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키모모] Rain Drop
BGM https://youtu.be/xFZnlaf76lY
"저기, 네가 스노하라?"
"…힉!"
갑작스런 부름에 화들짝 놀라서 움찔 몸을 떤다. 목소리에서는 예상했지만 자신의 이름을 부를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사람이 모모의 뒤에 서있다. …서, 선배가 왜 여기에? 그리고 나를? 내 이름을 아는 거야…? 물론 스노하라, 라고 밖에는 불리지 않았지만 남몰래 좋아하던 사람에게 갑작스레 존재가 알려졌을 때의 그 기분이란. 남몰래라는 말은 적당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인사 말고는 아무것도 안 해봤는걸. 설마 내 이름을 알 거라곤…. 그나저나 선배가 무슨 일이지.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모모의 얼굴이 긴장과 걱정으로 붉어졌다 새하얘졌다를 반복한다. 본인의 자각일 뿐이고, 실제로는 그냥 빨갛게 되어 진땀을 흘리고 있을 뿐이지만.
"…마, 맞는데요…. …무슨, 일로…?"
"…너, 우산 없는거지."
우산이… 없기는 한데. 항상 가방 안에 들어 있어서 스스로도 잊어버리고 있었던 접이식 우산은 한참 전에 눈 앞의 사람에게 몰래 양보해버렸으니까. …설마 그 날 우산에 무슨 문제가 있었던 게 아닐까!? 걱정으로 조마조마해지는 가슴을 부여잡고 눈 앞의 사람을 올려다본다. 정작 모모의 눈 앞에 있는 사람은 책망할 생각이 없는 건지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하고 있지만. 사실은 조금 긴장하고 있다는 사실은 본인 말고는 아무도 모를테니까. 침묵 속에서 유키가 느릿하게 입을 연다.
"…씌워줄게. 어느 쪽이야?"
…헤? 갑작스런 이야기에 모모가 입을 헤, 벌린다. 비가 오는 날이 아니었다면 파리라도 들어갈 만큼 커다랗게 열린 입이 당혹스러움을 대변한다. 유키 선배가… 나한테…? 비 오는 날에 우산을…? 착각한 거라고 생각하고 싶어도 제 귀에 들린 말이 그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어서. 그것도 같이 쓰고 가자는 얘기 같아서. …왜? 물론 선배한테 우산을 줬던 건 맞지만 이런 포상을 기대했던 건 아니었으니까. …그러니까… 일이 왜 이렇게 되었냐면….
🌧☂️☂️☂️🌧
"스노하라! 여기로 패스!"
아아, 대답을 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반응한다. 점심 시간의 축구만큼 재밌는 건 없는 것 같아. 부활동에서 하는 것보다 체계적이고 긴장감 넘치지는 않지만 그래서 더더욱 부담 없이 즐길 수 있어서. 물론 그렇게 온 힘을 다해서 플레이하는 것도 즐겁지만. 축구는 원래 재밌는 스포츠잖아? 자신을 부른 친구에게 모모가 공을 차면 나이스 패스! 하고 호응이 돌아온다.
부활동도 하고, 축구 특기생으로 학교에 스카우트되어 들어왔을 만큼 잘 하니까 매일 모모를 어느 편에 넣느냐로 친구들이 옥신각신 다투지만. 자신이 들어있다고 무조건 이기는 것도 아닌 만큼 즐기면서 뛰고 있는 모습이 여럿에게 인기를 끈다. 본인은 그냥저냥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지만 햇빛 내리쬐는 점심 시간에 여자애들이 운동장 한구석에 앉아 있는 게 흔한 일은 아니니까. 방금 했던 말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모모네 편의 한 남자애가 찬 공이 뻥, 하고 멀리까지 날아간다.
"…우와, 저거 유리창 맞을 것 같은데…."
"너 이제 체육한테 죽었다!"
킬킬거리는 소리도 머쓱하게 공은 넓은 포물선을 그리며 열려 있는 창문 안으로 쏙 들어간다. 탕, 하는 소리도 나지만 그래도 무언가 부서진 건 아닌 듯 요란스러운 반응이 돌아오지 않는다. 안타깝게도 건물 안의 기물에 맞고 튕겨져 나오는 정도의 행운까지는 돌아오지 않았지만, 쨍그랑 소리가 나지 않은 게 어디인지. 저게 저렇게 되나. 보고 있던 사람들에게서 감탄이 터져나온다.
