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팬텀] Forget me not

BL 드림

개막.

크림슨 극단은 전쟁의 발자국이 그대로 남은 가울 전역을 돌았다. 잿더미와 수해 속에서 반짝이는 것을 찾는 일이란 이베리아 해변에서 황금 동전을 줍는 것과 같았다.

다만 쉽지 않다는 거지, 불가능이라 단정 지을 수 없다는 것을, 극단원들은 재능으로 뒤덮인 두 눈동자를 발견하면서 알게 되었다. 그간 극단장이 데려온 모든 사람들은 그 빛을 드러나게 하기 위해 존재하는 거울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심지어 원래부터 단원이었던 자들도 포함하여).

자신에게 쏟아지는 질투와 경이 앞에서도 루시안은 거만함을 모르는 필라인 소년이었다. 어쩌면 영영 잃었을 애정과 관심을 받아 수줍었을 뿐이었을 수도 있겠지만.

"자, 루시안. 나의 루시안. 오늘이 무슨 날인 줄 아니?"

"…."

"오늘 만큼은 모르겠다고 말해도 용서하마."

"잘 모르겠어요."

사내는 기분이 좋아보였다. 유랑극단이 고성에 정착한지 몇 주만의 일이었다. 루시안도 덩달아 들뜬 얼굴로 극단장을 올려다보았다. 오늘 발성 연습은 그리 가혹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앞으로 나오거라. 자기소개를 해야지?"

"…."

"너무 오랜만이라, 누가 누군지 잊어버렸나?"

누더기 같은 검은 천을 쓴 것이 꾸물거리며 다가왔다. 신장이나 체격은 루시안과 비슷했지만 성별은 알기 어려웠다.

"박사(Doctor). 박사라고 부르도록 해."

"박사?"

"그래."

다른 이름은 없다는 듯이 굴자, 루시안은 극단장을 힐끔 바라보았다. 사내만은 상황이 몹시 유쾌한지 눈만 가느스름히 떴다.

"너는? 네 이름도 알려줘."

"나는…."

루시안은 극단장의 눈치를 보며 자신의 이름을 더듬더듬 밝혔다.

"루시안."

박사가 따라부르자 왠지 가슴이 간지러웠다. 극단장은 박사의 어깨를 움켜쥐며 말했다.

"그래, 박사는 이제부터 네 새로운 친구란다."

극단장은 루시안을 마지막으로 더이상 아이들을 데려오지 않았다. 테라 전역에 넘치는 게 고아였지만, 루시안 같은 축복은 여러번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래서는 안 되었고 그럴 수도 없었다.

최후의 아이가 왔다. 루시안의 재능을 압도할 수 있을까? 어쩌면, 혹은. 하지만 단원들의 기대는 빠르게 사라졌다. 몸을 쓰는 건 간단한 노래를 비롯해 연기도 영 꽝이라는 사실이 하루만에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아이는 연습을 빠지고 그 시간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도 있었다.

"왜 쫓아오는 거야?"

"그냥."

그 귀한 자유를, 루시안의 뒷꽁무니 쫓을 때 사용하고 있었다. 마치 그림자와 친구가 된 것 같았다.

박사는 여러모로 이상했고, 이해할 수 없었다.


"루시안, 루시안."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있던 루시안은 바닥을 짚으며 몸을 일으켰다. 습하고 차가운 공기가 근육을 꽁꽁 묶은 것만 같았다.

"어딨어? 루시안!"

"박사. 나는 여기야. 여기 있다."

혹여 목소리의 주인공이 멀어질까봐 루시안은 힘차게 외쳤다. 스승이 알면 성대를 아끼라고 잔소리를 퍼부었을 것이다. 발소리가 머지 않은 곳에서 들려왔다. 루시안은 지금이야말로 사용할 순간이라고 알아차렸다.

"박사!"

단단히 잠겨있던 문은 허무하리만큼 쉽게 열렸다. 날카롭게 쏟아지는 빛에 루시안의 두 눈이 감겼다.

"괜찮아? 다친 곳은 없어?"

"응…."

박사는 방어기제로 나온 눈물을 훔쳐주며 루시안을 요모조모 살펴봤다.

