일 시작하나 오늘 저녁부터 시작하나 마찬가지입니다.”

“진짜 고집불통입니다, 당신.”

“저는 그저 책임을 다하려는 것 뿐입니다. 그럼 이따뵙겠습니다.”

제 할 말을 마친 노아가 레인의 대답도 듣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르크의 책상 뒤를 가로지르던 노아가 무심결에 고개를 들었다가 결재를 받으러 온 마법사와 눈을 마주쳤다. 허공에서 얽힌 시선이, 정확히는 그 마법사의 시선만이 싸늘했다. 

그것이 잊고있던 현실을 깨닫게 해준다. 

여전히 변한 건 없는데, 무엇을 기대한 걸까.

도착한 탕비실에 쟁반을 내려두다가 노아는 문득 깨달았다.

첫 만남부터 지금까지 레인은 자신을 ‘A’가 아닌 ‘노아’라는 이름으로 불러주었다는 것을.

*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네. 이거 원, 갑자기 일이 이렇게 밀려들줄이야.”

“그 위치까지 갔으면 당연한 일인걸 새삼스레 말해 뭐하겠어. 내 입만 아프지.”

멋쩍게 웃는 아르크를 보던 레인이 들고 있던 책을 덮고 본래 있던 곳에 올려두었다. 가만히 있자니 지루해서 자료산 중 하나에서 뽑아든 것이었는데 의외로 흥미로운 내용이 가득했다. 

레인의 맞은편 자리에 앉은 아르크가 제 몫의 커피를 들고 단숨에 들이켰다. 아르크를 지켜보던 레인이 어물어리다가 결심한 듯 아르크에게 물었다.

“그러고보니, 너 말야. 제자 들이는것에 관심있었나? 누굴 가르칠만한 위인은 못 된다며?”

“시간이 약인게지, 한 치 앞길도 모르는 게 인생 아니던가.”

“말 돌리지말고 똑바로 말해. 그래, 대마법관이 제자들이는게 이상한 건 아니지. 근데 다른 마법관은 수십의 제자를 들이고도 부족하다고 더 들이는 마당에 넌 저 아이 하나뿐이잖아. 그것도 평생 제자 들일 생각은 없다던 놈이 무슨 바람이 들어서? 하필 네 제자가 내 경호 담당이라고? 우연의 일치치고는 인연이 너무 과하게 얽혔다고 생각하지 않아?”

“자네, 내가 설마 중앙에 입김이라도 불어넣었다고 말하는겐가?”

“아니라고는 못 하지. 아르크, 네 위치를 생각해. 충분히 하고도 남잖아?”

“에잉, 날 그렇게 치졸한 인간으로 봤다는겐가? 이거 섭섭한데-”

소맷단으로 눈꼬리를 콕콕 찍는 아르크의 모습은 누가봐도 장난스러웠다. 하지만 분위기가 풀리기는 커녕, 이제는 팔짱까지 낀 레인의 표정은 점점 일그러지고 있었다. 두 사람이 친우가 아니었다면 당장에라도 자리를 박차고도 남았을 것이다. 산만했던 공기가 내려앉으며 차분해지자, 웃음기 가득하던 아르크의 눈동자가 레인을 담았다.

“노아, 그 아이는 내게 소중한 가족이라네. 그래서 더는 풍문에 휩쓸려 다치지 않길 바랐을 뿐이고. 중앙의 제안이 내겐 무엇보다 달콤했을뿐이야.”

“정신차려, 아이라고는 해도 이미 다 큰 성인이야! 이렇게 한다고 좋을줄 알아? 그렇게까지 멍청하진 않았잖아, 대마법관이라는 자리가 제자까지 팔아넘길 정도로 탐나던가?”

“아니, 그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 이 자리가 필요한걸세.”

“지키다니? 그게 무슨…”

“레인. 자네에게 내 묻지. 언젠가 운디네를 포기해야하는 상황이 온다면, 자네는 포기할 수 있는가?”

“말 돌리지마, 그게 무슨 상관인데?”

“포기할 수 있는가?”

흔들림없는 물음에 레인의 시선이 비어버린 잔으로 향했다. 윙,윙. 청소용 샬레인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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