"저기 어디야?"
"행정실인거 아냐?"
"바보, 도서실이거든. 책 안 읽지?"
친구가 조금은 곤란해지는 것도 재미있는지 행정실이라는 희망사항을 얘기했던 쪽에게 면박이 돌아온다. 어느 쪽도 장난스런 투다. 발도 빠르고 사교성도 좋아 어느 쪽이든 사과하고 공을 찾아올 생각으로 모모가 운동장을 뛰쳐나간다.
"내가 가져올테니까 쉬고 있어! 오래 걸리면 그냥 들어가고."
"땡큐, 스노하라!"
모모가 예쁨 받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고, 예쁨 받을 만도 하니까. 어디든 모모가 가는 게 낫다고 판단했는지 가볍게 고마움을 전하고 다들 물이나 마시러 간다. 도서실이면… 오래 걸리지 않는 게 더 이상하다. 이왕이면 같은 1학년 반이었다면 좋았을텐데. 그러면 바로 공도 돌아왔을테고…. 그렇게 생각하는 건 모모도 예외는 아니라서 가지러 가는 게 역시 귀찮긴 하지만, 사람이 다치거나 크게 망가지는 소리가 나지 않은 건 역시 다행이다. 정말로 유리창이라도 깨졌으면 다 같이 가서 허리 숙이고 인사한 후에 벌 받아야 하니까. 중학생 때도 그런 적이 있었으니 다행인 건 다행인 거다. 물론 그 때는 모모 자신이 깬 거였지만.
조심스럽게 학교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1학년이라 아직 자주 가지 않는 쪽의 구조는 익숙하지 않아 도서실 주변은 거의 처음 보는 건물 같다. 다른 곳을 갈 때 지나가는 일은 있지만 제 반으로 돌아가는 길은 여기보다 빠른 곳이 있으니까. 점심 시간에 모여서 축구나 하는 애들이 도서실이 익숙할 리 없지. 도서실이란 걸 알려준 애도 사실 책 안 읽는 친구다.
코너를 돌면 조용한 도서실의 문이 보인다. 책 읽던 사람이나 도서위원이 화가 난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과는 달리 도서실에는 사람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는다. 이쪽에는 다행인 일이지. 살금살금 안으로 들어가면 도서 대출과 반납을 해줄 것 같은 책상 쪽에도 학생이 없다. 잠시 자리를 비운 걸까, 아니면 도서 위원도 마침 땡땡이 중이었던 걸까. 모모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주위를 둘러보면 바닥에 떨어져 있는 축구공이 보인다. 책장 옆을 맞고 튕겨져 나간 것 같은데, 다행히 길목들에 화분이나 깨질 만한 물건도 없었던 모양이다. 공을 주우러 도도도 뛰어가면 아무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반대편 책상에 누군가가 앉아 있는 것이 보인다. 까딱 잘못했다간 공을 맞았을 정도로 창문과 아주 가까운 거리라 많이 놀랐었을 듯싶다.
"저, 저기… 죄송해요. 친구들이랑 축구하다가 그만…."
제가 찬 공도 아닌데 사과를 하며 다가간다. 많이 화나진 않았겠지?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도 상대는 반응조차 없다. 뒷모습만 보여서 몰랐는데… 자고 있는 건가? 휴…. 그래도 혹시 다치진 않았을까 살피러 가본다. 엄청 큰 소리 났는데 자고 있는 게 신기해…. 옆으로 가서 누구인가 살펴보면 가장 후배인 모모에게는 당연하게도 모르는 얼굴이지만.