"문앞에 빗자루가 세워져 있던데.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

"…모른다."

"빗자루에 다리가 달릴 일은 없을테고. 따로 짚이는 것도 없어?"

너무 많이 안다는 것은 동시에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과 같은 말이었다. 루시안의 눈썹도 귀도 축 처졌다.

"정말로 몰라."

"알겠어. 딱히 추궁하려는 건 아니었어. 그냥 네가 걱정되었거든."

"내가 걱정됐어?"

"그래."

"왜?"

박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복도를 밝히는 오리지늄 등불의 빛이 박사를 은은히 비췄다. 아, 저 실루엣을 거둬 얼굴을 확인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장난꾸러기는 미꾸라지처럼 뒤로 슥 물러났다.

"레슨하러 가야지, 루시안. 오늘은 극단장이 봐주는 날이잖아?"

"극단장님이야."

"아무려면 어때."

루시안은 키득키득 웃었다. 박사는 도통 겁을 내는 모습이 아니었다. 이유 모를 당당한 태도에 루시안은 목 안쪽이 간질간질했다. 어쩌면 세상에 하나 뿐인 아군을 얻은 게 아닐까. 박사는 마치 대본 속 주인공의 든든한 조력자 같았다.

"루시안, 시간이 금이란 걸 잊었니?"

"죄, 죄송합니다, 단장님."

"…."

박사는 삐딱하게 극단장을 쳐다보았다.

"너는 우리의 시간을 낭비한 게 아니라 관객 분들을 기다리게 한 거란다. 이건 네 책임도 있겠구나, 박사."

"아, 아니에요!"

엉뚱한 사람에게 불똥이 튀자 루시안은 깜짝 놀랐다.

"박사를 감싸지 말거라, 루시안. 친구를 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도 그의 덕목이란다."

"하, 하지만, 일부러는 아니었어요. 박사는 잘못하지 않았어요."

"단장의 말이 옳아."

"박사!"

루시안은 애원하듯 박사를 불렀다. 박사는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극단장을 노려보았다. 보통 기개가 아니었다. 루시안의 동기들은 단장과 눈이라도 마주치면 오줌을 지렸다.

"신발을 벗고 의자 위로 올라가도록, 박사."

박사는 반항기가 가득한 눈을 숨기지도 않았지만 극단장의 말을 묵묵히 따랐다.

"바지를 오금까지 걷어라."

"단장님, 제발!"

새된 비명을 지르는 루시안은 아랑곳하지 않고 남자는 회초리를 들어올렸다.

"보렴. 네가 잘못된 길을 걸으니 주변 사람들이 고통 받지 않니."

"잘못했어요, 용서해주세요. 다시는 늦지 않을게요."

박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날선 바람 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박사의 종아리에 붉은 줄이 하나둘 새겨질 때마다 루시안은 몸을 벌벌 떨어댔다. 자기가 맞는 것도 아닌데 송글송글 맺은 식은땀이 등을 타고 내려왔다. 너무 아팠다. 루시안이 아팠다. 박사는 끝끝내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체벌이 끝나고 루시안의 레슨은 이어졌다. 박사는 수업 내내 의자 등받이에 힘없이 기대 앉아 있었다. 필사적으로 가사에 집중하려 했지만 루시안의 시선은 자꾸만 박사를 향했다.

"여기까지만 하자꾸나. 오늘 있었던 일을 잊지 말렴, 루시안."

극단장은 루시안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안쪽에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루시안은 박사를 둘러업었다.

"레슨, 벌써 끝났어?"

"…응."

숨이 띄엄띄엄 떨어지는 목소리였다. 루시안은 어쩔 줄 몰라 하면서 박사의 질문에 대답했다. 당장 어딘가에 박사를 눕혀두고 쉬게 해주고 싶었다.

"미안, 잠깐 졸았나봐. 오늘은 뭐 배웠어?"

"노, 래를…."

"불러줄 수 있어?"

아픈데 무슨 노래냐고, 말도 하지 말고 그냥 쉬었으면 좋겠다고 루시안은 생각했다. 정작 입에서 튀어나오는 건 맑고 고운 노랫소리였다. 이곳저곳을 환하게 밝히는 별빛에 대한 가사가 처량하게 울려퍼졌다. 박사가 끙끙거리며 부탁하니 거절할 재간이 없었다.

"루시안은 참 착하구나."

"…난 착하지 않아."

박사가 맞고 있는데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공포가 루시안을 옭아맸다. 박사 대신 고통 어린 비명을 지르며 간청하는 게 전부였다.

"그런 점까지 좋은 거야, 나는."

루시안은 훌쩍거렸다. 박사는 정말로 이상한 아이였다. 아픔을 느끼지 못하기라도 한 걸까. 루시안을 왜 좋다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차라리 다른 애들처럼 루시안을 미워하고 싫어했다면, 편했을 것이다.

"루시안. 방에 돌아가면 같이 과자 먹자. 부엌에서 가울 비스킷 좀 얻어왔어."

"…."

"루시안."

"…."

"울지마."

편하게 외톨이가 됐을 것이다.


아무도 살지 않는 고성에 떠돌이 극단이 들어선 후로 계절은 명배우처럼 몇 번이나 옷을 갈아입었다. 부쩍 짧아진 소매와 더불어 아이들은 금세 성장했다. 박사는 여전히 지저분한 천을 뒤집어 쓰고 있었지만, 갸름한 턱선이 언뜻언뜻 보이기 시작했다. 가끔 바람이 불면 천 아래로 얇은 입술도 보였다. 루시안은 호선을 그리는 입매를, 친애하는 필라인 소년을 바라보면 안쪽으로 조금 들어가는 보조개를 참기 힘들었다. 박사가 손짓하면 홀린 듯 그 입에 자신의 것도 포갤 수밖에 없었다. 빈말이어도 그것을 키스라고 부를 수 없지만, 대본을 흉내내듯 둘은 가끔 혀를 집어넣기도 했다. 박사는 루시안의 이가 빠지고 자라는 빈 부분을 톡톡 두드렸다. 루시안은 간지러워서 웃음이 났다. 박사의 가슴은 변함없이 납작했다. 박사는 남자아이였다.

소년들은 점점 어른이 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종종 성의 테라스에서 밤하늘을 구경하곤 했다. 덩치가 점차 성인에 가까워지면서 숨바꼭질이 힘들어진 까닭에서였다. 달리 갈 만한 곳도 없었다. 어쨌거나 둘은 지평선 너머 빅토리아 내의 이동 도시들이 발하는 불빛과 헷갈릴 때도 있었지만, 대체로 별을 바라보고 있었다.

"봐, 루시안."

루시안은 하늘을 올려다보는 박사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세상은 정말로 아름다워. 언젠가 사람들은 천체가 품고 있는 비밀을 풀겠지. 비밀은 비밀로 존재함으로써 아름답겠지만, 나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진실을 추구하며 진리에 다다를때.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음으로 갈음해서, 자연은 또다른 영리한 모습으로 사람들 앞에 나타나게 될 거야. 우리는 다음 대답을 준비해야 하는 거지."

"끝없는 질문과 해답…."

"필연이란 거야."

박사는 가끔 뜻모를 말을 노래하듯 내뱉고 루시안의 동의를 구하곤 했다. 머리가 비상하고 다정한 사람이었다. 이런 시골 구석에서 썩어가서는 안 될 사람이었다.

"루시안. 나는 후회하지 않아."

박사는 테라스에 등을 기댄 채로 루시안을 바라보았다. 바람이 두 사람을 스치며 지나갔다. 너무 춥지도 따뜻하지 않았다.

둘은 익숙하게 입술을 거듭했다. 단순히 입을 포개기만 하는 행위였다. 루시안은 어떤 질문을 던지고 싶은 충동이 치솟았다. 극단장의 앞에서도 태연한 박사를 대단히 곤란케 할 터였다.

'박사. 내가 죽으면 너는 자유로워질까?'

묻고 싶다. 알고 싶다. 너를 곤란하게 하고 싶었다. 자신의 앞에서만. 오직 루시안의 편을 들어주면서 알려주는 것은 하나도 없었던 박사의 진심을 알고 싶었다.