…잘생겼다…. 이렇게 생긴 사람 처음봐. 축구만 하느라 몰랐는데 이렇게 잘생긴 사람이 우리 학교에 있었구나. 1학년은 대충 본 것 같은데… 선배인가? 엎드려서 자는 중이라 넥타이 색이 안 보여. 선배로 추정되는 은발의 청소년은 남자인 모모조차 감탄할 정도로 예쁘게 생겨서. 가지각색으로 개성 있게 생긴 친구들이나 여타 사람들과는 달리 TV에서도 나올까 말까 한 기가 막힌 얼굴이다. 교복 입고 있는 걸 보니 학생은 맞는 것 같은데, 이렇게 잘생겼으면 유명할 법도 하니까… 아마 축구 하느라 그거 말고는 관심을 안 가졌던 게 맞는 것 같아.
그래도 평소라면 짱이다, 하고 넘어갔을텐데. 창가에 비치는 햇살 때문에 머리칼이 반짝거려서 시선이 떨어지지 않는다. 부드러울 것 같아. 만져보고 싶다…. 양손으로 공을 들고 있는 것만 아니었어도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을 것 같아서.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모습도 사람이 아닌 것 같아. 넋을 놓고 보고 있으면 언제 왔는지 도서위원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다가온다.
"그 사람이랑 아는 사이면 도서실은 잠 자러 오는 곳이 아니라고 좀 알려주세요."
같은 1학년의… 누구더라? 아무튼 다른 반의 도서위원이다. 원래 좀 퉁명스러운 애인건 알아도 이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면 하루 이틀 자는 게 아닌 모양이다. 심부름을 다녀온 건지 품 안에 선생님이 반납하라고 시켰을 책을 잔뜩 안고서는 모모를 훑어본다. 모모를 일방적으로 아는 눈빛인데, 공까지 들고 도서실에 서 있을 사람은 더더욱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제법 의아한 표정이다. 책장에 공 자국이 그대로 나 있는 걸 보고 상황을 파악한 것 같지만.
"아는 사람 아닌데…."
"그런가요. 저 사람, 항상 햇빛이 잘 든다고 거기에서 자서. …그리고 책장은 제대로 닦아주세요."
옆에 있길래 아는 사람인 줄 알았다고 하며 턱으로 티슈가 있는 쪽을 가리킨다. 그것 말고는 별로 볼 일은 없는지 몸을 돌리지만. …항상 여기에서 자고 있구나…. 운동장 옆이면 가끔은 시끄러울텐데도, 일찍 와서 자느라 괜찮은 건지 아니면 이 자리가 그렇게까지 마음에 드는 건지. 그래도 창문이 열려 있으면 또 위험한 상황에 처할까봐 이중창 중에서 하나 정도는 닫아두기로 한다. 안쪽 창문이 아니면 가림막도 붙어 있지 않으니까 햇빛 드는 건 문제 없겠지. 창문을 닫아보면 제법 꼬질꼬질해서 왜 안 닫고 있었는지는 알 것 같지만. 티슈를 뽑아 책장을 닦으면서 뽀득뽀득 창문도 닦아본다. 물티슈도 아니라서 제대로 닦이지는 않지만.
그 날부터 괜히 도서실 앞을 지나가면서 그 선배가 있는지 힐끔 보고, 괜히 또 공이 날아갈까봐 창문을 닫아주고. 어떨 때는 물티슈를 가져와서 그 자리의 창문을 닦다가 창 밖을 지나가던 교장 선생님에게 칭찬을 받고. 모모의 참견이 하나씩 늘어날 때마다 평판은 더 높아져만 갔다. 그 도서위원은 정말 아는 사이 아니냐며 추궁하고, …선배의 이름이 오리카사 유키토라는 것도 알게 되고. 그게 벌써 몇 주나 됐는데 깨어 있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점까지 귀엽게 보이게 돼서.
모모가 유키를 좋아하게 됐다는 걸 깨달은 건 얼마 전, 방과후에 저녁 노을이 질 때까지 그 자리에 앉아 있다가 결국 노을로 붉게 물든 은발의 머리카락에 손을 대버린 날이다. 부끄러움에 도망치면서도, 손에 스친 부드러운 머리칼의 감촉을 잊을 수가 없어서. 그 날부터 며칠이고 부끄럼과 기분 좋은 죄책감에 시달려 도서실에도 가지 못했지만. 얼마 전의 그 날은 비가 와서.
…선배, 가방에 노트랑 필통 하나랑 휴대폰만 넣어서 다니시던데….