박사는 가끔 어딘가 그리운 듯한 표정을 짓지만, 박사의 옆에는 루시안이 있었다. 빈 자리가 있다면 루시안이 채워줄 수 있었다. 하지만 루시안을 선택하면서 포기한 것들이, 후회로 돌아올 것이다. 지금은 후회하지 않는다고 해도 두 사람은 젊었다. 루시안은 박사의 선택을 돌려주고 싶었다.

"내 첫 무대는 네게 바칠 거다, 박사."

"그것 참 영광인데? 극단장 배가 좀 아프겠네."

박사는 변성기가 온 목소리로 낄낄 웃었다. 누구나 무서워하는 극단장을 엿먹일 수 있는 기회가 오면 박사는 주저하지 않았다. 머리가 굵어져도 옛날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 조금 웃겼다.

"루시안. 곧 무대가 시작될 거다. 슬슬 준비하도록. 단장님을 실망시켜선 안 된다. 모든 것이 완벽해야 한다."

"…알겠습니다."

"박사, 너를 위한 자리도 있다."

"오, 그 인간이 웬일이지?"

"단장님께 말버릇을 삼가라. 한두살 먹은 어린 애도 아니고."

루시안을 부르러온 단원은 못마땅한 듯 박사를 노려보았다. 뛰어난 재능이 있는 루시안과 달리 예술에 하등 문외한이었다. 시중은커녕 청소도 하지 않는다. 도대체 극단장은 밥만 축내는 놈을 아직도 내쫓지 않는지 의아했다. 지금까지 불만을 토로하지 않는 건 어련히 뜻이 있겠거니 싶었다. 위대하신 분의 계획이다.

막이 오른다.

박사는 2층 프라이빗석의 기둥 뒤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루시안과 눈이 마주치자 손을 살짝 흔들어주었다.

박사가 알기로는 이번 무대는 ‘루시안’의 처음이자 마지막 무대였다. 새가 지저귀는 듯한 팔세토가 흘러나오며 1막 1장부터 고막을 사로잡기 시작했다.

제 3자가 끼어든 재현극이었지만, 모든 배우들은 진짜였다. 고성의 시간은 기이하게 흘러갔기 때문에 박사는 단 한 달 사이 수 년을 루시안과 함께 보냈다. 시간의 함정에 빠지지 않는 사람은 박사 뿐이었으나, 그마저도 지나간 세월을 확신할 수 없었다.

추억이 조금씩 현재에 삼켜질 때마다 이런 삶도 나쁘지 않겠구나 생각했다. 박사조차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던 결과였다. 커튼 너머로 입을 맞추는 동안 건너편에 있던 극단장이 징그럽긴 했다만, 팬텀의 성장 과정을 지켜보는 건 꽤 괜찮았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좋았다. 순진하고 소극적인 루시안. 끝내 박사의 정체를 물어보지 않았던.

'죽으려고 하다니, 가당치도 않아.'

루시안은 퍽 외로운 아이였다. 그리고 소년의 세상은 좁았다. 박사 정도 되는 사람이 루시안의 계획을 모를 리 없었다. 박사만이 아니라 누구도 이런 곳에 있어서는 안 되었다.

제일 먼저 칼춤이 쓰러졌다. 배풍등의 놀란 연기는 실감났다. 이어서 그림자의 환각이 걷히니 피 냄새가 자욱했다. 무대에 흩뿌려진 붉은 얼룩이 페인트 따위가 아니란 게 밝혀지자, 관객들은 비명을 질렀다.

출입구 곳곳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천장이 우지끈 무너지며 거대한 샹들리에가 추락했다. 불씨가 사방으로 번지는 혼란 속 루시안은 박사의 목소리만은 똑똑히 들렸다.

"루시안! 뒤로 나와!"

우왕좌왕 피하거나 쓰러지는 단원을 피해서 루시안은 복도를 내달렸다. 박사가 불렀다. 가슴이 뛰었다. 우리는 여기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미로 같은 길은 그 어느때보다도 직선 같았다. 박사에게 가는 길은 항상 올곧았다. 박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굉장하던데? 루시안."

"박사. 나도…. 후회하지 않는다."

박사는 무언가를 견디는 듯이 입술을 안쪽으로 말았다가 입꼬리를 올렸다.

"…이리 와, 루시안."

테라스 난간에 앉아있던 박사가 손짓했다.

"네가 후회하지 않으면 됐어. 그럼 준비는 됐어?"

루시안은 바깥쪽을 힐끔 보았다. 두 사람이 종종 같이 누웠던 낡은 매트리스가 보였다. 그 밑에도 뭔가 깔려있는 것 같았지만 터무니없이 얇고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셋을 세면 뛰어내리는 거야."

"바, 박사."

"응?"

"미안하지만, 손을 잡아주겠나?"

박사는 루시안이 내민 손과 루시안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청년은 수줍은 듯한 미소를 지었다. 손을 맞잡으면 괜찮을 것 같았다. 박사는 비실비실해서 극단내에서 믿음직스러운 평가를 받지 못했지만, 다른 누구보다도 단단한 사람이니까.

"박사!"

짓궂게도 박사는 루시안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잡았다. 얇은 입술이 손등에 스치듯 떨어졌다.

"자, 말괄량이 공주님. 어서 나갑시다."

맞잡은 두 손이, 루시안의 가슴이 두근두근거렸다. 오늘밤 우리는 이 저주 받은 성에서 벗어난다. 두 사람은 가볍게 입맞췄다. 그러고는 곧 난간 바깥으로 몸이 밀쳐졌다.

루시안은 멀어지는 박사를 보았다. 박사는 손을 놓았다. 박사는, 여전히 테라스에 남아 있었다. 거대한 화마가 금방이라도 고성을 집어삼킬 듯 일렁거렸다.

"박사, 박사…!"

"지금부터 내 말 잘 들어, 루시안."

박사가 소리쳤다. 루시안은 멍하니 테라스를 올려다보았다.

"난 널 이 성에서 내보내기로 결심했어. 지금 이 순간은 내가 아주 오랫동안 기다려온 순간이기도 해. 난 널 반드시 밖으로 내보낼 거야. 하지만 아직 살아있는 단원들이 널 쫓아오겠지! 증오의 칼날을 얼마나 오랫동안 버틸 수 있을까? 나도 몰라! 하지만 극단의 천덕꾸러기에게는 아무런 관심이 없을 거야."

박사의 선언은 거대한 방백 같았다. 좌중을 붙잡고 뒤흔들었다. 곧 루시안의 위로 검은 천이 떨어졌다. 난간에는 루시안과 똑같은 공연복을 입고 있는 청년이 서 있었다.

"나를 봐, 루시안. 너는 이제 내가 되는 거야. 그리고 빅토리아를 어느 정도 벗어나면 노랫소리를 따라가."

"이러지 마라, 박사. 너 혼자서 감당할 필요는…!"

"나는 아직 할 일이 남아있어. 어서 일어나!"

너만이 블러드 다이아몬드를 가공하고 완성시킬 수 있다는 말을 들으며, 박사는 극단장의 아츠에 순순히 당해주었다. 구질구질 살아서 기회를 만드는 쪽이 죽는 것보단 나았다. 그래, 연마하고 완성해주마. 그러나 그게 네가 원하는 방향은 아닐 거다.

"안녕, 안녕! 루시안. 우리는 같이 죽을 수는 없어. 언젠가 다시 만나자, 루시안. 아니…. 팬텀."

박사는 뒤돌아섰다. 붉은 망토는 불길을 닮아 있었다. 지독한 운명의 레퍼토리다. 필라인 소년은 처음부터 돌려줄 것도 없었다. 루시안은 반드시 박사를 찾아갈 것이다. 노랫소리가 팬텀을 인도할 것이다. 하지만 박사는 알고 있었다. 루시안을 기다리는 박사는 이곳의 자신이 아니었다. 팬텀은 스스로 나아갈 터였다. 운명의 주인은 결국 자기자신이 될 테니까. 그렇다면 박사는 새로운 모험을 위한 갈채를 준비해야 한다. 어두운 밤을 떠도는 유령이여, 무대막 뒤의 환영이여. 다음 무대를 고대하라. *획득시 대사

반짝반짝 작은 별,

아름답게 비추네.

동쪽 하늘에서도,

서쪽 하늘에서도.

반짝반짝 작은 별,

아름답게 우릴 비추네.

종막.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