일기예보에도 없었던 갑작스런 비가 내릴 무렵에는 그런 생각이 떠올라서. 가방 안까지 봤다고 하면 스토커같겠지만, 실제로도 그렇게까지 다르진 않은 것 같지만…. 선배가 비를 맞고 뛰어가는 건 싫었으니까. 결국 누나인 루리가 예전에 넣어준 접이식 우산을 「비가 오니까 써 주세요」라는 쪽지와 함께 옆에 두고 왔을 때도 설렘은 멈추질 않아서. 정작 자신은 비를 맞아 쫄딱 젖어 우산을 잃어버렸다는 말과 함께 잔뜩 혼이 났지만.
☁☂️☂️☂️☁
요즘 도서실 창문이 닫혀 있다. 유키는 고민한다. 점심때는 몰라도 방과후에는 저녁이 되면 날이 점점 추워지니까 깨는데, 자꾸 일정 시간까지 안 깨서 당직 서는 선생님이 깨운다. 이젠 귀찮다는 표정을 보는 것도 짜증나긴 하지만, 추워서 깨는 것보다는 깊게 자는 게 훨씬 낫다. 누가 닫는 거지?
"이오리 군은 상냥하네. 내가 추울까봐 매일 창문 닫아주는 거지?"
"…저 아니거든요."
이제는 얼굴을 익혀버린 도서위원에게 놀림과 동시에 고마움의 표시로 그렇게 물으면, 단 하나의 망설임도 없이 오해를 사서 기분 나쁘다는 표정으로 대답한다. 정말 놀리는 재미가 있다니까…. …아니라고? 그러면 누구지. 사실 나를 매일 구박하는 대머리 선생이 창문을 닫아주고 있었다는 전개는 절대 싫은데. 그러면 앞으로 자리 옮기고 싶을 거야. 유키가 심각한 얼굴로 고뇌하고 있으면 정말로 오해 사기 싫었던 건지 순순히 얘기해준다.
"스노하라 씨예요. 요즘 매일 오셔서 창문 닫고 가시던데."
"스노하라? 누구지. 모르는데."
"1학년이니까… 정말 아는 사이 아니었나요?"
유명한 편이긴 하지만 만날 도서실에서 잠만 자시니까 모르시겠죠. 라는 독설과 함께 쏟아지는 이야기는 제법 흥미로워서. 이 애, 은근히 아는 거 얘기해주는 거 좋아한단 말이지. 그러니까, 얼마 전부터 축구부 유망주인 스노하라라는 애가 창문을 닫아주러 온다는 얘기구나. …우리 학교 여자 축구부 있었던가? 이름만, 그것도 성만 듣고 착각해서는 귀여운 여자애일까 생각해버린다. 유키를 따라다니는 여자애들은 많지만 전부 귀찮게 구는 사람들 뿐이다보니, 앞에 나서지도 않고 몰래 도와주는 사람은 흔치 않다. 그런 척 해도 결국에는 다들 '사실 나였어.' 하면서 얼굴을 드러내고 싶어하던데 스노하라라는 애는 그렇지도 않고… 조금 호감이 생겨서. 그나저나 아는 사이 아니냐고 물어볼 정도면 정말 꾸준하긴 했나보다. 뭐, 다른 이유 없이 그냥 문 닫는 게 취미일 수도 있고.
그러다가 여자애가 아니라는 걸 알아버렸지만. 지나가다가 "스노하라, 힘내!" 하는 여자애의 목소리를 듣고 유키가 반사적으로 몸을 돌린 순간이었다. 운동장에서 누구보다 눈에 띄는 사람이 하나 있어서, 열심히 다른 팀의 선수들을 제치며 달려가는 모습과 격해지는 응원. 그리고 골을 넣은 후에 반짝이는 웃음의 세레모니. …귀여운 여자애가 아닌 걸 알았는데도 실망하지 않았을 만큼, 멋있는 모습이었다. 스포츠라고는 관심도 없는데다 오히려 싫어하는 편에 가까운데도. 그렇게까지 햇빛이 쨍쨍한 날은 아니었는데… 빛이 나는 것 같아.
그래서 사실은 창문을 닫아주러 왔을 때 자고 있는 척 한 적도 있어. 그렇게 매일 열심히 잠만 잘 리 없잖아?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순간에 순수하게 창문 닫는 게 취미라서 그런 게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게 됐지만. 그러다가 잠든 날에 창문이 깨끗해져 있기도 하고.
도서위원인 이오리가 시시콜콜한 것들을 잘 얘기해주는 덕에 유키도 모모에 대한 호감이 깊어져만 갔다. 떨어트린 물건을 주워줬다거나, 자신을 챙겨준 걸 가끔 목격하게 되는 걸 한탄하는 듯싶긴 했지만. 도서실을 정상적으로 이용해주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건 역시 도서위원으로서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인 모양이다. 이오리 역시 독서보다는 봉사시간과 평판, 그리고 조용하게 공부할 수 있는 장소 등을 목적으로 도서위원을 하는 것 같았는데도 말이지. 한번 신경 쓰게 되면 계속 생각하게 되는 걸까?
낮잠을 자는 시간이 아닐 때 교내에서 마주치면 평범한 후배처럼 인사를 하고 도망가버린다. 그 정도의 집념이면 말이라도 한 번 걸어볼텐데. 그것도 자신이 빤히 쳐다봐서 눈치를 주지 않으면 인사도 안 해준다니까. 모모에 대한 유키의 소소한 불만이었다. 모모가 워낙 교내에서 평판이 좋은 탓인지 후배에게 인사를 강요하는 못된 선배라는 이미지까지 생겼지만 모모 군 이외에는 그렇게 하지 않는걸.
"요즘은 창문 안 닫아주네…."
유키의 뒤에서 그런 호의를 당연하게 생각하냐며 질색하는 이오리의 시선이 꽂혔지만 두 사람 모두 개의치 않는 듯했다. 이오리 역시 별 일도 없는데 괜히 자신까지 피해다니는 듯한 모모의 태도는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 혹시나 이오리가 그 사건을 목격했을까 부끄러운 마음에 도망 다니고 있다는 걸 알 턱이 없으니까. 그 때 도서실에는 커녕 학교에도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누가 노을이 유유히 흘러갈 시간까지 학교 도서실에서 대출 반납이나 해주고 있단 말인가. 유키가 괜히 축 늘어져 자는 척도 안 하고 제 작곡 노트나 끄적이며 또 며칠이 지나갔다. 저렇게 신경 쓰이면 직접 가서 물어보면 될 것을…. 그렇게까지 얘기해줄 의리가 이오리에게는 없었지만.
얼마 전의 그 날은 비가 와서. 안 자고 있을 때는 도서실에 누군가 들어오는 기척이 날 때마다 누구보다 빠르게 자는 척을 하는 유키를 보고 어떤 도서위원이 기함을 했다. 직전까지만 해도 우산이 없으니 빌려달라느니 하나밖에 없다느니 실랑이를 하고 있었는데. 이런 반응 속도를 가지고 있으면서 그렇게 나무늘보같은 움직임을 하는 건가? 학교에서 유키의 외모가 통하지 않는 몇 안 되는 사람인지라 태도가 유독 짰지만, 평소의 유키와 조금은 안면이 있으니 어쩔 수 없겠지.
조금 조급한 숨소리로 언제나처럼 창문을 닫아주고, 자는 척을 하는 고개 뒤쪽에 무언가를 놓는 소리가 들렸다. 빠져나가는 게 어찌나 빠르던지, 쌩하니 나가는 축구부 에이스를 보고 차분한 검은 머리의 소년이 귀띔을 해주었다. 유키가 그제서야 고개를 들고 옆에 놓인 걸 봤다. 우산이랑… 쪽지. 내가 우산 없는 건 어떻게 알았지. 지켜봐지고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인지 하나도 불쾌하지 않아서. 모모 군은 우산 있는 건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으면 닫힌 유리창 멀리 모모가 비를 맞은 채로 전력질주를 하는 모습이 보인다.
"…지극정성이네요."
바쁜 도서위원은 그 말을 남기고 다시 공부하러 떠났다. 답지 않게 세련된 우산과 대조되는 삐뚤빼뚤한 남자 고등학생의 글씨를 보면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
고맙다는 말도, 우산을 돌려주지도 못한 채로 시간이 흘렀다. 혼자서는 모모 군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유키는 자신이 모모에게 인사를 한 적조차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인사를 하게 되면 스노하라라고 불러야 하는구나. …아니, 그 전에 이름부터 물어봐야 하는구나. 모모가 제 이름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과는 별개로 자신이 모모의 이름을 캐물었다고 생각하면 기분 나빠할지도 모른다는 걱정까지 들어서. …내가 왜 이렇게 신경 쓰는 거지? 우산을 받았던 날부터 그 정도는 알고 있으면서 모르는 척을 했다. 유키의 가방에는 항상 기회를 엿보는 것처럼 잘 말려진 접이식 우산이 언제나 자리잡고 있었다.
도서관에 가서 자는 빈도도 줄어들었다. 어차피 안 오는걸. 원래 햇빛이 좋아서 잔 거였으면서 목적을 상실해 괜히 다른 곳을 어슬렁거렸다. 거의 유일무이에 가까운 도서 위원 이오리는 유키가 도서관에서 수면을 취하지 않자 그 누구보다 행복한 표정으로 공부를 하고 있었다. 문제집이 잘 풀리는 모양이지. 충격이었다. 사실은 이오리도 내심 즐기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자신이 없는 사이에 저런 행복을 찾다니…. 그 얼굴을 보니 또 모모가 보고 싶어졌다. 모모 군도, 좋아하는 거 하면 엄청 빛나게 웃는데…. 친구들이랑 축구 할 때만 해도 그렇게 웃으니, 자신의 앞에서는 어떤 표정을 보여줄지 궁금해졌다. 매번 자는 척만 하지 말걸. …한 번쯤은 먼저 말을 걸어볼걸. 후회를 품고 축구 하는 모습을 몰래 훔쳐보면서 더럭 겁이 났다. 모모 군은 나를 좋아했는데, 이제 안 좋아하게 된 거면 어떡하지. 그래서 안 오는 거면 어떡해. 역시 그건 싫어서. 그럴 거면 우산은 왜 주고 간 거야.
불안이 커져가는 사이에 또 비가 와버렸다. 모모 역시 이번에는 우산을 가져오지 않은 듯 하굣길의 신발장 앞에서 고민하는 것 같았다. 안 돼, 모모 군 쓸데없이 터프하니까 빨리 잡지 않으면 또 비 맞고 뛰어가버려. 걱정이 확 들어 모모를 불렀다.
"저기, 네가 스노하라?"
"…힉!"
깜짝 놀란 것처럼 놀라 이쪽을 돌아본다. 말은 걸었는데, 싫어하면 어떡하지. 다행히도 모모 군이 아니라 스노하라라고 부르긴 했지만. 그런 상념도 뒤돌아보는 모모의 얼굴을 보면 어느 새 물웅덩이에 퐁당 빠진 솜사탕처럼 녹아버린다. 붉어진 얼굴. 떨리는 눈동자. 누군가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으레 보이는 표정이다. …싫은 건, 아니구나….
"…마, 맞는데요…. …무슨, 일로…?"
"…너, 우산 없는거지."
지난번에는 우산이 있었으니까 이번에도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신발장에서 밖을 살피는 모습이 눈에 들어와서. 아마 그게 모모 군이 평소에 들고 다니던 우산이 아닐까 싶다. 하나뿐인 우산을 나한테 줬으니까, 어쩔 수 없이 비를 맞게 되는 거야. 그래도 모모 군이 비를 맞고 뛰어가는 건 싫었으니까. 용기를 내서.
"…씌워줄게. 어느 쪽이야?"
헤, 입을 벌리는 모습에 개의치 않는 척 모모에게 받았던 우산을 슬쩍 꺼낸다. 내 얼굴도 빨갛겠지만, 모모 군의 얼굴보다는 안 빨갛겠지. 우산을 놓고 간 게 자신이라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지금의 모모에게는 중요하지 않은 듯하다. 접이식 우산을 펼치면 남자 고등학생 둘이 찰싹 붙어 간신히 들어갈 수 있을 만큼의 자리가 난다. 아직 당황해서 머뭇거리면 유키가 가볍게 몸을 붙이며 묻는다.
"…싫어? 그럼 그냥 이거 줄게."
같이 쓰고 가면 좋겠지만, 당혹스러울지도 모르니까. 우산을 모모의 손에 쥐여주려고 내밀면 망설이다 고개를 젓는다. 유키가 여분의 우산을 가지고 다니지 않는다는 건 모모도 알고 있으니까. 오늘도 그럴지는 모르겠지만, 혹시 또 모르고…. …싫지 않으니까.
"…안 싫어요! 조, 좋아요…."
부끄러움에 고개를 푹 숙이면 목소리가 작아진다. 그 말에 유키 역시 기뻐져선 배시시 웃는다. 좋아한다고 했어. 우산 쓰는 거 얘기지만, 내 얘기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지도. 모모에게 가볍게 팔짱을 끼면 어쩐지 굳어버리는 것 같지만, 이렇게까지 붙지 않으면 둘 중 한 명은 젖어버릴테니까. 젖는 것보다는 같이 붙어서 가는 게 낫지 않아? 모모 군은 몸이 중요하니까 감기 걸리면 안 되는걸. 모모 군이 빌려준 우산이니까, 모모 군이 못 쓴다는 건 말도 안되고.
교문을 빠져나가고선 모모의 로봇처럼 뻣뻣하게 움직이는 손가락과 발걸음이 가리키는 곳으로 발걸음을 향한다. 사이에 조용한 침묵이 감도는데도, 어쩐지 열이 올라서. 시원하게 비가 내리는 날인데도 더워.
"…제, 제가 들게요…! …흐엑."
열기와 습기에 몸을 살짝 움직이면 모모가 깜짝 놀라 우산으로 손을 뻗는다. 손이 맞닿으면 화들짝 놀라 다시 떨어트리지만. …귀엽다. 덩달아 발갛게 달아오른 뺨을 하고선 우산을 잡을 수 있게 손잡이를 내어준다. 모모가 손잡이를 꼭 잡으면, 유키가 비 오는 날에 물고기라도 낚는 것처럼 그 위에 제 손을 겹쳐버리지만.
순간으로 경직된 두 손 사이에 심장 소리가 크게 들려. 차마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변명할 수 없을 만큼 명백한 소리에 두 사람 모두 더 뜨거워져서. …빨리 놓고 싶은데, 조금 더 걷고 싶어. 제 집이 앞에 보이면 안도하면서도 아쉬워하는 모모 자신이 있다. 한숨을 쉴 만큼 부끄럼이 가신 건 아니라 조심스레 몰아쉰다.
"…다 왔어요. 가, 감사합니다! 선배…는 집이…."
"그렇게 멀지 않아. 근방이니까."
이 주변 사는 애들이 다 그렇지 뭐. 학교도 가까운 곳으로 다니고. 유키의 말에 침을 꼴깍 삼키며 고개를 끄덕인다. 모모 역시 스카웃은 받았지만, 역시 고른 이유는 거리 때문이었고. 멀다고 하면 되려 바래다 줄 생각이었던 것 같은 모모의 비장한 얼굴을 보고 유키가 가볍게 웃으며 문 앞까지 모모를 데려다준다. 금방 뒤돌아설 것 같았던 모습과는 달리 머뭇거리던 유키가 우산 아래에서 손잡이를 꼭 쥐고 얘기한다. 고백이라도 할 것 같은 표정이지만, 그렇게까지 용기 낼 수 없어서.
"모모 군. …우산, 잘 말려서 내일 돌려줄게."
…그래도, 내일은 꼭. 유키가 조심해서 들어가, 얘기하며 손을 흔들더니 몸을 휙 돌려 뛰어가기 시작한다. 느리기 짝이 없는 발걸음인데도 심장은 달리기 선수마냥 뛰고 있어서. …이름도 불렀으니까, 더 힘을 내야지.
모모 역시 긴장으로 다리에 힘이 풀려 현관문 앞에 주르륵 미끄러져 앉는다. …내일, 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지.
…그것보다, …이름으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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